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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곽승재는 그를 무시했다.아래층에서는 주민기가 마무리하고 뒤따라 술집을 나섰다.고은서는 서둘러 곽승재의 손을 뿌리쳤고 곽승재는 표정이 살짝 바뀌더니 차갑게 말했다.“네 차 키 기사한테 주고 넌 내 차 타고 가.”고은서는 의심스러웠다.“내가 차 갖고 온 걸 어떻게 알았어?”곽승재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장님도 아니고 이렇게 눈에 띄는 색깔과 번호판을 어떻게 못 봐!”“...”고은서의 마세라티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 선물 중 하나였다.색상은 화끈한 붉은색에 번호판은 그녀의 이름 약자와 생일을 조합해 만들었다.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곽승재의 말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다.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렸고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키를 건네며 알아서 조수석에 앉았다.곽승재가 시동을 걸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GS그룹에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니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전에 네가 왜 민시후 술집에 오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지 말해.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어?”곽승재는 지난번 사고 전에도 고은서에게 이 질문을 했었고 그때 고은서는 아직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했었다. 이젠 친해졌다는 건가?당연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판주를 상대하려고 민시후와 함께 손잡으려고 했다는 걸 알려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동업이 성사됐다면 곽승재의 화를 돋우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둘 사이가 틀어졌고 민시후가 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기에 자존심 때문이라도 말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제때 구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슨 사이든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 없어.”인정이나 다름없는 말에 곽승재는 화가 치밀었다.“고은서, 너 유부녀라는 거 잊지 마.”고은서는 비웃으며 반격했다.“그럼 당신은 백유미네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샤워할 때 유부남인 거 안 잊었어?”대체 어쩌다 샤워했다는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늘 백유미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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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곽승재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으며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내 아내의 신분이 짓밟히는 게 아니면 내가 네 일에 이렇게 신경 썼겠어?”그럴 줄 알았다.2층으로 올라갈 때 그의 눈빛에서 보였던 그 걱정도 같은 이유였겠지.예전처럼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또다시 곽승재에게 끌려다닐 테니까.고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내 일에 참견하기 싫으면 빨리 이혼 서류에 사인해. 내가 말했잖아, 사인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너...”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고 고은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곽승재도 차에서 내려 시커멓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운전석에 밀어 넣고 안전띠까지 매주었다.“예원 별장으로 바로 돌아가. 내 차에 위치추적기가 있으니까 말 안 들으면 할아버지 모셔 올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미친놈.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엑셀을 밟았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소파에 쓰러졌다.그녀의 직감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었다.무의식적으로 민시후의 방탕함이 피상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현실이 다시 머리를 강타했다.협업은 뒤로 하고 지금 문제는 도아름에게 서인수에 대해 말할지 말지였다.같은 여자로서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부부 사이의 문제고, 그녀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또한 서인수가 한 모든 일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걸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의견을 묻기 위해 박지연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그녀가 오늘 이미 L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은서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곽승재는 판주 투자은행 사무실에 도착했다.“대표의 불량한 품행은 향후 상장에 큰 리스크인데 그 정도 상식도 없습니까?”곽승재가 차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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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고 심지어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그런 반응에 백유미는 당황하며 울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서 부드럽게 사과를 건넸다.“승재야, 어쨌든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벌이든 욕이든 내가 다 감수할게.”이 정도 설명이면 백유미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곽승재는 더 이상 문제를 추궁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서인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모함이 아니라면 투자 계획을 철회해.”백유미가 서둘러 답했다.“걱정 마, 이미 사람들을 시켜서 확인하는 중이니까. 정말 문제가 있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만둘 거야.”곽승재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미간을 어루만졌다.