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에는 잿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다음 날 다시 출근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졸업하자마자 주지혁의 회사에 입사했던 안시연은 주지혁이 정한 ‘사내 연애 금지' 규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지혁의 제안대로 비밀 연애를 승낙했다. 하지만 안시연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재무팀 주임 자리를 꿰찼다.다시 회사에 돌아왔더니, 주지혁이 일부러 그녀를 재무팀 주임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재무팀 보조직으로 발령 냈다.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은 모두 그녀가 주지혁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주지혁이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고 몰래 트집을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사흘이 지나자, 안시연은 이미 피곤함에 찌들대로 찌들었다.업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힐끔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다름 아닌 조이현이 회사로 방문한 것이었다.안시연은 기회를 노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저기요, 이리 좀 와보실래요?”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안시연은 밖에 있던 주지혁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네, 조이현 씨.”그러자 조이현이 다짜고짜 물었다.“혹시 그쪽이 안시연 씨인가요?”“네, 그렇습니다.”조이현은 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짐 챙겨서 나오세요. 주 대표님과 저를 따라 외근 좀 다녀오셔야겠어요.”말을 마친 조이현은 안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각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클라이언트와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선 주지혁은 안시연이 조이현을 따라 나
안시연은 자기가 너무 예민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연 대표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가 떠올랐다.몇 분 지나지 않아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프타임으로 들어왔는데, 맨 앞에 선 남자는 바로 연정훈이었다.테니스복 차림의 연정훈은 이승우의 차림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가뜩이나 더운 날씨라 얼굴이 붉어졌던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자,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자꾸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정훈 오빠!”연정훈이 가까이 다가오자, 조이현은 바로 다가가 인사했고 겸사겸사 주지혁을 소개했다.안시연은 뒤에 서서 주지혁이 순간 벙찌더니 온몸이 굳어진 것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얼마 전 주지혁과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가했을 때, 연정훈도 자리에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주지혁은 연정훈이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것이었다.안시연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못 본 듯, 테니스 라켓을 한쪽에 맡기고 물병을 따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연정훈이 경기장에서 돌아오자, 모든 관심이 그에게로 집중됐다.부승원이 물었다.“마지막 공은 어떻게 된 거야?”연정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실수지 뭐.”이승우가 피식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실수? 에이, 설마 우리 쪽에서 미녀가 온 걸 보고 잠깐 정신 팔린 거 아니겠지?”연정훈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안시연을 한 번 보았다.안시연은 갑자기 연정훈과 눈을 마주치자,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사이, 조이현이 안시연을 대신해서 그녀를 소개하고 있었다.“정훈 오빠, 안시연 씨에요. 지혁 씨 회사 직원이에요.”연정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물병을 내려놓고, 이승우에게 말했다.“내가 졌어, 기량이 남보다 못한 걸 인정해. 경기에서 진 이유가 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이라고 할 순 없지.”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 안시연이 예쁘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연정훈의 최측근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번외 경기가 시작되었고, 장외에서 이승우 등이 관전했다. 조이현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전했고, 남자들은 뒤에서 앉아 있었다.부승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심코 입을 열었다.“주 대표님은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사업을 하시는 건가요?”주지혁은 부승원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몸을 뒤로 기대고 조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이현이 같은 여자친구를 뒀으니, 앞으로 주 대표님 사업은 승승장구 할수 있겠네요.”이승우도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끼어들었다.“예를 들면 어떻게 승승장구할 것 같다는 거지?”“당연히 인맥으로겠지...”이승우가 피식 웃었다.‘풉, 인맥은 무슨, 뇌물 공세겠지...’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도 모자라, 예쁜 비서까지 데리고 온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틀림없다는 것을 두 사람도 진작에 알아챘다. 기회를 틈타 예쁜 비서를 그들에게 넘기려는 속셈을 말이다.주지혁의 입꼬리가 약간 굳어졌다. 그는 물론 부승원의 비아냥거리는 어조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우스운 상황을 만든 조이현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경기장에서 몇십 번의 라운드가 계속됐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탁!”