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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 비긴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449 챕터

제1화

“죽고 싶으면 곱게 죽지, 투신자살은 왜 한대?”혐오감이 잔뜩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들 곱게 죽고 싶지 않...”고은서는 문득 곽승재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그녀가 대체 언제 투신자살했단 말이지?“사모님, 드디어 깼군요.”이때, 도우미 이미숙이 물과 약을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머리가 아프시죠? 의사 선생님께서 가벼운 뇌진탕 증상이 있다고 해서 약 처방해주셨는데 지금 드실래요?”고은서는 널찍한 침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숙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까먹었다.실내 인테리어를 봐서는 예전의 곽씨 일가 별장 같았다.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2년이 넘도록 발길이 끓긴 곳이지 않은가?설마 곽승재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단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칼로 심장을 찌른 이상 설령 살아있더라도 수술실에 실려 갔을 테니까.고은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가슴을 확인해봤는데 멀쩡하기만 했다.그리고 머리와 손목에는 의료용 거즈가 둘둘 감겨 있었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나중에 투신자살하고 싶으면 더 높은 곳에 올라가. 고작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으니까.”싸늘한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방을 나섰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기 몸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2년 넘게 정신병원에 갇혀 있으면서 안색은 이미 초췌하다 못해 창백했고, 살이 쏙 빠져 장작처럼 삐쩍 말랐지만 지금은 피부가 뽀얗고 매끈하니 탄력까지 넘쳤다.몸과 팔뚝에도 간병인과 환자들 때문에 난 상처와 멍을 찾아볼 수 없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화가 난 나머지 말을 좀 심하게 했을 뿐이에요.”이미숙은 그녀가 상처받은 줄 알고 조심조심 위로했다.“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이따가 도련님과 잘 얘기...”“아줌마! 오늘 며칠이죠?”고은서는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이미숙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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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고은서, 이제 그만해! 대체 언제까지 소란 피울 거야?”곽승재가 버럭 화를 내며 타박하자 고은서는 말없이 냉소를 지었다.자기 와이프를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남보다 더 못할 수 있단 말인가?“승재야, 화내지 마.”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유미가 먼저 말을 꺼내더니 설명을 보탰다.“은서 씨, 승재가 오늘 내 생일 파티에 참여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야. 사실 우리 아빠가 오랜만에 보고 싶다고 해서 가볍게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집으로 초대했는데 이렇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어. 게다가 은서 씨가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걸려 서둘러 해명하러 달려왔거든. 다 내 탓이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사과하는 백유미의 모습은 진정성이 가득했다.고은서는 3년 전에도 백유미가 집까지 찾아와서 똑같은 변명을 했던 거로 기억했다.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침실이었다.당시 백유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란히 서 있는 선남선녀를 보자 열이 확 올랐다.이내 악을 쓰며 백유미에게 꺼지라고 했고, 탁자에 놓인 꽃병을 집어던지기도 했다.꽃병에 머리를 부딪힌 백유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곽승재는 노발대발하면서 곧바로 백유미를 안고 병원으로 데려가 몇 날 며칠이나 돌봐주었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화를 돋우는 말이었지만, 이제 고은서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심지어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짓는 여유까지 되찾았다.“유미 씨, 멀리서 해명하러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애썼네. 나 화 안 났어. 아버님께서 승재를 식사에 초대하셨다며? 얼른 가 봐. 연장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백유미는 고은서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살짝 당황했다.곽승재도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상황이란 말이지?자신에게 혼났는데 울고불고 떠들기는커녕 백유미와 밥 먹으러 가라고 흔쾌히 보내주기까지 하다니?분명 2시간 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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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녀를 가장 아끼는 분이지만, 전생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반드시 곁에서 효도하여 외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은서는 몸이 만신창이라 당분간 외할아버지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결국 설렘과 간절함을 애써 억누르고 며칠 후에 찾아뵙기로 약속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고은서는 테라스에 앉아 지난 일들을 회상했다.18살이 되던 해, 사랑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사랑에 빠진 소녀는 체면 불고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남자에게 대시했지만, 끝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대학 졸업할 때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곽승재의 할머니 전미자가 둘이 혼인신고 하도록 적극 추진한 덕분에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비록 곽승재는 대놓고 그녀를 싫어했지만, 언젠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는 이름다운 환상을 줄곧 품고 있었다.결혼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나자 백유미가 귀국해서 곽승재의 회사에 입사했다.두 사람 사이의 남다른 인연은 그녀에게 어쩌면 곽승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결국 점점 초조해지면서 떼를 부리기 시작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확인받고 싶었다.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투신자살로 협박하는 바람에 곽승재과 백유미의 사이는 갈수록 돈독해졌고, 곽승재가 집에 돌아오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절망에 빠진 그녀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미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곽승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출국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하지만 출국 전날, 뜻하지 않게 집에 강도가 들어 불까지 지핀 탓에 백유미는 자칫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 심지어 범인을 붙잡았는데 다름 아닌 그녀가 시켰다고 딱 잡아뗐다.