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으며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내 아내의 신분이 짓밟히는 게 아니면 내가 네 일에 이렇게 신경 썼겠어?”그럴 줄 알았다.2층으로 올라갈 때 그의 눈빛에서 보였던 그 걱정도 같은 이유였겠지.예전처럼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또다시 곽승재에게 끌려다닐 테니까.고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내 일에 참견하기 싫으면 빨리 이혼 서류에 사인해. 내가 말했잖아, 사인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너...”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고 고은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곽승재도 차에서 내려 시커멓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운전석에 밀어 넣고 안전띠까지 매주었다.“예원 별장으로 바로 돌아가. 내 차에 위치추적기가 있으니까 말 안 들으면 할아버지 모셔 올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미친놈.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엑셀을 밟았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소파에 쓰러졌다.그녀의 직감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었다.무의식적으로 민시후의 방탕함이 피상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현실이 다시 머리를 강타했다.협업은 뒤로 하고 지금 문제는 도아름에게 서인수에 대해 말할지 말지였다.같은 여자로서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부부 사이의 문제고, 그녀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또한 서인수가 한 모든 일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걸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의견을 묻기 위해 박지연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그녀가 오늘 이미 L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은서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곽승재는 판주 투자은행 사무실에 도착했다.“대표의 불량한 품행은 향후 상장에 큰 리스크인데 그 정도 상식도 없습니까?”곽승재가 차가운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고 심지어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그런 반응에 백유미는 당황하며 울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서 부드럽게 사과를 건넸다.“승재야, 어쨌든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벌이든 욕이든 내가 다 감수할게.”이 정도 설명이면 백유미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곽승재는 더 이상 문제를 추궁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서인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모함이 아니라면 투자 계획을 철회해.”백유미가 서둘러 답했다.“걱정 마, 이미 사람들을 시켜서 확인하는 중이니까. 정말 문제가 있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만둘 거야.”곽승재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미간을 어루만졌다.“별일 없으면 나가.”백유미는 곽승재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슬쩍 떠보았다.“승재야, 너무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머리 좀 주물러줄까? 아빠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마사지를 해드렸는데 아빠가 나 마사지 잘한다고 칭찬했어.”“됐어.” 곽승재는 거절했다.“기사한테 나 데리러 오라고 해.”백유미는 부드럽고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하룻밤 지내는 게 어때, 어차피 내일 아침에 서인수 관련해서 회의해야 하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있어?”곽승재는 여전히 거절했다.“아니.”고은서가 또 무슨 말썽을 피우면 더 이상 감당할 기운이 없다.백유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곽승재는 최근 들어 고은서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예전 같았으면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고은서에게 절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곽승재는 항상 자신의 일에 엄격했고 명운처럼 중요한 프로젝트를 절대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오늘 그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일을 뒤로 미루고 며칠 전 성아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쳐 망신을 준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일부러 그녀를 피하기까지 했다
