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이제 네 차례야.”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디 가!”고운서가 버럭 외쳤다.“사인 안 해?”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네가 꾸민 짓이지?”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고은서, 우리 할
고은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전생에 무려 8년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건 달랑 이혼협의서 한 장, 그리고 백유미와 결혼했다는 소식뿐이지 않은가?그런 남자가 어찌 단 몇 주 만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냐는 말이다.“할머니는 만약 승재가 우리 은서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이혼하고 싶냐는 뜻이야.”전미자가 다시 물었다.노부인의 잔뜩 기대하는 눈빛 속에서도 고은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번 생에는 어떻든 간에 곽승재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제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지긋지긋했고, 곽승재와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삶을 맞이할 생각이다....본가 거실을 나서자 고은서는 싸늘한 얼굴로 차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이혼한다고 생난리를 쳤는데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지 않은가?어쩌면 곽승재는 그녀와 전미자가 짜고 치는 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에 차에 타면 추궁과 모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결국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택시 타고 가려고 했다.“타!”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곽승재는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괜찮아, 어차피 가는 길도 아닌데.”고은서도 매섭게 쏘아 붙었다.이혼을 못 해서 짜증이 난 건 매한가지라 스스로 제 무덤을 파서 곽승재의 화풀이를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곽승재의 말투에 협박이 담겨 있었다.“소리는 왜 질러?! 그렇게 능력 있으면 나한테 따지는 시간에 이혼 수속이나 하지?”고은서가 화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이런 말투로 그를 대한 적은 처음이고, 심지어 반박까지 하다니?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이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의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는 곽승재를 발견했고, 잽싸게 도망치려는 찰나 이미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이거 놔!”결국 다급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그의 팔뚝을 콱 물었다.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목덜미를 잡고 차에 쑤셔 넣었다.“
화면에 뜬 연락처를 보자 곽승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고, 잽싸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승재야, 판주 미팅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언제 와?”고요한 차 안에서 백유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곽승재의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은서의 귀에 들렸다.곽승재는 최근에 판주 투자은행을 인수했고, 백유미가 이사직을 담당하고 있다.전생에 백유미는 판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커리어 여왕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당시 납득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GS 그룹에 입사해서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지만 곽승재의 조롱만 받았다.“네가 출근한다고?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고 있어? 이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유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할애했는데 고작 호언장담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비록 유미는 너보다 배경이 빵빵하거나 가진 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항상 노력하고 사리에 밝기도 해. 어디 너처럼 갑질밖에 모르는 줄 알아?”...“그래, 일단 알겠어.”곽승재가 전화를 끊자 고은서도 회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했다.전생에서 봤던 곽상재의 눈코입이 점차 현생과 오버랩되면서 별안간 차 안의 공기마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실장님, 저 앞에 세워주실래요? 여기서 내릴게요.”“사모님, 여기는 택시도 안 잡힐 텐데 대표님 먼저 회사로 모셔다드리고 댁까지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 여기서 세워주세요.”고은서는 단 1초라도 곽승재와 같은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주민기는 차를 세우는 대신 백미러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안달 난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의 속에서 또다시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차 세워요. 여기서 내려줘요.”주민기는 그의 말에 따라 길가에 차를 댔다.고은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았다.“고은서, 감히 우리 할머니를 한 번만 더 건드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곽승재의 경고에도 그녀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준수한 외모의 남자는 살짝 건방진 느낌마저 들었고, 흰색 캐쥬얼 정장을 입고 있었다.만약 보통 사람이 이런 옷차림이라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들겠지만, 그는 되레 귀티와 여유가 흘러넘쳐 이미지와 찰떡이었다.