“별일 없으면 나가.”백유미는 곽승재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슬쩍 떠보았다.“승재야, 너무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머리 좀 주물러줄까? 아빠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마사지를 해드렸는데 아빠가 나 마사지 잘한다고 칭찬했어.”“됐어.” 곽승재는 거절했다.“기사한테 나 데리러 오라고 해.”백유미는 부드럽고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하룻밤 지내는 게 어때, 어차피 내일 아침에 서인수 관련해서 회의해야 하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있어?”곽승재는 여전히 거절했다.“아니.”고은서가 또 무슨 말썽을 피우면 더 이상 감당할 기운이 없다.백유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곽승재는 최근 들어 고은서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예전 같았으면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고은서에게 절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곽승재는 항상 자신의 일에 엄격했고 명운처럼 중요한 프로젝트를 절대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오늘 그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일을 뒤로 미루고 며칠 전 성아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쳐 망신을 준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일부러 그녀를 피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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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이미숙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그가 감기 걸리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던 찰나, 곽승재가 오늘 밤 자신을 도와준 게 떠올랐다.배은망덕할 수는 없으니 고은서는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분명 도련님이 올라와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침대를 정리하는 줄 알고 이미숙은 안도하며 기다렸다.곧 다시 나온 고은서의 손에 얇은 담요가 들려 있었다.“여기요.”이미숙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사모님, 도련님 부축해서 올라오게 하시지 않고요? 이런 날 소파에서 자면 추워서 병 걸리기 쉬워요.”“아픈 고양이도 아니고 어디 그렇게 쉽게 얼어 죽겠어요?”고은서는 얇은 담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여기 담요 있으니까 가서 덮어주면 돼요.”고마운 건 이 정도면 되지.이미숙은 망설이며 담요를 받아 들었다. “사모님, 이거 의자에 깔고 발로 밟던 거 아니에요?” 고은서는 집에서 맨발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별다른 할 일이 없을 때면 의자를 밟고 뛰어다니거나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해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두었던 것이다.“괜찮아요, 안 더러워요. 여기에 여분의 담요도 없어요.”이미숙은 침대와 의자에 놓인 예쁘고 깨끗한 여러 개의 담요를 슬쩍 바라보았다.“이건 다 내가 아끼는 건데 어떻게 곽승재한테 줘요!”고은서가 품에 껴안았다.“하지만...”“없어요, 없어” 고은서가 재촉했다.“이게 제일 나아요. 아주머니, 빨리 가져가세요!”“...”...다음 날 점심때, GS 그룹대표 사무실.판주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주민기는 사장님의 미간에서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었다.“대표님, 몸이 안 좋으시면 일단 쉬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저 부르세요.”곽승재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육현석의 모습이 보였다.그를 본 육현석이 오바스럽게 달려왔다.“형, 드디어 만났네! 어제 하루 종일, 오늘 오전 내내 기다렸어. 정말 대통령보다 더 바쁘네!”육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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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고은서가 좀 귀찮게 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닌데, 그러면 안 되지 않아?” 육현석이 묻자 곽승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나가.”마침 비서가 차를 가져왔고 육현석이 아부하며 그에게 건넸다.“형, 차 마시고 목 좀 축여.”곽승재는 마침 목이 불편해 물을 받아 마셨다.“헤헤, 형은 내가 왜 왔는지 알잖아!”비서가 나가자 육현석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이렇게 말했다.“걸프 프로젝트 우리 집 영감탱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형이 기각하면 난 몇 달, 아니 올해 내내 자유가 없어. 분명 회사로 끌려가서 공부시킬 거라고!”“마침 내 귀도 조용할 수 있겠네.”“형 이러면 안 돼.”육현석이 울먹이며 징징거렸다.“학교 다닐 때 형이랑 민시후가 싸우면 누가 달려가서 도와줬어?”“발차기 한 번에 피 줄줄 흘리면 쓰러진 너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질뻔했을 때?”“... 그래도 형에 대한 내 의리는 인정해 줘야지!”곽승재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다시 상세하게 제안서 만들어. 직접 만들고 직접 설명해.”육현석이 울상을 지었다.“내가 어떻게 해!”“그럼 네 의리 챙겨서 아버지 회사로 가서 일해.”“해, 바로 할게!”멘탈 하나는 갑이었던 육현석은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형,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바람피우면 안 돼. 아니면 내가 고은서한테 내가 말해서 형 빨리 포기하게 만들까?”곽승재는 육현석을 노려보았다.“당장 나가,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는 내 사무실에 발도 들이지 마.”‘이 형 기분이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해?’고은서를 언급할 때마다 화를 낸다는 건 분명 떨쳐내지 못해 짜증이 난 거겠지.“알았어, 형. 바로 갈게.”육현석은 사무실을 나서기 전 이렇게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난 항상 곁에서 형 편이 되어줄 테니까!”곽승재는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쓸 기운이 없어 눈을 감았다....고은서는 정오 무렵 낮잠에서 깨어났다.