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아버지의 방치와 계모의 학대 속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지시연은, 결국 G시 최고 권력자인 고유건과의 결혼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남편 유건은 시연이 혼전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사생활과 도덕성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갈등의 불씨를 지핀다. 결국, 시연은 열 달 동안 품었던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후,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몇 년 후, 지시연이 다시 G시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곁에는 한 어린아이가 함께였다. “고 대표님, 전담의가 필요하시다면서요?” 유건은 시연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오늘부터 당신을 내 전담의로 채용할게.” 그 후, 세상 사람들은 부인도 애인도 필요 없다는 유건이 전담의에게만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쏟고, 심지어 그녀의 아들이 누구의 아들인지도 모른 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아낀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View More“아니요.” 시연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한마디로 거절했다.유건의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 유건의 가슴은 바늘로 찌르는 듯했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날 싫어해?” 시연이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고,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도 알잖아요. 나랑 장소미, 절대 안 맞아요.” 이어서 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당신을 위해서라도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시연은 이 말을 뱉으며 자신의 속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이 유건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그리고 더 이상, 유건에게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시연은 한 번 더 못 박았다. “앞으로도... 웬만하면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또 덧붙였다.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치면... 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하자고요.” 그러고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진짜 가볼게요.” “그래.” 유건은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뻔했다. 시연은 돌아섰고, 유건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가 멀어지는 걸. 점점 멀어지는 걸. 모두 다 유건이 예상했던 결말이었지만, 시연이 이렇게 빨리, 이렇게 단호하게 떠날 줄은 몰랐다. 한순간, 그는 발을 떼고 싶었고, 시연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유건의 발은 바닥에 단단히 박힌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가서 뭐 하게?’ ‘나는 이미 저 사람을 놓아줬잖아.’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저 사람을 다시 붙잡겠어?’ ‘그리고 저 사람은 자유를 원했고, 이제야 결국 자유를 얻었어.’ ‘그러니까... 저 사람이 분명히 아주 기뻐할 거야.’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방해하지 말자.’ ‘이젠, 정말 다 끝났으니까.’...강울대학교병원, VIP 병동 밖. 시연은 가방을 메고, 작은 짐을 들고,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유건의 품에 안긴 채, 시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굳힌 채, 남자를 안아주는 일 없이, 그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있었다. 그러다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유건 씨의 사과, 받아줄게요.” 그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속엔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순간, 유건은 천천히 시연을 놓아주었다. 비록 계속 시연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유건은 그럴 자격이 이제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위자료 관련해서, SKY전원주택단지의 그 집의 명의는 네 앞으로 넘길 거야. 그리고 현금, 기타 부동산도 정리해서...” “하...” 시연이는 남자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미안해요.” 시연은 입술을 다물고, 조금 얌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내가 위자료를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안 줘도 돼요. 우리,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녀는 분명히 ‘계약 결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는 듯했다. “아니야.” 유건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받아야 할 몫이야. 그냥 받아 줘.” ‘그리고 우리 사이는 이미 거래 관계가 아니었잖아.’‘다 내가 잘못했어.’남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시연은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넘겼다. “알았어요. 받을게요.”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시연이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어디 가?” 유건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떨쳐내고,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난 후 말했다. “여긴 유건 씨의 병실이
