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내 인생 가장 눈부신 시기를 함께 보낼 그이를 기다리며.]정교한 요리가 담긴 사진은 백유미의 옆모습 셀카와 함께 업데이트 되었다.긍정적인 문구와 사진은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그녀의 셀카를 살펴보면 구석에서 반쯤 드러난 남자의 팔을 확인할 수 있다.셔츠를 입은 남자는 손목에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너무도 익숙했다. 곽승재가 항상 차고 다니는 시계 중의 하나였으니까.역시나 예상대로 그동안 백유미와 함께 있었다.하긴 그날 욕구가 치밀어 오른 상황에서 고은서가 거절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생활이 깔끔한 곽승재는 여태껏 그 어떤 스캔들에도 휘말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욕구를 주체 못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사친을 찾아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더 가까워진 건 백유미의 게시물에서도 느껴졌다.고은서는 그저 웃으며 백유미의 인스타를 차단했다.전에는 ‘라이벌’의 성향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팔로우했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마음이 편할 정도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전생에 가깝게 지냈던 절친 성아연이다.성씨 일가는 최근 2년 동안 금융업에 발을 디뎠고 현재 그룹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그녀가 전생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성씨 일가는 갑자기 GS그룹과 손을 잡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가도 상승했다.성아연은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힌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방문안 온 적이 없었다.이해득실을 따지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했기에 원한을 품은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전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마음을 나눌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여 환생한 후에도 지금까지 성아연에게 연락한 적이 없었다.내심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건지 궁금했던 고은서는 브레이크를 밟고 화면을 터치했다.“은서야, 너 지금 어디야?”전화를 받자마자 성아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잠
고은서는 웃으며 답했다.“방금 복싱 클래스 끊었어요.”주인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살다 보니 이런 우연도 있네요. 저 복싱 클래스 코치예요.”참 신기한 인연이다.다음번 만남은 서로 거래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다니.“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고은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볼일 봐요. 전 이만 가볼게요.”“잠깐만요.”주인혁이 그녀를 불러세웠다.“하실 말씀이라도?”고은서의 질문에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지난번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이 감사함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뭐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업무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 다음번에 사줘요.”“괜찮아요. 안 그래도 퇴근하려던 참이었어요.”주인혁은 다급하게 말했다.수줍어하며 소년미를 뿜어내는 그의 모습은 풋풋한 대학생 같았다.순간 연하남을 덕질하는 누나 팬들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가 됐다.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을게요.”“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줘요.”주인혁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었고 고은서가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그가 나왔다.“타요.”그녀의 손짓에 주인혁은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운전 실력이 별로니까 마음 준비 단단히 해요.”“괜찮아요. 믿을게요.”진지한 그의 표정과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니 왠지 모를 책임감이 크게 다가왔다.“어디로 갈까요?”주인혁이 답했다.“전 다 괜찮으니까 마음껏 선택해요.”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버블티는 어때요??”버블티를 좋아했던 학창 시절의 고은서는 늘 곽승재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하여 대학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버블티를 사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곽승재는 불량식품에 관심 없다며 매몰차게 내쳤다.“이 버블티에는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첨
