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는 일부러 뜸을 들다가 말했다.“당신과 협력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저를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겨우 한 번 본 여자가 갑자기 그와 협력하자고 한다. 그것도 라이벌의 아내가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서 역시 그를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만약 저희 목표가 일치한다고 하면요?”“네? 고은서 씨 목표도 곽승재를 무너뜨리는 건가요?”민시후는 또 흥미가 생겼다.“곽승재의 다른 사업은 모르겠지만 판주 투자은행은 철저히 쓰러뜨릴 거예요.”판주 투자은행은 백유미가 책임졌었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고은서는 자신이 백유미와 싸우지 않는다고 해도 백유미가 절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백유미와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전생에 겪었던 모든 것들을 되갚아줄 것이다.“제가 듣기로 고은서 씨는 곽승재 씨를 몹시 사랑한다면서요? 몇 년이나 짝사랑한 끝에 겨우 결혼했는데 왜 갑자기 그와 척을 진다는 거죠?”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확실히 그녀는 곽승재와 정말 대립해야 할지 망설였었다.그러나 어젯밤 곽승재에게 이혼 후 백유미와 만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 또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전생에 백유미가 정신병원에까지 손을 써서 고은서를 괴롭히게 놔둔 곽승재는 공범이었다.“민시후 씨, 전 오늘 성의를 가지고 찾아온 겁니다.”고은서가 말했다.“200억이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대로 민시후 씨 손에 들어갈 거예요. 전 그 뒤로 투자은행 업무만 책임지고 민시후 씨의 영업 기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봐도 민시후 씨가 손해볼 일은 없죠. 혹시 민시후 씨는 이게 곽승재가 파놓은 함정일까 봐 저랑 협력할 배짱이 없는 겁니까?”“제 승부욕을 자극하시네요. 재밌군요!”민시후는 흥미를 느꼈다.“고은서 씨, 전 우리의 협력에 관심이 매우 많아요. 그러면 고은서 씨가 명운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
고은서가 이메일을 열었을 때 안에는 전에 그녀가 이력서를 넣었던 회사에서 답장이 와 있었다.그녀는 대학 시절 금융 투자분석사 자격증을 땄었고 그로 인해 투자회사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두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고, 다른 두 회사는 그녀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력이 없었기에 월급이 다른 투자자들보다는 조금 낮았다.고은서는 그 회사들에 간단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전에 그녀는 회사에 다니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민시후와 협력하기로 했으니 당분간은 다른 회사로 갈 수 없었다.답장을 보낸 뒤 고은서는 명운 자료를 열었다.명운은 최근 몇 년 동안 비교적 빠르게 발전한 고량주 양조장으로 오랜 역사와 무형 문화 유산이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다.고은서가 기억하기론 전생에 명운은 PE를 통해 상장한 뒤 시가총액이 빠르게 상승하여 이로 인해 판주 투자은행이 큰돈을 벌었었다.좋은 프로젝트를 따고 싶은 회사는 많았다.민시후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금이 많고 통도 큰 GS 그룹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생에 민시후도 아마 경쟁에 참여했지만 패배했을 것이다.고은서는 당시 곽승재에게만 정신이 팔렸었기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은 없다.지금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얻으려면 판주보다 더 유리한 가격을 제시해야 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가치를 넘으면 안 되었다.전생에 명운이 상장한 사실은 많은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기사에 판주의 투자 금액과 지분 비율이 적혀 있었다.그러나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단지 참고용으로만 써야 했고 구체적인 것은 실제 상황에 따라 분석하고 작성해야 했다.고은서는 열심히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저녁 무렵, 곽승재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이미숙은 그를 보고 살짝 놀랐다.“도련님, 돌아오셨어요? 저녁을 드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이미숙은 최근 곽승재가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좀 잦아졌다고 생각했다.전에는 일
곽승재는 그녀가 그날의 일로 화가 나서 이혼을 제안한 것이라고 오해했다.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고은서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그날이 우리의 5주년 기념일인 거 알고 있었잖아. 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왜 유미 씨랑 밥 먹으러 간 거야?”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나한테는 평소랑 다를 것 없었어.”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기념일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모든 건 고은서의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했다.“언젠가는 봐주겠지 하는 마음 하나로 기다렸던 내가 바보네.”고은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그걸 듣지 못한 곽승재는 줄곧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며 고은서를 바라봤고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가다듬었다.“이렇게 말다툼할 기분 아니거든? 이혼은 진심이야.”아직도 이혼으로 왈가왈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다.“고은서, 이혼하는 걸 제멋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고은서는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왜? 