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건 씨.”시연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유건의 품에 기댄 그녀는 그의 가슴과 너무 가깝게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심장박동까지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녀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내려주세요, 전 괜찮아요.” “괜찮다고?”유건의 눈동자에는 온통 그윽하고 차가운 기운만이 감돌았다.“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 시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성질이 나쁘고 입이 거친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번 깨달았다.‘잘생긴 얼굴이 아깝단 말이지.’ “정말 괜찮아요, 저는 그냥... 배가 고플 뿐이에요. 저혈당이라서 다리에 힘이 없네요.” “그럼 밥 먹으러 가자!”병원은 명리산 부근에 있었는데, 산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번거로웠다. 그래서 유건은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외진 곳에 있던 식당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요리도 별로인 것처럼 보였다. 유건이 은근히 짜증스러운 기색을 표했다.“맛있는 게 없네, 이러다가는 대충 한 끼를 때우게 되겠어.” “저는 괜찮아요.”시연은 방금 종업원이 준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다. “배만 채우면 되니까요.” “음식을 안 가리는구나?”유건이 물을 두 잔 따랐고,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직 젊은데 왜 그렇게 몸이 약해?”이 말에는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익숙해져 버린 시연이 설명했다.“건강은 괜찮은데, 저혈당이 있어서 배고픔을 잘 못 견뎌요...” 노크 소리가 들리고, 룸으로 들어온 지한의 손에는 연고가 들려 있었다. “형님, 여기 있습니다.”유건이 연고를 받으며 지한에게 지시했다.“따뜻한 물이랑 수건도 준비해 줘.”“네.”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곧 웨이터가 뜨거운 수건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대표님, 제가 뭘 하면 되나요?”“아무것도요.” 유건은 손을 흔들며 웨이터에게 나가라고 표시한 뒤, 의자를 가리키며 지시연을 향해 말했다.“올려.”‘직접 발라주려는 건가?’ ‘이건 아니지
시연은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유건이 쓰러진 여자친구에게 달려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지금 고유건은 장소미를 만나러 갔고, 내 전화까지 끊었으니 내가 어찌 됐건 상관없다는 말이잖아...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가야겠네.’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떠났다.식당을 나서자 그녀는 어리둥절했다.명리산 일대에 시연은 온 것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녀가 혼란스러운 상태로 차를 타고 온지라 이곳이 이렇게 외진 곳인 줄은 알지 못했다.근처에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차로 오기 때문에 택시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시연은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라 택시 기사들도 시연의 콜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그냥 좀 더 걸어가 보자.’다른 방법이 없어서 시연은 두 다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큰길로 가면 차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계속 걸었다.그러나 식당에서 점차 멀어지자 가로등도 몇 개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게다가 요 며칠 줄곧 비가 와서 도로 상태는 매우 걷기 힘들 정도로 나빴다.시연은 어둠을 더듬어 걷다가 갑자기 발을 헛디뎠다.“무슨 일이지?” 시연은 허리를 굽혀 확인해 보았는데 마치 진흙탕에 빠진 것 같았다.그녀는 발을 빼려고 힘껏 다리를 당겼다. 발이 쑥 빠졌지만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보이지 않았다.잇따른 불운에 시연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큰 길목에 다다랐을 때 시연이 갑자기 발바닥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아...”시연은 비명을 질렀다.잘 보이지 않지만 실습 경험을 통해서 시연은 유리조각이 발바닥을 찌른 것이라고 판단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유리조각을 뽑아냈다. 피가 손을 물들였다....병원, 병실 안.고유건은 장소미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감기로 인한 미열이었다.소미는 창백한 얼굴로 미안해하며 말했다.“유건 씨, 미안해요. 이런 일로 귀찮게 했네요.”“다 내 잘못이에요.”소미