성아연이 보내온 카톡인데 사진과 동영상, 음성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고은서는 사진부터 보았고 그곳은 백유미가 사는 곳의 아래층이었다.동영상을 보고 싶었지만, 길이가 꽤 되어 어쩔 수 없이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은서야, 불여우 혼내주러 왔어. 난 네가 서러움을 받으면서 사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타로 버블티 나왔어요.”“고마워요.”고은서는 음성 메시지를 듣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죄송한데 급한 일 때문에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다소 냉랭한 그녀의 모습에 주인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예의 바르게 손을 흔들었다.“나중에 복싱장에서 봬요.”“좋아요.”버블티 가게에서 나온 고은서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동영상을 확인했다.영상 속의 성아연은 백유미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이어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고, 분노를 참지 못한 성아연은 남의 남편과 데이트를 즐기는 백유미에게 불륜녀라며 욕설을 퍼부었다.백유미는 당황한 듯 몸 둘 바를 몰랐다.“아연 씨, 저는 승재가 우리 아빠를 도와줘서 고마운 마음에 식사 대접하는 것뿐이에요.”“그 말을 누가 믿죠? 이봐요, 경고하는데 곽승재 씨는 은서 남편이에요. 승재 씨랑 알고 지낸 지 오래되어서 특별한 사이가 된 것마냥 착각하고 있나 본데 정신 차려요. 당신은 도우미의 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승재 씨 만날 자격 없어요.”“아연 씨, 도가 좀 지나치시네요. 이건 주택 침입 아닌가요?”곽승재가 싸늘하게 말했다.“전 은서를 위해서 이 일을 바로잡고 싶은 것뿐이에요.”성아연은 두려움 없이 할말을 이어갔다.“은서는 승재 씨가 집에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바쁜 줄 알았는데 여기서 불륜녀랑 시간을 보내고 있었네요?”“아연 씨,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악!”백유미가 변명하기도 전에 성아연은 힘껏 그녀를 밀쳤다.“역겨우니까 연기 그만하고 저리 꺼져요.”뒤로 밀려난 백유미가 넘어지려던 찰나 때마침 곽승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아니까 서재로 가자. 내가 다 설명할게.”곽승재는 그녀를 힐끗 보고선 긴 다리로 서재를 향해 걸어갔고 고은서는 그 뒤를 따랐다.서재 소파에 앉은 그는 넥타이를 풀며 차갑게 물었다.“뭘 어떻게 설명할 건데?”고은서는 방금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두 개를 건네주었다.“두 장 전부 이혼협의서야. 하나는 내가 빈털터리로 집을 나가는 거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200억의 위자료는 주는 거야. 사인은 둘 다 했으니까 고민해보고 결정해도 좋아.”곽승재는 고개를 들었다.“200억?”이윤을 따지는 사업가로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200억이라는 금액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응.”고은서는 말을 이었다.“전에 20억 준다고 했지? 생각해 봤는데 너무 적은 것 같아. 정확히 따지자면 잘못은 당신이 했잖아? 그리고 이 결혼에서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이 그쪽이니까 200억은 줘야 합리적이지.”처음에는 그 어떤 지체없이 속전속결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곽승재에게 돈을 요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하지만 민시후와 거래하기 위해서는 200억이 필요했다. 이 기회를 그냥 놓칠 리 없었던 고은서는 위자료를 빌미로 돈을 받아낼 계획이었고 그 돈으로 계약이 성사된다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이 말을 들은 곽승재는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고은서가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의 결혼이 내 강요로 이루어진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당신에게 미안한 짓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이혼소송 하면 위자료가 무조건 200억 넘을 거야.”고은서는 차근차근 모든 말을 내뱉었다.“200억의 위자료를 주는 순간 당신은 자유의 몸이고 당당하게 모든 여자를 만날 수 있어. 그러면 절대 오늘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석이조지?”곽승재는 비웃으며 말했다.“말을 이렇게 잘하는 사람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네.”고은서는 시종일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고은서는 그와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결정했어? 어디에 사인할 거야?”“혼자서 결정하기에는 너무 어려운데?”곽승재는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손에 들더니 여유롭고 느긋하게 말했다.“할아버지가 조언을 해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 이혼협의서를 들고 찾아뵈려고.”“결정 안 해도 돼.”고은서는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한푼도 안 가지고 이 집에서 나갈게.”곽승재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잘못은 내가 했잖아. 이혼소송 하면 200억보다 훨씬 더 많은 위자료를 받을 거야. 할아버지는 네가 손해 보는 걸 안타까워하시겠지?”개자식, 방금 했던 똑같은 말로 그녀의 말문을 막아버렸다.