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괜찮아.”고은서가 거절했다.“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푹!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이제 네 차례야.”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디 가!”고운서가 버럭 외쳤다.“사인 안 해?”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네가 꾸민 짓이지?”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고은서, 우리 할
고은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전생에 무려 8년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건 달랑 이혼협의서 한 장, 그리고 백유미와 결혼했다는 소식뿐이지 않은가?그런 남자가 어찌 단 몇 주 만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냐는 말이다.“할머니는 만약 승재가 우리 은서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이혼하고 싶냐는 뜻이야.”전미자가 다시 물었다.노부인의 잔뜩 기대하는 눈빛 속에서도 고은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번 생에는 어떻든 간에 곽승재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제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지긋지긋했고, 곽승재와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삶을 맞이할 생각이다....본가 거실을 나서자 고은서는 싸늘한 얼굴로 차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이혼한다고 생난리를 쳤는데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지 않은가?어쩌면 곽승재는 그녀와 전미자가 짜고 치는 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에 차에 타면 추궁과 모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결국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택시 타고 가려고 했다.“타!”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곽승재는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괜찮아, 어차피 가는 길도 아닌데.”고은서도 매섭게 쏘아 붙었다.이혼을 못 해서 짜증이 난 건 매한가지라 스스로 제 무덤을 파서 곽승재의 화풀이를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곽승재의 말투에 협박이 담겨 있었다.“소리는 왜 질러?! 그렇게 능력 있으면 나한테 따지는 시간에 이혼 수속이나 하지?”고은서가 화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이런 말투로 그를 대한 적은 처음이고, 심지어 반박까지 하다니?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이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의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는 곽승재를 발견했고, 잽싸게 도망치려는 찰나 이미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이거 놔!”결국 다급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그의 팔뚝을 콱 물었다.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목덜미를 잡고 차에 쑤셔 넣었다.“
화면에 뜬 연락처를 보자 곽승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고, 잽싸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승재야, 판주 미팅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언제 와?”고요한 차 안에서 백유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곽승재의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은서의 귀에 들렸다.곽승재는 최근에 판주 투자은행을 인수했고, 백유미가 이사직을 담당하고 있다.전생에 백유미는 판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커리어 여왕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당시 납득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GS 그룹에 입사해서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지만 곽승재의 조롱만 받았다.“네가 출근한다고?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고 있어? 이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유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할애했는데 고작 호언장담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비록 유미는 너보다 배경이 빵빵하거나 가진 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항상 노력하고 사리에 밝기도 해. 어디 너처럼 갑질밖에 모르는 줄 알아?”...“그래, 일단 알겠어.”곽승재가 전화를 끊자 고은서도 회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했다.전생에서 봤던 곽상재의 눈코입이 점차 현생과 오버랩되면서 별안간 차 안의 공기마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실장님, 저 앞에 세워주실래요? 여기서 내릴게요.”“사모님, 여기는 택시도 안 잡힐 텐데 대표님 먼저 회사로 모셔다드리고 댁까지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 여기서 세워주세요.”고은서는 단 1초라도 곽승재와 같은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주민기는 차를 세우는 대신 백미러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안달 난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의 속에서 또다시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차 세워요. 여기서 내려줘요.”주민기는 그의 말에 따라 길가에 차를 댔다.고은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았다.“고은서, 감히 우리 할머니를 한 번만 더 건드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곽승재의 경고에도 그녀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준수한 외모의 남자는 살짝 건방진 느낌마저 들었고, 흰색 캐쥬얼 정장을 입고 있었다.만약 보통 사람이 이런 옷차림이라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들겠지만, 그는 되레 귀티와 여유가 흘러넘쳐 이미지와 찰떡이었다.어딘가 낯익은 얼굴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도련님.”기사가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불렀다.