“놔요, 이 손 놓으라고요!”시연은 손이 너무 아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유건의 손은 집게처럼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왜 자꾸 움직여!”유건은 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늘 밤 일은 확실히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자신이 왜 그랬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그도 분명히 시연에게 무척 미안하고 걱정이 되었는데, 그녀가 마세라티에서 내리며 낯선 남자를 향해 웃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나는...”유건이 입을 열어 사과하려고 했다.“지금은 고유건 씨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시연은 유건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까는 나를 버려두고 가놓고, 이제 다시 돌아와서 도리어 화를 내는 건 무슨 경우야?’시연은 팔을 빼서 유건의 손에서 겨우 벗어났고, 균형을 잃고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발바닥의 통증이 갑자기 심해졌다.통증을 참을 수 없어서 그녀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아아...”시연이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 유건도 놀라며 눈살을 찌푸렸다.“또 무슨 수작이야?”시연은 분노하며 말했다.“고유건 씨는 어차피 안 보이잖아요, 제가 어떻든 당신과 상관없어요!”‘이 여자, 내가 쓸데없이 신경 썼군!유건이 떠나려고 몸을 돌릴 때, 시연의 스커트 자락 아래로 붉은 핏물이 묻은 것을 보았다.‘피? 다친 건가?“왜요?”유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다쳤어?”그는 손을 내밀어 확인하려 했다.“내가 볼게...”찰싹!시연은 유건이 내민 손을 쳐냈다.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유건은 눈을 가늘게 떴다.“지시연, 나를 때린 거야?”“아니에요, 그게 아니라...”시연은 당황하여 머리를 가로저으며 순간적으로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그냥 손을 쳐냈을 뿐인데 어떻게 때렸다는 거지?’시연은 유건을 장소미의 남자 친구로 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했을 뿐이었다.유건은 곧장 그녀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지금의 시연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인 왼발에 감긴 천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
시연은 유건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이건 컵라면이에요, 익기를 기다리고 있고요.”‘도대체 무슨 말이지?’‘이 여자, 일부러 내 기분 나쁘게 하려는 건가?’유건은 불쾌함을 참았다. ‘우리 둘의 사이는 비록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여자도 전에 날 크게 도왔으니까.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먹는 이 여자를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데...’‘내가 이 여자한테 분명히 카드를 주었는데도, 왜 일자리를 찾고, 심지어 여기에서 컵라면을 먹을까?’‘일단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자.’“그만 먹어! 라면이 뭐가 맛있어? 내가 다른 거 사 줄게.”“됐어요, 저...”그러나 유건은 곧장 시연을 끌고 식품코너로 갔다.“뭐 먹고 싶어?”시연은 냉담하게 쳐다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말 안 해?” 유건은 잘 생긴 짙은 눈썹을 비틀며 말했다.“그럼 내가 정하지.”유건은 진열대에서 연어초밥, 생우유, 그리고 계란찜을 가져왔다.그는 곧장 계산을 하고 돌아서서 시연에게 먹으라고 건네주었다.“먹어 봐.”시연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도 하지 않고 음식을 받지도 않았다.갑자기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길 건너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이 순간, 시연은 심장 박동이 갑자기 빨라져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비록 뒷모습, 뒤통수만 보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노은범이었어!’그렇다. 이때 노은범의 곁에는 다른 친구 두 명과 함께 있는데, 서로 웃고 떠들며 걸어가면서 점점 멀어졌다.‘그 사람이 돌아왔네!’시연은 갑자기 유건을 밀치며 외쳤다.“좀 비켜주세요!”유건이 산 그 음식들이 갑자기 온 바닥에 흩어졌다.유건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마치 금방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이런 배은망덕한 계집애!’“지시연!”시연은 그를 무시하고 편의점을 뛰쳐나와 다급히 그를 쫓아갔다. “은이야, 은이야...”‘은이야?'시연이 곧바로 뛰어나갔지만 노은범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어디 갔지?’그녀
“맞습니다.”안색이 아주 어두워진 유건의 얼굴을 보고 의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다만, 아직 임신 초기입니다. 3주밖에 안 됐어요. 산모가 저혈당으로 쓰러져서 임신이 확인된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시점에서는 확인이 어려웠을 겁니다.”“허.”유건은 냉담한 눈빛으로 음험하고 차갑게 웃었고, 갑자기 몸을 돌려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지시연, 다 들었어?”시연은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유건은 침을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물었다.“저는...”시연은 자신의 옷깃을 움켜잡고 한동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사실, 지금 시연이 스스로도 매우 놀랐다. ‘임신이라니!’‘로얄호텔에서 그날 밤!’‘그날 밤, 내가 너무 긴장해서 전혀 그 남자가 피임 조치를 했는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어... 돌이켜 보면, 아무 준비도 없었던 것 같아...’‘내가 그래도 의사인데 이런 초보적이고,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다니!’시연이 오랫동안 말이 없자, 유건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고, 소리 없는 조롱이 눈가에 번졌다.“이 아이를 낳겠다고 말할 건 아니지?”‘설령 나와 지시연이 계약 결혼 관계이고 아무리 명목상의 부부일 뿐이지만... 