하루라도 빨리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 아니었나? 그러면 여사친이랑 당당하게 만날 수 있잖아.”곽승재는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가 매우 언짢았다.“이혼할지 말지는 나한테 달려있어. 할머니를 내세워서 결혼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혼? 헛소리 그만해.”“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네가 날 괴롭힌 만큼 나도 똑같이 돌려줄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드디어 미쳤네.”고은서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할머니 생신까지 30일 남았어. 그날이 지나면 무조건 이혼할 거야.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거든.”“고은서, 꿈 깨.”곽승재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너 사모님 되는 거 좋아했잖아. 그럼 내가 질릴 때까지 버티고 있으라고.”말을 마친 그는 젓가락을 뿌리치고 식탁을 떠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쳤냐?”고은서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고은서는 예전에도 종종 쇼핑을 즐겼지만, 오늘처럼 미친 적은 없었다.큰 자극을 받은 게 틀림없다.그녀는 웃으며 되물었다.“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여?”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엄청.”고은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지금 제정신이고, 무슨 일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그들은 남성복 코너에 도착했다.박지연은 정성스레 넥타이와 옷을 고르며 물었다.“은서야, 그러지 말고 승재 씨 것도 좀 골라봐.”고은서는 단칼에 거절했다.“됐어.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이야.”화가 잔뜩 났음에도 걱정하지 말라는 그녀의 모습에 박지연은 할말을 잃었다.“이렇게 더럽히면 어떡해요? 대여할 때 분명히 그 어떤 얼룩도 용납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요.”그때 맞은편의 브랜드 정장 샵에서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훤칠한 키에 미소년처럼 생긴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판매원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행사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혹시 드라이클리닝 가능한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비용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이걸 어떻게 드라이 클리닝해요!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고급 원단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옷이라고요. 세탁하면 값어치가 떨어지니까 당연히 그쪽이 정가로 사야죠.”남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세탁 비용은 제가 많이 지불할게요.”“안 됩니다.”“그 옷 얼마예요? 제가 살게요.”고은서는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판매원과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판매원은 양손 가득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고선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손님, 이 정장은 이번 가을 최신 상품이고 가격은 5,500만입니다.”고은서는 블랙 카드를 건넸다.“비밀번호 없어요.”판매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재빨리 다가가 카드를 받았다.청초하게 생긴 남자는 고개를 돌려 고은서를 바라보더니 고마움에
순간 후회가 밀려온 주민기다.기분이 안 좋은 듯 하루 종일 정색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젯밤 새벽까지 야근한 게 떠올랐다.이런 타이밍이 고은서 얘기를 꺼내면 독이 되지 않을까?곽승재는 짜증이 가득했다.“귀찮게 하지 말고 할 말 없으면 나가요.”주민기는 곽승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건넸고 그는 곁눈질로 힐끔 화면을 보았다.그 위에는 백화점에서 쇼핑한 카드 결제 내역들로 꽉 찼다.수십만 원부터 수십억까지 가격대는 다양했고 전부 여자들이 좋아하는 쥬얼리나 명품 옷과 가방이다.띵!때마침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xx 남성 정장 샵에서 고객님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5,500만 원을 소비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오시기를 기대합니다.]주민기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으나 문자를 보고 나서 곽승재의 표정이 풀린 것 같았다.비록 곽승재의 옷장에 절대 볼 수 없는 저렴한 가격대의 옷이지만 옆에서 최선을 다해 아부를 떨었다.“사모님은 쇼핑하러 가서도 대표님 생각뿐인가 봐요. 이렇게 옷까지 사시다니 정말 배려심이 많은 분이네요.”역시나 예상대로 곽승재의 표정은 한결 좋아졌다.하지만 여전히 싸늘한 분위기를 유지했다.“전 이런 걸 바란 적 없어요.”주민기는 뭔가 떠오른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대표님, 어제 늦게까지 야근한 데다가 오늘도 하루 종일 바빴으니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시는 건 어떨까요?”곽승재는 피곤한 듯 몸을 쭉 뻗었다.“아줌마한테 기운 돋우는 차 한잔을 준비해달라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고은서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5시가 되었다.박지연이 떠난 후 불현듯 기분 전환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용실에 가서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했다.그녀는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신이 났다.“사모님, 도련님은 서재에 계십니다.”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미숙이 다가와서 말했다.‘웬일로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거지? 설마 카드 긁은 것 때문에 화내려고 온 건가? 아니다, 차라리 잘됐어.
