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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임공
시연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을 때,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중년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장소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 별거 아닌 연예인 주제에 날 무시해?! 내가 너랑 결혼해 주겠다는데도 날 밤새워 기다리게 한 거냐고!”

소미는 간신히 굴욕을 참아냈다.

‘이 진 대머리가 이런 핑계로 여자를 농락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설령 저 사람이 정말 결혼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여자 입장에서 그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

‘하... 내가 얼마나 재수가 없었길래 저 남자의 눈에 띈 거야?’

‘부모님께서는 나를 아끼는 마음에 지시연한테 대신 가라고 하셨지만...’

‘지시연이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장미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지동성도 설설 기며 말했다.

“맞습니다, 화 푸십시오, 진 사장님.”

“화를 풀라고?”

진광수는 분노를 삼킬 수 없었다.

“웃기는 소리! 장소미 씨가 원하지 않는 이상, 나도 억지로 할 생각은 없어! 그냥 파산하고 감옥에 갈 준비나 하는 게 좋을 거야!”

몸을 일으킨 그가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다가 시연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진광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 집 계집애길래 이렇게 예쁜 거지?’

시연은 화장기가 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청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탄력 있는 피부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짙은 이목구비를 가진 전형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가씨는 누구?”

시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진 사장이구나.’

‘어젯밤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 남자가 훤칠한 키에 탄탄하고 힘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 눈앞의 이 사람은 절대 아니었단 말이지!’

‘우리 우주를 위해서 존엄과 순결을 바쳤는데... 상대를 잘못 찾았던 거야?’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어젯밤의 그 ‘진 사장’은 조금 이상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러면 뭐 해?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었는걸...’

장미리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정당치 못한 중매꾼 역할을 시작했다.

“진 사장님, 제 막내딸인 시연입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G시에서 저희 막내딸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장소미도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지시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광수가 소미를 마음에 들어 하는 상황에서도 지동성 부부는 지시연을 진광수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정말 그러네!”

진광수가 연거푸 칭찬했다.

장미리가 마음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진 사장님, 시연이는 아직 남자 친구가 없습니다. 사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시연이를 아내로 삼는 건 어떠신지...”

“나랑 어울릴 것 같긴 하군. 그럼...”

진광수가 거리낌 없이 시연을 훑어보며 더욱 만족스러워했다.

“오늘 저녁에 데리러 올 테니 우선 한번 해보자고. 다시는 실수하지 말고!”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까요!”

진광수가 떠나자 시연이 창백한 얼굴로 지동성을 바라보았다.

“또 저를 팔아넘기시려고요?”

막 입을 떼려던 지동성을 장미리가 막아섰다.

“팔아 넘기다니? 널 여태 키워 놨는데, 이 정도 힘은 보태야 하지 않겠니? 오히려 진 사장이 널 원하는 걸 다행히 여겨야 한다고!”

말을 끝나자마자 장미리가 소미에게 지시했다.

“당장 방문을 걸어 잠그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

“알겠어요, 엄마.”

“아빠!”

시연은 이를 악물고 지동성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장미리는 내 계모지만, 아빠, 아빠는 제 친아빠잖아요!’

시연도 지동성이 자신을 향한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아버지’를 생명의 지푸라기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그래도 한 번쯤은 날 도와주지 않으실까?’

그러나 지동성은 시연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등을 돌리며 딸을 무시할 뿐이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거라. 설마 네 아버지가 파산하고 감옥에 가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소미가 시연을 잡아당겼다.

“가자고!”

“이거 놔!”

시연이 노발대발하며 소미를 뿌리쳤다.

“내 발로 갈 거야!”

소미는 시연의 뒤를 바짝 쫓아 2층까지 올라왔고, 방문을 열어 시연을 밀어 넣고는 눈을 부라리며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야, 나대지 좀 마.”

“지우주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치료가 지체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텐데 말이지.”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방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시연은 한스러워서 온몸을 떨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우주를 개의치 않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우주는 누나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정말로 또 내 몸을 팔아야 해?’

그녀는 벅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엄마, 나 이제 어떡해요?”

어머니는 지시연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의 우주는 겨우 한 살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49재가 지나기도 전에 지동성은 장미리와 장소미를 데리고 시연의 앞에 서서 재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더 우스운 것은 장소미가 뜻밖에도 지동성의 친딸이라는 것이었으며, 시연보다 두 달 일찍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지동성은 일찍이 자기 본처를 배신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시연은 자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엄마가 계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녀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몸을 일으킨 시연이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상자를 하나 꺼냈고, 품에 안더니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상자 안에는 비취 팔찌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전화번호 하나가 적힌 쪽지가 깔려 있었다.

