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안시연의 머릿속에는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날 주지혁과 함께했던 소소한 추억, 주지혁에게 배신당해 버림받았을 때 느꼈던 절망, 그리고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힘들었던 시간들...안시연은 분명 그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큰 절망에 빠진 안시연의 눈물은 두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고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이명까지 들렸다.그때 밝은 빛이 차 안에 비치더니 뜨거운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었다.순간 안시연은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멈췄다. 두려움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던 그녀는 옆에 있는 유태호의 깜짝 놀라는 목소리를 들었다.“연... 연 대표님.”연정훈?어쩌면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시연은 눈을 번쩍 떴다.조금 전, 질식해 죽을 것 같았던 속의 울렁거림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안시연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열리는 차 문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불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춰들어 그녀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차 밖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굵직한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내려.”그 말에 안시연은 유체이탈했던 영혼이 다시 자기 몸으로 돌아온 듯 온몸이 저려났지만 이내 긴 숨을 몰아쉬고는 차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바로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나 앞으로 고꾸라져 다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지난번 식당에서처럼 연정훈이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줬다.정면으로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순간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하고 상쾌한 향수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그녀가 얼마 전에도 그에게서 맡았던 그 독특한 향이었다.“걸을 수 있겠어?”나지막한 연정훈의 목소리였지만 마치 가슴을 뚫고 귓가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걸을 수 있어요...”안시연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가누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풀린 그녀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안시연은 그대로 말하지 못했다. 대신 처음에는 횡설수설했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생각했던 말을 겨우 꺼냈다.“외할머니가 아파서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돈이 많이 필요해요. 그런데 제 돈은 주지혁 씨가 공동계좌에 묶어놔서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을 하면서도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연정훈이 아무 대꾸가 없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결혼하신 줄 알고 그때... 제가 실례했습니다.”연정훈은 계속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굳이 말하자면 안시연이 무례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저 좀 태도가 차가웠을 뿐이었다.“내가 반지에 대해 설명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연정훈은 계속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투는 조금 전보다 덜 차가웠다.안시연은 연속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속이는 줄 알았어요.”“내가 여학생이나 속이는 그런 쓰레기처럼 보이나?”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안시연은 연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닙니다.”몇 초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연정훈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안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습니다.”안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눈을 바라보았다.“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오해할 수 있잖아요. 마치... 마치 저보고 착하다고 하셨지만 또 생각도 많다고 하셨던 것처럼요.”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안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갔고 고개도 점차 아래로 숙여졌다. 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낮은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억지도 유분수지.”말문이 막힌 안시연은 그저 입술만 깨물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그때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잠깐 멈칫한 안시연은 위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숨을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오후 내내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라 위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꼬르륵. 꼬르륵. 조용한 방안에서 그녀의 ‘꼬르륵’ 소리는 유
