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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작가: 류한나
“네가 봐!”

곽승재가 그녀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그것을 건네받아 보니 CCTV 영상이었다.

장소를 보니 차고였는데 두 명의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구석 쪽에서 수상쩍게 기웃거리고 있었다.

잠시 뒤, 정장 차림의 백유미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녀가 차 키를 누르자마자 두 남자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한 명은 백유미의 입을 막고 끌고 갔고 다른 한 명은 차 문을 열고 백유미를 차에 태운 뒤 떠났다.

“백유미 씨 어디로 끌려갔는데? 뭘 찾았어?”

고은서의 진지한 표정에 곽승재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

“그들은 백유미를 잡아서 차에 태웠어. CCTV를 보고 있던 경비원이 마침 이상함을 발견하고 그들을 막았어.”

고은서는 웃었다.

“웃기네. 두 사람이 백유미 씨를 잡으러 갔는데 하필 CCTV가 있는 곳을 골라서 기다리다가 꼬리를 잡혔다고?”

“고은서, 너 그게 무슨 태도야?”

곽승재는 화를 냈다.

“경비원이 백유미를 차에서 구출했을 때 백유미는 입이 테이프로 막아졌고 두 손발이 묶인 상태였어. 제때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곽승재는 말하면서 사진 몇 개를 던졌다.

“두 범인은 한 여자가 그들에게 돈과 사진을 건네며 사주했다고 했어. 네가 외할아버지 집에 가던 길에 운전기사는 주유하러 갔고 넌 편의점에 들렀어. 그리고 그 두 남자가 마침 그곳에 나타났어. 이게 다 우연이라고?”

사진 속 두 명의 모자를 쓴, CCTV 속 남자들과 비슷한 몸매의 남자들은 그녀와 같은 편의점에 있었다.

고은서는 아침을 먹지 않아서 먹을 걸 사러 편의점에 들른 거였기에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백유미가 이런 짓을 하면서 그녀를 모함할 줄은 몰랐다.

“아침에 백유미를 모욕한 거로는 부족해서 점심에 사람을 시켜 납치한 거야? 이거 해명해야 하지 않겠어?”

곽승재가 차갑게 물었다.

고은서는 우스웠다.

“내가 점쟁이야? 아니면 예지 능력이라도 있어? 이 두 남자가 거기에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고 그들에게 백유미를 납치하라고 사주한단 말이야?”

“그 두 사람은 백수였어.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고. 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주한 걸 수도 있잖아.”

고은서는 그의 말에 기가 막혔다.

“그러면 신고해서 경찰더러 해결하라고 해.”

“백유미가 책임을 묻지 않고 사람을 놔줄 거란 걸 알아서 그렇게 태연하게 신고하라고 하는 거지?”

곽승재의 잘생긴 얼굴이 차가웠다.

“고은서, 평소에 네가 멋대로 굴 때는 그래도 참았어.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을 사주해서 납치를 시켜? 백유미가 책임을 묻든 말든 넌 반드시 백유미를 찾아가서 사과해야 해!”

“내가 안 가겠다면?”

고은서가 물었다.

“그러면 이걸 외할아버님한테 알려서 외할아버님더러 처리하라고 해야지.”

“나쁜 놈!”

고은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가 이런 걸 봐서 그녀를 걱정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백유미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대체 뭘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지 말이다.

곽승재의 지시에 따라 운전기사는 백유미의 거처로 향했다.

그곳은 고급 아파트였는데 GS 그룹에서 임원들을 위해 이곳에 거처를 마련해준다고 한다.

고은서가 말했다.

“정확한 주소만 알려줘.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곽승재의 의심하는 눈빛에 고은서는 코웃음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도망치는 게 두려워서 감시라도 하려고 그래?”

곽승재는 의아해했다.

“사과만 해. 다른 수작은 부리지 말고.”

고은서는 코웃음쳤다.

“그렇게 믿지 못하겠으면 음성통화 켜놓고 있든지.”

곽승재는 그 제의에 동의했고 고은서는 속으로 웃었다.

