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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류한나
“펜 이리 줘요.”

“대표님, 거래처 분들이 계약 체결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주민기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는 GS 그룹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중요한 협력 건이었는데, 자칫 고은서 때문에 망칠 뻔했다.

곽승재는 고은서를 무시하고 주민기와 함께 급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곽승재!”

고은서가 뒤쫓아갔다.

“저 여자 끌어내.”

곽승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고은서를 에워쌌다.

고은서는 곽승재가 워커홀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바빠지기 시작하면 오늘은 이혼하기 글렀기에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일 오전 9시, 구청에서 봐!”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떠났다.

대체 간다는 건가? 만다는 건가?

하루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곽승재라면 무조건 올 텐데...

이런 생각에 고은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곧이어 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메일에 접속했다.

메일함에는 여러 투자은행에서 보낸 채용 제의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처럼 바로 메일을 삭제하는 대신 하나씩 클릭해 봤다.

그러나 전부 기한이 지난 메일로 심지어 난다긴다하는 금융권 엘리트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투자은행도 있었다.

정작 그녀는 쓰레기 같은 곽승재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차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서 절대로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삶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했다.

몇 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서 내일이면 곽승재와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내 PC 전원을 끄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으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다.

한창 열심히 짐을 싸고 있을 때 이미숙이 걸어 들어왔다.

“사모님, 짐을 왜 싸는 거죠? 여행 가시게요?”

이미숙은 곽승재가 임시 고용한 도우미로 혹시라도 두 사람의 상황을 전미자에게 보고하는 불상사를 막으려고 일부러 본가의 도우미를 들이지 않았다.

비록 전생의 고은서는 성질도 까다롭고, 툭하면 소란을 피웠지만 이미숙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케어해주었다.

단지 이미숙이 백유미에게 매수당했다는 친한 친구의 말을 듣고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태클 건 적이 꽤 있었다.

“아줌마, 저 내일부터 나가서 살 거예요.”

고은서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저한테 맞춰 주느라 마음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세요.”

이미숙은 깜짝 놀랐다. 늘 불평불만하고 의심과 짜증이 끊이질 않던 사모님이 차분한 모습으로 사과까지 한다니?

그날 2층에서 뛰어내리고 나서 깨어난 이후로 그녀는 180도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닙니다, 사모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이사하신다는 거예요?”

고은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곽승재와 이혼할 생각이거든요. 내일 이혼하러 가려고요.”

이미숙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록 그녀를 돌본 지 1년도 채 안 되었지만, 도련님에 대한 사모님의 마음이 어떤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려 도련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일매일 머리를 쥐어짜 내며 고민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가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면 집에 명화를 가득 걸어놓았고, 책을 즐겨 본다고 하면 위층 아래층 가리지 않고 심지어 온실마저 책을 수두룩하게 진열했다.

또한, 먹고 입고 쓰는 것도 전부 도련님의 취향이 반영되었는데 그런 분이 지금 이혼한다니?

“사모님에게 오로지 도련님뿐이었잖아요. 왜 갑자기 이혼하고 싶으신데요?”

이미숙은 당최 이해가 안 갔다.

고은서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마음을 얻지 못했으니 포기하려고요. 그래서 그냥 놓아주기로 했어요.”

그래도 납득이 안 가는 듯 한마디 보태려던 찰나, 복도에 서 있는 곽승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련님, 오셨어요? 식사는 하셨나요? 얼른 준비해드릴게요.”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서류 가지러 와서 금방 갈 거예요.”

말을 마치고 나서 서재로 향하려는 순간 고은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이미숙이 서둘러 말했다.

“도련님, 사모님, 그럼 얘기 나누세요.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미숙이 떠난 뒤 곽승재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나 바빠, 쓸데없는 일이면 혼날 줄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바쁘거든? 너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

고은서는 물건이 가득 쌓인 테이블 위에서 이혼협의서를 꺼내 곽승재에게 다가갔다.

“1분만 지체할게. 여기 사인하면 내일 그냥 구청 가서 확인서만 받아오면 돼.”

곽승재는 고은서를 힐긋 쳐다보았다.

방금 2층으로 올라오면서 마침 이미숙이 고은서에게 왜 이혼하냐고 묻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사실 고은서가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로 확신했지만, 마음을 얻지 못해 포기했다는 대답과 유난히 홀가분한 말투는 절대로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혼협의서를 들고 있는 고은서의 생얼은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했고, 박시한 옷차림도 캐주얼한 느낌이라 그동안의 세련되고 완벽한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설마 진짜 마음을 접었단 말인가?

