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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Author: 류한나
검은색 정장에 훤칠한 키를 가진 곽승재가 안으로 들어왔다.

‘곽승재가 여긴 웬일이지?’

고은서를 본 곽승재의 눈빛이 살짝 차가웠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이 말이다.

‘왜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까? 설마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가?’

“외할아버님.”

고은서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고준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승재 왔니? 배고프지? 얼른 앉아서 밥 먹거라. 안 그래도 널 기다리고 있었다.”

고준석은 너그럽게 그를 불렀다.

“넌 은서 옆에 앉거라. 네가 좋아하는 갈치찜이 마침 거기에 있네.”

그 말에 고은서는 갈치찜을 식탁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

“은서야, 뭐 하는 거야? 예의 없게.”

고준석은 고은서를 나무란 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곽승재에게 말했다.

“승재야, 내가 은서를 오냐오냐 키워서 조금 제멋대로다. 평소에는 네가 많이 봐주거라. 따지지 말고. 은서가 그래도 마음씨는 착하니까.”

곽승재는 고준석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고은서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외할아버님.”

곽승재는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 교육을 엄격히 받고 자란 사람이기에 고은서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녀의 외할아버지 앞에서 선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전생에 그는 백유미를 위해 고은서를 억지로 정신병원에 보냈고, 고은서의 외할아버지가 사정할 때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었다.

“외할아버님께서 제대로 가르치시지 못했으니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전생의 일을 떠올린 고은서는 순간 입맛이 떨어졌다.

그녀는 입맛이 없는 것처럼 음식을 뒤적였다.

고준석과 곽승재는 시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참, 은서야.”

고준석은 문득 뭔가 떠올랐다.

“저번에 네가 만들었던 그 향수 샘플, 많은 고객들이 좋아했어. 나한테 언제부터 양산하냐고 묻더라니까!”

“외할아버지, 저 그거 그냥 심심해서 만든 거예요. 그리고 재료도 꽤 보기 드문 것들이잖아요. 어떻게 양산할 수 있겠어요?”

“참, 내가 깜빡했네.”

고준석은 웃으면서 머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우리 은서가 능력은 좋아. 그렇지, 승재야?”

고준석이 곽승재에게 질문했다.

곽승재는 어른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아버지의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고은서는 조금 마음이 쓰리고 미안했다.

외할아버지가 그녀를 칭찬하는 것은 곽승재에게 그녀의 장점이 많다는 걸 보여주며 그녀를 조금 더 좋아해 주길 바라서였다.

그러나 곽승재의 눈에 그녀는 아무 능력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칭찬해봤자 무용지물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 마시고 나니 날이 저물었다.

고준석은 웃으며 말했다.

“시간도 꽤 늦었으니 붙잡지 않으마. 얼른 돌아가서 쉬거라.”

“외할아버지, 전 안 돌아갈래요. 전 여기서 외할아버지랑 며칠 같이 지낼래요.”

고은서가 애교를 부렸다.

그녀는 외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되어 그와 오래 있고 싶었다. 겨우 하루로는 부족했다.

고준석은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너도 참, 승재가 널 데리러 왔는데 집에 가지 않고 왜 여기 있어?”

“승재야, 네가 바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가끔 은서랑 같이 돌아와서 밥이나 먹고 가거라.”

“알겠습니다.”

곽승재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오르기 전, 고준석은 고은서의 손을 잡으며 자애롭게 말했다.

“은서야, 더는 승재하고 싸우지 마. 무슨 일 있으면 말로 풀어. 부부는 원래 다 그러고 사는 법이야.”

차에 오른 고은서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준석은 그와 곽승재가 싸우지 않았다는 걸 믿지 않았다.

오늘 특별히 곽승재를 불러 같이 밥을 먹은 것도 그녀를 대신해 부부관계를 풀기 위해서였다.

고준석은 연세가 많으신데도 여전히 그녀 때문에 마음을 많이 썼다.

조금 전에는 외할아버지가 걱정하시지 않게 애써 눈물을 참았는데 이제는 참기가 힘들었다.