어딘가 낯익은 얼굴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도련님.”기사가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불렀다.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시간 지체해서 미안해요. 제가 100% 보상해드릴게요.”고은서가 진심으로 사과했다.이에 남자는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차량 수리비를 제외하고 정신적 보상 그리고 손실비도 있죠. 지금 몇조가 넘는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지체되었으니까 모두 책임지세요.”상대방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고은서는 피식 웃기만 했다.“저기요, 외모도 멀쩡하고 돈도 좀 있어 보이는데 사기로 먹고사는 거였어요?”어쩐지 사진 찍고 증거를 남기는 기사의 모습이 절대로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남자는 화내기는커녕 여전히 여유만만했다.“내가 뭐로 먹고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만약 그쪽이 배상할 능력이 없다면 차주한테 하라고 해요.”그제야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타깃이 곽승재라는 것을 눈치챘다.한편, 머릿속으로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떠올랐다. 그는 바로 곽승재의 최대 라이벌인 민시후였다.전생에 민시후와 직접 만난 적은 없었고, 정신병원에 있을 때 경제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자주 접했다.당시 그는 곽승재에 버금가는 몸값을 자랑했고, 그가 설립한 투자회사는 GS 그룹을 바짝 추격하는 존재로 거듭났다.“곽 대표 와이프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당신 차를 끌고 나와 내 차를 박았는데 어떻게 할 건가?”고은서가 전생을 회상하고 있을 때 민시후는 이미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남편이랑 한마디 해요.”민시후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비록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여보세요’라고 말했다.“혼자 차 끌고 나갔어?”짜증이 덕
“고은서 씨, 질문 하나 있는데 제가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네요.”민시후가 사악하게 말했다.‘나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무슨 질문인데요?”민시후는 일부러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고은서 씨는 저랑 곽 대표님의 내기에서 누가 이길 것 같아요?”민시후가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는 순간, 고은서는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챘다.전에 고은서는 먼저 민시후에게 연락처를 물어서 그에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가르침을 받았다. 이건 고은서가 곽승재보다 민시후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는 걸 의미했다.그런데 민시후가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듦과 동시에 곽승재를 도발하는 것이었다.고은서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얼버무렸다.“내기 같은 건 실력을 제외하고도 운이 필요한 일이죠.”“고은서 씨는 제 운이 좋은 것 같나요?”“글쎄요, 일단은 민시후 씨가 좋은 성적을 얻길 바랄게요.”민시후는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듯했는데 곽승재가 창문을 올려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언제부터 민시후랑 그렇게 친해진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돌렸을 때 곽승재가 다소 짜증스러운 어투로 물었다.고은서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넘겼다.“지금은 안 친한데.”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민시후의 미래 투자은행은 전망이 밝고 돈을 벌기에 적합할 듯했다.그러나 민시후 쪽에서는 곽승재와 대결하려고 했다.고은서는 전생에 곽승재가 그녀를 냉대하고,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낸 일로 그를 무척이나 원망했다. 그때 곽승재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가 억지로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었다.그래서 그녀는 아직 그 단계까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작게 냉소했다.곧 초록불이 들어오자 민시후는 액셀을 밟아 곽승재의 앞에 서더니 곽승재의 차를 막고 천천히 운전했다.곽승재가 왼쪽으로 가면 그도 왼쪽으로 가고 곽승재가 오른쪽으로 가면 그도 오른쪽으로 가서 절대 곽승재에게 먼저 앞서나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비록 고
민시후의 차는 큰 시멘트 더미와 충돌해서 차 뒷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졌다.겉보기엔 곽승재의 차보다 상태가 훨씬 더 심각했다.이때 구급차가 도착했고 곧 의사가 도착해 민시후를 차 안에서 들어냈다.“뚜렷한 외상은 없고 골절 현상도 없습니다. 일단은 에어백 충격이 너무 커서 정신을 잃은 것으로 판단됩니다...”의사의 말에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동시에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민시후와 곽승재 두 사람의 원한이 얼마나 크기에 겨우 비즈니스적인 대립 관계로 인해 이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충돌한단 말인가?...고은서와 곽승재가 경찰서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었다.그들은 민시후가 이미 정신을 차렸고 큰 문제는 없지만 머리를 핸들에 박는 바람에 약간의 뇌진탕 증상이 있어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쉬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오늘 사고가 발생한 곳은 길이 넓고 차가 적어서 다른 차량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기에 경찰서에서도 크게 추궁하지는 않았다.고은서는 곽승재와 민시후 사이의 갈등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곽승재가 계속 표정을 굳히고 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을 거두어야 했다.