설령 지시연 어머니가 우리 할아버지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더라도... 지시연이 내 아내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어!’‘우리 둘이 이혼하지 않는 한 지시연의 출산은 절대 불가능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유건은 시연이 당장 자신과 이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그리하여 자기 할아버지 고상훈의 체면을 봐서도, 시연이 전에 도와준 것을 봐서, 시연이 원하는 대로 이혼 얘기를 나중에 다시 상의하자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번에 만약에 시연이 감히 뱃속에 그 아이를 낳겠다고 하면 유건은 즉시 시연을 끌고 이혼 수속을 할 생각이었다!한편, 시연의 머릿속도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이 아이를
시연은 요즘 임신으로 인한 걱정이 많아서 무엇을 해도 힘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심지어는 인터넷으로 아르바이트도 찾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자꾸 잡념에 빠지기 쉬웠기 때문에 지시연은 대부분의 시간을 임진아의 곁에서 보냈다. 진아가 돌아오자, 시연이 중얼거렸다.“드디어 왔네! 배고파 죽을 뻔했잖아.”“보자.”진아가 빙그레 웃으며 시연의 가슴을 어루만졌다.“야, 큰일이네, 배가 엄청 고파서 여기도 작아졌잖아!” “하하...”시연이 웃으며 뒹굴었다.“임진아, 너 자꾸 장난칠래?”“빨리 일어나, 나가서 밥 먹자!”“좋아.”두 사람은 강울대 뒤편의 거리로 향했는데, 이곳은 밤이 되면 시끌벅적해졌으며, 작은 것부터 길거리 통닭, 포장마차 음식, 그리고 미슐랭급 식당까지 있는 곳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두 사람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임진아, 지시연, 이런 우연도 있네?”그 사람은 두 사람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창인 우찬이었다. 시연은 미소를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아가 우찬을 힐끗 보았다.“우연? 강울대 학생 중에 여기에 와서 밥을 안 먹는 사람도 있던가?” 진아가 또 우찬을 부추겼다.“이렇게 수준 낮은 대화를 걸다니... 왜, 우리한테 밥이라도 사려는 거야?” 상대방이 놀라서 물러날 거라는 진아의 예상과 달리, 우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살게! 가자!”진아와 시연이 서로를 마주 봤다.‘이게 웬 횡재야?’ “분명히 너한테 반한 거야!” 진아가 작은 소리로 시연에게 말했다.“물론 나한테 반한 걸 수도 있지. 됐어, 그건 신경 쓰지 말자. 어쨌든 공짜로 먹는 밥이잖아? 내가 공짜를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우찬이가 우리를 해치려고 한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일단 가보자!” 진아에게 끌려가던 시연은 거절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우찬은 두 사람을 데리고 새로 개업한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아래층은 홀이고 위층은 룸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시연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진아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뚫린 입이면 다인 줄 알아?!”우찬이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와, 이게 뚫린 입이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일이야? 사실일 뿐이잖아. 그때 전교생이 두 사람을 질투할 정도였는데?”“닥쳐! 그만하지 못해?”“싫은데?”우찬이 일부러 또 물었다.“두 사람, 왜 헤어진 거야? 우리는 너희 사이가 너무 좋아서 너희가 끝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연애에서 결혼까지!” “그건 시연한테 물어봐야지.” 줄곧 말하지 않던 은범이 입을 열며 시연을 바라보았다. “시연이가 결정한 거지, 뭐. 쟤가 먼저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거든.” 툭!갈비 한 조각을 뜯고 있던 시연이 그대로 탁자 위에 갈비를 떨어뜨렸다. ‘너무 방심했어.’ ‘노은범, 대체 뭐라는 거야?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니... 허, 말은 그럴싸하네.’“그래?”우찬은 시연을 잡고 꼬치꼬치 물었다.“시연아, 왜 그랬어? 우리 은범이 어디가 부족해서?” 시연의 마음속에는 떫은 슬픔이 만연했다. 시연이 나른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안 나네. 내 아침밥을 사주지 않아서 그랬나?” 결국, 대답을 얼버무린 셈이었다. 진아도 조차도 이 대답을 듣고 멍해졌다.“하긴.”우찬이 은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여자는 원래 사소한 일로 화를 내는 법이잖아. 은범아, 시연이 말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어. 지금 여자 친구한테는 더 세심하고 자상하게 해주란 말이지.” 국물을 먹던 시연이 또 한 번 멈칫했다. ‘여, 여자 친구가 생긴 건가?’“은범 씨!”그녀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밝은 목소리의 여자가 은범의 이름을 외치며 이쪽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왔어?”은범이 의자를 끌어 그 여자를 앉혔다.“네.”웃으며 은범에게 기대어 앉는 여자의 모습은 작은 새의 모습과 같았다. 그녀가 은범에게 애교를 부렸다.“나 저거 먹을래요! 그리고 국도요! 아 국부터 한
