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한 권하윤이 전자 오르간 포장지를 뜯는 순간, 정다정의 눈이 반짝 빛났다.그 모습에서 다정이 얼마나 전자 오르간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저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할 뿐 손도 대지 않았다.그때 하윤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다정아, 와서 쳐봐.”다정이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손을 대지 못하자 하윤이 농담조로 말했다.“이거 너 주려고 산 건데, 네가 치지 않으면 옷 거치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어.”자기를 주려고 샀다는 말에 다정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 틈에 하윤은 얼른 다정의 손을 끌어당겨 전자 오르간 위에 올려 놓았다.“자, 얼른 쳐 봐.”그제야 다정은 조심스럽게 건반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건반을 누르지는 않고 그 위만 맴돌았다.다정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윤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이제 막 자리를 비켜주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리자 하윤은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작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도준 씨.”“뭐 잘못한 거 있어? 왜 그렇게 말해?”방문을 닫고 나서야 하윤은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다정이 밖에 있거든요. 혼자만의 공간을 주려고요. 있잖아요. 의사 선생님이…….”하윤은 오늘 있은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도준에게 말했다.도준이 당연히 이른 작은 일은 신경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한 거지만, 하윤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따가 내가 사람 보내서 다정이 데려 갈게. 다른 사람이 돌봐 주는 게 좋겠어.”“안 돼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애를 억지로 데려갔다가 악화라고 되면 어떡해요?”곧바로 거절하는 하윤의 말에 도준이 인내심을 잃었다.“악화되면 그것도 본인 팔자야. 지금 자기한테 너무 의존한다며? 그 상황에 만약 자기가 실수로 자극이라도 주면 애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겠어.”오늘 정신과 의사도 똑 같은 말을 한 적 있다. 한 사람이 모든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잘못하면 미친 짓까지 벌일 수
‘이건 아빠가 만들었던 동요잖아?’이 곡은 인지도가 높은 곡이 아니다. 더욱이 교재 어느 곳에도 실린 적 없다.‘그런데 다정이가 예전에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 곡을 알지?’권하윤이 문을 열고 방에서 나오자 정다정이 건반 위에 있던 손을 얼른 내렸다.다정이 놀라기라도 할까 봐 하윤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잘 치네. 계속 연주할 수 있어?”격려를 받은 다정은 조심스럽게 손을 건반 위에 다시 올려 놓았다.체계적인 학습을 거치지 않아서인지 실력은 당연히 전문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그저 더듬더듬 멜로디만 따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하윤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이건 아빠가 만든 버전이 아니라 주림 선배가 리메이크 한 버전이잖아.’주림은 처음 이 동요를 듣는 순간 트레몰로 기법을 사용하여 이성호에게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하지만 단순한 멜로디 때문에 창작의 여지가 많아 주림은 자주 다른 버전으로 리메이크해 연주하곤 했다.다정이 연주를 끝내자 하윤은 다정의 옆에 앉아 수다를 떠는 투로 다정하게 물었다.“이 동요 누가 가르쳐줬어?”“주림 오빠요…….”분명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하윤은 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주림, 장옥분, 흥덕 마을…….’‘아, 주민수 할아버지의 딸이 있는 곳이 아마 흥덕 마을이라고 했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하나 둘 들어맞았다.“네가 말했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주림 오빠였어?”“주림 오빠 어머니예요.”다정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그런 거였어?’다정과 대화하는 도중, 하윤은 주림의 어머니가 주영애라는 여자이고, 흥덕 마을에서 분식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건 주민수가 말했던 것과 딱 들어 맞았다. 주림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 주영애의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던 때쯤, 주영애가 마을에서 분식집을 차리면서 형편이 좋아졌다.‘나와 다정이 인연도 보통 인연은 아니네.’하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이 노래 언니도 아는데, 내가 뒤에 부분 가르쳐