주민기가 차를 타고 도착했다.고은서가 말했다.“두 사람 회사로 돌아가는 거 방해하지 않게 나는 내가 알아서 차 타고 갈게요.”곽승재는 워낙 바빠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늘 시간을 이렇게 많이 지체했으니 틈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배려한다고 한 말에 곽승재는 오히려 차가운 표정을 해 보였다.“요 이틀 있었던 사건들로는 모자라서 계속 사고 치려고?”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곽승재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코웃음쳤다.고은서는 뒤늦게 반응했다.“이혼 얘기는 진심이었어. 민시후 씨 차를 들이받은 건 순전히 사고였고.”“민시후가 왜 널 알고 있는 건데? 민시후 만나자마자 자기소개라도 했어?”그 일을 설명하기는 번거로웠고 설명한다고 해도 곽승재가 믿지 않을 것 같았기에 고은서는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오늘 오빠에게 폐를 끼친 건 내
“어딜 가? 네가 약 발라줘!”“미안하지만 난 의사가 아니라서 그럴 의무가 없는데.”고은서가 차갑게 거절했다.곽승재는 더욱더 언짢아졌다. 조금 전까지는 초조해하면서 걱정해 주고는 곧바로 태도를 달리하다니.“의무가 없다니? 내가 누구 때문에 다쳤는지 잘 생각해 봐.”고은서는 괜히 네가 화를 내서 차를 들이받지 않았더라면 다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곽승재는 끝까지 그녀와 따지고 들 태세였고 고은서는 그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겨우 약을 바르는 것이니 시간도 얼마 들지 않을 것이다.이미숙이 약상자를 들고 왔고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면봉과 알코올을 꺼냈다.“도련님, 사모님. 전 먼저 일 보러 가보겠습니다. 분부하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이미숙이 떠나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상처를 처리해 주기 시작했다.그의 상처는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긁힌 곳이 꽤 많아 피가 많이 흘렀다.알코올을 상처에 바르니 쓰라렸다. 곽승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가만히 있었고 고은서는 살살 움직였다.“됐어.”그의 팔에 약을 다 바른 뒤 고은서는 대충 정리하고 손을 씻을 생각이었다.“이마도 해줘.”곽승재는 고은서의 불성실한 태도가 조금 불쾌했다.예전이었다면 손톱 끝이 조금 상한 거로도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오늘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도 고은서는 발견하지 못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이마를 힐끗 보았다. 확실히 관자놀이와 구레나룻 쪽에 상처가 있었다.유리 조각이 튀어서 난 상처인 듯했는데 이미 딱지가 앉아있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고은서는 그의 상처를 처리하기 쉽도록 그의 옆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고 그녀의 향기가 곽승재의 코를 간질였다.곽승재는 순간 답답함이 느껴져서 손을 뻗어 목 언저리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움직이지 마.”고은서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고정했다.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에 닿자 곽승재는
“승재가 다쳤다고 해서 한 번 와봤어. 오해하지 마, 은서 씨.”백유미는 뭔가 떠오른 것처럼 황급히 설명했다.“승재가 사인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승재 사무실에 갔다가 주 비서에게서 승재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승재가 먼저 얘기해준 건 아니야!”‘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오해하지 말라는 건지.’고은서는 입꼬리를 당겼다.“백유미 씨, 건의 하나 할게. 오해받고 싶지 않으면 오해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아. 예를 들면, 이 남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 그의 아내가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은 상황에 이렇게 집에 찾아오지 마. 집에 오게 됐다고 해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켜야지. 다른 사람의 남편이랑 같이 앉아있을 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어?”백유미는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히더니 서둘러 소파 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은서 씨, 난...”“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네.”고은서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나랑 고은서 씨는 성 떼고 이름만 부를 정도로 친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날 사모님이라고 부를 생각이 없다면 고은서 씨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고은서, 적당히 해.”곽승재가 경고했다.‘벌써 편을 들어준다고?’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내가 뭐 틀린 얘기 했어? 왜 적당히 하라는 건데?”“승재야, 은서 씨... 고은서 씨 말이 맞아. 내가 그런 것까지는 신경을 못 썼어.”백유미는 무안함을 느끼면서도 부드럽게 화를 내려는 곽승재를 달랬다.“고은서 씨, 언짢게 했다면 미안해. 나 지금 당장 갈게.”백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고은서가 그녀를 말렸다.“가야 할 사람은 나니까.”“고은서!”곽승재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이틀 전 있었던 교통사고 때문에 고은서는 택시를 탔다.외할아버지 고준석은 교외 쪽에서 살고 있어서 차로 한 시간 반은 가야 했다.마당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꽃에 물을 주고 있는 외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전미자 생일 연회 때마침 성씨 집안 소개로 새로운 사업 계약서를 체결한 고국성은 눈에 띄게 우쭐대며 다녔는데 곽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업적을 적지 않게 으리으리하게 포장해서 떠벌리고 다녔었다.