라켓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하게 들려왔다. 안시연이 위험한 공을 되받아친 소리였다.장외에서 이승우가 박수갈채를 보냈다.“나이스 샷!”연정훈도 그녀를 바라보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다 시선이 안시연의 가슴에 꽂히자, 덤덤한 척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백핸드로 정면 타를 날렸다.구력이 너무 센 데다가 구속도 너무 빨랐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도 받아치기 어려웠다. 한우빈과 그의 파트너, 두 사람 모두 수비에 실패했다.첫 라운드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승리로 끝났다.안시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했던 안시연은 격렬하게 운동하고 나니 당이 떨어진 듯 무기력해졌다.다음 라운드가 다시 시작될 줄 알고 숨을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안시연 쪽으로 쏠렸다. 다만 연정훈은 관심 없다는 듯이 생수병 마개를 비틀고 물 한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가 연정훈을 오해했던 것이었다.“안시연 씨?”한우빈의 파트너가 다시 한번 부르자, 안시연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안시연과 주지혁은 진작에 헤어졌으니, 주지혁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 주지혁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정훈의 앞에서 안시연이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주지혁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시연의 거침없는 말투에 주지혁의 눈빛은 다시 어두워졌다.“남자친구도 없는데 왜 우리 연 대표님을 보는 척도 안 해요?”이승우가 짓궂게 말했다.“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안시연은 뜸을 들이다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지혁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예전엔 주지혁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안시연은 주지혁이라는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상하고 도도한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자격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부인하면 오히려 주지혁의 자격지심을 건드릴 수 있어. 할머니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쩔쩔매며 망설이는 안시연의 모습은 마치 묵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지혁의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이승우는 그제야 곁에 있던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휴, 이번엔 물 건너갔네...”연정훈은 손에 든 생수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작은 행동에도 안시연은 가슴이 뜨끔했다.이때, 연정훈이 씁쓸하게 말했다.“상대가 일편단심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안시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이승우와 부승원이 경기하러 경기장으로 나가자, 자리에는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안시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땀이 많이 나서 잠시 샤워만 하고 오겠다며 조이현에게 양해를
주지혁이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한발 한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샤워하고 나온 후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샤워장에서 나온 후 생수 한 병을 사서 복도에 앉아 있었다.“안시연 씨?”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승우와 부승원이었다.“이승우 씨, 변호사님!”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이승우가 먼저 물었다.“어디 아프세요? 테니스 경기 때 무리했던 거 아니에요?”안시연은 지금 컨디션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더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더위? 더위 먹은 거라고 해도 방심하지 마세요.”이승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건네주었다.“이거 가지고 3층 A1 라운지로 올라가시면 제가 의사를 불러올게요.”“아닙니다.”안시연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이승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우리 사이에 뭘 사양해요. 한번 친구는 평생 친구죠.”“...”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부승원도 입을 열었다.“A1 라운지는 개인 라운지가 아니고 프라이빗한 공간도 아닙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거기서 푹 쉬고 나오세요. 카드는 프런트에 반납하면 돼요.”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쳤던 안시연은 개인 라운지가 아니라면 마음 놓고 쉬다가 내려와도 된다는 생각에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이승우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어서 가서 쉬세요.”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그런데 안시연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자마자 이승우가 부승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우리 부승원 변호사님, 멀쩡한 얼굴로 진지하게 헛소리하면 되나요?”부승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에 놓인 이승우의 손을 아래로 내려놨지만, 이승우는 또다시 올려놓으
