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수한 외모의 남자는 살짝 건방진 느낌마저 들었고, 흰색 캐쥬얼 정장을 입고 있었다.만약 보통 사람이 이런 옷차림이라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들겠지만, 그는 되레 귀티와 여유가 흘러넘쳐 이미지와 찰떡이었다.어딘가 낯익은 얼굴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도련님.”기사가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불렀다.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시간 지체해서 미안해요. 제가 100% 보상해드릴게요.”고은서가 진심으로 사과했다.이에 남자는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차량 수리비를 제외하고 정신적 보상 그리고 손실비도 있죠. 지금 몇조가 넘는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지체되었으니까 모두 책임지세요.”상대방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고은서는 피식 웃기만 했다.“저기요, 외모도 멀쩡하고 돈도 좀 있어 보이는데 사기로 먹고사는 거였어요?”어쩐지 사진 찍고 증거를 남기는 기사의 모습이 절대로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남자는 화내기는커녕 여전히 여유만만했다.“내가 뭐로 먹고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만약 그쪽이 배상할 능력이 없다면 차주한테 하라고 해요.”그제야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타깃이 곽승재라는 것을 눈치챘다.한편, 머릿속으로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떠올랐다. 그는 바로 곽승재의 최대 라이벌인 민시후였다.전생에 민시후와 직접 만난 적은 없었고, 정신병원에 있을 때 경제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자주 접했다.당시 그는 곽승재에 버금가는 몸값을 자랑했고, 그가 설립한 투자회사는 GS 그룹을 바짝 추격하는 존재로 거듭났다.“곽 대표 와이프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당신 차를 끌고 나와 내 차를 박았는데 어떻게 할 건가?”고은서가 전생을 회상하고 있을 때 민시후는 이미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남편이랑 한마디 해요.”민시후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비록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여보세요’라고 말했다.“혼자 차 끌고 나갔어?”짜증이 덕
“고은서 씨, 질문 하나 있는데 제가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네요.”민시후가 사악하게 말했다.‘나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무슨 질문인데요?”민시후는 일부러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고은서 씨는 저랑 곽 대표님의 내기에서 누가 이길 것 같아요?”민시후가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는 순간, 고은서는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챘다.전에 고은서는 먼저 민시후에게 연락처를 물어서 그에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가르침을 받았다. 이건 고은서가 곽승재보다 민시후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는 걸 의미했다.그런데 민시후가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듦과 동시에 곽승재를 도발하는 것이었다.고은서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얼버무렸다.“내기 같은 건 실력을 제외하고도 운이 필요한 일이죠.”“고은서 씨는 제 운이 좋은 것 같나요?”“글쎄요, 일단은 민시후 씨가 좋은 성적을 얻길 바랄게요.”민시후는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듯했는데 곽승재가 창문을 올려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언제부터 민시후랑 그렇게 친해진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돌렸을 때 곽승재가 다소 짜증스러운 어투로 물었다.고은서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넘겼다.“지금은 안 친한데.”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민시후의 미래 투자은행은 전망이 밝고 돈을 벌기에 적합할 듯했다.그러나 민시후 쪽에서는 곽승재와 대결하려고 했다.고은서는 전생에 곽승재가 그녀를 냉대하고,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낸 일로 그를 무척이나 원망했다. 그때 곽승재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가 억지로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었다.그래서 그녀는 아직 그 단계까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작게 냉소했다.곧 초록불이 들어오자 민시후는 액셀을 밟아 곽승재의 앞에 서더니 곽승재의 차를 막고 천천히 운전했다.곽승재가 왼쪽으로 가면 그도 왼쪽으로 가고 곽승재가 오른쪽으로 가면 그도 오른쪽으로 가서 절대 곽승재에게 먼저 앞서나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비록 고