그래서 곽현수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그녀는 그가 자신은 고국성처럼 천한 사람을 직접 처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은서는 화내는 대신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우리 삼촌이 약간 잘난 체하면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이건 삼촌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 이 이유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죠. 회장님께서 우리 삼촌이 면한 일에 관해 잘 모르신다면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그녀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지라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아니면 어제 오미나 씨랑 대화한 내용을 녹음해 두었는데 직접 들어보실래요?”곽현수는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설명과 녹음파일 같은 걸 계속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그는 오미나에 관해서도 더는 묻지 않고 찻잔을 들고 아주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으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오늘 찾아온 이유가 대체 오미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야 아니면 네 삼촌 일을 해결하고 싶어서야?”“삼촌 일을 해결할 겸 오미나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사실 그보다 우리 삼촌이 어느 면에서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더 알고 싶네요.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은데 회장님께서 알려줬으면 좋겠네요.”고은서도 꿀리지 않고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생각보다 더 총명하네.”곽현수는 여전히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총명해 보았자 당신 같은 사람 눈에는 들지 않겠지.’고은서는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곽현수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잠시 후, 곽현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승재가 이혼
이튿날 오후, 고은서는 약속 시간에 맞춰 곽현수가 얘기한 시가 가게에 도착했다.전시 구역에는 다양한 시가 상자가 진열되어 있었고 주변 벽에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직원은 고은서를 VIP룸으로 안내해 주었다.VIP룸에는 검은 가죽 소파와 부드러운 캐시미어 카펫, 그리고 정교한 티 테이블이 놓여있었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차분한 느낌 주었다.곽현수는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고 직원이 그에게 다양한 신제품을 소개해주는 걸 듣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상위자의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와 달리 유독 더 날카롭게 다가왔는데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고은서는 곽현수와 만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전과 같이 고은서는 곽현수를 보자마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그녀는 자신이 이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얼마나 우울한 사람으로 컸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도착했습니다.”고은서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인기척을 느낀 곽현수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곽현수를 향해 덤덤하게 곽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곽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직원이 들고 있는 트레이 위에 있는 시가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직원은 이내 공손하게 시가를 꺼내주었다.그는 그제서야 눈길을 고은서한테 돌리면서 그녀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고은서가 소파에 앉는 동시에 직원은 곽현수를 위해 시가에 불을 붙여주었다.“난 무슨 일로 찾은 거지?”곽현수는 말하면서 시가를 한 입 맛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직원은 아주 눈치 있게 곽현수에게 다른 시가를 건네주었다.그와 동시에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제가 곽 회장님이 시가를 즐기는 시간을 방해한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곽현수는 새 시가를 들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마음에 드는지 직원에게 잘라 달라고 한 다음 내려보라고 손짓했다.직원이 나간 후, 그는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담담한
고국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이렇게 치밀하게 계산해서 접근한 이유가 결국 돈 때문 아니야? 도대체 얼마면 너랑 네 전남편 배를 채울 수 있는데? 금액이나 말해!”그러나 오미나는 여전히 처량한 표정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고 대표님, 아이는 정말 뜻밖이었어요. 저는 그냥 조용히 낳아서 혼자 키울 생각이었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몰아붙이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밝힌 것뿐이에요.”“일부러 접근한 게 아닌데 왜 미리 증거들을 남겨둔 거죠?”유성준이 물었다.고은서는 유성준이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했다.오미나가 제시한 증거들은 단순한 우연으로 준비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모든 정황이 그녀의 의도적인 접근을 증명하고 있었다.하지만 오미나는 유성준을 무시한 채 다시 고국성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대표님 그렇게 화내실 필요 없어요. 검사하면서 물어봤더니 남자아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모님보다 훨씬 젊어요. 그리고 그분처럼 강압적이지도 않죠. 만약 사모님께서 이번 일로 이혼을 원하신다면 저와 함께 사는 것도 고려해 보세요. 