이미숙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그가 감기 걸리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던 찰나, 곽승재가 오늘 밤 자신을 도와준 게 떠올랐다.배은망덕할 수는 없으니 고은서는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분명 도련님이 올라와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침대를 정리하는 줄 알고 이미숙은 안도하며 기다렸다.곧 다시 나온 고은서의 손에 얇은 담요가 들려 있었다.“여기요.”이미숙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사모님, 도련님 부축해서 올라오게 하시지 않고요? 이런 날 소파에서 자면 추워서 병 걸리기 쉬워요.”“아픈 고양이도 아니고 어디 그렇게 쉽게 얼어 죽겠어요?”고은서는 얇은 담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여기 담요 있으니까 가서 덮어주면 돼요.”고마운 건 이 정도면 되지.이미숙은 망설이며 담요를 받아 들었다. “사모님, 이거 의자에 깔고 발로 밟던 거 아니에요?” 고은서는 집에서 맨발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별다른 할 일이 없을 때면 의자를 밟고 뛰어다니거나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해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두었던 것이다.“괜찮아요, 안 더러워요. 여기에 여분의 담요도 없어요.”이미숙은 침대와 의자에 놓인 예쁘고 깨끗한 여러 개의 담요를 슬쩍 바라보았다.“이건 다 내가 아끼는 건데 어떻게 곽승재한테 줘요!”고은서가 품에 껴안았다.“하지만...”“없어요, 없어” 고은서가 재촉했다.“이게 제일 나아요. 아주머니, 빨리 가져가세요!”“...”...다음 날 점심때, GS 그룹대표 사무실.판주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주민기는 사장님의 미간에서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었다.“대표님, 몸이 안 좋으시면 일단 쉬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저 부르세요.”곽승재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육현석의 모습이 보였다.그를 본 육현석이 오바스럽게 달려왔다.“형, 드디어 만났네! 어제 하루 종일, 오늘 오전 내내 기다렸어. 정말 대통령보다 더 바쁘네!”육현석
“고은서가 좀 귀찮게 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닌데, 그러면 안 되지 않아?” 육현석이 묻자 곽승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나가.”마침 비서가 차를 가져왔고 육현석이 아부하며 그에게 건넸다.“형, 차 마시고 목 좀 축여.”곽승재는 마침 목이 불편해 물을 받아 마셨다.“헤헤, 형은 내가 왜 왔는지 알잖아!”비서가 나가자 육현석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이렇게 말했다.“걸프 프로젝트 우리 집 영감탱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형이 기각하면 난 몇 달, 아니 올해 내내 자유가 없어. 분명 회사로 끌려가서 공부시킬 거라고!”“마침 내 귀도 조용할 수 있겠네.”“형 이러면 안 돼.”육현석이 울먹이며 징징거렸다.“학교 다닐 때 형이랑 민시후가 싸우면 누가 달려가서 도와줬어?”“발차기 한 번에 피 줄줄 흘리면 쓰러진 너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질뻔했을 때?”“... 그래도 형에 대한 내 의리는 인정해 줘야지!”곽승재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다시 상세하게 제안서 만들어. 직접 만들고 직접 설명해.”육현석이 울상을 지었다.“내가 어떻게 해!”“그럼 네 의리 챙겨서 아버지 회사로 가서 일해.”“해, 바로 할게!”멘탈 하나는 갑이었던 육현석은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형,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바람피우면 안 돼. 아니면 내가 고은서한테 내가 말해서 형 빨리 포기하게 만들까?”곽승재는 육현석을 노려보았다.“당장 나가,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는 내 사무실에 발도 들이지 마.”‘이 형 기분이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해?’고은서를 언급할 때마다 화를 낸다는 건 분명 떨쳐내지 못해 짜증이 난 거겠지.“알았어, 형. 바로 갈게.”육현석은 사무실을 나서기 전 이렇게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난 항상 곁에서 형 편이 되어줄 테니까!”곽승재는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쓸 기운이 없어 눈을 감았다....고은서는 정오 무렵 낮잠에서 깨어났다.어젯밤 도아름에게 서인
박지연은 카메라 앞에 서 있고, 그 뒤로 그녀의 남편이 손에 든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다정한 사진이라기엔 아쉬웠지만 박지연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고은서는 달콤한 휴가를 방해할 수 없어 고민 끝에 도아름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 오후에 시간 되시면 같이 스파나 가실래요? 명운 쪽의 일을 재촉하려는 게 아니라 새로 오픈한 샵이 아주 좋다고 들어서 같이 가보고 싶어서요.]고은서는 직접 말하기에는 너무 건방진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어서 서인수에 대한 도아름의 태도를 살펴본 다음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잠시 후 도아름이 답장을 보냈다.[그래요.]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아름과 약속을 잡고 샵 주소를 보냈다.그때 이미숙이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아주머니, 어차피 둘밖에 없는데 같이 먹어요.”이미숙은 고은서가 전보다 훨씬 소탈하고 친근하게 대하니 자연스레 거절하지 않았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어제 밤새 소파에서 주무셨어요. 아침에 나가보니 기침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는데 감기 걸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미숙이 말하자 고은서는 짧게 대꾸할 뿐 맛있게 밥을 먹었다.“...” 왜 사모님이 더 이상 도련님에게 애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이미숙이 덧붙였다.“사모님, 도련님께 전화해서 일찍 오시라고 하는 건 어때요? 오전에 여사님께서 사모님보고 도련님 약 드시는 거 감독하라고 하셨어요.”곽승재가 약 먹는 걸 감독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아주머니, 약은 다 됐어요?”고은서가 묻자 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불에 끓이고 있으니까 도련님 오시면 바로 드실 수 있어요.”“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약은 제때 마셔야 효과가 있죠. 아주머니, 한 그릇 챙겨주세요. 제가 곽승재한테 가져다줄게요.”샵은 GS그룹과 같은 방향이었고 아직 도아름을 만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고은서는 가는 길에 곽승재의 표정을 즐길 생각이었다.어쩌면 체면이 깎인 곽승재가 분노에 휩싸여 이혼 서류에 사인할지도 모른
