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의 약속을 들은 시연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사실대로 말할게요.” “처음에 계약 결혼을 수락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우주 치료비가 필요해서.”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장소미의 남자친구라는 걸 알았죠... 이혼을 거부한 건, 복수였어요. 그 여자한테, 그 집안에...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게 전부예요.”시연의 분홍빛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건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정말... 복수였어...’예전에 시연이 병실에서 그랬다. 유건이 누굴 사랑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인제야 명확하게 유건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그동안... 내가 느낀 시연이의 다정함은... 모두 연기였던 걸까?’‘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유건은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표정을 감췄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방식으로 복수한다고? 좀 유치하지 않아?”“그렇죠, 유치하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복수는커녕, 나 자신만 구역질 나게 했으니까.’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미안해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이혼 안 해준 것도, 당신을 이용한 것도... 그건 분명 내가 잘못한 거니까요.”그 한마디가 유건의 가슴 깊은 곳에 단번에 불을 밝혔다. ‘‘그동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지금은...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걸까?’유건은 묻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웠다.그런 유건의 망설임을 모른 채, 시연은 조용히 물었다.“이제 다 알았으니까... 어쩔 건데요? 이혼할 거예요?”“뭐...?”그 순간, 유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그 질문을 참을 수는 없을 터였다.‘이혼? 또 이혼? 이혼이 무슨 일상 대화야?’‘조금만 감정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두 번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연은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리고... 또...‘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뭔가 꽉 막힌 듯한 느낌, 그리고 불쾌한 통증. 혹시 또 쓰러지기라도 할까 두려워진 시연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유건과 나눴던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특히 복수 때문에 이혼을 거부했다는 말. 그 말은 진심이었다.깜깜한 어둠 속, 시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결국, 난 지키지 못했어.” ‘난... 마음이 움직였으니까.’‘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좋아하게 돼버렸어.’ ‘내가 만든 덫에 내가 걸려든 거야. 자업자득이지.’그날 밤, 유건은 끝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식탁에서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여전히 유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출근했나...?’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두통도 없나 보네. 진짜 대단한 체력이다.’시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가방을 둘러매고 현관을 나섰다. 역시나 정기환이 대기 중이었다.“형수님.” 기환은 운전석에서 시연을 힐끔힐끔 보며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왜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아니요... 그게...” 기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네...?” 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왜요, 제가 뭘 물어야 하죠? 무슨 질문을 기다리는 거예요?”‘뭐야, 이건 또 무슨 희한한 대화야...’“아, 아니요... 그냥요. 하하.” 기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조용히 운전대를 잡았다.강울대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이 병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기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걸... 형님한테 뭐라고 보고해야
노은범이었다.“시연아.”시연보다 먼저, 은범이 담담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응, 오랜만이야.” 딱히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은범은 또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그는 더 말라가고 있었다.‘왜 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복잡하지...?’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시연의 감정.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은범은 심재규 쪽을 힐끗 보더니, 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교수님이랑 아는 사이야. 근처에 볼일 있어서 잠깐 들른 거고.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어.”‘정말 그게 다일까? 아니야, 분명 날 보러 온 거잖아.’하지만 시연은 굳이 그 사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배웅해 줄게.”“응, 좋아.” 두 사람은 마치 친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함께 별산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은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로 향했다. “많이 나왔네.”“응, 이제 슬슬 티 나기 시작했어. 4개월 지나고부터 눈에 띄더니,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느낌이야.”“그래... 참 좋다.” 은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잘 지내? 그 사람은... 너한테 잘해줘?”시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나쁘든... 이젠 내 몫이야. 너까지 이런 얘기 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너... 상태도 안 좋은데.’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은범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줘. 곧 우주 수업이 끝날 시간이잖아. 이만 돌아가.” “응, 잘 가.”“잘 있어.”시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은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후에도, 우주는 아직 수업 중이었다....