우리 함께 아들을 키워요. 따님도 친딸처럼 소중히 보살필게요.”“네가 감히!”오미나의 말에 분노에 찬 고국성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나를 호구로 보지 마! 난 아들 같은 것도 필요 없어!”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히 오미나의 말에 혹해서 판단을 흐리지 않았네.’그녀는 유성준에게 눈짓을 보내 고국성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진정시키게 했다.그리고 자신은 남아 오미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곽현수가 어떤 대가를 제시했길래 이렇게까지 우리 삼촌을 벼랑 끝으로 모는 거죠?”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나 오미나는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고 대표님과 저는 평범하게 만나 가까워졌어요. 벼랑 끝으로 내몬다니요?”그 말에 고은서는 손안에 쥐고 있던 녹음 중인 핸드폰을 더욱 꽉 쥐었다.오미나는 곽현수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곽현수와 관련이 없다고
기자 회견은 호텔 2층 연회장에서 열렸다.유성준이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회견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국성은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진지하게 사과하며 관련된 사건은 이미 경찰에 신고한 상태이며 조사가 진행되면 자신의 결백이 증명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단은숙 역시 남편의 인품을 믿는다며 고국성이 결코 가정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며 이번 사건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모략이고 아이 역시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고국성의 아이예요! 친자 확인서도 있습니다.”고국성을 향한 여론이 점점 우호적으로 바뀌려던 찰나 입구 쪽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시선을 돌리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미나였다.오미나는 헐렁한 임부복 차림을 한 채 손에는 감정서를 들고 있었다.걸어오는 걸음걸이는 다소 불안정해 보였다.“고국성 씨, 당신이 먼저 나에게 끊임없이 호감을 표현하고 선물도 주고 식사에도 초대했잖아요. 그래서 경계를 풀고 친구가 된 건데 당신은 제가 술에 취한 틈을 타 호텔에서 강제로 저를 안은 거잖아요!”오미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기자들은 충격적인 폭로에 즉각 반응하며 고국성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냈다.“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미나를 유혹한 적도 없고 그런 짓을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고국성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그러나 오미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신 사진과 영상 그리고 고국성이 자신에게 선물을 건넨 증거 자료를 하나씩 꺼내 보였다.심지어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가는 CCTV 영상까지 있었다.“고국성 씨, 원래는 당신과 이렇게 적대적으로 싸울 생각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모함하고 내 명예를 짓밟으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모두 공개할 수밖에 없네요!”오미나는 본래 가련한 스타일이었다.화장기 없는 얼굴에 울 것 같은 억울한 표정까지 더해지자 그녀는 완벽한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반면 중년이 되어 배가 나온 고
육현석은 자신의 속셈을 들켰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난 그냥 네가 승재 형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네 전화는 꼭 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한번 시험해 볼래?”고은서는 시험해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하지만 흥미를 느낀 박지연이 곽승재의 번호를 눌렀다.육현석이 말릴 틈도 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연 씨, 은서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은서는 아무 일도 없어! 형, 내 전화는 왜 안 받았어!”육현석이 화가 난 듯 따져 묻자 곽승재 쪽에서 갑자기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거리가 멀었던 탓에 여자의 신분은 확인하기 어려웠다.“누가 우는 거야? 형 지금 어디야?”육현석이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할게.”차분하게 답한 곽승재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육현석이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쯧, 망했네?”박지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곽승재가 은서를 특별히 여긴다는 걸 증명하려다가 결국은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들켜 버렸네?”육현석은 급히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오해하면 안 돼!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고은서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육현석은 그녀를 유심히 살피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넌 지금 화난 거야? 아닌 거야?”고은서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대답 대신 되물었다.“내가 화내길 바라는 거야? 아니길 바라는 거야?”뜻밖의 질문에 육현석은 말문이 막혔다.화가 났다면 지금 상황이 조금 두려웠고 화가 나지 않았다면 완전히 신경도 안 쓴다는 뜻 같아 왠지 씁쓸했다.“됐어. 음식 준비도 끝났으니까 가서 나르는 거나 좀 도와줘.”박지연은 육현석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주의를 돌렸다.육현석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박지연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곽승재가 정말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고 있는 거라면 기분이 어때?”