고은서가 타이어로 애를 먹고 있던 그때, 귓가에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이미 차 옆으로 다가왔다.비록 그녀는 이 상황이 조금 창피했지만 이런 일로 토라질 만큼 유치한 사람은 아니었다.고은서는 입을 삐쭉 내민 채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을 내어줬다.차에 앉은 곽승재는 여유롭게 핸들을 돌리면서 페달을 밟았고 후진하는 동시에 오른쪽 타이어가 흙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이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운전석에서 내려왔다.“계속해.”고은서는 다시 입을 삐죽거리며 운전석에 올라탔고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곽승재가 조수석에 앉았다.“뭐 하는 거야? 갑자기 왜 앉아?”눈살을 찌푸린 채 묻는 고은서의 모습에도 곽승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되레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머리는 이게 뭐야?”고은서는 어깨까지 오는 길이의 히피펌을 했다.“내 머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뭔 상관이래.”순간 곽승재는 표정이 어두워졌다.“할말 있어? 없으면 내려.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명령하듯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곽승재는 꾹 참고 안전벨트를 맸다.“운전 연습한다며? 멀뚱멀뚱 가만히 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곽승재는 비아냥거렸다.“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구덩이에 빠져서 혼자 낑낑대냐?”“날이 어두워서 안 보였던 것뿐이야.”“밝은 대낮에만 운전할 거야? 나중에 네가 운전하는 곳마다 조명이 비칠 것 같아?”“그건...”반박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네 뒤치다꺼리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얼른 연습해.”지난번의 일은 확실히 그녀의 잘못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고은서는 전방을 주시한 채 페달을 밟았다.비록 수시로 조언하는 그의 모습이 꼴불견이지만 그래도 옆에서 가르쳐 준 덕분에 확실히 전보다 능숙해졌다.이제 직진과 유턴은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익었다.“힘들어. 다음에 연습하자.”힘든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벽에 부딪힌 듯한 소리였다.집에 있는 사람은 이미숙과 곽승재뿐인데 주정뱅이가 나타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철컥!방문이 열리자 곽승재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한껏 달아오른 새빨간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그는 눈마저 빨갛게 충혈되었다.뭔가 위험을 직감한 고은서는 곧바로 노트북을 닫았고 사람을 부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술 마셨어?”그녀는 침착하게 물으며 아무 내색 없이 방문을 열었다.“아줌...”아줌마라는 세글자가 나오기도 전에 입술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곽승재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갑자기...”고은서는 너무 놀라서 밀어내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오히려 그녀를 더 힘껏 끌어안고 키스했다.그의 몸은 매우 뜨거웠고 발버둥 칠 공간마저 주지 않은 채 빈틈없이 고은서를 품에 껴안았다. 곧이어 벽으로 밀어 세우더니 마치 그녀의 모든 숨결을 빼앗아 가듯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고은서는 주먹으로 그를 때리려고 했지만, 두 손 전부 잡힌 탓에 꼼짝달싹 못 했다.늘 그렇듯 남녀의 힘 차이는 현저하다. 고은서는 몸이 완전히 짓눌려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러서야 끙끙대며 애원했다.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곽승재는 멈출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뭔가 자극을 받은 듯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아!”고은서의 비명에 곽승재는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숨 고를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마치 목을 물려는 듯 다가갔다.“아줌마!”소리를 들은 이미숙이 부랴부랴 위층으로 올라왔다.그러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그들의 애매한 자세를 보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줌마, 도와...”“내려가요.”곽승재는 고은서의 입을 막고선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고은서가 많이 걱정되었지만, 일개 도우미가 젊은 부부의 사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건 주제넘은 행동이라고 판단되어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다.“이거 놔!”고은서는 그가 한눈판 틈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내 인생 가장 눈부신 시기를 함께 보낼 그이를 기다리며.]정교한 요리가 담긴 사진은 백유미의 옆모습 셀카와 함께 업데이트 되었다.긍정적인 문구와 사진은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그녀의 셀카를 살펴보면 구석에서 반쯤 드러난 남자의 팔을 확인할 수 있다.셔츠를 입은 남자는 손목에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너무도 익숙했다. 곽승재가 항상 차고 다니는 시계 중의 하나였으니까.역시나 예상대로 그동안 백유미와 함께 있었다.하긴 그날 욕구가 치밀어 오른 상황에서 고은서가 거절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생활이 깔끔한 곽승재는 여태껏 그 어떤 스캔들에도 휘말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욕구를 주체 못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사친을 찾아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더 가까워진 건 백유미의 게시물에서도 느껴졌다.고은서는 그저 웃으며 백유미의 인스타를 차단했다.