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타이어로 애를 먹고 있던 그때, 귓가에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이미 차 옆으로 다가왔다.비록 그녀는 이 상황이 조금 창피했지만 이런 일로 토라질 만큼 유치한 사람은 아니었다.고은서는 입을 삐쭉 내민 채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을 내어줬다.차에 앉은 곽승재는 여유롭게 핸들을 돌리면서 페달을 밟았고 후진하는 동시에 오른쪽 타이어가 흙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이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운전석에서 내려왔다.“계속해.”고은서는 다시 입을 삐죽거리며 운전석에 올라탔고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곽승재가 조수석에 앉았다.“뭐 하는 거야? 갑자기 왜 앉아?”눈살을 찌푸린 채 묻는 고은서의 모습에도 곽승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되레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머리는 이게 뭐야?”고은서는 어깨까지 오는 길이의 히피펌을 했다.“내 머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뭔 상관이래.”순간 곽승재는 표정이 어두워졌다.“할말 있어? 없으면 내려.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명령하듯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곽승재는 꾹 참고 안전벨트를 맸다.“운전 연습한다며? 멀뚱멀뚱 가만히 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곽승재는 비아냥거렸다.“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구덩이에 빠져서 혼자 낑낑대냐?”“날이 어두워서 안 보였던 것뿐이야.”“밝은 대낮에만 운전할 거야? 나중에 네가 운전하는 곳마다 조명이 비칠 것 같아?”“그건...”반박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네 뒤치다꺼리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얼른 연습해.”지난번의 일은 확실히 그녀의 잘못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고은서는 전방을 주시한 채 페달을 밟았다.비록 수시로 조언하는 그의 모습이 꼴불견이지만 그래도 옆에서 가르쳐 준 덕분에 확실히 전보다 능숙해졌다.이제 직진과 유턴은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익었다.“힘들어. 다음에 연습하자.”힘든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벽에 부딪힌 듯한 소리였다.집에 있는 사람은 이미숙과 곽승재뿐인데 주정뱅이가 나타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철컥!방문이 열리자 곽승재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한껏 달아오른 새빨간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그는 눈마저 빨갛게 충혈되었다.뭔가 위험을 직감한 고은서는 곧바로 노트북을 닫았고 사람을 부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술 마셨어?”그녀는 침착하게 물으며 아무 내색 없이 방문을 열었다.“아줌...”아줌마라는 세글자가 나오기도 전에 입술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곽승재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갑자기...”고은서는 너무 놀라서 밀어내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오히려 그녀를 더 힘껏 끌어안고 키스했다.그의 몸은 매우 뜨거웠고 발버둥 칠 공간마저 주지 않은 채 빈틈없이 고은서를 품에 껴안았다. 곧이어 벽으로 밀어 세우더니 마치 그녀의 모든 숨결을 빼앗아 가듯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고은서는 주먹으로 그를 때리려고 했지만, 두 손 전부 잡힌 탓에 꼼짝달싹 못 했다.늘 그렇듯 남녀의 힘 차이는 현저하다. 고은서는 몸이 완전히 짓눌려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러서야 끙끙대며 애원했다.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곽승재는 멈출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뭔가 자극을 받은 듯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아!”고은서의 비명에 곽승재는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숨 고를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마치 목을 물려는 듯 다가갔다.“아줌마!”소리를 들은 이미숙이 부랴부랴 위층으로 올라왔다.그러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그들의 애매한 자세를 보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줌마, 도와...”“내려가요.”곽승재는 고은서의 입을 막고선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고은서가 많이 걱정되었지만, 일개 도우미가 젊은 부부의 사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건 주제넘은 행동이라고 판단되어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다.“이거 놔!”