안시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밥을 먹으려 했지만 손에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연정훈은 그녀가 침대에서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을 올려 주었다.“고마워요.”처음부터 끝까지 안시연이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밖에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국수를 먹고 있는 안시연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사실 연정훈은 그녀의 친척도 친구도 아니었기에 굳이 나서서 그녀를 도울 필요가 없었다.순간 안시연은 며칠 전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날 연정훈이 자기를 도운 게 진작부터 무언가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들었다.밖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그렇게 저녁 식사는 안시연 혼자 침대에서 먹는 것으로 끝났다. 옆에 있던 연정훈은 한 입도 대지 않았다.안시연이 밥을 다 먹었을 쯤 링거도 거의 다 맞았다.“좀 쉬시다가 몸이 괜찮아지시면 내일 아침에 퇴원하세요.”간호사의 말에 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가 나가자 병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바깥에서는 연정훈이 통화하는 목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안시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병상 침대 시트의 한쪽을 붙잡고 겨우 몸을 가누며 일어섰다.방문을 열어보니 작지만 탁 트인 거실이 보였다. 마치 호텔 스위트룸 같은 느낌이었다.창가에 서서 전화통화 중인 연정훈은 손에 쥔 사인펜을 창턱에 대고 볼펜의 뒤를 딸깍딸깍 누르고 있었다.순간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연정훈은 종이를 찾으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안시연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전화하면서 전화번호를 받아 적기 위해 황급히 종이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해 손바닥에 적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여기까지 생각한 안시연은 연정훈의 옆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눈앞에 하얀 손바닥이 놓여진 것을 본 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순간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자신의 행동이 미련하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주춤하며 손을 거두려 했다.하지만 이때 연정훈이 사인펜의 뒤로
리드미컬한 연정훈의 눈빛에 안시연은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안시연은 순순히 손을 내밀어 연정훈에게 보여 주었다.손바닥의 글씨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내일 아침이면 없어질 거예요.”안시연의 나지막한 말에 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옆 서랍에서 알코올 솜을 꺼냈다.“이리 와봐.”연정훈은 차가운 알코올 솜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닦아주었다.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기운이 또다시 안시연을 감쌌다.순간 안시연의 심장은 사정없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손을 거두고 싶은 충동을 최대한 억누르며 연정훈을 힐끗 바라봤다.연정훈과 눈이 마주친 안시연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귀가 빨개져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일회용 핀셋과 함께 다 쓴 알코올 솜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개를 숙여 자기 손바닥을 바라본 안시연은 조금 전의 볼펜 자국이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지워진 것을 발견했다.“알코올을 이런 데에 쓰기도 하네요.”안시연은 혼자 중얼거렸고 연정훈도 그녀의 말에 뭐라고 답하지 않았다.그때 시계를 올려다본 안시연은 시간이 너무 늦어 연정훈이 곧 갈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갑자기 연정훈이 그녀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아까 자는 사이에 핸드폰의 진동이 계속 울렸어.”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스팸 문자예요. 방금 차단했어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녀는 그 문자들이 주지혁이 보낸 것임을 연정훈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그날 호텔에서 연정훈이 갑자기 다가와 약을 발라주던 것이 떠올랐다.그날도 오늘처럼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뜨거운 기름에 튄 것처럼 모든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났었다.아니나 다를까 연정훈이 바로 물었다.“할머니의 수술비는 받았어?”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어떡
안시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욕을 너무 많이 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거짓말했다.“욕한 적 없어요.”“욕을 안 했다고? 그래...?”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농담 섞인 말투로 한마디 덧붙였다.“너 되게 쉬운 여자네.”사실 첫 번째의 황당한 만남에서 안시연은 이미 연정훈의 진짜 모습이 그리 점잖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 만나 보니 안시연의 이런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연정훈은 사람을 희롱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안시연의 빨개진 얼굴을 본 연정훈은 그제야 조금 진지해지는 듯했다. “8천만 원, 빌려주면 어떻게 갚을 건데?”순간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한 안시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제가 차용증을 써드릴게요.”정말 순진하고 유치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그녀가 갚지 않는다고 연정훈이 두려워하기는 할까?연정훈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이자가 붙어.”안시연은 연정훈의 말뜻을 단번에 깨닫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그에게 이자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안시연도 잘 알고 있었다.