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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시연은 유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죠? 그냥 어르신을 잘 설득해 보시는 게...”

하지만 시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말했다.

그는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평온한 어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약 결혼 조건으로 보상도 해줄게요, 돈으로요.”

‘금전적인 보상을 하겠다고?’

멍해진 시연은 차마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 우주는 아직도 치료비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고씨 저택을 찾아간 이유였지.’

시연이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건이 계속해서 말했다.

“지시연 씨가 원하는 대로 드릴게요.”

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눈을 흘기는 유건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조롱이 서려 있었다.

‘고작 돈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정말 보잘것없는 여자잖아?’

‘하지만 오히려 좋아, 앞으로도 다루기 쉬울 테니까.’

“그럼 합의서는 내가 준비할게요. 내일 아침, 신분증과 필요한 서류를 들고 구청으로 오세요!”

“네.”

이튿날 아침, 시연은 구청 입구에서 유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했기 때문에 유건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유건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본 시연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고유건 씨.”

하지만 유건은 시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따라와요!”

“아, 네.”

절차는 빠르게 끝났는데, 혼인관계증명서를 손에 쥔 지시연은 왠지 마음이 복잡했다.

‘생존을 위해 몸을 파는 것도 모자라서, 결혼까지 하다니...’

구청의 입구에는 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유건이 뒤에 있는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요, 기사님이 집까지 데려다 줄 거예요.”

그는 곧장 앞에 있는 차로 향했다.

“형수님.”

주지한은 지시연에게 다가가 카드 한 장을 건네주었다.

“형님께서 주신 겁니다.”

‘바라던 바가 이렇게 빨리 실현되다니!’

시연은 사양하지 않았다.

카드를 건네받은 그녀는 유건을 향한 깊은 감사를 느꼈다.

“감사해요.”

하지만 유건은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이건 거래의 일부일 뿐이야. 고맙다는 말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고.’

“지한아, 이 여자는 네가 ‘형수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이만 가자.”

하지만 시연은 운전기사와 함께 가지고 않았고, 목적지의 주소를 물어본 뒤, 기사를 먼저 가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자폐증 치료 전문 요양병원인 태산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벤틀리 뮬산에 몸을 실은 유건이 지한에게 지시했다.

“소미 씨한테 가서 결혼이 없던 일이 되었다고 전해. 최대한 잘 달래주고,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줘. 꼭 그녀를 만족시켜야 해.”

“네, 형님.”

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카드 거래 명세서였다.

[XXXX 카드 승인, 고*건 님, 40,000,000원 일시불로 결제하였습니다.]

‘카드를 받자마자 이렇게 큰돈을 쓰다니!’

...

태산요양병원에서 나온 시연은 병원 진료비 납입 확인서를 가지고 있던 장부에 집어넣고는 꼼꼼히 메모를 해놓았다.

[XX년 X월 X일, 고유건 씨에게 4,000만 원을 빌렸음.]

시연은 결코 유건에게 공짜로 돈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능력이 없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해서든 꼭 갚을 거야.’

한 가지 걱정거리를 해결한 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동안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던 시연은 갑자기 긴장이 풀리자,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실습의로서 무엇이 문제인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날 밤 그 남자랑 너무 지나친 밤을 보내서 그런지… 이틀간 그곳이 심하게 아프고 출혈까지 있었어. 앞으로도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이네.’

이렇게 생각하자, 시연은 더 이상 지체할 엄두가 나지 않아 즉시 병원에 가서 산부인과에 진료 접수를 했다.

...

같은 시각.

회의 중이던 유건은 지한의 전화를 받았다.

[형님!]

지한이 다급하게 말했다.

[장소미 씨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형님께서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갑자기 쓰러지셔서 지금 급히 병원으로 옮기는 중입니다!]

“지금 바로 갈게!”

병원.

장미리가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불쌍한 우리 딸! 약속했던 결혼이 물거품이 되다니, 억울해서 어째!”

“엄마,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유건 씨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람이에요.”

눈물을 글썽이는 소미는 아주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가 복이 없었던 거죠. 유건 씨, 그래도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유건은 여자가 우는 것을 귀찮게 여기는 사람이었지만, 소미는 그의 첫 여자인 셈이었기에 그는 약간의 인내심을 가져야만 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만... 그 여자와의 결혼은 임시방편이었을 뿐이에요. 절대 그 여자를 향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조만간 이혼할 거고, 소미 씨와 한 약속도 꼭 지킬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요.”