고은서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곽승재의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하여 울분이 치밀어 올랐던 고은서는 소파 위로 올라서더니 그를 내려다보며 버럭 화를 냈다.“미쳤어? 이혼은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인데 왜 할아버지까지 귀찮게 만들어.”고은서를 올려다보는 처지가 됐음에도 그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네가 정말로 이혼을 원하는 거면 숨길 필요가 없잖아.”“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혈압을 앓고 있는 노인은 큰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된다.지난번에 얼핏 이혼 얘기를 꺼냈는데 어찌나 걱정하던지 쓰러지는 건 아닌가 싶었다. 만약 이혼협의서를 가지고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그러니 고은서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 적당한 때를 찾아 할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고 혼자서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겸허히 잘못을 인정하고 애교부리면 화가 금방 풀리지 않을까?곽성재는 화가 나서 말문이 막힌 고은서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설마 이혼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내 관심을 끌고 싶은 거야? 너의 소중함을 알았으면 좋겠어?”“아니! 난 이혼하고 싶어.”곽승재는 비웃었다.“결혼에 얽매이고 싶지 않지만, 이 관계를
곽승재는 소파에 서 있는 고은서를 차갑게 바라보았다.“내 일은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 이혼을 원한다면 성의를 보여!”그 말과 함께 그는 이혼 서류를 내려놓고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지난번 홧김에 이혼을 강행하지 않은 탓에 곽승재는 그녀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고 일은 점점 더 번거로워졌다.고은서는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소파에서 내려와 합의서를 들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고은서, 허구한 날 말썽 좀 피우지 마. 매번 응석 받아줄 정도로 내가 인내심이 크지 않아.”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그 말은 백유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를 돌아오게 하려고 자신이 벌인 짓이란 뜻인가?미친!“당신이 인내심이 있든 없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고은서가 도발적으로 고개를 들었다.“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전까지 난 하루도 가만있지 않고 당신 후회하게 만들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곽승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든 채 자리를 떠났다!방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김이 빠졌다.망할 곽승재, 한 번 더 믿어주면 어디가 덧나나.속에 꽉 찬 불만을 털어놓을 곳이 없던 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니까 곽승재는 양가 어른들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혼 서류에 사인하겠단 거야?”불만 가득 털어놓는 그녀의 말에 박지연은 의아했다.“대체 왜? 네 말처럼 그 정도로 널 미워하면 아무리 네가 장난하는 거라도 흔쾌히 사인을 할 텐데?”“내 말이, 머리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고은서가 씩씩거렸다.“은서야, 혹시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봤어?” 박지연이 은근한 말투로 묻자 고은서가 되물었다.“무슨 가능성?”“곽승재가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는 게 아니니까 지금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거지!”“그럴 리가!”고은서는 조금도 믿지 않고 박지연에게 지난번에 곽승재가 화를 내며 자신을 충분히 괴롭히겠다고 한 말을 전했다.“내가 자꾸 이혼 얘기를 꺼내는 게 못마땅해서 괴롭히는 거야. 그래, 그런 거야.”고은서는 문득 곽승재같이 오만하고 건방진
L국을 언급하자 시간을 세어보던 고은서는 무언가 떠올랐다.“지연아, 너 휴가 낼 수 있잖아. 왜 온 선생님과 같이 안 갔어?”“나 시간 없어. 시댁 가정부도 일 있다고 휴가 내서 내가 매일 가서 청소하고 밥도 해주고 밤에는 어머님과 같이 운동도 해야 해.”“가정부가 휴가를 냈으면 임시 가정부 구하면 되지. 넌 L국에 가서 온 선생님 만나.”고은서가 말했다.“결혼할 때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지금이 그걸 만회할 좋은 기회야.”박지연은 살짝 마음이 흔들렸지만 역시나 거절했다.“됐어, 비자도 만료됐는데 다음에 가지 뭐.”“비자는 갱신하면 되고 정 안 되면 여행사에 신청해서 투어로 가면 되잖아. 좋은 기회인데, 온 선생님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박지연은 곧바로 마음이 동했다.“그럼 해볼까?”“당장 해!” 고은서가 재촉하자 박지연은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평소에는 나랑 남편에 대해 거의 물어보지 않더니 오늘 갑자기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고은서는 차분하게 말했다.“내 결혼생활은 실패했으니까 절친한 친구라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게 잘못됐어?”“...”