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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작가: 임공
“지시연을 놔줘.”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는 유건은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지한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넘쳐흘렀다.

“예, 형님.”

지한이 황급히 손을 놓았다.

하지만 이런 소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시연은 깨어나지 않았다.

순간, 유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 여자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어쨌든 지시연은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여기 온 거잖아. 나중에 할아버지께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재수가 없는 건 내가 될 거라고.’

‘정말 귀찮은 여자 같으니라고!’

표정이 굳은 유건은 허리를 굽혀 시연을 가로로 안았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려 했다.

그가 시연을 옮기던 찰나, 그녀의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무릎에 있는 두 개의 멍이 드러났다.

‘이게 뭐야?’

유건은 멍해졌다.

‘이래서 어젯밤에 아프다고 한 건가? 근데 이건 어떻게 생기게 된 거지?’

그의 포근한 가슴에 기댄 시연이 놓지 못하겠다는 듯 유건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 중얼거렸다.

“은이야...”

유건은 또 한 번 멍해졌다.

‘은이? 사람 이름이잖아? 여자 이름인 것 같은데...’

‘지시연이 왜 잠결에 여자애 이름을 부르는 거지?’

유건은 그제야 시연의 길고 볼륨감 있는 속눈썹, 모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얼굴, 그리고 분홍빛 도는 입술이 살짝 내밀어진 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이를 본 유건은 잠시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깨어난 시연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고... 유건 씨?”

유건은 마치 감전된 것처럼 손을 풀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선 채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일부러 무섭게 말했다.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내 방문 앞에서 죽지 말고!”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두 걸음 세 걸음 멀어져갔다.

시연은 의아했다.

‘목숨을 저주할 정도로 내가 싫은 거야?’

지한 또한 그녀에게 말했다.

“밤새 많이 추웠을 텐데, 샤워로 추위를 좀 몰아내는 게 좋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이곳의 욕실을 빌려 샤워를 마친 지시연은 지한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형님께서는 청파각에 계세요.]

시연은 단장을 마치고 청파각으로 향했다.

생일 연회는 점심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는데, 점심에는 전통적인 식사 있었고, 저녁에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시연은 유건을 찾아 묵묵히 걸어갔지만, 그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유건은 주지한과 함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은수 프로젝트 말이에요, 한 회장님께서 도대체 어떻게 계획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지한도 거들며 말했다.

“아마 한 회장님을 쉽게 설득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나이의 어르신들은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으시니까요.”

그의 말 속에는 숨은 뜻이 있었는데, 사실 유건이 이번에 이곳을 찾은 것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순간, 시연도 깨달을 수 있었다.

‘고유건은 은수 프로젝트 때문에 여기에 온 거구나!’

“아이고, 저는 한 회장님의 생신 선물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과 공을 들였어요.”

“모든 게 헛수고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은수 프로젝트는 거의 반년이나 지체됐잖아요? 이만큼 했으면 됐어요.”

비즈니스상의 일에는 흥미가 없었던 시연은 끼어들지도 못하고 주스 한 잔을 연거푸 마실 뿐이었다.

“그거 말고...”

컵을 빼앗아 든 지한이 웃으며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

“이거 마시고 몸 좀 녹이세요.”

“감사합니다.”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고, 컵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이 광경을 본 유건은 미소를 짓고 있는 지한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언제부터 저렇게 사이가 좋아진 거지?’

‘설마, 지시연이 우리 지한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지한이는 감정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아이지만, 지시연은 경험이 아주 많잖아?!’

‘안 돼, 저 여자가 지한이랑 너무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 유건이 시연의 손에 있던 컵을 빼앗았다.

“내 옆에 와서 앉아.”

“네?”

경악한 시연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온몸으로 ‘나한테 오지 마라’는 뜻을 내뿜던 유건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왜 그래?”

유건은 서늘하게 시연을 흘겨보았다.

“할아버지께서 불러서 온 거라면서 그렇게 병풍처럼 있을 거야? 내 와이프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아.”

시연은 반 박자 느리게 유건의 뒤를 따라갔는데, 마치 그의 작은 꼬리 같았다.