“이번 일... 정말 미안해.” 유건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사실, 유건도 이 정도의 사과로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것은 꼭 해야 할 말이었다. ‘...?’ 시연은 순간 멍해졌지만, 곧 깨달았다. ‘아, 그 일.’ 솔직히 말해서, 시연이는‘괜찮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유건이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왜 그렇게 나한테 못되게 굴었어요?” 책망. 원망. 그리고... 서운함. 시연의 모든 감정이 섞인 말을 듣자, 유건의 눈빛이 흔들렸다.시연의 그 한마디가, 가슴을 세게 쥐어짜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맞아.” 그는 인정했다. “내가 나쁜 놈이었어.” 그리고 말을 잇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한숨처럼, 유건은 말했다. “이제부터...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네?” “아니.” 유건은 스스로를 비웃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자체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남자의 말이 점점 더 흐트러졌다. 시연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건이가 다시 한번 자기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긴장했다. “시연아.” 남자는 잠시 숨을 삼켰다. “우리, 더는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아.” 쿵-그 순간, 시연은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뭐?’ 그녀는 오랫동안 유건을 바라봤고, 불안하게 되물었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게... 그럼, 이제 내가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녀는 일부러 ‘헤어지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유건과 시연의 관계는, 항상 유건이 주도했다. 그래서 유건이 원하지 않는 이상, 시연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유건이 엄청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유건은 목이
강울대학교병원, VIP 병실. 시연이 혹시라도 깨어나 도망칠까 걱정돼서, 유건은 그녀를 자신의 병실로 데려왔다. 그리고 바로 내과 담당의를 호출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닙니다.” 진료를 마친 의사가 차트를 넘기며 말했다. “이번에는 치료를 중단한 탓에 그런 거니까, 수액 이틀 정도 맞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유건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고,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천천히 물었다. “앞으로도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나요?” “지금 당장은 장담할 수 없지만...” 의사는 현실적으로 답했다. “초기에는 크게 악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마친 후에도 주기적인 체크와 모니터링은 필수입니다.” 유건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수고 많으셨어요.” “별말씀을요, 고 대표님.” 의사가 나가고, 유건은 조용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시연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임신으로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장소미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장소미 또한 앞으로 시연처럼 합병증이 생길 수도 있을 터였다. 유건은 더 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었다.왜냐하면,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결국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유건도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몇 시간 후. 시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깨달았다. ‘여긴... 고유건의 병실이야.’ 그리고 유건은 바로 옆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동식 수액 거치대가 옆에 놓여 있고, 남자의 왼손에는 수액 라인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으로는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또한 남자 앞에는 노트북이 켜져 있었고, 틈틈이 타자를 치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진짜...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네.’ 그 순간, 시연은 자기가 유건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민망해졌다. ‘고유건은 소파에서 자고, 나는 침대에서 잤다?’ 왠지 미안해졌기에, 그녀는 팔을 짚고 천천히
“주지한 씨죠?” 하은은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제발, 고 대표님께 전해주세요! 시연이가 아주 아파요. 강울대학교병원에 가야 하는데, 제가 못 업겠어요!”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지한의 목소리가 순간 팽팽하게 긴장됐다. [고마워요, 친구분.] “별말씀을요!” 전화를 끊자마자, 하은은 급히 사탕 하나를 까서 시연의 입에 넣었다. “일단 이거 물고 있어. 고 대표님이 금방 올 거야!” 시연은 너무 지쳐서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기에, 그냥 눈만 천천히 깜빡였다. 하은은 시연의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친구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지켜봤다. ...그 시각. 지한이 전화를 받을 때, 유건은 수액을 맞고 있었다. 그는 회사 일로 종일 병원에 있지도 못했기에, 그제야 겨우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형님.” 지한은 망설임 없이 보고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갈 테니까 형님은 수액부터...”그는 끝까지 말할 수 없었는데, 유건이 이미 바늘을 뽑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유건의 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형님!” 지한이 다급하게 티슈를 뽑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를 닦으며 단호하게 물었다. “차는 준비됐어?” “예.” “그럼 가자.”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은 이미 병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10분도 채 안 돼서, 유건은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밤늦은 시간. 기숙사 출입 문제를 고려해, 지한이 미리 기숙사 관리실과 조율을 끝마쳤다. “형님, 들어가도 됩니다.” 관리실 선생님은 문을 열어줬고, 유건은 거침없이 502호로 향했다. “고 대표님, 오셨...” 하은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건은 이미 침대 옆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으응...” 시연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힘없는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유건의 가슴이 세게 죄어들었고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곧장 몸을
