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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Penulis: 임공
시연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을 때,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중년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장소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 별거 아닌 연예인 주제에 날 무시해?! 내가 너랑 결혼해 주겠다는데도 날 밤새워 기다리게 한 거냐고!”

소미는 간신히 굴욕을 참아냈다.

‘이 진 대머리가 이런 핑계로 여자를 농락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설령 저 사람이 정말 결혼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여자 입장에서 그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

‘하... 내가 얼마나 재수가 없었길래 저 남자의 눈에 띈 거야?’

‘부모님께서는 나를 아끼는 마음에 지시연한테 대신 가라고 하셨지만...’

‘지시연이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장미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지동성도 설설 기며 말했다.

“맞습니다, 화 푸십시오, 진 사장님.”

“화를 풀라고?”

진광수는 분노를 삼킬 수 없었다.

“웃기는 소리! 장소미 씨가 원하지 않는 이상, 나도 억지로 할 생각은 없어! 그냥 파산하고 감옥에 갈 준비나 하는 게 좋을 거야!”

몸을 일으킨 그가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다가 시연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진광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 집 계집애길래 이렇게 예쁜 거지?’

시연은 화장기가 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청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탄력 있는 피부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짙은 이목구비를 가진 전형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가씨는 누구?”

시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진 사장이구나.’

‘어젯밤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 남자가 훤칠한 키에 탄탄하고 힘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 눈앞의 이 사람은 절대 아니었단 말이지!’

‘우리 우주를 위해서 존엄과 순결을 바쳤는데... 상대를 잘못 찾았던 거야?’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어젯밤의 그 ‘진 사장’은 조금 이상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러면 뭐 해?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었는걸...’

장미리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정당치 못한 중매꾼 역할을 시작했다.

“진 사장님, 제 막내딸인 시연입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G시에서 저희 막내딸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장소미도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지시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광수가 소미를 마음에 들어 하는 상황에서도 지동성 부부는 지시연을 진광수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정말 그러네!”

진광수가 연거푸 칭찬했다.

장미리가 마음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진 사장님, 시연이는 아직 남자 친구가 없습니다. 사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시연이를 아내로 삼는 건 어떠신지...”

“나랑 어울릴 것 같긴 하군. 그럼...”

진광수가 거리낌 없이 시연을 훑어보며 더욱 만족스러워했다.

“오늘 저녁에 데리러 올 테니 우선 한번 해보자고. 다시는 실수하지 말고!”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까요!”

진광수가 떠나자 시연이 창백한 얼굴로 지동성을 바라보았다.

“또 저를 팔아넘기시려고요?”

막 입을 떼려던 지동성을 장미리가 막아섰다.

“팔아 넘기다니? 널 여태 키워 놨는데, 이 정도 힘은 보태야 하지 않겠니? 오히려 진 사장이 널 원하는 걸 다행히 여겨야 한다고!”

말을 끝나자마자 장미리가 소미에게 지시했다.

“당장 방문을 걸어 잠그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

“알겠어요, 엄마.”

“아빠!”

시연은 이를 악물고 지동성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장미리는 내 계모지만, 아빠, 아빠는 제 친아빠잖아요!’

시연도 지동성이 자신을 향한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아버지’를 생명의 지푸라기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그래도 한 번쯤은 날 도와주지 않으실까?’

그러나 지동성은 시연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등을 돌리며 딸을 무시할 뿐이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거라. 설마 네 아버지가 파산하고 감옥에 가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소미가 시연을 잡아당겼다.

“가자고!”

“이거 놔!”

시연이 노발대발하며 소미를 뿌리쳤다.

“내 발로 갈 거야!”

소미는 시연의 뒤를 바짝 쫓아 2층까지 올라왔고, 방문을 열어 시연을 밀어 넣고는 눈을 부라리며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야, 나대지 좀 마.”

“지우주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치료가 지체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텐데 말이지.”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방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시연은 한스러워서 온몸을 떨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우주를 개의치 않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우주는 누나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정말로 또 내 몸을 팔아야 해?’

