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에는 잿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다음 날 다시 출근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졸업하자마자 주지혁의 회사에 입사했던 안시연은 주지혁이 정한 ‘사내 연애 금지' 규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지혁의 제안대로 비밀 연애를 승낙했다. 하지만 안시연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재무팀 주임 자리를 꿰찼다.다시 회사에 돌아왔더니, 주지혁이 일부러 그녀를 재무팀 주임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재무팀 보조직으로 발령 냈다.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은 모두 그녀가 주지혁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주지혁이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고 몰래 트집을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사흘이 지나자, 안시연은 이미 피곤함에 찌들대로 찌들었다.업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힐끔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다름 아닌 조이현이 회사로 방문한 것이었다.안시연은 기회를 노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저기요, 이리 좀 와보실래요?”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안시연은 밖에 있던 주지혁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네, 조이현 씨.”그러자 조이현이 다짜고짜 물었다.“혹시 그쪽이 안시연 씨인가요?”“네, 그렇습니다.”조이현은 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짐 챙겨서 나오세요. 주 대표님과 저를 따라 외근 좀 다녀오셔야겠어요.”말을 마친 조이현은 안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각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클라이언트와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선 주지혁은 안시연이 조이현을 따라 나
안시연은 자기가 너무 예민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연 대표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가 떠올랐다.몇 분 지나지 않아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프타임으로 들어왔는데, 맨 앞에 선 남자는 바로 연정훈이었다.테니스복 차림의 연정훈은 이승우의 차림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가뜩이나 더운 날씨라 얼굴이 붉어졌던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자,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자꾸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정훈 오빠!”연정훈이 가까이 다가오자, 조이현은 바로 다가가 인사했고 겸사겸사 주지혁을 소개했다.안시연은 뒤에 서서 주지혁이 순간 벙찌더니 온몸이 굳어진 것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얼마 전 주지혁과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가했을 때, 연정훈도 자리에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주지혁은 연정훈이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것이었다.안시연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못 본 듯, 테니스 라켓을 한쪽에 맡기고 물병을 따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연정훈이 경기장에서 돌아오자, 모든 관심이 그에게로 집중됐다.부승원이 물었다.“마지막 공은 어떻게 된 거야?”연정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실수지 뭐.”이승우가 피식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실수? 에이, 설마 우리 쪽에서 미녀가 온 걸 보고 잠깐 정신 팔린 거 아니겠지?”연정훈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안시연을 한 번 보았다.안시연은 갑자기 연정훈과 눈을 마주치자,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사이, 조이현이 안시연을 대신해서 그녀를 소개하고 있었다.“정훈 오빠, 안시연 씨에요. 지혁 씨 회사 직원이에요.”연정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물병을 내려놓고, 이승우에게 말했다.“내가 졌어, 기량이 남보다 못한 걸 인정해. 경기에서 진 이유가 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이라고 할 순 없지.”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 안시연이 예쁘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연정훈의 최측근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번외 경기가 시작되었고, 장외에서 이승우 등이 관전했다. 조이현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전했고, 남자들은 뒤에서 앉아 있었다.부승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심코 입을 열었다.“주 대표님은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사업을 하시는 건가요?”주지혁은 부승원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몸을 뒤로 기대고 조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이현이 같은 여자친구를 뒀으니, 앞으로 주 대표님 사업은 승승장구 할수 있겠네요.”이승우도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끼어들었다.“예를 들면 어떻게 승승장구할 것 같다는 거지?”“당연히 인맥으로겠지...”이승우가 피식 웃었다.‘풉, 인맥은 무슨, 뇌물 공세겠지...’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도 모자라, 예쁜 비서까지 데리고 온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틀림없다는 것을 두 사람도 진작에 알아챘다. 