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는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그중 변여름과 연결된 시나리오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는 꿈에서라도 어린 시절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 이제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소녀이자 친구의 여동생인 그녀가 그를 이렇게 바보처럼 속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변여름이 오기 전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최근의 시간과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고, 결국 비정한 상업 세계에서 또 한 번의 대가를 치렀다고 체념하려 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자신을 속였든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게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서 힘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건 변백호의 여동생 변여름이었다.‘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양혁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마치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싶은 심정이었다.굴욕과 답답함이 온몸을 뒤덮었고 그 감정들이 서로 뒤엉켜 마치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화산이 터져버린 듯했다.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어졌고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일이 터지면 양혁수가 분명 분노할 것이라고 변여름은 예상했다.하지만 막상 그의 눈에서 거부감과 격렬한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보자 그녀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힘이 빠진 손에서 라이터가 미끄러져 떨어졌다.불꽃이 꺼지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하지만 양혁수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꿰뚫고 있었다.변여름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두려움 때문인지 약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사지는 점점 감각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그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어둠 속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거칠고 빠르게 이어졌다. 순식간에 의자가 날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소리를 듣고 변여름은 양혁수가 진짜로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변여름은 입을 열고 사과하려 했지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혁수 오빠...”양혁수는 들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만
“변여름의 몸에 칩이 이식되어 있어. 내가 여기서 여름의 모든 수치를 모니터링할 수 있어. 방금 여름의 심박수와 혈압이 모두 비정상이었어. 여름이랑 같이 있지? 병원에 데려가 줘. 여름이는 그 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아마 알레르기 반응일 거야.”변백호는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양혁수를 당황하게 했다.양혁수가 변백호의 말의 진의를 판단하려 할 때 변백호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지금 네 기분이나 변여름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여름이가 너와 잠자리를 가졌더라도 즉시 병원에 데려가. 변여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쾅!변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양혁수? 양혁수!”주차장에서 양혁수는 얼굴이 어두운 채 급히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는 마음속으로 상황이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지만 변백호가 한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았다.조금 전 변여름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온몸에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치 얼음물에 담갔듯이 사라졌다.그는 마치 얼음 지옥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약물 알레르기가 빠르게 나타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다.겨우 위층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그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며 길을 가다가 물건에 부딪혔다.사무실에 도착하자 머리가 멍해졌다. 정전 사태를 떠올리며 문이 열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순간적인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다행히 문은 무사히 열렸다.양혁수는 가까운 불을 켜고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시선은 소파 옆에서 쓰러져 있는 변여름에게 고정되었고 그의 마음은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졌다.양혁수는 변여름을 들고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온 순간 검은색 코트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변여름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혁수는 그들이 변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인