이 사건은 곽승재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입이 아프게 변명해봤자 그녀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대쪽 같이 밀어붙였다.결국 외할아버지의 설득과 전미자의 도움을 받아 옥살이는 면하게 하겠다는 대답을 어렵게 받아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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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고은서가 몸을 홱 돌렸다.“누가 버리라고 했죠? 당장 주워요.”프런트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어차피 대표님은 볼 생각도 없을 텐데 굳이 헛수고할 필요 있어요? 그동안 챙겨온 물건도 다 버리라고 했거든요.”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일하는 게 힘들까 봐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음식이며, 옷이며,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마저 가져다주었다.게다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처럼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은 진심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꼴이라니.어떻게 고작 프런트 직원이 감히 그녀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냐는 말이다.고은서는 싸늘한 시선으로 프런트 직원을 노려보았다.“대표님이 보든 말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물건을 함부로 버리죠? 얼른 챙기지 못해요?”여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알겠어요, 다시 챙기면 되잖아요. 목을 매서 겨우 대표님을 만난 주제에 어디서 사모님 행세를 하는 건지, 참.”“무슨 일이죠?”그녀에게 사과를 요구하려던 찰나,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내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의 비서 주민기가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주민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색 프리미엄 맞춤 정장 차림의 곽승재였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비록 안색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지만 비주얼 자체가 워낙 훈훈한지라 오히려 남성미를 한층 더 부각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그를 만날 때마다 고은서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이름을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입도 벙긋하기 싫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주민기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득의양양한 얼굴로 잽싸게 대답하는 예전과 달리 고은서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곽승재가 인정한 아내가 아니었다.남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처세술에 불과했으니까.“무슨 일이지?”고은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곽승재는 프런트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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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펜 이리 줘요.”“대표님, 거래처 분들이 계약 체결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주민기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는 GS 그룹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중요한 협력 건이었는데, 자칫 고은서 때문에 망칠 뻔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무시하고 주민기와 함께 급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곽승재!”고은서가 뒤쫓아갔다.“저 여자 끌어내.”곽승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고은서를 에워쌌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워커홀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바빠지기 시작하면 오늘은 이혼하기 글렀기에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내일 오전 9시, 구청에서 봐!”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떠났다.대체 간다는 건가? 만다는 건가?하루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곽승재라면 무조건 올 텐데...이런 생각에 고은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곧이어 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메일에 접속했다.메일함에는 여러 투자은행에서 보낸 채용 제의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처럼 바로 메일을 삭제하는 대신 하나씩 클릭해 봤다.그러나 전부 기한이 지난 메일로 심지어 난다긴다하는 금융권 엘리트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투자은행도 있었다.정작 그녀는 쓰레기 같은 곽승재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차지 않았는가?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지경이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서 절대로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삶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했다.몇 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서 내일이면 곽승재와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이내 PC 전원을 끄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으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다.한창 열심히 짐을 싸고 있을 때 이미숙이 걸어 들어왔다.“사모님, 짐을 왜 싸는 거죠? 여행 가시게요?”이미숙은 곽승재가 임시 고용한 도우미로 혹시라도 두 사람의 상황을 전미자에게 보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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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괜찮아.”고은서가 거절했다.“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푹!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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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이제 네 차례야.”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디 가!”고운서가 버럭 외쳤다.“사인 안 해?”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네가 꾸민 짓이지?”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고은서, 우리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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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고은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전생에 무려 8년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건 달랑 이혼협의서 한 장, 그리고 백유미와 결혼했다는 소식뿐이지 않은가?그런 남자가 어찌 단 몇 주 만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냐는 말이다.“할머니는 만약 승재가 우리 은서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이혼하고 싶냐는 뜻이야.”전미자가 다시 물었다.