“전화는 왜 꺼놓은 거야?”

곽승재의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할머니를 찾아가거나 외할아버지를 찾아가네. 고은서, 좀 적당히 해. 외할아버님은 네가 착하다고 하던데, 네가 한 일을 봐. 착한 것 하고는 거리가 멀지.”

고은서가 창가 쪽에 몸을 기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곽승재는 조금 화가 나서 그녀를 잡아당겼다.

“너...”

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곽승재는 말문이 턱 막혔다.

고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은서는 예전에도 운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시끄럽게 굴었다.

마치 사탕을 얻지 못한 아이처럼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왜 자신을 외면하냐, 왜 같이 있어주지 않느냐,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면서 따졌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고은서는 조용했다. 그녀의 빨개진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입술도, 작은 콧방울도 다 붉었다.

한없이 약한 모습이었다.

곽승재는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그녀를 놓아주고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얼굴 보여주면 자기가 한 일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

고은서는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똑똑히 말하는데, 첫째, 나는 내가 뭘 했길래 오빠가 이렇게 날 질책하는 건지 모르겠고, 둘째, 난 한 번도 착한 사람이었던 적 없어. 그러니까 당연히 착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 오빠가 알려줄 필요 없어.”

“너!”

미안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조금 전의 자신이 우스워졌다.

“고은서, 너 정말 답이 없구나. 백유미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고은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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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며칠 동안 고은서는 매우 바빴다. 유일 투자은행의 공식 연회가 송민아의 기획으로 예정대로 열렸다. 연회 당일, 주인혁은 자발적으로 현장에 도착해 개막 게스트로 두 곡을 불렀다. 고은서는 그 장면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인혁의 현재 명성에 비해 그가 공연하는 것은 다소 과한 일이었지만 그는 연예인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무대를 도와준다고 했다. “누나, 개업식 때 제가 가려고 했었는데 그때 계약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었어요. 이번에는 절대 거절하지 마세요.” 주인혁이 간절하게 말했고 송민아도 부추기자 고은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의 챔피언인 주인혁의 목소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현장 사람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송민아는 리허설에서 이미 그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전에 왜 팬들이 연예인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 조금 알겠어. 진짜 매력적인 점이 있네.” “발라드 왕자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야.” 고은서가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좋아하면 인혁 씨를 남자친구로 만들어서 노래 듣고 싶을 때마다 현장에서 불러 달라고 해.” 송민아가 고은서의 농담에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너한테 관심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게스트로 온 이유도 결국 너 때문이잖아.” 고은서는 주인혁을 도와준 일을 송민아에게 털어놓았다. “사람은 힘든 순간에 받는 따뜻함에 특별히 감동을 받게 돼. 인혁 씨도 결국 언젠가는 깨달을 거야.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송민아가 고은서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나이 든 사람처럼 말해? 마치 많은 걸 겪은 사람처럼...” 고은서는 그냥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확실히 많은 일을 겪었다.곽승재가 그 괴상한 남자를 쫓아내 준 순간, 고은서는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난 게 아니었다면 곽승재는 단지 잘생긴 남자

  • 어게인, 비긴   제996화

    고은서는 고은혜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은혜도 알아챘을 정도로 여시은은 자신의 의도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은서야, 너랑 여시은 씨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방금 네 말에서 다른 의도가 느껴졌어.”유성준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한두 마디로는 설명이 안 돼.” 고은서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오빠, 여시은이 만약 오빠한테 비즈니스를 소개해 준다면 조심하는 게 좋아. 차라리 거절하는 게 나을 거야.” 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방금 여시은 씨에게 향수를 개인적으로 선물한다고 한 거야? 그걸 MQ의 기획에 쓸까 봐?” 고은서는 확실이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여시은은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왔고 그녀가 자신에게 향수를 맡기려는 목적이 무엇이든 MQ를 떠나서 그건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문제 생기지 않을까?” 고은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사람을 걱정할 줄도 아네?” 고은서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다 계획이 있어.” 복이 아니면 화가 될 테니, 고은서는 여시은이 과연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보려 했다. 그때,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고은혜는 고은서에게 해산물을 사달라고 했다. “최근 인턴 생활 너무 힘들어서 위로가 필요해.” “성준 오빠가 너를 소홀히 한 거야?” 고은서가 일부러 물었다. 유성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냥 내가 더 배우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 공부보다 더 힘들어.” 고은혜는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유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고은혜까 유성준을 초대했다. 유성준은 한동안 고은서를 못 봤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대접할게.”고은혜가 고른 곳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해산물 레스토랑이었다. 주문을 받을 때 웨이터가 하나의 디저트를 추천했다. 그 디저트에는 견과류가 들어 있었