기회를 틈타 예쁜 비서를 그들에게 넘기려는 속셈을 말이다.주지혁의 입꼬리가 약간 굳어졌다. 그는 물론 부승원의 비아냥거리는 어조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우스운 상황을 만든 조이현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경기장에서 몇십 번의 라운드가 계속됐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탁!”라켓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하게 들려왔다. 안시연이 위험한 공을 되받아친 소리였다.장외에서 이승우가 박수갈채를 보냈다.“나이스 샷!”연정훈도 그녀를 바라보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다 시선이 안시연의 가슴에 꽂히자, 덤덤한 척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백핸드로 정면 타를 날렸다.구력이 너무 센 데다가 구속도 너무 빨랐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도 받아치기 어려웠다. 한우빈과 그의 파트너, 두 사람 모두 수비에 실패했다.첫 라운드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승리로 끝났다.안시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했던 안시연은 격렬하게 운동하고 나니 당이 떨어진 듯 무기력해졌다.다음 라운드가 다시 시작될 줄 알고 숨을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안시연 쪽으로 쏠렸다. 다만 연정훈은 관심 없다는 듯이 생수병 마개를 비틀고 물 한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가 연정훈을 오해했던 것이었다.“안시연 씨?”한우빈의 파트너가 다시 한번 부르자, 안시연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안시연과 주지혁은 진작에 헤어졌으니, 주지혁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 주지혁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정훈의 앞에서 안시연이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주지혁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시연의 거침없는 말투에 주지혁의 눈빛은 다시 어두워졌다.“남자친구도 없는데 왜 우리 연 대표님을 보는 척도 안 해요?”이승우가 짓궂게 말했다.“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안시연은 뜸을 들이다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지혁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예전엔 주지혁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안시연은 주지혁이라는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상하고 도도한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자격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부인하면 오히려 주지혁의 자격지심을 건드릴 수 있어. 할머니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쩔쩔매며 망설이는 안시연의 모습은 마치 묵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지혁의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이승우는 그제야 곁에 있던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휴, 이번엔 물 건너갔네...”연정훈은 손에 든 생수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작은 행동에도 안시연은 가슴이 뜨끔했다.이때, 연정훈이 씁쓸하게 말했다.“상대가 일편단심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안시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이승우와 부승원이 경기하러 경기장으로 나가자, 자리에는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안시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땀이 많이 나서 잠시 샤워만 하고 오겠다며 조이현에게 양해를
주지혁이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한발 한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샤워하고 나온 후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샤워장에서 나온 후 생수 한 병을 사서 복도에 앉아 있었다.“안시연 씨?”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승우와 부승원이었다.“이승우 씨, 변호사님!”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이승우가 먼저 물었다.“어디 아프세요? 테니스 경기 때 무리했던 거 아니에요?”안시연은 지금 컨디션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더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더위? 더위 먹은 거라고 해도 방심하지 마세요.”이승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건네주었다.“이거 가지고 3층 A1 라운지로 올라가시면 제가 의사를 불러올게요.”“아닙니다.”안시연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이승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우리 사이에 뭘 사양해요. 한번 친구는 평생 친구죠.”“...”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부승원도 입을 열었다.“A1 라운지는 개인 라운지가 아니고 프라이빗한 공간도 아닙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거기서 푹 쉬고 나오세요. 카드는 프런트에 반납하면 돼요.”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쳤던 안시연은 개인 라운지가 아니라면 마음 놓고 쉬다가 내려와도 된다는 생각에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이승우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어서 가서 쉬세요.”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그런데 안시연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자마자 이승우가 부승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우리 부승원 변호사님, 멀쩡한 얼굴로 진지하게 헛소리하면 되나요?”부승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에 놓인 이승우의 손을 아래로 내려놨지만, 이승우는 또다시 올려놓으