역시나 권하윤이 생각했던 대로 정다정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설마 선배가 밖에서 만난 사람인가? 누구지?’하지만 하윤이 핸드폰을 다시 받아 든 그때, 다정이 갑자기 액정 끝을 짚으며 말했다.“이 언니 같아요.”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웬 여자의 옆모습이었다.‘이 사람은…… 공은채?’공은채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데다 사진을 찍는 것도 싫어하여 단체사진을 찍던 날 먼저 떠났었다. 때문에 엉겁결에 옆모습만 걸린 모양이다.하지만 하윤은 믿기지 않았다.“다정아, 혹시 잘못 본 거 아니야?”하윤의 질문에 다정은 갑자기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죄송해요. 저도 제대로 본 건지 모르겠어요. 그게, 그러니까…….”너무 급한 나머지 다정이가 환자라는 것조차 잊은 하윤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얼른 달랬다.“괜찮아. 그냥 물어보는 거니까 무서워하지 마.”한참 동안 다정을 달랜 뒤, 하윤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공은채라면 분위기가 독특한데다 평범한 생김새가 아니라 잘못 알 가능성이 극히 드문데.’‘설마 주림 선배가 정말 공은채 남자 친구였어?’‘그런데 도준 씨와 약혼한 사이 아닌가?’‘아니지. 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또 주림 선배 여자친구라는 거야?’하윤은 갑자기 몰려오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이윽고 한참 뒤, 다정이 평정심을 되찾자 하윤은 다시 물었다.“너 혹시 언제 이 언니 만났어? 혹시 흥덕 마을에서 만난 거야?”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주림 오빠가 이 언니 데려온 적 있어요. 제가 이 언니한테 예쁘다고 하니까 아주머니도 기뻐하며 저한테 사탕을 줬거든요. 이 언니가 자기 미래 며느리라면서.”하윤은 들으면 들을 수록 이 모든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그러면 이 언니와 대화는 해본 적 있어?”“네, 엄청 친절했어요.”‘친절하다고?’하윤의 기억에 공은채는 언제나 무뚝뚝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어 절대 친절이라는 단어와 매치가 되지 않았다.그러던 그때, 고은지가 했던 말이 갑자기 뇌리를
민도준의 대답 대신 들려오는 요란한 배경소리에 권하윤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안돼요?”“돼.”도준은 가볍게 대답했다.“그것 때문에 돌아간 거잖아.”하지만 그 말투에 쉽게 눈치챌 수 없는 다른 뜻이 담겨 있다는 걸 안 하윤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도준은 해원에서 그녀가 엉망으로 만든 상황을 수습하고 있는데, 그런 도준은 한마디도 관심하지 않았으니.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늘 빚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진짜로 빚진 하윤은 오죽할까?그제야 하윤은 조심스럽게 설명을 늘어 놓았다.“아니에요. 저는 도준 씨가 저 때문에 또 위험해질까 봐 집에서 기다리려고 돌아온 거예요.”하윤의 변명에 낮게 깔린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도준은 또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하윤에게 장난치기 시작했다.“응. 착하네.”모든 감정이 도준의 행동에 달려 있는 하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주동적으로 의견을 냈다.“그러면 도준 씨가 돌아오면 같이 만나러 가요.”“응? 이렇게 말 잘 듣는다고?”“도준 씨가 밖에서 고생하는데, 제가 또 사고 치면 안 되죠.”하윤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말은 잘해. 됐어, 나 바쁘니까 혼자 놀고 있어.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네.”도준이 더 이상 아까 일을 문제삼지 않자 하윤은 얼른 대답했다.이윽고 도준이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도준 씨,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을 텐데 담배 적게 피우고 술은 마시지 마요. 싸움 나면 절대 직접 나서지 말고요.”하윤의 말에 도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아주 다 컸네? 이제는 나한테 잔소리도 다 하고?”“안 돼요?”“돼.”도준은 목소리를 내리 깔며 말을 이었다.“나중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가르쳐 줄게.”“…….”도준의 희롱에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하윤의 뜨거운 얼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하지만 문 밖에서 들려오는 연주 소리에 이내 걱정에 잠겼다.‘공은채에 관한 걸 도준 씨한테 물어봐도 될까?’도준은 하윤의 앞에서