“아직도 이 번호가 연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숫자를 하나씩 눌러 전화를 걸자, 놀랍게도 수화기 너머에서 연결음이 들려왔다!

시연은 긴장감을 느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도 않았고, 엄마도 돌아가셨는데... 날 알아보시려나?’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숨을 깊게 들이마신 시연이 부드럽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고상훈 어르신이세요? 혹시 부명주 씨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저는 그 분의 딸입니다...”

“네, 곧 뵙겠습니다.”

‘세상에나! 나를 단번에 알아보시잖아?’

전화를 끊은 후, 시연은 팔찌를 챙겨 가방에 넣었고, 옷장에 있던 침대 시트 몇 장을 엮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괜찮을 거야, 여기는 2층이고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니니까.’

침대 시트 한쪽을 고정한 시연은 가방을 멘 채 침대 시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고 순조롭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녀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마당을 뛰쳐나가 고상훈이 준 주소를 따라 고씨 저택으로 향했다.

...

주지한이 대표실 문을 열며 말했다.

“형님, 이 집사님께서 오늘 저녁에 오실 거냐고 여쭤보셨습니다.”

고유건이 잠시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갈 거야.”

그는 원래 자기 집인 SKY전원주택단지에 살았지만, 최근 할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아 고씨 저택을 자주 찾던 참이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유건이 물었다.

“시킨 건 어떻게 됐어?”

“누가 형님께 약을 먹인 건지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

지한이 말했다.

“아, 그 여자분은 찾았는데, 연예인이더군요. CCTV에 정면이 찍히지는 않았지만, 호텔 출입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습니다. 본래 진성그룹의 진광수 사장의 방에 들어가려 했다는데... 확실히 그 일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았어요.”

“알겠어.”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아주 두려워하더라니…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부당한 요구를 받았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던 거라고.’

‘하지만 앞으로는 아무도 그 여자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수 없을 거야.’

“그 여자, 이름이 뭐야?”

“장소미입니다.”

지한이 핸드폰을 켜고 유건에게 건네주었는데, 화면에는 장소미의 사진이 있었다.

어젯밤 약물을 섭취한 유건은 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데다가, 불도 켜지 않아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예쁘네.’

‘할아버지의 건강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으셔. 원래도 나의 혼사를 걱정거리로 여기던 분이셨는데, 요즘은 부쩍 더 자주 말씀하시는 것 같고.’

‘나는 같은 피를 나눈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결혼할 상대를 찾지 못했잖아?’

‘물론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혼사를 정했던 약혼녀가 있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그 여자애의 부모와 연락이 끊긴 지 한참 되었다고 난감해하시던 참이었고…’

‘그런데 마침 장소미가 나타난 거야.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이자 내 첫 번째 여자, 그리고 내게 순결까지 준 여자라…’

이렇게 생각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결국 찾았어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원하시던 손자며느리를요!’

“지한아, 장소미의 집으로 가자.”

지씨 자택.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지시연을 데리러 온 진광수가 그녀가 도망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발대발하며 외쳤다.

“나를 물 먹이는 데 재미라도 들린 건가?!”

“저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쓸데없는 소리 좀 집어치워! 이렇게 된 이상, 빈손으로 갈 수는 없겠어!”

진광수는 장소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동생만큼 예쁘지는 않아도 꽤 쓸모가 있겠군! 오늘 밤은 네가 나와 있어 줘야겠어!”

그가 소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안 돼요, 싫어요, 엄마, 아빠!”

놀란 소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진 사장님, 소미는 아직 어려서 사장님을 잘 모시지 못할 겁니다. 시연이가 돌아오면...”

“저리 꺼지지 못해?!”

소미에게 다가가던 장미리가 진광수의 발에 차이고 말았다.

“엄마, 엄마!”

진광수는 끝내 울부짖는 소미를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씨 저택 앞.

검은색 벤틀리 뮬산이 멈춰서자 지한 말했다.

“형님, 여기입니다.”

차에서 내려 천천히 안으로 향하는 유건은 온몸에서 신사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광수가 소미를 잡아당기는 것을 본 순간, 뼛속에서부터 음침한 포악함이 폭발하는 듯했다.

