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에는 잿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다음 날 다시 출근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졸업하자마자 주지혁의 회사에 입사했던 안시연은 주지혁이 정한 ‘사내 연애 금지' 규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지혁의 제안대로 비밀 연애를 승낙했다. 하지만 안시연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재무팀 주임 자리를 꿰찼다.다시 회사에 돌아왔더니, 주지혁이 일부러 그녀를 재무팀 주임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재무팀 보조직으로 발령 냈다.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은 모두 그녀가 주지혁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주지혁이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고 몰래 트집을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사흘이 지나자, 안시연은 이미 피곤함에 찌들대로 찌들었다.업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힐끔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다름 아닌 조이현이 회사로 방문한 것이었다.안시연은 기회를 노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저기요, 이리 좀 와보실래요?”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안시연은 밖에 있던 주지혁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네, 조이현 씨.”그러자 조이현이 다짜고짜 물었다.“혹시 그쪽이 안시연 씨인가요?”“네, 그렇습니다.”조이현은 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짐 챙겨서 나오세요. 주 대표님과 저를 따라 외근 좀 다녀오셔야겠어요.”말을 마친 조이현은 안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각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클라이언트와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선 주지혁은 안시연이 조이현을 따라 나
안시연은 자기가 너무 예민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연 대표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가 떠올랐다.몇 분 지나지 않아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프타임으로 들어왔는데, 맨 앞에 선 남자는 바로 연정훈이었다.테니스복 차림의 연정훈은 이승우의 차림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가뜩이나 더운 날씨라 얼굴이 붉어졌던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자,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자꾸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정훈 오빠!”연정훈이 가까이 다가오자, 조이현은 바로 다가가 인사했고 겸사겸사 주지혁을 소개했다.안시연은 뒤에 서서 주지혁이 순간 벙찌더니 온몸이 굳어진 것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얼마 전 주지혁과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가했을 때, 연정훈도 자리에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주지혁은 연정훈이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것이었다.안시연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못 본 듯, 테니스 라켓을 한쪽에 맡기고 물병을 따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연정훈이 경기장에서 돌아오자, 모든 관심이 그에게로 집중됐다.부승원이 물었다.“마지막 공은 어떻게 된 거야?”연정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실수지 뭐.”이승우가 피식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실수? 에이, 설마 우리 쪽에서 미녀가 온 걸 보고 잠깐 정신 팔린 거 아니겠지?”연정훈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안시연을 한 번 보았다.안시연은 갑자기 연정훈과 눈을 마주치자,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사이, 조이현이 안시연을 대신해서 그녀를 소개하고 있었다.“정훈 오빠, 안시연 씨에요. 지혁 씨 회사 직원이에요.”연정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물병을 내려놓고, 이승우에게 말했다.“내가 졌어, 기량이 남보다 못한 걸 인정해. 경기에서 진 이유가 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이라고 할 순 없지.”장외 풍경이 예뻤던 탓? 안시연이 예쁘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연정훈의 최측근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번외 경기가 시작되었고, 장외에서 이승우 등이 관전했다. 조이현은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전했고, 남자들은 뒤에서 앉아 있었다.부승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심코 입을 열었다.“주 대표님은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사업을 하시는 건가요?”주지혁은 부승원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몸을 뒤로 기대고 조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이현이 같은 여자친구를 뒀으니, 앞으로 주 대표님 사업은 승승장구 할수 있겠네요.”