민시후의 차는 큰 시멘트 더미와 충돌해서 차 뒷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졌다.겉보기엔 곽승재의 차보다 상태가 훨씬 더 심각했다.이때 구급차가 도착했고 곧 의사가 도착해 민시후를 차 안에서 들어냈다.“뚜렷한 외상은 없고 골절 현상도 없습니다. 일단은 에어백 충격이 너무 커서 정신을 잃은 것으로 판단됩니다...”의사의 말에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동시에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민시후와 곽승재 두 사람의 원한이 얼마나 크기에 겨우 비즈니스적인 대립 관계로 인해 이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충돌한단 말인가?...고은서와 곽승재가 경찰서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었다.그들은 민시후가 이미 정신을 차렸고 큰 문제는 없지만 머리를 핸들에 박는 바람에 약간의 뇌진탕 증상이 있어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쉬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오늘 사고가 발생한 곳은 길이 넓고 차가 적어서 다른 차량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기에 경찰서에서도 크게 추궁하지는 않았다.고은서는 곽승재와 민시후 사이의 갈등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곽승재가 계속 표정을 굳히고 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을 거두어야 했다.주민기가 차를 타고 도착했다.고은서가 말했다.“두 사람 회사로 돌아가는 거 방해하지 않게 나는 내가 알아서 차 타고 갈게요.”곽승재는 워낙 바빠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늘 시간을 이렇게 많이 지체했으니 틈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배려한다고 한 말에 곽승재는 오히려 차가운 표정을 해 보였다.“요 이틀 있었던 사건들로는 모자라서 계속 사고 치려고?”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곽승재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코웃음쳤다.고은서는 뒤늦게 반응했다.“이혼 얘기는 진심이었어. 민시후 씨 차를 들이받은 건 순전히 사고였고.”“민시후가 왜 널 알고 있는 건데? 민시후 만나자마자 자기소개라도 했어?”그 일을 설명하기는 번거로웠고 설명한다고 해도 곽승재가 믿지 않을 것 같았기에 고은서는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오늘 오빠에게 폐를 끼친 건 내
“어딜 가? 네가 약 발라줘!”“미안하지만 난 의사가 아니라서 그럴 의무가 없는데.”고은서가 차갑게 거절했다.곽승재는 더욱더 언짢아졌다. 조금 전까지는 초조해하면서 걱정해 주고는 곧바로 태도를 달리하다니.“의무가 없다니? 내가 누구 때문에 다쳤는지 잘 생각해 봐.”고은서는 괜히 네가 화를 내서 차를 들이받지 않았더라면 다칠 일도 없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곽승재는 끝까지 그녀와 따지고 들 태세였고 고은서는 그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겨우 약을 바르는 것이니 시간도 얼마 들지 않을 것이다.이미숙이 약상자를 들고 왔고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면봉과 알코올을 꺼냈다.“도련님, 사모님. 전 먼저 일 보러 가보겠습니다. 분부하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이미숙이 떠나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상처를 처리해 주기 시작했다.그의 상처는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긁힌 곳이 꽤 많아 피가 많이 흘렀다.알코올을 상처에 바르니 쓰라렸다. 곽승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가만히 있었고 고은서는 살살 움직였다.“됐어.”그의 팔에 약을 다 바른 뒤 고은서는 대충 정리하고 손을 씻을 생각이었다.“이마도 해줘.”곽승재는 고은서의 불성실한 태도가 조금 불쾌했다.예전이었다면 손톱 끝이 조금 상한 거로도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오늘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도 고은서는 발견하지 못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이마를 힐끗 보았다. 확실히 관자놀이와 구레나룻 쪽에 상처가 있었다.유리 조각이 튀어서 난 상처인 듯했는데 이미 딱지가 앉아있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고은서는 그의 상처를 처리하기 쉽도록 그의 옆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고 그녀의 향기가 곽승재의 코를 간질였다.곽승재는 순간 답답함이 느껴져서 손을 뻗어 목 언저리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움직이지 마.”고은서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고정했다.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에 닿자 곽승재는