그녀는 벅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엄마, 나 이제 어떡해요?”

어머니는 지시연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의 우주는 겨우 한 살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49재가 지나기도 전에 지동성은 장미리와 장소미를 데리고 시연의 앞에 서서 재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더 우스운 것은 장소미가 뜻밖에도 지동성의 친딸이라는 것이었으며, 시연보다 두 달 일찍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지동성은 일찍이 자기 본처를 배신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시연은 자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엄마가 계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녀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몸을 일으킨 시연이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상자를 하나 꺼냈고, 품에 안더니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상자 안에는 비취 팔찌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전화번호 하나가 적힌 쪽지가 깔려 있었다.

“아직도 이 번호가 연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숫자를 하나씩 눌러 전화를 걸자, 놀랍게도 수화기 너머에서 연결음이 들려왔다!

시연은 긴장감을 느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도 않았고, 엄마도 돌아가셨는데... 날 알아보시려나?’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숨을 깊게 들이마신 시연이 부드럽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고상훈 어르신이세요? 혹시 부명주 씨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저는 그 분의 딸입니다...”

“네, 곧 뵙겠습니다.”

‘세상에나! 나를 단번에 알아보시잖아?’

전화를 끊은 후, 시연은 팔찌를 챙겨 가방에 넣었고, 옷장에 있던 침대 시트 몇 장을 엮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괜찮을 거야, 여기는 2층이고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니니까.’

침대 시트 한쪽을 고정한 시연은 가방을 멘 채 침대 시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고 순조롭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녀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마당을 뛰쳐나가 고상훈이 준 주소를 따라 고씨 저택으로 향했다.

...

주지한이 대표실 문을 열며 말했다.

“형님, 이 집사님께서 오늘 저녁에 오실 거냐고 여쭤보셨습니다.”

고유건이 잠시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갈 거야.”

그는 원래 자기 집인 SKY전원주택단지에 살았지만, 최근 할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아 고씨 저택을 자주 찾던 참이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유건이 물었다.

“시킨 건 어떻게 됐어?”

“누가 형님께 약을 먹인 건지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

지한이 말했다.

“아, 그 여자분은 찾았는데, 연예인이더군요. CCTV에 정면이 찍히지는 않았지만, 호텔 출입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습니다. 본래 진성그룹의 진광수 사장의 방에 들어가려 했다는데... 확실히 그 일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았어요.”

“알겠어.”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아주 두려워하더라니…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부당한 요구를 받았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던 거라고.’

‘하지만 앞으로는 아무도 그 여자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수 없을 거야.’

“그 여자, 이름이 뭐야?”

“장소미입니다.”

지한이 핸드폰을 켜고 유건에게 건네주었는데, 화면에는 장소미의 사진이 있었다.

어젯밤 약물을 섭취한 유건은 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데다가, 불도 켜지 않아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예쁘네.’

‘할아버지의 건강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으셔. 원래도 나의 혼사를 걱정거리로 여기던 분이셨는데, 요즘은 부쩍 더 자주 말씀하시는 것 같고.’

‘나는 같은 피를 나눈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결혼할 상대를 찾지 못했잖아?’

‘물론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혼사를 정했던 약혼녀가 있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그 여자애의 부모와 연락이 끊긴 지 한참 되었다고 난감해하시던 참이었고…’

‘그런데 마침 장소미가 나타난 거야.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이자 내 첫 번째 여자, 그리고 내게 순결까지 준 여자라…’

이렇게 생각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결국 찾았어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원하시던 손자며느리를요!’

“지한아, 장소미의 집으로 가자.”

지씨 자택.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지시연을 데리러 온 진광수가 그녀가 도망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발대발하며 외쳤다.

“나를 물 먹이는 데 재미라도 들린 건가?!”

“저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쓸데없는 소리 좀 집어치워! 이렇게 된 이상, 빈손으로 갈 수는 없겠어!”

진광수는 장소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동생만큼 예쁘지는 않아도 꽤 쓸모가 있겠군! 오늘 밤은 네가 나와 있어 줘야겠어!”