연정훈이 말을 잇기도 전에 주지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연 교수님?”연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빨갛게 달아오른 안시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요?”“아까 너무 바빠서 미처 감사하다고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요. 지난번 성진대학교 동문회에서 교수님 덕분에 조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안시연은 조금 놀라웠다. 주지혁이 먼저 연정훈에게 동문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안시연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연정훈이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 아까보다 더 가까이 밀착했다. 안시연은 고개를 들면 연정훈과 닿을 것 같았다.연정훈은 주지혁에게 대답하지 않았고 기분이 언짢아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대답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았고 할 말을 이어갔다.“바쁘신 분이라 잊으셨나 봐요. 지난번에 제가 후배와 함께 인사드렸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안시연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제야 주지혁의 의도가 이해됐다. 주지혁은 연정훈의 태도를 떠보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연정훈이 그들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두려워했다.‘후배? 정말 웃기지도 않네... 이렇게 선을 긋는 건가?’연정훈도 주지혁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시선은 안시연의 빨간 입술 위에 떨어졌다. 연정훈은 다시 한번 반복했다.“후배?”안시연은 그 두 글자를 듣고 조롱받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이 말을 이었다.“그날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연정훈이 이렇게 말하자, 주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연정훈이 기억 안 난다고 말했다는 건 그들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이어서 두 사람은 본론으로 들어가 잠깐 대화를 나눴다. 안시연은 두 사람의 대화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통화가 끝나자,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연정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지만, 안시연은 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도대체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양지원은 모르는 척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양혁수는 콧방귀를 뀌었다.“...쳇.”양지원은 어이없었다.“...”‘이 녀석.’그녀는 혀를 차더니 휴지를 던져 그의 어깨를 툭 쳤다.‘누구한테 감히 쳇이야?’양혁수는 차갑게 말했다.“변백호, 그 입이 가벼운 놈이 또 다 말했죠?”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꽤 영리하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구경이라도 하듯 미소를 지었다.“왜? 변여름한테 당해서 마음 아파 집에 틀어박힌 거야?”양혁수는 인정하지 않았다.“대표는 연차 써서 그냥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예요.”‘아무 이유도 없어.’양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변여름과는 무관해?”“꼬맹이 하나 때문에 내가 진지할 이유 없어요.”“그래.”양지원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의 얼굴 옆에 툭 내려놓았다.양혁수는 흘끗 보았다.“뭐예요?”“변씨 가문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야. 한 번 가봐.”양혁수의 머릿속을 변여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했다.“안 갈 거예요.”“왜?”“귀찮아요.”“우리 두 집안이 가까운 사이인데 네가 안 가면 보기 좋지 않아.”양지원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문득 말투를 바꿨다.“아니면 변여름을 마주칠까 봐 가기 싫은 거야?”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양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지. 꼬맹이가 장난을 친 것뿐이야. 너는 어른이잖아. 그렇게 옹졸하게 굴지 마. 한번 가서 축하도 해주고 그 아이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안심시켜.”“말이 쉽죠.”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양지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양지원은 그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 별일 아니잖아.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비웃는 듯한 말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지만 변여름은 끝내 그에게 손목시계를 선물로 남겼다.그녀가 변씨 가문의 군수 공장을 떠나기 전에 직접 만든 시계였다. 정교한 내부 구조를 갖추었으며 변씨 가문의 안전망과 연결되어 있어 자기방어는 물론 위급 시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시계와 봉투를 받아들었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채 서재 서랍에 넣고 잠갔다.사실 봉투 안에는 다른 것이 없었고 오직 시계 사용 설명서만 들어 있었다.변여름은 언제나 양혁수가 쉽게 속고 더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떠났지만 변여름은 그가 평안하길 바랐다.이 뜻밖의 재앙은 갑자기 찾아왔다가 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양혁수는 두 달 동안 무료 점심을 얻어먹었지만 대가는 포장이 조금만 단순해도 불편함을 느끼고 입맛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그는 10일 넘게 집에서 식사를 거르며 끝없는 술자리 속에서 양식을 지겨워서 토할 것 같을 때까지 먹었다.