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고은서는 이미 떠난 뒤였다.“곽 대표님, 사모님께서는 택시를 타고 먼저 가셨습니다.”기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깨물다가 기사에게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자고 했다.현관에서 고은서의 신발을 본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은서의 방문은 꽉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곽승재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다음 날, 곽승재는 헬스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이미숙은 아침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그는 식탁 앞에 가서 앉아 위층을 힐끗 보며 말했다.“깨워서 아침 먹으라고 해요.”이미숙이 깍듯이 대답했다.“도련님, 사모님은 이미 외출하셨습니다.”외출했다고?그는 어제 일부러 고은서에게 냉정해질 시간을 주었고 오늘 아침 그녀에게 무슨 상황인지 물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아침 일찍 외출했다니.“어디로 간 거예요?”이미숙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아침도 드시지 않고 나가셨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이미숙이 말을 보탰다.곽승재는 눈썹을 치켜세웠다.“알겠어요. 볼일 보세요.”이미숙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곽승재는 주민기에게 연락했다.“어제 백유미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 조사해 봐요.”어젯밤 고은서의 반응은 너무 이상했다.비록 사과하라고 했을 때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긴 했었다.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백유미를 보자 원수라도 본 듯이 군 걸까?곽승재는 자신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고은서가 백유미를 목 졸라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반응한 걸까?...고은서는 차를 타고 민시후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화 속에서 그가 알려준 병실에 도착했다.민시후가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침실, 간호실뿐만 아니라 응접실도 있었고 응접실 안에는 초대형 TV, 정수기, 가죽 소파가 있었다.호텔 스위트룸에 비견
민시후는 일부러 뜸을 들다가 말했다.“당신과 협력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저를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겨우 한 번 본 여자가 갑자기 그와 협력하자고 한다. 그것도 라이벌의 아내가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서 역시 그를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만약 저희 목표가 일치한다고 하면요?”“네? 고은서 씨 목표도 곽승재를 무너뜨리는 건가요?”민시후는 또 흥미가 생겼다.“곽승재의 다른 사업은 모르겠지만 판주 투자은행은 철저히 쓰러뜨릴 거예요.”판주 투자은행은 백유미가 책임졌었다.전생에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고은서는 자신이 백유미와 싸우지 않는다고 해도 백유미가 절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백유미와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전생에 겪었던 모든 것들을 되갚아줄 것이다.“제가 듣기로 고은서 씨는 곽승재 씨를 몹시 사랑한다면서요? 몇 년이나 짝사랑한 끝에 겨우 결혼했는데 왜 갑자기 그와 척을 진다는 거죠?”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확실히 그녀는 곽승재와 정말 대립해야 할지 망설였었다.그러나 어젯밤 곽승재에게 이혼 후 백유미와 만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 또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전생에 백유미가 정신병원에까지 손을 써서 고은서를 괴롭히게 놔둔 곽승재는 공범이었다.“민시후 씨, 전 오늘 성의를 가지고 찾아온 겁니다.”고은서가 말했다.“200억이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대로 민시후 씨 손에 들어갈 거예요. 전 그 뒤로 투자은행 업무만 책임지고 민시후 씨의 영업 기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봐도 민시후 씨가 손해볼 일은 없죠. 혹시 민시후 씨는 이게 곽승재가 파놓은 함정일까 봐 저랑 협력할 배짱이 없는 겁니까?”“제 승부욕을 자극하시네요. 재밌군요!”민시후는 흥미를 느꼈다.“고은서 씨, 전 우리의 협력에 관심이 매우 많아요. 그러면 고은서 씨가 명운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
고은서가 이메일을 열었을 때 안에는 전에 그녀가 이력서를 넣었던 회사에서 답장이 와 있었다.그녀는 대학 시절 금융 투자분석사 자격증을 땄었고 그로 인해 투자회사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다.두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고, 다른 두 회사는 그녀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력이 없었기에 월급이 다른 투자자들보다는 조금 낮았다.고은서는 그 회사들에 간단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전에 그녀는 회사에 다니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민시후와 협력하기로 했으니 당분간은 다른 회사로 갈 수 없었다.답장을 보낸 뒤 고은서는 명운 자료를 열었다.명운은 최근 몇 년 동안 비교적 빠르게 발전한 고량주 양조장으로 오랜 역사와 무형 문화 유산이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다.고은서가 기억하기론 전생에 명운은 PE를 통해 상장한 뒤 시가총액이 빠르게 상승하여 이로 인해 판주 투자은행이 큰돈을 벌었었다.좋은 프로젝트를 따고 싶은 회사는 많았다.민시후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금이 많고 통도 큰 GS 그룹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생에 민시후도 아마 경쟁에 참여했지만 패배했을 것이다.고은서는 당시 곽승재에게만 정신이 팔렸었기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은 없다.지금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얻으려면 판주보다 더 유리한 가격을 제시해야 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가치를 넘으면 안 되었다.전생에 명운이 상장한 사실은 많은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기사에 판주의 투자 금액과 지분 비율이 적혀 있었다.그러나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단지 참고용으로만 써야 했고 구체적인 것은 실제 상황에 따라 분석하고 작성해야 했다.고은서는 열심히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저녁 무렵, 곽승재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이미숙은 그를 보고 살짝 놀랐다.“도련님, 돌아오셨어요? 저녁을 드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이미숙은 최근 곽승재가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좀 잦아졌다고 생각했다.전에는 일