그가 소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안 돼요, 싫어요, 엄마, 아빠!”

놀란 소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진 사장님, 소미는 아직 어려서 사장님을 잘 모시지 못할 겁니다. 시연이가 돌아오면...”

“저리 꺼지지 못해?!”

소미에게 다가가던 장미리가 진광수의 발에 차이고 말았다.

“엄마, 엄마!”

진광수는 끝내 울부짖는 소미를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씨 저택 앞.

검은색 벤틀리 뮬산이 멈춰서자 지한 말했다.

“형님, 여기입니다.”

차에서 내려 천천히 안으로 향하는 유건은 온몸에서 신사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광수가 소미를 잡아당기는 것을 본 순간, 뼛속에서부터 음침한 포악함이 폭발하는 듯했다.

‘저 새X가 감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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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연은 진아의 집에 하루 종일 머무르다가 저녁에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가방을 메고 외출했다. 오늘 밤, 그녀는 해야 할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18세가 된 이후, 장미리는 시연에게 일절 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연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했다. 비록 그녀는 고유건이 준 카드로 우주의 치료비를 지불했으나, 그 외의 비용은 지출할 생각도 없었고, 지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연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BLUE’였다.‘BLUE’은 G시의 유명한 재벌 마사지 클럽으로서 재벌들의 사치스러운 유흥업소라고 할 수 있었다. 시연은 이곳에서 안마사와 침구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임상의학이 전공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하여 특별히 한의학의 안마와 침구에 대한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했고, 자격증까지 수료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 자체가 바쁘기 때문에 임시직으로 아르바이트했으며, 손님의 수와 서비스 시간에 따라 임금을 계산하고 정해진 출퇴근 시간조차 없었다. 정규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입이었지만, 시연은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물론 호의적이지 않은 손님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시연은 늘 유연하게 대처했다. 시연은 출근할 때 찍어야 할 직원 카드를 스캔한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매니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시연아, 손님 오셨다!” “네, 바로 갈게요!”그녀는 서둘러 안마와 침술에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나와 객실로 달려갔다. 한 명의 손님에게 서비스를 마친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손님, 안녕히 가세요. 오늘 밤에는 푹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복도의 다른 한쪽 끝,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유건은 주지한을 따라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한이 물었다.“형님, 왜 그러십니까?” “지한아, 봐봐, 저게 누구야?” 유건의 어조는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낯빛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9화

    “지한아, 비켜.” 지한을 밀쳐낸 유건은 조금 전의 분노를 가라앉힌 채, 다시 평소와 같은 무덤덤하고 고고한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무슨 일이야?” “고유건 씨가 절 해고하게 시킨 거예요?” “그래, 맞아.” 그가 시연을 힐끗 쳐다보았다.“대답이 됐니? 지한아, 가자.” “예, 형님...”“잠시만요!”시연이 재빨리 두 걸음 뛰어서 유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잘못했어요!”시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비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결혼으로 저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내가 고유건을 건드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건 간과했으니까!’‘내가 주제넘은 짓을 한 거야!’ “제발요, 해고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이 일은 제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그녀는 의과대학 마지막 학기의 실습 과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는 급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르바이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시연이 짙은 안개가 낀 눈빛으로 간청했다. “제가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혼할게요, 동의할게요. 고...”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껏 움켜쥐었다. “네가 이혼을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거야?” 분노가 극에 달한 유건이 온몸에서 포악한 기운을 발산하며 말했다. “네까짓 게 감히 몇 번이나 날 건드려?! 겁은 지나가던 개나 줘버린 거야?!” 이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뿌리쳤다.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하지만 시연이 다시 그를 막았다.“고유건 씨!”유건이 눈살을 찌푸렸다.“꺼지라니까?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괜히...”시연은 그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는 사는 것만으로도 힘든 사람이에요. 저는 정말 이 일이 필요해요...” 음침하고 냉담한 얼굴의 유건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0화