제대로 먹지 못하니 잠도 오지 않았고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그렇게 양씨 도련님은 서른네 살의 나이에 다시 어린아이처럼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보름을 버티던 그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회사도 가지 않으며 집에서 있었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집사는 조용히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지원은 정확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변여름이 갑자기 떠났다는 이야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양혁수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곧장 변백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형제끼리 숨기고 싶은 창피한 일일 텐데 과연 변백호가 솔직히 털어놓을까 싶었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양지원은 10분 동안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속으로 연애는 역시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그것으로 생각하며 변여름에게 손뼉을 쳤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쁜 양석진을 뒤로하고 사랑의 상처에 빠진 불쌍한 양혁수를 만나러 한강시로 향했다.한낮이었지만 양혁수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지만
“할 말은 네 오빠가 이미 다 했어.”양혁수는 여지를 남기지 않고 계속 말했다.“몸이 나았으니 멕하든으로 돌아가. 내가 준비해 줄게.”변여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나직이 말했다.“오빠 집을 나와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어요.”“지도 교수와 팀은 내가 다 준비해서 함께 보내줄게. 집에서도 공부할 수 있어.”변여름은 침묵했다.그는 이미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고 대비책도 마련해 두었다. 마치 그녀를 쫓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녀는 손을 들어 살며시 피로한 눈을 비볐다.“...알았어요.”변여름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자세히 들으면 흐느끼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양혁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쨌든 변여름은 그가 지켜보며 자란 아이였고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덜 장난스러웠다면 아무리 말썽꾸러기라도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감싸주었을 것이다.하지만 변여름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양혁수의 금기를 어겼다.“내일 갈 수 있겠어?”그가 다시 물었다.변여름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축 처졌다. 사실 그녀는 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고 적어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는 전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그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목이 메어 어렵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갈 수 있어요.”양혁수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그녀가 먼저 속삭였다.“혼자 갈 수 있어요. 오빠가 나를 위해 따로 준비해 줄 필요 없어요.”‘오히려 잘 된 거야.’“비행기 타기 전에 알려줘.”변여름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하는 것을 알아챘다. 목이 불편한 상태로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날 정말 감기 걸린 거였어요?”양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가 그런 사소한 일을 떠올릴 줄은 몰랐다.“아니.”그저 기침이 나서 그녀를 속이려고 조금 과장했을 뿐이었다.반대편에서 잠시 침묵하더니 변여름이 말했다.“다행이네요.”양혁수는 입안이 씁쓸해
뉴성에서 변백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초롱초롱한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검은색 책상이 놓여 있었다. 노지혜는 스트랩리스 드레스만 입고 곧고 하얀 다리를 드러낸 채 부드러운 발을 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아이고. 변 선생님, 삐뚤게 발랐어요.”그녀는 발가락을 움직이며 투덜거렸다.변백호는 노지혜를 한번 쳐다보았고 얼굴은 예전처럼 도도했다.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매니큐어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바르는 게 맘에 안 들면 네가 직접 발라.”노지혜는 햇살처럼 빛나는 금발을 하고 있었고 웃을 때 눈은 마법처럼 반짝였다.변백호의 성격에 익숙해진 노지혜는 책상에서 뛰어내려 그의 다리 위에 앉아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나쁜 사람이네요. 변여름 씨가 괜찮은데도 혁수 오빠를 놀리다니요.”변백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왜 혁수가 너에게 오빠가 되는 거야?”노지혜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오빠 아니에요?”“내려가.”‘절대 안 내려갈 거야.’그녀는 아예 허리를 흔들며 더 아래로 내려갔다.변백호는 그녀 때문에 배가 긴장되어 인상을 찌푸렸고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 아래를 세게 쳤다.“얌전히 있어.”그 말이 떨어지자 그의 몸에 달라붙은 노지혜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두 다리를 꽉 조이고 그를 보며 웃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몸에 갖다 대고 스스로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변백호는 침묵했다.“...”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노지혜는 큰 눈을 뜨고 입술을 깨물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2초 동안 멈칫하다가 마주 보는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혼쭐을 내줘야겠어.’...변백호 쪽은 봄처럼 행복했지만 양혁수 쪽은 3일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잤다.변여름은 그날 밤 바로 괜찮아졌다. 의사는 약물 부작용이 심했을 뿐이고 다행히 알레르기는 아니라고 했다.양혁수는 안도하며
