경성.해원과 경성의 온도 차 때문에 권하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행히 로건이 곧바로 차를 몰고 데리러 온 덕에 추위 속에서 오랫동안 떨 필요는 없었지만.그런데…….커다란 양복 차림에 흰 장갑까지 끼고 나타난 로건을 보는 순간 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로건은 그런 하윤의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폴터 인사를 해댔다.“사모님, 어서 오십시오!”“…….”한민혁은 차에 오르자마자 로건과 반갑게 수다를 떨었다.“나와 도준 형이 해원에 있어서 살맛 났겠네.”로건은 행복한 얼굴을 한 채 헤실 웃었다.“어? 제가 이제 곧 아빠가 된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괜찮은데 희연 씨가 음식을 먹지 못해서 걱정이에요…….”말문이 터졌는지 로건은 묻지도 않은 자기 근황까지 줄줄이 읊었다.그걸 듣는 동안 민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언제 그런 것까지 물어봤어?’‘어딜 가나 커플 지옥이구나!’……저녁.하윤은 다정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하윤은 집안에 들어서면서 직접 방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웬걸? 유씨 아주머니가 이미 집안 청소를 하고 음식까지 한 상 가득 준비해 놓았다.게다가 하윤을 보자 반갑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 돌아오셨네요.”하윤도 유씨 아주머니가 반가워 얼른 인사했다.“아주머니, 설마 그동안 계속 여기 있었어요?”“그럴 리가요. 사장님께서 오늘 사모님이 돌아오니 방 청소도 하고 음식 차려 주라고 해서 온 거예요.”유씨 아주머니는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말했다.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도준은 항상 자기를 생각한다는 걸 알아차리자 하윤은 마음이 따뜻해 났다. 이윽고 함께 식사하자고 유씨 아주머니를 향해 손짓했다.“아유, 아닙니다. 야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들 데리러 가야 하거든요. 그럼 천천히 드세요. 내일 다시 와서 아침 준비해 드릴게요.”“네, 수고했어요.”유씨 아주머니는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홱 돌렸
민도준이 전화를 끊겠다고 하자 권하윤은 곧바로 불만을 내비쳤다.“이제 고작 몇 마디 말했는데 전화를 끊으려고요? 어쩜 저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아요?”발끈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급할 거 뭐 있어? 전화 끊고 영상 통화로 얼굴 보자는 뜻이었는데.”도준의 말에 소리를 지르며 화 내던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방긋 웃었다.“그래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전화를 끊은 하윤은 얼른 코랄벨벳 가운을 벗어 던지고 끈 나시 슬립 원피스로 갈아 입은 뒤 립스틱까지 발랐다.하지만 그렇게 한참 동안 준비를 마친 뒤에야 어떤 플랫폼으로 영상 통화를 할 건지 의문이 들었다.도준은 지금껏 채팅 어플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걸 문자로 보내기 때문이다.하지만 하윤이 깊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카톡 어플에서 알람 소리가 들렸다.친구 추가 요청이었는데 요청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준이었다.맴 처음에는 도준이 자기 때문에 일부러 계정까지 만든 줄 알고 기뻐하던 하윤은 도준의 계정을 살피던 중 오래 전 만들어진 계정이라는 걸 발견하고 이내 풀이 죽었다.‘하! 오래 저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거야?’하윤은 투덜거리며 도준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하지만 뭐 볼 게 있나 확인해 보려 했지만 아무 내용도 없었다.‘응? 설마 나만 차단해서 올린 건 아니겠지?’하윤이 한창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하윤은 화가 났지만 도준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수신 버튼을 힘주어 내리쳤다.예쁘게 단장한 하윤을 본 순간,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뭐야? 혼자 집에서 뭐 한 거야?”하윤은 방금 도준과 영상 통화를 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단장하던 자기의 모습이 떠올라 콧방귀를 뀌더니 벨벳 가운을 낚아 채 자기를 꽁꽁 싸맸다.“안 보여줄 거예요.”도준은 핸드폰을 낮은 곳에 놓고 눈을 내리 깐 채 화면을 응시했다. 하지만 시선이 하윤의 목덜미에 닿은 순간,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보기만 하고 닿을 수 없자, 오히려 더 탐스러워 보였다.도