심재규는 시연을 보자 바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오늘이 마침 노 사장님의 진료 날이었어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하늘은 한 점 구름 없이 맑았다. 농구 코트 위, 남자들의 구호와 땀방울이 어우러진 뜨거운 풍경 속, 관중석의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은범이 파이팅!” “은범이, 잘생겼다!”“오늘은 구경꾼도 많네! 은범아, 여자애들이 저렇게 많은데 한 명도 눈에 안 들어와?” “야야, 우리 은범이 여자 친구 있잖아.”“아, 그냥 농담이지 뭐... 여기, 여자 친구는 안 왔잖아?”“저기 ‘법대 퀸’, 너 좋아한 지 꽤 됐지? 아빠가 대형 로펌 대표래. 솔직히 네 여친보다 집안이 몇 배는 좋잖아. 솔직히 말해봐, 흔들리지도 않아?”“그래, 시대가 변해도, 결국은 ‘분수에 맞는 집안’이 최고잖아.”“야, 그만해.” 은범이 결국 참지 못하고 수건을 내팽개쳤다. “끝나고 밥도 없어. 다들 꺼져.”“뭐야?!”“오늘 은범이의 한턱 기대했는데...”“야야, 시연이 얘기 꺼낸 너 때문이야! 은범이가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서 그러냐?”“오늘의 죄인은 너로 정했다!”농구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정리할 때쯤, ‘법대 퀸’이라 불리는 여대생이 다가왔다. 손에 시원한 음료를 든 채, 수줍은 미소를 띠며.“은범아, 이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범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버렸다. 남자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등에 백팩을 멘 채, 린넨 원피스를 입고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시연.“우리 여친 왔네!”“흥!” 시연은 콧소리를 흘리며, 은범의 시선을 따라 ‘법대 퀸’을 슬쩍 훑었다. “내가 좀... 타이밍이 안 좋았나 보네?”‘질투 날 수밖에 없잖아. 저렇게 예쁘고, 잘 어울리데...’“무슨 소리야! 나, 이제 막 경기 끝났어. 못 봤지? 나 아까 진짜 멋있었어.” 은범은 웃으며 시연의 손을 잡았다.그제야 시연도 입꼬리를 올렸다. “물 마실래?”시연이 내민 물병을 보자 은범이 반갑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스럽게 손을 뒤로 뺐다.“이건 그냥 물이야
차가운 면도날이 혈관을 스쳤다. 피가 터지듯 솟구쳤다.은범은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 ‘이상하다... 오히려... 편안해.’ ‘이대로 피가 다 빠지면, 이제... 끝이겠지.’그는 서서히 의자에 앉았다. 팔을 세면대 안으로 걸치고,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해방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죽음은 단지 긴 수면일 뿐이야.’ ‘두렵지도 않아...’그리고 점점 몸이 식어갔다.은범의 의식이 아득해지고, 생각은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때,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은범아! 은범아!!”강수희였다. 피범벅이 된 아들의 손목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무너졌다.“으아아악... 은범아...!”어머니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재빨리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제발요, 제 아들이에요! 지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요...” “여기... 제발, 빨리 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발...!!”...병원.“어떻게 된 거야?! 은범이는...!” 노수철이 숨을 헐떡이며 응급실로 뛰어들었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강수희의 눈은 완전히 부어올랐고,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우리 은범이가 왜...”“이모.” 조용히,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성빈이었다. 은범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가장 가까운 친구.“성빈이?” 노수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삼촌.” 성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싫어하실 거 알아요.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강수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물었다. “무슨 말이든... 해줘, 제발.”“네...” 성빈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모, 은범이... 심각한 우울증 환자예요.”“뭐...?” 강수희와 노수철은 동시
“어떻습니까, 교수님?” 강수희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물었다. 초조함이 전신을 감쌌고, 목소리도 떨렸다.의사는 깊게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출혈은 막았고 봉합은 완료했지만... 생명 징후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혹시 부모님이시라면, 자살 시도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노수철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절망과 자책, 무지의 공허함만이 흐를 뿐.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병실로 옮겨 보겠습니다. 상황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병실로 옮겨진 은범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몸은 차갑고, 호흡은 희미했다.의사는 곁을 돌며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생명 징후가 너무 약해요. 솔직히 말해서... 살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두 분... 부모로서... 정말 이유를 모르십니까?”‘살겠다는 의지가 없다’라는 말이, 비수처럼 강수희의 가슴에 꽂혔다. 의료는 기적을 바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꺾인 사람에겐 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이기도 했다.“방법... 방법이...” 강수희는 중얼거리며, 불현듯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방법 있어요! 방법이 있어요, 분명히!”그리고 이내, 진성빈을 찾아갔다.“성빈아... 있어. 방법이 있어.” 강수희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성빈은 바로 눈치를 챘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설마... 시연이요?”“그래, 시연이.” 강수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만이 은범이를 살릴 수 있어... 그 아이는... 은범이한테 약이야...”“이모...” 성빈은 난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시연이가 결혼했다는 거, 이모도 아시잖아요.”고씨 가문의 결혼식은 조용히 이루어졌지만, G시의 상류 사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버린 시연이, 전 남자 친구를 보러 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