그녀가 혼자 가려는 건 백유미가 경계를 늦춘 틈을 타서 그녀를 떠보기 위해서였다.

또는 백유미를 자극해서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길 바라서였다.

고은서는 원래 녹음할 생각이었는데 곽승재가 음성통화를 하는 것을 동의했으니 일을 던 셈이다.

그럴싸해 보이도록 고은서는 과일바구니까지 사 들고 위로 올라갔다.

백유미의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백유미가 문을 살짝 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저 바쁘니까 볼일 없으면 찾아오지 마세요!”

백유미는 평소보다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을 바라보니 집 안에 듬직한 뒷모습의 여자가 알 수 없는 상자를 백유미에게 건네려 했다.

“전 이런 것들 필요 없어요. 가지고 돌아가세요.”

백유미가 거절했다.

“유미야, 나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래. 아주머니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고은서가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가겠다고 말했을 때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고은서는 순간 심장이 철렁하면서 문을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그 인기척에 백유미와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둥그런 얼굴이 온전히 보였을 때 고은서는 온몸이 굳었다.

고은서는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털이 쭈뼛 서면서 뼛속까지 스며든 한기가 사지를 휘감는 듯했다.

“고은서 씨, 왜... 아!”

백유미가 놀란 목소리로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은서가 앞으로 달려들더니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를 그녀의 머리에 내팽개쳤다.

백유미의 비명과 함께 고은서는 눈이 빨개진 채 그녀의 목을 졸랐다.

“윽! 은서...”

백유미는 목이 졸려 얼굴이 빨갛게 된 채로 버둥거렸다. 그러나 고은서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죽어라 그녀의 목을 조르며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고은서, 미쳤어? 뭐 하는 거야?”

백유미가 눈을 뒤집기 직전에 큰 손 하나가 고은서를 떼어내며 그녀를 밀쳤다.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고은서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고 누가 자신을 밀쳤는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떨면서 미친 사람처럼 크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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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8화

    곽승재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고은서는 이미 떠난 뒤였다.“곽 대표님, 사모님께서는 택시를 타고 먼저 가셨습니다.”기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깨물다가 기사에게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자고 했다.현관에서 고은서의 신발을 본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은서의 방문은 꽉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곽승재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다음 날, 곽승재는 헬스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이미숙은 아침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그는 식탁 앞에 가서 앉아 위층을 힐끗 보며 말했다.“깨워서 아침 먹으라고 해요.”이미숙이 깍듯이 대답했다.“도련님, 사모님은 이미 외출하셨습니다.”외출했다고?그는 어제 일부러 고은서에게 냉정해질 시간을 주었고 오늘 아침 그녀에게 무슨 상황인지 물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아침 일찍 외출했다니.“어디로 간 거예요?”이미숙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아침도 드시지 않고 나가셨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이미숙이 말을 보탰다.곽승재는 눈썹을 치켜세웠다.“알겠어요. 볼일 보세요.”이미숙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곽승재는 주민기에게 연락했다.“어제 백유미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 조사해 봐요.”어젯밤 고은서의 반응은 너무 이상했다.비록 사과하라고 했을 때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긴 했었다.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백유미를 보자 원수라도 본 듯이 군 걸까?곽승재는 자신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고은서가 백유미를 목 졸라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반응한 걸까?...고은서는 차를 타고 민시후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화 속에서 그가 알려준 병실에 도착했다.민시후가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침실, 간호실뿐만 아니라 응접실도 있었고 응접실 안에는 초대형 TV, 정수기, 가죽 소파가 있었다.호텔 스위트룸에 비견