“여름이가 너를 좋아해.”쾅!양혁수는 마치 정면으로 총에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변여름과 나눈 애매한 대화들과 그녀와 나눈 친밀한 접촉들이 순식간에 총알로 변해 양혁수에게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그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변백호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바로 이어서 말했다.“여름이는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내가 말렸지만 듣지 않더라고.”“너희 집은 아이 교육을 입으로만 하는 거야? 말을 안 들으면 다른 방법은 없어?”“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름이를 가두기라도 해야 했을까?”변백호가 되물었다.“가두지 않으면 내게 와서 엉뚱한 짓을 하게 놔두는 거야? 내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좀 더 시간이 지나면...”그 말을 하다가 양혁수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말이 막혔다.‘젠장.’그는 힘껏 담배를 빨아들였지만 손에 든 담배는 이미 다 타버렸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온통 짜증스러운 감정들이 가득했고 오직 변백호가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나서 그를 죽도록 때려주어야만 겨우 화가 풀릴 것 같았다.“어쨌든 오늘 밤 변여름을 잘 돌봐줘. 여름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줘.”변백호가 말했다.양혁수는 침묵했다.“...”‘뭐든 다 해줘? 여름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감히 줄 수 있을까?’“나는 변여름을 신경 쓰지 않아. 네 여동생은 네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왜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거야? 변여름이 살아 있다면 나는 바로 떠날 거고 너희 가문 사람들한테 변여름을 지켜보게 하고 회복되면 다시 집에 데려다줘.”변백호가 말했다.“데려갈 수 없어.”“...”“여름이가 회복된 후 이렇게 전해줘. 네가 돌아오고 싶다면 네 운이 좋은 거고 돌아오기 싫다면 네가 알아서 해. 정말 안 되겠으면 2년 정도 숨어 있어.”양혁수는 어이없었다.‘???’‘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그는 역시 남매는 닮는다고 변씨 가문에는
뉴성에서 변백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초롱초롱한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검은색 책상이 놓여 있었다. 노지혜는 스트랩리스 드레스만 입고 곧고 하얀 다리를 드러낸 채 부드러운 발을 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아이고. 변 선생님, 삐뚤게 발랐어요.”그녀는 발가락을 움직이며 투덜거렸다.변백호는 노지혜를 한번 쳐다보았고 얼굴은 예전처럼 도도했다.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매니큐어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바르는 게 맘에 안 들면 네가 직접 발라.”노지혜는 햇살처럼 빛나는 금발을 하고 있었고 웃을 때 눈은 마법처럼 반짝였다.변백호의 성격에 익숙해진 노지혜는 책상에서 뛰어내려 그의 다리 위에 앉아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나쁜 사람이네요. 변여름 씨가 괜찮은데도 혁수 오빠를 놀리다니요.”변백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왜 혁수가 너에게 오빠가 되는 거야?”노지혜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오빠 아니에요?”“내려가.”‘절대 안 내려갈 거야.’그녀는 아예 허리를 흔들며 더 아래로 내려갔다.변백호는 그녀 때문에 배가 긴장되어 인상을 찌푸렸고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 아래를 세게 쳤다.“얌전히 있어.”그 말이 떨어지자 그의 몸에 달라붙은 노지혜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두 다리를 꽉 조이고 그를 보며 웃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몸에 갖다 대고 스스로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변백호는 침묵했다.“...”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노지혜는 큰 눈을 뜨고 입술을 깨물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2초 동안 멈칫하다가 마주 보는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혼쭐을 내줘야겠어.’...변백호 쪽은 봄처럼 행복했지만 양혁수 쪽은 3일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잤다.변여름은 그날 밤 바로 괜찮아졌다. 의사는 약물 부작용이 심했을 뿐이고 다행히 알레르기는 아니라고 했다.양혁수는 안도하며
“할 말은 네 오빠가 이미 다 했어.”양혁수는 여지를 남기지 않고 계속 말했다.“몸이 나았으니 멕하든으로 돌아가. 내가 준비해 줄게.”변여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나직이 말했다.“오빠 집을 나와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어요.”“지도 교수와 팀은 내가 다 준비해서 함께 보내줄게. 집에서도 공부할 수 있어.”변여름은 침묵했다.그는 이미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고 대비책도 마련해 두었다. 마치 그녀를 쫓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녀는 손을 들어 살며시 피로한 눈을 비볐다.“...알았어요.”변여름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자세히 들으면 흐느끼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양혁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쨌든 변여름은 그가 지켜보며 자란 아이였고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덜 장난스러웠다면 아무리 말썽꾸러기라도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감싸주었을 것이다.