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 환생하다?! 전생의 그녀는 무려 8년 동안 곽승재에게 목을 맸지만, 결국 주어진 거라고는 달랑 이혼확인서 한 장과 정신병원에서의 비극적인 죽음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고은서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곽승재와 이혼하는 것! 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초반에 시종일관 쌀쌀맞고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혼으로 협박하는 건가? 꿈 깨! 너의 연극에 가담할 생각 따위 없어.” 하지만 고은서는 이혼하고 나서 사업도 승승장구하고 곁에 잘나가는 남자가 끊이질 않는데... 그제야 곽승재는 후회막급했다. 고은서를 벽에 밀치고 두 팔로 가둔 곽승재.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우리 재혼하자...!” 다만 싸늘하기 그지없는 고은서. “미안한데 이만 꺼져줄래? 나한테 이제 사랑이 전부가 아니거든.”
더 보기민승호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민시현은 가차 없이 물었다.“여긴 왜 오신 거죠?”고은서는 솔직히 답했다.“시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러 왔어요.”민시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은서 씨도 시후 상태가 어떤지 잘 알겠죠.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이렇게 방해하러 오지 마세요. 완전히 인연을 끊으면 더 좋겠네요.”“아저씨! 시현 오빠!”고은서가 답하기도 전에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를 보자 민시현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고 민승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민아도 시후 보러 왔니? 시후가 많은 걸 잊어도 너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 걸 보니 네가 시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민승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송민아는 옆에 있던 고은서를 흘끗 보더니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아저씨, 이제 더 이상 그런 농담 하시면 안 돼요. 시후 오빠가 모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저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저는 정말 오빠를 완전히 내려놓았어요. 그러니까 절대 저희 두 사람 다시 이어주려고 하지 마세요!”민승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나는 정말로 네가 마음에 들었어. 우리 막내며느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시후 저 녀석이...”송민아는 이에 답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시현 오빠. 저랑 은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송민아는 고은서의 팔을 잡고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우리 집안과 민씨 가문은 원래 친분이 깊어. 아저씨도 나를 좋아해서 시후 오빠와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던 거야. 너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야.”“위로하려고 그러는 거면 안 해도 돼. 뭐든지 각오하고 있었어.”“시현 오빠가 너한테 심한 말한 건 아니지?”송민아가 자책했다.“좀 더 참을 걸 그랬어. 널 병실에 바래다주고 화장실에 갔어야 했는데...”고은서는 송민아의 표정과 말투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 화장실
송민아는 고은서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민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 씨, 미안해요. 시후가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에요. 의사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미처 시후한테 모든 걸 설명하지 못했어요.”고은서는 충격에서 벗어나 침착함을 되찾았다.그녀도 처음 깨어났을 때 뇌진탕 때문에 사고 당시의 기억이 없었다.민시후도 같은 상황일 가능성이 컸다.“괜찮습니다.”고은서는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신중하지 못했네요. 이럴 때 방해해서 죄송해요. 민시후, 푹 쉬어. 우린 먼저 가볼게.”고은서의 말이 끝나자 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잠깐, 왜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있다가 사고가 일어난 건지 아직 설명 안 했잖아.”사고라는 말에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사고 당시의 장면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의 눈가에 의심이 스쳤다.“설마 너랑 곽승재가 짜고 치는 연극은 아니지?”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다운 생각 방식이었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의도를 몇 번이나 의심했던 그였다.‘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고은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실망, 허탈함과 깊은 죄책감이 그녀를 뒤덮었다.민시후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본인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코끝이 시큰해진 고은서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먼저 쉬어. 나중에 다시 올게.”그렇게 말하고는 고은서는 송민아와 함께 병실을 나왔다.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던 고은서는 옆에 있던 의자에 힘없이 앉아버렸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시후 상태 알고 있었어?”송민아는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솔직히 답했다.“시아 언니가 어제 민시후가 기억을 잃었다고 알려줬어. 병원에 와 보라고 해서 와서 확인했더니 최근