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시간 지체해서 미안해요. 제가 100% 보상해드릴게요.”고은서가 진심으로 사과했다.이에 남자는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차량 수리비를 제외하고 정신적 보상 그리고 손실비도 있죠. 지금 몇조가 넘는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지체되었으니까 모두 책임지세요.”상대방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고은서는 피식 웃기만 했다.“저기요, 외모도 멀쩡하고 돈도 좀 있어 보이는데 사기로 먹고사는 거였어요?”어쩐지 사진 찍고 증거를 남기는 기사의 모습이 절대로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남자는 화내기는커녕 여전히 여유만만했다.“내가 뭐로 먹고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만약 그쪽이 배상할 능력이 없다면 차주한테 하라고 해요.”그제야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타깃이 곽승재라는 것을 눈치챘다.한편, 머릿속으로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떠올랐다. 그는 바로 곽승재의 최대 라이벌인 민시후였다.전생에 민시후와 직접 만난 적은 없었고, 정신병원에 있을 때 경제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자주 접했다.당시 그는 곽승재에 버금가는 몸값을 자랑했고, 그가 설립한 투자회사는 GS 그룹을 바짝 추격하는 존재로 거듭났다.“곽 대표 와이프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당신 차를 끌고 나와 내 차를 박았는데 어떻게 할 건가?”고은서가 전생을 회상하고 있을 때 민시후는 이미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남편이랑 한마디 해요.”민시후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비록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여보세요’라고 말했다.“혼자 차 끌고 나갔어?”짜증이 덕
“고은서 씨, 질문 하나 있는데 제가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네요.”민시후가 사악하게 말했다.‘나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무슨 질문인데요?”민시후는 일부러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고은서 씨는 저랑 곽 대표님의 내기에서 누가 이길 것 같아요?”민시후가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는 순간, 고은서는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챘다.전에 고은서는 먼저 민시후에게 연락처를 물어서 그에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가르침을 받았다. 이건 고은서가 곽승재보다 민시후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는 걸 의미했다.그런데 민시후가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듦과 동시에 곽승재를 도발하는 것이었다.고은서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얼버무렸다.“내기 같은 건 실력을 제외하고도 운이 필요한 일이죠.”“고은서 씨는 제 운이 좋은 것 같나요?”“글쎄요, 일단은 민시후 씨가 좋은 성적을 얻길 바랄게요.”민시후는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듯했는데 곽승재가 창문을 올려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언제부터 민시후랑 그렇게 친해진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돌렸을 때 곽승재가 다소 짜증스러운 어투로 물었다.고은서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넘겼다.“지금은 안 친한데.”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민시후의 미래 투자은행은 전망이 밝고 돈을 벌기에 적합할 듯했다.그러나 민시후 쪽에서는 곽승재와 대결하려고 했다.고은서는 전생에 곽승재가 그녀를 냉대하고,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낸 일로 그를 무척이나 원망했다. 그때 곽승재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가 억지로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었다.그래서 그녀는 아직 그 단계까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작게 냉소했다.곧 초록불이 들어오자 민시후는 액셀을 밟아 곽승재의 앞에 서더니 곽승재의 차를 막고 천천히 운전했다.곽승재가 왼쪽으로 가면 그도 왼쪽으로 가고 곽승재가 오른쪽으로 가면 그도 오른쪽으로 가서 절대 곽승재에게 먼저 앞서나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비록 고
민시후의 차는 큰 시멘트 더미와 충돌해서 차 뒷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졌다.겉보기엔 곽승재의 차보다 상태가 훨씬 더 심각했다.이때 구급차가 도착했고 곧 의사가 도착해 민시후를 차 안에서 들어냈다.“뚜렷한 외상은 없고 골절 현상도 없습니다. 일단은 에어백 충격이 너무 커서 정신을 잃은 것으로 판단됩니다...”의사의 말에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동시에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민시후와 곽승재 두 사람의 원한이 얼마나 크기에 겨우 비즈니스적인 대립 관계로 인해 이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충돌한단 말인가?...고은서와 곽승재가 경찰서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었다.그들은 민시후가 이미 정신을 차렸고 큰 문제는 없지만 머리를 핸들에 박는 바람에 약간의 뇌진탕 증상이 있어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쉬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오늘 사고가 발생한 곳은 길이 넓고 차가 적어서 다른 차량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기에 경찰서에서도 크게 추궁하지는 않았다.고은서는 곽승재와 민시후 사이의 갈등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곽승재가 계속 표정을 굳히고 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을 거두어야 했다.주민기가 차를 타고 도착했다.고은서가 말했다.“두 사람 회사로 돌아가는 거 방해하지 않게 나는 내가 알아서 차 타고 갈게요.”곽승재는 워낙 바빠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늘 시간을 이렇게 많이 지체했으니 틈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배려한다고 한 말에 곽승재는 오히려 차가운 표정을 해 보였다.“요 이틀 있었던 사건들로는 모자라서 계속 사고 치려고?”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곽승재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코웃음쳤다.고은서는 뒤늦게 반응했다.“이혼 얘기는 진심이었어. 민시후 씨 차를 들이받은 건 순전히 사고였고.”“민시후가 왜 널 알고 있는 건데? 민시후 만나자마자 자기소개라도 했어?”그 일을 설명하기는 번거로웠고 설명한다고 해도 곽승재가 믿지 않을 것 같았기에 고은서는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오늘 오빠에게 폐를 끼친 건 내