이승우도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끼어들었다.“예를 들면 어떻게 승승장구할 것 같다는 거지?”“당연히 인맥으로겠지...”이승우가 피식 웃었다.‘풉, 인맥은 무슨, 뇌물 공세겠지...’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도 모자라, 예쁜 비서까지 데리고 온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틀림없다는 것을 두 사람도 진작에 알아챘다. 기회를 틈타 예쁜 비서를 그들에게 넘기려는 속셈을 말이다.주지혁의 입꼬리가 약간 굳어졌다. 그는 물론 부승원의 비아냥거리는 어조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우스운 상황을 만든 조이현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경기장에서 몇십 번의 라운드가 계속됐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탁!”라켓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하게 들려왔다. 안시연이 위험한 공을 되받아친 소리였다.장외에서 이승우가 박수갈채를 보냈다.“나이스 샷!”연정훈도 그녀를 바라보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다 시선이 안시연의 가슴에 꽂히자, 덤덤한 척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백핸드로 정면 타를 날렸다.구력이 너무 센 데다가 구속도 너무 빨랐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도 받아치기 어려웠다. 한우빈과 그의 파트너, 두 사람 모두 수비에 실패했다.첫 라운드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승리로 끝났다.안시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했던 안시연은 격렬하게 운동하고 나니 당이 떨어진 듯 무기력해졌다.다음 라운드가 다시 시작될 줄 알고 숨을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안시연 쪽으로 쏠렸다. 다만 연정훈은 관심 없다는 듯이 생수병 마개를 비틀고 물 한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가 연정훈을 오해했던 것이었다.“안시연 씨?”한우빈의 파트너가 다시 한번 부르자, 안시연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안시연과 주지혁은 진작에 헤어졌으니, 주지혁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 주지혁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정훈의 앞에서 안시연이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주지혁이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시연의 거침없는 말투에 주지혁의 눈빛은 다시 어두워졌다.“남자친구도 없는데 왜 우리 연 대표님을 보는 척도 안 해요?”이승우가 짓궂게 말했다.“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안시연은 뜸을 들이다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지혁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예전엔 주지혁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안시연은 주지혁이라는 사람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상하고 도도한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자격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부인하면 오히려 주지혁의 자격지심을 건드릴 수 있어. 할머니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쩔쩔매며 망설이는 안시연의 모습은 마치 묵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지혁의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이승우는 그제야 곁에 있던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휴, 이번엔 물 건너갔네...”연정훈은 손에 든 생수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작은 행동에도 안시연은 가슴이 뜨끔했다.이때, 연정훈이 씁쓸하게 말했다.“상대가 일편단심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안시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이승우와 부승원이 경기하러 경기장으로 나가자, 자리에는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안시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땀이 많이 나서 잠시 샤워만 하고 오겠다며 조이현에게 양해를
주지혁이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한발 한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샤워하고 나온 후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샤워장에서 나온 후 생수 한 병을 사서 복도에 앉아 있었다.“안시연 씨?”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승우와 부승원이었다.“이승우 씨, 변호사님!”안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이승우가 먼저 물었다.“어디 아프세요? 테니스 경기 때 무리했던 거 아니에요?”안시연은 지금 컨디션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더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더위? 더위 먹은 거라고 해도 방심하지 마세요.”이승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건네주었다.“이거 가지고 3층 A1 라운지로 올라가시면 제가 의사를 불러올게요.”“아닙니다.”