강울대 뒷거리의 포장마차는 밤에 가장 시끌벅적했다.“사장님, 김치볶음밥 2인분 주세요!” 진아가 한 손으로 시연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배를 비비며 불평했다. “다 우찬이 때문이야. 그 녀석 때문에 내가 밥을 먹는 시간이 지체된 거라고!” 시연도 배가 고파서 침을 삼켰다.“진아야, 나는 호두과자가 먹고 싶어.” “그래! 조금 있다가 가서 먹자.”입에서 나오는 대로 승낙한 진아는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의심스럽다는 듯 시연을 훑어보았다. “요즘 먹는 양이 부쩍 많아진 것 같다? 한밤중에도 많이 먹는 것 같던데... 살찔까 봐 무섭지는 않아?”시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란함을 느꼈다. ‘그래, 내가 많이 먹기 시작했다는 걸 나도 느끼던 참이었어. 아마... 배 속에 있는 작은 녀석 때문이겠지?’ “볶음밥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진아가 핸드폰을 꺼내 결제하려 했다. 시연이 급히 말했다.“얼마예요? 제가 입금해 드릴게요.” “됐어...”“내가 입금할 거야!”겨우 1초도 티격태격하지 않았는데, 옆에서 낮고 온화한 목소리로 끼어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제가 계산할게요.” “누구지?”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마주한 두 사람은 즉각 멍해졌다.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노은범의 출중한 옆태는 마치 신처럼 보였다.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저지하는 반응을 보였다.“안 돼! 하지 마...” 하지만 결제 완료 알림은 은범이 이미 지불에 성공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은범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마주했고, 핸드폰을 보이며 말했다.“이미 했어.”하지만 인상을 찌푸린 시연은 별로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밥 한 끼일 뿐이잖아?” 은범은 마음속의 두근거림과 불안을 억지로 눌렀다.“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작은 호의를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또 거절하면 본인을 지나치게 신경 쓴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래, 고마워.”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조금 풀
시연보다 일찍 도착한 유건 일행은 이미 말을 타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주정빈과 유강석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건은 시연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를 본 부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왜 갑자기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말을 타자고 하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기 우리 고 대표님의 아내가 계시네.” 유건은 지하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멈췄다. 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내가 방이 없어서 곤란해하는 거 보고도 안 도와줄 거야?” ‘도와주라고?’ 유건의 입술에 미소가 살짝 번졌지만, 곧 자리를 떴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옆에 딴 남자가 이미 있지.’ “시연아.” 그때, 은범이 차를 주차하고 시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방을 예약하지 못한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작은 문제야.” 은범은 우주를 그녀에게 맡기고 말했다. “내가 해결할게. 걱정하지 마.” 그가 나서자마자, 문제는 금세 해결되었다. 은범은 두 장의 방 키를 들고 시연에게 흔들며 말했다. “다 됐어.” 그는 짐을 들고 설명했다. “내가 VIP 카드가 있어서 사전 예약 없이도 가능해.” 시연이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범은 부드럽게 말했다. “왜 화가 나 있어?” 시연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성빈이도 못 오게 됐어...” 알고 보니 그 일 때문에 화가 난 거였다. “괜찮아.” 은범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는 우주를 위해 온 거잖아. 우주가 기뻐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야.” 시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응.”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분위기가 훈훈했다. “우주 손 잘 잡고, 방에 짐부터 놓으러 가자.” “그래.” 이 광경을 목격한 지하는 깜짝 놀라며 유건을 쳐
며칠 후, 노은범은 GP그룹에 갔다. HUA테크는 GP그룹의 요구에 따라 절차를 밟았고, 오늘은 고유건을 만나러 온 날이었다. 유건의 비서가 은범을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고, 은범이 막 자리에 앉자 유건이 도착했다. 은범은 일어나 인사했다. “고 대표님.” “노 사장님.” 유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악수했다. “앉으세요.” 두 사람은 짧은 인사 후 바로 협력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유건은 은범의 능력에 매우 만족했고, 바로 계약을 결정했다. “협력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야말로 고 대표님께서 저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력 잘 부탁드립니다.” 관례에 따라 저녁에는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건이 초대했다. “노 사장님, 저녁 식사 같이하시죠?” 