어젯밤 도아름에게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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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박지연은 카메라 앞에 서 있고, 그 뒤로 그녀의 남편이 손에 든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다정한 사진이라기엔 아쉬웠지만 박지연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고은서는 달콤한 휴가를 방해할 수 없어 고민 끝에 도아름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 오후에 시간 되시면 같이 스파나 가실래요? 명운 쪽의 일을 재촉하려는 게 아니라 새로 오픈한 샵이 아주 좋다고 들어서 같이 가보고 싶어서요.]고은서는 직접 말하기에는 너무 건방진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어서 서인수에 대한 도아름의 태도를 살펴본 다음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잠시 후 도아름이 답장을 보냈다.[그래요.]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아름과 약속을 잡고 샵 주소를 보냈다.그때 이미숙이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아주머니, 어차피 둘밖에 없는데 같이 먹어요.”이미숙은 고은서가 전보다 훨씬 소탈하고 친근하게 대하니 자연스레 거절하지 않았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어제 밤새 소파에서 주무셨어요. 아침에 나가보니 기침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는데 감기 걸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미숙이 말하자 고은서는 짧게 대꾸할 뿐 맛있게 밥을 먹었다.“...” 왜 사모님이 더 이상 도련님에게 애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이미숙이 덧붙였다.“사모님, 도련님께 전화해서 일찍 오시라고 하는 건 어때요? 오전에 여사님께서 사모님보고 도련님 약 드시는 거 감독하라고 하셨어요.”곽승재가 약 먹는 걸 감독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아주머니, 약은 다 됐어요?”고은서가 묻자 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불에 끓이고 있으니까 도련님 오시면 바로 드실 수 있어요.”“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약은 제때 마셔야 효과가 있죠. 아주머니, 한 그릇 챙겨주세요. 제가 곽승재한테 가져다줄게요.”샵은 GS그룹과 같은 방향이었고 아직 도아름을 만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고은서는 가는 길에 곽승재의 표정을 즐길 생각이었다.어쩌면 체면이 깎인 곽승재가 분노에 휩싸여 이혼 서류에 사인할지도 모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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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예전처럼 짜증을 내는 대신 진지하게 물었다.“곽승재랑 친하죠, 그럼 그쪽이 설득해 볼래요?”육현석이 오만하게 말했다.“난 당연히 형이랑 친하지만, 그쪽 좋아하라고 형 설득할 수는 없어요.”“아니요, 그 사람 이혼 서류에 사인하도록 설득하자는 얘기예요.”“난 절대… 엥?”육현석은 고은서가 계속 애원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지금 뭐라고 한 거지?“이혼 서류? 형이 그쪽이랑 이혼해요?”“정확히 제가 그 사람과 이혼하려는 거예요.”고은서는 보온병을 육현석의 손에 밀어주며 정정하고는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 사본을 꺼내며 말했다.“어떻게든 사인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건, 난...” 육현석은 충격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이게 무슨 상황인지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이혼을 원하는 사람이 왜 고은서가 된 걸까, 왜 그녀는 이혼 서류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걸까!그때 육현석은 갑자기 고은서에게서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번뜩 정신이 들었다!형의 사무실에 있던 담요에서 똑같은 냄새가 났다.희미했지만 그는 같은 향기라고 확신했다.그렇다면 형이 주우라고 한 담요도 고은서 것이고, 전날 형이 심적으로 괴로워했던 것도 고은서 때문이라고?“전 못 받아요!”고은서가 이혼 합의서까지 자신의 품에 밀어 넣으려는 것을 본 육현석은 불에 덴 듯 펄쩍 뛰며 피했다.“전 그쪽 도와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잖아요!”그렇게 말한 뒤 육현석은 고은서에게 보온병을 다시 돌려주며 그대로 도망쳤다.“...”합의서를 가방에 넣고 고은서는 계속해서 로비로 걸어갔다.프런트 직원은 여느 때처럼 따뜻하게 그녀를 맞이했고 안내하는 사람 없이 그녀는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프런트에서 알렸는지 주민기는 그녀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고 곽승재가 안쪽 사무실에서 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곽승재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마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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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정말 내려놨다면서 한쪽으로는 날 걱정하고 한쪽으로는 이혼하려는 건가, 어른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곽승재가 묻자 고은서는 진심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곽승재는 여전히 이혼하겠단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그녀를 아는 그 누구도 믿지 않겠지, 다 바보같이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잘못이다.이혼에 있어 외삼촌과 외숙모의 동의를 받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고씨 가문의 사업은 전부 그들이 손에 쥐고 있었고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난리를 부릴 수가 없었다.그녀가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질 정도로 힘이 세지 않는 한 그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빨리 돈도 벌고 사업을 해야 했다.“당신이 말한 걱정이라는 게 이거야?”고은서는 보온병을 가리켰다.“당신한테 주려고 가져온 건 맞아. 할머니가 당신 약 먹는 걸 감독하라고 하셨거든.”또다시 지난번처럼 약을 탔다고 생각한 곽승재는 머리가 아팠다.“저리 치워, 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건 안 돼, 꼭 마셔야 해.”그녀가 보온병을 열자 강한 허브 냄새가 풍겼다.“할머니가 유명한 한의사한테서 특별히 구해 온 신장 강장 한약이야.”고은서는 신장을 튼튼하게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다 마실 때까지 지켜보다가 할머니께 영상 찍어 보내야 해.”고은서의 말투에서 곽승재는 무언가를 떠올렸고, 곧바로 잘생긴 얼굴이 가라앉았다.“버려.”고은서는 다소 아쉬웠다.“할머니의 성의를 이대로 버릴 거야?”