안시연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이승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우리 사이에 뭘 사양해요. 한번 친구는 평생 친구죠.”“...”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부승원도 입을 열었다.“A1 라운지는 개인 라운지가 아니고 프라이빗한 공간도 아닙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거기서 푹 쉬고 나오세요. 카드는 프런트에 반납하면 돼요.”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쳤던 안시연은 개인 라운지가 아니라면 마음 놓고 쉬다가 내려와도 된다는 생각에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이승우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어서 가서 쉬세요.”안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그런데 안시연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자마자 이승우가 부승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우리 부승원 변호사님, 멀쩡한 얼굴로 진지하게 헛소리하면 되나요?”부승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에 놓인 이승우의 손을 아래로 내려놨지만, 이승우는 또다시 올려놓으
연정훈이 말을 잇기도 전에 주지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연 교수님?”연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빨갛게 달아오른 안시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요?”“아까 너무 바빠서 미처 감사하다고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요. 지난번 성진대학교 동문회에서 교수님 덕분에 조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안시연은 조금 놀라웠다. 주지혁이 먼저 연정훈에게 동문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안시연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연정훈이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 아까보다 더 가까이 밀착했다. 안시연은 고개를 들면 연정훈과 닿을 것 같았다.연정훈은 주지혁에게 대답하지 않았고 기분이 언짢아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대답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았고 할 말을 이어갔다.“바쁘신 분이라 잊으셨나 봐요. 지난번에 제가 후배와 함께 인사드렸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안시연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제야 주지혁의 의도가 이해됐다. 주지혁은 연정훈의 태도를 떠보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연정훈이 그들의 관계를 폭로할까 봐 두려워했다.‘후배? 정말 웃기지도 않네... 이렇게 선을 긋는 건가?’연정훈도 주지혁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시선은 안시연의 빨간 입술 위에 떨어졌다. 연정훈은 다시 한번 반복했다.“후배?”안시연은 그 두 글자를 듣고 조롱받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이 말을 이었다.“그날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연정훈이 이렇게 말하자, 주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연정훈이 기억 안 난다고 말했다는 건 그들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이어서 두 사람은 본론으로 들어가 잠깐 대화를 나눴다. 안시연은 두 사람의 대화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통화가 끝나자,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연정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지만, 안시연은 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연정훈은 마지막 한 마디만 내던지고 돌아서서 안방으로 들어갔다.안시연은 약간 넋을 잃고 라운지에서 걸어 나왔다. 부끄럽고 민망한 상황 때문에 현기증마저 사라졌다.30분 전까지 건물 아래에서 바람피운 전 남자친구와 서로 애틋하게 마음을 표현하더니, 30분 후엔 그의 방에 무턱대고 나타나다니... 안시연의 입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연정훈이 안시연에게 양다리를 걸친다고 비아냥거린다고 해도, 그녀는 아니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안시연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 아무 데나 으슥한 곳을 찾았다. 그녀는 잠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지만, 주지혁이 입금하기를 기다려야 했다.아이러니하게도 안시연은 분명히 자기 돈으로 외할머니의 병원비를 납부하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알랑거리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멀리서 낯익은 그림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얼마 전, 바로 이 사람, 유태호가 안시연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주효진도 잔꾀를 부렸던 것이었다. 만약 그날 밤 도망가서 연정훈을 만나지 못했다면, 안시연은 아마 이미 이 남자의 노리개로 됐을 것이다.안시연은 더이상 순순히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 유태호가 가까이 다가오자, 안시연은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안시연 씨?”유태호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지만, 안시연은 고개도 돌아보지 않았다.