곽승재는 그녀가 그날의 일로 화가 나서 이혼을 제안한 것이라고 오해했다.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고은서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그날이 우리의 5주년 기념일인 거 알고 있었잖아. 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왜 유미 씨랑 밥 먹으러 간 거야?”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나한테는 평소랑 다를 것 없었어.”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기념일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모든 건 고은서의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했다.“언젠가는 봐주겠지 하는 마음 하나로 기다렸던 내가 바보네.”고은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그걸 듣지 못한 곽승재는 줄곧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며 고은서를 바라봤고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가다듬었다.“이렇게 말다툼할 기분 아니거든? 이혼은 진심이야.”아직도 이혼으로 왈가왈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다.“고은서, 이혼하는 걸 제멋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고은서는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왜? 하루라도 빨리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 아니었나? 그러면 여사친이랑 당당하게 만날 수 있잖아.”곽승재는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가 매우 언짢았다.“이혼할지 말지는 나한테 달려있어. 할머니를 내세워서 결혼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혼? 헛소리 그만해.”“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네가 날 괴롭힌 만큼 나도 똑같이 돌려줄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드디어 미쳤네.”고은서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할머니 생신까지 30일 남았어. 그날이 지나면 무조건 이혼할 거야.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거든.”“고은서, 꿈 깨.”곽승재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너 사모님 되는 거 좋아했잖아. 그럼 내가 질릴 때까지 버티고 있으라고.”말을 마친 그는 젓가락을 뿌리치고 식탁을 떠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쳤냐?”고은서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고은서는 예전에도 종종 쇼핑을 즐겼지만, 오늘처럼 미친 적은 없었다.큰 자극을 받은 게 틀림없다.그녀는 웃으며 되물었다.“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여?”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엄청.”고은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지금 제정신이고, 무슨 일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그들은 남성복 코너에 도착했다.박지연은 정성스레 넥타이와 옷을 고르며 물었다.“은서야, 그러지 말고 승재 씨 것도 좀 골라봐.”고은서는 단칼에 거절했다.“됐어.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이야.”화가 잔뜩 났음에도 걱정하지 말라는 그녀의 모습에 박지연은 할말을 잃었다.“이렇게 더럽히면 어떡해요? 대여할 때 분명히 그 어떤 얼룩도 용납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요.”그때 맞은편의 브랜드 정장 샵에서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훤칠한 키에 미소년처럼 생긴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판매원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행사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혹시 드라이클리닝 가능한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비용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이걸 어떻게 드라이 클리닝해요!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고급 원단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옷이라고요. 세탁하면 값어치가 떨어지니까 당연히 그쪽이 정가로 사야죠.”남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세탁 비용은 제가 많이 지불할게요.”“안 됩니다.”“그 옷 얼마예요? 제가 살게요.”고은서는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판매원과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판매원은 양손 가득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고선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손님, 이 정장은 이번 가을 최신 상품이고 가격은 5,500만입니다.”고은서는 블랙 카드를 건넸다.“비밀번호 없어요.”판매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재빨리 다가가 카드를 받았다.청초하게 생긴 남자는 고개를 돌려 고은서를 바라보더니 고마움에