은범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고 대표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만, 잠시 후에 일정이 있어서 오늘 저녁엔 G시에 있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제가 장소를 정해서 고 대표님을 초대하겠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떠나자마자, 유건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노은범이 저녁에 G시에 없다고? ‘CLOUD’는 G시 밖에 있는 곳이야. 시연도 오늘 저녁에 떠난다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이 여자는, 노은범과 함께 놀러 가는 거야?!!!’ 핸드폰이 울리자 유건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부지하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거칠게 나올 것까진 없잖아! 누가 너 건드렸어? 저녁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 유건은 불쾌한 기분에 답했다. “너희들이랑 술 마시고 카드 게임하는 게 그렇게 재밌겠냐?” 지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고 대표님. 뭐가 재밌는지 말씀해 보시죠?]유건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휴가 가자. CLOUD가 좋겠군.” ... 은범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뭐?” 강석은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누가 연애 경험이 많다고? 나에게 그런 딱지 붙이지 마! 그 여자들은 다 내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냥 친한 여사진들이라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가차 없이 눈을 굴리며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헤헤.” 강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애 있는 여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 “하하!” 정빈이 강석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지. 우리 강석 도련님이 만약 마음에 들었다면, 애가 있든 없든 상관없지. 그렇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두 사람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요즘 같은 시대에 애 하나 때문에 평생을 묶어두겠어?” “네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그동안 조용히 있던 지하가 끼어들며 말했다. “지금 시대가 어떻든, 옛날에 많은 나라들은 왕의 어머니도 딱 한 번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또 다른 군주와 결혼해 많은 자식을 낳았잖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 지하는 유건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눈빛 속에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유건은 이내 흥미를 잃고, 밤 10시도 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본가로 가는 길에 그는 문득 생각했다. ‘시연은 퇴근했을까?' 그때, 그는 우연히 버스에서 내리는 시연을 보았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차를 그녀 가까이로 몰고, 창문을 내렸다. “타.” 시연은 남자가 유건인 것을 보고는,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 “정말 우연이네요.” 차에 앉자마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메시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유건은 그녀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 “맞아. 왜?” “감사해요.” 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저에게 잘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유건은 가슴속이 찌릿하게 울리며, 그 느낌이 온몸에 퍼졌고, 겨우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흥, 그래.” “그런데...” 시연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현진아? 내 친구 외투가 너에게 있다고? 알았어... 아, 그리고 아직 너한테 고맙단 말도 못 했네. 그날 밤, 내 친구를 위해 침대를 양보해 줘서 고마워. 너무 늦었고, 비까지 쏟아져서 호텔을 못 잡았거든. 너 주사실에서 자느라 아주 피곤했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시연은 통화하면서 유건에게 지하철역을 가리키며 자신이 바쁘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천히 가!” 유건은 그녀가 그 말을 들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결국 올라가고 말았다. ‘이 여자가 결국 나한테 고마워하고, 내 마음을 알고 있었네!’ 게다가, 방금 시연이 전화에서 말한 내용을 유건도 아주 분명히 들었다. ‘그날 밤, 비가 쏟아지던 날, 그건 바로 노은범이 왔던 날이 아닌가?’ ‘이 여자는 노은범과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그러니까 노은범은 지시연을 버렸었고, 두 사람은 아직 화해하지 않은 상태이야! 흥!’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태산요양병원. 은범과 시연은 문 앞에서 서 있었다. 방 안에서는 CA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우주를 검사하고 있었다. 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손을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시연아.” 은범은 시연의 옆에 서서,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은 그녀의 진심을 속일 수 없었다.