전에는 ‘라이벌’의 성향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팔로우했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마음이 편할 정도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전생에 가깝게 지냈던 절친 성아연이다.성씨 일가는 최근 2년 동안 금융업에 발을 디뎠고 현재 그룹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그녀가 전생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성씨 일가는 갑자기 GS그룹과 손을 잡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가도 상승했다.성아연은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힌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방문안 온 적이 없었다.이해득실을 따지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했기에 원한을 품은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전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마음을 나눌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여 환생한 후에도 지금까지 성아연에게 연락한 적이 없었다.내심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건지 궁금했던 고은서는 브레이크를 밟고 화면을 터치했다.“은서야, 너 지금 어디야?”전화를 받자마자 성아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잠
전미자 생일 연회 때마침 성씨 집안 소개로 새로운 사업 계약서를 체결한 고국성은 눈에 띄게 우쭐대며 다녔는데 곽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업적을 적지 않게 으리으리하게 포장해서 떠벌리고 다녔었다.그래서 곽현수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그녀는 그가 자신은 고국성처럼 천한 사람을 직접 처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은서는 화내는 대신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우리 삼촌이 약간 잘난 체하면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이건 삼촌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 이 이유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죠. 회장님께서 우리 삼촌이 면한 일에 관해 잘 모르신다면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그녀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지라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아니면 어제 오미나 씨랑 대화한 내용을 녹음해 두었는데 직접 들어보실래요?”곽현수는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설명과 녹음파일 같은 걸 계속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그는 오미나에 관해서도 더는 묻지 않고 찻잔을 들고 아주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으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오늘 찾아온 이유가 대체 오미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야 아니면 네 삼촌 일을 해결하고 싶어서야?”“삼촌 일을 해결할 겸 오미나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사실 그보다 우리 삼촌이 어느 면에서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더 알고 싶네요.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은데 회장님께서 알려줬으면 좋겠네요.”고은서도 꿀리지 않고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생각보다 더 총명하네.”곽현수는 여전히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총명해 보았자 당신 같은 사람 눈에는 들지 않겠지.’고은서는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곽현수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잠시 후, 곽현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승재가 이혼
이튿날 오후, 고은서는 약속 시간에 맞춰 곽현수가 얘기한 시가 가게에 도착했다.전시 구역에는 다양한 시가 상자가 진열되어 있었고 주변 벽에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직원은 고은서를 VIP룸으로 안내해 주었다.VIP룸에는 검은 가죽 소파와 부드러운 캐시미어 카펫, 그리고 정교한 티 테이블이 놓여있었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차분한 느낌 주었다.곽현수는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고 직원이 그에게 다양한 신제품을 소개해주는 걸 듣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상위자의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와 달리 유독 더 날카롭게 다가왔는데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고은서는 곽현수와 만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전과 같이 고은서는 곽현수를 보자마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그녀는 자신이 이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얼마나 우울한 사람으로 컸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도착했습니다.”고은서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인기척을 느낀 곽현수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곽현수를 향해 덤덤하게 곽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곽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직원이 들고 있는 트레이 위에 있는 시가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직원은 이내 공손하게 시가를 꺼내주었다.그는 그제서야 눈길을 고은서한테 돌리면서 그녀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고은서가 소파에 앉는 동시에 직원은 곽현수를 위해 시가에 불을 붙여주었다.“난 무슨 일로 찾은 거지?”곽현수는 말하면서 시가를 한 입 맛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직원은 아주 눈치 있게 곽현수에게 다른 시가를 건네주었다.그와 동시에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제가 곽 회장님이 시가를 즐기는 시간을 방해한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곽현수는 새 시가를 들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마음에 드는지 직원에게 잘라 달라고 한 다음 내려보라고 손짓했다.직원이 나간 후, 그는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담담한