“승재가 다쳤다고 해서 한 번 와봤어. 오해하지 마, 은서 씨.”백유미는 뭔가 떠오른 것처럼 황급히 설명했다.“승재가 사인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승재 사무실에 갔다가 주 비서에게서 승재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승재가 먼저 얘기해준 건 아니야!”‘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오해하지 말라는 건지.’고은서는 입꼬리를 당겼다.“백유미 씨, 건의 하나 할게. 오해받고 싶지 않으면 오해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아. 예를 들면, 이 남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 그의 아내가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은 상황에 이렇게 집에 찾아오지 마. 집에 오게 됐다고 해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켜야지. 다른 사람의 남편이랑 같이 앉아있을 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어?”백유미는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히더니 서둘러 소파 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은서 씨, 난...”“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네.”고은서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나랑 고은서 씨는 성 떼고 이름만 부를 정도로 친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날 사모님이라고 부를 생각이 없다면 고은서 씨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고은서, 적당히 해.”곽승재가 경고했다.‘벌써 편을 들어준다고?’고은서는 피식 웃었다.“내가 뭐 틀린 얘기 했어? 왜 적당히 하라는 건데?”“승재야, 은서 씨... 고은서 씨 말이 맞아. 내가 그런 것까지는 신경을 못 썼어.”백유미는 무안함을 느끼면서도 부드럽게 화를 내려는 곽승재를 달랬다.“고은서 씨, 언짢게 했다면 미안해. 나 지금 당장 갈게.”백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고은서가 그녀를 말렸다.“가야 할 사람은 나니까.”“고은서!”곽승재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이틀 전 있었던 교통사고 때문에 고은서는 택시를 탔다.외할아버지 고준석은 교외 쪽에서 살고 있어서 차로 한 시간 반은 가야 했다.마당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꽃에 물을 주고 있는 외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검은색 정장에 훤칠한 키를 가진 곽승재가 안으로 들어왔다.‘곽승재가 여긴 웬일이지?’고은서를 본 곽승재의 눈빛이 살짝 차가웠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이 말이다.‘왜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까? 설마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가?’“외할아버님.”고은서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고준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승재 왔니? 배고프지? 얼른 앉아서 밥 먹거라. 안 그래도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준석은 너그럽게 그를 불렀다.“넌 은서 옆에 앉거라. 네가 좋아하는 갈치찜이 마침 거기에 있네.”그 말에 고은서는 갈치찜을 식탁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맞은편에 앉아.”“은서야, 뭐 하는 거야? 예의 없게.”고준석은 고은서를 나무란 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곽승재에게 말했다.“승재야, 내가 은서를 오냐오냐 키워서 조금 제멋대로다. 평소에는 네가 많이 봐주거라. 따지지 말고. 은서가 그래도 마음씨는 착하니까.”곽승재는 고준석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고은서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알고 있습니다, 외할아버님.”곽승재는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 교육을 엄격히 받고 자란 사람이기에 고은서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녀의 외할아버지 앞에서 선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물론 예외도 있었다.전생에 그는 백유미를 위해 고은서를 억지로 정신병원에 보냈고, 고은서의 외할아버지가 사정할 때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었다.“외할아버님께서 제대로 가르치시지 못했으니 제가 가르치겠습니다.”전생의 일을 떠올린 고은서는 순간 입맛이 떨어졌다.그녀는 입맛이 없는 것처럼 음식을 뒤적였다.고준석과 곽승재는 시사에 관해 이야기했다.“참, 은서야.”고준석은 문득 뭔가 떠올랐다.“저번에 네가 만들었던 그 향수 샘플, 많은 고객들이 좋아했어. 나한테 언제부터 양산하냐고 묻더라니까!”“외할아버지, 저 그거 그냥 심심해서 만든 거예요. 그리고 재료도 꽤 보기 드문 것들이잖아요. 어떻게 양산할 수 있겠어요?”
