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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Author: 임공
“고... 고 대표님...”

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

“제... 예명은 시연이에요.”

뚝-

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시연... 시연이라니...’

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

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

“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

“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

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

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

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

“네, 고 대표님.”

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

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

“고... 고 대표님?”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

“너, 누구야?”

“네...?”

“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

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네...?”

“꺼지라고.”

쾅!

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꺅!”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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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안 돼!!’강수희는 숨을 들이켰다. 놀라움, 당혹, 불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떠올랐다.“시연아, 넌 우리 은범이를 그렇게 아꼈잖아. 은범이 곁을 밤새워 지키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아무 감정이 없다고?”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제가 은범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이었어요.”“그렇게 말하지 마.” 강수희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아냐... 날 원망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너희 사이 갈라놓았던 거, 다 인정할게.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절대 방해 안 할게. 아니다... 아예 안 보이게 사라질게. 너만 은범이 옆에 있어 준다면...”“사모님.”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막아섰다. “그만 말씀하세요. 저는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젠, 정말로... 아니에요.”강수희는 마치 뺨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너희 둘, 그렇게 사랑했는데...”“그건 과거일 뿐이에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요.”그 말에, 강수희는 말문이 막혀 굳어버렸다. 시연은 한 박자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사모님의 부탁으로 잠시 은범이 곁에 있어 줄 순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일시적인 거예요. 제가 다시 떠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때 또 무너지면, 은범이는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은범이는 스스로 일어나야 해요. 온 세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떠나도 견딜 수 있어야... 그게 진짜 회복이에요.”시연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가방을 메고, 마지막으로 강수희를 바라봤다.“사모님, 전 오늘 은범이 병실에 들어가지 않을게요. 제 존재가 지금 은범이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니까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지하철에서 내리자, 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할아버지의 전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3화

    “그 말...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시연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교수님한테...” 강수희는 급히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우주 진료 보던 그 정신과 교수님. 그분이 직접 말했어, 네가 은범이한테 도움이 된다고.”“맞아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천천히 손을 빼냈다.“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원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신 거지, 제가 원치 않음에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은 안 하셨을 거예요.”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아이... 너무 똑똑하네.’맞는 말이었다. 심재규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시연이 원할 경우에만’이라고.하지만 아들이 스스로 생을 끊으려 했던 그날 밤은 겪은 순간부터, 강수희의 모든 이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앞으로 치료받는 동안 은범이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이번엔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까?또 그다음엔? 그땐 정말,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강수희는 더 이상 아들의 생명을 ‘확률’에 걸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결국 시연이 곁에 있는 것이었다.“시연아... 너랑 은범이, 한때 사랑했던 사이잖니. 정말... 정말 이렇게 외면할 수 있어?”그 한마디로, 시연을 ‘사람 생명을 외면한 냉혈한’으로 몰아붙였다.‘나를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이 감정에, 죄책감에, 죄의식에.’하지만 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을 조용히 쥐며 입을 열었다.“제가 은범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은범이의 상태가 좋아지고, 나아지게 된다면... 좋죠. 하지만... 그다음은요?” “다음...?”“네, 제가 언젠가 자리를 뜨게 되면요?”급격히 표정이 굳은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엔, 안타까움도, 체념도 섞여 있었다.“사모님, 전 결혼했어요. 그리고 은범이와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요.”“그... 그건...”강수희가 다급히 말을 덧붙이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2화

    지하는 여자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걸음을 천천히 맞추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진아는 입을 벌렸다.‘세상에...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저 양반.’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좋았어, 이거 한 장만 박제해 두자. 다음에 또 장난치면 바로 보여줘야지.”그녀는 그 장면을 확대하여 정확히 프레임에 넣었다.찰칵- 사진을 찍고는 핸드폰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여자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나, 저 여자 어디서 봤지?’...그 시각, 시연의 집.시연은 느지막이 일어나, 진아가 남겨두고 간 국을 데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시연아! 은범이가 깨어났어!]“정말요?”시연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정말 다행이에요. 어때요? 상태는?”[훨씬 나아졌대. 교수님도 그러시더라, 기적 같다고.]‘진짜로... 다행이다.’그 순간, 시연의 가슴 깊이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무거웠던 짐 하나가 내려간 듯했다.[시연아, 시간 괜찮으면 병원에 들러줄래? 은범이가 널 보면 정말 기뻐할 거야.]잠시 망설였지만, 시연은 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확인할 건 해야지.’“네, 오늘 쉬는 날이라 금방 갈게요.”[정말? 정말 고맙다!]강수희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우리 기다리고 있을게.]“네.”...병원.병실 앞. 강수희는 병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시연이 오기를 기다린 듯한 얼굴이었다.“시연아!”그리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친근하게 웃으며, 팔짱까지 끼는 모습. 이전과는 딴판이었다.“어제 일은 잘 해결됐지? 고 대표님이랑도... 잘 풀었어?”너무도 티 나는, 의도된 질문.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문제없어요.”“그렇구나...” 강수희의 눈빛에 실망이 그대로 비쳤다. ‘생각보다... 잘 안됐구나’하는 반응이었다“그럼 들어가자. 은범이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1화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0화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39화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38화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37화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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