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 되지 않는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시연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 작은 호의조차도 그녀는 감사하게 여기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남이 자신에게 베푼 작은 호의를 열 배로 갚으려 했다. ... 강울대학교병원을 나선 시연은 고씨 가문의 본가로 돌아갔다. 고상훈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며칠 동안 네가 없어서 그런지, 우리 유건이도 뭘 그렇게 바쁜지 하루 종일 얼굴을 못 봤어. 마침 잘 됐어, 저녁에 같이 밥을 먹자.” 그러나 전화를 걸자, 유건은 말했다. [할아버지, 저 바빠서 못 돌아갑니다.] “뭐가 그렇게 바빠?” 고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을 것 아니냐? 더군다나 시연이가 출장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고상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런 고얀 것! 정말 무례하군!” “할아버지.” 시연은 속으로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오늘 저녁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할아버지랑 밥도 먹고, 같이 바둑도 두고, 불경도 읽어드릴게요. 괜찮죠?” “좋지, 좋지.” 순식간에 고상훈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그날 저녁, 유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유건이 돌아왔나?’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 아마 아침에 돌아온 것 같네.’ 물소리가 멈추고, 유건은 욕실에서 나와 곧바로 옷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녀를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정
GP그룹 회의실. 주지한은 서류 폴더 하나를 펼쳐 유건 앞에 놓았다. 최근 GP그룹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기술 협력 파트너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적합한 후보가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 제출된 것은 두 번째 후보군이었다. 유건은 한눈에 서류를 훑었다. [HUA테크, CEO 겸 총괄 엔지니어, 노은범]유건의 손가락이 ‘노은범’이라는 세 글자를 톡톡 두드렸다. 지한이 말했다. “형님, 노은범은 비록 최근에 귀국했지만, 해외 유학 시절 뛰어난 성과를 냈고, 여러 번 과학 기술상을 수상한 인재입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노은범은 매우 드문 전문가였다. 유건은 사업가이자 남자였다. 사업상의 문제를 감정과 잘 분리했고, 또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좋아, HUA테크와 절차를 진행해.” 저녁에 유건은 부지하 등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유건은 노은범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노씨 가문의 도련님 말이지.” 주정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거 못 들어봤어? 사람들이 G시 제일 미남이라고 평가했잖아.” 유건의 머릿속에 노은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건조차도 은범이 그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시연은 노은범의 외모에 반한 거야?!’ 유건은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 여자냐? 누가 외모 얘기를 물었어?” “그럼 뭘 묻는 건데?” 유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은범 도련님은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별다른 나쁜 습관도 없어. 너처럼 남녀 관계도 깨끗하고...” 하지만, 그도 말을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는 예전 얘기고, 지금은 본처와 첩을 두 손에 잡고 있는 상태잖아!” 유건은 침묵했다. ‘결국 노은범이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었던 거야?’ ‘좋네.’ ‘지시연도 눈이 멀진 않았고, 원하
문이 열리자, 노은범의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이 드러났다. 방금 샤워를 마친 그는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하체는 시연이 방금 김현진에게서 빌린 널찍한 운동복 바지만 입고 있었다. 유건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은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시연이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은범은 말했다. “시연이 지금 욕실에 있어요.” 그는 이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남자의 직감으로, 은범도 유건이 시연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유건은 단순히 시연의 환자가 아니었어...’ 유건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지금 이 상황은 그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유건은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낮게 말했다. “시연이 어디 있지? 직접 만나야겠어.” “은범아, 누구야?” 바로 그때, 시연이 나와 은범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며 걸어왔다. 유건은 은범을 무시하고, 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시연은 놀라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이 남자는 조금 전까지도 장소미와 함께 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따라와.” 유건은 시연의 손목을 잡고 이끌려 했다. 그러나 은범이 유건을 막아섰다. “고 대표님, 이 손 놓으세요.” 그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유건은 비웃으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시연에게 물었다. “나랑 갈 거야, 말 거야?” 시연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했다. “은범아, 고 대표님과 몇 마디만 하고 올게. 걱정하지 마.” 시연이 이렇게 말하자, 은범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며 당부했다. “만약에 너를 괴롭히면 바로 소리 질러.” “알았어..