“네가 봐!”곽승재가 그녀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그것을 건네받아 보니 CCTV 영상이었다.장소를 보니 차고였는데 두 명의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구석 쪽에서 수상쩍게 기웃거리고 있었다.잠시 뒤, 정장 차림의 백유미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녀가 차 키를 누르자마자 두 남자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한 명은 백유미의 입을 막고 끌고 갔고 다른 한 명은 차 문을 열고 백유미를 차에 태운 뒤 떠났다.“백유미 씨 어디로 끌려갔는데? 뭘 찾았어?”고은서의 진지한 표정에 곽승재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그들은 백유미를 잡아서 차에 태웠어. CCTV를 보고 있던 경비원이 마침 이상함을 발견하고 그들을 막았어.”고은서는 웃었다.“웃기네. 두 사람이 백유미 씨를 잡으러 갔는데 하필 CCTV가 있는 곳을 골라서 기다리다가 꼬리를 잡혔다고?”“고은서, 너 그게 무슨 태도야?”곽승재는 화를 냈다.“경비원이 백유미를 차에서 구출했을 때 백유미는 입이 테이프로 막아졌고 두 손발이 묶인 상태였어. 제때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곽승재는 말하면서 사진 몇 개를 던졌다.“두 범인은 한 여자가 그들에게 돈과 사진을 건네며 사주했다고 했어. 네가 외할아버지 집에 가던 길에 운전기사는 주유하러 갔고 넌 편의점에 들렀어. 그리고 그 두 남자가 마침 그곳에 나타났어. 이게 다 우연이라고?”사진 속 두 명의 모자를 쓴, CCTV 속 남자들과 비슷한 몸매의 남자들은 그녀와 같은 편의점에 있었다.고은서는 아침을 먹지 않아서 먹을 걸 사러 편의점에 들른 거였기에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백유미가 이런 짓을 하면서 그녀를 모함할 줄은 몰랐다.“아침에 백유미를 모욕한 거로는 부족해서 점심에 사람을 시켜 납치한 거야? 이거 해명해야 하지 않겠어?”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고은서는 우스웠다.“내가 점쟁이야? 아니면 예지 능력이라도 있어? 이 두 남자가 거기에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고 그들에게 백유미를 납치하라고 사주한단 말이야?
그러나 고은서는 웃으면서 곧 눈물을 흘렸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맞고, 욕을 먹고, 시달렸던 화면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를 책임졌던 간병인은 아주 건장해서 단번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그녀를 끌고 갈 수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식사인 묽은 죽도 단번에 엎을 수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약을 먹기를 거부할 때는 그녀의 입을 틀어쥐고 억지로 약을 먹였다.고은서는 정신병원에서 곽승재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간병인을 시켜 괴롭힌 건 줄로 알았다.그런데 전생의 그 악마 같은 여자는 다름 아닌 백유미의 친척이었다.그러니 그녀가 전생에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살아갔던 건 전부 백유미의 짓이었다.자신이 받았던 학대와 위암으로 인한 고통을 떠올린 고은서는 지금 당장 백유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백유미는 어떻게 그렇게 악랄할 수 있었던 걸까?곽승재의 사랑을 그렇게 듬뿍 받았으면서 말이다.곽승재는 백유미를 위해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기까지 했는데 백유미는 왜 그녀를 가만두지 못하고 괴롭힌 걸까?곽승재는 바닥에 쓰러진 고은서를 바라봤다.비록 고은서가 먼저 음성통화를 할 거라고 했지만 곽승재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그녀를 따라왔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고은서가 백유미의 목을 조르는 게 보였다.엉망으로 흩어진 과일 사이에 누워있는 고은서는 공허한 눈빛으로 마치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나른하게 바닥에 누워있었다.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마치 아주 괴롭고 비참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그녀의 작은 얼굴에서 끝없는 증오와 원망이 보였다.이상하게도 곽승재는 그녀의 미친 짓에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승재...”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려고 할 때 백유미가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고은서 때문에 목이 빨개진 백유미를 본 곽승재는 넋이 나가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얼른 가서 약상자 가져오세요.”여자는 서둘러 약상자를 찾으러 갔다.곽승재는 백유미를 부축해
박지연이 고개를 들어 온승준을 바라보았다“아직 용건 있나?”박지연의 표정은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담담했다.예전 그를 볼 때의 설렘과 기대의 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온승준은 가슴이 답답했다.“며칠 전에 손을 다쳐서 휴가 중인데 시간 괜찮으면 같이 도성에 있는 극장에 가서 오페라 볼래?”박지연은 다친 이유는 묻지도 않고 곧장 답했다.“바빠서 안 될 것 같아.”온승준은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서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박지연이 그냥 가버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말을 덧붙였다.“네가 좋아하는 라 트라비아타인데. 배우도 유명한 국가급 아티스트고...”“온 선생님.”박지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사실 난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아. 같이 오페라를 보며 관심 있는 척했던 건 당신에게 맞춰주기 위해서였어. 극장에서 몇 시간 앉아 있는 것보다 등산을 가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게 더 좋아. 그러니 당신 어머님이 하신 말씀도 맞아. 