좀처럼 감정적으로 구는 고은서가 아니었지만 박지연은 그래도 설득당했다.“네 말이 맞아, 비자 갱신해야겠어.”“그래.”전화를 끊으며 고은서는 살짝 안도했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전생에 온 의사는 L국에 출장을 갔을 때 첫사랑을 만났고, 이후 그 여자가 온 이사의 병원으로 전근해 오며 박지연과 온 이사의 결혼을 파탄 내는 이유가 되었다.이번에 박지연이 해외로 가서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바꾸길 바랐다.알려줄 건 알려주고 욕도 실컷 한 후 고은서는 계속해서 투자계획서를 다듬었다.그녀는 빨리 마무리해서 민시후에게 넘기고 싶었다.데이터 분석은 지루했지만 데이터를 통해 기업의 운영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시장에 내놓는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보람찬 일이었다.또 한 번의 밤샘 작업 끝에 고은서는 마침내 계획서를 완성했다.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하늘은 이미 하얗게 물들어 있었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화장을 한 후 아침을 먹고 민시후를 찾아가려 했다.컴퓨터로 가보니 옆 포트에 꽂아 두었던 USB가 사라졌다.고은서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 데도 없었다.어젯밤까지 자료를 저장해 두었는데 어디로 갔을까?고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미숙에게 물었지만 이미숙은 고개를 저었다.“아침에 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길래 안 잠겨 있어서 들여다봤을 뿐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어요.”“오늘 아침에 곽승재가 내 방에 들어왔어요?” 고은서가 묻자 이미숙은 고은서의 진지한 표정에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들어갔어요. 사모님 방에 핸드폰이 있는 걸 보시고 외출 안 하셨다고 하셨어요. 사모님, USB가 중요한가요? 제가 찾는 걸 도와드릴까요?”USB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결정적인 데이터가 많다는 게 중요했고, 만약 곽승재가 그걸 봤다면 며칠 동안 일한 게 헛수고가 된다!“아뇨, 제가 직접 찾아볼게요.”고은서는 곧바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대답은 없었다.개자식, 전화를 안 받을 거면 휴대폰은 왜 써!고은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대충 아침을 먹은 후 차를 몰고 GS그룹으로 향했다.회사 로비에 도착한 고은서는 또다시 제지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프런트에 새로 온 직원이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그리고는 적당히 살가운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사모님, 오셨어요. 바로 대표님 사무실로 모실게요.”고은서는 의아했다.“곽승재가 제가 오는 걸 알고 있어요?”직원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연락은 받지 못했지만 사모님이 오시면 아무도 막지 말고 대표 사무실로 모시라는 규정이 있어요.”이런 말도 안 되는 규정을 곽승재가 동의했다고? 게다가…“저를 어떻게 아세요?”직원이 답했다.“저희가 교육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GS그룹과 대표님 주변의 중요한 분들을 파악하는 거예요.”고은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은 GS그룹 사람도 아니고, 곽승재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
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도련님. 안 그래도 짧고 귀한 밤, 어서 기다리고 있는 미녀한테 가. 여기서 괜히 애먼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붙잡긴 누가 붙잡는다고 그래?”여자는 고은서의 말을 듣자마자 반말하며 말했다.“네가 일부러 승재 씨 유혹했으니 이쪽으로 온 거겠지. 순진한 척하지 마. 여우 같은 것.”고은서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거기 아가씨. 눈은 장식이 아니에요. 제발 눈 똑바로 떠서 보세요. 지금 누가 힘으로 제압하고 있는지.”“네 수작일 뿐이잖아! 신경 안 쓰는 척, 무관심한 척하면서 승재 씨 소유욕을 자극하는 거지. 변변치 않은 수준은 아니네.”“꺼져!”고은서가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곽승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승재 씨…”곽승재의 싸늘한 말투에 여자는 금방 눈물을 글썽였다.“네 물건 챙겨서 이 호텔에서 꺼져. 다시 내 눈에 띄지 마.”곽승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피처 피하지 못한 여자는 어디엔가 부딪혀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고은서는 재빨리 무릎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곽승재를 맞히지는 못했다.빠르게 반응한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고은서의 기습을 피했다.하지만 그 순간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고은서는 얼른 힘주어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어깨를 돌볼 겨를도 없이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의 스피드를 과소평가한 그녀는 두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해 다시 곽승재의 품에 잡혔다.“이거 놔!”화가 난 고은서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쳤다.곽승재는 낮게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그는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고은서,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따뜻한 곽승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고은서는 오싹함을 느끼며 거칠게 몸부림쳤다.“움직이지 마. 내가 무슨 짓 할지 장담 못 해.”곽승재가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저항하려 했지만 뭔