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연정훈의 표정은 그 어떤 것도 암시하는 기색이 없이 무덤덤하기만 했다.안시연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그날의 장면들이 떠올랐다.‘설마 그날 호텔처럼 갚으라는 건가?'여기까지 생각한 안시연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설령 지난번에는 연정훈을 유혹할 용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럴 체면이 없다.그녀는 지금 오직 할머니의 근심걱정뿐이었다. 게다가 방금 링거까지 맞아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와 거리를 두려고 무의식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난 안시연은 발뒤꿈치 뒤에 무언가 있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고개를 뒤로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앞에서 그녀를 잡아당겼다.안시연은 가까스로 몸을 지탱해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몸 절반은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귀에서 울리던 이명
마치 순풍에 돛단 듯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병상에 눕히더니 그녀의 허리를 잡고 키스하기 시작했다.잔잔한 키스 소리가 고즈넉한 공간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온 몸의 온도는 한껏 올라갔고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연정훈의 목을 팔로 감쌌다.목을 위로 젖히고 하얀 천장을 바라본 안시연은 이 순간 수치심이 극에 달했다.환자복의 옷자락이 살짝 밀려 올라가자 안시연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연정훈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를 바라봤다.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정훈은 다시 그녀와 입술을 맞춘 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늘 그렇듯 진중하고 자제하는 모습이었다.“힘 빼...”“네...”남자의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을 본 안시연은 온몸이 점점 나른해지고 두피가 저려났다.연정훈과 같은 피지컬을 가진 사람과는 굳이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좋은 잠자리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연정훈과 관계를 맺어도 자기는 손해 볼 게 없다고 그녀는 스스로 위로했다.안시연은 자기최면에 성공한 듯 욕망이 불타올랐고 오감도 점점 마비되는 것 같았다.그때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더니 시선이 점점 또렷해졌다. 미세하게 숨을 몰아쉬던 안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쳤다.“교수님...”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본 연정훈은 흥분하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은 듯 몸을 약간 위로 올렸다.“힘들어?”안시연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는 온몸에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조금...”“그럼 진작 말했어야지.”연정훈이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아픈 그녀의 몸을 탐할 수 있겠는가? 안시연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연정훈은 마치 그녀가 졸라서 이 관계를 하고 있는 듯 말했다.안시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위로 옮겼다.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에 앉은 연정훈은 달팽이처럼 이불 속에 움츠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흥은 깨졌지만 기분이 그리 언짢은 것 같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품에
안시연은 병원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퇴원했다.퇴원한 후, 그녀는 연정훈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저 퇴원했어요. 고맙습니다, 교수님.”연정훈은 역시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외할머니가 있는 제일 병원으로 급히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안시연은 병실 앞에서 눈시울이 시뻘게진 채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주지혁을 만났다.주지혁은 안시연을 보고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하...그녀가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도 옆에 서서 구경하던 인간이 인제 와서 또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안시연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주 대표님의 생각에는요?”더운 날씨에도 긴 팔과 바지를 입은 안시연을 본 주지혁은 분명 그녀가 어제저녁 관계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주지혁은 유태호가 안시연의 위에 올라탄 장면만 떠올리면 온몸이 부르르 떨려 당장이라도 유태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안시연의 이런 차가운 반응 또한 그녀가 유태호와 하룻밤을 보냈을 거라는 주지혁의 추측을 뒷받침했다.주지혁은 자책하면서도 안시연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이렇게 갈팡질팡했던 그의 마음은 안시연의 허약한 안색을 본 순간, 미안함이 먼저 앞섰다.“시연 씨, 죄송해요.”안시연은 그런 주지혁을 무시하고 바로 뒤돌아서 주치의 사무실로 향했다.“병원비는 내가 냈어요.”주지혁의 말에 안시연은 걸음을 멈췄다.물론 안시연의 가방 안에는 연정훈의 카드가 들어있었지만 사실 그녀도 병원비는 주지혁이 내길 바랐다. 어차피 그것은 안시연의 돈이니까!그녀 또한 자기 돈으로 외할머니의 병을 치료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주지혁은 그녀가 멈춰 선 것을 보고 기분이 풀린 줄 알고 그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외할머니부터 먼저 가봐요. 다른 건 나중에 얘기하죠.”모르는 사람은 주지혁이 외할머니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줄 알 것이다.안시연은 이런 주지혁이 정말 징그럽다고 생각했다.할머니 수술을 앞둔 지금
