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된 공간은 안시연의 절망적인 마음을 더욱 어둡게 했다.안시연은 손에 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채 최대한 몸을 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유태호는 안시연의 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고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위로하는 척 한마디 했다.“두려워할 거 없어요. 금방 끝나니까. 그건 기분을 좋게 해주는 향수일 뿐이에요.”안시연은 자기를 어루만지는 뜨거운 남자의 손길에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저... 저 숨이 안 쉬어져요.”“숨이 안 쉬어진다고요?”“가슴이 너무 답답해요...”유태호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안시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볼은 확실히 심상치 않게 빨갰다.안시연이 애원하는 듯 유태호를 보며 물었다.“창문 좀 열어주시겠어요?”창문 좀 여는 건 큰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주위에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으니까... 조금 이따 안시연과 더 좋은 시간을 보내려면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유태호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그래요. 열어드릴게요.”운전기사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안시연이 앉아 있는 쪽의 도어를 열었다.순간 스치는 뜨거운 바람에 안시연은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재빨리 주위를 탐색한 그녀는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주위 차량에 도움을 청하려 했다.하지만 주변 환경이 워낙 조용한 데다 지나가는 차들도 적어 연속 두 개의 교차로를 지났지만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태호는 절대 이 창문을 계속 열지 않을 것이다.이제 막 다음 교차로에 다다르려 할 때 가장 가까운 한 차로에 대형 화물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앉아 있는 위치가 너무 높아 도와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괜찮아요?”유태호는 귀찮은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로 그의 절박함을 알아챈 안시연은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차창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이제 막 밖으로 손을 내밀어 화
순간 안시연의 머릿속에는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날 주지혁과 함께했던 소소한 추억, 주지혁에게 배신당해 버림받았을 때 느꼈던 절망, 그리고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힘들었던 시간들...안시연은 분명 그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큰 절망에 빠진 안시연의 눈물은 두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고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이명까지 들렸다.그때 밝은 빛이 차 안에 비치더니 뜨거운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었다.순간 안시연은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멈췄다. 두려움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던 그녀는 옆에 있는 유태호의 깜짝 놀라는 목소리를 들었다.“연... 연 대표님.”연정훈?어쩌면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시연은 눈을 번쩍 떴다.조금 전, 질식해 죽을 것 같았던 속의 울렁거림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안시연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열리는 차 문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불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춰들어 그녀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차 밖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굵직한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내려.”그 말에 안시연은 유체이탈했던 영혼이 다시 자기 몸으로 돌아온 듯 온몸이 저려났지만 이내 긴 숨을 몰아쉬고는 차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바로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나 앞으로 고꾸라져 다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지난번 식당에서처럼 연정훈이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줬다.정면으로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순간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하고 상쾌한 향수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그녀가 얼마 전에도 그에게서 맡았던 그 독특한 향이었다.“걸을 수 있겠어?”나지막한 연정훈의 목소리였지만 마치 가슴을 뚫고 귓가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걸을 수 있어요...”안시연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가누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풀린 그녀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안시연은 그대로 말하지 못했다. 대신 처음에는 횡설수설했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생각했던 말을 겨우 꺼냈다.“외할머니가 아파서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돈이 많이 필요해요. 그런데 제 돈은 주지혁 씨가 공동계좌에 묶어놔서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을 하면서도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연정훈이 아무 대꾸가 없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결혼하신 줄 알고 그때... 제가 실례했습니다.”연정훈은 계속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굳이 말하자면 안시연이 무례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저 좀 태도가 차가웠을 뿐이었다.“내가 반지에 대해 설명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연정훈은 계속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투는 조금 전보다 덜 차가웠다.안시연은 연속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속이는 줄 알았어요.”“내가 여학생이나 속이는 그런 쓰레기처럼 보이나?”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안시연은 연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닙니다.”몇 초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연정훈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안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습니다.”