“착하네.”민도준의 칭찬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낀 권하윤은 더 많은 칭찬을 받으려면 도준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그 시각, 수줍어하면서도 애써 협조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의 목울대는 또 한 번 꿀렁거렸다.“예쁘네.”하윤은 도준이 초록색 옷을 입은 자기 모습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초록색 슬립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레이스로 되어 있는 허리 부분은 너무 노출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오히려 보일 듯 말 듯하여 사람의 마음을 더 간지럽혔다.그때, 하윤은 칭찬을 들어 날아갈 듯한 기분을 애써 숨기며 불만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예쁘면 뭐 해요. 도준 씨가 카톡도 추가하지 않는데.”“아직도 이 생각 하는 거야?”여전히 꼬투리를 잡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내가 말했잖아. 몇 년 동안 안 써서 그런 거라고. 자기가 발정 나지만 않았어도 다시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거짓말. 카톡처럼 편리한 걸 그동안 안 썼다는 게 말이 돼요? 그리고 모멘트에 대체 뭐가 있길래 저를 못 보게 했어요?”하윤은 여전히 믿지 않는 듯 따져 물었다. 끈질긴 하윤의 태도에 도준은 화가 나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카톡은 심심할 때 잡담 나누는 거잖아. 그런 걸 내가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하윤은 일순 멍해졌다.하긴, 그때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뒤 그런 피 바람 속에서 살아가기 바빴겠는데, 한가하게 다른 사람과 잡담을 나눴을 리 없다.모멘트는 더더욱 그러하다. 공유할 순간이 없었고 공유할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그 생각에 토라져 있던 하윤은 이내 마음을 풀었다. 오히려 같잖은 일로 꼬투리 잡아 도준의 아픈 마음을 더 찌른 자기가 원망스러워 바로 사과했다.“미안해요.”도준의 시선은 땅으로 꺼질 것처럼 푹 숙인 하윤의 고개에서 점점 아래로 흘러내렸다.“이런 시덥잖은 사과는 너무 성의 없잖아.”잘못을 저지른 하윤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성의 있는 건데요?”
야생미 넘치는 민도준의 모습은 위험하고도 섹시한 아름다움을 띠고 있어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봤다.화면 맞은편에 있던 도준은 하윤의 몽환적인 표정을 보고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착하지, 숨소리 좀 들려줘.”하윤은 수치심이 극에 달했다. “안 돼요, 다정이 아직 거실에 있어요.”“우리 집은 방음이 잘 돼서 괜찮아, 말 들어.”결국 도준의 재촉에 못 이겨 이불을 머리위로 뒤집어썼다.화면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호흡이 서로 뒤엉키며 안개가 되어 휴대폰을 감싸며 피어올랐다.마침 이불 속에 있던 하윤이 숨막혀 죽을 것 같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 노크 소리는 아주 작아 마치 뼈마디로 문짝을 문지르는 것 같았다.“언니, 자요?”하윤이 이불을 들추려 하자 수화기에서 남자의 경고가 들려왔다.“가지 마.”“다…… 끝난 거 아니에요?”하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한 번 보고 올게요, 금방이면 돼요.”말을 마친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머리에 있는 가운을 가지고 땅에 발을 붙였다.하지만 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는 어느새 멈췄다.다정이 방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더니 그녀는 여전히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이에 놀란 하윤이 얼른 물었다.“다정아, 무슨 일이야?”다정은 서글프게 울며 말했다“미안해요 언니, 일부러 잠자는 거 방해하려던 거 아니에요, 엄마가 꿈에 나왔는데, 꿈에서 돌아가셨어요……, 언니 우리 엄마가, 엄마가…….”다정의 모습에서 하윤은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간 뒤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렸던 자기 모습이 보였다.꿈에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흩어져 아무리 붙여보려고 해도 붙일 수 없었다.다정의 모습이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하윤은 이내 쪼그려 앉아 다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너의 엄마는 지금 건강해, 내가 곧 엄마한테 데려다 줄게, 알겠지?”다정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언니.”“괜찮아, 가자.