“당분간 환자를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꼭 명심하세요!”주임 사무실에서 나온 안시연은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외할머니의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휴식만 잘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외할머니가 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새 옷을 사러 상가에 갔다. 조금 더 정갈한 모습으로 할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다.그렇게 한참을 옷을 고르고 있는데 VIP 구역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그중 하는 다름 아닌... 조이현이었다!자세히 생각해보니 그날의 일은 그녀의 필력이 빠질 수 없다.VIP 구역.임유정은 조이현을 보고 말했다.“너희 지혁 씨 아직도 좀 그래?”“아니, 괜찮아. 그냥 나한테 집중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야. 그거 알아? 지혁 씨 사무실에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가 있는데...”조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피식 웃더니 임유정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그 말을 들은 임유정은 일부러 충격을 받은 듯하며 말했다.“지혁 씨가 화낼까 봐 두렵지 않아?”“지혁 씨는 몰라. 회사 사람들 말하는 거 들어보니 그 여자 이틀 동안 출근도 안 했다 하더라고.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낫지, 뭐.”안시연은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그깟 위기감 하나 때문에 남의 인생을 망친 거였어?!’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때, 또 조인현이 입을 열었다.“언니, 언니도 정훈 오빠하고 어떻게 할지 빨리 결정해. 나중에 안 좋은 일 생기게 하지 말고.”“내가 뭐가 무서워서?”임유정이 웃으며 말했다.“이 경인 시에서 누가 나랑 다툴 수 있겠어? 체면 같은 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빼고는 말이야. 전에도 몇몇 있긴 했지만 결국 연씨 가문에 들어간 사람은 한 명도 없잖아?”임유정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고 안시연은 목제 선반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이 모든 것을 들었다.그때 고개를 돌리자 직원이 안시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는 옷도
이미 지난 지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양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그냥 오늘처럼 농담으로 꺼내는 경우는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속닥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았고 이제 흥미를 잃은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와인잔을 내려두고 양시연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여기에도 사람이 꽤 많네요.”“다들 볼일이 있나 보지. 우린 숨만 돌리고 다시 올라가자.”양시연은 연정훈의 뒤를 따랐고 호기롭게 행사장을 나서는 연정훈을 보며 왠지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처음 만났을 땐 정훈 씨가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계속 무게만 잡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이 먹고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은데요.”연정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꽤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앞으로 나이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자.”“뭐예요? 화났어요?”“그래.”양시연은 웃음이 터졌다.“언제 나이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고 그래요?”연정훈은 몸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예쁜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완전 실례라는 거 알지?”양시연은 바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이젠 나이 얘기하면 서운할 나이가 됐다는 말이네요.”양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정훈 씨 생일 지나면 서른 네살이네요.”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정훈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양시연을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양시연은 꾹 참던 웃음이 터졌고 연정훈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성숙한 와인이라는데 정훈 씨는 아직 한창 청춘이니까 벌써 속상해하지 마요.”연정훈은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고 양시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양시연은 자연스레 연정훈의 품에 안겼다.“그러면 머리가 다 헝클어진다고요.”“내가 다시 빗겨줄게.”“됐거든요. 저번에 립스틱 발라준다고 했다가 끊어졌잖아요.”양시연은 입을 삐죽였으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정훈의 품에 꼭
행사가 끝나고 애프터 파티가 시작되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샴페인을 연거푸 비우고 양시연은 몰래 내용물을 주스로 바꿨다. 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와인으로 채웠다.양시연이 몰래 연정훈에 말했다.“연 대표님 오늘 기분이 꽤 좋은가 봐요?”그러자 연정훈이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왠지 오늘이 우리 결혼식보다 더 결혼식 같은 느낌이 들어.”양시연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의 연정훈은 양시연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았고 양시연은 결혼식 당일 양혁수의 일까지 알게 되었으니 오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응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연정훈이 그걸 지금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양시연은 주스를 한 모금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식 그날 나도 열심히 했잖아요.”연정훈이 이어 질문을 던졌다.