나는 취미도 거칠고 천박한 사람이니 당신은 당신과 격이 잘 맞는 공주님을 찾아서 함께 오페라를 즐겨.”말을 마친 박지연은 더 이상 온승준을 신경 쓰지 않고 육현석과 함께 병원 배구팀 쪽으로 걸어갔다.온승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멍하니 서 있는 온승준의 모습을 보고 속이 다 시원했다.‘평소면 관심도 없을 배구 경기를 보러 온 걸 보니 이혼을 후회하기 시작했나 보네. 흥! 쭉 후회하라지! 전에 지연이 얼마나 아껴주고 잘해줬는데. 자기가 화나도 먼저 온승준을 생각해 줬던 사람인데 있을 때 잘했어야지. 이제 지연이의 가치를 깨닫다니 늦었어! 근데 남자들은 다 그런가? 잃고 나서야 소중한 걸 알지. 곽승재도, 온승준도 다 똑같아.’친선 경기는 반나절이나 이어졌고 박지연이 속한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병원은 명예와 상을 받았고 박지연과 다른 참가자들을 병원에서부터 상금을 받았다.그날 저녁 고은서는 박지연과 육현석 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라
이혼이라는 사건조차 온승준의 일상을 어지럽히지 못했다. 그는 이혼 이후에도 평온한 일상을 유지해 왔다.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정해진 시간에 휴식을 취했다하지만 전날 조수연과의 말다툼에서 박지연을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소리쳤을 때부터 그의 내면은 흔들리기 시작했다.마치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와 거세게 외치는 것 같았다.추첨 결과 박지연이 속한 병원이 첫 번째 경기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병원 팀과 맞붙게 되었다.경기장에서 박지연은 땀을 흘리며 팀원들과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한 잘생긴 남성과의 호흡은 남다른 수준이었다.득점할 때마다 두 사람은 환호하며 하이 파이브로 서로를 격려했다.온승준은 처음으로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빛나는 박지연의 모습을 보았다.그에게 박지연은 경기장에서 제일 빛나는 존재였고 어쩌면 유일한 존재였을 지도 몰랐다.30분 후 박지연이 속한 팀은 근소한 점수 차로 첫 경기를 승리로 마쳤다.고은서가 환호하며 박지연에게 달려갔다.“지연이 최고! 지연이가 제일 멋있어!”박지연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활짝 웃었다.“그럼! 내가 누군데!”“지연아, 땀 닦아.”이때 육현석이 다가와 깨끗한 수건을 건네주었다.박지연이 땀을 닦을 때 육현석이 또 물 한 병을 따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목마르지? 좀 마셔. 금방 운동했으니 너무 급하게 마시지는 말고.”“고마워. 하지만 내가 간호사라는 건 잊지 마. 그런 상식 정도는 있다고.”박지연이 웃으며 답했다.육현석도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답했다.“죄송합니다. 수간호사님. 괜히 아는 척했네요.”“음, 태도가 좋네요. 이번만은 봐 드릴게요.”박지연은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그녀를 보며 고은서는 문득 육현석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그가 이렇게 박지연을 챙기는 모습은 너무도 진실되어 보였다.“지연아.”바로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를 돌아본 박지연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그곳에는 온승
온승준은 어머니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유 선생도 말했잖아요. 저희는 그저 동료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재혼할 계획 없습니다.”조수연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유혜린이 있는 자리에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다.식사가 끝나고 유혜린이 떠나자 조수연은 온승준은 잡고 물었다.“승준아, 왜 그렇게 말한 거야?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평생 혼자 살 생각이야? 너 정말 혜린이가 널 좋아하고 다시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르는 거야?”온승준이 차분히 답했다.“몰랐어요. 그리고 저랑 유 선생은 단순한 동료지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너 정말 나 속 터지는 거 보려고 그래? 혜린이랑 헤어지고 나서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본 적 없잖아. 혜린이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 이제 혜린이가 너 때문에 일부러 병원까지 옮겨 왔는데 대체 왜 그리 무심하게 구는 거야!”온승준은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저는 한 번도 혜린이를 기다린 적 없어요. 학업과 미래를 위해 헤어졌고 그 이후 연애를 하지 않았던 건 단지 시간이 없었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그럼 왜 혜린이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지연이랑 갑작스럽게 결혼한 거야!”온승준은 조수연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제가 지연이랑 결혼한 게 유혜린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라고요?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조수연도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그때 혜린이가 인스타에 글 올렸다고 내가 말했잖아. 너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 뒤에 바로 지연이랑 혼인신고 했어.”온승준은 조수연의 말이 황당했다.조수연은 늘 집안일이나 주변 이야기를 떠들기 좋아했다.그는 대부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생각에 몰두하곤 했다.그로 인해 조수연이 이런 오해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동안 내가 너한테 소개팅도 몇 번이나 주선했지만 다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박지연은 집안도 별로고 직장도 별로고 학력도 평범하잖아.