‘저 새X가 감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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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연은 진아의 집에 하루 종일 머무르다가 저녁에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가방을 메고 외출했다. 오늘 밤, 그녀는 해야 할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18세가 된 이후, 장미리는 시연에게 일절 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연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했다. 비록 그녀는 고유건이 준 카드로 우주의 치료비를 지불했으나, 그 외의 비용은 지출할 생각도 없었고, 지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연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BLUE’였다.‘BLUE’은 G시의 유명한 재벌 마사지 클럽으로서 재벌들의 사치스러운 유흥업소라고 할 수 있었다. 시연은 이곳에서 안마사와 침구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임상의학이 전공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하여 특별히 한의학의 안마와 침구에 대한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했고, 자격증까지 수료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 자체가 바쁘기 때문에 임시직으로 아르바이트했으며, 손님의 수와 서비스 시간에 따라 임금을 계산하고 정해진 출퇴근 시간조차 없었다. 정규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입이었지만, 시연은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물론 호의적이지 않은 손님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시연은 늘 유연하게 대처했다. 시연은 출근할 때 찍어야 할 직원 카드를 스캔한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매니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시연아, 손님 오셨다!” “네, 바로 갈게요!”그녀는 서둘러 안마와 침술에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나와 객실로 달려갔다. 한 명의 손님에게 서비스를 마친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손님, 안녕히 가세요. 오늘 밤에는 푹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복도의 다른 한쪽 끝,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유건은 주지한을 따라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한이 물었다.“형님, 왜 그러십니까?” “지한아, 봐봐, 저게 누구야?” 유건의 어조는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낯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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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한아, 비켜.” 지한을 밀쳐낸 유건은 조금 전의 분노를 가라앉힌 채, 다시 평소와 같은 무덤덤하고 고고한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무슨 일이야?” “고유건 씨가 절 해고하게 시킨 거예요?” “그래, 맞아.” 그가 시연을 힐끗 쳐다보았다.“대답이 됐니? 지한아, 가자.” “예, 형님...”“잠시만요!”시연이 재빨리 두 걸음 뛰어서 유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잘못했어요!”시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비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결혼으로 저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내가 고유건을 건드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건 간과했으니까!’‘내가 주제넘은 짓을 한 거야!’ “제발요, 해고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이 일은 제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그녀는 의과대학 마지막 학기의 실습 과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는 급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르바이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시연이 짙은 안개가 낀 눈빛으로 간청했다. “제가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혼할게요, 동의할게요. 고...”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껏 움켜쥐었다. “네가 이혼을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거야?” 분노가 극에 달한 유건이 온몸에서 포악한 기운을 발산하며 말했다. “네까짓 게 감히 몇 번이나 날 건드려?! 겁은 지나가던 개나 줘버린 거야?!” 이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뿌리쳤다.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하지만 시연이 다시 그를 막았다.“고유건 씨!”유건이 눈살을 찌푸렸다.“꺼지라니까?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괜히...”시연은 그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는 사는 것만으로도 힘든 사람이에요. 저는 정말 이 일이 필요해요...” 음침하고 냉담한 얼굴의 유건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0화

    아르바이트가 없어졌으니, 지시연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했으며, 가능한 한 빨리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시연이 예상한 바와 같이, 그녀는 실습 업무 자체로도 매우 바빴고, 시간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시연은 일주일간 틈틈이 일자리를 찾았는데, 배가 고프면 빵을 두 입 먹을 뿐이어서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그녀는 오늘도 야근하고 나서 일자리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시연아.”같은 실습의인 주하은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오준수 선생님께서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시연은 멍해졌다.“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알아?” “모르겠어.”주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만 채혈하러 가봐야 해. 너도 얼른 가봐.” “그래, 알겠어.”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날이랑 상황이 비슷한 것 같은데...’ 그녀는 곧바로 오준수의 사무실로 갔다. 오준수는 전문의이자 의대 실습의의 총책임자였다. 시연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오 선생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녀를 한 번 바라본 오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약간의 의혹을 품은 채 입을 열었다.“시연아, 병원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너더러 실습이 중지됐으니까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하더라.” 시연이 온몸을 떨며 눈동자를 움츠렸다. “왜... 요?”오준수가 고개를 저었다.“글쎄다, 학교 측에 물어보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만 돌아오더라고.” 총책임자이던 그는 시연이 실습의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론이든 수술 실습이든, 흠잡을 데가 없는 학생이었는데...’오준수도 곤혹스러워했다.“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감도 안 오는 거야?” ‘제가 무슨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시연은 갑자기 심장이 꽉 조이는 듯했다. ‘틀림없이 고유건의 짓이야!’ 시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병원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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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60화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59화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58화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57화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56화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55화

    [흐흑... 흐윽...]전화기 너머로 장미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빠 비서한테 전화 왔어... 회사에서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대! 지금 병원으로 이송됐고,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소미야, 네가 더 가까우니까 먼저 좀 가봐!]“알겠어요, 엄마!”소미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유건 씨... 우리 아빠가 또 쓰러지셨어요...”사정을 들은 유건은 곧장 몸을 일으켜, 여자의 팔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같이 가자. 내가 함께할게.”“네... 유건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으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장미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지동성은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번엔 지난번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지동성은 입원했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담당 교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지금은 경과를 보셔야 합니다.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흑...”병상 옆 의자에 앉은 장미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걸 어쩌면 좋아... 네 아빠, 갈수록 심해지는데... 간이식도 아직 못 받았는데...”갑자기 장미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고 대표님, 간 이식 소식은 아직도 없는 건가요?”이전에 유건은 간 이식 대기자를 대신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직은 연락이 없습니다.”그는 도와주기로 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결국 ‘운’과 ‘순번’이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돈이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흐흑... 흐으...”장미리는 더욱 흐느껴 울며, 소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소미야... 네 아빠, 의식도 없고... 이대로면... 정말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어...”“그럴 리 없어요, 엄마.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미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54화