고은서는 그가 한눈판 틈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내 인생 가장 눈부신 시기를 함께 보낼 그이를 기다리며.]정교한 요리가 담긴 사진은 백유미의 옆모습 셀카와 함께 업데이트 되었다.긍정적인 문구와 사진은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그녀의 셀카를 살펴보면 구석에서 반쯤 드러난 남자의 팔을 확인할 수 있다.셔츠를 입은 남자는 손목에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너무도 익숙했다. 곽승재가 항상 차고 다니는 시계 중의 하나였으니까.역시나 예상대로 그동안 백유미와 함께 있었다.하긴 그날 욕구가 치밀어 오른 상황에서 고은서가 거절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생활이 깔끔한 곽승재는 여태껏 그 어떤 스캔들에도 휘말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욕구를 주체 못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사친을 찾아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더 가까워진 건 백유미의 게시물에서도 느껴졌다.고은서는 그저 웃으며 백유미의 인스타를 차단했다.전에는 ‘라이벌’의 성향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팔로우했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마음이 편할 정도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전생에 가깝게 지냈던 절친 성아연이다.성씨 일가는 최근 2년 동안 금융업에 발을 디뎠고 현재 그룹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그녀가 전생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성씨 일가는 갑자기 GS그룹과 손을 잡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가도 상승했다.성아연은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힌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방문안 온 적이 없었다.이해득실을 따지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했기에 원한을 품은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전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마음을 나눌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여 환생한 후에도 지금까지 성아연에게 연락한 적이 없었다.내심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건지 궁금했던 고은서는 브레이크를 밟고 화면을 터치했다.“은서야, 너 지금 어디야?”전화를 받자마자 성아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잠
고은서는 웃으며 답했다.“방금 복싱 클래스 끊었어요.”주인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살다 보니 이런 우연도 있네요. 저 복싱 클래스 코치예요.”참 신기한 인연이다.다음번 만남은 서로 거래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다니.“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고은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볼일 봐요. 전 이만 가볼게요.”“잠깐만요.”주인혁이 그녀를 불러세웠다.“하실 말씀이라도?”고은서의 질문에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지난번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이 감사함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뭐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업무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 다음번에 사줘요.”“괜찮아요. 안 그래도 퇴근하려던 참이었어요.”주인혁은 다급하게 말했다.수줍어하며 소년미를 뿜어내는 그의 모습은 풋풋한 대학생 같았다.순간 연하남을 덕질하는 누나 팬들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가 됐다.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을게요.”“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줘요.”주인혁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었고 고은서가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그가 나왔다.“타요.”그녀의 손짓에 주인혁은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운전 실력이 별로니까 마음 준비 단단히 해요.”“괜찮아요. 믿을게요.”진지한 그의 표정과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니 왠지 모를 책임감이 크게 다가왔다.“어디로 갈까요?”주인혁이 답했다.“전 다 괜찮으니까 마음껏 선택해요.”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버블티는 어때요??”버블티를 좋아했던 학창 시절의 고은서는 늘 곽승재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하여 대학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버블티를 사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곽승재는 불량식품에 관심 없다며 매몰차게 내쳤다.“이 버블티에는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첨