순간 후회가 밀려온 주민기다.기분이 안 좋은 듯 하루 종일 정색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젯밤 새벽까지 야근한 게 떠올랐다.이런 타이밍이 고은서 얘기를 꺼내면 독이 되지 않을까?곽승재는 짜증이 가득했다.“귀찮게 하지 말고 할 말 없으면 나가요.”주민기는 곽승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건넸고 그는 곁눈질로 힐끔 화면을 보았다.그 위에는 백화점에서 쇼핑한 카드 결제 내역들로 꽉 찼다.수십만 원부터 수십억까지 가격대는 다양했고 전부 여자들이 좋아하는 쥬얼리나 명품 옷과 가방이다.띵!때마침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xx 남성 정장 샵에서 고객님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5,500만 원을 소비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오시기를 기대합니다.]주민기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으나 문자를 보고 나서 곽승재의 표정이 풀린 것 같았다.비록 곽승재의 옷장에 절대 볼 수 없는 저렴한 가격대의 옷이지만 옆에서 최선을 다해 아부를 떨었다.“사모님은 쇼핑하러 가서도 대표님 생각뿐인가 봐요. 이렇게 옷까지 사시다니 정말 배려심이 많은 분이네요.”역시나 예상대로 곽승재의 표정은 한결 좋아졌다.하지만 여전히 싸늘한 분위기를 유지했다.“전 이런 걸 바란 적 없어요.”주민기는 뭔가 떠오른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대표님, 어제 늦게까지 야근한 데다가 오늘도 하루 종일 바빴으니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시는 건 어떨까요?”곽승재는 피곤한 듯 몸을 쭉 뻗었다.“아줌마한테 기운 돋우는 차 한잔을 준비해달라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고은서가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5시가 되었다.박지연이 떠난 후 불현듯 기분 전환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용실에 가서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했다.그녀는 거울 속 자기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신이 났다.“사모님, 도련님은 서재에 계십니다.”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미숙이 다가와서 말했다.‘웬일로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거지? 설마 카드 긁은 것 때문에 화내려고 온 건가? 아니다, 차라리 잘됐어.
고은서가 타이어로 애를 먹고 있던 그때, 귓가에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이미 차 옆으로 다가왔다.비록 그녀는 이 상황이 조금 창피했지만 이런 일로 토라질 만큼 유치한 사람은 아니었다.고은서는 입을 삐쭉 내민 채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을 내어줬다.차에 앉은 곽승재는 여유롭게 핸들을 돌리면서 페달을 밟았고 후진하는 동시에 오른쪽 타이어가 흙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이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운전석에서 내려왔다.“계속해.”고은서는 다시 입을 삐죽거리며 운전석에 올라탔고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곽승재가 조수석에 앉았다.“뭐 하는 거야? 갑자기 왜 앉아?”눈살을 찌푸린 채 묻는 고은서의 모습에도 곽승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되레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머리는 이게 뭐야?”고은서는 어깨까지 오는 길이의 히피펌을 했다.“내 머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뭔 상관이래.”순간 곽승재는 표정이 어두워졌다.“할말 있어? 없으면 내려.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명령하듯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곽승재는 꾹 참고 안전벨트를 맸다.“운전 연습한다며? 멀뚱멀뚱 가만히 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곽승재는 비아냥거렸다.“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구덩이에 빠져서 혼자 낑낑대냐?”“날이 어두워서 안 보였던 것뿐이야.”“밝은 대낮에만 운전할 거야? 나중에 네가 운전하는 곳마다 조명이 비칠 것 같아?”“그건...”반박하기도 전에 곽승재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네 뒤치다꺼리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얼른 연습해.”지난번의 일은 확실히 그녀의 잘못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고은서는 전방을 주시한 채 페달을 밟았다.비록 수시로 조언하는 그의 모습이 꼴불견이지만 그래도 옆에서 가르쳐 준 덕분에 확실히 전보다 능숙해졌다.이제 직진과 유턴은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익었다.“힘들어. 다음에 연습하자.”힘든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벽에 부딪힌 듯한 소리였다.집에 있는 사람은 이미숙과 곽승재뿐인데 주정뱅이가 나타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철컥!방문이 열리자 곽승재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한껏 달아오른 새빨간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그는 눈마저 빨갛게 충혈되었다.뭔가 위험을 직감한 고은서는 곧바로 노트북을 닫았고 사람을 부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술 마셨어?”그녀는 침착하게 물으며 아무 내색 없이 방문을 열었다.“아줌...”아줌마라는 세글자가 나오기도 전에 입술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곽승재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갑자기...”고은서는 너무 놀라서 밀어내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오히려 그녀를 더 힘껏 끌어안고 키스했다.그의 몸은 매우 뜨거웠고 발버둥 칠 공간마저 주지 않은 채 빈틈없이 고은서를 품에 껴안았다. 곧이어 벽으로 밀어 세우더니 마치 그녀의 모든 숨결을 빼앗아 가듯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고은서는 주먹으로 그를 때리려고 했지만, 두 손 전부 잡힌 탓에 꼼짝달싹 못 했다.늘 그렇듯 남녀의 힘 차이는 현저하다. 고은서는 몸이 완전히 짓눌려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러서야 끙끙대며 애원했다.