  • 어게인, 비긴   제995화

    여시은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약간의 난처함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마치 고은서가 오해할까 봐 몹시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의 본색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노련한 연기에 속을 일은 없었다. 고은서는 그냥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네가 뭘 했길래 내가 오해할 거라고 생각해?” 여시은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야, 다들 내가 아는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다 같이 몰려와서 환불을 요구했으니 네가 괜히 나랑 연관 지어 오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럼 정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고은서가 다시 묻자 여시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오늘 난 향수 맞추러 온 거라니까. 마침 여기서 다들 만날 줄은 진짜 몰랐어.” 고은서는 처음부터 여시은이 무언가를 인정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얼마나 뻔뻔하게 모르는 척할 수 있을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굳이 더 캐물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고은서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MQ에 대한 오해를 풀어줘서 고마워. 시은아.”여시은도 환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야. 난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분위기를 살피던 여성들이 슬쩍 눈치를 보며 고은서와 MQ 측에 사과하기 시작했다. 특히 잘못된 향수를 가져와 문제를 일으킨 여성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유성준과 고은서에게 거듭 사과했다. 유성준은 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고 고은서 역시 적당히 넘어갈 수 있도록 형식적인 말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자 고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오해도 풀렸으니 이제 본론을 얘기해도 되겠죠?”여시은이 아름다운 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은서야, 그날 목장에서 풀향기가 정말 상쾌하고 좋았어. 그런 향기랑 비슷한 향수 만들 수 있어?” 여시은이 이렇게 연기를 하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 어게인, 비긴   제994화

    유성준과 A/S 책임자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마친 상태였다. “고객님들께서는 제품을 수령하신 후 검품까지 마치셨습니다. 별다른 하자가 없는 이상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받을 때는 미처 확인을 못 했어. 그런데 최근에 써보니까 향이 너무 저급하더라. 우리 이미지에 치명적이니까 반드시 반품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MQ의 실체를 폭로할 수밖에 없겠네?”그때, 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준 오빠.” 그녀가 자연스럽게 인사하자 응접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며칠 전 여시은의 저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상냥하고 공손하던 여자들은 이제 거만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 명 한 명 성을 부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여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눈빛에 조소까지 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순진하게 굴다니. 정말 어리석네.’ 한편, 유성준도 그들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는 눈짓으로 고은서에게 개입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자신과 직원들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MQ는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법적으로 따져도 MQ가 이길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저 여자들의 목적은 단순히 환불이 아니었다. 그들은 논란을 일으켜 MQ의 명성을 깎아내리고 싶어 했다. 불만을 부풀려 가십으로 만들기만 하면 결국 MQ를 향한 대중의 의심이 생겨날 것이고 진실이 어떻든 간에 MQ는 여론의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그 순간 고은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오는 길에 이미 몇몇 언론사에 연락해 두었어요.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지금 바로 공식적으로 논의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말에 상류층 여성들이 순간 움찔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이 MQ의 잘못이 아니라면 MQ는 법적으