성아연이 보내온 카톡인데 사진과 동영상, 음성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고은서는 사진부터 보았고 그곳은 백유미가 사는 곳의 아래층이었다.동영상을 보고 싶었지만, 길이가 꽤 되어 어쩔 수 없이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은서야, 불여우 혼내주러 왔어. 난 네가 서러움을 받으면서 사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타로 버블티 나왔어요.”“고마워요.”고은서는 음성 메시지를 듣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죄송한데 급한 일 때문에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다소 냉랭한 그녀의 모습에 주인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예의 바르게 손을 흔들었다.“나중에 복싱장에서 봬요.”“좋아요.”버블티 가게에서 나온 고은서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동영상을 확인했다.영상 속의 성아연은 백유미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이어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고, 분노를 참지 못한 성아연은 남의 남편과 데이트를 즐기는 백유미에게 불륜녀라며 욕설을 퍼부었다.백유미는 당황한 듯 몸 둘 바를 몰랐다.“아연 씨, 저는 승재가 우리 아빠를 도와줘서 고마운 마음에 식사 대접하는 것뿐이에요.”“그 말을 누가 믿죠? 이봐요, 경고하는데 곽승재 씨는 은서 남편이에요. 승재 씨랑 알고 지낸 지 오래되어서 특별한 사이가 된 것마냥 착각하고 있나 본데 정신 차려요. 당신은 도우미의 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승재 씨 만날 자격 없어요.”“아연 씨, 도가 좀 지나치시네요. 이건 주택 침입 아닌가요?”곽승재가 싸늘하게 말했다.“전 은서를 위해서 이 일을 바로잡고 싶은 것뿐이에요.”성아연은 두려움 없이 할말을 이어갔다.“은서는 승재 씨가 집에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바쁜 줄 알았는데 여기서 불륜녀랑 시간을 보내고 있었네요?”“아연 씨,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악!”백유미가 변명하기도 전에 성아연은 힘껏 그녀를 밀쳤다.“역겨우니까 연기 그만하고 저리 꺼져요.”뒤로 밀려난 백유미가 넘어지려던 찰나 때마침 곽승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아니까 서재로 가자. 내가 다 설명할게.”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보고선 긴 다리로 서재를 향해 걸어갔고 고은서는 그 뒤를 따랐다.서재 소파에 앉은 그는 넥타이를 풀며 차갑게 물었다.“뭘 어떻게 설명할 건데?”고은서는 방금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두 개를 건네주었다.“두 장 전부 이혼협의서야. 하나는 내가 빈털터리로 집을 나가는 거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200억의 위자료는 주는 거야. 사인은 둘 다 했으니까 고민해보고 결정해도 좋아.”곽승재는 고개를 들었다.“200억?”이윤을 따지는 사업가로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200억이라는 금액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응.”고은서는 말을 이었다.“전에 20억 준다고 했지? 생각해 봤는데 너무 적은 것 같아. 정확히 따지자면 잘못은 당신이 했잖아? 그리고 이 결혼에서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이 그쪽이니까 200억은 줘야 합리적이지.”처음에는 그 어떤 지체없이 속전속결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곽승재에게 돈을 요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하지만 민시후와 거래하기 위해서는 200억이 필요했다. 이 기회를 그냥 놓칠 리 없었던 고은서는 위자료를 빌미로 돈을 받아낼 계획이었고 그 돈으로 계약이 성사된다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이 말을 들은 곽승재는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고은서가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의 결혼이 내 강요로 이루어진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당신에게 미안한 짓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이혼소송 하면 위자료가 무조건 200억 넘을 거야.”고은서는 차근차근 모든 말을 내뱉었다.“200억의 위자료를 주는 순간 당신은 자유의 몸이고 당당하게 모든 여자를 만날 수 있어. 그러면 절대 오늘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석이조지?”곽승재는 비웃으며 말했다.“말을 이렇게 잘하는 사람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네.”고은서는 시종일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고은서는 그와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결정했어? 어디에 사인할 거야?”“혼자서 결정하기에는 너무 어려운데?”곽승재는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손에 들더니 여유롭고 느긋하게 말했다.“할아버지가 조언을 해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 이혼협의서를 들고 찾아뵈려고.”“결정 안 해도 돼.”