케빈은 감옥에 7,8 년 정도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딱히 그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것처럼 후련한 표정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담배 좀 줄 수 있습니까?”눈썹을 치켜 올리며 담뱃갑을 꺼낸 도준이 검지로 담뱃갑 변두리를 툭툭 치자 케빈이 손을 내밀어 튀어나온 담배를 받았다. 수갑을 찬 불편한 손 때문에 두 손을 내민 채로 말이다.케빈은 오랫동안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는지 불을 붙이는 동작에서마저 어색함이 느껴졌다.매캐한 연기가 폐부로 흘러 들었고 알싸한 느낌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익숙한 냄새에 허벅지 안쪽에 있는 오래 된 담배 땜빵 자국이 찌근거렸다.그 순간 케빈의 기억은 그가 처음 담배를 배운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날 케빈은 민시영과 함께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햇살 같이 밝게 빛나던 아가씨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케빈 역시 등골이 부러졌었다.그날, 흡연실에서 누군가 케빈에게 담배를 건네주었다. 그 역시 불치병에 걸린 가족이 있어 슬퍼하는 줄 알고 위로하면서 말이다.“자, 한 대 피워요. 그러면 좀 괜찮아질 거예요.”시영이 담배 냄새를 싫어하여 전에 담배에는 손도 댄 적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 케빈은 허구한 날 담배로 기분을 달랬다.그러던 어느 날, 시영이 그 사실을 알고 케빈을 무릎 꿇게 하더니 손에 잡히는 물건을 미친 듯이 케빈에게 던지며 욕을 퍼부었다.이마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려 눈앞이 흐릿했지만 케빈은 왠지 모르게 후련했다. 심지어 시영이 주는 고통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그건 시영이 그 일을 당하고 처음으로 이성을 잃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시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전히 가족들과 웃으며 얘기하고 파티에 참석하고 수업을 했다.모든 울분을 토해낸 시영은 땅바닥에 널브러진 파편을 밟으며 케빈에게 걸어가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일어나서 키스해줘.”케빈은 움직이지 않았다. 본인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시영이 발길질했다.“왜? 이제는 너도 내가 싫어
늦은 밤.권하윤은 잠이 들지 않아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가 수시로 핸드폰을 확인했다.그렇게 11시까지 그 동작을 반복하다가 끝내 폭발한 하윤은 핸드폰을 이불 안으로 던져 버리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전화하겠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많이 보낸 문자에 답장도 안하고. 전화 와도 내가 대꾸하나 봐라.’그러던 그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 머리까지 이불을 덮고 있던 하윤은 당연히 자기가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불을 걷어낸 순간, 문틈 사이로 빛이 흘러 들어오는 게 보였다.‘집에 누가 있어!’‘누가 들어왔나 봐!’하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움켜쥔 채 허리를 굽히고 문틈 사이로 밖을 관찰했다.그 순간, 커다란 힘이 침실 문을 확 열어 젖혔다.“아!”너무 놀란 나머지 하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 치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살려달라고 소리치려던 찰나,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만 소리쳐. 나야.”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하윤은 문밖에서 흘러 드는 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장난기 섞인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자, 하윤은 화가 난 듯 남자의 가슴을 내리쳤다.“오면 온다 왜 말을 안 해요? 놀랐잖아요.”도준은 피하지도 않고 하윤에게 맞아주면서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서프라이즈 해주려고 그랬지.”본인은 도준을 때리느라 손이 아픈데 도준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자 하윤은 구시렁댔다.“나빠 죽겠어.”“싫어? 그럼 나 간다?”도준이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굴자 하윤은 얼른 도준의 목을 끌어안았다.“안 돼요. 못 가요.”고개를 젖힌 채 만류하는 모습은 바로 입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이에 도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하윤의 이마를 콩 내리쳤다.“그래, 안 갈게. 그러면 어디 한번 나 붙잡아 봐.”하윤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끝내 도준에게 입을 맞추었다.분명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전히 그리움에 병이 난 것 같았다.어느새 하윤의 등은 벽에 밀쳐졌고 허리를 끊어 안은 힘은