하지만 변여름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양혁수의 금기를 어겼다.“내일 갈 수 있겠어?”그가 다시 물었다.변여름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축 처졌다. 사실 그녀는 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고 적어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는 전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그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목이 메어 어렵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갈 수 있어요.”양혁수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그녀가 먼저 속삭였다.“혼자 갈 수 있어요. 오빠가 나를 위해 따로 준비해 줄 필요 없어요.”‘오히려 잘 된 거야.’“비행기 타기 전에 알려줘.”변여름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하는 것을 알아챘다. 목이 불편한 상태로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날 정말 감기 걸린 거였어요?”양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가 그런 사소한 일을 떠올릴 줄은 몰랐다.“아니.”그저 기침이 나서 그녀를 속이려고 조금 과장했을 뿐이었다.반대편에서 잠시 침묵하더니 변여름이 말했다.“다행이네요.”양혁수는 입안이 씁쓸해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지만 변여름은 끝내 그에게 손목시계를 선물로 남겼다.그녀가 변씨 가문의 군수 공장을 떠나기 전에 직접 만든 시계였다. 정교한 내부 구조를 갖추었으며 변씨 가문의 안전망과 연결되어 있어 자기방어는 물론 위급 시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시계와 봉투를 받아들었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채 서재 서랍에 넣고 잠갔다.사실 봉투 안에는 다른 것이 없었고 오직 시계 사용 설명서만 들어 있었다.변여름은 언제나 양혁수가 쉽게 속고 더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떠났지만 변여름은 그가 평안하길 바랐다.이 뜻밖의 재앙은 갑자기 찾아왔다가 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양혁수는 두 달 동안 무료 점심을 얻어먹었지만 대가는 포장이 조금만 단순해도 불편함을 느끼고 입맛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그는 10일 넘게 집에서 식사를 거르며 끝없는 술자리 속에서 양식을 지겨워서 토할 것 같을 때까지 먹었다.제대로 먹지 못하니 잠도 오지 않았고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그렇게 양씨 도련님은 서른네 살의 나이에 다시 어린아이처럼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보름을 버티던 그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회사도 가지 않으며 집에서 있었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집사는 조용히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지원은 정확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변여름이 갑자기 떠났다는 이야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양혁수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곧장 변백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형제끼리 숨기고 싶은 창피한 일일 텐데 과연 변백호가 솔직히 털어놓을까 싶었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양지원은 10분 동안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속으로 연애는 역시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그것으로 생각하며 변여름에게 손뼉을 쳤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쁜 양석진을 뒤로하고 사랑의 상처에 빠진 불쌍한 양혁수를 만나러 한강시로 향했다.한낮이었지만 양혁수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양지원은 모르는 척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양혁수는 콧방귀를 뀌었다.“...쳇.”양지원은 어이없었다.“...”‘이 녀석.’그녀는 혀를 차더니 휴지를 던져 그의 어깨를 툭 쳤다.‘누구한테 감히 쳇이야?’양혁수는 차갑게 말했다.“변백호, 그 입이 가벼운 놈이 또 다 말했죠?”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꽤 영리하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구경이라도 하듯 미소를 지었다.“왜? 변여름한테 당해서 마음 아파 집에 틀어박힌 거야?”양혁수는 인정하지 않았다.“대표는 연차 써서 그냥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예요.”‘아무 이유도 없어.’양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변여름과는 무관해?”“꼬맹이 하나 때문에 내가 진지할 이유 없어요.”“그래.”양지원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의 얼굴 옆에 툭 내려놓았다.양혁수는 흘끗 보았다.“뭐예요?”“변씨 가문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야. 한 번 가봐.”양혁수의 머릿속을 변여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했다.“안 갈 거예요.”“왜?”“귀찮아요.”“우리 두 집안이 가까운 사이인데 네가 안 가면 보기 좋지 않아.”양지원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문득 말투를 바꿨다.“아니면 변여름을 마주칠까 봐 가기 싫은 거야?”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양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지. 꼬맹이가 장난을 친 것뿐이야. 너는 어른이잖아. 그렇게 옹졸하게 굴지 마. 한번 가서 축하도 해주고 그 아이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안심시켜.”“말이 쉽죠.”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양지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양지원은 그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 별일 아니잖아.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비웃는 듯한 말