“누나, 백승엽 병문안 왔는데 다리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정신은 멀쩡하더라고요. 심지어 곽승재의 아버지가 돌아와서 이제 아무도 백씨 가문을 건드릴 수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더라고요.”원지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백씨 가문이 이 기회를 타서 다시 세력을 되찾지 않을까요?”고은서는 그의 말에서 그가 당장이라도 백씨 일가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이제 곧 소원을 성취할 차례인데 갑자기 곽현수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고은서가 그를 달래며 물었다.“해외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도입했어?”“최근 백승엽이 사고를 당하고 백유미도 조사 때문에 구치소에 들어가 있어서 프로젝트 책임자가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 공식적인 승인은 받지 못했어요.”“상황이 안정되었으니 적극적으로 추진해 봐.”백유미가 고씨 가문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고은서도 같은 방법으로 백가를 무너뜨릴 계획이었다.원지훈과 통화를 끝낸 고은서가 체육관으로 향했다.단순 친선 경기일 뿐이었지만 관중은 생각보다 많았다.관람석은 이미 절반 이상 차 있었고 각 병원의 대표 선수들은 경기 준비로 분주했다.응원단이 구호를 연습하는 모습도 보여서 분위기가 꽤 떠들썩했다.고은서는 좋은 자리를 찾아 박지연과 그녀의 팀원들을 응원하려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중 그녀는 한쪽 구석에서 온승준을 닮은 남자를 발견했다.구석진 곳에 서 있고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그녀는 온승준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고은서는 그가 온승준이든 아니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박지연과 온승준이 이혼했으니 그녀에게는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고은서는 굳이 시간을 낭비해 가며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온승준은 확실히 현장에 있었다.원래 그는 이런 경기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전날 구내식당에서 동료들이 어느 병원 팀이 우승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온승준은 그런 얘기에 관심이 없어 식판을 들고 자리를 뜨려고
백유미의 질문에 곽승재는 더는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네가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든 간에 결론적으로 그 일은 네가 벌인 거야. 단지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모든 걸 덮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곽승재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보던 백유미는 눈시울을 붉힌 채 쓴웃음을 지었다.“그래. 맞아. 내가 한 일이야. 하지만 네가 고은서를 좋아했다면 어떻게 남의 몇 말로 미워할 수 있었겠어? 너희 사이가 굳건했다면 내가 깨뜨릴 수 있었을까?”백유미는 조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는 단지 성아연한테 나를 몇 번 모욕하라고 한 것뿐이었어. 하지만 넌 그걸 고은서의 계획이라고 믿었지. 내가 다쳐서 입원했을 때도 네 선택으로 내 곁에 있었던 거였어. 승재야, 고은서를 미워한 건 너고 고은서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것도 너야. 그게 왜 내 탓이야? 내가 한 일은 고은서를 다치게 하지 못했어. 모든 책임과 잘못을 나한테 떠넘긴다고 정말 이 일이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백유미의 날카로운 비판에 곽승재는 심장이 순간 얼어붙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그의 가슴속은 답답함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서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고은서를 다시 찾겠다고 말하며 앞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그때 고은서가 그에게 물었다.“정말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그는 망설임 없이 안다고 답하며 그녀에게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고은서는 비웃으며 냉소적으로 웃을 뿐이었다.그는 그 당시 고은서의 상처가 전부 백유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백유미가 저지른 일을 밝혀내고 그녀가 대가를 치르게 만들면 그것이 고은서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했고 또한 고은서의 상처도 치유될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백유미의 질책과 비아냥을 들은 지금, 곽승재는 자신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크나큰 착각이었고 뼈아픈 실수였다.‘은서에게 상처를 준 건 백유미가 아닌 나였어.’“승재야, 너에 대한 내 마음은 단 한
