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을 처음 만났을 때, 안시연은 가난, 배신 등 온갖 낭패를 겪고 있었다. 고고한 연정훈은 안시연을 진흙탕에서 끌어내어 그녀의 몸도 마음도 구원해 줬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나서 매정하게 그녀를 버렸다. 다시 만난 그날, 자욱한 연기가 차에 몸을 기댄 연정훈의 얼굴을 뒤덮었다. 이내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 아니야.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에게 돌아와.” 안시연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가볍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낯설고 젊은 남자가 더 끌릴 뿐이니까요.”
View More반우희는 부승원이 거절할 줄 알았지만 그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녀는 멍해졌다.‘뭐지. 이 상황은?’승주는 반우희가 품에 든 가방을 받아 들고 앞장서며 물었다.“누나가 말했던 케이크는 다 가져왔어요?”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아까는 ‘그냥 받은 음식은 안 먹는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승주는 당당하게 대답했다.“그건 질투 나서 그런 것을 못 알아들었어요? 지식인은 원래 질투가 많거든요. 질투할수록 더 교양 있어 보이는 거라고요.”반우희는 어이가 없었다.“...”부승원은 뒤에서 걸으며 미소를 살짝 지었다. 희주와 동준은 양옆에 붙어 얌전히 말을 걸었고 승주뿐만 아니라 이 두 아이도 수다스러운 타입이라 대화의 주제가 끊기지 않았다.내내 조용할 틈이 없었고 위층에서 갑자기 누군가 창문을 열며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승주, 지금 몇 시인데! 좀 조용히 해라!”승주는 고개를 들고 즉시 외쳤다.“알았어요. 귀가 정말 밝으시네요.”부승원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는데 말한 사람은 한 노인인 것을 보고 부승원은 침묵했다.“...”노인은 승주의 태도에 익숙한 듯 창문을 덜컥 닫아버렸다.승주는 부승원에게 약간 미안한 듯 웃으며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노인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걸 암시하듯 눈짓을 보냈고 부승원은 별말 없이 끄덕이며 그의 행동에 동조했다.앞쪽에서 반우희는 이상하게 생각했다.‘부승원 씨가 왜 이렇게 승주에게 친절하지? 승주가 사랑스러운가?’그들은 우르르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반우희는 부승원을 대체 어떤 걸로 대접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테이블 위에는 천 원짜리 레몬 토닉워터가 한 잔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부 삼촌, 편하게 앉으세요.”승주는 부승원을 맞이하며 레몬워터를 들고 탁자 근처로 갔고 승주는 전혀 거리낌 없이 레몬워터를 즉석에서 뜯어 주전자에 전부 부어버렸다.부승원은 침묵했다.“...”그 주전자는 아마 차를 끓이는 주전자였던 것
반우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둔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예의상 ‘괜찮아요’라고 할 법도 한데 반우희는 눈을 반짝이며 바로 차에 올랐다.‘공짜 차! 완전 땡큐지!’“감사합니다! 변호사님!”반우희는 가방을 뒷좌석에 두고 빠르게 좌수석에 올라탔다.이건 송민재 변호사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상사의 차를 탈 때에는 뒷좌석에 앉는 게 실례라는 것 말이다.반우희는 차에 올라 조심스레 문을 닫고 또 부승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부승원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휘휘 저었다.그렇게 차량은 정인 그룹을 빠져나갔다.부승원은 자꾸 백미러를 통해 반우희를 힐끔거렸는데 반우희는 아주 태연하게 각도를 뒤로 젖히고 편하게 등을 기대앉았다.평소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하지 않고 편하게 대했다면 아주 차 안을 샅샅이 훑어봤을지도 몰랐다.부승원은 이미 반우희네 집을 여러 번 다녀왔었고 내비게이션도 돌리지 않았다. 게다가 반우희도 차에 올라 주소를 알려주지도 않았다.‘정말 다시 봐도 멍청해.’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 반우희는 여러 번 입을 열어 분위기를 풀려 했으나 부승원의 얼굴이 너무 차가워 보여 하려던 농담을 몇 번이고 삼켰다.그래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반우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부승원은 더 어이가 없어졌다.이제 차 안의 분위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마른기침했다.“아, 죄송해요. 갑자기 웃긴 얘기가 떠올라서 못 참았어요.”그리고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물었다.“변호사님한테 들려드릴까요?”“그럴 필요 없어.”“넵.”‘쳇. 차갑긴.’반우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몸을 좌석에 말아 넣고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차가 멈춰서자 반우희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도, 도착한 거예요?”“그래.”반우희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부승원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저도 모르게 입구에 어린아이들이 있지는 않을까 찾았다