고은서는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한푼도 안 가지고 이 집에서 나갈게.”곽승재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잘못은 내가 했잖아. 이혼소송 하면 200억보다 훨씬 더 많은 위자료를 받을 거야. 할아버지는 네가 손해 보는 걸 안타까워하시겠지?”개자식, 방금 했던 똑같은 말로 그녀의 말문을 막아버렸다.고은서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곽승재의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하여 울분이 치밀어 올랐던 고은서는 소파 위로 올라서더니 그를 내려다보며 버럭 화를 냈다.“미쳤어? 이혼은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인데 왜 할아버지까지 귀찮게 만들어.”고은서를 올려다보는 처지가 됐음에도 그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네가 정말로 이혼을 원하는 거면 숨길 필요가 없잖아.”“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혈압을 앓고 있는 노인은 큰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된다.지난번에 얼핏 이혼 얘기를 꺼냈는데 어찌나 걱정하던지 쓰러지는 건 아닌가 싶었다. 만약 이혼협의서를 가지고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그러니 고은서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 적당한 때를 찾아 할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고 혼자서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겸허히 잘못을 인정하고 애교부리면 화가 금방 풀리지 않을까?곽성재는 화가 나서 말문이 막힌 고은서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설마 이혼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내 관심을 끌고 싶은 거야? 너의 소중함을 알았으면 좋겠어?”“아니! 난 이혼하고 싶어.”곽승재는 비웃었다.“결혼에 얽매이고 싶지 않지만, 이 관계를
곽승재는 소파에 서 있는 고은서를 차갑게 바라보았다.“내 일은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 이혼을 원한다면 성의를 보여!”그 말과 함께 그는 이혼 서류를 내려놓고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지난번 홧김에 이혼을 강행하지 않은 탓에 곽승재는 그녀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고 일은 점점 더 번거로워졌다.고은서는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소파에서 내려와 합의서를 들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고은서, 허구한 날 말썽 좀 피우지 마. 매번 응석 받아줄 정도로 내가 인내심이 크지 않아.”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그 말은 백유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를 돌아오게 하려고 자신이 벌인 짓이란 뜻인가?미친!“당신이 인내심이 있든 없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고은서가 도발적으로 고개를 들었다.“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전까지 난 하루도 가만있지 않고 당신 후회하게 만들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곽승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든 채 자리를 떠났다!방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김이 빠졌다.망할 곽승재, 한 번 더 믿어주면 어디가 덧나나.속에 꽉 찬 불만을 털어놓을 곳이 없던 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니까 곽승재는 양가 어른들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혼 서류에 사인하겠단 거야?”불만 가득 털어놓는 그녀의 말에 박지연은 의아했다.“대체 왜? 네 말처럼 그 정도로 널 미워하면 아무리 네가 장난하는 거라도 흔쾌히 사인을 할 텐데?”“내 말이, 머리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고은서가 씩씩거렸다.“은서야, 혹시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봤어?” 박지연이 은근한 말투로 묻자 고은서가 되물었다.“무슨 가능성?”“곽승재가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는 게 아니니까 지금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거지!”“그럴 리가!”고은서는 조금도 믿지 않고 박지연에게 지난번에 곽승재가 화를 내며 자신을 충분히 괴롭히겠다고 한 말을 전했다.“내가 자꾸 이혼 얘기를 꺼내는 게 못마땅해서 괴롭히는 거야. 그래, 그런 거야.”고은서는 문득 곽승재같이 오만하고 건방진