이 광경에 시연은 숨이 턱 막혔다. “사모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요, 사모님!” 시연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왕성애마저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사모님은 아직 어리세요. 갑자기 이러시면 놀라서 수명이 깎일지도 모른다고요!”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강수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서 일어나세요.” 왕성애는 불쾌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한밤중에, 그것도 울고불고하며 무릎까지 꿇다니... 대체 누구한테 겁을 주려는 거야?’ “아, 네...” 노수철이 강수희를 부축해 일으켰고, 강수희는 그 틈에 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시연아,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무 급해서, 너무 막막해서 그랬어. 부탁이야... 우리 은범이 좀 살려줘.” ‘뭐...?’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은범이가... 왜요?” “은범이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강수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범이가 손목을 그었어... 자살 시도를 했다고... 의사 말로는, 그냥...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대. 시연아, 너밖에 없어. 은범이한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너뿐이야...” “맞아.” 노수철은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듯했다. “예전에 우리가 널 힘들게 했던 거 안다. 근데 은범이도... 결국 피해자잖니.” 시연은 이미 정신이 아득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리며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은범이는 어디 있어요?” “병원에 있어.” “어서 가요.” ‘지금은 묻고 따질 때가 아니야.’ 은범에게 우울증 있다는 거,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손목을 그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안 돼요!” 갑자기 왕성애가 가로막았다. “사모님! 가시면 안 돼요!” “왜요?” 시연은 당황했다. 왕성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답한 듯 말을 끌었다. “유건 도련님을 생각하셔야죠!” ‘고유건...’ 유건이 알게 된다면,
시연은 조용히 침대 곁에 앉았고, 모니터에 뜬 숫자들을 힐끗 봤다. 심박수, 산소포화도를 포함한 모든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은범아... 나야, 시연이.” 물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시연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은범의 손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감쌌다. “은이야...”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내가 왔어. 널 보러 왔어... 은이야...” 이어서 눈을 감자,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었어... 아프면 말하지 그랬어. 그동안 혼자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지?” “포기하지 마. 지금 여기서 끝내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내가 곁에 있을게.” 시연은 계속 중얼거렸다. 우울증이 어떤 건지, 그녀는 의사지만 완전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하면... 널 도울 수 있을까?’은범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시연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연아?” 문밖에 서 있던 강수희와 노수철이 놀라 그녀를 불렀다. “어디 가는 거니?” 지금 노수철 부부에게, 시연이 병실을 떠나는 건 곧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두 사람을 지나쳐, 병실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정기환을 바라봤다. “기환 씨...” 그녀의 부름에 그가 다가왔다. “형수님, 무슨 일이세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뒤적였다. “예전에... 지 사장님이... 제 이름으로 집을 하나 사주셨거든요. 그 집, 어딘지 알죠?” “네, 압니다.” 그녀는 집 열쇠를 꺼내 건넸다. “거기 서재 책상 왼쪽 서랍에, 천으로 된 가방이 하나 있어요. 그거 좀 가져다주세요.” 기환은 멈칫했다. ‘지금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시연은 고개를 돌려 노수철 부부를 바라봤다.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사모님?”짐을 정리하던 시연의 방에 왕성애가 들어섰다. 뒤이어, 이호민도 들어왔다.요즘 병원 쪽에 매달려 있던 이호민은 부부 사이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줄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호민은 바닥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유건 도련님이 또 사모님을 속상하게 했나요? 괜찮아요, 사모님. 속상한 게 있으면 어르신께 말씀드리세요.”“어르신은 누구보다 사모님을 아끼시잖아요. 원래 부부는 조금씩 다투기도 해요. 집까지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캐리어를 대신 들려 했다.하지만 시연은 고개를 저었고,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집사님, 그게 아니에요. 유건 씨가 저를 속상하게 한 게 아니라... 제가 유건 씨 속을 뒤집어놨어요. 지금은... 절 보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이호민과 왕성애는 동시에 얼어붙었다.‘어떻게 된 거지...? 저런 말까지 나올 정도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시연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백팩을 둘러맸다. “이모님, 집사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그 말에, 왕성애와 이호민은 허겁지겁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는 시연을 서둘러 붙잡았다.“사모님, 잠시만요.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유건 도련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 “맞아요. 도련님 성격 급한 거 사모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홧김에 한 말일 수도 있어요.”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단호하게 말했다.“유건 씨가 돌아와서 저를 보면 더 화가 날 거예요. 전... 그걸 더 보고 싶지 않아요.”‘그 사람한테 더 미운 존재가 되기 전에 조용히 사라지는 게, 내가 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야.’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도련님이 그렇게까지...’고씨 가문 본가 대문 앞. 그 순간, 정기환이 막 대문에 들어서고 있었다.“형수님?”그는 시연이 캐리어를 끌고
