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을 처음 만났을 때, 안시연은 가난, 배신 등 온갖 낭패를 겪고 있었다. 고고한 연정훈은 안시연을 진흙탕에서 끌어내어 그녀의 몸도 마음도 구원해 줬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나서 매정하게 그녀를 버렸다. 다시 만난 그날, 자욱한 연기가 차에 몸을 기댄 연정훈의 얼굴을 뒤덮었다. 이내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 아니야.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에게 돌아와.” 안시연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가볍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낯설고 젊은 남자가 더 끌릴 뿐이니까요.”
View More변여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허예나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그녀가 양혁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고 늘 다정했다.“오빠,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워요.”그녀가 불쑥 감사를 전하자 마치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양혁수의 감정이 요동쳤다. 마치 그녀가 그가 오늘 밤 무엇을 하려는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둠과 마주한 채 더욱 불쾌해졌다.변여름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지만 막상 현실이 닥치자 스스로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의 손에는 땀이 맺혔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변여름은 그를 속여 이토록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곧 자신을 싫어하는 눈빛으로 바라볼까 두려웠다.그 생각이 스치자 코끝이 찡해졌고 언제부터인지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믿기지 않아 손을 올려 얼굴을 닦았고 그것이 눈물임을 깨달았다.이 감정은 복잡했다. 누군가로 인해 가슴이 저미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니 마치 감정이 없던 기계가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자각한 듯한 기분이었다.그제야 변여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올라와 본능적으로 의자를 짚고 일어서려 했다.그 순간 그녀의 코끝이 먹먹해지는 소리를 들은 양혁수가 무언가를 깨닫고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어디 가?”변여름은 숨이 턱 막혔다. 눈을 감고 빠르게 감정을 다잡았다.“아니에요. 그냥... 오래 앉아 있으려니 불편해서요.”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자가 끌려가며 그녀는 양혁수와 정면으로 마주 서게 되었다.그는 단숨에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고 변여름은 당황해 숨이 멎을 듯했다.“오빠.”양혁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감싸고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었다.변여름은 그의 뜨거운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양혁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
주변이 아무리 어두워도 모자가 벗겨지자 변여름은 얼굴을 가리려고 손을 올렸다.“오빠.”양혁수는 손을 거두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불도 안 켰는데 뭐가 그렇게 두려워?”변여름은 결국 손을 내리고 모자가 벗겨지자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뒤에서 받쳐 주었다.“마스크 썼어?”“네...”그녀가 겨우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끈 사이로 들어가 귀에서 가볍게 떼어내자 마스크도 벗겨졌다.양혁수는 그녀의 보호막을 하나하나 없애며 얼굴을 어둠 속에 드러냈다. 두 볼이 차가워지고 변여름이 얼굴을 돌리면 그의 시선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가 분명히 잘 보이지 않지만 변여름은 마치 자신이 벗겨진 것 같은 시선을 느끼며 온몸이 불편해졌다.양혁수는 일부러 그렇게 했고 변여름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녀가 스스로 함정에 빠진 이상 양혁수가 어떻게 사냥감을 다루든 그의 권한이었다.“물 마실래?”그가 물었다.변여름은 정말 목이 말랐다. 어차피 심리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모든 방어를 해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목말라요.”“기다려.”양혁수는 냉장고 쪽으로 갔고 변여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오빠, 포도 주스 주세요.”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포도 주스라니. 하하 여우처럼 교활하네.’그는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입으로 대답했다.“여기 없어.”“그럼 망고 주스 주세요.”“그것도 없어.”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럼 뭐 있어요?”“생수.”양혁수의 말투는 무심했다.‘네.’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실내는 조용해졌고 냉장고가 열릴 때의 빛마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피하지 않았다.양혁수는 한 번 쳐다보려 했지만 중간에 멈췄다.그는 어차피 곧 자세히 볼 수 있을 테니 급해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은 그가 물을 따르는 소리를 들으며 양혁수가 진정제를 넣었을 거로 생각했다.사실 이런 것도 필요 없었다.양혁수가 불을 켜도 그녀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그는 물을 들고 돌아와 컵을 그녀 앞에 놓