곽승재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백유미는 여전히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며 곽승재의 냉랭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소파에 앉았다.“승재야, 전에도 말했지만 나 혼자서 성씨 일가 일을 조사할 능력도 없고 고씨 가문 사업에 개입할 힘도 없어.”곽승재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백유미를 바라봤고 백유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승재야,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네. 이미 알고 있었어? 하긴... 고은서를 신경 쓰는 걸 보면 조사를 했겠지.”백유미가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진심으로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는 걸 믿어줄 거로 생각해. 나도 아저씨 부탁을 받은 것뿐이야.”“왜 그 부탁을 들어줘야 했던 거지? 그리고 아버지는 왜 그런 일을 시킨 거야?”곽승재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백유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정말 몰라. 나도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저씨는 그냥 참견하지 말라고 하셨어. 승재야, 아저씨는 나랑 아버지한테 은혜를 베푸신 분이야. 그런 분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나랑 아저씨한테 밝히지 않은 건 아저씨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그런 거지?”백유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네 숨겨둔 패가 되어 널 도와줄게.”곽승재는 냉랭한 태도로 말했다.“백유미, 지금 상황에서 내가 널 믿을 거로 생각해?”백유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승재야, 네 마음속에서 나는 정말 그렇게 하찮은 존재야? 곰곰이 생각해 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해를 끼칠만한 일한 적 있어? 아저씨를 도와 너와 고은서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던 적은 있어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어. 물론 나도 아무런 조건 없이 돕겠다는 건 아니야.”백유미는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했다.“아버지에게 좋은 의사를 구해주고 다리를 고쳐줘. 그리고 아저씨가 백씨 가문에 화풀이하더라도 우리 가족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줘.”그 말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을 본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반면 육현석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귀국하셨네요? 정말 오랜만에 뵙는데 전이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네요.”뻔히 보이는 육현석의 아첨에 곽현수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대충 답했다.“현석아, 넌 먼저 나가봐라. 승재랑 할 얘기가 있구나.”육현석은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진작 눈치챘다.“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간 되시면 제가 환영회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육현석이 자리를 뜨자 곽현수가 사무실로 들어섰다.백유미는 문가에 서서 약간 두려운 표정으로 곽승재를 바라보고 있었다.“유미야, 들어와. 문 앞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곽현수가 말하자 백유미는 그제야 안으로 들어섰다.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곽현수에게 물었다.“어쩐 일로 귀국하셨어요?”곽현수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백씨 가문 산업을 그대로 고은서 손에 넘겨 걔 멋대로 하게 둘 것 같아서 들어왔어.”곽승재가 담담하게 답했다.“아버지, 말씀이 과하시네요. 저는 백씨 가문 산업에 손댄 적 없어요.”“방관이 돕는 거랑 뭐가 달라.”곽현수가 차갑게 쏘아붙였다.“고은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너는 유미 아버지가 병원에 있어도 상관도 하지 않고 심지어 유미가 마음고생하게 만들었잖니!”“저는 아저씨한테 할 만큼 했습니다. 이 이상으로 신경 쓸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백유미는...”곽승재는 무심하게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보시는 대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렇게 나왔네요.”곽승재의 말에 백유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승재야, 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한 거야. 아버지는 치료 시기를 놓쳐서 이제 다시는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 너무 속상해하셔서 혹시 잘못된 선택이라도 하실까 두려워서 아저씨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었어.”곽승재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곽승재, 백승엽은 단지 고은서에게 진실을 요구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굴