여전히 공포에 질려 하는 정다정을 보는 순간 권하윤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다정에게 있어 성인 남성에게 대항하는 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다정은 하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끝내 용기를 낸 거다.게다가 아까 도준이 때린 것은 아니냐고 물은 것도 예전에 장옥분이 맞고 살던 트라우마 때문일 거다.매일 어머니가 맞는 걸 봐왔으니 하윤도 똑 같은 일을 당한 거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팠지만 하윤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걱정하지 마. 언니 남편은 언니한테 엄청 잘해줘. 때린 적도 없고. 일찍 자고 내일 아침 같이 식사하자.”다정은 도준과 하윤의 방을 힐끔거리더니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방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응. 왜 그래? 잠이 안 와?”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다시 저었다.그러고는 하윤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언니, 아까 꽃병 깨뜨려서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제가 너무 바보 같았어요.”잇따라 일어난 하윤이 얼른 다정을 달랬다.“괜찮아,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구해주려던 거잖아. 언니 감동받았어.”하윤은 말하면서 다정을 방으로 끌고 가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주었다.“잘 자고 일어나면 내일 모든 일이 잘 될 거야.”스탠드 램프만 켠 침실 안, 다정이 이불을 덮어주는 모습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다정은 엄마가 그리워 눈물이 앞을 가렸다.“언니…….”다정이 이제 막 말하려던 찰나, 밖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그렇게 꾸물거려? 얼른 와.”도준이 다정을 잡으러 방까지 들어올까 봐 하윤은 서둘러 다정에게 작별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때문에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다정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하윤이 방에 돌아왔을 때, 도준은 침대에 기대 있었다. 팔에 두른 붕대는 남자의 겉모습에 영향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색다른 매력을 더했다.이불을 허리까지 덮은 채 훤히 드러낸 복근과 스탠드 등 불
남자의 넓은 등에 가려진 불빛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하윤의 가느다란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숨결보다 더 뜨거운 남자의 시선이 드리우자 하윤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하지만 도준이 놀라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것처럼 숨소리를 가늘게 내며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할 수 있는 건 저도 더 생각해 봐야겠는데요.”그런데 하윤의 발은 뻔뻔한 그녀의 태도와 달리 자꾸만 들썩이며 도준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아니면 제가 더 주물러 드릴까요? 저 요즘 밥도 많이 먹어 힘이 남아 돌거든요.”하윤의 교활한 웃음에 마음이 간질간질해난 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짝 웃고는 앞으로 쑥 내미는 하윤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입을 맞췄다.“그래? 그럼 이제 손 아프다고 하지 않겠네?”손등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윤은 손을 뒤로 뺐다.“무슨 생각 하는 거예요? 제가 말한 행위는 지극히 건전한 거거든요!”“그래?”그때 도준이 하윤의 목덜미에 숨결을 내뱉으며 말했다.“그러면 우선 할 일부터 하고 이따가 주물러.”“…….”창밖의 달빛이 바닥에 흩뿌려져 카펜 위를 밝게 비추었고 강하게 불던 밤바람은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잠잠해졌다.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운 하윤은 몸에 힘이 빠져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귀찮았다.하윤의 그런 모습이 재밌었는지 도준은 피식 웃으며 하윤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손등으로 그녀의 얼굴을 톡톡 쳤다.“어깨 주물러 준다며? 번복하는 거야?”“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일어나지 못하겠어요.”아니나 다를까 한 손에 다 잡힐 듯 가는 허리에 커다란 손자국이 나 울긋불긋한 키스마크와 뒤엉켜 있었다.그때, 하윤이 눈물 머금은 듯한 촉촉한 눈으로 도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흥, 마음 아파하지도 않고 주물러주지도 않고.”이제 갓 정사가 끝난 뒤라 불만 섞인 말투에 애교가 흘러 넘쳐 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래, 돌봐줄게.”자기 체온보다 훨씬 뜨거운 손이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