협의서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필요 없고 빈털터리 신세로 곽씨 일가에서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그녀의 정교한 사인이 적혀 있었다.

“문제없으면 얼른 사인해.”

고은서가 재촉했다.

곽승재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정말 이혼할 의향 있는 거야?”

“당연하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고은서가 물었다.

“펜 있어? 없으면 가져다줄게.”

곽승재는 대답하는 대신 이혼협의서를 고은서에게 건넸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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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연이 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온승준한테서 온 문자였다.[지연아, 나 전에 만났던 카페에 있는데. 우리 얘기 좀 나누면 안 될까?]옆에 있던 고은서도 그 문자를 보았다.“만나러 갈 거야?”박지연은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얘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온승준한테 확실하게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더는 온씨 집안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해줘야지.’“내가 같이 가줄까?”고은서가 걱정하면서 물었다.“혼자 가도 괜찮아.”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온승준은 워낙 성격이 냉담한 편이어서 먼저 시비를 걸면서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박지연은 외투를 하나 걸치고 온승준이 말한 카페로 갔는데 그는 이미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지연아.”온승준이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했다.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커피랑 디저트 시켰는데 얼른 먹어 봐.”온승준이 어색해하며 말했다.박지연은 전과 똑같은 커피와 디저트를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자세한 부분을 관찰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보살필 줄도 모르는 게 아니었어. 그저 나한테 시간 낭비하기 싫었던 거야.’“지연아, 오늘에 있었던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또 너랑 다툴 줄은 생각 못 했어...”온승준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온범준은 분명히 그에게 박지연한테 사과하려고 그녀를 부른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그녀와 재혼하는 걸 더는 막지 않겠다고 했었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박지연이 고개를 들고 온승준을 살펴보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옷도 구깃구깃해진 데다가 무척 피곤해 보였다.이토록 낭패한 그의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평소의 그는 옷차림을 아주 신경 쓰면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인상을 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타락한 천사 같은 면모를 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과거의 박지연이라면 아마 마음 아

  • 어게인, 비긴   제736화

    박지연은 육현석의 말에 기분이 은근히 좋았다.그는 그녀의 어떤 모습도 마다하지 않고 다 좋게 봐주곤 했다.“고마워.”박지연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우리도 언젠가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육현석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박지연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인사치레를 하지 않는 사이라면 친구보다 더 친밀한 사이여야 했다.갑갑해 난 박지연은 차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박지연한테서 병원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고은서는 노발대발했다.“진짜 자아 감각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분명히 너한테 비는 입장이면서도 왜 그렇게 거만하게 구는 거래? 파렴치해도 정도껏 해야지! 지연아, 정말 일찌감치 이혼하고 그 집에서 나와서 다행이야. 그런 사람들이랑은 같이 사는 게 아니야.”박지연도 고은서와 똑같은 생각이었다.‘정말 다행이야.’“오늘 육현석 어머니랑 만났다며. 어때? 좋은 분이신 것 같아?”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전생에는 육현석 어머니와 만날 일이 없었던 고은서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그냥 간단히 인사만 했는데 엄청 온화하시고 친절하신 분 같아. 아주 단아해 보였는데 너무 큰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어.”박지연이 이실직고했다.“와. 그럼 뭘 더 고민하는 거야. 얼른 육현석 고백을 받아들이고 사귀어!”고은서가 재촉했다.그러나 박지연은 따라 장난치는 대신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육현석이 엄청 좋은 건 사실인데 내가 함부로 넘볼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박지연은 진심이었다.사실 병원 앞에서 그녀는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저도 모르게 자비감이 생겼다.온승준도 꽤 훌륭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와 있으면서 박지연은 단 한 번도 자비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은서는 약간 의아해했다.‘박지연이 자비감을 느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너 지금 사귀고 난 후에 또 이별하게 될까 봐 그러는 거지? 지연아, 이게