“너 표정 왜 그래? 무슨 일 있어?”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송민아가 좀 이따 올 거야. 너랑 같이 민시후 보러 갈 거라고 하더라.”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아는 내가 민시후 형 때문에 곤란해질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정말 다정하네.”얼마 지나지 않아 송민아가 도착했다.고은서는 곧바로 민시후를 보러 가자고 했지만 송민아는 잠시 망설이며 박지연과 눈을 마주쳤다.“왜 그래? 너희 둘 다 왜 이렇게 수상해?”고은서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송민아가 고은서의 팔을 살짝 부축했다.고은서도 두 사람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단 민시후를 만나고 나서 추궁하기로 했다.고은서와 송민아가 병실 앞에 도착했다.병실에는 어제보다 사람이 적어진 것인지 한결 조용했다.송민아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민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거의 일주일만이었다.드디어 다시 민시후와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는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송민아가 병실 문을 열자 안에는 민시아와 민시후 남매 둘 뿐이었다.고은서는 민시아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곧장 민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어젯밤 문틈 사이로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상태가 나아 보였다.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고 앞에는 작은 간이식탁이 놓여 있었다.식사가 차려져 있었지만 민시후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민시후는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로 붕대를 감은 다리를 그대로 드러냈다.송민아가 말해줬던 대로 민시후는 머리 부상 외에도 팔과 다리가 골절되었다.그날 밤의 사고가 떠오르자 고은서의 눈가가 붉어졌다.“왜 또 왔어?”힘없는 민시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내 앞에서 그만 알짱대.”놀란 고은서가 고개를 들자 민시후의 말은 고은서가 아닌 송민아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은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의아했다.‘송민아는 이미 오래전에 민시후를 향한 감정을 정리했
박지연이 고은서를 설득한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민시후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해야 할 검사도 많아. 너도 기운 없이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야. 오늘 하루는 일단 쉬고 내일 민시후의 상태가 조금 더 안정된 후에 가서 보는 게 어때?”하지만 고은서는 기다릴 수 없었다.“싫어. 그냥 가서 민시후가 정말 깨어났는지만 확인할 거야.”말을 마친 고은서는 박지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박지연이 손을 뻗어 고은서를 잡았다.“민시후 정말 깨어났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전에 민시후가 혼수상태일 때도 나한테 숨겼잖아.”“너한테는 정말 못 당하겠네.”박지연은 체념한 듯 말했다.“지금 민씨 가문 사람들이 다 민시후를 지키고 있어. 민시후가 너와 대화할 여유가 있을 것 같아? 게다가 너 지금 이 상태로 들어가 봐야 민시후가 오히려 걱정할 거야. 조금 참았다가 내일 가도 똑같잖아.”고은서는 박지연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정말로 민시후가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그럼 병실에는 안 들어가고 밖에서 보기만 할게.”박지연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그럼 같이 가자.”“응.”10분 후 박지연은 고은서를 데리고 민시후의 병실 앞에 도착했다.병실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아 안이 살짝 보였고 그 안에는 민씨 가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도 있었다.민시후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몸에 부착된 기기들은 제거된 상태였다.머리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고 손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의사의 검사에 응하면서도 힘없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요. 쉬고 싶어요.”민시후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고은서의 가슴속에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민시후가 정말 깼어! 무사해... 멀쩡히 누워 있어.’“은서야, 이제 봤으니까 가자.”박지연이 조용히 말하자 고은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민시후는 허약한 상태라 고은서는 자신이 들어가서 괜히 폐를 끼치면 안
체육관 주차장에서 차가 미친 듯이 고은서를 향해 돌진했던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곽승재는 아찔한 공포를 느꼈다.그는 고은서를 보고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생각을 간파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진작 이런 마음을 깨달았더라면 은서가 그렇게까지 이혼을 결심했을까? 휴... 됐어.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형, 백승엽 사건에 대해 경찰도 결론을 내렸지? 전에 형이 아버님이 백승엽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사한 건 어떻게 됐어?”곽승재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가락을 풀고 오후에 곽현수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간략하게 육현석에게 전했다.육현석이 놀라며 말했다.“그럼 아버님이랑 상관없는 일이었던 말이야?”곽승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버지가 한 말도 일리가 있어. 만약 진짜로 은서를 해치려 했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을 쓸 필요가 없어. 그리고 민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그럼 백승엽은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걸까? 설마 자기 마음대로 벌인 일일리는 없잖아. 백승엽은 형한테 밉보일까 봐 누군가한테 원한을 품어도 작은 꼼수 정도만 부렸지 이렇게까지 악랄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잖아. 최근 백승엽과 접촉한 사람들을 다 확인해 봤어? 아버님 외에 수상한 인물은 없었어?”곽승재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현재로선 발견된 게 없어. 백승엽이 사람을 시켜 차 사고를 일으키고 불법 경로로 마약을 구매한 모든 증거가 명확하게 남아 있어.”“내가 듣기로 민시후가 은서를 도와 예전에 백씨 가문과 거래했던 고객들을 다시 이어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백유미의 정신 감정 보고서가 조작된 것임을 입증할 수 있는 의사도 찾았다고 하더라. 혹시 이런 일들이 백승엽을 자극한 건 아닐까? 게다가 백유미가 수술 중 대출혈로 고비도 겪었잖아.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걸지도 모르지.”그럴싸한 이유이긴 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았다.‘백승엽이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었다면 이렇게 냉정하고 신속하게 일을 꾸밀 수 있었을