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곽승재는 멈출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뭔가 자극을 받은 듯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아!”고은서의 비명에 곽승재는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숨 고를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마치 목을 물려는 듯 다가갔다.“아줌마!”소리를 들은 이미숙이 부랴부랴 위층으로 올라왔다.그러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그들의 애매한 자세를 보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줌마, 도와...”“내려가요.”곽승재는 고은서의 입을 막고선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고은서가 많이 걱정되었지만, 일개 도우미가 젊은 부부의 사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건 주제넘은 행동이라고 판단되어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다.“이거 놔!”고은서는 그가 한눈판 틈
고은서도 절친한 친구로서 초대 명단에 포함되었다.저녁 무렵, 육현석이 차를 몰고 그녀들을 데리러 왔다.평소보다 더 격식 있는 차림을 한 육현석을 보고 고은서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육현석, 안 지 꽤 오래됐는데 이렇게 정식적인 복장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육현석은 박지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어쨌든 여자 친구의 친구를 처음 만나는 자리니까 이미지 신경 써서 좋은 인상 남겨야지.”고은서는 이전까지 육현석이 놀고먹는 것만 좋아하고 일에 관심 없는 부유한 집 자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곽승재와 사이가 좋았기에 전생에 그녀는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지만 육현석은 항상 그녀를 피했다.그러나 환생하고 나서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자 오히려 육현석이 그녀와 곽승재의 사이를 돕기 위해 많은 조언을 해줬다.그래서 고은서에게 육현석은 EQ가 뛰어나고 여성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하지만 육현석이 박지연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자신이 편견이 있었음을 느꼈다.육현석은 박지연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의 모든 행동은 EQ가 아닌 마음을 따른 결과였다.“너는 항상 멋졌어. 아름 언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박지연이 육현석을 위로했다.“지연아, 너도 항상 이뻐.”육현석도 칭찬으로 답했다.“그만 좀 해! 여기 아직 사람 있잖아.”고은서가 닭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난 그냥 혼자 운전해서 갈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다가 정말 닭이 되겠어.”박지연이 가볍게 헛기침했다.“그만하고 같이 가자.”육현석이 신사답게 두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아가씨들, 타시죠.”도아름과의 약속 장소는 해성에서 특색있는 한식당이었다.도착 후 박지연은 도아름에게 정식으로 육현석을 소개했다.육현석은 예의 바르게 도아름과 악수하며 선물을 건넸다.“나는? 왜 나는 선물이 없어?”박지연이 얼른 육현석을 감쌌다.“두 사람은 자주 만나면서 무슨 선물이야.”고은서가 불만을 터트렸다.“박지연 씨, 지금
모진 말로 밀어내려 했음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는 민시후의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감동했다.그만큼 민시후가 감정을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고은서는 그가 가족과의 갈등을 일으킬까 봐 걱정되었다.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이어 남은 가족들까지 멀어지는 걸 고은서는 보고 싶지 않았다.민시현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면 두 형제간의 다툼은 불가피할 것이다.그래서 고은서는 결국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민시후, 네 형이 나를 찾아온 건 맞아. 하지만 나한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오늘 너한테 얘기한 건 모두 내 결정이야. 예전에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쫓아다녔는지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아. 내 결정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를 강요할 수는 없어.”민시후는 고은서의 말을 이해했다.민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기사 보낼 테니 타고 가.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래다주진 못하겠다.”말을 마친 민시후는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뭐 하려는지 바로 눈치채고 외쳤다.“민시후, 형 찾으러 가지 마. 내 결정은 그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어.”하지만 민시후는 대답 없이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은서는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민시현의 번호가 없었던 고은서는 고민 끝에 송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서 씨?”송민준은 약간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민시현을 찾으러 갈 수도 있다고 하며 상황을 설명했다.“송민준 씨, 민시현 씨한테 민시후 좀 막을 수는 없는지 연락 좀 해주세요.”송민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연락드릴게요. 소식 있으면 알려드리겠습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송민준은 약속대로 먼저 연락을 해왔다.“어제 시후는 아버지한테 불려서 북성으로 갔어요. 오늘도 해성으로 돌아오지는 못할 거예요. 은서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가 겉으로는 시후한테 엄한 듯해 보여도 속으로는 많