“어딜 가? 네가 약 발라줘!”“미안하지만 난 의사가 아니라서 그럴 의무가 없는데.”고은서가 차갑게 거절했다.곽승재는 더욱더 언짢아졌다. 조금 전까지는 초조해하면서 걱정해 주고는 곧바로 태도를 달리하다니.“의무가 없다니? 내가 누구 때문에 다쳤는지 잘 생각해 봐.”고은서는 괜히 네가 화를 내서 차를 들이받지 않았더라면 다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곽승재는 끝까지 그녀와 따지고 들 태세였고 고은서는 그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겨우 약을 바르는 것이니 시간도 얼마 들지 않을 것이다.이미숙이 약상자를 들고 왔고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면봉과 알코올을 꺼냈다.“도련님, 사모님. 전 먼저 일 보러 가보겠습니다. 분부하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이미숙이 떠나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상처를 처리해 주기 시작했다.그의 상처는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긁힌 곳이 꽤 많아 피가 많이 흘렀다.알코올을 상처에 바르니 쓰라렸다. 곽승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가만히 있었고 고은서는 살살 움직였다.“됐어.”그의 팔에 약을 다 바른 뒤 고은서는 대충 정리하고 손을 씻을 생각이었다.“이마도 해줘.”곽승재는 고은서의 불성실한 태도가 조금 불쾌했다.예전이었다면 손톱 끝이 조금 상한 거로도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오늘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도 고은서는 발견하지 못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이마를 힐끗 보았다. 확실히 관자놀이와 구레나룻 쪽에 상처가 있었다.유리 조각이 튀어서 난 상처인 듯했는데 이미 딱지가 앉아있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고은서는 그의 상처를 처리하기 쉽도록 그의 옆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고 그녀의 향기가 곽승재의 코를 간질였다.곽승재는 순간 답답함이 느껴져서 손을 뻗어 목 언저리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움직이지 마.”고은서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고정했다.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에 닿자 곽승재는
송민아에게 회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고은서는 책상에 앉아 진형서가 준 자료를 펼쳤다.대충 훑어보니 그 안에는 여시은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었다.여시은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후 그녀의 아버지인 여재훈이 그녀를 데리고 귀국해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여시은은 오랜 시간 강성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여재훈과 Y 국에 머물기도 했다.생활 반경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고 친구나 동료들 외에도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한 여성이 자주 찾아와 돌봐주곤 했다.여시은과 곽승재가 처음 만난 건 한 사교회 자리였으나 이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재훈과 곽현수가 Y 국에서 사업적 거래가 있어 여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곽현수를 알고 있었다.자료에서 보면 여시은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다.대학 시절 가볍게 만난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헤어졌다.‘그렇다면 여시은이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였던 걸까? 그녀가 곽승재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곽현수 때문일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송민아가 와서 재촉했고 그녀는 자료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저녁 무렵 고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박지연을 픽업해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오늘은 세 여자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명운 주류가 상장된 이후 도아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비워 나온 만큼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함께 여성 전용 요가 센터로 향했다.센터에서는 요가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다.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명상 요가를 한 세션 진행했다.몸을 충분히 이완시킨 후 개방형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려던 차에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곽승재와 최근 그와 열애설이 난 인플루언서였다.곽승재는 검은색 캐주얼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한쪽 팔에 무심하게 걸쳐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덕분에
진형서가 말했다.“민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전 여시은이 해성에 오기 전의 상황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현재 대표님은 해외에 계시고 여시은이 누군지 기억도 못 하고 계십니다. 해성의 일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이 조사 결과를 전해드리지 않았습니다. 고 대표님, 비록 저희 대표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이 자료는 고 대표님을 위해 조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 서류를 고대표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렸다.두 사람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민시후는 정말로 여시은을 계속 조사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다음날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고은서는 민시후가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최근에 다른 머리 아픈 일들로 인해 여시은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그녀는 민시후가 조사를 시작하고 진형서가 그 자료를 그녀에게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대표님, 이렇게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진형서가 사과의 말을 전했다.