고국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이렇게 치밀하게 계산해서 접근한 이유가 결국 돈 때문 아니야? 도대체 얼마면 너랑 네 전남편 배를 채울 수 있는데? 금액이나 말해!”그러나 오미나는 여전히 처량한 표정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고 대표님, 아이는 정말 뜻밖이었어요. 저는 그냥 조용히 낳아서 혼자 키울 생각이었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몰아붙이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밝힌 것뿐이에요.”“일부러 접근한 게 아닌데 왜 미리 증거들을 남겨둔 거죠?”유성준이 물었다.고은서는 유성준이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했다.오미나가 제시한 증거들은 단순한 우연으로 준비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모든 정황이 그녀의 의도적인 접근을 증명하고 있었다.하지만 오미나는 유성준을 무시한 채 다시 고국성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대표님 그렇게 화내실 필요 없어요. 검사하면서 물어봤더니 남자아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모님보다 훨씬 젊어요. 그리고 그분처럼 강압적이지도 않죠. 만약 사모님께서 이번 일로 이혼을 원하신다면 저와 함께 사는 것도 고려해 보세요. 우리 함께 아들을 키워요. 따님도 친딸처럼 소중히 보살필게요.”“네가 감히!”오미나의 말에 분노에 찬 고국성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나를 호구로 보지 마! 난 아들 같은 것도 필요 없어!”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히 오미나의 말에 혹해서 판단을 흐리지 않았네.’그녀는 유성준에게 눈짓을 보내 고국성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진정시키게 했다.그리고 자신은 남아 오미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곽현수가 어떤 대가를 제시했길래 이렇게까지 우리 삼촌을 벼랑 끝으로 모는 거죠?”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나 오미나는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고 대표님과 저는 평범하게 만나 가까워졌어요. 벼랑 끝으로 내몬다니요?”그 말에 고은서는 손안에 쥐고 있던 녹음 중인 핸드폰을 더욱 꽉 쥐었다.오미나는 곽현수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곽현수와 관련이 없다고
기자 회견은 호텔 2층 연회장에서 열렸다.유성준이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회견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국성은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진지하게 사과하며 관련된 사건은 이미 경찰에 신고한 상태이며 조사가 진행되면 자신의 결백이 증명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단은숙 역시 남편의 인품을 믿는다며 고국성이 결코 가정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며 이번 사건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모략이고 아이 역시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고국성의 아이예요! 친자 확인서도 있습니다.”고국성을 향한 여론이 점점 우호적으로 바뀌려던 찰나 입구 쪽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시선을 돌리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미나였다.오미나는 헐렁한 임부복 차림을 한 채 손에는 감정서를 들고 있었다.걸어오는 걸음걸이는 다소 불안정해 보였다.“고국성 씨, 당신이 먼저 나에게 끊임없이 호감을 표현하고 선물도 주고 식사에도 초대했잖아요. 그래서 경계를 풀고 친구가 된 건데 당신은 제가 술에 취한 틈을 타 호텔에서 강제로 저를 안은 거잖아요!”오미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기자들은 충격적인 폭로에 즉각 반응하며 고국성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냈다.“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미나를 유혹한 적도 없고 그런 짓을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고국성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그러나 오미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신 사진과 영상 그리고 고국성이 자신에게 선물을 건넨 증거 자료를 하나씩 꺼내 보였다.심지어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가는 CCTV 영상까지 있었다.“고국성 씨, 원래는 당신과 이렇게 적대적으로 싸울 생각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모함하고 내 명예를 짓밟으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모두 공개할 수밖에 없네요!”오미나는 본래 가련한 스타일이었다.화장기 없는 얼굴에 울 것 같은 억울한 표정까지 더해지자 그녀는 완벽한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반면 중년이 되어 배가 나온 고