  • 어게인, 비긴   제735화

    박지연은 진지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보면서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고은서 외에 이처럼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육현석이 처음이었다.“쇼핑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날 부른 거 아니야.”박지연은 오늘 온승준 부모님이 자신을 병원으로 부른 이유와 방금전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육현석에게 알려줬다.육현석은 이내 박지연의 말에서 중점을 짚어냈다.“그러니까 너랑 온승준을 재혼시키기 위해 널 병원으로 부른 거란 말이지?”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온승준이 아까 널 쫓아왔다면 진짜 재혼할 생각이었어?”육현석이 긴장해 하며 물었다.그러나 박지연은 단호하게 부인했다.“아니.”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어갔다.“나를 선택해주지 않아서 속상해하는 게 아니야. 그저 이 년 동안 내가 온씨 집안 사람들에게 퍼부은 진심이 수포로 돌아갔다는게 우스우면서도 속상해서 그러는 거야.”육현석은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연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손해를 본 건 그쪽 사람들이니까.”‘내가 널 더 잘 아껴줄게.’육현석이 속으로 한 마디 더 보태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애매한 말을 해보았자 역효과가 일어날 거라는 걸 육현석은 잘 알고 있었다.박지연은 감동을 받은 동시에 저도 모르게 겁이 났다.그래서 그녀는 하소연 대신 육현석을 김세라한테로 가보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아주머니께서 기다리시겠어. 얼른 가 봐. 난 먼저 돌아갈게.”“내가 데려다줄게.”“아니. 나 진짜 괜찮아. 혼자 돌아갈 수 있어. 얼른 볼일 봐.”박지연이 황급히 거절했다.“쇼핑몰에서 있었던 일로 널 나무란 건 아니지만 태도가 악렬한 걸 봐서는 인품이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인 것 같은데 굳이 엄마랑 병문안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내일 변호사를 보내서 상응한 배상금만 주면 돼. 지연아, 잠깐만 기다려줘.”육현석은 이내 로비로 들어가 김세라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차키를 들고 다시 나왔다.“엄마는 다른 기사한테 부탁했으니까 우린 이만 가자.”“안

  • 어게인, 비긴   제734화

    온승준이 박지연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그녀는 이미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그는 더는 그녀를 쫓아갈 수 없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병실에서부터 복도까지의 거리만이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박지연이 병원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고 각양각색의 불빛들이 도시 전체를 빛내고 있었다.병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 주민들도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다.그녀 또한 자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 줄 가족을 갈망했었다.온승준과 결혼한 이후로 그녀는 시부모님을 자신의 친부모님처럼 생각하고 모셨다.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이 또한 어릴 적 느껴보지 못한 부모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비록 시부모님이 그녀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대한다면 언젠간 자신을 받아들일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따뜻한 인심을 기대했었다.그러나 모든 게 다 그녀의 갈망뿐이었다.방금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짓누르려는 조수연을 보며 박지연은 깜짝 놀랐다.심지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득의양양한 눈빛이 섬뜩하게 느껴졌다.아까 그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박지연은 등골이 오싹해났다.‘이 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며느리 역할을 했는데도 내가 단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던 거야? 어떻게 날 저 정도로 미워할 수가 있지...’박지연은 고개를 들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지연아.”바로 이때,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육현석이었다.그의 옆에는 아주 단아한 귀부인 한 명과 선물 박스를 들고 있는 기사가 있었다.육현석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이분은 내 어머니셔.”그리고 뒤돌아 자신의 어머니인 김세라를 향해 박지연을 소개했다.“엄마, 이분은 박지연이야.”“안녕하세요, 아주머니.”박지연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김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온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만나서 반가워, 지연아. 현석이가 네 얘기를 많이 했었거든.”옆에 있던 육현석은