“제 처지도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고은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형서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진형서는 파일을 그녀에게 건네고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떴다.사무실로 올라가려던 고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민아를 만났다.“너 출장 가지 않았어? 오늘 돌아온 거야?”송민아는 대답 대신 고은서의 팔을 잡고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닫은 송민아는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야? 곽 대표님이 인플루언서와 밤을 보내고 이제는 결혼하려고 한다던데?”곽승재와 인플루언서의 스캔들이 알려진 후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고 GS 그룹에서도 소문을 막지 않았다.네티즌들은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에게 반해 연인 관계로 발전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최근 인터넷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이미 여러 날 된 소식인데 이제야 물어보는 거야?”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나왔겠어
“은서야, 지금 곽승재 편을 든 거야?”박지연은 뒤늦게 반응하며 물었다.“육현석 말로는 엊그제 같이 곽승재를 만나러 갔었다며? 걔는 네가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하더라. 아니다.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와 호텔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 미련은 없겠다.”박지연은 바로 스스로 부정했다.박지연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볼일 봐. 퇴근 후에 다시 얘기하자.”박지연은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고은서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지연아.”“왜?”고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했다.“아니야. 그냥 밖에 나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이제 시간 나면 우리 같이 놀러 가자.”“그게 다야? 깜짝 놀랐잖아.”박지연이 투덜댔다.“됐어. 가서 일해.”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동네 약국에서 긴급 피임약을 주문했다.비록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라고 해도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한 번으로 충분해.’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른 약품들도 몇 가지 골랐다.약을 고르던 중 이미숙이 노크했다.“사모님, 배 안 고프세요? 뭐 좀 만들어 드릴까요?”고은서는 승낙했다.세수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니 고국성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미나가 수술비와 위자료를 요구하며 돈만 주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더구나.”‘그래도 약속은 지키네.’“은서야, 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났다던데 사실이야?”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를 좋아하던 고국성은 곽승재의 상황을 알고 걱정했다.고은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삼촌, 사실이든 아니든 저랑 다시는 곽승재를 찾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 어기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예요.”고국성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고국성은 고은서가 능력도 갖추고 오미나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해결했으니 이제 그녀의
곽승재의 손아귀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고 그의 표정도 매우 차가웠다.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에는 뚜렷한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의 희미한 장면들 속에서 그녀의 눈앞을 스쳤던 것도 이렇게 광적이고 핏빛이 감도는 눈이었던 것 같다“왜 말이 없어?”곽승재는 맹수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고은서는 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알고 싶은 건 다 알았잖아. 내가 뭘 더 말해야 해?”“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 게 날 함정에 빠뜨리고 여자를 침대에 보내려고 그랬던 거야?”곽승재는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턱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맞아.”“그래서 내가 다른 여자랑 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고은서는 마음을 다잡고 냉소를 지었다.“아니면?”그녀의 대답에 곽승재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그의 눈가에는 실망으로 가득 찼다.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쓸쓸함이 차올랐다.곽현수에게 이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녀는 이미 곽승재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었다.만약 곽승재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꾸몄다면 그녀 역시 충격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을 것이었다.“곽승재, 여러 번 말했잖아. 난 이미 너를 내려놓았다고. 이쯤이면 그만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다시 한번 기름을 부었다.‘끝내려면 완전히 끝내야 해. 이러면 곽현수도 더 안심하겠지.’곽승재는 싸늘하게 웃었고 눈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고은서까지 태워버릴 듯했다.“알았어. 고은서, 후회하지 마.”말을 마친 곽승재는 그녀를 내팽개친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떴다.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제자리에 멈춰선 고은서는 머릿속도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은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혹시 누군가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직원은 그녀의 객실 문은 밤새 열리지 않았다고 확답했다.