양혁수는 결국 변씨 가문에 가기로 결심했다. 양지원의 역지사지 전략 때문도 아니었고 변여름 때문도 아니었으며 변백호 때문이었다.그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변백호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10년 넘게 쌓아온 우정이 변여름의 장난 때문에 틀어질 이유는 없었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지 않으면 아마 변여름을 만날 일도 없을 것이고 단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뿐이었다. 11월이 되자 날씨가 적당해졌다.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변백호가 직접 그를 마중 나왔다.변백호를 만나자마자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양혁수는 짐 가방을 변백호에게 던지고 마치 대장처럼 앞장서서 걸어갔다.변백호는 이미 익숙했다. 예전에도 그의 건방진 태도를 참아냈고 이번에는 여동생이 사고를 쳐서 약간 찔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짐을 들어주는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공항을 나서자 양혁수는 뒷좌석으로 향했다.그때 두 명의 인형 같은 아이들이 나타났다.“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로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양혁수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쾅 소리와 함께 차 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향하며 차에 탄 변백호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변백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꼭 따라와야 한다고 해서 달래도 소용없었어.”양혁수는 말이 없었다.노지혜가 낳은 이 두 아이는 마치 악마의 화신 같았다.지금은 여섯 살이지만 몇 년 전에 아주 어렸을 때 알록달록한 큰 거미를 들고 변백호의 베개 밑에 숨겨 놓았다. 한밤중에 변백호 거의 기절할 뻔했다.양혁수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내내 졸면서도 신경은 예민했다.이상하게도 이 두 아이는 내내 조용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변백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두 아이는 각자 카메라를 들고 양혁수를 계속 찍고 있었다.“너희 뭐 하는 거야?”작은 여자아이 하니가 먼저 대답했다. 목소리는 달콤하고 순수하며 설탕을 입힌 사과 같았다.“마크가 영상을 찍으면 고모랑 뭐든 바꿔줄 수 있다고 했어요.”작은 남자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혁수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그의
양혁수는 보지 않아도 현재 변여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마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수 무구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그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할 것이다.양혁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그럴 가능성없지 않잖아.”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그럼 내 걱정이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니지 않아?”“네. 맞아요.”이번에도 변여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수비 대신 공격을 하면 뻔뻔한 변여름을 제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변여름은 생각보다도 더 강적이었다.“걱정도 참. 내가 정말 보고 싶었다면 여기 카메라라도 달아놓으면 그만이잖아요.”양혁수는 경악을 했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농담이에요.”“오빠 걱정하지 마요. 나 그렇게 변태 아니에요.”‘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고.’변여름의 말에 양혁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이 욕실에 정말 카메라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때, 변여름이 갑자기 손을 뻗어 셔츠 가장 윗단추를 건드렸다.깜짝 놀란 양혁수는 서둘러 뒷걸음치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변여름.”그러나 변여름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다시 천천히 걸어와 계속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손목을 잡았고 변여름이 덤덤하게 말했다.“오빠, 셋 셀 때까지 이 손 안 놓으면 오빠 목욕할 때 나 몰래 들어올 거예요. 그리고 오빠가 잠 들었을 때 몰래 방으로 들어올 거예요.”이어 변여름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셋...”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렸다.변여름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긴장에 숨을 헐떡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을 웃음을 꾹 참고 남은 셔츠 단추를 모두 풀었다.그리고 양혁수가 셔츠를 벗는 동안 뒤를 돌아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몇 초 뒤, 변여름은 양혁수의 셔츠를 받아 쥐고 문밖으로 향했다.“오빠 나 정말 나가요. 도움 필요하면 남자 도우미 부를 테니 말해요.”