  • 어게인, 비긴   제733화

    조수연의 어이없는 요구를 들은 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온 교수님, 사모님,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재능이 있으신가 봐요? 아니면 제가 아직도 더 확실하게 설명해 드려야 하는 건가요?”박지연이 그들을 보면서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저 온승준이랑 재혼할 생각이 없어요. 온씨 집안 며느리로 다시 들어갈 생각이 없단 말이에요. 이성 친구가 있으면 안 되고 술도 마시면 안 되고 대들어서도 안 된다는 요구를 차마 못 들어주겠네요. 그리고 저 사직하고 애 낳을 생각 없어요. 이런 영광은 다른 사람한테 주는 게 더 합당할 것 같네요.”“너!”조수연의 얼굴이 삽시에 일그러졌다.박지연과 정면으로 다투기 시작해서부터 그녀는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마음속에 쌓인 분노도 사그라든 적이 없었다.자기 아들과 이미 이혼했다고 해도 박지연을 향한 그녀의 분노와 증오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박지연과 고은서한테서 엿 먹었을 뿐만 아니라 박지연한테 협박까지 당했다는 걸 떠올릴 때마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게다가 지금 온승준과 재혼할 기회를 준다는데도 이렇게 거만하게 나오다니.조수연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박지연, 네 같은 여자가 뭐라고! 우리 승준이랑 재혼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하며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무슨 꼬장을 부리고 있는 거야? 집안을 좀 한 게 어때서. 나를 몇 번 보살펴준 게 어때서. 왜 자꾸 이렇게 시시하게 구는 거야? 지금 네가 했던 일들을 다 눈감아준다고 하는데도 뭐가 불만이야?”“눈감아줘서 정말 고맙네요. 하지만 저는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 그냥 넘어가 주지 못하겠네요.”박지연이 반박했다.“저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간다고 해도 손절할 정도로 역겹거든요.”“이년이 정말! 어른한테 버릇없이 그게 무슨 태도야!”조수연은 더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전에는 얌전한 척하더니 이혼하자마자 본성을 드러내는 것 좀 봐. 승준이가 너랑 이혼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평생 속아서 살 뻔했네.”아직 이성

  • 어게인, 비긴   제732화

    “당연히 되지!”민시후가 이내 좋아하면서 답했다.“손에 있는 일을 다 끝내자마자 해성으로 돌아갈게.”“...”어이가 없어진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박지연한테 같이 밥 먹자고 연락했다.그러나 박지연이 처리할 일이 있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다음에 다시 약속 잡기로 했다.박지연은 오늘 온범준이 할 얘기가 있다고 조수연 병실로 올 수 없냐고 하는 전화를 받았다.“할 말은 이혼하기 전에 이미 다 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그쪽이랑 할 얘기가 더는 없는데요.”박지연이 거절했다.그러자 온범준이 이레 병원 원장이 온승준이 두 병원을 바삐 오가는 걸 보고 조수연을 이레 병원으로 옮겨주겠다고 얘기했다고 말했다.박지연은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직접 만나러 가든지 혹은 이레 병원에서 만나든지 두 가지 선택뿐이었다.박지연은 당연하게도 직접 만나러 가는 걸 선택했다.그녀는 가기 전에 온승준한테 연락했는데 수술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남기고 조수연이 있는 병원으로 홀로 갔다.병실로 들어가기 전에 박지연은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다음 허리를 곧게 펴고 아주 떳떳한 자태로 걸어 들어갔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온범준과 조수연은 전처럼 그녀를 향해 비아냥거리지 않았다.“지연이 왔니?”온범준이 아주 평온한 말투로 먼저 인사했다.이를 본 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온범준은 수많은 제자를 아래에 둔 교수로서 뼛속까지 오만함으로 차 넘치는 사람이었다.이혼하기 전에 조수연처럼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항시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깔보는 자태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오늘따라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아무리 그래도 어른인데 인사하면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조수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저를 왜 찾으신 거죠?”박지연도 똑같은 말투로 되물었다.조수연은 박지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온범준과 오늘 절대 화를 내

  • 어게인, 비긴   제731화

    고은서는 곽승재의 좋지 못한 안색을 무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여씨 가문에서 결혼 제안을 동의했다는 건 그만큼 당신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겠지. 그리고 당신 아버지도 여시은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두 집안의 동의를 다 거친 결혼이라면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정말 여씨 가문을 괜찮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면 얼른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함정으로 가득 한 물음이었지만 고은서는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둘 다야.”곽승재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고은서, 내가 너랑 민시후 사이를 방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민시후까지 나온 이상 더 말해 보았자 일만 커질 뿐, 고은서는 너무 피곤한 탓에 곽승재와 별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나 먼저 올라갈게.”그녀는 담담하게 한 마디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곽승재는 묵묵히 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과거의 고은서라면 누군가 그에게 접근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GS그룹으로 달려가 그 사람을 어떻게서든 멀리 쫓아내려고 난동을 부렸을 것이다.‘그런데 왜 지금은 도리어 날 결혼하라고 달래는 거지? 심지어 아무렇지 않아 보여. 방금전 본가에서는 나를 걱정하며 끌어당기기까지 했잖아. 그리고 내 손을 뿌리치는 대신 순순히 내 품에 안겼었잖아.’그러나 곽승재는 자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고은서가 모든 걸 부인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며칠 후.고은서는 직원들과 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관한 일들을 의논하고 중요한 이메일 여러 개를 처리한 후 여시은 집들이 선물을 사러 갔다.‘집들이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그녀는 유명한 옥방에 가서 좋은 의미가 담긴 옥 장식품 하나를 샀다.그리고 그곳에서 정교하게 만든 영롱하고 귀엽게 생긴 옥토끼도 함께 구매했는데 곽승연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그녀가 결산을 마치고 나가려고 할 때 익숙한 사람 한 명