민시후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미소 지었다.“늘 생각해 온 일이야. 다만 ZY에서 프로젝트를 몇 개 더 완성하고 경험과 자금을 충분히 쌓은 후에 말하려고 했어.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명운도 상장을 앞두고 있고 제인 제약 계약도 체결되었잖아. 내 손에 새로운 프로젝트로 없으니 준비를 시작해도 될 것 같아.”“잘됐네. 마침 백씨 가문 산업 중에 금융 관련 사업도 있었으니 이번 인수 절차가 끝나면 네가 이어받아서 함께 운영하면 되겠다.”민시후가 제안했으나 고은서는 정중히 거절했다.“백씨 가문 산업은 ZY 그룹 프로젝트야. 내가 혼자 독점하는 건 아닌 것 같아.”“백씨 가문을 파산시킬 수 있었던 건 네 덕이야. 난 그냥 인수를 도와주려고 한 거지 ZY 그룹에 합병시킬 생각은 없었어.”그 말에 고은서는 약간 감동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ZY 그룹에서 손을 댔으니 당연히 가져가야지.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비율에 따른 수익만 나눠줘.”고은서의 단호한 태도에 민시후는 한발 물러서며 인수가 완료된 후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이로써 두 사람은 잠정적으로 합의를 보았다.“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 게 이것 때문이야?”이때 강바람이 불어와 물결이 일렁였다.고은서는 반짝이는 강 건너편의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민시후, 앞으로 한동안 많이 바빠질 거야. 그래서 일 외의 것에 신경 쓸 시간은 없을 것 같아.”“그래서?”민시후가 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고은서가 시선을 돌려 민시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답했다.“그래서 이전에 약속했던 건 지키지 못할 것 같아.”“잠시만이라는 거야? 아니면 이대로 끝이야?”민시후가 묻자 고은서가 잠시 멈칫하다 답했다.“이대로 끝내자. 우리 다시 친구 해.”“고은서, 며칠 전만 해도 나를 믿는다고,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민시후의 목소리에서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다.고은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고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지 않고 되물었다.“내가 무슨 일을 숨기겠어.”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그럼 곽승재가 왜 계약 체결 현장에 안 왔는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판주 투자은행이 이번 계약에 끼어든 건 곽승재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민시후도 이 점을 못마땅해하며 신경 쓰고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달래길 바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 내가 곽승재를 생각하고 있다고 쳐.”고은서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고은서, 너!”민시후는 예상대로 화를 냈다.“왜 화를 내? 네가 먼저 얘기 꺼낸 거잖아.”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말문이 막혔다.고은서는 끝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런 대답 듣기 싫으면서 왜 먼저 말을 꺼내는 거야? 말하고 나서 스스로 감당도 못 하면서 자업자득 아니야?”민시후는 고은서가 농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얼굴을 잡고 마구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민시후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은서야, 나 화난 거 아니야. 그냥 네가 곽승재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과거가 부러울 뿐이야.”‘그게 부러워할 만한 일인가?’고은서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과거는 많지만 아름다운 건 없었어.”고은서는 모든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들을 털어내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생각하고 있던 건 곽승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마침 웨이터가 음식을 내오자 고은서가 다시 말했다.“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먹자.”대화 이후 고은서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민시후는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알고 싶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음식은 정교하고 맛있었고 강변 야경은 아름다웠다.두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웨이터가 후식으로 디저트를 가져오자 고은서는 얼른 한입 베어 물었다.달콤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맛이었다.“은서야, 나한테 할
멀지 않은 곳에서 민시후는 제인 제약의 담당자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송민아는 다시 참지 못하고 물었다.“며칠 전까지는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더니 오늘은 자신만만하네. 며칠 전 있었던 일은 용서한 거야?”고은서가 답했다.“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민시후는 원래 누명을 썼던 거니까.”송민아는 그 말을 듣고 장난스레 물었다.“고은서, 민시후랑 만나지 몇 달도 안 됐으면서 벌써 그렇게 믿는 거야?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네. 예전 같았으면 오빠와 가까워지려는 여자들한테 사람을 보내 협박하거나 돈을 줘서 쫓아냈을 거야. 만약 그때 내가 그날처럼 자극적인 장면을 목격했다면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도 안 돼.”고은서는 송민아의 말을 듣고 가슴이 약간 찌릿했다.송민아가 민시후에게 보였던 모습은 예전에 곽승재를 대하던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송민아, 너 정말 민시후를 많이 좋아하는 구나.”“야, 그 말 좀 이상하다? 예전엔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좋아한 거지 지금은 아니야. 나 싫다는 사람 나도 싫어.”송민아가 확신에 차 말했다.“맞아. 네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민시후 손해지.”고은서가 웃으며 동조했다.“뭐가 그렇게 재밌어?”민시후가 다가오며 사랑이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송민아는 눈치껏 자리를 피했고 고은서는 농담 섞인 말투로 답했다.“송민아가 널 포기한 건 네 손해라고 얘기하고 있었어.”민시후는 즉각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또 그 얘기가 나오는 건데? 몇 번을 말해. 나는 민아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품은 적이 없다니까? 그리고 송민아가 나를 포기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날 포기한다면 그건 정말 큰 손해일 것 같아.”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농담을 받아치는 대신 말했다.“민시후, T 국에서 내가 너한테 밥 두 번 사기로 했던 거 기억나? 아직 한 번이 남았잖아. 오늘 채울까?”“기억력 좋네. 난 네가 벌써 잊었을 줄 알았지.”“제인 제약과 일 마무리되면 바로 출발할까?”“그렇게