변여름은 전신 검은색 의상에 캡모자를 눌러쓰고 완전히 무장한 채 밖으로 나섰다.결국 그 팔찌와 목걸이는 착용하지 않았다. 양혁수가 보면 더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건물 아래에 도착한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섰다.휴대폰에는 그가 보낸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사무실 층수를 알려주고 그녀가 어디까지 왔는지 물었다.이런 평화로운 대화는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고 그녀는 타이핑하는 것조차 버거웠다.엘리베이터가 높이 올라갈수록 그녀는 마스크를 더욱 깊숙이 올렸다.36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문이 열리자 어둠이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그녀는 밝은 엘리베이터에서 재빨리 나와 밖에서 들어오는 밤의 빛을 따라 그의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양혁수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 위치를 알려주었다.“찾았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했다.“응. 들어와.”변여름은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문으로 걸어갔다.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사무실 커튼이 쳐져 있었고 실내는 밖보다 더 어두워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문을 닫자 이전에 주차장에서와 다를 바 없었다.변여름의 심장은 북처럼 쿵쾅거렸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오빠?”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약간 당황했고 양혁수가 곧 불을 켜서 이 절대적인 사냥의 승리를 끝낼까 봐 두려웠다.“계속 앞으로 걸어가서 소파를 만지면 왼쪽으로 돌아. 10미터쯤 가면 테이블이 있어.”옆에서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변여름은 깜짝 놀랐다.어둠 속에서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비싼 금속 라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변여름의 신경은 순간 긴장되었고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소리를 듣고 그가 소파 맞은편 책상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목적지로 가기 위해 그의 앞을 지나쳐야 했다.그녀는 그가 갑자기 라이터를 켤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양혁수는 라이터를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양혁수는 느긋하게 마치 인내심 있는 사냥꾼처럼 그녀의 발소
양혁수는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지만 변여름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고 전하며 이런 상황은 오랫동안 없었다고 덧붙였다.그날 이후로 이틀 동안 그들은 통화를 하지 않았지만 변여름은 허예나의 신분으로 아무렇지 않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는 여전히 답장했으며 말투에도 아무런 허점이 없었다.토요일 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변여름은 실험실 밖에 도착했을 때 전화를 받고 마음이 긴장되었고 마치 단두대의 칼이 떨어지려는 느낌이 들었다.“여보세요?”저쪽에서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기침 소리가 두 번 들렸다.변여름은 민감하게 그 소리를 포착하고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오빠, 감기 걸렸어?”잠시 후 저쪽에서 대답이 들렸다.“응. 조금.”잘 듣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에 담긴 차가운 냉정함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입을 열고 함정일 가능성이 있는 구덩이로 순순히 들어갔다.“어디에 있어요?”“회사에서 야근 중.”“집에 안 가세요?”“귀찮아. 오늘은 회사에서 자려고.”변여름은 다시 물었다.“저녁 먹었어요?”“아직.”변여름은 입술을 깨물며 가방끈을 쥐었다. 그 손길에선 미묘한 주저함과 망설임이 엿보였다.더 나아가면 그와 제대로 대화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했다.그녀가 말이 없자 양혁수는 오히려 먼저 물었다.“뭐 하고 있어?”그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물었고 변여름은 마치 그가 여자 친구에게 묻는 것처럼 착각했다.그녀의 심장은 두 번이나 쿵쾅거렸고 살짝 침을 삼켰다.“방금... 엄마랑 산책하고 왔어요.”“그러면 지금은 할 일 없어?”“...네.”“나한테 와. 같이 저녁 먹자.”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약속을 잡은 것이다.변여름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저는 지금...”“이 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보냈고 불도 다 꺼 놨어. 너를 볼 사람은 없을 거야. 너는 계속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어.”마지막 몇 마디를
“허씨 가문의 딸이 참 괜찮더라. 너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한 번 진지하게 만나봐.”양지원은 차분히 인내하며 말했다.그녀의 본심은 양혁수에게 양시연이 머물던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그러나 양혁수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고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괜찮다고? 대체 어디가?’비서가 아직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의 음식이 다시 눈에 들어오자 그는 거슬려서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불편했다.양혁수는 두 달 동안 낯선 사람이 보낸 음식만 먹었다.만약 상대방이 음식에 무슨 짓을 했으면 그는 지금쯤 허현무와 함께 포커라도 칠 판이었다.안전 문제를 제쳐두고 그를 진짜 화나게 한 것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이었다.