  • 어게인, 비긴   제19화

    민시후는 일부러 뜸을 들다가 말했다.“당신과 협력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저를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겨우 한 번 본 여자가 갑자기 그와 협력하자고 한다. 그것도 라이벌의 아내가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서 역시 그를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만약 저희 목표가 일치한다고 하면요?”“네? 고은서 씨 목표도 곽승재를 무너뜨리는 건가요?”민시후는 또 흥미가 생겼다.“곽승재의 다른 사업은 모르겠지만 판주 투자은행은 철저히 쓰러뜨릴 거예요.”판주 투자은행은 백유미가 책임졌었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고은서는 자신이 백유미와 싸우지 않는다고 해도 백유미가 절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백유미와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전생에 겪었던 모든 것들을 되갚아줄 것이다.“제가 듣기로 고은서 씨는 곽승재 씨를 몹시 사랑한다면서요? 몇 년이나 짝사랑한 끝에 겨우 결혼했는데 왜 갑자기 그와 척을 진다는 거죠?”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확실히 그녀는 곽승재와 정말 대립해야 할지 망설였었다.그러나 어젯밤 곽승재에게 이혼 후 백유미와 만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 또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전생에 백유미가 정신병원에까지 손을 써서 고은서를 괴롭히게 놔둔 곽승재는 공범이었다.“민시후 씨, 전 오늘 성의를 가지고 찾아온 겁니다.”고은서가 말했다.“200억이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대로 민시후 씨 손에 들어갈 거예요. 전 그 뒤로 투자은행 업무만 책임지고 민시후 씨의 영업 기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봐도 민시후 씨가 손해볼 일은 없죠. 혹시 민시후 씨는 이게 곽승재가 파놓은 함정일까 봐 저랑 협력할 배짱이 없는 겁니까?”“제 승부욕을 자극하시네요. 재밌군요!”민시후는 흥미를 느꼈다.“고은서 씨, 전 우리의 협력에 관심이 매우 많아요. 그러면 고은서 씨가 명운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

  • 어게인, 비긴   제20화

    고은서가 이메일을 열었을 때 안에는 전에 그녀가 이력서를 넣었던 회사에서 답장이 와 있었다.그녀는 대학 시절 금융 투자분석사 자격증을 땄었고 그로 인해 투자회사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두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고, 다른 두 회사는 그녀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력이 없었기에 월급이 다른 투자자들보다는 조금 낮았다.고은서는 그 회사들에 간단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전에 그녀는 회사에 다니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민시후와 협력하기로 했으니 당분간은 다른 회사로 갈 수 없었다.답장을 보낸 뒤 고은서는 명운 자료를 열었다.명운은 최근 몇 년 동안 비교적 빠르게 발전한 고량주 양조장으로 오랜 역사와 무형 문화 유산이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다.고은서가 기억하기론 전생에 명운은 PE를 통해 상장한 뒤 시가총액이 빠르게 상승하여 이로 인해 판주 투자은행이 큰돈을 벌었었다.좋은 프로젝트를 따고 싶은 회사는 많았다.민시후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금이 많고 통도 큰 GS 그룹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생에 민시후도 아마 경쟁에 참여했지만 패배했을 것이다.고은서는 당시 곽승재에게만 정신이 팔렸었기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은 없다.지금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얻으려면 판주보다 더 유리한 가격을 제시해야 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가치를 넘으면 안 되었다.전생에 명운이 상장한 사실은 많은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기사에 판주의 투자 금액과 지분 비율이 적혀 있었다.그러나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단지 참고용으로만 써야 했고 구체적인 것은 실제 상황에 따라 분석하고 작성해야 했다.고은서는 열심히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저녁 무렵, 곽승재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이미숙은 그를 보고 살짝 놀랐다.“도련님, 돌아오셨어요? 저녁을 드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이미숙은 최근 곽승재가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좀 잦아졌다고 생각했다.전에는 일