“여름이가 너를 좋아해.”쾅!양혁수는 마치 정면으로 총에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변여름과 나눈 애매한 대화들과 그녀와 나눈 친밀한 접촉들이 순식간에 총알로 변해 양혁수에게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그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변백호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바로 이어서 말했다.“여름이는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내가 말렸지만 듣지 않더라고.”“너희 집은 아이 교육을 입으로만 하는 거야? 말을 안 들으면 다른 방법은 없어?”“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름이를 가두기라도 해야 했을까?”변백호가 되물었다.“가두지 않으면 내게 와서 엉뚱한 짓을 하게 놔두는 거야? 내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좀 더 시간이 지나면...”그 말을 하다가 양혁수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말이 막혔다.‘젠장.’그는 힘껏 담배를 빨아들였지만 손에 든 담배는 이미 다 타버렸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온통 짜증스러운 감정들이 가득했고 오직 변백호가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나서 그를 죽도록 때려주어야만 겨우 화가 풀릴 것 같았다.“어쨌든 오늘 밤 변여름을 잘 돌봐줘. 여름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줘.”변백호가 말했다.양혁수는 침묵했다.“...”‘뭐든 다 해줘? 여름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감히 줄 수 있을까?’“나는 변여름을 신경 쓰지 않아. 네 여동생은 네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왜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거야? 변여름이 살아 있다면 나는 바로 떠날 거고 너희 가문 사람들한테 변여름을 지켜보게 하고 회복되면 다시 집에 데려다줘.”변백호가 말했다.“데려갈 수 없어.”“...”“여름이가 회복된 후 이렇게 전해줘. 네가 돌아오고 싶다면 네 운이 좋은 거고 돌아오기 싫다면 네가 알아서 해. 정말 안 되겠으면 2년 정도 숨어 있어.”양혁수는 어이없었다.‘???’‘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그는 역시 남매는 닮는다고 변씨 가문에는
“변여름의 몸에 칩이 이식되어 있어. 내가 여기서 여름의 모든 수치를 모니터링할 수 있어. 방금 여름의 심박수와 혈압이 모두 비정상이었어. 여름이랑 같이 있지? 병원에 데려가 줘. 여름이는 그 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아마 알레르기 반응일 거야.”변백호는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양혁수를 당황하게 했다.양혁수가 변백호의 말의 진의를 판단하려 할 때 변백호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지금 네 기분이나 변여름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여름이가 너와 잠자리를 가졌더라도 즉시 병원에 데려가. 변여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쾅!변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양혁수? 양혁수!”주차장에서 양혁수는 얼굴이 어두운 채 급히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는 마음속으로 상황이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지만 변백호가 한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았다.조금 전 변여름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온몸에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치 얼음물에 담갔듯이 사라졌다.그는 마치 얼음 지옥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약물 알레르기가 빠르게 나타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다.겨우 위층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그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며 길을 가다가 물건에 부딪혔다.사무실에 도착하자 머리가 멍해졌다. 정전 사태를 떠올리며 문이 열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순간적인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다행히 문은 무사히 열렸다.양혁수는 가까운 불을 켜고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시선은 소파 옆에서 쓰러져 있는 변여름에게 고정되었고 그의 마음은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졌다.양혁수는 변여름을 들고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온 순간 검은색 코트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변여름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혁수는 그들이 변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인
양혁수는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그중 변여름과 연결된 시나리오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는 꿈에서라도 어린 시절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 이제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소녀이자 친구의 여동생인 그녀가 그를 이렇게 바보처럼 속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변여름이 오기 전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최근의 시간과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고, 결국 비정한 상업 세계에서 또 한 번의 대가를 치렀다고 체념하려 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자신을 속였든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게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서 힘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건 변백호의 여동생 변여름이었다.‘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양혁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마치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싶은 심정이었다.굴욕과 답답함이 온몸을 뒤덮었고 그 감정들이 서로 뒤엉켜 마치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화산이 터져버린 듯했다.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어졌고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일이 터지면 양혁수가 분명 분노할 것이라고 변여름은 예상했다.