‘곽승재는 취한 상태에서 약까지 먹었으니 이 방에 올 리가 없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물에다 약을 너무 많이 타서 약효가 강해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목에 남은 자국은 병 자국에 눌린 흔적일까? 사지의 뻐근함은 단순한 숙취의 후유증?’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다.고은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도 몸의 감각은 확실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정말 꿈이라고? 아니면... 그 남자는 곽승재였을까?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갈 때는 어떻게 나가고? 줄곧 날 잡고 싶다고 말했으니 우리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면 계속 남아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머리가 복잡해진 고은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순간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고은서는 재빨리 옷을 걸쳐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아니나 다를까 복도에는 수많은 연예부 기자가 곽승재의 객실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들은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부으며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주민기가 경호원들과 함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끈질긴 기자들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그 혼란 속에서 어두운 표정을 한 곽승재가 고은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가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곽승재는 이미 어젯밤 일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그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고은서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곽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원하시는 대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세요.]답장은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어떻게 곽승재를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고은서는 지금까지 극도의 긴장 속에 있었기에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긴장이 풀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이 바짝 마르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감각이 몰려왔다.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고은서는 휘청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가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낸 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자자. 자면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모든 폭풍은 내일 다시 맞서면 돼.’자신을 그렇게 세뇌하듯 다독인 고은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녀는 더위에 시달렸다.그 뜨거움은 단순한 체온 상승이 아닌 몸속 혈액에서부터 느껴지는 타오르는 듯한 열기였다.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하고 심지어 차가운 물병을 목에 대어 보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피부의 모든 세포가 시원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열기 속에서 고은서는 갑자기 무언가 뜨겁고 묵직한 존재가 자신의 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무게감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가왔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호흡을 앗아갔다.남자의 낮고 거친 숨소리가 술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그리고 익숙한 남성의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그 향기는 고은서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호흡이 교차하고 서로의 몸이 닿자 고은서는 더 뜨거워졌고 마음속에서부터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다.그녀는 지금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별할 여유도 정력도 없었다.약과 술의 작용하에 고은서는 몸이 반응하는 대로 손을 뻗었다.객실 안 에어컨 바람이 천천히 방안을 맴돌았다.낮은 온도로 설정된 냉기 속에서도 방 안의 온도는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은은한 조명이 커다란 침대 위에서 단단히 엉켜 있는 두 개의 실루엣을 비췄다.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열기에 가득 찬 입맞춤을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목으로 옮겨갔다.방 안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다.그 향기는 마치 봄의 미풍에 섞인 향처럼 감각을 부드럽게 자극했다.밤은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곽승재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뒤 재빨리 가방에서 숨겨둔 약을 꺼내어 물에 녹였다.긴장감 속에서 약은 빠르게 물속에 녹아들었고 고은서는 조심스럽게 그 물을 침대 옆으로 가져갔다.큰 키를 가진 곽승재가 침대에 평평히 누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굳게 감겨 있었고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은 방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고은서가 조심스럽게 곽승재의 뺨을 건드리자 곽승재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붉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은서야...”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 울림은 그대로 고은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고은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술 많이 마셔서 목마르지? 물 좀 마셔.”