  • 어게인, 비긴   제730화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 나오면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곽승재는 품이 갑자기 허전해 나면서 약간 속상하긴 했으나 티 내지 않았다.“내려가자.”소란 소리를 들은 서연정과 전미자도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승재야, 무슨 일이니? 네 아버지랑 회사 일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다투기 시작한 거야?”“의견이 맞지 않아서 말다툼 좀 한 것뿐이에요.”전미자한테 걱정 끼치기 싫었던 곽승재는 아주 간결하게 답했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서연정이 걱정하면서 물었다.“없어요.”곽승재는 약간 어색해하며 답하고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먼저 은서를 데려다주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나 차 가지고 왔어. 힘들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할머니와 어머니랑 얘기 나눠.”고은서는 그와 거리를 두며 거절했다.“은서야, 시간도 늦었고 한데 네 차는 본가에 두고 그냥 승재 차에 가. 내일 기사한테 네 차를 가져다주라고 할게. 금방 아버지랑 싸웠는데 널 데려다주면서 바람이라도 쐬게 해.”전미자가 고은서를 달랬다.“걱정하지마. 나도 예원 별장으로 돌아갈 건데 그저 가는 김에 널 데려다주는 것뿐이야.”곽승재가 말하면서 먼저 밖으로 나갔다.“저 자식이. 고집 하나는 세 가지고.”전미자가 혀를 끌끌 차며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야, 얼른 가 봐. 사실 승재도 네가 본가로 온 걸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꺼려할까 봐 참고 돌아오지 않았던 거야.”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미자와 서연정에게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곽승재는 이미 차를 문 앞에 세우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는 약속한 대로 가는 길에 그녀한테 말을 걸지 않고 운전만 했다.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차창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종일 바쁘게 보낸 탓인지 아니면 차 안의 노래가 너무 유유한 탓인지 그저 눈만 감고 휴식하려던 고은서는 어느새 진짜 잠들어버렸다.깨어났을 때 그녀는 은은한 설송향이 나는 검은 외

  • 어게인, 비긴   제729화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곽승재랑 여시은을 결혼시키려는 거야? 그런데 아주 마땅한 일이긴 하지. 여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힘과 배경으로 두 가문이 사돈을 맺게 되면 서로 아주 큰 이익을 얻게 될 거야.’“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고은서뿐이에요.”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단순한 협력이라면 저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사돈을 맺으려 하거든 꿈 깨세요.”“곽승재,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감히 나랑 대들어?”곽현수가 단단히 화난 모양이다.“사내애가 각종 기회를 이용해서 가문 기업을 더 크게 이끌어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종일 사랑에 빠져있다는 게 말이 돼? 대체 언제쯤 철이 들 거야?”“철이 든다는 게 아버지께서 제안하신 결혼을 받아들이는 건가요? 결혼을 무기로 이용하려 한다는 게 하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곽승재가 반박했다.“너!”곽현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젠 아버지까지 무시하려 드는 거야? 네가 백씨 부녀한테 한 짓들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줬잖아.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건데 왜 자꾸 나랑 맞서지 못해서 안달이나 하는 건데!”“정말 저를 위해서 생각하신다면 다신 저한테 아무와 결혼하라는 소리 하지 마세요.”곽승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백유미가 왜 그렇게 겁도 없이 흉악 무독한 짓을 저질렀겠어요.”“내가 도와준 게 뭐 어때서! 네 승엽이 아저씨가 지금까지 날 위해 해준 일이 얼만데. 큰 공로는 없어도 고생만은 수없이 많이 했어. 내가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진짜 아저씨만 도와주신 거예요?”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백유미를 해성으로 들이고 돈까지 주면서 저와 고은서 사이를 이간질하게 했잖아요.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고은서도 곽현수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 왜 백유미를 도와 자신을 해치려 하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고씨 가문이 뭐가 볼 데가 있다고. 그리고 고은서한테 별 감정도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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