    아르바이트가 없어졌으니, 지시연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했으며, 가능한 한 빨리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시연이 예상한 바와 같이, 그녀는 실습 업무 자체로도 매우 바빴고, 시간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시연은 일주일간 틈틈이 일자리를 찾았는데, 배가 고프면 빵을 두 입 먹을 뿐이어서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그녀는 오늘도 야근하고 나서 일자리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시연아.”같은 실습의인 주하은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오준수 선생님께서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시연은 멍해졌다.“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알아?” “모르겠어.”주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만 채혈하러 가봐야 해. 너도 얼른 가봐.” “그래, 알겠어.”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날이랑 상황이 비슷한 것 같은데...’ 그녀는 곧바로 오준수의 사무실로 갔다. 오준수는 전문의이자 의대 실습의의 총책임자였다. 시연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오 선생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녀를 한 번 바라본 오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약간의 의혹을 품은 채 입을 열었다.“시연아, 병원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너더러 실습이 중지됐으니까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하더라.” 시연이 온몸을 떨며 눈동자를 움츠렸다. “왜... 요?”오준수가 고개를 저었다.“글쎄다, 학교 측에 물어보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만 돌아오더라고.” 총책임자이던 그는 시연이 실습의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론이든 수술 실습이든, 흠잡을 데가 없는 학생이었는데...’오준수도 곤혹스러워했다.“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감도 안 오는 거야?” ‘제가 무슨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시연은 갑자기 심장이 꽉 조이는 듯했다. ‘틀림없이 고유건의 짓이야!’ 시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병원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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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23화

    “은범이?”진짜 노은범이었다!“시연아, 괜찮...”은범이 갑자기 신음을 내뱉었다. 잘생긴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며 고통에 찬 표정을 지었다.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형수님!!”기환은 구조 요청 소리를 듣자마자 빛처럼 달려왔다. 화살처럼 뛰어 들어와 단숨에 칼을 든 남자를 제압했다.“가만있어! 움직이지 마!”기환은 순식간에 그 남자를 바닥에 눌러 제압했고, 피 묻은 칼이 남자의 손에서 떨어졌다.기환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단 몇 분,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형수님 다쳤다니?!’“형수님, 어디 다치셨어요?”“아, 아니에요. 난 괜찮아요.”시연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은범에게 돌렸다.은범은 왼쪽 허리를 부여잡고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선홍빛 피가 흘러내렸다.시연은 즉시 판단을 내렸다.“은범아, 너 당장 응급실로 가야 해! 기환 씨, 도와줘요!”“네! 알겠습니다!”순식간에 병원 내부는 분주해졌고, 은범은 긴급히 응급실로 실려 갔다.마침 응급실 당직 중이던 의사는 시연의 동창인 김현진이었다.“상황은 좀 어때?”“허리에 자창이 있어. 개복 수술로 내부 확인이 필요해.”현진은 은범이 시연과 아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방금 상처를 확인했는데 깊지는 않아. 심각한 문제는 없을 거야.”“고마워.”“별거 아닌데, 뭐. 바로 수술실로 옮길게.”시간을 지체할 틈도 없이, 은범은 응급실에서 바로 수술실로 이송되었다.시연도 은범을 따라 수술실로 향했다....한편, 구석에 있던 기환은 시연을 주시하며 유건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벌어진 일을 보고했다.[칼을 든 남자?]유건의 이마가 깊게 주름졌다.[기환아, 너 요즘 너무 태만해진 거 아니야? 내가 뭐라고 했어? 한순간도 떨어지지 말라고 했잖아.]이 말에 기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옆에서 지한이 나서서 기환을 두둔했다.“형님, 기환이도 사람입니다. 모든 순간을 감시할 순 없죠.”즉, 실수할 수도 있다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22화