조이현이 아래로 내려와 주지혁을 찾다가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안시연이 황급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뚱뚱한 늑대 같은 남자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조이현도 유태호를 잘 알고 있었다. 출신은 별로지만, 장사에 이골이 나 벌여놓은 일은 꽤 된다고 소문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됨됨이가 덜됐다고 악명이 높았다.‘이렇게 되면 안시연은...’오늘 조이현이 안시연을 데리고 나온 것은 그녀를 연정훈의 품에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연정훈은 욕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성공할 거라고 희망을 품지 않았다. 심지어 조이현은 차라리 미녀
양혁수는 멍하니 셔터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작은 문부터 셔터까지 거리가 있었는데 죽을힘을 다해서 달리지 않는 이상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솔직히 말해 양혁수는 그렇게 전력 질주하는 게 귀찮았다.그리고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셔터가 고장으로 인해 오작동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딸깍.셔터가 아예 닫히고 차고의 전등도 모조리 꺼졌다.순식간에 차고 안은 암흑이 되었다.‘허.’‘역시. 그러면 그렇지.’‘나를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다 이유가 있겠어.’7년 전이었다면 양혁수는 바로 작은 문을 걷어차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니 인내심이 는 건지 어린아이의 수작에 그렇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침착하게 핸드폰을 찾아 손전등을 켰고 켜자마자 작은 문의 손잡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양혁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문 뒤의 사람도 그 자리 그대로 멈췄다.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양혁수는 쯧 하고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그리고 예상대로 문이 열렸다.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양혁수의 뒤로 들려왔다.“이게 네가 날 만나자고 한 이유야?”말을 마치자마자 등 뒤로 다가온 소녀는 바로 양혁수를 덥석 안았다. 자연스러운 손놀림이 마치 몇 번이고 시물레이션을 해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핸드폰을 들어 주변을 환하게 비추려 했다.그러나 등 뒤의 사람이 한 발 더 빨랐고 양혁수의 손을 잡고 핸드폰을 빼앗았다.양혁수는 당연히 핸드폰을 뺏기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순순히 핸드폰을 내어준 건, 차에서 내리며 외투를 걸치지 않아 얇은 셔츠만 입은 상태에서 등 뒤로 소녀의 말랑한 볼이 느껴져 반항할 의지가 사라진 것이었다.핸드폰을 뺏기고 2초 뒤 주변은 다시 캄캄해졌다.보통 캄캄한 게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양혁수는 차라리 두 눈을 감았고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하. 미치겠네.’“손 풀어.”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변여름은 고분고분 손을 풀고 망설임 없이 양혁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왔으면 하는데?]변여름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 본인이 허예나가 되어 당장이라도 양혁수를 만나고 싶었다.[정말 저를 도우실 건가요?]변여름이 다시 묻자 양혁수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봐서.]변여름이 재빨리 타자하는데 양혁수가 말을 보탰다.[살인, 방화는 안 돼.]변여름은 핸드폰을 꼭 쥐었다.‘그러니까 돕는다는 거네. 살인, 방화만 아니면.’변여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계속 질문을 이었다.[벌써 저택 정원에 추모식까지 마련해 뒀는데 내일 조문하러 올 거예요?][오전에 시간 되면 갈게.][오기 전에 꼭 연락해야 해요. 제가 마중 갈게요.]먼저 만나자고 하는 허예나에 양혁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사진으로 얼굴을 확인했으니 허예나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저도 모르게 내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양혁수는 이런 기대를 단순한 호기심으로 치부하였다. 온라인으로 만난 친구를 만나면 설레는 마음과 같은 거로 생각했다.[그래.]양혁수의 대답에 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다.[오늘은 더는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아요.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셔서 곁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아요.][응. 너도 일찍 쉬어.]평소와 다름없는 안녕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양혁수가 일정을 앞당겨 돌아온 건 허씨 가문에 조문하러 가기 위함이 맞았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허예나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문에서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비행기에 오르면서도 양혁수는 이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여자에게 이렇게 마음을 쓰다니.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주선으로 만난 사이이고 그동안 그렇게 많은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았으니 정이 든 것도 당연했다.다른 한편, 변여름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잠에 들 수 없었다.두근거리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양혁수의 마음속에 허예나가 들어선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