  • 어게인, 비긴   제21화

    곽승재는 그녀가 그날의 일로 화가 나서 이혼을 제안한 것이라고 오해했다.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고은서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그날이 우리의 5주년 기념일인 거 알고 있었잖아. 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왜 유미 씨랑 밥 먹으러 간 거야?”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나한테는 평소랑 다를 것 없었어.”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기념일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모든 건 고은서의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했다.“언젠가는 봐주겠지 하는 마음 하나로 기다렸던 내가 바보네.”고은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그걸 듣지 못한 곽승재는 줄곧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며 고은서를 바라봤고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가다듬었다.“이렇게 말다툼할 기분 아니거든? 이혼은 진심이야.”아직도 이혼으로 왈가왈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다.“고은서, 이혼하는 걸 제멋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고은서는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왜? 하루라도 빨리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 아니었나? 그러면 여사친이랑 당당하게 만날 수 있잖아.”곽승재는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가 매우 언짢았다.“이혼할지 말지는 나한테 달려있어. 할머니를 내세워서 결혼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혼? 헛소리 그만해.”“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네가 날 괴롭힌 만큼 나도 똑같이 돌려줄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드디어 미쳤네.”고은서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할머니 생신까지 30일 남았어. 그날이 지나면 무조건 이혼할 거야.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거든.”“고은서, 꿈 깨.”곽승재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너 사모님 되는 거 좋아했잖아. 그럼 내가 질릴 때까지 버티고 있으라고.”말을 마친 그는 젓가락을 뿌리치고 식탁을 떠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쳤냐?”고은서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 어게인, 비긴   제22화

    고은서는 예전에도 종종 쇼핑을 즐겼지만, 오늘처럼 미친 적은 없었다.큰 자극을 받은 게 틀림없다.그녀는 웃으며 되물었다.“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여?”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엄청.”고은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지금 제정신이고, 무슨 일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그들은 남성복 코너에 도착했다.박지연은 정성스레 넥타이와 옷을 고르며 물었다.“은서야, 그러지 말고 승재 씨 것도 좀 골라봐.”고은서는 단칼에 거절했다.“됐어.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이야.”화가 잔뜩 났음에도 걱정하지 말라는 그녀의 모습에 박지연은 할말을 잃었다.“이렇게 더럽히면 어떡해요? 대여할 때 분명히 그 어떤 얼룩도 용납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요.”그때 맞은편의 브랜드 정장 샵에서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훤칠한 키에 미소년처럼 생긴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판매원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행사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혹시 드라이클리닝 가능한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비용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이걸 어떻게 드라이 클리닝해요!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고급 원단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옷이라고요. 세탁하면 값어치가 떨어지니까 당연히 그쪽이 정가로 사야죠.”남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세탁 비용은 제가 많이 지불할게요.”“안 됩니다.”“그 옷 얼마예요? 제가 살게요.”고은서는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판매원과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판매원은 양손 가득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고선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손님, 이 정장은 이번 가을 최신 상품이고 가격은 5,500만입니다.”고은서는 블랙 카드를 건넸다.“비밀번호 없어요.”판매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재빨리 다가가 카드를 받았다.청초하게 생긴 남자는 고개를 돌려 고은서를 바라보더니 고마움에

  • 어게인, 비긴   제23화

    순간 후회가 밀려온 주민기다.기분이 안 좋은 듯 하루 종일 정색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젯밤 새벽까지 야근한 게 떠올랐다.이런 타이밍이 고은서 얘기를 꺼내면 독이 되지 않을까?곽승재는 짜증이 가득했다.“귀찮게 하지 말고 할 말 없으면 나가요.”주민기는 곽승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건넸고 그는 곁눈질로 힐끔 화면을 보았다.그 위에는 백화점에서 쇼핑한 카드 결제 내역들로 꽉 찼다.수십만 원부터 수십억까지 가격대는 다양했고 전부 여자들이 좋아하는 쥬얼리나 명품 옷과 가방이다.띵!때마침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xx 남성 정장 샵에서 고객님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5,500만 원을 소비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오시기를 기대합니다.]주민기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으나 문자를 보고 나서 곽승재의 표정이 풀린 것 같았다.비록 곽승재의 옷장에 절대 볼 수 없는 저렴한 가격대의 옷이지만 옆에서 최선을 다해 아부를 떨었다.“사모님은 쇼핑하러 가서도 대표님 생각뿐인가 봐요. 이렇게 옷까지 사시다니 정말 배려심이 많은 분이네요.”역시나 예상대로 곽승재의 표정은 한결 좋아졌다.하지만 여전히 싸늘한 분위기를 유지했다.“전 이런 걸 바란 적 없어요.”주민기는 뭔가 떠오른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대표님, 어제 늦게까지 야근한 데다가 오늘도 하루 종일 바빴으니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시는 건 어떨까요?”곽승재는 피곤한 듯 몸을 쭉 뻗었다.“아줌마한테 기운 돋우는 차 한잔을 준비해달라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고은서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5시가 되었다.박지연이 떠난 후 불현듯 기분 전환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용실에 가서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했다.그녀는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신이 났다.“사모님, 도련님은 서재에 계십니다.”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미숙이 다가와서 말했다.‘웬일로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거지? 설마 카드 긁은 것 때문에 화내려고 온 건가? 아니다, 차라리 잘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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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689화