하지만 막상 그의 눈에서 거부감과 격렬한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보자 그녀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힘이 빠진 손에서 라이터가 미끄러져 떨어졌다.불꽃이 꺼지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하지만 양혁수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꿰뚫고 있었다.변여름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두려움 때문인지 약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사지는 점점 감각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그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어둠 속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거칠고 빠르게 이어졌다. 순식간에 의자가 날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소리를 듣고 변여름은 양혁수가 진짜로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변여름은 입을 열고 사과하려 했지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혁수 오빠...”양혁수는 들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만
변여름은 심장이 평소와는 다르게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양혁수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자 그녀는 옆으로 누워 겨우 눈을 뜨고 감각에 의존해 그의 방향을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소파 옆에 서서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변여름은 눈을 감고 결심을 내린 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양혁수는 그녀가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이용해 몸을 일으킨 후 그의 주머니에서 일부러 그녀를 겁주기 위해 사용한 라이터를 빼냈다.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자 피해자인 그조차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그녀가 손을 뺄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도를 느끼며 마음이 더 아파왔지만 그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고 그가 준 부드러움의 일부를 더 이상 훔칠 용기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큰 화를 낼 것이었다.시선이 교차하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정상적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혁수 오빠.”가볍고도 무게감 있는 몇 마디가 양혁수의 귀에 들어갔다.그는 잠시 놀란 듯이 멈췄고 그다음에는 몸이 굳어버렸다.변여름은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조여진 손에서 어렵게 손목을 빼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양혁수는 변여름의 손목 위에 흉터를 확실히 느꼈다.얼마 전의 평범한 대화가 양혁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이건 어떻게 된 거야?”‘몇 년 전 오빠와 함께 공장에서 일할 때 제품의 일부가 폭발해서 조각이 날아왔어요.’변여름의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와 조금 전의 호칭이 완벽하게 겹쳤다.양혁수는 마치 누군가 뒤에서 강하게 가격을 당한 듯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는 믿을 수 없는 시선으로 어둠 속의 그녀를 바라보았다.‘불가능해. 절대 불가능해.’그는 최근의 친밀함을 떠올렸다. 조금 전 그는 그녀를 무릎에
변여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허예나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그녀가 양혁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고 늘 다정했다.“오빠,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워요.”그녀가 불쑥 감사를 전하자 마치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양혁수의 감정이 요동쳤다. 마치 그녀가 그가 오늘 밤 무엇을 하려는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둠과 마주한 채 더욱 불쾌해졌다.변여름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지만 막상 현실이 닥치자 스스로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의 손에는 땀이 맺혔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변여름은 그를 속여 이토록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곧 자신을 싫어하는 눈빛으로 바라볼까 두려웠다.그 생각이 스치자 코끝이 찡해졌고 언제부터인지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믿기지 않아 손을 올려 얼굴을 닦았고 그것이 눈물임을 깨달았다.이 감정은 복잡했다. 누군가로 인해 가슴이 저미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니 마치 감정이 없던 기계가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자각한 듯한 기분이었다.그제야 변여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올라와 본능적으로 의자를 짚고 일어서려 했다.그 순간 그녀의 코끝이 먹먹해지는 소리를 들은 양혁수가 무언가를 깨닫고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어디 가?”변여름은 숨이 턱 막혔다. 눈을 감고 빠르게 감정을 다잡았다.“아니에요. 그냥... 오래 앉아 있으려니 불편해서요.”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자가 끌려가며 그녀는 양혁수와 정면으로 마주 서게 되었다.그는 단숨에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고 변여름은 당황해 숨이 멎을 듯했다.“오빠.”양혁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감싸고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었다.변여름은 그의 뜨거운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양혁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