고은서의 질문에 전미자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잘 몰라. 연정이와 현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분명 현수와 관련이 있을 거야.”이 말에 고은서도 깊이 공감했다.하지만 그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에 뭐라 덧붙이기도 어려웠다.“은서야, 승재는 두 사람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았어. 그래서 랑과 결혼에 대한 믿음을 잃었지.”전미자는 앨범을 내려놓고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너와 승재가 결혼하길 원했던 건 사실 개인적인 욕심이었어. 너는 밝고 자신감 넘치고 또 진심으로 승재를 좋아했잖니. 난 네가 승재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승재가 떨떠름하게 승낙했을 때도 난 너희가 행복할 거라고 믿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니.”전미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고은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전미자로부터 여러 번 들었었다.전미자가 아무리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해도 속으로는 여전히 그녀가 곽승재와 함께하길 바라고 있다는 걸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전미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전미자가 휴식을 취하겠다고 하자 고은서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유일 투자은행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은서는 유성준의 연락을 받았다.“아저씨가 경찰에 신고했어. 경찰도 고소를 받아들였어. 공식 기자회견은 모레 오후에 열릴 거야. 홍보팀에서 친분이 있는 몇몇 언론사와 약속을 잡았고 아주머니도 아저씨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로 했어.”빈틈없는 그의 일 처리에 고은서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게임 회사 쪽의 진행 상황을 점검한 후 그녀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왔다.집에 들어서자 고은서는 며칠 동안 야근하던 박지연뿐만 아니라 한껏 멋을 낸 육현석도 발견했다.“은서야, 왔어?”박지연이 먼저 말을 건넸다.“육현석이 자꾸 밥 먹자고 꼬드겼는데 난 피곤해서 집에 간다고 했더니 따라왔어.”육현석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지연이가 아주머니 요리가 끝내준다고 해서 오래전부터
“민준 씨,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고은서가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송민준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고은서는 전화를 끊었다.‘오미나에 대한 일을 숨기지 않은 걸 보면 삼촌과 관련이 없겠어. 민시후가 나를 좋아해서 송민아와 파혼한 일 외에는 특별한 갈등도 없잖아. 처음 만났을 때 싸늘한 시선은 동생의 파혼 때문이었나 보다. 이후에 조금 친절해진 것도 송민아와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애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편이라고 했으니까.’송민준에 대한 의심을 거둔 고은서는 컴퓨터 속 자료를 바라보았다.‘오미나와 곽현수의 비서가 만난 적 있다고? 우연일까? 백승엽의 청부 폭행 사건에서 곽현수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백유미를 귀국시키고 원지훈과 함께 회사를 차리도록 지원한 것도 곽현수야. 이혼하긴 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나를 잡으려고 하고 있어. 그것 때문에 삼촌한테 손댄 건가?’고은서는 곽현수가 대체 왜 이런 일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한동안 전미자를 찾아뵙지 못한 게 떠오른 고은서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혹시 그녀에게서 무언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전화를 걸어 전미자가 시간이 된다는 걸 확인한 후 고은서는 전미자의 집으로 향했다.전미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여전히 다정하게 맞아주었다.“왜 이렇게 말랐어!”그녀는 걱정스럽게 고은서를 바라보며 주방에 더 많은 음식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비록 곽승재와 이혼했지만 전미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녀를 아껴주고 있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전미자와 담소를 나누고 소파에 함께 앉아 오래된 사진 앨범을 넘겼다.고은서는 젊은 시절의 곽현수를 보고는 무심코 말했다.“할머니, 아저씨 젊었을 때 정말 잘생기셨네요. 분명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 혹시 감정적인 문제는 없었나요?”전미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 고집불통이 무