    고서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말씀하세요.”“승연이 상황에 관해서 너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어. 지금 승연이가 꺼려하지 않으면서도 정서 조절에 도움이 되는 향을 찾아야 하는데 승재 할머니 말씀으로는 네가 퍼퓸 제작에 능하다고 하던데 혹시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해서.”서연정은 국내외에도 많은 퍼퓨머가 있긴 하나 곽승연이 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설명을 보태면서 부득이하게 고은서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전에 곽씨 가문 본가에 갔을 때 곽승연 상태와 퍼퓸 제작에 관한 일을 곽승재한테서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때 당시는 곽승연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던지라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거절했었다.“어머니, 제가 한번 해볼게요.”“은서야, 고마워.”서연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를 보며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가슴이 찡해났다.“하지만 너무 큰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꼭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장할 수가 없어요.”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고은서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은서야. 내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걸. 승연이 상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결과가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정말 고마워.”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시간 내서 승연이가 무얼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보도록 할게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원래도 까다로운 퍼퓸 제작이 이번엔 더 힘들 것 같았다.‘천천히 해야지.’“은서야, 잘 부탁해. 기사님한테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기다리라고 할게.”“괜찮아요.”고은서가 말을 계속 이어가려고 할 때 서연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넌 승연이를 도와주는 것 외에 일도 해야잖니. 기사님이 데려다주고 하면 너도 차에서 조금이나마 편히 쉴 수 있잖아.”그녀의 말에 고은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운전하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 어게인, 비긴   제688화

    육현석이 혼자 추측하기 시작했다.“혹시 뭐 발견한 거라도 있어서 백유미를 이용하려고 놓아준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은 모르고 있는 게 나아.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서류 하나를 들면서 말했다.“...”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은서와 서연정은 전에 약속한 찻집에서 만났다.웨이터를 따라 위로 올라가 보니 은은한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혔고 여러 향초도 켜져 있었고 내부는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송민준을 만날 때 갔던 찻집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는데 아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은서야, 왔어?”서연정이 그녀를 보며 인사했다.“어머니.”고은서는 인사하면서 곽승연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열심히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승연이가 요즘 많이 나아졌어. 너한테 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했는데 직접 전해주는 게 더 예의인 것 같아서 데리고 왔어.”서연정이 앞서 설명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곽승연은 다도 전문가들이 차를 올려줄 때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미안, 은서야. 승연이 아직 다른 여자애들처럼 너랑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진 못해.”서연정이 웃으면서 사과했다.“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 하는데 대부분 사람은 그저 환자로만 보거든. 승연이는 또 그걸 싫어하고. 그래서 애가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지금은 주동적으로 인사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돼.”아이패드를 들고 조용하게 앉아있는 곽승연은 나긋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가녀린 몸매와 창백한 얼굴빛을 외에는 전혀 자폐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저는 승연이가 그저 평범한 여자애처럼 보여요. 조용하고 귀엽잖아요.”“고마워, 은서야.”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승연아, 언니한테 줄 물건이 있다며? 언니 지금 여기 왔어