유건의 분노는, 무너지는 파도처럼 쏟아졌다.하지만, 시연은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남자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 보며 조용히 말했다.“지금... 많이 화났어요?”그 말에 유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뭐?!! 이 여자,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 상황에서 ‘많이 화났냐’고 묻는다고?’시연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조금은 멍한 목소리에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톤이었다.“잘 모르겠어요. 지금 내가 당신을 좋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 ‘그게 네 진실한 마음이라고?’ 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아니면...” 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동자에 짙은 의문을 담았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진짜 의문이었다.“당신은 고씨 가문의 도련님이고, 당연히 모든 걸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법적으로 당신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있으니까...”“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더라도, 나는 무조건 당신을 좋아해야 하고, ‘배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좋아해야 하고, 배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냐고?’ 시연의 말이 유건의 가슴을 도려냈다.‘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 우린 대체 뭐였지?’ “혼인 중에 외도라니, 네 진심이 그거였어?” 유건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가라앉았지만, 안에 담긴 분노는 더 짙었다.“내 진심이... 그거였냐고요?”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그리고 문득, 아까 자신이 본 그 나비난 화분이 떠올랐다. 유건이 가장 먼저 들렀던 곳... 바로 장소미가 있는 곳. 시연은 아내였지만, 유건의 ‘첫 번째’가 아니었다. 늘 ‘두 번째’, 늘 ‘장소미의 다음’이었다.시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서로서로... 똑같지 뭐...”“뭐라고?” 유건이 날카롭게 물었다.“아...” 시연은 힘없이 웃었다.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이젠 굳이
유건은 분명히 봤다. 두 눈으로, 직접.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무언가 기대하고 있었다.‘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그게 정말... 단순한 우연이었을지도 몰라.’‘아니면, 어쩌면... 진짜로, 오해일 수도 있잖아.’되뇔수록, 마음은 더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고유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자존심은? 너답던 원칙은 다 어디로 갔어?’유건의 감정은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그러는 사이 문밖의 시연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그러다 유건의 시선이 책상 위 어딘가에 멈췄다. 작은 노트 하나.그 작은 책상은 시연의 것이었다. 평소에 시연이 쓰던 전공 서적과 자료들이 정리돼 있었고, 그 위에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무심코 들춰본 노트 속. 글자와 숫자들이 정돈된 필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이건... 가계부?’두 페이지를 더 넘긴 순간, 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장난해?’4000만 원, 우주의 첫 치료비. 그 뒤엔 우주의 식중독 입원비, 시연 어머니 묘지 이전 비용... 그녀가 ‘고씨 가문'에, 아니, 유건에게 ‘빚진’ 항목들만 정리된... ‘일종의 청구 리스트’였다.‘이게... 뭐야?!’순간, 유건의 심장이 ‘툭’하고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분노가 밀물처럼 되살아났다.그중 한 줄에서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바로 시연 어머니 묘지 이전비였다. ‘묘지 이전?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땐 우린 이미 결혼했는데... 난 아무것도 몰랐어!’‘저 여자는 단 한 마디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아니, 말하기조차 싫었던 거겠지. 나란 존재가 그 정도였다는 거잖아.’그러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똑- 똑-유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문 안 잠겼어.”밖에 있던 시연은 그 말에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렇게 말투가...?’‘기분이 상했나, 저 정도로?’ 속으로 작게 숨을 내쉬며, 시연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유건은 작은 책상
‘정말... 그냥 가버린 거야?’시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유건이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연의 온몸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정말... 끝난 걸까?’ 무기력한 체념이 밀려오고, 그녀의 마음속은 새까맣게 비어버린 듯했다. 시연은 마침 잘못을 저지르고 버림받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웠고, 무서웠다. “형수님!”지한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멍하니 계시면 어떡해요! 형님 진짜 화나셨어요!”“지금 안 따라가면... 후회할지도 몰라요!”“아... 네!” 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바로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발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천천히요.” 지한이 팔을 내밀었다. 시연은 지한의 손을 잡고 균형을 잡으며 슬리퍼를 신었다.그때, 시연의 시선이 강수희에게 향했다. ‘왜... 내가 침대에 있었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수희는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시연아, 어서 가보렴. 고 대표님한테 잘 설명해. 오해일 뿐이잖니?”“네...” 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유건이 먼저니까 무조건 그를 잡아야 했다.하지만 병실을 나서자 유건의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형님, 본가로 가셨어요. 형수님도 어서 타세요.”“알겠어요.”...본가에 도착하자, 왕성애가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사모님, 도련님이랑 싸우셨어요? 도련님 얼굴이... 귀신 본 사람보다 더 창백하더라고요. 도련님의 그렇게 화난 얼굴을 본 게... 몇 년 만인지 몰라요.”시연은 말없이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다른 남자랑 침대에 있던 걸 들켰다’라고 할 수도 없잖아.’유건이 화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상상 이상으로 격렬했을 터.“이모님, 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얼른 가봐요.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얘기만 잘하면 다 풀릴 거예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마주 내려오던 가사도우미들의 손에 익숙한 화분이 들려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