곽승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고은서, 또 말썽 피우면 내가 강장제가 필요한지 아닌지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속에 담긴 협박을 알아차리고 보온병을 내려놓으면서 다정한 척 말했다.“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면 안 되지. 괜찮아, 여기 둘 테니까 사람 없을 때 몰래 마셔도 돼.”곽승재의 서늘한 눈빛이 그녀에게 향하자 고은서는 재빨리 사무실 문으로 물러섰다.“누가 자길 걱정한다고, 과대망상인가!”말을 마친 고은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턱을 들고 당당하게 나갔다.주민기는 고은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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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도아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감정의 깊이는 결혼한 시간과 상관이 없죠.”왠지 오늘따라 도아름의 기분이 이상해 보이는 건 고은서의 착각일까.지나치게 평온했다, 폭풍전야처럼.혹시 서인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걸까, 아니면 단순히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걸까?“은서 씨, 오늘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따로 있죠?”도아름은 차를 마시더니 살짝 주름이 잡힌 눈매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요.”고은서는 도아름의 관찰력에 감탄하면서도 부인하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주제넘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도아름이 살짝 웃었다.“그 사람이 약접 잡혀서 협박당하는 거 알고 있죠?”고은서는 깜짝 놀랐다.“그럼 사모님도 알고 계셨어요?”“아름 언니라고 불러요.”도아름의 얼굴이 한층 차가워졌다.“이젠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도아름은 어젯밤에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서인수가 그런 더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아름 언니, 그럼 어떻게 하실 거예요?”고은서는 그들이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고, 가정과 자식, 이익 관계가 걸려 있어 이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배우자의 바람을 알면서도 참는 것을 선택한다.특히 도아름처럼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곪아 터진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도아름은 차를 마시며 자신의 결정을 숨김없이 말했다.“전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것도 못 참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한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고은서는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이렇듯 확실한 도아름의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잘 생각해 보신 거예요? 명운은 곧 상장을 앞두고 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으면 안 돼요. 안 그러면 모든 걸 잃으니까요.”현실적인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한순간의 분노 때문에 힘들게 쌓아온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나보고 참으라고 설득하는 건가요?” 도아름이 되묻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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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회사가 지난 몇 년 동안 침체기였잖아요. 곽씨 가문의 이름을 빌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더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 거예요.”외삼촌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 잔뜩 들떠서 이전 임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는 등 막무가내로 권력을 휘둘러 해를 거듭할수록 MQ의 발전은 악화됐다.운 좋게도 남아있는 할아버지는 명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리를 지키고 있기에 회사가 무너지지 않았다.그러나 할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고 기력도 딸려 삼촌에게 훈계를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지난해 그녀가 곽승재와 결혼하고 외삼촌이 곽씨 가문의 사돈이라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협업을 따내서야 겨우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곽씨 가문에 계속 의존하는 건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면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그래도 전문가들이라 우리에게 가져다줄 이익도 많고 삼촌보다 훨씬 잘할 텐데 더 좋지 않겠어요?”고준석은 이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은서 네가 나이를 먹더니 철이 들었구나. 사업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어.”“할아버지, 놀리지 마세요.” 고은서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할아버지, 제 제안 한번 고려해 주세요.”고준석이 손녀의 간청을 뿌리칠 리 없었다.“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며칠 후에 외삼촌과 상의해 볼게.”“역시 할아버지가 제일 현명해요! 할아버지, 삼촌을 꼭 설득하셔야 해요!”고준석은 고은서의 이마를 가볍게 톡 두드렸다.“말해 봐, 웬일로 집안 사업에 신경을 쓰는 거야. 넌 곽승재 그놈만 바라보고 있잖아.”“할아버지도 이제 저 다 컸다고 하지 않았어요?”고은서는 고준석의 팔짱을 끼고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할아버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아끼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요.”전생에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할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고, 자연스레 삼촌도 더 이상 회사를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죽음을 택하기 전 MQ는 이미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고은서는 할아버지의 피땀 눈물인 MQ가 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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