    여자애는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진짜 살짝만, 살짝만 만져볼게요.”말처럼, 여자애의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와... 아기가 있는 배는 이런 느낌이구나!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엄마 되는 거, 완전 힘든 일인데...”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굴 찾는 건가요?”“저요?”여자애는 손을 거두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혹시 변이준 있어요? 저 보고 오라 그랬거든요.”‘이준 선배님?’“수술 들어가셨어요.”“헉, 진짜요?”여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아싸, 잘됐다!”그 말과 동시에,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선생님, 나중에 변이준이 오면 전해주세요. 저 왔다 갔다고, 없어서 먼저 간다고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벌써 휙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어... 네...”시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여기가 무슨 호랑이굴이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그래도, 궁금했다. ‘저 친구... 선배님이랑 어떤 사이지?’‘여동생일까? 닮은 구석은 없었는데...’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눈에 띄게 수려했다는 정도?’오후 2시쯤, 변이준이 수술을 마치고 내려왔다.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얼굴은 늘 그렇듯 환했다.시연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선배님, 의뢰하신 처방은 이미 내려놨어요. 환자도 약을 복용 중이고요.”“역시, 고마워!”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훑었다. 그때, 시연은 문득 오전 일을 떠올렸다.“아, 맞다. 오늘 오전에 어떤 여자분이 선배님을 찾아왔었어요. 근데 안 계셔서 그냥 간다고 하시던데요?”“그냥... 갔다고?”그 말을 들은 이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하... 그 녀석, 말을 좀 듣고 살면 어디 덧나나...”이준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더 이상 머리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53화

    단 한 마디. 그 말에 시연은 마치 얼음물에 던져진 듯 몸이 굳었다.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따갑지?’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가운 말이 그녀를 후려쳤다.“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냉소가 담긴 웃음이었다.“내가 왜 양석현 교수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것 같아?” “내가 마음이 약해서? 돈이 남아돌아서? 밤에 잠이 안 와서?”순간,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건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아니, 다 아니야. 널 위해서였어. 널 아끼니까, 널 좋아하니까, 돈을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던 거야.”그 말을 끝내고, 유건은 웃었다. 이번엔 대놓고,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근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또 돈을 써야 하지? 지금의 네가, 그럴 가치가 있나? 차라리 그 돈으로 비둘기 밥이나 주는 게 더 낫겠는데?” 시연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가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너랑 엮이는 거, 진심으로 지긋지긋해. 너랑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끝났어.”그는 돌아섰다. 단호하고 차가운 걸음이었다.“유...” 시연은 반사적으로 불러보려 했지만, 목에 걸린 그의 이름은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해...’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마비된 채로.그 순간, 유건이 다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일부러 찾아왔고, 부부였던 정은 있으니까... 지원금은 지한이 통해서 처리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은 없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차로 향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그대로 떠나버렸다.그리고 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가을 오후의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52화

    지한이 보기엔, 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듯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하지만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막 나온 시연은 멀리서 유건과 지한이 정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있다...!’더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시연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유건 씨!”문 앞에서 유건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시연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여자의 걸음은 빨랐고, 숨이 찰 정도로 다급했다. 유건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저 여자... 아직도 안 갔던 거야?’“유건 씨! 잠깐만요!”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거의 뛰다시피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건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뛰고 있어?’ 하지만 곧 속으로 비웃듯 생각했다.‘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유건 씨...” 시연은 겨우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잠깐이면 돼요. 몇 분이면 되는데... 시간 좀 줄 수 있어요?”맑은 눈망울이 간절히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유건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비웃듯 느릿하게 말했다.“신기하네. 네가 먼저 날 찾을 줄은 몰랐거든.”“그게 아니라, 나...”그러나 시연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유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근데 난, 너한테 줄 시간이 없어. 단 1분도.”차가운 눈매, 건조한 말투. 남자의 입꼬리는 비쭉 올라갔지만, 표정엔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단호히 돌아섰다. 그 차가운 뒷모습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혀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던 사람...’유건의 본모습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시연의 몸속으로 한기 같은 게 퍼지며, 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멍하니 유건이 차에 올라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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