연정훈이 추파를 던지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두 볼을 꾹꾹 찔렀다.“앞으로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돼요.”양시연이 명령하듯 말하자 연정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가끔은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마실 수는 있지만 너무 정직하게 주는 대로 받아먹지 말고 가끔은 힘든 척 쉬기도 하란 말이에요.”연정훈은 자세를 바로 세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해봤다.“그럼, 무슨 핑계로 마시지 말까?”양시연이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때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임신 준비 중이라고 할까?”“...”양시연은 당황하다가 바로 얼굴을 붉히고 연정훈의 등을 내리쳤다.“장난하지 말고요!”연정훈은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 술을 마셔 불그스름하진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나 장난 아니고 진심이야. 다른 직원이 나한테 이런 이유를 대면 나도 술을 권하기는 어렵거든.”양시연이 허리를 꼬집으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언제 동의했어요?”연정훈은 바로 양시연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두 사람은 침대에 풀썩 누웠고 양시연은 숨을 몰아쉬다가 연정훈의 턱을 치켰다.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연정훈의 마음이 읽혔다. 그래서 먼저 연정훈에게 키스했다.입술이 맞닿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잡고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양시연과 함께 샤워실로 향했다.정인 그룹.부승원은 가장 마지막으로 회사를 나섰다.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었다.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는데 회의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그곳으로 걸어가서 보니 다름 아닌 반우희였다.반우희는 큰 박스에 양시연이 저녁에 사준 야식과 간식을 담고 있었다. 허겁지겁 박스에 담으며 또 어디론가 전화하고 있었다.“내일 친구들이랑 소풍 간다며? 누나가 간식 가지고 갈게. 사람들이 거의 먹지도 않았어.”“먹다 남긴 거 아니야. 그리고 너 2만 원짜리 케이크 먹어본 적 있어? 먹어보고나 말해.”“...”통화
양시연이 시선을 돌리자 주지혁은 바로 헤드 라이터를 꺼버렸다.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주지혁은 운전석에 앉아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았는데 양시연은 차갑게 시선을 거두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두 차량은 다른 방향에 세워졌고 현재는 각도가 비스듬히 붙어 있었다.양시연은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빠르게 차를 빼내 검은색 벤츠와 스치듯 지나쳤다.이제 레스토랑 골목을 벗어나자 뒷자리에서 연정훈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양시연은 그 소리에 웃음이 터졌다.“뭐해요?”“양 대표님 운전 실력이 깔끔하네요.”연정훈의 말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운전을 이어갔다.“영광인 줄 알아요. 정훈 씨도 예전처럼 굴었으면 주지혁 씨랑 똑같은 결말이었을 거예요. 언감생심 나랑 결혼할 수 있었겠어요?”연정훈은 두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마. 나 술 마셔서 지금 예민하단 말이야.”“예민하면 눈 감고 잠이나 자요.”굳이 말을 걸다니 연정훈도 참 웃겼다.연정훈은 잠이 오지 않았고 계속 꾸역꾸역 양시연에게 주지혁을 만난 기분이 어떤지 인터뷰했다.양시연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있는 동안 대답을 이었다.“기분이요? 보면 짜증 나긴 한데 원망까지는 아니에요.”몇 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어 과거의 사소한 일은 이제 기억할 가치가 없었다.하지만...양시연이 다시 운전대를 잡고 백미러로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했다.“그 사람들 한 패거리죠?”“똑똑하네.”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 해도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이동하면 한 패거리라는 건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정호덕 회장님은 부이사장님이고, 이 회장님은 함께 자리하지 않은 걸 보아 다른 패거리인가 보죠?”“이 회장님은 우리 아버지 대학교 시절 룸메이트야.”‘아, 그렇군.’양시연은 드디어 안심되었다.열심히 분석하는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다시 주지혁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제 양시연에게 주지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강남
양시연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정호덕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우리가 연 대표 잡아먹을까 봐 걱정 한 거예요? 아니면 연 대표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날 까 걱정 한 거예요?”양시연은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방금 회장님께서 우리 남편 인기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그건 방금 양시연 씨를 만나기 전 제 생각이지요. 양시연 씨가 이렇게 미모의 여성인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연 대표가 아무리 능력이 좋고 인기가 많다고 해도 집에 미모의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한테 시선이 가겠습니까?”정호덕의 말에 양시연은 살풋 미소를 터뜨렸다.‘참.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네.’정호덕 회장님은 연정훈의 상사로 연정훈과 호형호제를 한다고 해도 연정훈에게 깎듯이 예의를 차리지는 않았다.그러나 양시연에게는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그리고 양시연은 그 이유가 양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늦어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기회가 되면 우리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꼭 오시길 바랍니다.”양시연의 말에 정호덕이 바로 대답했다.