“왼쪽 방향 가르마, 누구인지 알아?”양시연이 힐끔 보다가 대답했다.“정훈 씨 외숙부요.”연정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양시연은 자신이 없어졌다. 그날 결혼식에서 인사를 건넨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저기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가르마를 한 사람이 외숙부야.”양시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을 살폈다.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양시연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아, 그쵸. 저는 정훈 씨가 저 사람 물어보는 줄 알고 답한 거예요. 같은 방향에 가르마 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정훈 씨 질문이 잘못됐네요.”연정훈이 차가운 시선으로 양시연을 바라봤다“사실 뻥이야. 첫 번째 그 사람 외숙부 맞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몰래 연정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그러니까 결혼식 당일 넌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내 외숙부가 어떻게 생긴 건지 아직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아니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데 정훈 씨가 장난한 거잖아요.”“네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내 꾀에 속았을까?”양시연
“그래서 결국 얼마나 있는지 알아냈어요?”그 뒤로 며칠 뒤,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반우희에게 물었다.반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라니까요.”“왜 그렇게 생각해요?”“변호사님은 그렇게 해서 제 관심을 끄려는 거예요. 돈으로 유인해서 옆에 묶어두려고!”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반우희는 자신이 아주 넘쳐 보였다.“실은 변호사님 저 엄청 좋아해요. 그래서 이렇게 머리 굴리는 거예요.”양시연은 엄지척을 하며 말했다.“그래요. 우희 씨 말이 맞아요. 승원 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그렇죠? 히히.”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벌써 코끝이 시려오는 겨울이 다가왔다. 그리고 양시연은 반우희에게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벌써 반우희도 결혼을 한다니. 넓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양시연은 주변을 살펴보며 이 모든 게 정말 꿈만 같다고 생각했다.오늘 아침 기획팀에서 연말 행사 계획안을 반우희에게 제출했었다. 거액의 기획 금액 옆으로 반우희의 사인을 보며 반우희도 정말 많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연정훈이 문자를 보내왔다.[신혼여행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했어?]양시연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애교를 가득 담아 답장했다.[이렇게 바쁜데 언제 여행을 간다고 그래요.][부승원 시켜.]양시연은 빵 하고 터졌다.‘역시 못 말린다니까.’양시연은 사실 몇 가지 여행지를 찾아두긴 했으나 자세한 일정표를 작성하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 연정훈과 상의를 하고 결정할 생각이었다.행사는 설 연휴가 끝나고 바로 시작되었고 이건 양시연이 몸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복귀하는 행사였기에 모든 게 완벽하길 바랐다.연정훈은 미리 시간을 비워두어 양시연의 옆자리를 지켰다.넓고 화려한 강당에 수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웠다.양시연은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고 빼곡하게 앉은 사람들을 쭉 훑다가 연정훈에게로 시선을 고정했
반우희는 한참 조잘거렸으나 부승원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부승원은 두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그러자 반우희는 서운한 듯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그때, 부승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하자.”반우희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결혼이요?”부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박!’반우희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보며 부승원은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그래서 반우희의 귓불을 매만지며 말했다.“나랑 사법 고시 넘기기로 약속한 거 기억해?”반우희는 입을 삐죽였다.“이번 해는 안 될 것 같은데요...”“다음 해는?”“다음 해는 꼭 넘을 게요!”“그래도 못 넘기면 어떻게 할 거야?”“그러면... 변호사님 닮은 아기 안 낳을 거예요.”“...”“어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깜빡였다.“이 정도 벌칙이면 되겠죠?”부승원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반우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그래. 뭐 심한 벌칙이긴 하네.”‘히히.’반우희는 바로 입꼬리를 올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퐁퐁 뛰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우희야.”부승원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반우희는 얌전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평소에 늘 성까지 붙여 반우희라고 깐깐하게 부르던 부승원이 다정하게 부른 게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래서 앞으로 다가가 부승원의 이마를 매만지며 아픈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부승원의 이마가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부승원은 반우희의 손을 잡고 뜨거운 온도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사실 부승원은 늘 반우희 혼자 들떠 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심심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었다.반우희는 부승원이 과음을 한 탓이라 생각해 앞으로 다가가 빤히 쳐다봤다.“삼촌?”