  • 어게인, 비긴   제993화

    유일 투자은행은 최근 여러 프로젝트에 투자했으며 그녀가 맡은 명운의 상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찾아와 투자 요청을 해왔다. 하지만 고은서는 너무 두각을 나타내면 경쟁자들의 질투를 사기 쉽다고 우려했다. 반면 송민아의 생각은 달랐다. “질투할 사람들은 우리가 작은 축하 파티를 열든, 공식적인 술자리를 마련하든 어차피 질투할 거야.” 그녀는 유일 투자은행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실력을 널리 알리는 게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 잡는 길 아니겠어?” 송민아는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가 ‘world 게임’ 프로젝트 하나만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맡은 프로젝트도 많잖아. 회사 명성이 커지면 우리 일도 더 수월해질 거야.”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술자리를 한 번 덜 연다고 해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결국 고은서는 송민아의 의견에 설득당했고 그녀를 칭찬했다. “민아야, 대단하네. 갈수록 더 능숙해지는 것 같아.”송민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직접 사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빠가 옛날 무용담을 워낙 자주 들려주셔서 자연스럽게 배웠거든.” 결국 연회는 송민아가 전적으로 맡기로 했다. 한편, KK 측에서 WOR 게임 회사의 핵심 창작진 자료를 고은서에게 전달해왔다. 책임자가 말했던 대로 주요 제작진들은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으며 사회적 배경도 복잡하지 않았고 별다른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허 씨 성을 가진 한 핵심 멤버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가 몇 년 동안 게임을 개발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반대했고 결국 그는 집을 나와 독립했다. 하지만 이제 ‘WOR 게임’의 내부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정식 출시만 된다면 그들의 몸값은 자연스럽게 치솟을 터였다. 드디어 오랜 시간 버텨온 보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고은서는 자료를 덮고 데이터를 확인하려던 찰나 핸드폰 벨

  • 어게인, 비긴   제992화

    온승준이 말을 하려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맑고 가벼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야, 스테이크 몇 분 익힐까?” “왜 지연이한테 안 물어봐요?” “지연이꺼는 내가 다 알아. 지연이의 모든 취향과 금기 사항은 남자친구로서 당근 다 알아야지.”“네. 잘 들었습니다. 제껀 7분 정도 익혀 주세요. 자꾸 그런 눈빛으로 지연이를 쳐다보면 밥을 안 먹어도 당신들의 애정폭탄에 배부를 것 같아요.” “고은서, 제발 입 다물어.” 장난스러운 대화 뒤로 문이 닫히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방금 뭐라고 하려던 거야?] 박지연은 비로소 아직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별일 아니야.] 온승준은 전화를 끊으면서 ‘요즘 잘 지내?’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박지연은 잘 지내고 있었고 그 행복한 모습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육현석이라는 남자는 박지연에게 정말 잘해주고 있었다. 그는 박지연의 모든 습관을 알고 심지어 박지연과 친구들을 위해 직접 요리까지 해주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자 온승준의 얼굴이 간지러워졌다. 그는 손을 대어보았고 손에 물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잠시 후, 육현석이 준비한 음식이 완성됐다. 풍성한 서양 요리와 간단한 한식도 함께였다. 도아름 외에도 송민아가 함께 와서 자리를 빛냈다. “현석 씨, 이렇게 많은 요리를 할 줄 알다니 정말 대단해요.” 송민아가 진심 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육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서양 요리는 간단해서 잘하는 편이고 한식은 이 정도만 할 수 있어요. 더 많이 배워서 지연이가 매번 새로운 요리를 먹을 수 있게 해줄 거예요.” “지연 언니, 이런 남자친구는 어디서 구해요?” 송민아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육현석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민아 씨, 그 말은 틀렸어요. 제가 운이 좋은 거예요. 지연이 같은 좋은 여자를 만났으니까요.” “맞