  • 어게인, 비긴   제687화

    육현석은 곽승재의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큰 타격을 받은 모양이다.육현석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달랬다.“형, 형수님이 실망한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잖아. 전에 백유미를 감방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어긴 사람이 형이 맞잖아. 심지어 지연이도 화를 내면서 또다시 형이랑 형수님이 재혼하는 걸 도와주면 나랑 절교하겠다고 했단 말이야.”육현석은 무척 난감해했다.한쪽은 제일 친한 형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였기에 그에게 있어서 누굴 도와줄지 선택 내리기 너무 어려웠다.“형수님 형한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냥 내려놓는 건 어때?”육현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다시 열었다.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너도 민시후가 고은서한테 더 잘 어울린다는 소리 하려고 그러는 거야?”“그럴 리가! 형수님처럼 훌륭한 사람한테 민시후가 뭐야.”육현석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그런데 왜 백유미를 이대로 놓아주는 거야? 혹시 아버님이랑 백승엽이 백유미를 놔주라고 형을 협박한 거야?”육현석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현석아, 전에 은서가 임신했던 아이가 내 아이래.”곽승재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바꾸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왜 갑자기 이 말을 꺼내는 건지 약간 의문스럽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그의 말에 답했다.“내가 전에도 형수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민시후랑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을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나한테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난 그저 민시후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는 거라고만 생각하면서 믿지 않았어.”곽승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주민기한테 조사하라고 맡기고도 그 결과를 확인해 보지 않았어. 고은서 말이 맞아. 난 근거 없는 자신감만 넘치는 사람이야. 증거 있는 일만 믿으면서 단 한 번도 고은서를 믿어준 적이 없어. 그래서 고은서도 내가 자신을 위해 변할

  • 어게인, 비긴   제686화

    “누가 얌생이라는 거야?”“T국에 있을 때 분명히 나도 고은서를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한테 소식을 숨겼잖아. 이게 얌생이가 아니고 할 짓이야?”민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내 아내에 관한 소식을 왜 너한테 알려줘야 하는데?”곽승재가 화를 내며 말했다.“두 사람이 이혼한 지 언젠데 아직도 아내 타령이야. 곽승재, 아내라는 호칭 적당하게 부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너 대신 창피해지려고 하니까.”민시후가 비아냥거리며 반박했다.“너!”곽승재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민시후, 네가 환자라고 내가 널 못 팰 것 같아?”“당신이 뭔데 민시후를 패?”바로 이때, 고은서가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그녀는 민시후 앞에 막아서며 한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곽승재, 여기 블랙박스 있는 거 안 보여? 함부로 행동하지 마.”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곽승재의 마음을 찔렀다.그는 순간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옆에 보고 있던 주민기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나 고은서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주민기 씨, 건망증이세요? 뇌 건강에 신경 좀 쓰시는 게 좋겠네요. 곽승재한테서 돈 받으면서 편드는 건 이해하겠지만 저도 스스로 볼 줄 알거든요. 그러니까 대신 설명해줄 필요 없어요.”주민기는 억울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그냥 사무실에 계시면 될 걸 왜 굳이 나와서 사모님을 기다리려는 거야. 난 부득이하게 따라 나온 것뿐인데. 게다가 사모님한테 잘 보이기는커녕 민시후 때문에 도리어 화내는 모습만 보이게 되었잖아.’그에게 있어 더 절망적인 건 고은서가 민시후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주민기는 미래의 속상해하는 곽승재의 모습과 힘든 자신의 앞날이 벌써부터 무서워 났다.‘대표님이 기분 나빠하면 내 일상도 함께 힘들어지는데. 난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인데 왜 하늘은 계속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야. 벌써부터 힘이 빠져.’주민기가 한창 생각