청파각 홀에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유건은 고씨 집안의 지위와 고상훈의 관계로 인해 한강우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시연은 유건의 왼편에 앉았다.

연회가 시작되자, 유건은 이 테이블의 유일한 후배로서 가장 먼저 잔을 들었다.

“한 회장님, 저희 할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신 관계로 특별히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이 술 한잔에 동해와 남산 같은 복과 건강이 깃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한강우가 웃으며 술을 받았다.

유건은 지한에게 축하 선물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전에 외국에서 구한 200년 역사가 깃든 도자기입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신경 써줘서 고맙다.”

한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그다지 큰 기쁨을 보이지는 않았다.

유건이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 노친네는 너무 다루기 어렵다니까?’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축하 인사를 하며 선물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강우는 줄곧 같은 태도를 보일 뿐, 특별한 기쁨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한강우의 시선이 고유건의 곁에 있는... 시연에게 떨어졌다.

테이블에 있던 모든 사람은 한강우에게 아부하느라 바빴지만, 오직 시연만큼은 음식에 몰두하고 있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어렵군.’

“젊은 아가씨는 어느 가문의 사람이지?”

한강우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시연은 급히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에 있는 것을 삼키며 입을 닦았다.

유건이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먹을 줄만 안다니까? 할아버지께서는 도대체 이 여자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고 생각하신 거야?’

“저는...”

시연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웠다.

“고유건 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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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40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9화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8화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7화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6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5화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4화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3화

    차가 시연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더니, 지한이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시연은 유건을 흘낏 보았다.‘이상하네, 왜 조수석에 앉아 있지?’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또 유건의 차를 타면 점점 엮이게 될 것 같았다.“형수님, 얼른 타세요.” 지한은 차를 움직일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려서 직접 문 열어드려야 합니까?”“아니에요...”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뭐야, 버스 정류장에 세우면 안 되는 거 몰라?”“그러니까! 버스가 못 지나가잖아.”“빨리 가라고!”“벤틀리네, 저런 차를 태워준다는데 안 탄다고?”“재수 없어.”점점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이 오갔다.어쩔 수 없이, 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탔다.“형수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물었다.시연은 대답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건을 바라보았다.‘이거 완전 악연 아니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지?’“형수님.” 지한이 웃으며 유건을 가리켰다. “마침 형님이 차에 계시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요.” 시연은 당황했다. ‘이 둘 뭐 하는 거야?’“이제 목적지 말해주실래요?”지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실은 우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저 한 번 모시고 가는 걸로 부담 갖는 건 아니시죠?”지한의 말에 시연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산신당으로 갈 거예요.”지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유건을 바라보았다.“거기서 볼일 있으세요?”“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 게 있어서요.”‘거기서 뭘 사려는 거지?’산신당은 G시보다 더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사찰뿐만 아니라 재래시장도 있어,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니 말이다.분명 번잡하고 활기차지만, 고급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232화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한테 단 한 번도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지동성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다시 한번 말하마.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돈은 이 아빠가 다 낼게.” 시연은 멍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왜요?”지동성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아버지가 자식한테 돈을 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니?”‘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럼 그때 우주의 치료비를 끊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건 누구였더라?’‘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그 중심에 있던 거 아니었나?’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곧이어, 지동성이 말을 이었다.“시연아,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에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구나.”시연은 또다시 얼어붙었다.‘오늘따라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무심결에 튀어나왔다.“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흠.”지동성이 가볍게 기침했다.“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앞으로 몇 번이나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단다. 가족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흘렸다.“아내도 있고 딸도 있잖아요. 가족이랑 매일매일 함께하잖아요?”“시연아.”지동성이 딸의 말을 끊고,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너와 우주도 아빠의 자식이야.”그는 모델 조립에 열중하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아빠의 생일에 와준다면, 네가 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때가 되면 우주의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내가 책임지마.” ‘우주를 빌미로 협박하는 거야?’시연은 본능적으로 떠올렸다.‘로얄호텔에서의 그때도...’그녀는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딸의 반응을 본 지동성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스치는 후회의 눈빛.“아빠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냥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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