연정훈이 말을 잇기도 전에 주지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연 교수님?”연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빨갛게 달아오른 안시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요?”“아까 너무 바빠서 미처 감사하다고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요. 지난번 성진대학교 동문회에서 교수님 덕분에 조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안시연은 조금 놀라웠다. 주지혁이 먼저 연정훈에게 동문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안시연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연정훈이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 아까보다 더 가까이 밀착했다. 안시연은 고개를 들면 연정훈과 닿을 것 같았다.연정훈은 주지혁에게 대답하지 않았고 기분이 언짢아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대답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았고 할 말을 이어갔다.“바쁘신 분이라 잊으셨나 봐요. 지난번에 제가 후배와 함께 인사드렸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안시연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제야 주지혁의 의도가 이해됐다. 주지혁은 연정훈의 태도를 떠보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연정훈이 그들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두려워했다.‘후배? 정말 웃기지도 않네... 이렇게 선을 긋는 건가?’연정훈도 주지혁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시선은 안시연의 빨간 입술 위에 떨어졌다. 연정훈은 다시 한번 반복했다.“후배?”안시연은 그 두 글자를 듣고 조롱받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이 말을 이었다.“그날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연정훈이 이렇게 말하자, 주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연정훈이 기억 안 난다고 말했다는 건 그들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이어서 두 사람은 본론으로 들어가 잠깐 대화를 나눴다. 안시연은 두 사람의 대화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통화가 끝나자,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연정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지만, 안시연은 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뭐가요?”“내가 떠나면 네가 다시 재혼할까 봐 두려워.”“...”양지원은 어이없어 잠시 눈을 감았다.그녀는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했는데 양석진은 그때 하필 그런 농담을 던졌다.“이 부분은 위로할 수 없네요. 아직 나는 젊고 만약 당신이 운이 따라주지 않아 중간에 떠난다면 그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재혼할 거예요.”양지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재혼만 할 거 아니라 시연의 성까지 바꿀 거예요.”양석진은 웃으며 말했다.“시연이 내 성을 따랐다고? 우리 모두 너의 성을 따랐던 거 아니었어?”양지원 잠시 멈칫했다.“그럼 당신 성도 바꿀 거예요. 더 이상 나와 같은 성을 쓰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 말이 나오자 양석진은 마음속으로 조금 긴장했지만 그는 평생의 고생이 결국 양지원의 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했다.“정말 냉정하네.”양지원은 코끝이 찡한 느낌을 참으며 숨을 고르고 말했다.“알았으면 잘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외로운 노인이 될 거고 아무도 당신을 위해 복수를 해줄 사람이 없을 거예요.”“알았어. 꼭 살아 있을게.”그는 말하며 몸을 일으켰고 양지원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그가 눈치채지 않게 하려고 했다.그 순간 눈물이 통제 없이 떨어졌고 양지원이 그것을 숨길 틈도 없이 양석진은 이미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지원아 울지 마. 내가 잘 살아 있을게. 아무 일 없을 거야.”그 말을 듣자 양지원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고 양석진을 꽉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양석진의 심장 소리만이 그녀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저택 위에서는 양시연과 연정훈의 통화가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연정훈은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했지만 양시연은 계속 말했다:“기다려볼게요. 아마 밤중에 결과가 나올지도 몰라요.”연정훈은 차라리 말했다:“해가 밝으면 내가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오