  • 어게인, 비긴   제685화

    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해외에서 혼자 지내며 꽤 많은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고은서는 민시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비록 지난 생에서 앞으로 그가 이루어낼 성과가 작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 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고은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그냥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고은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이 없어. 이제 알게 되었으니 날 책임 져야 해.”민시후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답했다.“져야 할 책임이 너무 커서 감당 안 되겠는데?”“그럼 내가 너 책임질까?”민시후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어머니의 묘비 앞에 데려간 이유를 알았다.그는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며 자신에게 진지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고은서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구애받았지만 그녀는 곽승재에게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곽승재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고 살았었다.잠시 생각하던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다음 주 우리 삼촌 생일인데 부상이 다 나으면 나랑 같이 갈래?”그 말에 민시후는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지금이라도 갈 수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두 바퀴 뛰어서 보여줄까?”말을 마친 민시후가 날뛰려 했지만 고은서가 얼른 제지했다.“됐어. 얼른 앉아.”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민시후, 여기서 몇 바퀴 돌다가는 구급차 불러야 할 거야.”민시후는 고은서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래. 알았어. 얌전히 앉아 있을게.”병동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고은서는 핸드폰을 차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민시후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고

  • 어게인, 비긴   제684화

    다급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농담이야.”그 말을 들은 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고은서, 너는 진짜 예쁘면서 마음도 착해.”“야... 그러지 마.”고은서가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민 도련님, 정상적으로 돌아올 순 없을까? 그렇게 웃지도 말고 닭살 돋는 말 하지도 마. 아니면 뭔가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잖아.”민시후는 말문이 막혔다.‘역시 장난은 그만 쳐야겠어. 전에 방탕하게 행동했더니 이제 이미지 회복은 글렀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재밌는 곳이나 특별히 경치가 좋은 곳에 데려갈 것으로 생각했다.그런데 민시후는 그녀를 묘지로 데려왔다.고은서는 민시후의 지시에 따라 한 묘비 앞에 섰다.묘비 사진에는 온화하고 단정한 표정의 중년 여성이 웃고 있었다.“우리 어머니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여긴 외가 쪽 집안 묘지야. 비록 어머니가 북성으로 시집갔지만 외로울까 봐 여기에서 묘비를 세웠어.”고은서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평소 민시후는 세상만사에 무심한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드물게 부드럽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민시후는 휠체어에서 내려 준비한 꽃을 조심스럽게 묘비 앞에 놓고 묘비 위로 떨어진 나뭇잎을 정성껏 정리했다.“왜 곽승재를 그렇게 미워하냐고 물었었지?”고은서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여러 번 물었었지만 지난번 서운에서 조금 얘기해줬을 뿐 전부는 얘기해 주지 않았다.묘비 앞에 앉아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는 민시후의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조심스레 짐작했다.“설마 경찰서에 끌려갔던 그날 밤 어머니께서 사고를 당하신 거야?”민시후의 눈에 슬픈 감정이 서렸다.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날 밤 내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급하게 해성으로 오시다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어. 이튿날 북성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 난 어머니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

  • 어게인, 비긴   제683화

    곽승재는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단순히 바람 쐬러 나온 건지 아니면 볼일이 있어 나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고은서가 민시후를 휠체어에 태운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평소처럼 냉담하고 무표정한 눈빛을 보였지만 그 안에는 아픔도 서려 있었다.“아이고, 곽 대표. 여기서 입원 중이었어? 우연이네.”민시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곽승재는 그에게 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였다.고은서가 물었다.“할 말이라도 있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몇 분이면 되는데 병실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고은서는 차분하게 답했다.“여기서 얘기해.”곽승재는 민시후를 한번 보고 다시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사적인 일이라서 다른 사람이 듣는 건 곤란해.”“그럼 미안하지만 시간이 안 되겠네. 저녁에 시간 되면 다시 얘기해.”고은서가 그렇게 말하자 곽승재의 가슴 속에서 무거운 통증이 밀려왔다.이제 고은서는 몇 분이라도 자신에게 할애하지 않으려는 듯했다.“지나가게 좀 비켜줄래?”고은서가 곽승재에게 길을 비키라고 재촉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나중에 시간을 낸다는 말을 핑계로 그저 대화를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결국 입을 열었다.“어제 승연이가 네가 준 캔들을 사용했더니 밤새 잠을 설치지 않고 잤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 승연이가 그림 한 장 그렸는데 너한테 주고 싶대.”고은서는 약간 놀랐다.‘승연이랑은 한번 마주친 게 다인데? 날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그림을 선물로 준다고?’“외할아버지 댁에 아직 오일이 조금 남아 있어. 만약 승연이가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 가져다줄게.”고은서가 여전히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은서야, 어머니가 직접 승연이 그림을 너한테 전달하고 싶대. 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내가 장소를 정해서 알려줄게.”고은서가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도 어머니 연락처 있으니 나중