저택에 도착해서도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진 곽승연은 도우미가 데리고 올라갔고 고은서는 일행들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저번에 곽승재와 함께 호원 저택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호원 저택은 더 북적이는 것 같았다.집안에 적지 않게 놓인 귀여운 장식품들은 집안의 활기를 북돋아 주었다.“승연이 거야.”서연정은 정신과 의사가 다양한 사람과 물건들을 접촉하는 것이 곽승연의 심신 건강에 좋다고 알려준 사실을 고은서에게 말해주었다.“오늘 승연이랑 함께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승연이가 많이 지친 것 같긴 한데 분명 그만큼 즐겁게 지냈을 거야.”그 후에도 서연정은 도우미에게 그들에게 차와 과일을 대접하라고 부탁했고 저녁도 먹고 갈 것을 제안했다.“괜찮아요, 어머니. 저희는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냥 앉아 있다가 가는 거로 충분해요.”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그래요, 저희는 어머님을 뵈러 온 것뿐이니까 저녁은 괜찮아요.”육현석도 웃으며 고은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아버님은 아직 안 오셨나 봐요?”육현석의 말에 서연정의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아까보다 살짝 옅어졌다.“승재 아버지는 바쁘셔. 매일 퇴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육현석은 서연정과 곽현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곽승연이 키우는 강아지가 뛰어나왔고 육현석은 박지연과 함께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서연정과 함께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서연정은 고은서에게 해성의 부녀 자선 단체에서 자신을 초대해 그곳에 갔다 온 일을 말해주었다.“Y국에도 가지 않게 됐고 승연이 상태도 점점 안정되고 있어서 뭐라도 해서 삶을 충실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너무 좋죠.”고은서는 서연정이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온종일 집안 남자들 옆에 머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그 후에도 고은서는 서연정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고은서는 손문호에 관해 물어보려고 했으나 적절한 대화 주제를 생각해내지 못
사실 육현석도 운전기사를 자처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고은서와 곽승연을 데려다주는 일이 아니라면 육현석도 충분히 박지연과 함께 차를 타고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하지만 육현석은 고은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 고은서가 말해주길 송민준이 자신에게 푹 빠져 어딜 가나 따라다닌다고 그랬었다.게다가 육현석이 보기에도 송민준은 고은서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육현석은 곽승재를 위해서라도 그 두 사람을 사이를 가로막는 게 응당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육현석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박지연도 이번만큼은 육현석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민준 씨, 피곤하실 텐데 은서와 승연이는 현석이가 데려다주게 내버려 두세요.”박지연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육현석을 도와 말을 해주기도 했다.송민준은 작게 미소를 지었고 굳이 본인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차에 앉자 박지연은 그제야 육현석의 정곡을 찔렀다.“왜, 민준 씨가 은서 마음을 얻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보지?”육현석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난 단지 어머님을 뵌 지도 오래됐고 오늘 마침 시간이 있으니까 어머님을 뵈러 가고 싶어서 그런 거야.”박지연은 일부러 육현석의 속셈을 모르는 척했다.“그래,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어. 어쨌든 난 은서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민준 씨도 꽤 괜찮은 사람이고.”하지만 육현석의 생각은 달랐다.“송민준 그 사람은 곧 서른이잖아. 은서랑 나이 차이도 크게 나니까 분명 세대 차이가 있을 거야.”박지연이 다시 반박했다.“세대 차이 같은 소리 좋아하네. 성숙한 남자야말로 진정으로 자기 사람한테 잘한다고!”육현석은 급히 말을 바꿨다.“승재 형도 스물일곱 살이니까 형도 자기 사람한테 잘할 거야. 게다가 송민준보다 세대 차이도 덜 나잖아.”“얼씨구, 육현석 씨 계산이 빠르시네요?’박지연은 비아냥댔다.“근데 곽승재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까먹었고?”육현석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지연아, 승재 형은 절대 그
고은서는 민망하긴 했지만 곽승재가 이미 이렇게나 높게 들어 올렸겠다, 기회를 틈타 더 망설이지 않고 소원패를 제일 높은 나뭇가지에 걸었다.“언니 소원패는 엄청 높은 곳에 걸었으니까 소원이 꼭 이뤄질 거야!”곽승연은 꺄르르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때마침 송민아와 송민준도 안에서 나와 그 둘을 향해 다가왔다.고은서는 정말 민망하기 짝이 없어 곽승재한테 어서 내려달라고 사인을 보냈다.멀지 않은 곳에서 박지연과 육현석도 둘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육현석은 당연하게도 기뻤지만 박지연은 불쾌하다는 듯 곽승재의 손을 내치고는 고은서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그리고는 곽승재에게 그 인플루언서와의 관계를 언급하며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고은서에게 찝쩍대서야 되겠냐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박지연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전 그냥 은서가 키가 작아 높은 곳까지 닿지 않는 것 같아서 도와준 것뿐이지 찝쩍거린 게 아니에요.”