곽현수는 곽승재의 말을 듣고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네 할머니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여씨 가문 체면은 고려해야 하지 않겠니? 고은서와 강제로 이혼시키고 다시 여씨 가문과 결혼한다면 더러운 소문 때문에 여씨 가문에도 피해가 가지 않겠니? 그런 상황에 여씨 가문이 널 받아들이겠어?”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한참을 침묵하던 곽승재가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이렇게 세심하고 사려 깊은 분인줄은 미처 몰랐습니다.”곽승재의 비꼬는 말투에 곽현수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이제라도 내 뜻을 알았으니 더 늦기 전에 여씨 가문과의 결혼을 확정 지어라!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봐야죠.”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곽승재의 크고 곧은 체격은 마치 한 그루의 장성한 소나무처럼 위풍당당했다.“이미 관련 증거는 경찰에 넘겼습니다. 아저씨의 죽음이 아버지와 관련 있는지는 경찰이 조사할 겁니다.”“너 이 자식이!”곽현수는 분노로 숨이 턱 막혔다.“못난 놈!”곽현수가 화를 내건 말건 곽승재는 신경 쓰지 않고 긴 다리를 뻗어 유유히 룸을 빠져나갔다....테니스 코트 안에서 육현석은 땀을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둘렀다.육현석은 박지연 병원의 배구 친선 경기에 참여한 이후로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혹시라도 다음에도 비슷한 활동이 있으면 박지연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의도도 있었다.막 열정이 솟아오를 때쯤 육현석은 멀찍이 서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헐레벌떡 곽승재의 옆으로 달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형, 여긴 무슨 일이야?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격렬한 운동하면 안 돼.”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육현석도 땀을 닦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형, 참 답답하다니까. 부상당한 몸으로 제대로 쉬지도 않고 밤새 고은서 돌보느라 잠도 안 자고 심지어 계속 안고 다니기까지 하면서...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그래?”곽승재는 육현석을 흘깃 쳐다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버지도 아저씨가 그렇게 대담하게 민시후까지 엮어 함정을 파고 기회를 이용해 범가온을 독살할 줄은 예상 못 했겠죠. 아버지가 시켰다는 걸 밝힐까 봐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꾸민 거 아닙니까?”“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곽현수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진 채 손에 들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내던졌다.“네가 감히 네 아버지를 이렇게 의심해? 내가 고은서를 손보려면 방법이야 많아. 굳이 백승엽을 이용할 필요는 없지! 백승엽은 오랫동안 내 곁에서 집사를 해 왔어. 공로가 없진 않다고. 내가 왜 그런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어 죽게 만들겠어!”곽승재는 바닥에 떨어진 시가를 흘깃 내려다본 후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정말 아버지와 상관없습니까?”“당연하지!”곽현수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누가 너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했길래 날 의심하는 거야! 혹시 고은서야?”곽현수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너랑 이혼한 걸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지금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네가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일부러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거잖아! 곽승재!”곽현수는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경고했다.“더 이상 나를 거스르지 마라. 안 그러면 나도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거다. 백유미를 귀국시킨 건 내가 맞지만 너랑 고은서의 관계와 감정이 정말 단단했다면 그렇게 쉽게 흔들릴 리도 없었겠지!”곽현수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고은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질질 끌어? 이미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러는 거냐. 아니면 네 엄마 때문에 일부러 내 화를 돋우려고 그러는 거야?”곽승재는 코웃음을 치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누가 지금 일부러 이러고 있는데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문제에는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씨 가문의 혼사는 얘기가 다르죠.”곽승재는 또 다른 서류를 꺼내어 곽현수 앞에 내밀었다.“사람을 시켜 조사해봤더니 1년 전 Y 국에서 열린 연회에 원래 초대받은 사람은 아
곽승재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프라이빗 룸에서 곽현수를 만났다.곽현수는 손에 고급 시가를 들고 앉아 있었다. 그에게서는 오랜 시간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 특유의 날카로운 아우라가 풍겼다. 곽현수 주위에는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몇몇 사업가들이 앉아 함께 시가를 음미하고 있었다.중앙의 테이블에는 디캔팅 된 레드와인이 놓여 있었고 유리잔 속에서 은은하게 흔들리는 와인빛이 유혹적인 광택을 뿜어냈다. 시가의 그윽한 향과 와인의 깊은 향이 어우러져 공간 전체가 편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곽승재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문가에 도착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아버지.”곽현수는 옆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해성시 경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곽승재의 출현에 놀라운 기색을 보였다.