‘억울하게 오해했더라도 곽승재도 나를 속였으니 사과하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고은혜에게 앞으로 절대 곽승재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뒤 강현철의 상황을 물었다.“그 사람은 곽 대표님 경호원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어. 그런데 아빠는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처벌을 원치 않으신대.”“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다음엔 더 심해질 거야! 절대 가만둬선 안 돼!”고은혜는 난감해하며 답했다.“그 사람이 와서 난리 칠 때 그러더라. 무슨 일을 당한다면 자기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아빠의 추문을 전부 폭로해 버리겠다고 협박했어.”고은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숨길 수도 없었다.고은서는 직접 고국성을 찾아가 이번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비록 명예가 다소 손상될지는 몰라도 약점을 잡혀 협박받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차를 부르려던 고은서는 곽승재의 차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차창이 내려졌지만 뒷좌석에서 곽승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아가씨, 타시죠. 곽 대표님께서 바래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운전기사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곽승재의 상태를 묻기도 귀찮았던 고은서는 그냥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고은서는 바로 고국성의 집으로 향해 제안했지만 고국성은 단호하게 반대했다.“나는 누명을 쓴 거야! 내가 왜 잘못을 인정해야 해? 그럼 내 체면은? 직원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난 절대 동의 못 해!”“삼촌, 누명을 썼다면 더더욱 공개적으로 해명해야 해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끌려다녀서는 안 돼요. 경찰에 신고해서 조사하게 하면 되잖아요. 결과가 나오면 사람들도 이해할 거고요.”고국성이 망설이는 사이 단은숙이 격앙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모든 사람이 네 삼촌이 바람피우고 사생아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다른 사모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겠어!”고은서는 지금 이 상황이 피곤했다.단순히 고국성 개인의 문제였다면 협박을 당하든 망신을 당하든 신
곽승재는 오랫동안 저자세로 나왔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고은서의 태도를 보고 조금 속상했다.고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아무리 고치겠다고 해도 본성은 여전히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사람이야. 지금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사라지거나 소위 말하는 호감이 식어버리면 결국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곽승재의 잘생긴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네 말은 내가 그동안 해온 모든 행동이 전부 네가 돌아오게 하려는 연기였다는 뜻이야?”“난 그저 사실을 얘기하는 거야. 당신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있었고 원하는 건 다 가졌지. 한때 당신한테 그렇게 매달렸던 내가 이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이러는 걸 수도 있잖아. 오늘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앞으로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누군가에게 계속 감시당하는 기분 썩 좋지 않거든.”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그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고은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치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듯했다.고은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겉으로 보기엔 고은서가 은혜도 모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그녀를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기색조차 없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곽현수처럼 사람을 시켜 감시하지 않으면 그녀의 상황을 제때 알 수도 없었고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두 사람은 몇십 초간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러던 중 곽승재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속도를 줄인 운전기사는 병원에 도착했음을 알렸다.“차 돌려서 본사로 가죠.”막 차 문을 열려던 고은서는 싸늘하게 기사를 향해 명령하는 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었다.“너 많이 다쳤...”“거짓말이야.”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무표정하게 답했다.그녀는 말문이 막혔다.“어디로 데려다줄까?”고은서는 이미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디딘 상태였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기사 불러서 알아서 갈게.”말을 마친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