  • 어게인, 비긴   제991화

    온승준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박지연은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난처하게 안 했어. 그런데 당신은 사과 말고 어머니에게 뭐 더 할 수 있겠어?] 박지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온 선생님,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많이 약속했는지 기억 안 나? 당신 어머니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조 여사님은 날 볼 때마다 비아냥거리기만 했어.][미... 미안...] 온승준이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자 박지연은 그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 원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유혜린 씨가 임신 중이라는 이유로 이번 한 번만 봐준 거야.] 박지연은 잠시 멈춘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정말 법적 절차를 밟을 거야. 당신 아이가 나중에 죄를 지은 할머니를 두게 될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온승준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혜린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자연스럽게 박지연을 한 번 언급했다. 그 뒤로 조수연은 잘못된 걸 느끼고 대화를 얼버무리며 다른 이야기로 돌렸다. 온승준은 자신이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들어줬으면 어머니가 약속을 지킬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박지연의 말 속에서 유혜린이 뱃속의 아이를 이용해 박지연에게 신고를 취소하도록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온승준은 부모님의 강한 요청에 따라 유혜린과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식은 할 마음도 없었고 마침 국경 없는 의료팀에서 그를 초대해 X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곳은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고 온승준은 그곳에서 점점 더 조국이 그리워졌고 특히 박지연이 몹시 그리워졌다. 수없이 많은 밤을 보내며 그는 박지연을 꿈에서 만났다. 꿈 속에서 박지연은 예전처럼 그에게 손을 흔들며 웃었고 병원의 이야기들을 기쁨 가득한 얼굴로 나누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

  • 어게인, 비긴   제990화

    “너희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지. 내가 갈 데가 어딨다고?” 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집에서까지 왜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어?” 그러다 박지연의 옷깃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붉은 흔적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고은서의 눈빛이 번뜩였다. “설마... 현석 씨 어젯밤 여기서 잤어? 너희 둘...”“쉿! 조용히 좀 해.” 박지연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은서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부엌 쪽에서 육현석이 고개를 내밀었다. “은서 왔네. 지연이랑 얘기하고 있어. 아름 누나랑 애들 도착하면 밥 먹자.” 고은서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힌 채 억울하다는 듯 눈을 굴렸다. ‘나 지금 입도 못 연다고...’하지만 육현석의 시선에는 오직 박지연만 보이는 듯했다. 그는 박지연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이더니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혹시... 나 지금 투명인간이 된 거야?’ 고은서는 천천히 박지연을 흘끗 쳐다보았다. 박지연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고은서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거실 옆 서재로 데려갔다. “물 마실래? 주스도 있는데.” 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물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소파에 털썩 앉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냥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공기 자체가 달달하거든.” 그러곤 곧바로 한마디 더 던졌다. “어쩐지 어젯밤 갑자기 연락 두절되더라니. 역시 달콤한 밤은 천금보다 귀하다 이거지?”고은서의 농담을 듣는 순간, 박지연의 머릿속에 어젯밤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민망한 순간을 육현석에게 들킨 것도 모자라 아침까지도 그에게 휘둘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아닌 척할 필요가 있을까?’박지연은 단번에 체념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고은서의 목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다 너 때문

  • 어게인, 비긴   제989화

    박지연은 육현석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며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게다가 그의 표정은 박지연의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도대체 왜 은서랑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지?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얘기한 거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지?’박지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베란다에 땅굴을 파서 당장이라고 숨어버리고 싶었다.육현석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박지연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헛기침을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척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배고프지? 주방에 먹을 거 뭐 있는지 볼까?”그러면서 도망치려는데 육현석이 그녀의 길을 막아섰다.별처럼 반짝이는 육현석의 눈을 바라보자 박지연은 심장이 쿵쾅거렸다.“현, 현석아... 뭐 하려고...”육현석이 손을 뻗어 박지연의 머리카락 한 오리를 휘감으며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한밤에 일곱 번이라니. 내가 지연이 마음속에서 아주 용맹한가 봐.”이미 당황한 상태에서 이런 톤과 눈빛으로 말하는 육현석을 보자 박지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세상이 지금 당장이라도 멸망했으면 좋겠어.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박지연은 육현석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방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육현석이 힘껏 밀착하며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박지연은 육현석의 뜨거운 체온과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꼈다.“현... 음.”박지연이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육현석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갑작스럽고도 열정적인 이 키스에 박지연은 처음에는 몸을 비틀거리며 저항하려 했다. 어찌 됐든 베란다에서 키스하는 건 너무 쑥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육현석은 그녀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박지연의 얼굴을 감싸 쥐고 숨을 훔치듯 격렬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박지연은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의 리듬에 휩쓸려갔다.육현석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박지연은 숨이 차올라 예전처럼 그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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