“며칠 전에 금방 낯선 사이로 지내자고 한 사람은 당신이야.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던 사람도 당신이고. 그런데 지금 대체 뭐하려는 거야?”고은서는 화난 표정을 하고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낯선 사이? 결혼하고 같이 자고 심지어 제일 친밀한 일까지 함께해온 사이인데 낯선 사이로 지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곽승재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똑똑.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열려고 할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주문하신 과일 가져왔습니다.”“잠시만요.”고은서는 간단히 답하고 곽승재를 째려보면서 약간 누그러든 말투로 말했다.“이거 놔. 나 아파.”곽승재는 고은서가 일부러 누그러든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경각심을 낮추고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계속 고은서는 제압한 채 벽에 밀어붙인 동작을 유지한 상태로 문을 열었다.“손님...”말을 하려던 웨이터는 이 장면에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잘 생기고 기품이 심상치 않은 남자가 여자의 두 손을 제압한 채 다정한 모습으로 벽에 붙어있다고? 요즘 사람들 제대로 노네.’웨이터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손님, 요구하신 과일 가져왔습니다.”고은서는 웨이터의 반응을 보자마자 점점 더 어색해졌다.“스테이크는 룸 안에 놔주세요. 그리고 와인은 준비되었나요?”그녀가 웨이터에게 과일을 놓고 가보라고 말하려고 할 때 맞은 켠 방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 돌려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가 데리고 온 그 여자였다.그녀는 음식을 가져다준 웨이터와 대화 중이었다. 고은서의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그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야릇한 동작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변하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이미언은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일부러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건지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머리를 헤치고 있었는데 아주 성숙된
그러나 뜻밖으로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웨이터가 아닌 곽승재였다.방금전과 달리 그는 정장 외투를 벗고 흰 셔츠 차림이었다.수공으로 만들어진 셔츠는 그의 우월한 몸매를 두드러지게 했다. 머리 위에 있는 불빛 때문에 문에 기대고 서 있는 그는 여느 때와 달리 남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왜 또 온 거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왜 맨발로 다녀?”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고은서는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없으면 문 닫게 좀 비켜!”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언이가 미용 기기를 안 가져와서 그러는데, 지금 이 시간에 상가들도 다 문 닫았고 마침 너한테 안 쓴 새 미용 기기가 있다는 게 떠올라서 빌리러 왔어.”‘빌리긴 개뿔. 하다 하다 미언이라고 부르면서 내 기분 망치려고 작정했네.’“꺼져.”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하면서 문을 닫으려고 할 때 곽승재가 문틈을 비집고 방으로 들어왔다.“고은서, 물건 하나 빌려주는 게 뭐가 어때서 화를 내고 그래. 그냥 빌리지 않을게. 내일 새로운 미용 기기 한 박스 보내주면 될 거 아니야.”곽승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일부러 이러는 거 맞네.’고은서는 더는 곽승재랑 대화하고 싶지 않은 탓에 방 안으로 들어가 전에 그가 줬던 미용 기기를 가져와 그에게 던져주면서 말했다.“됐지. 얼른 내 방에서 나가!”그러나 곽승재는 나가기는커녕 미용 기기를 손에 쥐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화내는지 아직 안 답해줬는데.”“당신 볼 때마다 기분 잡쳐서 그래.”“기분이 왜 잡치는 건데. 전에는 날 보는 거 좋아했잖아. 밥 먹을 때마저도 날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로.”“...”고은서는 너무 어이없는 탓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혼하기 전에 곽승재는 집으로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집으로 왔다고 해도 서재에서 회사 일을 처리할 뿐 유일하게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라고는 밥 먹는 시간밖에 없었다.