양혁수는 축축한 건 질색이라 평소 머리가 완전히 건조될 때까지 말리는 편이었다.양혁수는 드라이어를 들고 능숙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바람을 조절했고 그 바람에 양혁수가 입은 셔츠 자락이 말리면서 양혁수의 탄탄한 몸이 그대로 드러냈다.변여름은 원래 가만히 서서 양혁수가 필요할 때 물건을 건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주변에 은은하게 샴푸 향이 퍼지고 변여름의 시선은 자꾸 두어 개 단추를 풀어 헤쳐 드러난 양혁수의 쇄골로 향했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고 저도 모르게 자꾸 양혁수를 힐끔대다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변여름은 슬그머니 자세를 틀어 양혁수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며 반성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어 소리가 멈췄다.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양혁수는 무심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런데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뻤다.‘안돼! 이 음란 마귀야 멈춰!’변여름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제 볼을 꽉 꼬집었다.‘좀 참으라고!’“여름아.”양혁수의 부름에 변여름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왜요, 오빠?”“목욕물 받아놓고 나가줘.”이제 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변여름을 부려 먹었다.“알았어요.”변여름은 양혁수가 소파에 앉는 걸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그 사이,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시원한 과일 주스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유리컵을 내려놓자마자 변여름이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오빠, 준비 끝났으니까 들어가요.”“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이만 나가.”“오빠 들어가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갈게요.”양혁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를 대신 감겨주는 건 그렇다 쳐도, 씻는 건 꽤 사적인 영역이었다.솔직히 변여름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욕실 안은 바깥보다 더 축축했다.변여름은 양혁수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며 어느 물건은 어디에 두었는지 설명해 줬다.양혁수는 일
양혁수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인기에 지금껏 받은 고백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그런데 서른네 살이 되는 해에 족히 열 살은 더 어린 꼬마에게 고백 폭탄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며칠을 곱씹어본 끝에, 양혁수는 결론을 내렸다.이건 마치 산적 두목한테 납치당한 기분이었다!그러나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산적 두목은 말투가 부드럽고 귀에 착 감기는 데다, 모든 일에 적당히를 알고, 양혁수를 모시는 방식도 너무 완벽해서 반박할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양혁수는 불평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양혁수가 두 번의 진료를 받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자, ‘두목’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양혁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서 노릇도 하고, 가끔은 가정부 노릇도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읽어야 하는 서류들은 미리 검토한 후 요점만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고, 업무 효율은 원래 비서보다 더 뛰어났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준비한 과일을 다양한 모양 틀로 찍어냈다.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먹다 보니 과일을 입에 넣기 전에 오늘엔 별 모양인가, 하트 모양인가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그리고 무엇보다 변여름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즐거워했다. 가끔 양혁수가 작은 부탁을 하면, 대단한 일이라도 된 듯 기뻐하며 도왔다.지친 기색 없이 기꺼이 헌신하는 변여름 덕분에 양혁수는 점점 더 게을러졌고, 어느새 낮잠까지 챙겼다.낮잠 자다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어김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깼어요?”‘지금 일상이 신선놀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반려동물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양지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양혁수는 내심 양지원이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양지원이 봤다면 또 놀려댈 게 뻔했다.차츰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고 굳이 급히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생각한 양혁수는 바로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붕대만 풀면 바로 떠날 것이라 계획을 차렸다.해가 질 녘, 변여
“네가 무슨 방법이라도 대서 날 국내로 보내줘.”양혁수가 변백호를 향해 말했다.양혁수가 정신을 차린 뒤로 변백호는 처음 병실을 찾았다.변여름은 방금 병실을 나섰고 엉망인 양혁수의 입가를 보며 변백호는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이 되었다.“눈이 회복될 때까지 두 날만 더 쉬어.”양혁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타박상뿐이고 안구는 다치지도 않았다면서 뭔 회복을 기다리는 거야?”“서둘러줘. 오늘 밤, 늦어서 내일 아침엔 돌아가야 해. 국내에 할 일이 많다고.”변백호는 바로 양혁수의 마음을 쿡 찔렀다.“너 여름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양혁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너희 부모님께 말 좀 잘해줘. 난 네 매부 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으니까.”“말해봤자 소용없어. 여름이는 너만 좋아하니까.”변백호가 바로 받아쳤고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너 정말 미쳤어? 나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띠동갑 되는 남자한테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너라도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여름이 다리를 분질러라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혁수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하지만 사실 양혁수는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그러니까 너희 부모님께 말해서 여름이 좀 잘 타일러줘.”“소용없어. 오히려 두 분이 여름이 돕겠다고 나설지도 몰라. 우리가 오랜 친구인 걸 보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걸.”“...”변백호는 양혁수에게 충고를 남겼다.“네가 정말 여름에게 마음이 없다면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당분간만 참아줘.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목을 매게 된다는 말도 있잖아. 일단은 옆에 두고 여름이가 차츰 관심이 식을 때까지 내버려둬.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너한테 질리면 가버릴 수도 있잖아.”“...”‘그걸 충고라고!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돼!’양혁수는