육현석은 자신의 속셈을 들켰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난 그냥 네가 승재 형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네 전화는 꼭 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한번 시험해 볼래?”고은서는 시험해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하지만 흥미를 느낀 박지연이 곽승재의 번호를 눌렀다.육현석이 말릴 틈도 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연 씨, 은서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은서는 아무 일도 없어! 형, 내 전화는 왜 안 받았어!”육현석이 화가 난 듯 따져 묻자 곽승재 쪽에서 갑자기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거리가 멀었던 탓에 여자의 신분은 확인하기 어려웠다.“누가 우는 거야? 형 지금 어디야?”육현석이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할게.”차분하게 답한 곽승재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육현석이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쯧, 망했네?”박지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곽승재가 은서를 특별히 여긴다는 걸 증명하려다가 결국은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들켜 버렸네?”육현석은 급히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오해하면 안 돼!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고은서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육현석은 그녀를 유심히 살피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넌 지금 화난 거야? 아닌 거야?”고은서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대답 대신 되물었다.“내가 화내길 바라는 거야? 아니길 바라는 거야?”뜻밖의 질문에 육현석은 말문이 막혔다.화가 났다면 지금 상황이 조금 두려웠고 화가 나지 않았다면 완전히 신경도 안 쓴다는 뜻 같아 왠지 씁쓸했다.“됐어. 음식 준비도 끝났으니까 가서 나르는 거나 좀 도와줘.”박지연은 육현석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주의를 돌렸다.육현석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박지연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곽승재가 정말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고 있는 거라면 기분이 어때?”
고은서의 질문에 전미자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잘 몰라. 연정이와 현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분명 현수와 관련이 있을 거야.”이 말에 고은서도 깊이 공감했다.하지만 그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에 뭐라 덧붙이기도 어려웠다.“은서야, 승재는 두 사람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았어. 그래서 랑과 결혼에 대한 믿음을 잃었지.”전미자는 앨범을 내려놓고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너와 승재가 결혼하길 원했던 건 사실 개인적인 욕심이었어. 너는 밝고 자신감 넘치고 또 진심으로 승재를 좋아했잖니. 난 네가 승재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승재가 떨떠름하게 승낙했을 때도 난 너희가 행복할 거라고 믿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니.”전미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고은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전미자로부터 여러 번 들었었다.전미자가 아무리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해도 속으로는 여전히 그녀가 곽승재와 함께하길 바라고 있다는 걸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전미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전미자가 휴식을 취하겠다고 하자 고은서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유일 투자은행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은서는 유성준의 연락을 받았다.“아저씨가 경찰에 신고했어. 경찰도 고소를 받아들였어. 공식 기자회견은 모레 오후에 열릴 거야. 홍보팀에서 친분이 있는 몇몇 언론사와 약속을 잡았고 아주머니도 아저씨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로 했어.”빈틈없는 그의 일 처리에 고은서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게임 회사 쪽의 진행 상황을 점검한 후 그녀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왔다.집에 들어서자 고은서는 며칠 동안 야근하던 박지연뿐만 아니라 한껏 멋을 낸 육현석도 발견했다.“은서야, 왔어?”박지연이 먼저 말을 건넸다.“육현석이 자꾸 밥 먹자고 꼬드겼는데 난 피곤해서 집에 간다고 했더니 따라왔어.”육현석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지연이가 아주머니 요리가 끝내준다고 해서 오래전부터
“민준 씨,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고은서가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송민준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고은서는 전화를 끊었다.‘오미나에 대한 일을 숨기지 않은 걸 보면 삼촌과 관련이 없겠어. 민시후가 나를 좋아해서 송민아와 파혼한 일 외에는 특별한 갈등도 없잖아. 처음 만났을 때 싸늘한 시선은 동생의 파혼 때문이었나 보다. 이후에 조금 친절해진 것도 송민아와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애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편이라고 했으니까.’송민준에 대한 의심을 거둔 고은서는 컴퓨터 속 자료를 바라보았다.‘오미나와 곽현수의 비서가 만난 적 있다고? 우연일까? 백승엽의 청부 폭행 사건에서 곽현수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백유미를 귀국시키고 원지훈과 함께 회사를 차리도록 지원한 것도 곽현수야. 이혼하긴 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나를 잡으려고 하고 있어. 그것 때문에 삼촌한테 손댄 건가?’고은서는 곽현수가 대체 왜 이런 일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한동안 전미자를 찾아뵙지 못한 게 떠오른 고은서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혹시 그녀에게서 무언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전화를 걸어 전미자가 시간이 된다는 걸 확인한 후 고은서는 전미자의 집으로 향했다.전미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여전히 다정하게 맞아주었다.“왜 이렇게 말랐어!”그녀는 걱정스럽게 고은서를 바라보며 주방에 더 많은 음식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비록 곽승재와 이혼했지만 전미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녀를 아껴주고 있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전미자와 담소를 나누고 소파에 함께 앉아 오래된 사진 앨범을 넘겼다.고은서는 젊은 시절의 곽현수를 보고는 무심코 말했다.“할머니, 아저씨 젊었을 때 정말 잘생기셨네요. 분명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 혹시 감정적인 문제는 없었나요?”전미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 고집불통이 무