“시간만 된다면 얼마든지요.”연정훈은 그제야 입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양시연의 손을 잡고 떠났다.차에 오른 뒤 양시연은 연정훈의 기분이 꽤 좋은 걸 눈치챘다.‘쯧. 유치하긴.’‘어쩐지 아까 차에 오르지 않고 꾸물거리더니. 시간 맞춰 주지혁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구나.’두 사람의 뒤로 정호덕 무리는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소를 지운 정호덕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시작했다.“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타고난 팔자는 다 다르지요. 예전에는 여자들이 시집을 잘 가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편히 산다던데 우리 남자들도 다 똑같아요. 연 대표 능력도 좋지만 좋은 처가를 만난 것도 능력이에요.”그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조재민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
정인 그룹 대표로 있을 때도 연정훈은 이렇게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양시연은 너무 걱정되어 아예 운전해 그곳으로 향했다.양원 그룹 대표들은 눈에 띄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고 대부분 회원제로 운영되는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가졌다.양시연은 차를 길가에 세워 두고 연정훈에게 문자를 보내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려 했다.그런데 문자를 보내기도 전에 두 사람이 나란히 나오는 게 보였다. 앞장선 사람은 바로 연정훈이었고 양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진수빈은 양시연을 발견하고 눈치껏 빠져줬다.“사모님이 마중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래.”연정훈은 술을 꽤 많이 마신 건지 두 볼이 옅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양시연을 빤히 바라보던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주변에는 나무가 많이 심겨 있었고 꽤 숨겨진 곳에 있었던 레스토랑이라 양시연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달려가 연정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연정훈의 몸에서 알코올 향이 물씬 나자 양시연은 마음이 아팠다.“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괜찮아. 많이 마신 거 아니야.”연정훈은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목 주변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양시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빨리 차에 타요. 돌아가서 해장국 해줄 테니 먹고 자요.”연정훈은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양시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부승원이 직원들 착취하며 퇴근시키지 않았다며?”양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전했다.연정훈은 포인트를 정확히 캐치했다.“그럼 출소하자마자 날 데리러 온 거네?”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린 채로 연정훈을 바라봤다.“당연하죠. 정훈 씨가 어디 가서 당하진 않을지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연정훈은 더 활짝 웃어 보이더니 참지 못하고 키스를 하려고 다가왔다.그러자 양시연은 깜짝 놀라 연정훈의 입을 가로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지금 밖이에요!”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앞으로 이미지를 위해
승주는 나이는 어리지만 말하는 본새가 애 어른 같았다.“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요? 지금 퇴근해도 막차예요. 지하철에서 내려서 걸어온다고 해도 한참 걸리는데 제가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아세요?”양시연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리다가 승주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럼 내가 변호사님 연락처 넘겨줄게. 이따가 승주가 전화해 보는 게 어때? 승주가 전화하면 변호사님도 말을 듣지 않겠어?”화면 속 승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좋아요! 내가 해볼게요!”양시연은 부승원의 연락처를 전송하고 통화를 종료했다.그리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그러나 술자리가 있다던 연정훈이 아직도 연락이 없자 양시연은 또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참. 나도 걱정을 사서 한다니까.’양시연은 자신의 머리를 콩콩 내려치고 빠르게 탕비실을 나섰다.시간이 늦은 만큼 사무실은 아주 조용했고 공기 중에도 피곤하다는 기운이 느껴졌다.그러나 부승원은 늘 그랬듯 아직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바른 자세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승원은 정말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양시연은 왠지 부러운 마음이 들었고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어졌다.그때.부승원의 핸드폰이 울렸다.양시연은 몸을 바로 세우고 부승원 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양시연이 건넨 번호는 부승원의 개인 연락처였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번호였다.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에 부승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안시연은 귀를 쫑긋 세웠다.“여보세요!”