박지연은 곽승재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러시구나, 참 마음씨도 좋네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 사다리나 하시면 되겠어요. 높은 곳에 닿지 않는 사람은 다 도와주시지 그래요?”숨도 안 쉬고 몰아붙이는 박지연에 곽승재는 찍소리도 할 수 없었지만 육현석도 그를 달리 도와줄 수 없었다.육현석은 몰래 곽승재를 부른 것만으로도 이미 크나큰 모험을 한 격인데 박지연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송민준이 와서야 상황이 일단락되었다.“곽 대표님도 도와주려고 그런 거잖아요.”“곽 대표님, 여시은 씨는 함께 오지 않은 건가요?”송민준이 무심결에 곽승재에게 물었다.이에 곽승재가 고은서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시은 씨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어딘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곽승재를 따라 굳이 이곳까지 함께 온 여시은이 얼마 있지도 않고 바로 이렇게
여시은은 솔직하고도 재치있게 곽승재의 말을 받아쳤다. 그런 여시은의 태도에 곽승재의 미간이 묘하게 찌푸려졌다.“시은 씨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분간은 결혼 생각이 없고 시은 씨가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시은 씨도 저한테 너무 많은 감정을 기대하지 말아요.”곽승재의 말에 여시은의 얼굴에 드물게 상실감이 드리웠다. 하지만 여시은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입술을 삐죽이고는 투덜거릴 뿐이었다.“곽 대표님, 이렇게나 무뚝뚝해서야 되겠어요? 저도 제가 잠깐 뭐에 홀린 건 아닌지 반성 좀 해봐야겠어요!”곽승재는 여시은의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승연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가봐야겠어요.”여시은은 굳이 곽승재를 따라가지 않았다.“곽 대표님, 은서도 절 반기지 않는 것 같고 대표님도 저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으니 전 먼저 돌아갈게요.”곽승재는 여시은을 말리지 않았다.“기사님은 밖에 있어요. 제가 기사님한테 시은 씨 모셔다드리라고 말해둘게요.”여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곽 대표님, 나중에 은서한테 제가 은서 향수 완성품을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다고 좀 전해주실래요? 항상 기다리고 있다고도 말이에요!”여시은은 가려다 말고 상냥한 목소리로 곽승재에게 말했다.곽승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은행나무 잎이 여시은의 팔에 떨어졌다. 팔에 붙은 나뭇잎을 떼서 본 여시은은 웃으며 나뭇잎을 부스러기로 만들어버리고는 털어버렸다.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이른바 소원 나무는 엄청나게 거대했다. 나무 기둥은 여러 사람이 둘러싸야만 안아지는 정도였고 나무뿌리는 화단에 둘러싸여 있었다.나무에는 목재로 된 소원패가 가득 걸려 있었고 바람이 불면 딸랑거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곽승재가 도착했을 때, 송민아는 송민준을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고 고은서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일찌감치 다 쓴 곽승연이 있었다.곽승연은
“...”그제야 고은서는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승연이가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아마 민아랑 다른 곳에 갔나 봐. 내가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일이야!”말을 마친 고은서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 때, 곽승재가 조롱하듯 말했다.“민시후가 가니까 이젠 송민준이야?”그 말에 고은서는 행동을 멈추고 곽승재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는 넌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딴 걸 묻는 거지?”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낀 곽승재는 차분하게 대꾸했다.“고은서, 넌 정말 독한 사람이야. 사람을 다루는데 무서우리만치 인정사정없을 뿐만 아니라 손에 쥐고 있는 게 누구의 감정이든지 참 쉽게 휘둘러. 네가 놓고 싶을 때 놔버리면 그만이지.”“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고은서가 바로 반박했다.“너야말로 어제는 마재경을 옆에 끼고 다니더니 오늘은 시은이랑 보란 듯이 이곳에 찾아왔잖아. 네가 그러고도 나한테 뭐라 할 자격이 있냐고!”“은서야 넌 지금 곽 대표님을 오해하고 있어.”곽승재가 말문이 막혀 어버버 거리고 있을 때 여시은이 갑자기 튀어나왔다.여시은이 고은서에게 설명했다.“오늘 곽 회장님께서도 판주 투자은행에 가셨는데 곽 대표님께서 나갔다 올 거라는 걸 알게 되셨고 내가 심심해할까 봐 나랑 같이 나갔다 오라고 하신 거였어. 절대 은서 네가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게 아니야!”고은서는 원래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여시은을 보니 기분이 더할 나위 잡쳤다.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은아, 마침 곽승재도 함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짚고 넘어갈게. 난 곽승재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고 다시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 날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그 말을 들은 여시은은 단 한 번도 둘 사이에 본인이 껴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시은이 너도 곽승재와 거리를 좀 두는 게 좋겠어. 나랑 곽승