    “미안해. 내 잘못이야. 벌 받을게.”...다음 날 아침.시연은 몽롱한 상태에서 손에 간지러운 느낌을 받았다.“뭐 하는 거예요?”그녀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내가 깨운 거야?”유건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곧 나가야 해서 가기 전에 약 한 번 더 발라주려고. 다 바르면 다시 자. 깨어나서도 꼭 스스로 바르고. 하루 네다섯 번 정도.”“귀찮아 죽겠어요!”시연은 이불을 확 댕겨 얼굴을 덮어버렸다.유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지만 다정하게 웃었다.시여의 성격은 그다지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가 기상 후 심한 짜증을 부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잠을 충분히 잤을 때는 괜찮지만, 덜 잤을 때는 아주 예민했다.“안 건드릴게. 푹 자.”...시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오늘은 별다른 업무가 없었고, 강울대병원에 가서 서류만 제출하면 되는 날이었다.그녀는 준비를 마치고 기환의 차에 올라 강울대병원으로 향했다.서류를 제출한 후, 같은 팀 펠로우인 서성안이 그녀에게 근무 스케줄을 건넸다.“이게 우리 과 다음 주 야간 근무 일정이야. 가는 길에 외래 수간호사님께 전해줘.”“알겠어요.”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받아서 들었고, 외과 건물을 나와 외래 진료실로 향했다.그녀는 수간호사에게 스케줄을 전달한 후, 외과 진료실을 한 번 힐끗 바라보았다.오늘은 오준수와 김현진이 외래 근무 중이었다. 역시나 환자들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그때, 기환이 시연에게 달려왔다.“형수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금방이에요. 1분이면 돼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주시거나, 그냥 소리치시면, 제가 바로 달려올게요.”“알겠어요. 빨리 다녀와요.”기환은 늘 시연을 보호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심지어 식사나 화장실 가는 일조차 마음대로 못 할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나 괜찮아요. 여긴 사람도 많잖아요.”“금방 다녀올게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환을 기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21화

    유건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시연을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품속에 가두어, 다시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내 말 안 들려? 내가 절대 아내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왜 날 믿지 않는 거야?”시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고 대표님, 당신이 도덕적 기준을 지킬 거라고 믿어요. 당신의 몸은, 나에 충실할 거라고요.”유건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도덕성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유건을 오래 봐왔기에 시연도 확신할 수 있었다.“하지만, 배신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에요. 마음의 배신도, 배신이에요.”뭔가 어색한 듯, 그녀는 말을 고쳐 잡았다.“아니, 내가 잘못 말했네요. 사실 당신의 마음도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죠.”유건이 시연의 말을 끊었다.“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 양심에 찔리진 않아?” ‘내가 이 여자에게 쏟아온 모든 진심이, 헛것이었단 말이야?!’“그래요.”시연은 솔직히 인정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찔리는 것 같기도 하네요. 당신 마음은 나를 향하긴 했어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유건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완전히 당신을 향한다고 생각할 건데?” ‘나는 진심으로 이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고, 함께 살아가려 했고...’ ‘이 여자와 배 속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야?’“몰라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절호의 순간이 오면, 당신이 다른 이유로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 말이 틀렸나요?” 결국, 그녀는 오늘 밤 유건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유건은 시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베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그런 얘긴 나중에 하고, 약부터 바르자.”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연의 손을 놓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잠시 후, 약을 들고 돌아왔다.“칼에 베인 거야?”시연은 살짝 찡그리며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20화

    ‘애초부터 장소미와 함께 보낼 생각이었겠지.’ 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괜히 헛수고하지 말자.’‘괜히 마음 쓰고 노력해 봤자, 정작 본인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결국 나만 바보 되는 거잖아.’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조용히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조용했던 방 안, 문 쪽에서 철컥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시연은 즉시 몸을 돌려,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환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유건은,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소파 위에 툭 던졌다. ‘맞네, 여기... 저 사람 집이었지?’ ‘내가 문을 잠근다고 해서 이 사람이 못 들어올 리가 없잖아.’ 시연은 순간적으로 잊고 있던 현실을 떠올렸다. 유건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침대 위에 편하게 앉았다. “날 못 들어오게 해? 그럼 난 어디서 자라고?”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 방은 우리 방이야. 반반씩 나눠 써야지.” 시연은 남자를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섰다. “그럼 당신이 여기서 자고, 난 다른 방에서 잘게요.” 그러고는 바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손목이 단단히 붙잡혔다. “손님방은 안 치웠어.” 유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설마, 이 시간에 성애 이모를 깨울 생각이야?” 그 말에, 시연은 순간 망설였다. ‘하긴, 나도 남한테 폐 끼치는 걸 싫어하긴 하는데.’ 하지만 바로 대안을 찾았다. “그럼 서재에서 잘게요.” “안 돼.” 그 순간, 유건이 팔을 당겨 그녀를 품 안에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가슴팍에 파묻힌 시연.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여보, 오늘 내 생일이야. 그냥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지금 이걸... 핑계라고 하는 거야?’ 시연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런 말... 다른 사람한테는 통할지 몰라도, 나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19화