별장 뒤 마당에는 유럽풍의 빈티지 소형 램프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저녁 바람이 불 때마다 불꽃이 아련히 흔들렸다.마당에는 넓게 핀 장미들은 벌레 소리와 어우러져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하얀 작은 저택 안에서는 창문이 열려 있었고 양지원은 망고 밥을 정성스럽게 플레이팅하고 있었다.양석진은 앞 저택에서 내려와 계단을 따라 작은 저택의 문 앞에 도착했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물 한 잔을 따라 대리석 조리대에 기대어 여유롭게 양지원을 바라보며 조용히 분위기를 즐겼다.“쓰읍.”양지원은 과일을 자르다 말고 갑자기 손을 움츠렸다.“손 베였어?”양석진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아니에요.”양지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두 손을 양석진에게 보여주었고 확실히 멀쩡했다.양석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다시 일을 시작하도록 놔두었다.“안 되겠으면 목표를 바꿔도 돼. 라면을 끓이거나 주스를 만들어도 난 만족할 거야.”양석진이 장난스레 비꼬자 양지원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곧 성공해요. 이 찹쌀밥은 정말 잘 쪄졌거든요.”양석진은 평소처럼 칭찬으로 분위기를 맞췄다.“딱 봐도 알겠네. 윤기가 잘잘 흐르고 밥알이 조화롭게 흩어져 있어.”양지원은 그의 과한 표현에 잠시 침묵했다.“...”“오빠.”“응.”“망고 두 배로 더 줄게요.”양석진은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좋아.”둘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양지원은 고개를 숙여 플레이팅에 집중했지만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았다.눈이 마주친 찰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다시 망고 장식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양석진은 이를 눈치채고 물잔을 내려놓은 뒤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칼을 건네받고 양지원의 손을 물 아래로 가져가 씻어주며 부드럽게 손을 살폈다.그의 시선은 오롯이 그녀의 손에 머물렀지만 양지원은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물이 멈추자 그는 티슈를 꺼내 그녀의 손을 닦아주었다.손을 막 떼어
양씨 가문은 한강시에서 수년간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이전에도 여러 곳에 집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양석진과 양지원이 예전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양지원의 취향에 맞는 여러 별장을 체험하고 있었다.양창수는 길에서 농담을 던지며 말했다.“양석진 씨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도 부잣집 양지원 씨를 만나서 나까지 잘 먹고 잘살게 됐어요.”그 말을 듣고 양시연은 자신이 너무 걱정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마 양석진은 그냥 작은 병일 거라고 느꼈다.해변가 별장에 도착하자 차는 지하 주차장까지 들어갔고 차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양시연은 서둘러 부모님을 만나러 올라갔고 위층에 도착했을 때 바로 수영장으로 안내되었다.넓은 옥상 공간에서 유리문을 열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양지원은 편안하게 물속에서 수영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우아하고 여유로웠다.그 옆에서 양석진은 양지원의 수영 시간을 재고 있었고 이 광경을 보고 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 늦은 시간에 여기는 왜 왔어?”양지원은 물에서 나와서 양시연에게 말했다.양시연은 허리를 붙잡고 조금은 불쌍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아빠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아무 일도 없어.”양지원은 라운지로 나와서 집사에게 건네받은 수건을 덮으며 말했다.“연정훈은 죽고 싶은 건가? 너에게 이런 쓸데없는 소식을 전하고 널 혼자서 여기까지 오게 하고 말이야.”양시연은 연정훈 이야기를 꺼냈다.“정훈 씨가 오려고 했는데 제가 말렸어요.”“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왔어야지.”연정훈이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양시연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양지원은 양시연의 배를 보고 걱정이 되어 혹시라도 그녀가 미끄러져 넘어질까 봐 양시연이 수영장을 돌아서 양석진에게 가는 걸 막았다.양석진은 수영장을 한 바퀴 돌아서 양시연과 양지원 두 사람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임신했는데도 이렇게 조심성이 없네. 아무리 걱정해도 전화 한 통은 했어야지.양시연이 앉고 나서야 양석
양시연은 양석진이 한강시에 머무는 이유가 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상황을 확인하러 가자.”연정훈은 곧 양시연의 사무실에 도착해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보통 아버님께서 고의로 정보를 차단하려면 내게까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야 하는데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야. 이건 아버님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일 수 있어.”연정훈의 말은 그럴듯했지만 양시연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그때 진수빈이 들어와 짐을 모두 챙겼다고 말하자 양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 혼자 갈게요.”연정훈은 즉시 반대했다.“난 너랑 함께 갈 거야.”“괜찮아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우리는 아직 상황을 모르잖아요. 당신과 내가 갔다가 왔다 갔다 하면 며칠이나 걸릴지 몰라요. 당신은 일을 열심히 해요.”“너의 일에 비하면 업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연정훈은 말했다.양시연은 마음속으로 감동했지만 이성은 여전히 우위를 차지했고 그녀는 패드를 정리하며 말했다.“인생은 길어요. 언제든지 일이 생길 수 있는데 당신이 항상 나 때문에 일을 내려놓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혼자 가도 괜찮아요. 게다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도 많고 당신이 일을 놓고 나랑 가는 게 오히려 부담될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옆에서 연정훈을 안으며 말했다.“됐어요. 정훈 씨는 여기서 잘 있어요. 난 아빠를 보러 갈게요. 어쩌면 별일 없을 수도 있겠죠.”그녀는 이 말을 하며 자신을 위로하고 긴장을 풀려 했다.연정훈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양시연을 안은 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양시연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가 경인에 남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나 안 갈게. 대신 약속해 어떻게 되든 꼭 자신을 잘 지키겠다고.”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두 사람은 정인에서 저녁을 먹고 연정훈은 임성원에게 양시연을 한강시로 안전하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연정훈은