방금 전 그릇 하나를 깨 버린 정다정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부엌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권하윤이 얼른 다가가 걱정된 투로 물었다.“왜 그래? 혹시 다쳤어?”다정은 너무 놀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러다가 하윤이 허리를 굽혀 깨진 그릇 조각을 줍자 그제야 허둥지둥 치우며 끊임없이 사과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손을 부들부들 떠는 다정의 모습에 하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불안해 보이는 다정이 손이라도 베일까 봐 얼른 일으켜 세웠다.“무서워할 거 없어. 그릇 하나 깬 건데 뭐. 괜찮아.”하지만 어렵사리 다정을 부엌에서 데리고 나간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아침상이 눈에 들어와 하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다 네가 한 거야?”“죄송해요. 언니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했어요. 바로 버릴게요.”다정이 또다시 사과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은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하윤은 준비한 음식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며 애써 다정을 달랬다.그때 마침 돌아온 유정인도 풍부한 아침상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다정이가 이 아줌마 직장까지 빼앗으려 하는 거 아니야?”기특해서 던진 농담일 뿐이었는데, 다정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질리더니 방으로 달려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그 모습에 유인정은 어리둥절했다.“다정이 왜 저래요?”하윤은 꼭 걸어 잠근 방문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낯설어 그러는 것이니 우리끼리 먹어요.”식사가 끝나고, 유정인도 퇴근한 뒤에도 다정은 여전히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심각한 상황에 하윤이 다정을 달래 보려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민도준의 전화가 걸려왔다.그 순간, 하윤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얼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도준 씨, 다정이가…….”“이모님한테서 들었어. 내가 민혁을 보냈으니 다정이 데리고 심리의사 한번 찾아가.”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어 스트레스를 받은 게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인
집에 도착한 권하윤이 전자 오르간 포장지를 뜯는 순간, 정다정의 눈이 반짝 빛났다.그 모습에서 다정이 얼마나 전자 오르간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저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할 뿐 손도 대지 않았다.그때 하윤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다정아, 와서 쳐봐.”다정이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손을 대지 못하자 하윤이 농담조로 말했다.“이거 너 주려고 산 건데, 네가 치지 않으면 옷 거치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어.”자기를 주려고 샀다는 말에 다정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 틈에 하윤은 얼른 다정의 손을 끌어당겨 전자 오르간 위에 올려 놓았다.“자, 얼른 쳐 봐.”그제야 다정은 조심스럽게 건반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건반을 누르지는 않고 그 위만 맴돌았다.다정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윤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이제 막 자리를 비켜주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리자 하윤은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작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도준 씨.”“뭐 잘못한 거 있어? 왜 그렇게 말해?”방문을 닫고 나서야 하윤은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다정이 밖에 있거든요. 혼자만의 공간을 주려고요. 있잖아요. 의사 선생님이…….”하윤은 오늘 있은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도준에게 말했다.도준이 당연히 이른 작은 일은 신경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한 거지만, 하윤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따가 내가 사람 보내서 다정이 데려 갈게. 다른 사람이 돌봐 주는 게 좋겠어.”“안 돼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애를 억지로 데려갔다가 악화라고 되면 어떡해요?”곧바로 거절하는 하윤의 말에 도준이 인내심을 잃었다.“악화되면 그것도 본인 팔자야. 지금 자기한테 너무 의존한다며? 그 상황에 만약 자기가 실수로 자극이라도 주면 애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겠어.”오늘 정신과 의사도 똑 같은 말을 한 적 있다. 한 사람이 모든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잘못하면 미친 짓까지 벌일 수