그 호칭에 부승원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리고 반우희를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부승원은 침을 꿀꺽 넘겼고 다시 두 눈을 뜨니 눈가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반우희는 표세연이 준비한 선물을 채애정에게 건넸다.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반우희는 겉으로 덜렁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 분별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연씨 가문을 배경으로 삼을까 봐 걱정했던 것 같다. 들어올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가 준비한 선물만 건넸고 식사 후 모두가 흩어진 뒤에야 차분하게 표세연이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어머님, 이 선물은 저희 엄마께서 드리는 거예요.’채애정은 원래 기분이 좋았지만 선물을 받고 부승원이 결혼과 출산에 대해 언급한 것을 떠올리며 얼굴에 미소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반우희의 손을 잡고 문밖까지 배웅했다.그녀는 돌아와 선물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 담긴 것에 놀랐다.그것은 비취 구슬로 엮인 목걸이였으며 색상과 품질 모두 뛰어났다.그녀는 표세연과 오랜 인연이 있었지만 표세연이 이렇게 진심으로 반우희에게 대해줄 줄은 몰랐다. 첫 번째 만남인데도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주다니 진짜 딸이 있는 집안은 다르구나 싶었다.‘쯧.’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부승원은 반우희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고 전화를 받고 몇 번 응답했다.“주는 거면 그냥 받으세요. 그냥 며느리의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하세요. 그 외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반우희는 말의 끝에 귀를 기울였다.부승원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반우희가 살짝 웃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은근히 올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부승원은 술을 많이 마셔서 입에서 술 냄새가 섞인 숨이 나왔다. 반우희는 그의 얼굴에 살며시 얼굴을 비비며 다가갔다.부승원은 반우희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오늘 저녁 맛있었어?”“맛있었어요. 당신 집에 요리사 정말 요리를 잘하시네요.”부승원은 그녀의 코끝에 입술을 가볍게 대며 말했다.“앞으로 여기서 살면 매일 너에게 요리해 줄 거야.”반우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험 삼아 말해 보았다.“왜 내가 그 집에
거실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반우희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지만 마침 부승원이 그녀의 옆에 나타났다.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감싸며 뒤로 숨으려 했지만 한 아줌마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잘됐네요. 이렇게 되면 호칭 바꾸는 용돈 안 줘도 되고 돈 아끼는 셈이네요.”반우희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부형석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때 채애정이 다가왔다.부승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우희를 살짝 끌어냈다.“우리 엄마는 본 적 있잖아. 와서 인사해.”반우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입이 떨어지지 않다가도 결국 힘겹게 말을 꺼냈다.“...어머니, 안녕하세요.”부승희는 혀를 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왜 차별 대우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 차례에서 용돈을 받을 생각이라도 했어요?”웃음이 터졌다.반우희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부승원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부승원이 그녀를 붙잡고는 부승희를 노려보았다.부승희는 사람들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끝났네요. 우리 오빠가 나한테 눈빛으로 압박을 주고 있어요.”다시 한번 웃음이 퍼졌다.부승원은 동생들의 농담을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승희야, 앞으로 조심해. 오빠는 이제 아내가 생겼으니까 아마 너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부승희는 한숨을 쉬며 익숙한 듯 말했다.“괜찮아요. 오빠는 여자친구가 없어도 저한테 신경 안 썼어요.”채애정은 부승희를 힐끔 보며 나직이 말했다.“너 오빠가 신경 안 쓴다고? 그런 말 하지 마.”부승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엄마, 오빠가 우희 씨한테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예전에 나한테 잘해줬다고 생각하긴 어려울걸요.”모두 자연스럽게 다시 부승원과 반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반우희는 부승원의 곁에 꼭 붙어 있었고 부승원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없이도 모든 걸 전하는 듯했다.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움찔했지만 부승원이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말했다.“반우희는 아직 어리니까 다들 너무 괴롭히지