민시현은 본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시후는 집안의 막내에요. 어머니가 생전에 특별히 귀여워하셨죠. 그 결과 시후는 어릴 때부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며 규칙을 따르지 않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민시현은 느긋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시후는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세상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래서 은서 씨가 이혼하지 않았음에도 제멋대로 행동하여 은서 씨 결혼에 문제를 일으켰죠. 그건 저희 가문 잘못입니다. 우리가 시후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으니까요.”민시현은 민시후를 나무라는 듯 보였지만 고은서는 그 말속에 자신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음을 느꼈다.결혼 생활 중 민시후와 얽히며 아이까지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와 이혼한 고은서의 행동은 다른 사람이 보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다행히 당시 두 사람의 기사는 빠르게 막았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지는 않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은서 씨 명성이 시후 때문에 손상될 뻔했습니다.”고은서는 민시현의 말에서 기사를 막은 것에 그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를 이용해 신속히 이혼하고 해외로 나가 아이를 낳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민시후와 함께 호텔에 가던 모습이 노출될 뻔했고 결국 아이도 잃고 말았다.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이기에 고은서는 더 이상 이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민시현 씨, 이전 일들은 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와 민시후는 언제나 떳떳했습니다. 민시후는 항상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결코 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아요.”민시현은 미소를 띠며 믿는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은서 씨가 시후를 그렇게 감싸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서 씨를 무시하려는 뜻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고은서는 반박하지 못했다.지금까지 그녀는 민시후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았으니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고마워, 승준 씨.”...다음 날 고은서는 MQ에 들렀다.여시은이 맞춤 주문한 향수가 모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여시은은 직접 상품을 수령하고 잔금을 지불했다.그녀는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며 고은서와 유성준 그리고 관계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최근 MQ 업무량이 급증하여 유성준이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고은서가 여시은과 함께 식사하러 나섰다.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은 집들이 파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고은서에게 사과했다.그녀는 자신이 고용한 가사도우미들은 모두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며 그렇게 쉽게 매수당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고은서는 이 일이 여시은과 무관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 여시은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게 굴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맞춤 향수를 제작하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붙잡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여시은은 집주인으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 곁에서 있으며 자리를 지켰다.‘서로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닌데 여시은이 정말 나를 중요하게 여기나?’“은서 씨, 민시후 씨 언제 시간 되시는지 한번 봐주세요. 꼭 식사 자리를 마련해서 정중히 사과드리고 싶어요.”여시은이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사실 시은 씨랑은 상관없는 일이니 굳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그러나 여시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아니에요. 저희 집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제가 책임져야죠.”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그럼 민시후한테 물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좋아요. 연락 기다릴게요.”여시은과 식사를 마친 고은서가 ZY 그룹으로 향하는 길에 송민준에게서 연락이 왔다.고은서는 조금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송민준은 그녀에게 찻집에서 만나자고 하며 누군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그 말에 고은서는 곧 누가 그녀를 찾고 있는지 짐작했다.곽승재가 준 자료에 따르면 민시현은 송민준을 통해 그 여자를 찾았다고 했다.