502호에 가장 먼저 에어컨이 설치되었고, 바로 옆 방들도 차례로 공사가 진행됐다. 어수선했던 소음이 점점 멀어지며 구경하던 학생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하은은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녀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며, 씨익 웃었다. “꿀물 좀 마실래? 고 대표님이 보내준 무첨가 최고의 국내산이야. 한 잔 타 줄게.” “응, 고마워.” 시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하은은 찻잔에 꿀물을 타서 건넸다. 그리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한껏 즐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시원하다!” 시연은 말없이 컵을 내려다보며 한 모금 삼켰다. “시연아.” 하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 너한테 진짜 잘해 주는 거 같아.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시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작게 중얼거렸다. “돈이 많잖아.” “아, 참.” 하은은 눈을 반쯤 감고 한숨을 쉬었다. “돈이 많은 건 맞지. 근데 돈 많다고 다 이렇게 해? 돈 아까워하는 부자들도 널리고 널렸어.” 그러더니 툭, 시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한번 잘 생각해 봐. 뭐, 나는 그냥 하는 말이야.”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솔직히, 그녀는 확실히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여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시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톡 알림이었는데, 유건에서 온 톡이 하나 떴다. [이제 좀 시원해?] 시연은 한참 동안 가만히 화면을 바라봤는데, 답장하진 않았다. 잠시 후, 또 유건에서 온 톡이 왔다. [편하게 쉬어. 내가 미처 생각 못 한 게 있으면, 네 친구한테라도 전해줘.] 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은 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그녀는 두려워졌다. ‘고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하지만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건, 감당하기
“네?” 하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하은은 놀라 허둥대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고 대표님! 시연이는 제 친구인데, 제가 당연히 돌봐야죠...” “빨리 알려줘요.” 유건은 귀찮다는 듯 단호하게 잘랐다. “말 안 해도 찾아낼 수 있으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학생이 시연이를 챙기는 게 정말 고마워서 그런 거니까 받아주고요.” “아... 네.” 하은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아니에요. 갈게요.” ...기숙사 건물 밖. 유건은 걸음을 멈추고 건물을 한 번 올려다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지한을 향해 낮게 말했다. “지금 당장 처리할 게 있어.” “알겠습니다, 형님.” ...기숙사 안. 하은이는 방을 들락날락하며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도착하는 배달 상자들... 전부 다 유건이 보낸 거였다. 책상 위는 이미 가득 찼기에, 결국 다른 짐들을 치워야 할 지경이었다. 음식, 생활용품, 필요한 건 전부 다 옮겨야 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하은은 도시락을 여는 순간, 진한 냄새가 퍼졌다. 딱 적당한 온도... 하은은 밥그릇을 챙겨 시연을 부축했다. “조금이라도 먹어 봐.” “응.” 시연은 일부러 굶지는 않았다. 한눈에 봐도 성애 이모의 손맛이었으니 말이다. “꺅!” 갑자기 하은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하은은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었다. “무슨 대형 이슈라도 떴어?” “아니, 그게 아니고!” 하은은 말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곳엔 하은의 계좌에 5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순간, 시연의 손이 멈췄다. “이게 뭐야?” 하은은 침을 삼켰다. “고 대표님이, 나한테 보낸 거래... 널 돌봐준 거에 대한 감사라는데... 이건 너무 많잖아!” 여자의 말끝이 떨렸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아주 좁은 기숙사에는 벽 쪽으로 침대가 나란히 두 개 놓여 있고, 그사이에는 작은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걸로 끝. 더 이상 공간은 없었다. 오래된 기숙사에는 에어컨조차 없었지만, 날씨는 미친 듯이 더웠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선풍기가 끽끽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바람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물병과 컵이 있었는데, 컵에 물을 따른 유건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숙사에서 벌꿀을 찾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꿀은 어디 있죠?” 침대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시연이 움찔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굼뜬 움직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였네. 정말 고유건이 여기까지 찾아왔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틀 정도 못 본 사이에 또 더 말랐네.’ 