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예전처럼 짜증을 내는 대신 진지하게 물었다.“곽승재랑 친하죠, 그럼 그쪽이 설득해 볼래요?”육현석이 오만하게 말했다.“난 당연히 형이랑 친하지만, 그쪽 좋아하라고 형 설득할 수는 없어요.”“아니요, 그 사람 이혼 서류에 사인하도록 설득하자는 얘기예요.”“난 절대… 엥?”육현석은 고은서가 계속 애원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지금 뭐라고 한 거지?“이혼 서류? 형이 그쪽이랑 이혼해요?”“정확히 제가 그 사람과 이혼하려는 거예요.”고은서는 보온병을 육현석의 손에 밀어주며 정정하고는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 사본을 꺼내며 말했다.“어떻게든 사인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건, 난...” 육현석은 충격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이게 무슨 상황인지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이혼을 원하는 사람이 왜 고은서가 된 걸까, 왜 그녀는 이혼 서류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걸까!그때 육현석은 갑자기 고은서에게서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번뜩 정신이 들었다!형의 사무실에 있던 담요에서 똑같은 냄새가 났다.희미했지만 그는 같은 향기라고 확신했다.그렇다면 형이 주우라고 한 담요도 고은서 것이고, 전날 형이 심적으로 괴로워했던 것도 고은서 때문이라고?“전 못 받아요!”고은서가 이혼 합의서까지 자신의 품에 밀어 넣으려는 것을 본 육현석은 불에 덴 듯 펄쩍 뛰며 피했다.“전 그쪽 도와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잖아요!”그렇게 말한 뒤 육현석은 고은서에게 보온병을 다시 돌려주며 그대로 도망쳤다.“...”합의서를 가방에 넣고 고은서는 계속해서 로비로 걸어갔다.프런트 직원은 여느 때처럼 따뜻하게 그녀를 맞이했고 안내하는 사람 없이 그녀는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프런트에서 알렸는지 주민기는 그녀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고 곽승재가 안쪽 사무실에서 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곽승재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마른
“정말 내려놨다면서 한쪽으로는 날 걱정하고 한쪽으로는 이혼하려는 건가, 어른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곽승재가 묻자 고은서는 진심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곽승재는 여전히 이혼하겠단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그녀를 아는 그 누구도 믿지 않겠지, 다 바보같이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잘못이다.이혼에 있어 외삼촌과 외숙모의 동의를 받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고씨 가문의 사업은 전부 그들이 손에 쥐고 있었고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난리를 부릴 수가 없었다.그녀가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질 정도로 힘이 세지 않는 한 그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빨리 돈도 벌고 사업을 해야 했다.“당신이 말한 걱정이라는 게 이거야?”고은서는 보온병을 가리켰다.“당신한테 주려고 가져온 건 맞아. 할머니가 당신 약 먹는 걸 감독하라고 하셨거든.”또다시 지난번처럼 약을 탔다고 생각한 곽승재는 머리가 아팠다.“저리 치워, 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건 안 돼, 꼭 마셔야 해.”그녀가 보온병을 열자 강한 허브 냄새가 풍겼다.“할머니가 유명한 한의사한테서 특별히 구해 온 신장 강장 한약이야.”고은서는 신장을 튼튼하게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다 마실 때까지 지켜보다가 할머니께 영상 찍어 보내야 해.”고은서의 말투에서 곽승재는 무언가를 떠올렸고, 곧바로 잘생긴 얼굴이 가라앉았다.“버려.”고은서는 다소 아쉬웠다.“할머니의 성의를 이대로 버릴 거야?”곽승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고은서, 또 말썽 피우면 내가 강장제가 필요한지 아닌지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속에 담긴 협박을 알아차리고 보온병을 내려놓으면서 다정한 척 말했다.“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면 안 되지. 괜찮아, 여기 둘 테니까 사람 없을 때 몰래 마셔도 돼.”곽승재의 서늘한 눈빛이 그녀에게 향하자 고은서는 재빨리 사무실 문으로 물러섰다.“누가 자길 걱정한다고, 과대망상인가!”말을 마친 고은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턱을 들고 당당하게 나갔다.주민기는 고은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도아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감정의 깊이는 결혼한 시간과 상관이 없죠.”왠지 오늘따라 도아름의 기분이 이상해 보이는 건 고은서의 착각일까.지나치게 평온했다, 폭풍전야처럼.혹시 서인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걸까, 아니면 단순히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걸까?“은서 씨, 오늘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따로 있죠?”도아름은 차를 마시더니 살짝 주름이 잡힌 눈매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요.”고은서는 도아름의 관찰력에 감탄하면서도 부인하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주제넘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도아름이 살짝 웃었다.