양시연이 임신한 후 양지원은 경인에 없을 때도 자주 전화를 걸었으나 이번에는 시간이 좀 지나갔다.양시연이 먼저 전화를 걸자 양지원은 말했다.“한강시가 더워져서 요즘 기운이 없네.”“언제 돌아올 거예요? 아빠랑 둘 다 한강시에 오래 있었잖아요.”“곧 돌아갈 거야. 경인에 며칠 지내고 시원한 곳을 찾아야겠어.”양지원이 말했다.모녀는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양시연은 전화를 끊었고 그때 양시연은 양석진이 한강시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니면 양석진이 경인에 있을 때처럼 자주 오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그녀는 이 의문을 품고 점심때 연정훈에게 물어봤는데 그가 말했다.“부모님 사이가 좋은 거지. 비록 계속 오가더라도 아버님께서 즐기고 계신 거야.”“당신은 잘 아네요.”“같은 남자니까 당연히 알지.”양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연정훈은 계속해서 밥을 먹으라며 그녀를 달랬다. 그러면서 수수께끼의 답을 다시 꺼내었고 양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조금만 힌트를 줄게요.”연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말해 봐.”양시연은 하나씩 나열했다.“태양계 주요 행성들의 비교 분석, 행성이 되지 못한 태양계 천체들, 태양계 외 행성 탐사 진행 상황.”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기댔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최근 천문학에 관심이 생겼어?”양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나는 항상 관심 있었어요.”‘바보.’연정훈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그럼 최근에 중요한 연구 발견이 있었어? 갑자기 내가 바보라고 말하는 거 보니 내가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됐어요. 말하면 말할수록 당신이 더 바보 같아요.”연정훈은 무안해하며 한숨을 쉬었는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잠시 전화를 내려놓고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주지혁이 들어왔다.“연 대표님, 이 두 가지 신청서에 서명해 주세요.”
“정말 못 맞추겠어.”연정훈은 3초 동안 불을 켜고 고민하다 결국 또다시 항복하자 양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한껏 비웃었다.“뭐든 시간제한은 있어야지. 퀴즈를 내면 답도 공개해야 하는 법 아니야?”연정훈이 항의하듯 말하자 양시연은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네.’이 문제의 복잡함으로 봐서 양시연이 먼저 말해주지 않는 이상 그는 아마 평생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혹여 가능성이 있다면 언젠가 그가 소현주를 떠올리며 과거를 다시 되짚어보고 그녀와의 기억 속 단서를 양시연의 성격과 겹쳐 보며 답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연정훈이 소현주를 떠올릴지는 알 수 없었고 설령 떠올린다 해도 결혼 이후 양시연은 연정훈과 문학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과거의 유치한 발언들을 다시 끄집어내기는 더욱 어려워 보였다.결론적으로 연정훈은 혼자서 이 문제를 풀 수 없었다. 결국 양시연이 입을 열었다.“딱히 시간제한은 없어요. 대신 날 기쁘게 해봐요. 내가 기분 좋아지면 힌트를 줄게요.”“진짜지?”“네.”‘좋아.’연정훈은 딸깍하고 불을 껐다. 양시연은 그가 곧 달콤한 말을 할 줄 알고 기대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 이어졌다.어두운 공간에서 연정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오더니 부드럽게 그녀 위로 몸을 기울였다. 익숙한 가까움이 느껴지자 그녀는 깜짝 놀라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뭐 하는 거예요...”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머리맡에 눌러두며 배는 조심히 피했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양시연의 입술을 지나 귀끝에 닿았을 때 그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네가 말했잖아. 널 기쁘게 해달라고.”양시연은 침묵했다.“...”‘아. 변태.’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연정훈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손이 그녀의 잠옷을 살며시 올리며 피부를 스칠 때 저도 모르게 얕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결국 연정훈의 방식은 여전히 정확하고 효과적이었다.조용히 밤이 깊어졌고 두
연정훈은 어리둥절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난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도 내게 바보라고 한 적이 없었어.”양시연은 가볍게 대답했다.“그럼 오늘부터 생긴 거네요.”연정훈은 어이없어했다.“...”연정훈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한 후 양시연에게 다가가서 진지하게 말했다.“힌트 좀 줄래?”양시연은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스스로 생각해요.”연정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도 생각할 방향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없어요.”양시연의 막무가내 태도에 연정훈은 잠시 멈칫한 후 웃음을 참지 못했다.연정훈은 팔꿈치를 지탱하며 옆으로 누워 그녀를 바라보고는 허리를 감쌌다.“내가 계속 못 맞추면 계속 만지지 못하는 거야?”“당신이 알아서 해요.”양시연은 교만하게 말한 후 연정훈은 그녀의 귀에 입을 맞췄다.그녀는 작은 신음을 내며 눈을 뜨고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다시 해봐요.’연정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알았어. 안 할게.’연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이 항복을 의미했다.양시연은 흡족하게 입을 굳히며 돌아서서 그를 보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며 입술을 대고 말했다.