변여름은 사람을 시켜 허예나 모녀를 집 안으로 데려가 줬고 차에서 내리던 허예나는 걱정이 가득했다.그러나 5분 뒤, 허예나는 아주 기뻐하는 목소리로 변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름 씨, 저 지금 들어왔는데 큰어머니가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네.”변여름은 아주 침착했다.“지금 밖으로 조용히 나오셔서 저를 마중 오세요. 다른 사람이 저에 관해 묻는다면 어머님의 도우미라고 말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밖은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뚝뚝 떨어졌고 날이 어느새 어두워졌다.허예나는 우산을 쓴 채로 변여름과 함께 뒷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허예나는 변여름을 지민영의 작은 방으로 데려가 줬다.“여름 씨, 죄송하지만 잠시만 여기에 계세요.”변여름은 창가 자리에 서서 커튼을 살짝 든 채로 정원 쪽 상황을 살폈다. 머릿속엔 방금 들어오던 경로와 저택 구조를 되짚었다.“저는 괜찮아요. 혹시 다른 사람이 예나 씨가 이곳에 온 걸 알고 있나요?”“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얼굴을 자주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꼭 외출해야 한다면 마스크 착용하세요.”허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그전에도 늘 그래왔어요.”변여름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현정임은 정원에 작은 추모식을 마련했고 허현무의 유골함도 곧 집으로 이송이 될 것이다. 이르면 오늘 저녁, 늦으면 내일 점심까지도 추모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질 것이다.변여름은 작은 방에 머물며 양혁수의 일정을 살폈다.그런데!한 시간 전에 양혁수가 벌써 일정을 바꿔 비행기에 탑승한 게 아니겠는가! 사실을 알아차린 변여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허현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허현무의 생일 연회에 참석할까 전전긍긍하며 몰래 양혁수에게 한가득 프로젝트를 떠안겼었다. 그래서 예정대로라면 적어도 3일 뒤에나 한강시에 돌아올 수 있는 일정이었다.그러니 양혁수가 지금 돌아온다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변여름은 침묵했고
변여름은 병원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변백호와 먼저 한바탕 말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전까지는 변백호가 설령 자신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더라도 양혁수에게 알리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지만, 지금 보니 변백호는 확실히 양혁수를 남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변여름의 만행을 폭로할 태세였다.일이 틀어지려는 순간, 허예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여름 씨,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변여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현무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 변여름의 계획에 변수가 생겼다.양혁수가 ‘허예나’에게 얼마나 빠져든 건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장례식에 직접 조문을 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허예나와 마주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이 시점에서 허현무의 아내는 아마 유산을 독차지하는 데만 신경을 쏟고 있을 것이며 허예나 모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게 뻔했다.그러니 양혁수가 허예나를 위해 나선다면, 두 사람이 만나는 건 필연적이었다.변여름은 여러 상황을 저울질하며 물었다.[집에서 장례는 어떻게 치른대요?][큰어머니가 한강시에서 장례식하고, 유골은 화서시에 있는 선산에 묻겠다고 하세요.][그럼 큰어머니는 예나 씨와 어머님께 어떤 태도인가요? 허씨 가문에 와도 좋다고 하셨나요?]이 질문이야말로 허예나가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양혁수와의 만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변여름의 계획이 중요했다.[병원에 있을 때부터 큰어머니가 우릴 대하는 태도는 별로 좋지 않았어요. 원래부터 우리 모녀를 경계했으니 이번엔 재산 문제로 저를 집에 못 들어오게 막을 겁니다.]변여름은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짐 챙기세요. 어머니 짐도 챙기시고 두 시간 후에 데리러 갈 테니까 직접 가서 조문하세요.][그래도...][예나 씨 몫의 재산은 제가 챙겨줄게요. 그리고 따로 100억 더 챙겨줄 테니까 수고비라고 생각하세요.]허예나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어 바로 승낙했다.다시 핸드폰을 확인하니 변백호가 계속 메시