경매 가격이 이억에 달한 이상 그녀와 겨룰 사람은 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은서도 브로치가 이억에 낙찰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곽승재가 갑자기 팻말을 들면서 경매에 참여하려고 했다.“사억.”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경매 가격을 듣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대부분 경매 가격을 이천만씩 올리는 게 보편적이었는데 곽승재처럼 가격을 단번에 배로 늘리는 사람은 없었다.“여씨 가문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경매에 참여하는 걸 봐서는 여시은 아가씨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러는 게 분명해.”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고은서의 귀에도 들렸다.“요즘 여씨 가문에서 해성 있는 프로젝트 하나를 눈 여겨두면서 GS그룹이랑 협력하려고 한다던데. 브로치 하나로 환심 사는 게 마땅한 거 아니야?”‘여씨 가문이랑 GS그룹이 협력한다고? 전생에는 없던 일인데.’주인혁은 묵묵히 현장을 지켜보고만 있는 고은서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위안했다.“누나, 다 헛소리야. 내가 보건데는 곽승재 씨가 누나 주려고 경매에 참여한 거 같아.”“위안할 필요 없어. 누굴 주든 곽승재 마음이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주인혁도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소문을 전해 듣긴 했으나 그는 곽승재가 아직도 고은서를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찾아와서 자신이 입고 있는 정장을 보며 비아냥거리지 않았을 것이다.“사억, 사억, 사억! 낙찰입니다!”땅 하는 소리와 함께 브로치는 곽승재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일반 경매와 다르게 이번 경매는 경매가 끝나자마자 경매품을 경매자한테 가져다주는 독특한 면이 있었다.곽승재는 브로치를 가져다준 웨이터를 보면서 그에게 무슨 말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이어 웨이터는 트레이를 들고 고은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면서 순간 불안해졌다.아니나 다를까, 웨이터가 브로치를 들고 고은서 앞에 멈춰 섰다.순간, 사람들의 부러운 눈길이 그녀한테로 쏠렸다.무대 위에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미 이혼한 마당에 같이 앉는다는 게 말이 돼?’고은서는 혼자 속으로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화장실로 갔다.한참 화장실 안에서 꾸물거리다가 밖으로 다시 나가려고 할 때 여자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 봤어? 진짜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 몸매랑 기품도 완전 매력적이지 않아?”“그러니까. 오늘 현장에 온 연예인들보다도 더 멋있다니까.”‘진짜 어디 가나 여자들한테는 인기짱이네.’고은서가 속으로 감탄했다.“파티장에 들어오면서 여씨 가문 아가씨랑 얘기 나누는 거 봤는데 꽤 친해 보이던데? 심지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저녁 식사하던데 혹시 가문끼리 협력관계라도 맺으면서 결혼이라도 하려는 건가?”고은서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다른 여자가 또 입을 열었다.“나도 그 생각 했는데. 그런데 이미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어? 얼마 전에 제삼자에 관한 소문도 났었잖아.”“이혼한 지 오라거든. 내가 얼핏 들었는데 곽 대표님 전처 조건 엄청 별로라던데. 곽 대표님한테 빌붙어 살다가 쫓겨난 거라잖아.”“소식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네요.”고은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화장실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두 여자는 깜짝 놀라 하며 고개를 돌렸다.반면 고은서는 덤덤하게 손을 씻으면서 말했다.“그쪽들이 말하는 전처가 곽 대표가 싫어서 이혼을 먼저 제기한 거예요.”“지금 무슨 헛소리에요. 어디서 들은 가짜 소식을 가지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예요!”여자는 이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반박했다.“제가 그 조건이 별로인 전처거든요.”고은서는 손을 닦으면서 말했다.두 여자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경악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러나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미친 거 아니야? 어디서 함부로 전처라고 나대는 거야?”“내 말이. 아무리 이쁘장하게 생겨도 곽 대표님 눈에 들지도 못할 사람이 왜 저러는 거야?”두 여자가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