“지연아, 너 임신하진 않았지?”고은서가 갑자기 물었다.전생에는 이맘때쯤 박지연이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후로 간호사 일도 그만두고 몸조리를 했는데 많은 일들이 발생했었다.온 닥터가 비록 바람을 피운 건 아니었지만 유혜린과 시어머니한테 각종 시달림을 받으면서 끝내는 부부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임신했는지 안 했는지만 답해.”고은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박지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안 했어. 요즘같이 있는 시간도 별로 없는데 임신할 리가 없어.”‘하긴 매일 바쁘게 보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수도 적은데 설마 임신하겠어? 전생처럼 흘러가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야.’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연아, 너 요즘 수간호사 선거 때문에 바쁘잖아. 임신할 좋은 시기는 아닌 거 같아. 꼭 피임조치 해. 알았지?”고은서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비록 전생과 스토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박지연이 전생처럼 상처투성이가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는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사랑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만으로도 충족하다고 생각한 고은서는 적어도 그녀가 임신하면서 몸에까지 상처가 되는 일은 겪지 않았으면 했다.박지연은 개인적인 일에 참여한다고 비아냥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서가 예전처럼 별로 좋지는 않은 듯했다.“응, 알겠어.”고은서는 박지연이 이혼하기는 싫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여러 아재 개그로 박지연의 꿀꿀한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한 덕분에 그나마 기분이 괜찮아진 듯했다.“내가 알아봤는데 곽승재가 병원으로 온 게 임시 결정한 거래. 아마 너 때문에 온 것 같은데.”박지연이 화제를 돌렸다.고은서는 곽승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곽승재 얘기하지마. 들을 때마다 기분 잡쳐.”“왜?
곽승재의 행동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커플이 그를 향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에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커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자신의 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아까 그 여자...”여자가 말하면서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 곽승재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자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할 때 곽승재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예약한 룸은 다름 아닌 고은서의 맞은편 룸이었다.이를 발견한 여자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가 곽승재한테 빌붙으려 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여자는 연회에서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여러 업계를 오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잘난 체를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나 곽승재처럼 뼛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는 고귀한 기품을 가진 남자는 어디 가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푹 빠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을 냉대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낙심하긴 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끝내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곽승재는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수많은 남자를 만나본 그녀는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대신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먼저 건의했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에게 호텔 이름을 댔다.여자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곽승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곽승재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룸만 예약하고 로비에 앉아 부하들과 온라인미팅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곽승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의외네. 내 이름을 다 기억하다니.”‘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왜 비아냥거리며 난리야?’엘리베이터는 문이 너무 오래 열려있은 탓에 경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곽승재가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은서도 더는 그와 다투기 싫어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구석에 서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데 일이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저 참을 생각이었다.이내 곽승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서 경보 소리가 멈추고 문이 닫히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몇 층으로 가세요?”고은서가 곽승재랑 함께 온 여자에게 물었다.여자는 그녀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자랑이라도 하는 듯 턱을 받쳐 들고 말했다.“그쪽이랑 같은 층이에요.”‘나랑 같은 층이라고? 진짜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엘리베이터 각 면에 거울이 있었기에 그녀는 곽승재와 여자의 행동을 엿볼 수 있었다.여자는 곽승재 곁에 꼭 붙어서 물었다.“대표님, 저분과 아는 사이세요?”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했다.