승주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부승원은 깜짝 놀라 펜을 내려두고 물었다.“누구시죠?”진지한 부승원의 목소리에 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그리고 핸드폰 너머로 목소리가 이어졌다.“나 승주예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승주?’“삼촌. 나예요. 나. 승주요!”상대는 서슴지 않고 신분을 밝혔다.“...”핸드폰을 잠시 내려두고 번호를 다시 확인한 부승원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저녁 7시 30분.그러나 건물은 대낮처럼 환했다. 연정훈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고 양시연은 자꾸 걱정되었다.그렇게 잠시 딴청을 하는데 갑자기 문서 하나가 눈앞으로 날아왔다.“이 몇몇 사람은 해고해요. 일하는 데 방해가 돼요.”“...”부승원의 말에 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스카우트한 사람이니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읽었다.“자꾸 연정훈만 생각할 거면 회사 때려치우고 집이나 가요. 그리고 평생 내조만 하면서 살아요.”양시연은 속으로 욕을 퍼부어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요.”그때 양시연이 문서를 내려놓고 꽤 진지한 얼굴로 부승원에게 물었다.“양원 그룹 내부 사정이 많이 복잡하나요? 연씨 가문에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있어요?”양시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연정훈에게 태클을 거는 사람은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그러나 무표정의 부승원이 비꼬듯 이런 말을 했다.“지금 연정훈 걱정할 여유가 있어요?”“...”“정인 그룹 관리를 이딴 식으로 하고 딴청이라니.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양시연은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그리고 드디어 양시연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에 집중했다.저녁 8시. 모두에게 휴식 시간이 주어지고 양시연은 야식을 주문했다.반우희는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양시연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양시연은 반우희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았고 냉큼 과일 주소도 건넸다.반우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언니.”양시연은 반우희에게 오늘 첫날 소감을 물어보려 했으나 부승원이 옆에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어휴. 그래 내 앞길이나 걱정하자고.’반우희는 맛있게 빵을 먹다가 양시연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웃음이 빵 터졌다.그리고 부승원을 향해 이렇게 속닥였다.“시연 언니 옆에 있는 변호사님은 마치...”부승원이 고개를 들었다.‘또 무슨 말을 하려고.’반우희가 바로 말을 이었다.“왕을 조종하는 섭정 대신 같아요!”“...”‘그래. 내시라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주지혁이요?”연정훈은 몸을 바로 세우더니 본인이 직접 셔츠 자락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휙 가까이 가져다 대며 양시연의 표정을 살폈다.양시연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빠르게 연정훈의 등을 내리쳤다.“왜 이래요!”그러자 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이 몸을 돌려서자 연정훈은 양시연을 뒤로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양혁수한테 질투한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겠어.”양시연이 째려보며 말했다.“그걸 지금 안 거예요?”“양혁수는 그래도 명의상 네 오빠니까 너랑 아무 사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무려 시연이 약혼자였던 사람이라고.”양시연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반쯤 돌려 연정훈의 두 볼을 쭉 잡아당겼다.“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해봐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이젠 그 사람한테 아예 관심이 사라진 것 같으니 나도 안심이야.”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도 웃음이 터졌다.농담을 마치고 양시연은 두 손을 연정훈의 목에 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이 정훈 씨 아래 직원이에요?”“그래. 내가 직속 상사야.”“그럼 꼭 조심해요.”양시연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주지혁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몇 년 전에 확실하게 알아차렸어요. 그 사람은 목적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정훈 씨가 직속 상사이긴 하지만 주지혁이 태클을 걸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곁에 소인배를 둘 필요는 없으니 기회를 봐서 다른 팀으로 보내버려요. 괜히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게요.”본인을 걱정하는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고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입술에 뽀뽀했다.“내가 그 사람한테 잡아먹힐까 봐 걱정돼?”연정훈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투에서 주지혁을 가소롭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양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여전히 연정훈의 목에 손을 건 채로 말했다.“정훈 씨가 주지혁을 대처하는 건 아주 간
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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