양혁수는 오후에 세운에 도착했다. 거래처 대표와 함께 점심을 나눈 뒤 저녁에는 테니스 약속이 있었다.아직 시간이 남아 그는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청했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자주 통화했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반년 전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바빴고 최근 두 달간 양석진이 중요한 업무를 맡으면서 양지원 역시 여러 차례 귀빈을 접대하느라 자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네가 올 수는 없어? 꼭 내가 네 사무실까지 가야 해?”“양지원이 전화 너머로 투덜거리자 양혁수는 의자에 기대어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거기로 가서 양석진 씨를 만나면 어떻게 해요?”“뭐가?”“양석진 씨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아빠라고 해야 하나요?”양지원이 말했다.“...아빠라고 부르면 뭐 어때?”“내가 낯가려서 못 부르겠어요.”“그냥 핑계 대는 거잖아.”양지원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그만 해요. 할머니도 됐고 엄마도 이제 성격을 좀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변해야죠. 좀 더 성숙해지고 혼자 운전해서 나를 만나러 와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내가 신선한 코코넛 두 개도 가져왔어요.”양지원은 다시 한번 황당하다는 듯 침묵했다.“...정말 효자네.”‘그 먼 곳에서 코코넛을 가져오다니.’양혁수가 웃으며 덧붙였다.“감동이죠? 감동했으면 빨리 와요. 늦으면 난 집에 갈 거예요.”“집에 가. 몇 달만 더 안 보면 넌 다른 사람 아들 될 거야. 어차피 내게는 아들이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양혁수는 피식 웃었다.결혼 후 오히려 더 어려지고 젊어진 듯한 양지원을 보며 그는 새삼 그녀가 마음 편히 잘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예전보다 말투는 부드러워졌고 차가운 기운 대신 애교스러움이 묻어났다.‘참 좋네.’가벼운 대화가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양시연이 둘째를 임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문득 양혁수는 양시연과 닮은 그 얼굴을 떠올렸다. 순간적으로 입을 열었지만 허예나에 대한 질문이 튀어나올 뻔한 걸 깨닫고 곧바로
변여름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홱 들었다.“오빠, 저는 괜찮아요. 오빠도 일찍 쉬세요.”“갑자기 로봇처럼 변했네?”변여름이 말했다.“네. 충전 완료됐어요.”양혁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가자. 일찍 자. 잘 자.”“잘 자요.”변여름은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천천히 베개에 기대앉았다.불편한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자고 싶지 않아서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휴대폰을 꺼내 허예나와 양혁수의 통화 내용을 다시 확인하며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를 떠올렸다.그녀는 생각에 잠기면서 한때는 기쁨을 느꼈고 그에게 더 가까워진 것 같았지만 곧 질투심에 휩싸였다. 만약 진실이 밝혀지면 그가 너무 화를 내서 영원히 자신을 무시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가장 안전한 방법은 다른 모습을 보이며 그에게 계속 다가가는 것이라고 결심했다.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그가 아무리 화를 내더라도 그가 만난 적 없는 그 사람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을 것이며 그녀를 더 이상 여동생처럼 대할 수 없을 것이다.결심을 굳힌 변여름은 컴퓨터를 켜고 다시 불안한 생각에 잠겼다.계획표를 열고 양시연과 닮은 사진을 보자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다.‘맞아. 방금 느꼈던 질투는 헛된 감정이었어. 허예나는 혁수 오빠와 아직 아무런 관계도 아니잖아. 시연 언니야말로 오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사람이야.’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몸을 곧게 펴고 머릿속으로 논리적인 해석을 하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다음 날 아침 양혁수는 출장을 떠났고 변여름은 허현무의 생일 잔치에 차질이 없도록 특별히 휴가를 내어 그날 하루를 바짝 신경 써 보냈다.그녀는 길가의 카페에 앉아 심심풀이로 유치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노지혜가 추천한 게임이었고 변태가 정상인이 되려면 정상인의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며 요즘 연구실 사람 중 절반이 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그 생각을 하며 변여름은 노지혜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변백호 씨가 어젯밤에 나한테 너에 대해 물
양혁수는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변여름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멍하니 있었고 그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의사를 불러줄까?”“아니요.”변여름은 눈을 떴다.“숙취 해소제 한 잔만 마시면 돼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매우 불편해 보이자 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옆 소파에 앉으려 했다. 그러나 변여름은 가방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찾아 그에게 건넸다.“뭐야?”“먹는 거예요.”양혁수는 그녀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앉았고 상자 안에 꽃 모양의 송편 네 개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다.변여름이 말했다.“녹두 송편이에요.”“그런데 왜 빨간색이야?”“색소를 넣었어요.”양혁수는 웃으며 송편을 받아 들었다.“어디서 난 거야?”변여름은 가방을 내려놓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연구실에 있는 언니 고향 특산품인데 두 상자나 받았어요.”