‘억울하게 오해했더라도 곽승재도 나를 속였으니 사과하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고은혜에게 앞으로 절대 곽승재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뒤 강현철의 상황을 물었다.“그 사람은 곽 대표님 경호원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어. 그런데 아빠는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처벌을 원치 않으신대.”“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다음엔 더 심해질 거야! 절대 가만둬선 안 돼!”고은혜는 난감해하며 답했다.“그 사람이 와서 난리 칠 때 그러더라. 무슨 일을 당한다면 자기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아빠의 추문을 전부 폭로해 버리겠다고 협박했어.”고은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숨길 수도 없었다.고은서는 직접 고국성을 찾아가 이번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비록 명예가 다소 손상될지는 몰라도 약점을 잡혀 협박받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차를 부르려던 고은서는 곽승재의 차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차창이 내려졌지만 뒷좌석에서 곽승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아가씨, 타시죠. 곽 대표님께서 바래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운전기사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곽승재의 상태를 묻기도 귀찮았던 고은서는 그냥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고은서는 바로 고국성의 집으로 향해 제안했지만 고국성은 단호하게 반대했다.“나는 누명을 쓴 거야! 내가 왜 잘못을 인정해야 해? 그럼 내 체면은? 직원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난 절대 동의 못 해!”“삼촌, 누명을 썼다면 더더욱 공개적으로 해명해야 해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끌려다녀서는 안 돼요. 경찰에 신고해서 조사하게 하면 되잖아요. 결과가 나오면 사람들도 이해할 거고요.”고국성이 망설이는 사이 단은숙이 격앙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모든 사람이 네 삼촌이 바람피우고 사생아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다른 사모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겠어!”고은서는 지금 이 상황이 피곤했다.단순히 고국성 개인의 문제였다면 협박을 당하든 망신을 당하든 신
곽승재는 오랫동안 저자세로 나왔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고은서의 태도를 보고 조금 속상했다.고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아무리 고치겠다고 해도 본성은 여전히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사람이야. 지금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사라지거나 소위 말하는 호감이 식어버리면 결국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곽승재의 잘생긴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네 말은 내가 그동안 해온 모든 행동이 전부 네가 돌아오게 하려는 연기였다는 뜻이야?”“난 그저 사실을 얘기하는 거야. 당신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있었고 원하는 건 다 가졌지. 한때 당신한테 그렇게 매달렸던 내가 이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이러는 걸 수도 있잖아. 오늘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앞으로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누군가에게 계속 감시당하는 기분 썩 좋지 않거든.”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그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고은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치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듯했다.고은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겉으로 보기엔 고은서가 은혜도 모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그녀를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기색조차 없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곽현수처럼 사람을 시켜 감시하지 않으면 그녀의 상황을 제때 알 수도 없었고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두 사람은 몇십 초간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러던 중 곽승재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속도를 줄인 운전기사는 병원에 도착했음을 알렸다.“차 돌려서 본사로 가죠.”막 차 문을 열려던 고은서는 싸늘하게 기사를 향해 명령하는 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었다.“너 많이 다쳤...”“거짓말이야.”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무표정하게 답했다.그녀는 말문이 막혔다.“어디로 데려다줄까?”고은서는 이미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디딘 상태였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기사 불러서 알아서 갈게.”말을 마친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