양혁수는 숟가락에 닿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그러나 국물 맛은 여전했으며 짭짤한 새우젓의 맛만 추가되었을 뿐이었다.말없이 입안의 것을 씹고 있는데 변여름이 물었다.“입에는 맞아요?”“그래...”변여름은 다행이라며 중얼거렸고 자연스럽게 양혁수의 숟가락 위로 반찬을 집어주었다. 양혁수는 본인이 우연히 반찬을 집은 건지 아니면 반찬이 밥에 잘 섞여 있던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입에 넣고 국물도 한술 떴다.양혁수는 본인의 의지대로 스스로 밥을 먹었고 변여름도 자신이 먹여주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몰래 집어주고 있으니 두 사람 분위기도 차츰 풀렸다.하지만 몰래 반찬을 집어주는 것도 사실 먹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양혁수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변여름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은 딸기를 양혁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아...”그러나 양혁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오빠는 손도 안 씻었잖아요.”“...”겨우 딸기 하나라는 생각에 양혁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그렇게 물꼬를 트고 나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번졌다.딸기에 이어 변여름은 손수 치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양혁수에게 건넸다.그렇게 한입씩 먹여주며 변여름이 말했다.“오빠가 자고 있을 때 연락이 네 통 정도 걸려 왔는데 하나는 지원 이모이고 다른 전화는 회사 사람인 것 같아요.”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양혁수는 핸드폰을 건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변여름이 건네온 치킨에 말문이 막혔다.“오빠, 이 집 치킨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요.”양혁수는 입 안 가득 찬 치킨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변여름은 양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핸드폰을 건넸다.그러다 보니 양혁수는 지금 변여름이 자신을 ‘먹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아주 자연스레 변여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변여름이 질문을 이었다.“조원희라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걸까요?”두 번이나 걸었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
“오빠, 다른 사람이 오빠를 돌보는 건 내가 못 믿겠어서 그래요.”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네가 날 돌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야.’변여름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아무 말없이 손을 잡아 화장실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세면대 근처까지 안내한 뒤 침착하게 설명했다.“오빠, 화장실 공간이 좀 작아요. 왼쪽으로 1미터 가면 변기이고 난 바로 밖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불러요.”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조용히 문을 닫고 얌전히 문 앞에서 기다렸다.양혁수는 더 이상 변여름과 말다툼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었다.“변여름.”“네. 저 여기 있어요.”“멀리 떨어져.”“아...”잠시 뒤, 문밖에서 변여름이 침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변여름은 두 손 검지손가락을 귀에 쏙 집어넣고는 친절하게 외쳤다.“오빠, 나 귀도 막았어요!”“...”얼마 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변여름은 어느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양혁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다를 들었다. 어제 결혼식 이야기를 하는데 그 누구도 두려운 기색은 없었으며 오히려 웃음소리까지 섞여 있었다.이 집안 사람들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친구들까지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 근처 1km 반경 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간은 자기 혼자뿐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양혁수는 안일하고 평온한 일상에 익숙해졌고 이번 일은 꽤나 오랜만에 겪는 황당한 사건이었다.옆에서 변여름은 뜨거운 국밥을 숟가락으로 저으며 온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러다 양혁수의 작은 움직임에도 관심을 보였다.“너희 가문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거야?”“아니요.”변여름은 침착하게 답했다.“우리도 오랜만에 겪는 일이에요. 이번 일은 그냥 사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벌인 짓이래요.”양혁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변씨 가문 사업에 사고가 안 나는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무조건 괜찮다고 말하세요. 만약 문제 생기면 본인의 눈을 대신 주겠다고 말이에요!”양혁수가 눈을 뜨기도 전에, 먼저 들려온 건 노지혜가 의사를 윽박지르는 소리였다.양혁수는 천천히 몸의 감각을 확인했다. 팔다리는 멀쩡했고, 감각도 정상이었다. 다만 눈앞이 온통 어두웠지만 실명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변여름이었다. 변여름은 들어오자마자 노지혜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의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아무 문제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 눈을 바치겠습니다!”“...”