  • 어게인, 비긴   제682화

    고은서가 민시후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민시후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들어서려 하자 민시후는 전화를 끊고 백유미에게 정신 진단서를 발급한 병원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병원은 곽현수가 개인적으로 지분을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관련 증거는 경찰서에 보내놨고 백유미가 돌아오면 재검사 신청할 거야. 원지훈의 사망 원인은 T 국 쪽 부검 보고서에서 군도로 목을 그었다고 나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건지 실수로 찔린 건지는 알 수 없어. 상식적으로 백유미가 그 상태에서 성인 남성을 죽일 힘이 남아있을 리는 없지만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이 나타날 수도 있지. 하지만 이 부분은 증거로 삼을 수 없어. 폐기된 창고에는 CCTV가 없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너에게 향해 있었으니 그 누구도 안쪽 상황은 신경 쓰지 않았어. 새로운 증거가 없으면 사건 재조사는 힘들 거야.”민시후의 설명을 듣자 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시후는 대충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T 국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고마워.”고은서는 진심으로 말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감사한 마음을 알아채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마우면 행동으로 표현해 줘.”고은서는 경계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뭐 하려는 거야?”그 모습을 본 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고은서, 지금 누구랑 벽을 세우는 거야? 밥 챙겨왔다며? 어디 있어? 배고파 죽겠어!”고은서는 그제야 도시락을 열어 보여줬다.“특별히 찾아온 맛집이야. 얼른 드세요, 민 도련님.”민시후는 젓가락으로 몇 입 맛보고선 불만을 표했다.“특색이 하나도 안 살았잖아. 다음엔 내가 직접 요리해서 진짜 맛있는 음식이 뭔지 보여줄게.”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요리할 줄 알아?”민시후가 고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무슨 반응이야? 내가 요리할 줄 아는 게 이상해?”‘이상하고말고. 부잣집 도련님이 의식주에 대해 까다롭게 굴면서 사람들이 신경 써주는 생활이 익숙할 텐데 왜 스스로 요리를 배운 거지?’“혹시 어떤 여자

  • 어게인, 비긴   제681화

    고은서가 여시은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며 미소를 지었다.“시은 씨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네요.”여시은은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곽 대표님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보고 싶어 할 걸요? 같이 가면 제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여시은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병실로 이끌었다.여시은의 비서는 문을 두드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예기치 않게 곽승재의 병실에 들어섰다.곽승재는 VIP 스위트룸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실과 오픈형 주방 작은 재활실이 있었으며 병상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주민기에게 업무 보고를 듣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고은서를 바라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은서의 방문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사모님, 시은 씨.”주민기는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네고 한쪽으로 물러났다.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시은은 상냥하게 말했다.“주 비서님께서도 계셨네요.”여시은은 곧장 곽승재에게 말을 건넸다.“곽 대표님,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대신 제가 왔어요. 마침 은서 씨를 마주쳐서 같이 왔지 뭐예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귀여웠다.“곽 대표님, 너무 감사하죠?”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 말했다.“감사합니다. 여시은 씨. 아저씨한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그럼요.”여시은은 눈빛으로 비서에게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과일 좀 준비했어요. 성의 없어 보인다고 하진 말아주세요.”곽승재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눈길은 여전히 고은서에게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수중에 들린 도시락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에게 말하는 대신 여시은에게 말을 건넸다.“시은 씨. 얘기 나눠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떤 여시은이 작은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부탁했다.“은서 씨, 저도 대표님이랑 친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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