‘이건 아빠가 만들었던 동요잖아?’이 곡은 인지도가 높은 곡이 아니다. 더욱이 교재 어느 곳에도 실린 적 없다.‘그런데 다정이가 예전에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 곡을 알지?’권하윤이 문을 열고 방에서 나오자 정다정이 건반 위에 있던 손을 얼른 내렸다.다정이 놀라기라도 할까 봐 하윤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잘 치네. 계속 연주할 수 있어?”격려를 받은 다정은 조심스럽게 손을 건반 위에 다시 올려 놓았다.체계적인 학습을 거치지 않아서인지 실력은 당연히 전문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그저 더듬더듬 멜로디만 따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하윤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이건 아빠가 만든 버전이 아니라 주림 선배가 리메이크 한 버전이잖아.’주림은 처음 이 동요를 듣는 순간 트레몰로 기법을 사용하여 이성호에게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하지만 단순한 멜로디 때문에 창작의 여지가 많아 주림은 자주 다른 버전으로 리메이크해 연주하곤 했다.다정이 연주를 끝내자 하윤은 다정의 옆에 앉아 수다를 떠는 투로 다정하게 물었다.“이 동요 누가 가르쳐줬어?”“주림 오빠요…….”분명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하윤은 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주림, 장옥분, 흥덕 마을…….’‘아, 주민수 할아버지의 딸이 있는 곳이 아마 흥덕 마을이라고 했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하나 둘 들어맞았다.“네가 말했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주림 오빠였어?”“주림 오빠 어머니예요.”다정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그런 거였어?’다정과 대화하는 도중, 하윤은 주림의 어머니가 주영애라는 여자이고, 흥덕 마을에서 분식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건 주민수가 말했던 것과 딱 들어 맞았다. 주림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 주영애의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던 때쯤, 주영애가 마을에서 분식집을 차리면서 형편이 좋아졌다.‘나와 다정이 인연도 보통 인연은 아니네.’하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이 노래 언니도 아는데, 내가 뒤에 부분 가르쳐
역시나 권하윤이 생각했던 대로 정다정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설마 선배가 밖에서 만난 사람인가? 누구지?’하지만 하윤이 핸드폰을 다시 받아 든 그때, 다정이 갑자기 액정 끝을 짚으며 말했다.“이 언니 같아요.”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웬 여자의 옆모습이었다.‘이 사람은…… 공은채?’공은채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데다 사진을 찍는 것도 싫어하여 단체사진을 찍던 날 먼저 떠났었다. 때문에 엉겁결에 옆모습만 걸린 모양이다.하지만 하윤은 믿기지 않았다.“다정아, 혹시 잘못 본 거 아니야?”하윤의 질문에 다정은 갑자기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죄송해요. 저도 제대로 본 건지 모르겠어요. 그게, 그러니까…….”너무 급한 나머지 다정이가 환자라는 것조차 잊은 하윤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얼른 달랬다.“괜찮아. 그냥 물어보는 거니까 무서워하지 마.”한참 동안 다정을 달랜 뒤, 하윤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공은채라면 분위기가 독특한데다 평범한 생김새가 아니라 잘못 알 가능성이 극히 드문데.’‘설마 주림 선배가 정말 공은채 남자 친구였어?’‘그런데 도준 씨와 약혼한 사이 아닌가?’‘아니지. 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또 주림 선배 여자친구라는 거야?’하윤은 갑자기 몰려오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이윽고 한참 뒤, 다정이 평정심을 되찾자 하윤은 다시 물었다.“너 혹시 언제 이 언니 만났어? 혹시 흥덕 마을에서 만난 거야?”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주림 오빠가 이 언니 데려온 적 있어요. 제가 이 언니한테 예쁘다고 하니까 아주머니도 기뻐하며 저한테 사탕을 줬거든요. 이 언니가 자기 미래 며느리라면서.”하윤은 들으면 들을 수록 이 모든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그러면 이 언니와 대화는 해본 적 있어?”“네, 엄청 친절했어요.”‘친절하다고?’하윤의 기억에 공은채는 언제나 무뚝뚝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어 절대 친절이라는 단어와 매치가 되지 않았다.그러던 그때, 고은지가 했던 말이 갑자기 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