“하나는 나 주려고 남겨둔 거야?”“아니요. 두 상자 다 제가 먹었고 이건 염치 불고하고 따로 얻어낸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상자를 열고 웃으며 말했다.“어떤 녹두 송편이길래 그렇게 맛있어?”“자스민 향이 나고 속도 꽉 차 있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를 입에 넣었다.달콤한 작은 송편 안에는 부드러운 크림이 가득 차 있었다.“정말 맛있네.”그는 감탄하며 고개를 들었다.“차 안에서 했던 말 취소할게. 네가 네 형보다 훨씬 낫네.”변여름은 그가 먹지 않은 송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히 그와 대화했던 허예나는 가상의 인물이라 얼굴도 없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에게 준 것을 허예나에게 넘겼을지도 몰랐다.그녀는 조용히 안도하며 눈을 들었다.“오빠, 괜히 우리 오빠 얘기 꺼내지 말고 그냥 칭찬만 해주세요. 우리 오빠, 혁수 오빠한테 연락한 지 오래됐잖아요. 우애도 없는데 우리 오빠는 신경 쓰지 마세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집에서 너희 오빠한테 학대라도 받았어? 너 이간질하는 거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변여름
변여름은 정답을 맞힌 것처럼 자신감 있게 문제를 풀었다.양혁수는 속으로 의아해하며 변여름이 너무 영리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대화가 끝난 후 변여름은 모든 것을 간파한 듯 코웃음을 치며 말을 마무리했다.양혁수는 웃으며 변여름을 쳐다보았다.“나이도 어린데 생각이 참 많네.”변여름이 말했다.“제가 생각하는 건 거의 다 맞아요.”“됐어. 자. 더 이상 말하지 마. 너랑 얘기하면 머리 아파.”변여름은 침묵했다.‘...’‘흥. 얼굴도 못 본 사람이랑 얘기할 때는 머리 안 아픈가?’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심한 질투를 느꼈다. 전에는 스스로 위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양혁수가 너무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그 생각에 그녀는 가방을 꽉 끌어안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이상하네. 참 드문 일이야. 이 꼬맹이도 짜증을 낼 때가 있네.’“집에 가면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수정과를 끓여 달라고 할게.”그가 말했다.“유 아주머니가 수정과를 정말 맛있게 만들어.”변여름은 고양이가 아니었고 만약 고양이라면 지금쯤 귀가 쫑긋 섰을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마침내 대답했다.“네.”양혁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달래기 쉽네.’그는 에어컨 온도를 조절한 후 아무 말 없이 집까지 운전했다.차에서 내리려던 변여름은 원래 혼자 내리려고 했으나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누웠다.양혁수는 역시나 그녀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다가가 문을 열어주고 몸을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여름아, 몸이 안 좋아?”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좀 힘이 없어요.”속으로는 양혁수가 자신을 안아줄 거로 생각했지만 그는 몸을 돌려 허리를 굽혔다.“자, 내가 업어줄게.”변여름은 어이없었다.“...
“여름아.”“네.”‘쯧.’“어지러우면 그렇게 크게 고개를 흔들지 마.”“네.”‘젠장, 다 소용없었군.’그는 속도를 조금 줄이며 변여름에게 의자를 더 낮추라고 말했다.변여름은 머리를 굴렸다. 버튼을 못 찾았다고 하면 차를 세워줄 테고 직접 조절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하지만 버튼이 너무 눈에 띄어 모른 척할 수 없었다.‘에휴. 디자이너가 너무 성실했네.’결국 그녀는 스스로 의자를 조절하고 얌전히 몸을 기댔다. 어차피 그가 잔소리할 거란 걸 알았고 아직 한 번도 혼난 적이 없어서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양혁수는 어이없다는 듯 숨을 들이마셨다.“...”왠지 변여름은 혼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그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네가 혼자 한강시에 왔으니 네 오빠가 널 내게 맡긴 이상 내가 책임져야 해.”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며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양혁수는 이어서 말했다.“교수님과 저녁을 먹는 건 괜찮지만 술을 마실 거라면 미리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거나 어디로 와야 할지 알려줘야 해.”그는 운전대 위로 시선을 두며 덧붙였다.“네가 천재라는 건 알지만 머리가 좋다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야.”변여름은 정신을 가다듬고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그녀가 집중해서 듣는 듯한 모습에 피식 웃었다.“됐어. 그냥 누워 있어. 곧 도착할 거야.”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최근 일이 많아 활력이 넘쳤지만 버거운 나날이 이어져 그녀는 피곤했다. 거기에 술까지 더해지니 몸이 더 무거워졌고, 깊은 피로가 스며들었다.그런데도 머리는 여전히 깨어 있었고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싶었다.양혁수는 동생을 타이르는 일에는 서툴렀고 할 말을 마친 뒤엔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그러다 몇 번 시간을 확인했다. 허예나가 요양센터에 도착했을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런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겉으로는 아무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