“설마 우리 우주를 위해서?” 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물론이지.] 은범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킬 거야.] 시연은 이 일이 우주에 관한 것인 만큼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해.” [알겠어.]전화를 끊고, 은범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시연이 우주 때문에 연락을 받았을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연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진아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네.” 그러더니 진아도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거야? 너 정말 남편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이는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연이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시연은 1층 공터로 내려갔고, 그곳에서는 은범이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시연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됐어?” 은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고, 얼굴과 옷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은범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 이렇게 됐어.” 시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은범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고 말렸다. “내가 창우면에 오지 않았다 해도 타이어는 터졌을 거야.” 그는 시연의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나 안으로 들어가도 돼?” “아, 맞다!” 시연은 그를 손짓해 재촉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그래.” 시연은 그를 따라 2층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병원 직원 숙소야. 좀 낡고 허름하지만, 화장실이 있으니까 샤워는 할 수 있어.” 말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시연의 방에 도착했다. 시연은 문을 열며 말했다. “나랑 진아는 한방을 써.”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건의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은 의료팀과 함께 물품을 정리하고, 차에 싣고 출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그녀는 마지막 차로 떠나려 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연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유건의 이름을 보자, 시연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그 순간, 유건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첫 번째 의료 차량이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중앙 주차장으로 가세요.” 유건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응급실로 향하며 물었다. “지시연 선생님 계신가요?” 접수대의 간호사는 시연과 친분이 있었다. “지 선생님이요? 방금 의료지원 차량과 함께 떠났어요.” “떠났다고요? 언제요?” “저기요!” 간호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출발한 저 차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벌써 달려 나갔다. “시연아! 지시연!” 막 출발한 차량은 병원 문을 막 나섰고, 차의 속도는 아직 빠르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누군가가 차를 쫓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저 사람 우리 차를 쫓아오는 거야?” “당연하지! 엄청나게 빨리 달리잖아!” “오, 키가 크네. 최소 190cm는 되겠어. 정말 잘생겼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한 번 봐봐. 저 사람은 누구를 쫓아오는 거야?” “맞아, 맞아. 일단 모두 일어나서 누굴 쫓는지 알아보자고.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차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운전기사도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시연만은 차에 오르자마자 음악을 틀고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차 안의 소란을 전혀 알지 못했다. 차가 병원을 빠져나가 큰길로 들어서려 할 때, 운전기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