안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눈을 바라보았다.“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오해할 수 있잖아요. 마치... 마치 저보고 착하다고 하셨지만 또 생각도 많다고 하셨던 것처럼요.”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안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갔고 고개도 점차 아래로 숙여졌다. 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낮은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억지도 유분수지.”말문이 막힌 안시연은 그저 입술만 깨물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그때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잠깐 멈칫한 안시연은 위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숨을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오후 내내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라 위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꼬르륵. 꼬르륵. 조용한 방안에서 그녀의 ‘꼬르륵’ 소리는 유
안시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밥을 먹으려 했지만 손에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연정훈은 그녀가 침대에서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을 올려 주었다.“고마워요.”처음부터 끝까지 안시연이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밖에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국수를 먹고 있는 안시연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사실 연정훈은 그녀의 친척도 친구도 아니었기에 굳이 나서서 그녀를 도울 필요가 없었다.순간 안시연은 며칠 전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날 연정훈이 자기를 도운 게 진작부터 무언가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들었다.밖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그렇게 저녁 식사는 안시연 혼자 침대에서 먹는 것으로 끝났다. 옆에 있던 연정훈은 한 입도 대지 않았다.안시연이 밥을 다 먹었을 쯤 링거도 거의 다 맞았다.“좀 쉬시다가 몸이 괜찮아지시면 내일 아침에 퇴원하세요.”간호사의 말에 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가 나가자 병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바깥에서는 연정훈이 통화하는 목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안시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병상 침대 시트의 한쪽을 붙잡고 겨우 몸을 가누며 일어섰다.방문을 열어보니 작지만 탁 트인 거실이 보였다. 마치 호텔 스위트룸 같은 느낌이었다.창가에 서서 전화통화 중인 연정훈은 손에 쥔 사인펜을 창턱에 대고 볼펜의 뒤를 딸깍딸깍 누르고 있었다.순간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연정훈은 종이를 찾으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안시연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전화하면서 전화번호를 받아 적기 위해 황급히 종이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해 손바닥에 적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여기까지 생각한 안시연은 연정훈의 옆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눈앞에 하얀 손바닥이 놓여진 것을 본 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순간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자신의 행동이 미련하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주춤하며 손을 거두려 했다.하지만 이때 연정훈이 사인펜의 뒤로
리드미컬한 연정훈의 눈빛에 안시연은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안시연은 순순히 손을 내밀어 연정훈에게 보여 주었다.손바닥의 글씨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내일 아침이면 없어질 거예요.”안시연의 나지막한 말에 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옆 서랍에서 알코올 솜을 꺼냈다.“이리 와봐.”연정훈은 차가운 알코올 솜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닦아주었다.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기운이 또다시 안시연을 감쌌다.순간 안시연의 심장은 사정없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손을 거두고 싶은 충동을 최대한 억누르며 연정훈을 힐끗 바라봤다.연정훈과 눈이 마주친 안시연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귀가 빨개져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일회용 핀셋과 함께 다 쓴 알코올 솜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개를 숙여 자기 손바닥을 바라본 안시연은 조금 전의 볼펜 자국이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지워진 것을 발견했다.“알코올을 이런 데에 쓰기도 하네요.”안시연은 혼자 중얼거렸고 연정훈도 그녀의 말에 뭐라고 답하지 않았다.그때 시계를 올려다본 안시연은 시간이 너무 늦어 연정훈이 곧 갈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갑자기 연정훈이 그녀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아까 자는 사이에 핸드폰의 진동이 계속 울렸어.”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스팸 문자예요. 방금 차단했어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녀는 그 문자들이 주지혁이 보낸 것임을 연정훈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그날 호텔에서 연정훈이 갑자기 다가와 약을 발라주던 것이 떠올랐다.그날도 오늘처럼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뜨거운 기름에 튄 것처럼 모든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났었다.아니나 다를까 연정훈이 바로 물었다.“할머니의 수술비는 받았어?”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어떡