고개를 들어 곽승재의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과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동자를 확인한 고은서는 그의 알 수 없는 어색함과 조금은 강압적인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고은서는 굳이 곽승재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민준 씨가 말한 그대로야. 승연이가 민아랑 노는 걸 좋아해서 내가 내내 승연이 옆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뿐이야.”곽승재는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고은서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았어야지.”갑작스러운 곽승재의 태도에 고은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그가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상대해주기도 귀찮아 퉁명스럽게 말했다.“미안, 내 잘못이야. 지금 당장 승연이를 찾으러 갈게.”말을 마친 고은서는 곧장 옆에 있는 사찰로 들어갔다.여시은은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고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곽승재에게 물었다.“곽 대표님, 왜 은서 화를 돋우고 그러세요!”곽승재는 고은서가 향한 곳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승연이를 보러 가야겠어요.”곽승재까지 자리를 뜨자 사찰 앞에는 여시은과 송민준 둘만 남게 되었다.여시은은 송민준을 향해 웃어 보이며 물었다.“송 대표님, 아까 은서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떼주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은서의 마음을 사려는 노력이라고 봐도 되는 부분인가요?”송민준은 여전히 온화한 태도로 여시은의 말에 대답했다.“마침 눈에 보여서 도와준 것뿐이에요.”“듣자 하니 며칠 전에 송 대표님한테 작은 사고가 생겼다고 그러던데요, 게다가 상처도 입으셨다고요?”여시은이 계속해서 물었다.“제 부상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큰일이라면 저한테 무작정 시비를 걸다가 경찰에게 잡혀간 사람들에게나 생겼겠네요.”여시은은 작게 웃었다.“일부러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라면 골치가 아파도 싸죠.”여시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송민아와 곽승연이 둘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승연아, 오빠가 지금 승연이 찾고 있는데 나랑 같이 오빠 찾으러 갈래?”여시은은 산뜻한 미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마 그럴 일 없을 거야. 곽승재 말로는 회사에 급히 볼 일이 있다고 그랬거든.”박지연은 흥하고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제일 좋기는 오지 말았으면 해. 최근에 그 인플루언서랑은 아직도 안 헤어졌지? 오기만 해, 뭐가 됐든 내가 그 사람을 보고도 욕을 참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고은서는 작게 웃고 대답했다.“가자, 현석 씨가 표를 샀대.”육현석은 표를 손에 쥐고 다가왔고 송민준은 일행들에게 줄 물과 기도할 때 사용하게 될 향을 사 들고 다가왔다.“송민준 씨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귀한 쉬는 날에 우리랑 같이 절에 오는 고생을 찾아서 한다는 게 말이 돼?”박지연은 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한번 흘기고는 대답했다.“그래, 네 말대로 지금 나한테 눈이 멀어서 다른 건 다 안중에도 없어서 내가 어딜 가든 다 따라오나 봐. 어떻게 좀 만족스러운 대답인가, 박지연 씨?”“...”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때마침 육현석이 다가온 덕분에 둘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절은 엄숙하고 고요했으며 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절에 들어서니 거대한 고목 몇 그루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들은 바에 의하면 이 절은 당나라 때부터 존재해왔다고 한다. 몇 번의 격변을 겪으며 예전만큼 성대하지는 못하나 여전히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발길이 끊기지 않는 곳이었다.박지연과 육현석이 앞장섰다.송민아와 곽승연은 생각보다도 더 성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모든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고 심지어는 땅에 떨어진 은행나무 잎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둘이 딱 붙어 관찰하고 다시 걸어가곤 했다.그리고 고은서와 송민준이 제일 뒤에서 함께 그들을 따라갔다.고은서는 가장 영험하고 중생을 두루 보살핀다는 X신전에 도착해서 평안등 하나를 띄웠다.그러면서 타국에 있는 민시후가 무탈하게 수술을 마치고 얼른 몸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신전에서 나왔을 때 송민준이 고은