    “알 필요 없어요.” 시연은 아픈 손을 조심스럽게 뺐다. ‘알 필요 없다고?’ 유건의 예리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당신은 내 아내야. 아내가 손을 다쳤는데, 내가 몰라도 된다고?” “그게 뭐 대수인가요?” 시연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지만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전 여자 친구와 생일을 함께 보낸 것도 몰랐는데요?” ‘뭐...? 생일을... 함께 보냈다고?’ 유건은 순간 당황했다. 그보다 더한 기분은, 놀라움이었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시연은 이미 팔을 빼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생일...?’ 유건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가, 곧바로 깨달았다. ‘맞다, 오늘 내 생일이었지.’ 시연이 저녁 약속을 잡았던 이유, 그녀가 오늘 내내 기다렸던 이유. ‘시연이는...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유건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곧장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전화기 너머로 기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알고 있었어?” 유건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연이가... 내 생일 챙기려고 했던 거.” [네, 알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유건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기환은 짧은 침묵 후, 솔직하게 답했다. [형수님께서 형님께 직접 깜짝선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았던 거죠.]유건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요 형님... 혹시... 선물 이야기는 들으셨나요?]“선물?” [아... 형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제가 말하면, 그 마음을 망치는 거 아닐까요?]유건은 그 말을 듣자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기환은 한 가지 더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형수님께서 정말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직접 손으로 만든 거예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18화

    시연은 계속해서 국수를 먹었지만, 전혀 유건을 쳐다보지 않았다. 유건은 속이 쓰렸다. 그리고 시연을 한밤중까지 기다리게 한 자기 잘못을 확실히 인정했다. “내일 저녁은 어때? 내가 직접 예약하고 먼저 가 있을게.” “괜찮아요.” 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 남은 매운 단무지 한 조각을 집었다. “마지막 하나네.” “더 가져다줄게.” 유건은 기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반찬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곧바로 깨달았다. 자기는 반찬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걸. 잠시 냉장고를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이모님 부를게.” “됐어요.” “아니야.” 유건은 고집스레 말했다. “당신이 먹고 싶다며?” “그러니까, 됐다고요.” 시연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왜 그래요?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게 해줘요.” 여자의 말속에 분명한 불만이 묻어 있었다. ‘많이 화났구나...’ 유건은 결국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알겠어. 당신 말대로 할게.” 시연은 다시 젓가락을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왜 계속 쳐다봐요? 배고픈 거예요? 저녁 안 먹었어요?” 유건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먹었어.” “먹었군요.” 시연이 잠시 멈칫하더니, 작은 웃음을 흘렸다. 유건은 순간 깨달았다. ‘아차, 또 실수했어!’ 그렇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 “미안해.” 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사과하는 것 외에는. 그러나, 그 사과조차도 공허할 뿐이었다. 시연은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면을 다 먹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요.” 말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유건은 얼른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그녀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17화