안시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욕을 너무 많이 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거짓말했다.“욕한 적 없어요.”“욕을 안 했다고? 그래...?”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농담 섞인 말투로 한마디 덧붙였다.“너 되게 쉬운 여자네.”사실 첫 번째의 황당한 만남에서 안시연은 이미 연정훈의 진짜 모습이 그리 점잖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 만나 보니 안시연의 이런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연정훈은 사람을 희롱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안시연의 빨개진 얼굴을 본 연정훈은 그제야 조금 진지해지는 듯했다. “8천만 원, 빌려주면 어떻게 갚을 건데?”순간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한 안시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제가 차용증을 써드릴게요.”정말 순진하고 유치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그녀가 갚지 않는다고 연정훈이 두려워하기는 할까?연정훈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이자가 붙어.”안시연은 연정훈의 말뜻을 단번에 깨닫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그에게 이자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안시연도 잘 알고 있었다.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연정훈의 표정은 그 어떤 것도 암시하는 기색이 없이 무덤덤하기만 했다.안시연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그날의 장면들이 떠올랐다.‘설마 그날 호텔처럼 갚으라는 건가?'여기까지 생각한 안시연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설령 지난번에는 연정훈을 유혹할 용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럴 체면이 없다.그녀는 지금 오직 할머니의 근심걱정뿐이었다. 게다가 방금 링거까지 맞아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와 거리를 두려고 무의식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난 안시연은 발뒤꿈치 뒤에 무언가 있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고개를 뒤로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앞에서 그녀를 잡아당겼다.안시연은 가까스로 몸을 지탱해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몸 절반은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귀에서 울리던 이명
마치 순풍에 돛단 듯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병상에 눕히더니 그녀의 허리를 잡고 키스하기 시작했다.잔잔한 키스 소리가 고즈넉한 공간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온 몸의 온도는 한껏 올라갔고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쌌다.목을 위로 젖히고 하얀 천장을 바라본 안시연은 이 순간 수치심이 극에 달했다.환자복의 옷자락이 살짝 밀려 올라가자 안시연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연정훈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를 바라봤다.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정훈은 다시 그녀와 입술을 맞춘 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늘 그렇듯 진중하고 자제하는 모습이었다.“힘 빼...”“네...”남자의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을 본 안시연은 온몸이 점점 나른해지고 두피가 저려났다.연정훈과 같은 피지컬을 가진 사람과는 굳이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좋은 잠자리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연정훈과 관계를 맺어도 자기는 손해 볼 게 없다고 그녀는 스스로 위로했다.안시연은 자기최면에 성공한 듯 욕망이 불타올랐고 오감도 점점 마비되는 것 같았다.그때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더니 시선이 점점 또렷해졌다. 미세하게 숨을 몰아쉬던 안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쳤다.“교수님...”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본 연정훈은 흥분하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은 듯 몸을 약간 위로 올렸다.“힘들어?”안시연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는 온몸에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조금...”“그럼 진작 말했어야지.”연정훈이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아픈 그녀의 몸을 탐할 수 있겠는가? 안시연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연정훈은 마치 그녀가 졸라서 이 관계를 하고 있는 듯 말했다.안시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위로 옮겼다.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에 앉은 연정훈은 달팽이처럼 이불 속에 움츠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흥은 깨졌지만 기분이 그리 언짢은 것 같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시연은 병원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퇴원했다.퇴원한 후, 그녀는 연정훈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저 퇴원했어요. 고맙습니다, 교수님.”연정훈은 역시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외할머니가 있는 제일 병원으로 급히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안시연은 병실 앞에서 눈시울이 시뻘게진 채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주지혁을 만났다.주지혁은 안시연을 보고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하...그녀가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도 옆에 서서 구경하던 인간이 인제 와서 또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안시연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주 대표님의 생각에는요?”더운 날씨에도 긴 팔과 바지를 입은 안시연을 본 주지혁은 분명 그녀가 어제저녁 관계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주지혁은 유태호가 안시연의 위에 올라탄 장면만 떠올리면 온몸이 부르르 떨려 당장이라도 유태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안시연의 이런 차가운 반응 또한 그녀가 유태호와 하룻밤을 보냈을 거라는 주지혁의 추측을 뒷받침했다.주지혁은 자책하면서도 안시연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이렇게 갈팡질팡했던 그의 마음은 안시연의 허약한 안색을 본 순간, 미안함이 먼저 앞섰다.“시연 씨, 죄송해요.”안시연은 그런 주지혁을 무시하고 바로 뒤돌아서 주치의 사무실로 향했다.“병원비는 내가 냈어요.”주지혁의 말에 안시연은 걸음을 멈췄다.물론 안시연의 가방 안에는 연정훈의 카드가 들어있었지만 사실 그녀도 병원비는 주지혁이 내길 바랐다. 어차피 그것은 안시연의 돈이니까!그녀 또한 자기 돈으로 외할머니의 병을 치료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주지혁은 그녀가 멈춰 선 것을 보고 기분이 풀린 줄 알고 그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외할머니부터 먼저 가봐요. 다른 건 나중에 얘기하죠.”모르는 사람은 주지혁이 외할머니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줄 알 것이다.안시연은 이런 주지혁이 정말 징그럽다고 생각했다.할머니 수술을 앞둔 지금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