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손을 자신이 가슴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사기 친 거 아니에요. 부승원 씨가 나한테 뽀뽀하면 심장이 쿵쾅거려서 긴장한 나머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거든요. 이게 바로 ‘독을 독으로 다스린다’는 거죠. 이해되죠?”부승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럼 내가 너에게 뽀뽀하면 네가 긴장한다면서 왜 딸꾹질은 안 해?”“몰라요. 아마 이게 전설 속의 신체 본능인가 봐요. 내 딸꾹질마저도 오빠를 좋아하나 봐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그는 입꼬리를 억지로 눌러 내리며 그녀를 평가했다.“거짓말을 참 잘 꾸며내는군.”“에휴. 결국 안 해 주겠다는 거네요.”반우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 심장은 계속 날뛰게 놔두셔야죠. 당신 집에 도착하면 언제 딸꾹질이 터질지 몰라요. 창피당하는 건 감수해야죠. 어차피 부승원 씨가 내 곁에 있으면 어떤 고생이든 할 수 있어요.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시를 읊조리듯 감상에 젖었다.그러더니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던 찰나 눈앞의 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응?’반우희는 1초 만에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얼른 다가가 자기 입술을 가리켰다.“여기.”부승원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으면서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반우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손으로 그녀의 귀를 가볍게 잡아당겼다.“‘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반우희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난 기회를 잡았을 때 밀어붙여야 한다는 말만 배웠어요.”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어휴. 참 똑똑하긴 하지.’마침 그때 근처에 한 대의 차가 멈춰 섰다.반우희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있는데 부승원이 그녀의 귀를 한 번 더 꼬집으며 말했다.“나의 할아버지예요.”‘네?’반우희는 순간 자세를 바로잡고 마치 사열을 받는 군인처럼 반듯이 섰다.부승원은 그런 그녀
“대략 몇 명 정도 와요?”“많지 않아.”“...”“오십에서 육십 명 정도?”반우희는 놀랐다.‘...?’‘오십에서 육십 명이면 거의 결혼식 아니야?’반우희는 애써 이건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반우희는 큰 장면을 못 본 것도 아니고 경기도 내 저명한 가문들도 여러 번 드나들었는데 심지어 연정훈도 오빠라고 부를 정도다.‘괜찮아 사소한 일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녀는 결국 불면증에 시달렸다.‘아.’반우희는 양시연을 찾아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시부모님을 뵐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물었다.양시연은 잠시 기억을 되새겼다. 그 당시 그녀가 처음 표세연을 만났을 때 표세연은 그녀에게 나가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 뒤 그녀가 다시 돌아와 표세연을 만났을 때 표세연은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이런 경험은 공유하기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결혼식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만났었고 심지어 연정훈의 외가 쪽과도 몇 번밖에 마주하지 않았다.하지만 독특한 민씨 가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녀에게 꽤 친절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걱정 마요. 아무도 우희 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다들 우희 씨한테 잘해줄걸요?”“왜요?”“부승원 씨가 우희 씨를 좋아하니까요.”양시연은 핵심을 짚었다.시부모 문제도 두 집안 간의 문제도 결국 부부 문제로 귀결되며 대부분의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된다.반우희는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 말이 꽤 일리 있다고 느꼈고 그리고는 히히 웃으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맞아. 부승원 씨가 나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자자.’반우희가 부씨 가문에서 식사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표세연은 미리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건조하게 성사된 의형제 관계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우희는 점점 표세연의 마음에 들었다.아침이 되자 승주는 일찍 일어나 희주와 동준을 끌고 와 반우희가 옷을 고르는 걸 지켜봤다.부승원이 도착했
부승희는 사업 이야기를 하러 부승원을 찾았고 대화가 끝난 뒤 자연스럽게 함께 저녁을 먹었다.반우희는 대화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지 않았다.“승희 씨, 전주에 가서 돼지를 키우게 되는 거예요?”부승희는 반우희의 말을 정정했다.“축산업 회사를 설립하는 거예요.”“어떤 가축을 기르려고요?”“돼지.”“그럼 결국 승희 씨가 돼지를 기르는 거네요?”부승희는 어이없었다.“...”반우희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다른 것도 키워요.”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네...”반우희는 생각에 잠겼다.부승희는 장난기 가득한 성격이지만 돈 버는 일에는 진지했으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창업을 시도해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부승원은 부승희가 가져온 사업 계획서를 신중하게 검토한 후 말했다.“지금 네 자본 규모가 너무 작아.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좀 투자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투자를 받는 건 어려울 것 같아.”“얼마나 투자할 수 있어?”“600억에서 천억 정도. 시험 삼아 해보자.”“그럼 충분하네. 이전에 투자한 것까지 합치면 6천억 정도 되겠어.”반우희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실례지만 '억'이라는 단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부승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어쨌든 '만'은 아니겠죠.”반우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세상에 그러니까 억이라는 거야?’반우희는 자신이 꽤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재벌가의 창업은 억 단위로 시작하는 건가?’부승희는 부승원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사이 반우희는 침묵 속에서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손을 들었다.부승희와 부승원은 반우희를 바라보았고 반우희는 히히 웃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저기 혹시 나도 같이할 수 있을까요?”부승원은 놀랐다.부승희는 재미있어하며 반우희를 놀렸다.“우희 씨는 얼마나 투자할 거예요?”반우희는 손가락 하나를 펴며 그들의 말투를 따라 했다.“200억 정도 어때요?”부승희는 반우희를 보며 웃었다.“우희 씨 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