노부인의 잔뜩 기대하는 눈빛 속에서도 고은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번 생에는 어떻든 간에 곽승재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제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지긋지긋했고, 곽승재와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삶을 맞이할 생각이다....본가 거실을 나서자 고은서는 싸늘한 얼굴로 차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이혼한다고 생난리를 쳤는데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지 않은가?어쩌면 곽승재는 그녀와 전미자가 짜고 치는 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에 차에 타면 추궁과 모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결국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택시 타고 가려고 했다.“타!”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곽승재는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괜찮아, 어차피 가는 길도 아닌데.”고은서도 매섭게 쏘아 붙었다.이혼을 못 해서 짜증이 난 건 매한가지라 스스로 제 무덤을 파서 곽승재의 화풀이를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곽승재의 말투에 협박이 담겨 있었다.“소리는 왜 질러?! 그렇게 능력 있으면 나한테 따지는 시간에 이혼 수속이나 하지?”고은서가 화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이런 말투로 그를 대한 적은 처음이고, 심지어 반박까지 하다니?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이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의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는 곽승재를 발견했고, 잽싸게 도망치려는 찰나 이미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이거 놔!”결국 다급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그의 팔뚝을 콱 물었다.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목덜미를 잡고 차에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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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화면에 뜬 연락처를 보자 곽승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고, 잽싸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승재야, 판주 미팅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언제 와?”고요한 차 안에서 백유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곽승재의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은서의 귀에 들렸다.곽승재는 최근에 판주 투자은행을 인수했고, 백유미가 이사직을 담당하고 있다.전생에 백유미는 판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커리어 여왕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당시 납득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GS 그룹에 입사해서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지만 곽승재의 조롱만 받았다.“네가 출근한다고?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고 있어? 이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유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할애했는데 고작 호언장담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비록 유미는 너보다 배경이 빵빵하거나 가진 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항상 노력하고 사리에 밝기도 해. 어디 너처럼 갑질밖에 모르는 줄 알아?”...“그래, 일단 알겠어.”곽승재가 전화를 끊자 고은서도 회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했다.전생에서 봤던 곽상재의 눈코입이 점차 현생과 오버랩되면서 별안간 차 안의 공기마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실장님, 저 앞에 세워주실래요? 여기서 내릴게요.”“사모님, 여기는 택시도 안 잡힐 텐데 대표님 먼저 회사로 모셔다드리고 댁까지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 여기서 세워주세요.”고은서는 단 1초라도 곽승재와 같은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주민기는 차를 세우는 대신 백미러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안달 난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의 속에서 또다시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차 세워요. 여기서 내려줘요.”주민기는 그의 말에 따라 길가에 차를 댔다.고은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았다.“고은서, 감히 우리 할머니를 한 번만 더 건드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곽승재의 경고에도 그녀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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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준수한 외모의 남자는 살짝 건방진 느낌마저 들었고, 흰색 캐쥬얼 정장을 입고 있었다.만약 보통 사람이 이런 옷차림이라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들겠지만, 그는 되레 귀티와 여유가 흘러넘쳐 이미지와 찰떡이었다.어딘가 낯익은 얼굴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도련님.”기사가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불렀다.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시간 지체해서 미안해요. 제가 100% 보상해드릴게요.”고은서가 진심으로 사과했다.이에 남자는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차량 수리비를 제외하고 정신적 보상 그리고 손실비도 있죠. 지금 몇조가 넘는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지체되었으니까 모두 책임지세요.”상대방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고은서는 피식 웃기만 했다.“저기요, 외모도 멀쩡하고 돈도 좀 있어 보이는데 사기로 먹고사는 거였어요?”어쩐지 사진 찍고 증거를 남기는 기사의 모습이 절대로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남자는 화내기는커녕 여전히 여유만만했다.“내가 뭐로 먹고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만약 그쪽이 배상할 능력이 없다면 차주한테 하라고 해요.”그제야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타깃이 곽승재라는 것을 눈치챘다.한편, 머릿속으로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떠올랐다. 그는 바로 곽승재의 최대 라이벌인 민시후였다.전생에 민시후와 직접 만난 적은 없었고, 정신병원에 있을 때 경제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자주 접했다.당시 그는 곽승재에 버금가는 몸값을 자랑했고, 그가 설립한 투자회사는 GS 그룹을 바짝 추격하는 존재로 거듭났다.“곽 대표 와이프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당신 차를 끌고 나와 내 차를 박았는데 어떻게 할 건가?”고은서가 전생을 회상하고 있을 때 민시후는 이미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남편이랑 한마디 해요.”민시후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비록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여보세요’라고 말했다.“혼자 차 끌고 나갔어?”짜증이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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