유건이 말했다.

“정말이에요?”

장미리는 곧 울음을 그쳤다.

“고 대표님, 지금 우리 소미를 속이시는 건 아니죠?”

유건은 결코 의심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설령 그 사람이 장소미의 어머니라고 할지라도.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소미가 유건의 옷소매를 잡고 흐느꼈다.

“저는 유건 씨를 믿어요.”

이 말을 들은 유건의 얼굴빛이 누그러졌다.

‘얼마나 억울하겠어.’

‘모든 게 다 지시연, 그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 때문에 내 신용을 잃었다고!’

“푹 쉬어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요.”

“네, 유건 씨의 말대로 할게요.”

소미를 위로한 유건은 서둘러 회사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병원 로비를 지나던 그의 눈에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저 사람은... 지시연?’

‘집으로 가랬더니 왜 여기 있는 거야?’

유건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시연이 한 진료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유건이 고개를 들어 팻말을 확인했다.

[산부인과.]

유건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30분 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 나오던 시연은 유건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시연은 멍해졌다.

“고유건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유건은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산부인과에는 왜 온 겁니까?”

“이건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시연이 눈이 반짝였다.

“고유건 씨는 알 필요 없는... 제 개인적인 일이라고요.”

갑자기 진료실 문이 열리고, 손에 의무기록 사본을 쥔 간호사가 소리쳤다.

“지시연 님, 신청하신 의무기록 사본 챙겨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시연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유건이 한발 앞서 의무기록 사본을 빼앗았다.

놀란 그녀가 발을 구르며 의무기록 사본을 빼앗으려 했다.

“돌려주세요! 보지 마시라고요!”

“내가 보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큰 키라는 장점을 활용한 유건이 의무기록 사본을 펼치자, 시연은 조급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대체 당신이 뭔데요? 제발 보지 마세요!”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황이었다.

순간, 유건의 얼굴이 잿더미처럼 검게 변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천박한 상처야?”

수치심을 느낀 시연이 눈을 질끈 감았는데, 그녀의 얼굴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간호사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남자 친구이신 것 같은데, 여태 그것도 모르셨어요? 정말이지 여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분이시네요. 그쪽이 쾌락을 찾는 동안, 환자분은 그곳이 심하게 찢겨 몇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고요. 사랑하는 여자라면 더 잘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가 등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경험이 많지도 않으면서, 왜 자기 여자 친구한테 그런 쓸데없는 요구를 해?!”

유건은 누군가에게 몽둥이를 맞은 것 같았다.

‘심하게 찢긴 상처? 몇 바늘이나 꿰맸다고? 게다가... 쓸데없는 요구?’

‘허, 정말 얼마나 뜨거운 밤을 보낸 거야?!’

‘내가 이런 여자랑 결혼하게 될 줄이야!’

‘이제 막 결혼했는데, 나한테 이렇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선물하다니!’

‘내가 고작 이런 여자 때문에 소미 씨를 슬프고 억울하게 한 거야?!’

“지시연, 그 어떤 말로도 네 뻔뻔함을 형용할 수는 없을 거야! 알아?!”

유건은 시연을 끌고 갔다.

그의 거센 힘으로 인해 통증을 느낀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당연히 할아버지께 가야지!”

‘막 혼인신고 한 여자가 이미 다른 남자와 첫날밤을 가졌고, 심지어는 수치스러운 상처 때문에 병원까지 방문했으니까!’

고유건은 잠시도 참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께 네가 어떤 여자인지 똑똑히 말씀드려! 이렇게 방탕하게 몸을 굴리는 주제에, 감히 겁도 없이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혼약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먹여?!”

시연은 미안함과 동시에 억울함을 느꼈다.

‘결혼을 원한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니었잖아?’

‘게다가 우리는 계약 결혼을 했을 뿐이고, 실질적인 부부관계와 간섭은 하지 않기로 했어!’

‘우리는 곧 이혼할... 그런 사이라고!’

‘하지만 고유건 씨가 나한테 큰 은혜를 베푼 건 사실이야... 그래,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자.’

병실에 도착한 유건은 시연을 거칠게 안으로 밀쳤다.

“들어가, 가서 네가 어떤 인간인지 할아버지께 직접 말씀드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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