양시연은 그만하라는 듯이 손으로 귀를 가렸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임산부는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고. 내가 계속 못 맞추면 아마 네가 더 기분이 안 좋을 거잖아.”양시연은 눈을 뜨며 물었다.“내가 뭐가 기분이 안 좋을 게 있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의 굳은 손가락이 그녀의 섬세한 피부와 마찰하면서 기분 좋은 간질거림을 느끼게 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무언의 암시를 즉시 느끼고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손목을 뻗어 그를 밀쳐냈다.연정훈은 상황을 보고 더욱 버릇없이 굴며 가슴을 그녀의 등 뒤에 대고 고개를 숙여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콤한 말로 달래며 말했다.“내가 바보여서 못 맞춘 건 내 잘못이야. 제발 너 자신
‘불가능해.’양시연은 연정훈과 수없이 얽혀 있었던 소현주를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었고 소현주의 절박한 부탁도 양시연은 그냥 무시했다.양시연은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소현주가 살고 싶다면 알아서 처신하는 게 소현주에게도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병원을 나오자마자 양시연은 임성원에게 모든 절차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지시했다.차에 올라타자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불룩해진 배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아기야. 이제 집에 가자. 바보 같은 아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차가 출발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 연정훈은 이미 집에 있었다.그는 방금 접대를 마치고 돌아온 듯 약간 술에 취한 상태로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양시연을 기다렸다.양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연정훈의 뒤로 다가가 귀를 살짝 꼬집었다.연정훈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성숙하고 근엄한 표정 사이로 미묘한 놀라움이 흘러나왔다.그가 오후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양시연은 차갑게 굴었는데 돌아왔을 때 그녀의 태도가 달라져 있어 그는 의아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순수하고 어리숙한 눈빛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연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두 걸음 빠르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안았다.“어디 갔다 왔어?”양시연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임성원 씨가 말 안 했어요?”연정훈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물어봤는데 아주 단호하게 알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말도 안 돼요. 당신 부하가 감히 당신한테 그렇게 말해요?”“예전엔 내 부하였지. 지금은 당신 사람이 되었으니 나한테도 눈치 주는 게 당연한 거지.”연정훈은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고 양시연은 콧소리를 내며 식탁에 앉아 오렌지 하나를 들어 그의 손에 쥐여줬다.“빨리 까줘요. 우리 아가가 먹고 싶대요
소현주는 이메일을 열자마자 두 장의 사진을 확인했고 양시연은 연이어 몇 장의 사진을 더 보냈다.사진을 찍는 양시연의 동작이 반복될 때마다 소현주의 온몸은 마치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말도 안 돼.”소현주는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양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이 이메일 양시연 씨가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다른 사람한테서 얻은 거죠?”소현주는 자신과 대화를 나눈 사람 그리고 연정훈의 질문에 답한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절대 양시연일 리 없었다고 생각했다.양시연은 소현주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던 듯 잔잔히 웃으며 손으로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소현주 씨뿐만 아니라 나도 믿기 어려운 일이에요.”“가식 떨지 마요.”소현주는 그녀의 말을 끊고 억눌린 감정을 더는 참지 못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양시연 씨일 리가 없어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그녀의 단호한 부정 속에는 절망과 무너진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양시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연정훈 씨는 아직 몰라요.”소현주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시연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곧 알게 될 거예요.”양시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연정훈 씨와 진심으로 소통했던 사람은 나였고 결국 정훈 씨가 사랑하고 곁에 남길 선택한 사람도 나예요. 소현주 씨의 의심은 틀리지 않았어요. 사실 나에겐 이메일을 살 능력도 있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말하면 연정훈 씨는 무조건 믿을 테니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훈 씨는 나라는 걸 알았을 때 기꺼이 믿으려고 할 거예요. 정훈 씨가 얼마나 놀라고 기뻐할지 전 이미 상상이 가거든요.”“닥쳐!”소현주는 비명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냈고 행동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방 안을 서성이며 옷과 머리를 마구잡이로 잡아 뜯던 소현주는 기진맥진한 끝에 침대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소란이 커지자 간호사가 문을 두드렸다.양시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