고은서는 곽승재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지만 그에게 더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연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곽승재도 고은서에게 있어서 곽승연이 본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아마 누가 곽승연을 데리러 올지 물어도 고은서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곽승재는 그저 퀸을 품에 안은 채 우두커니 서서 고은서와 곽승연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언니, 오빠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곽승연이 소곤대며 말했다.“아니야, 너희 오빠는 일이 바빠서 안 가고 싶을 거야.”이윽고 곽승연이 또 물었다.“언니랑 오빠는 다시 화해할 거예요?”곽승연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작게 웃고는 곽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승연아, 언니가 말했지? 언니랑 승연이 오빠의 관계가 어떻든지 우리 둘 사이의 우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말이야.”곽승연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고 고은서는 곽승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데리러 온다던 박지연이 도착했는지 몰라 연락을 하려고 핸드폰을 꺼낸 찰나에 마침 검은색 차 한 대가 천천히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였다.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송민준이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송민아였다.“짜잔! 놀랐지?”송민아는 냉큼 조수석에서 내려 고은서를 놀래줬고 덕분에 고은서는 어리둥절한 채 송민아에게 물었다.“여긴 어떻게 온 거야?”“어떻게 오긴, 당연히 너 데리러 왔지!”송민아가 해석을 덧붙였다.“지연 언니가 같이 참배하러 가자고 연락이 왔었는데 오빠도 시간이 빈다길래 같이 왔어!”알고 보니 박지연이 송민아도 함께 부른 것이었다. 고은서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박지연이 남자친구를 챙기느라 자신을 챙기지 못할까 봐 송민아를 부른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여긴 누구야?”송민아는 얌전하고 순한 곽승연을 보고 물었다.고은서는 웃으며 곽승연을 그들에게 소개해주었다.“승연이라고 해. 곽승재 여동생이야.”
고은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정말 절에 가는 거야?”“당연하지. 마침 육현석도 시간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같이 절에 가서 간절하게 빌고 주변에서 놀다 돌아오자. 일도 쉬면서 해야지.”박지연이 답했다.‘육현석도 같이 가는 거구나. 쉬는 게 아니라 그냥 데이트하러 가는 거겠지.’“난 굳이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데.”“괜찮아. 너도 이젠 습관 될 때가 되지 않았니?”박지연이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박지연과 시간을 정한 후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그러나 뜻밖으로 곽승연과 마주치게 되었다.품에 퀸을 안고 있는 걸 봐서는 아마 곽승재 집에서 나온 듯했다.“언니! 언니도 여기 살아요?”곽승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무척 기뻐했다.‘따지고 보면 승연이를 못 만나지도 꽤 됐네.’곽승연의 상태는 전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좋아하며 총총 달려왔다.“응. 승연이는 여기에 왜 온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엄마가 오늘 바빠서 같이 못 있어 준다고 나갔는데 마침 오빠를 너무 오래 못 본 것 같아서 기사님 차에 오빠 찾으러 온 거예요.”곽승연의 말하는 속도도 전과 달리 많이 빨라졌다.마침 곽승재가 집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고은서를 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틀 전의 키스를 떠올린 고은서도 그한테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승연아, 언니는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러자 곽승연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언니, 어디 가는 거예요?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고은서는 전에 편한 시간에 그녀를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아무튼 박지연이랑 육현석 두 사람과 나가는데 승연이를 데리고 가도 괜찮겠지?’“승연이 데리고 어디 갈 생각이었어?”고은서가 곽승재를 향해 물었다.“판주에 처리할 일이 생겨서 사무실에 데려가려고.”곽승재가 덤덤하게 답했다.‘굳이 휴식일에 동생을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