곽승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은서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고은서는 술에 취한 곽승재가 얼마나 고집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괜히 반박하는 것보다는 빨리 물을 마시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이었다.“안 마실 거야?”“마실 거야.”곽승재는 요구를 덧붙였다.“근데 네가 직접 먹여 줘.”고은서는 긴장하며 최대한 빨리 물을 마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반쯤 일으켜 세운 뒤 조심스레 컵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만 곽승재는 한 모금 마시더니 뜨겁다며 굳이 고은서도 마셔보라고 했다.술에 취한 채 그녀가 안 마시면 자신도 안 마시겠다는 완강한 태도에 고은서는 순간 물을 그대로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녀는 꾹 참고 단순히 상황을 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대충 물을 두 모금 마신 뒤 컵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이제 됐지?”곽승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손을 감싸며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그리고 그는 이전의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커다란 늑대처럼 그녀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은서야, 나 등 아파. 약 좀 발라줘.”고은서는 빨리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계
고국성은 이내 다가가 그와 악수하면서 인사했고 단은숙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유독 고은혜만은 입을 꾹 다문 채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곽승재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눈길을 고은서 쪽으로 돌렸다.그는 무언갈 억누르고 있는 듯한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승재야, 네 자리 남겨뒀으니까 얼른 앉아.”고국성은 고은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여서 앉을 수 있는 곳이 남아돌았는데 고국성은 하 곽승재를 고은서 옆에 앉히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속셈이 너무 선명했다.아무튼 고은서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꺼낸 거였기에 그가 어디에 앉든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을 한 채 고은서 옆에 앉았다.너무 가까운 탓인지 그의 특유한 설송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이어 차를 따라주는 웨이터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고은서는 이 기회에 찻잔을 대신 들어주면서 슬쩍 옆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곽승재도 손을 뻗으면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그의 체온이 피부결을 통해 뜨겁게 느껴지면서 고은서는 손을 확 거두어들였다.반면 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웨이터에게 건네주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고은혜는 두 사람이 행여나 어색해할까 봐 다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음식이 다 오른 후 고국성은 자신이 소장해 둔 진귀한 술을 가져오라고 웨이터를 시켰다.고은서는 레스토랑에 오기 전부터 고국성한테 밥만 먹으면 어색할 수도 있으니 술이라도 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암시했었다.아니나 다를까 고국성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말대로 행동했다.“승재야, 평소에 너무 바빠서 별로 모일 시간도 없었는데 이 좋은 기회에 우리 실컷 마셔보자고.”고국성은 웨이터를 다시 내보내고 직접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기쁜 날인데 다 같이 마셔야죠.”곽승재가 제안했다.고국성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그래. 가족끼리 떠들썩하게 재밌게 보내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고은서는 고국성 집에 들렀다.고국성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고은혜는 상을 찌푸리고 폰을 놀고 있었다.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 옆으로 다급히 걸어오며 말했다.“언니, 엄마가 방문을 잠그고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아빠랑 이혼한다고 변호사까지 찾았어.”기자 회견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성이 오미나와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단은숙은 오미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아이가 생겼다는 건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맺었다는 걸 의미했고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고은혜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고국성 앞으로 다가가 일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오미나가 아이를 없애겠대?”고국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동의할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정말이야? 엄마한테 이 소식을 알려줘야지.”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러나 고국성은 낙관적인 고은혜와 달리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동의하지 않았단 얘기야?”고은서는 고국성 옆에 앉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삼촌, MQ를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MQ를 더 크게 이끌고 나가려거든 다른 사람한테 너무 의지해서도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후부터 곽승재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그만 하세요. 이 또한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해주는 대신 삼촌이 들어줘야 할 조건이기도 해요.”고은서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고국성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곽승재를 찾아간 건 어떻게 안 거지? 분명히 유승준도 모르게 몰래 찾아갔는데.’그는 결연한 태도의 고은서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계에서 곽승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