이제 변여름이 대답할 차례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종이를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한참 후에야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됐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네네! 알겠습니다!”의사는 마치 해방이라는 듯 밝게 대답하고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변여름.”그 순간, 변여름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지 침대 옆으로 바람이 일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오빠! 깨어났어요?”“응.”양혁수는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지금 내 상태는 어때?”“눈꺼풀이 유리 파편에 긁혔지만 안구는 문제없대요.”그 말을 듣자 양혁수는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지금 눈이 안 보이는 건 눈을 뜨지 못하게 고정 장치랑 붕대를 감아둬서 그런 거예요. 잠시 휴식하고 붕대를 풀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예요.”“다른 건?”“미약한 뇌진탕이랑 등에 충격으로 인한 타박상이 있어요.”양혁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꽤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은?”“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어요.”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변여름은 붕대로 가려진 양혁수의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오빠, 미안해요.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그 길로
양혁수가 변여름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이후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해서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선이었다.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며 결혼식이 시작되었다.양혁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에서 차를 탈 거냐는 비서의 질문에 답장을 보냈다.식장은 축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부가 드디어 신랑 앞에 마주했고, 주례는 뻔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시큰둥했다. 아침부터 그 쌍둥이들한테 시달려서인지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변여름이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어설프게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자기랑 같이 찍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휴대폰 화면에 뭐가 찍혔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변여름이 잠깐 동작을 멈춘 걸 보니, 마침 양혁수가 쳐다보는 순간이 찍힌 모양이었다.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묘한 순간 변여름이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찰칵!양혁수는 변여름의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나갔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몇 초간 시선을 마주했다.그런데 그때.콰과광!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식장을 뒤흔들었다.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몰아쳤고, 사방에서 날아온 파편들이 양혁수를 비롯한 주변의 하객들을 노렸다.그리고 비명과 구조 요청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폭탄이야!”정신을 차린 양혁수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직 경호원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오빠! 이쪽으로 가요!”변여름이었다.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때가 아니었고 양혁수는 곧장 변여름을 따라 움직였다.하객들은 모두 호텔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변여름은 반대로 움직였다. 양혁수를 데리고 호텔 내부로 들어가, 가장 외진 길을 선택해 빠르게 이동했다.그리고 무선 장비를 이용해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와이너리.노지혜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층을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두 사람 떠났어.”변여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영상을 앞으로 당겨 양혁수와 변백호가 투덕거리는 장면을 되돌아봤다.노지혜도 관심을 보이더니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백호 오빠가 이겼네.”변여름은 노지혜를 힐끗 쳐다보았고 노지혜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변여름은 안 보여줄 거라는 듯이 아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아, 근데 말이야. 네가 고백했을 때 혁수 씨 반응 어땠어?”변여름은 턱을 괴고 다시 영상의 타임라인을 조정했다. 이번엔 양혁수가 카메라를 쳐다보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우리한테 들킨 거 알고 있었네.”“어쩐지 네가 심하게 오글거리더라.”변여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그러게 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낸 거야.’‘난 그냥 고백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 하게 하고. 흥’노지혜가 다시 다가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근데 이제 두 사람 모두 자리 비웠는데 약 정말 줘?”“음... 일단 지혜 씨가 갖고 있어요.”노지혜는 단번에 눈치챘고 변여름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귀에 대고 더 위험한 계획을 속삭였다.변여름은 순진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질질 끌지 않고 고백 같은 건 아예 못 하게 단칼에 잘라, 최대한 빨리 집에 돌려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꼭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애써 모른 척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계획을 세웠고 앞으로 엮일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밤에 혼자 있으면 자꾸 변여름 생각이 났다.‘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몇 년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봤고... 그때는 완전 어린애였는데?’어린아이의 짝사랑이니 그렇지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