그는 하은을 힐끔 봤다. “아, 꿀이요?” 하은이는 재빨리 알아차리고 부리나케 벌꿀을 찾아 컵에 짜 넣었다. 그리고 공손히 내밀었다. “고마워요.” 유건은 짧게 인사를 건넨 후 자연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시연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땀범벅이잖아...’ 시연은 순간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빼려 했지만 그녀는 힘이 없었다. 유건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곤, 꿀물을 한 모금 마셔 봤다. “딱 적당한 온도네.” 그리곤 컵을 시연의 입가에 가져갔다. “마셔. 천천히.”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남자의 손길. 하은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조용히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고 대표님, 시연이가 아직 밥 못 먹어서 이걸 사 오던 참이었어요.” “그래요? 수고했어요.” 품위 있는 감사를 건네는 남자의 태도에 시연은 꿀물을 반쯤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더는 안 마실래요.” 유건은 컵을 치우고, 그대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는 안의
지한이 서둘러 말했다. “바로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잠깐, 나도 같이 갈게.” 지하도 다시 시연을 찾으러 나갔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수색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시연의 흔적은 없었다. 유건은 링거를 다 맞추고도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았지만, 더는 병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정민환을 데리고 강울대 후문 쪽으로 향했다. ...차 안. 민환이 지한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응, 확인했어. 우리가 겹쳐서 찾지 않도록 이동할게.” 전화를 끊은 민환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형님, 지금까지 확인된 숙소들은...” 하지만, 유건은 듣고 있지 않았다. “형님?” “저기 봐.” 유건의 시선이 길 건너를 향해 있었는데, 민환도 그 시선을 따라가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임진아가 보였다. 진아는 한 여학생과 함께 있었는데, 둘은 가벼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뭐가요?” “임진아가 저렇게 태평할 리가 없어.” 유건의 눈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제일 친한 친구가 사라졌는데, 임진아의 태도는 너무 평온하잖아?’ ‘임진아와 시연의 사이를 생각하면, 절대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없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임진아의 집이 아니라면? 시연이를 어디에 숨겼을까?’ 그때, 유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여학생에게 향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누구였더라?’ 기억력이 좋은 그는, 머릿속을 빠르게 되짚었다. ‘병원! 맞아!’ ‘저 여학생, 시연이랑 같은 과에서 실습하던 여학생이야.’ ‘내가 전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스쳐 지나가며 본 적이 있어.’ “허.” 유건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민환아.” “네, 형님.” “저 여학생 기숙사 방 번호 알아봐.” “네?” “지금 당장.” 이제야 실마리가 풀렸다.
밤 10시, 로얄호텔.지시연이 7203호 로얄 스위트룸의 호수를 확인했다.‘여기구나.’그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지동성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다. [시연아, 네 새엄마가 네가 진 사장을 잘 모시기만 하면, 바로 네 동생의 치료비를 주겠다고 약속했단다.]이 문자 메시지를 읽은 시연의 창백한 얼굴에 무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신경이 마비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듯했다. 아버지는 재혼한 후, 시연과 동생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는 계모가 10여년간 두 남매를 가혹하게 학대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의식주를 마련해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때리고 욕하고 비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까지 벌인 학대로도 모자라, 사업상의 빛 때문에 딸 시연이 남자랑 잠자리를 가지게 하다니...시연이 응답을 하지 않자, 지동성과 새엄마 장미리는 동생 지우주의 치료비를 빌미로 그녀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시연의 동생 우주는 자폐증을 앓고 있어서 치료를 멈출 수 없었다.호랑이도 자기 새끼는 건들지 않는 법이거늘... 지동성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었다!시연은 동생 우주를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시연이 방문 앞에 선 채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이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문고리를 살짝 돌리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조금의 불빛도 없이 어두컴컴했다. 시연은 눈썹을 찌푸린 채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진 사장님, 저예요. 어...”갑자기 길고 우락부락한 팔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벽으로 밀쳤다. 벽에 부딪힌 시연은 등에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바로 이때, 남자의 거친 숨결이 순식간에 그녀를 휘감기 시작했다.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며 손으로 시연의 목을 조여왔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머릿속이 멍해진 시연은 이것이 도통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몰라요...” 그 남자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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