이렇게 조금씩 다가오는 함정은 절대 어린 여자아이가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는 자신이 인터넷을 통해 접촉했고 그날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 진짜 허예나 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함정인지 알고 싶었다.물론 어느 쪽이든 양시연의 사진을 이용해 자신을 오도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악의적이었다.그가 감정을 가다듬고 양지원과의 통화를 끝낸 뒤 사무실은 죽음처럼 고요했다.잠시 후 양혁수는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변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멀리서 커피숍에서 정보를 찾고 있던 변여름은 심하게 재채기했다.그녀는 휴지를 뽑아 닦고 코를 살짝 문질렀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변여름은 이틀 후에 그를 만나야 했기에 아프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곧 집에 가서 약을 먹어야 한다고 결심했다.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계속 글을 썼다.모든 것이 평범해 보였다. 밤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양혁수는 돌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친오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변여름은 매우 예민해서 전화를 받자마자 예상했고 역시 변백호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양혁수가 문제를 발견했어. 그 사진이 허예나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이 허점은 원래 변여름이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었고 양혁수가 발견했
“500자가 뭐 어려운가? 손 글씨로 써서 보낼게요.”양혁수는 아주 통쾌하게 대답했고 양지원도 기분이 퍽 좋아졌다. 그리고 양혁수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그냥 그렇죠, 뭐.”“별일 없긴, 너 엄마가 바보인 줄 알아?”양지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날 그렇게 급하게 돌아가서 뭘 한 건데?”“말했잖아요. 한강시에 급한 볼일이 있었다고.”“한강시에 볼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허씨 가문에 볼일이 있었던 거야?”‘쯧.’양혁수는 왠지 낯간지러운 마음에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고 변명이라도 하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었다.“비서가 어디까지 말해줬는데요?”“뭘 또 비서가 말해줬다고 생각해? 나 아직 정정하고 내 옆에도 눈과 귀가 많아.”“그런데 왜 이제야 물어보세요?”양혁수는 사실 오랫동안 궁금했었다.“전에 소개팅 주선하면 세 날에 한 번씩 물어봤었잖아요.”양지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거야 네가 항상 소개팅에 무덤덤하니까 그렇지. 새로 사람 만나는 것도 너무 꺼리니까 나도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고 있었어.”양지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그 아이 나도 두 번 만나봤는데 참 온순하고 좋은 여자 같더라.”‘잘못 보셔도 한참 잘못 보신 거네요. 그렇게 온순하고 착한 건 모두 연기이고 사실 여우가 따로 없어요.’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또 무언가 떠올랐다.허예나는 양시연을 많이 닮았다. 양지원은 양혁수가 양시연을 향한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양혁수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부단히 노력했었다.그런데 왜 하필 양시연을 닮은 여자를 소개해 준 걸까?그 생각까지 마치자 양혁수는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양지원의 말이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양지원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혁수야?”양혁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이번엔 꽤 마음이 잘 맞나보네. 앞으로도 잘 지내볼 생각인 거니?”양지원의 질문에 양혁수는 조금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사진 한 장 보
[그래도 두 달 동안 내가 해준 도시락이 입에 맞긴 했죠?][혹시, 앞으로도 계속 도시락 챙겨줘도 될까요?][이번 소개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변여름은 질문을 쏟아냈고 점점 더 솔직하고 직접적이었다.양혁수는 허예나의 손맛에 길들어진 것인지 쓴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도시락이 입에 맞긴 했나 보다 싶었다.계속 도시락을 받는 건 아무렴, 괜찮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소개팅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개팅 상대를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게 말이나 되는가?앞으로라...양혁수는 계속 만남을 이어가려면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핸드폰이 툭 꺼져버렸다.확인해 보니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것이었다.‘뭐야? 배터리가 떨어진 것도 왜 몰랐지?’양혁수는 행여나 허예나가 자신이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할까 봐 빠르게 충전기를 꽂고 노트북 앞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되어서 노트북으로 다시 문자 보내.]그러자 변여름은 뾰로통한 이모티콘을 보냈다.[오빠 지금 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러는 거죠? 배터리가 떨어졌다니 무슨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해요.]“...”[네 착각이야.][그래요, 그럼. 빨리 대답이나 해요.]“...”양혁수는 잠시 뜸을 들였을 뿐인데 상대는 또 재촉했다.[뭐야... 설마 노트북도 배터리가 다 떨어진 건가?]비꼬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양혁수는 바로 영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나 상대는 바로 연락을 끊었다.[뭐예요!][지금 대답할 테니 얼굴 보여줘.][오빠, 우린 소울메이트잖아요.][난 얼굴 안 보여주는 소울메이트 필요 없어.]변여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도 내가 못생긴 건 아니라 다행인 것 같긴 한데.’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대치 상태에 놓였다.변여름은 요즘 들어 더 불안해졌고 이 비밀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기 전에