“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곽승재는 태연하게 자리에 있는 어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눈치 빠르게 각자 적당한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난 후 곽승재는 곽현수 옆에 놓인 등나무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곽현수는 시가를 깊게 들이마신 후 희미한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승엽 아저씨가 죽었습니다.”곽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일로 굳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어제 이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다.”“경찰이 현장을 조사했지만 타살 흔적은 없었습니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입니다.”곽현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곽승재는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경찰 측에서 아저씨랑 함께 숨어있던 경호원 두 명을 확보했는데 아저씨는 최근 극도의 불안 속에서 정신적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틀 전 두 경호원에게 당분간 몸을 피하라고 지시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여요.”곽승재의 말을 들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만큼 고은서는 더 이상 민시아와 돌려 말할 생각이 없어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시아 씨, 오늘 저를 찾아오신 건 민시후와 거리를 두라는 말씀이죠?”민시아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화장하지 않았음에도 피부는 하얗고 투명하게 빛났고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침착함을 머금고 있었다.고은서는 아름답고 왠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은서 씨, 지나치면 반드시 상처를 입게 됩니다.”민시아가 입을 열었다.“시후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미 한 차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았고 시후가 세상을 가볍게 여기고 방탕한 삶을 살아온 것도 그 아픔을 감추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저는 그 애가 은서 씨 때문에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렵습니다. 이번에는 버텨내지 못할 거예요.”민시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시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저는 시후에게 모든 걸 걸어보라고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은서 씨는 여전히 전 남편인 곽 대표님과 가깝게 지내고 있고 곽 대표님 역시 은서 씨를 무척 신경 쓰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시후는 결국 상처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점점 깊이 빠져들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차라리 지금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민시아의 말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민시현에 비하면 그녀는 오히려 매우 정중한 태도였다.“시아 씨, 저랑 시후는 현재 친구일 뿐이에요.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생각은 없습니다.”고은서는 차분하게 설명했다.“은서 씨를 떠보는 게 아닙니다. 시후 성격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 애가 완전히 단념하도록 만들려면 은서 씨가 곽 대표님과 재결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시후는 원칙이 강한 아이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다른 연인을 두고 있다면 절대 빼앗으려 하지 않을 거예요.”고은서는 단호히 거절했다.“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저는 이미 곽승재와 이혼했습니다. 다시 만날 생각도 없고요. 시후는 저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어요. 그런
“죽고 싶으면 곱게 죽지, 투신자살은 왜 한대?”혐오감이 잔뜩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들 곱게 죽고 싶지 않...”고은서는 문득 곽승재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그녀가 대체 언제 투신자살했단 말이지?“사모님, 드디어 깼군요.”이때, 도우미 이미숙이 물과 약을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머리가 아프시죠? 의사 선생님께서 가벼운 뇌진탕 증상이 있다고 해서 약 처방해주셨는데 지금 드실래요?”고은서는 널찍한 침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숙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까먹었다.실내 인테리어를 봐서는 예전의 곽씨 일가 별장 같았다.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2년이 넘도록 발길이 끓긴 곳이지 않은가?설마 곽승재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단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칼로 심장을 찌른 이상 설령 살아있더라도 수술실에 실려 갔을 테니까.고은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가슴을 확인해봤는데 멀쩡하기만 했다.그리고 머리와 손목에는 의료용 거즈가 둘둘 감겨 있었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나중에 투신자살하고 싶으면 더 높은 곳에 올라가. 고작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으니까.”싸늘한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방을 나섰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기 몸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2년 넘게 정신병원에 갇혀 있으면서 안색은 이미 초췌하다 못해 창백했고, 살이 쏙 빠져 장작처럼 삐쩍 말랐지만 지금은 피부가 뽀얗고 매끈하니 탄력까지 넘쳤다.몸과 팔뚝에도 간병인과 환자들 때문에 난 상처와 멍을 찾아볼 수 없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화가 난 나머지 말을 좀 심하게 했을 뿐이에요.”이미숙은 그녀가 상처받은 줄 알고 조심조심 위로했다.“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이따가 도련님과 잘 얘기...”“아줌마! 오늘 며칠이죠?”고은서는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이미숙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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