지난번에 이미 명확히 온승준의 마음을 거절했었기에 박지연은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런 말을 하지 마. 우리 사이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 당신이 나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좋아한다는 감정보다는 나한테 익숙해져서 그래. 다른 사람과 새롭게 맞춰가는 게 더 귀찮고 번거로울 테니까.”온승준은 본능적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사실 박지연이 곁에 있는 게 익숙해져 다른 사람을 찾기 싫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게다가 박지연은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이혼 후 당신이 부적절한 행동을 많이 해서 나한테 많은 폐를 끼쳤어. 앞으로는 주의 좀 해줘. 당신 때문에 현석 씨가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해.”그 말을 들은 온승준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박지연이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녀는 늘 상대방을 위해 모든 걸 배려하고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온승준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그 문제의 원인이 될 날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승준 씨, 나도 당신한테 사과할 게 있어.”박지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예전에 당신한테 결혼을 제안했을 때 당신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먼저 물어봐야 했어. 유혜린 씨가 남자 친구를 사귄다는 사실에 자극받아 나랑 급하게 결혼하는 줄 알았다면 나는 절대로 그 결혼 하지 않았을 거야.”박지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2년 넘는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유혜린 씨도 돌아왔고 아직 당신한테 마음이 남아 있으니 앞으로 행복하길 바라.”“그 소식에 자극받아서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온승준은 드디어 말할 기회를 찾았다.“당시 유 닥터랑 헤어지고 나서 우리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어. 유 닥터한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고. 만약 L 국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유 닥터를 기억조차 못 했을 거야. 당신과 결혼한 건 정말로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이야. 당신의 밝음과 용기가 참 매력적이었어.”박지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사
의논 끝에 이 임무는 온승준이 담당한 인턴에서 맡겨졌다.그녀는 온승준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온승준은 오늘도 야근 중이었다.그는 사무실에서 진단서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는데 퇴근 후 쉬러 가야 했을 인턴이 그를 다시 찾아왔다.망설이며 말하려다 마는 표정을 하는 설민희를 보고 펜을 쥐고 있던 온승준이 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나요?”설민희는 헛기침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용감히 완수하기로 했다.그녀는 단톡방의 한 사진을 온승준에게 열어 보여주며 용기 내 말했다.“온 선생님, 외과 간호사님한테 들었는데 수간호사 박지연 님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대요.”갑자기 들은 소식에 충격이라도 받은 건지 아니면 사진을 보고 자극을 받은 건지 온승준 손에 들려있던 펜촉이 힘에 눌려 부러졌다.설민희는 숨을 죽이며 조금 전까지 평온하던 온승준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멍해진 모습에 눈치만 살폈다.온승준은 이미 넋이 나간 채 자신이 들은 사실과 본 사진을 부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설민희는 대충 답을 알겠다는 듯 급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한편 박지연은 육현석과 사귀기로 했다는 사실을 고은서에게 알렸다.고은서는 몹시 놀랐지만 그보다 더 기뻐하며 진심으로 축하해줬다.고은서와 잠시 장난을 주고받은 후 박지연은 전화를 끊었다.조금 전 육현석이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인스타에 올릴 거라며 사진을 찍자고 고집부리던 행동을 떠올리자 박지연은 마음이 달콤해졌다.박지연은 사랑 앞에서는 항상 용감했다.그녀도 육현석에게 호감이 있었기에 용감히 그 마음에 응해보기로 했다.만약 서로 맞지 않으면 헤어지면 될 일이고 적어도 용기 내 함께 해 봤으니 후회는 없을 것이었다.인생은 짧다.지나간 과거에 얽매어 자신을 괴롭힐 필요도 과거의 실패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잠시 생각을 하던 박지연은 육현석과 손을 맞잡을 사진을 꺼내 보며 이번엔 자신도 당당히 인스타에 공개하기로 했다.사진과 함께 올릴 멘트를 작성하던 중 옆에 있던 간호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