척 보아도 허현무의 본처와 아들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허예나 모녀에게는 겨우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앞으로도 왕래하며 지분으로 허예나를 묶어두는 것과, 둘째로는 대충 돈을 쥐여주고 연을 끊는 것이었다.그리고 허예나에게 그 큰돈을 챙겨주고 겨우 연을 끊는다는 건 사실 조금 비합리적이었다.허씨 가문 아들이 멍청해서 돈을 흥청망청 나눠준 거라면 몰라도 허현무 본처는 아주 돈을 밝히고 똑똑한 사람이었다.그래서 왠지 이 결정은 허씨 가문 모자가 내린 게 아닌 것 같았다.다른 한편, 연구실 근처.변여름은 허예나가 보낸 메시지를 통해 유산 분할을 확인했다.그 금액은 바로 변여름이 조종한 것이었다.변여름은 허예나가 멍청하게 당하는 건 싫었으나 또 다른 사람의 눈에 보기에도 큰 금액을 유산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큰 금액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고 의아하게 여긴 양혁수가 조사를 한다면 들통이 날 게 뻔했다.지금껏 양혁수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양지원의 ‘소개’로 주선된 만남이라 양혁수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허씨 가문 전체 유산 분할을 확인한 변여름은 자신의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은 자신의 논리대로 그 금액을 책정했지만 허씨 가문 모자가 어떤 사람인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허예나가 유산 받은 금액은 너무 눈에 띄었다.양혁수는 그동안 이 업계에 오랜 시간 발을 담그며 이런 이상한 낌새는 바로 눈치를 챌 것이다.그 생각을 하자 변여름은 짜증이 확 치솟았고 허예나의 메시지도 무시한 채로 연구실 근처를 걸었다.그때, 또 핸드폰이 진동했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였다.[어디야?]변여름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답장했다.[요양 센터에 있어요.][허씨 가문이 내쫓은 거야? 아니면 너랑 어머님이 스스로 나오겠다고 한 거야?][스스로 나오겠다고 한 거예요. 엄마가 거길 불편해하셔서요.]변여름은 먼저 유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오빠, 저 아버
그날 밤, 변여름은 양씨 저택으로 돌아갔지만 양혁수를 만나지는 못했다.양혁수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사는 양혁수에게 변여름이 벌써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했다.잠들기 전 변백호가 양혁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양혁수가 받기 전에 통화는 끊어졌다.양혁수가 다시 걸었으나 이번엔 변백호가 거절을 했다.[?][실수로 잘못 누른 거야.]양혁수는 그러려니 넘어갔고 핸드폰을 내려둔 뒤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다른 한편 위층의 변여름은 바나나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한 손으로는 노트북의 거절 버튼을 눌러 변백호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별수 없어진 변백호는 메시지만 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절대 굽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변백호를 협박했다.[오빠, 자꾸 내 일에 끼어들면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나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일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여름아, 내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혁수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변여름은 그 메시지를 조금 멈칫했다.변여름 역시 양혁수가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불같이 화를 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괜찮아. 난 오빠 동생이니까 죽이진 않겠지.][허.]‘이럴 때만 오빠다, 이거지?’남매는 한참 침묵했고 변백호가 다시 침묵을 깨트렸다.[한 달 시간 줄게. 더 이상 선 넘지 마.]변여름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되레 변백호를 이용하려 들었다.[혁수 오빠가 날 의심하면 꼭 먼저 알아차리고 미리 나한테 말해줘.]“...”참다못한 변백호는 핸드폰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변여름은 아주 덤덤하게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아 시원해.’괜히 시비를 거는 변백호를 처리하고 변여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오늘엔 양혁수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갔는데 꽁냥꽁냥 연애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문자를 보내면 꼬박꼬박 답장은 왔다.변여름은 최근 2개월 동안의 메시지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었다.오늘의 만남을 뒤로 변여름은 양혁수를 향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고
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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