곽승재는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도 눈치 있게 더는 캐묻지 않고 그에게 애교부리기 시작했다.“대표님, 이 호텔 레스토랑 음식이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으신데 웨이터한테 우리 룸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곽승재는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하고 싶은 대로 해.”“그럼 저 와인도 같이 주문해도 될까요?”여자는 곽승재의 대답에 점점 더 담이 커졌다.“오늘 대표님 대신 운전하느라고 연회 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단 말이에요. 보상은 해줄 거죠?”곽승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응.”그의 대답을 얻은 여자의 목소리가 방금전보다 더 애교스러워졌다.“고마워요, 대표님.”‘우웩, 토할 것 같아.’고은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린 탓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왜, 의견이라도 있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자기애가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내가 이혼까지 했던 너를 왜 좋아해?”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와 함께 연기하면서 이미 귀찮은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진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면 성가신 일이 지금보다 더 많을 것이다.게다가 고은서는 더는 사랑이란 단어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았다.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민시후한테 내리지 말라고 말했다.“나 혼자 들어가면 돼.”“확실해?”“응.”민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은서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서 박지연에게 연락했다.그러나 전화가 통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의 옆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이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손에는 명품백을 들고 있었고 아주 화려한 옷차림에 몸매도 우월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선남선녀 같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자는 거지? 내가 이 호텔에 있는 걸 알면서도 굳이 여자를 데리고 여기로 온다고? 해성에 다른 호텔이 없는 것도 아닌데.’“은서야, 괜찮아?”전화 너머로 박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답했다.“응. 너 온 닥터랑 얘기 나눠봤어? 왜 그 여자랑 함께 카페로 갔는지는 물어봤고?”“물어봤지. 다른 친구가 유혜린이 귀국한 거 알고 같이 밥 먹자고 했대. 그런데 종일 수술하면서 피곤해서 그저 같이 커피 사러 간 거라고 했어.”“그게 다야?”고은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응.”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은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물었다.“다친 손이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고?”“연고 가져다줬어. 병원으로 새로 개발한 건데 흉터 없애는 데 좋다면서 주던데.”“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캐물었다.“잠시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고은서가 되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백씨 집안 프로젝트를 산통 깨는 거 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고 송민준한테 부탁한 거야? 목적이 분명하잖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그냥 너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우리 둘 사이에 무슨 빚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나한테 널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유지하라고 한 사람은 너잖아.”민시후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럼 송민준도 내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거네.”“알아차리라지 뭐. 게다가 송민준 집안 도우미가 그런 짓을 했는데 네가 의심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지 않아? 걔도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증명할 의무가 있잖아.”민시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이 정도로 지지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그런데 그 도우미가 수상하긴 해.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안고 갈 생각이었으면 숨을 필요가 없잖아. 게다가 왜 송민아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송민준한테는 저렇게 쉽게 걸려든 거지?”민시후는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이번에는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 거야. 그런데 다시는 송민준 앞에서 꼼수 부릴 생각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감히 못 건드리는 존재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한마디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제발 총명한 척 그만해줄래?”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보다는 총명하지. 게다가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면 날 찾아와서 협력을 제안하지 않았을 거잖아.”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겸손한 것도 일종 미덕이에요.”“이미 충분히 우수해서 그 어떤 미덕도 나에겐 금상첨화일 뿐이야. 딱히 너무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드네.”...두 사람은 곧장 ZY 그룹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정식으로 회사 직원들에게 인사했다.전에 입사 활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데다가 그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