    그런 유건을 보면서 소미는 바로 눈치챘다. 지금 남자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소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응.” 유건은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소미 씨. 지금 당장 가봐야 해.” “미안하긴요.” 소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린 오랜 친구인데, 그런 걸로 사과할 필요 없어요. 급한 일 있으면 얼른 가요.” 유건은 그녀의 배려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조심해서 가요!” 소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손안에 쥔 나비 머리핀을 서서히 꽉 쥐었다. ...차 안. 지한은 운전석에서 전화를 걸었다. “기환아, 형수님을 꼭 붙잡아 둬. 형님, 지금 가는 중이야.” 기환이 난감한 목소리로 답했다.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러나 통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시연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갔다. 기환은 순간 당황하며 급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형수님, 형님 곧 도착하십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시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늦었어요. 식사 시간도 훌쩍 지났으니, 저도 이제 들어가 봐야죠.” 기환은 속수무책이었다. ‘형수님을 강제로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결국, 한숨을 삼키며 시연을 따라 차에 올랐다. ‘형님이 실수하신 건 맞지...’‘아무리 바빴다고 해도, 임신 중인 형수님을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기환은 차를 몰며 지한에게 전화를 걸까 고민했지만, 마땅한 변명이 없었다. ‘오늘은... 형님이 잘못하신 거야.’ 두 사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건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건 텅 빈 테이블,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 치우지 않은 식기들.그리고... 텅 빈 의자.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고, 바로 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16화

    그날, 지한이 다녀온 후, 직접 유건에게 보고했다.유건이 남긴 선물이 이미 ‘나비 공주'의 손에 무사히 전달되었다고.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유건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해외로 나가 치료받았다. 그는 반년 동안 앞이 보이지 않았고, 또다시 반년을 걸려 치료받고서야 성공했다. 유건은 그렇게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그것이 ‘나비 공주’가 가져다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아이가 날 지켜준 덕분에 시력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시력을 되찾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비 공주’를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비 공주’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그녀가 살던 집은 텅 비어 있었고, 그 후로도 ‘나비 공주’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소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걸 보며, 유건의 눈가가 뜨겁게 붉어져 왔다. ‘설마... 정말 유건 씨가...?’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손에 쥐고 있던 나비 머리핀을 소미 앞에 내밀었다. 소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애린 언니가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이걸 왜 유건 씨가...?”유건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원래 내 것이었어.” ‘만약 장소미가 진짜 나비 공주라면,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거야.’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공기마저 조용해진 듯했다. 소미의 눈에 혼란과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입술이 떨리면서도 몇 번이나 말하려다 멈추었다. “유건 씨... 당신...!” 그녀는 숨이 가빠진 듯, 겨우 말을 꺼냈다. 유건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여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소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달라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 순간, 유건의 숨이 멎었다. ‘그때 내가 남겼던 말을 장소미가 기억하고 있어.’ ‘그렇다면... 맞아.’ ‘진짜 ‘나비 공주’가... 장소미인 거라고.’ 유건은 미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415화

    과거의 기억이 순식간에 유건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그것은 유건이 아직 어리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해, 그는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충격으로 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 유건은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고상훈은 세계적인 명의들을 불러 치료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누구도 극 시력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앞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세상이 영원히 어둠뿐일 거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 사실은 소년이던 유건에게 아주 가혹한 선언이었다...그 시절의 유건은 극도로 예민하고 난폭했다.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고상훈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의 소통을 거부했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무시했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화를 냈다. 그저 모든 것이 짜증 났다.간병인과 가사 도우미들에게도 끊임없이 신경질을 부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어두운 사람이 되어 갔다. 고상훈은 그런 손자를 안타까워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최대한 그의 뜻을 존중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건은 조용한 회복을 위해 도심에서 떨어진 별장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나비 공주’와 처음 만났다. ‘나비 공주’는 유건의 옆집에 살고 있었다. 두 집은 높은 담장을 두고 연결되어 있었고, 그녀는 자주 그 담장을 넘어오곤 했다. 두 사람과의 첫 만남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유건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데, 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걸까...?’ 그때, 익숙하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비 오는데 왜 거기 앉아 있어? 감기 걸릴지도 몰라!” 유건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나는 볼 수도 없는데.’ 그가 반응하지 않자, 소녀는 다급한 듯 담장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잠시 후, 소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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