“그 사람이 약접 잡혀서 협박당하는 거 알고 있죠?”고은서는 깜짝 놀랐다.“그럼 사모님도 알고 계셨어요?”“아름 언니라고 불러요.”도아름의 얼굴이 한층 차가워졌다.“이젠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도아름은 어젯밤에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서인수가 그런 더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아름 언니, 그럼 어떻게 하실 거예요?”고은서는 그들이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고, 가정과 자식, 이익 관계가 걸려 있어 이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배우자의 바람을 알면서도 참는 것을 선택한다.특히 도아름처럼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곪아 터진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도아름은 차를 마시며 자신의 결정을 숨김없이 말했다.“전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것도 못 참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한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고은서는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이렇듯 확실한 도아름의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잘 생각해 보신 거예요? 명운은 곧 상장을 앞두고 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으면 안 돼요. 안 그러면 모든 걸 잃으니까요.”현실적인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한순간의 분노 때문에 힘들게 쌓아온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나보고 참으라고 설득하는 건가요?” 도아름이 되묻자 고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
“곽승재보다 더 나쁜 놈이잖아!”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백유미가 약물 알레르기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곽승재는 그녀가 다친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었다.하지만 온 닥터는 박지연의 상처를 봤으면서도 그녀를 혼자 병원에 보냈다.“네 시어머니도 너무해! 널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는 거잖아!”고은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자기 아들이 힘들까 봐 다친 며느리를 혼자 병원에 가게 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아들 첫사랑한테는 친절하게 굴면서 며느리한테는 밥하라고 시키는 게 정말 시어머니가 할 짓이야?”이미 화를 냈던 건지 박지연은 오히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시어머니는 항상 날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으셨잖아. 그런 사람이 내가 다쳤다고 해서 신경 쓸 리가 없지.”“더 나쁜 건 온 선생님이야! 네게 다정하지도 그렇다고 네 편을 들어주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너한테 얘기조차 안 하잖아. 이런 생활을 어떻게 견디는 거야!”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지연아, 너도 온 선생님 그냥 차 버려! 우리 둘이 지내면 되잖아. 남자는 필요 없어!”박지연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너도 알잖아. 속상하긴 해도 남편 얼굴만 보면 그래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단지 성격이 차갑고 딴짓 안 한다면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첫사랑이 작정하고 돌아왔잖아. 안 그래도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인데 뭘 더 버티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네가 다친 이 며칠 동안 네 상태에 관해 물어본 적 있어?”“의사잖아.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있으니까 물어봐도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게다가 요즘 학회가 많아서 바쁘거든. 얼굴 마주 볼 시간도 별로 없어.”“결국 물어본 적 없다는 얘기네?”화가 난 고은서가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바빠서 다친 아내 상태를 물어볼 시간은 없으면서 첫사랑이랑 쇼핑하고 커피 마실 시간은 있나 보네.”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말을 밖으로 뱉은 고은서는 곧바로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이미 입 밖으
박지연의 안색이 확연히 어두워졌다.그녀는 팔을 살짝 뒤로 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요리하다가 실수로 데었어.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검진받으러 왔다며? 같이 있어 줄게.”고은서는 직감적으로 박지연과 온 닥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대화하기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기에 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따랐다.고은서는 잘 회복하고 있었다.전에 옥상에서 떨어지며 생긴 부상도 별 탈 없이 회복 중이었다.“아직 밥 안 먹었지? 같이 뭐라도 좀 먹을까?”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도 거절하지 않았다.“식당에 가자. 당직이라서 얼른 가봐야 해.”“그러자.”병원 식당은 환한 조명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곳곳에 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병원 환경 좋네.”고은서가 칭찬하자 박지연이 답했다.“평소에는 이렇게 깔끔하지 않아. GS 그룹에서 병원에 새 건물 몇 개 지어준다며 시찰 나온 사람들이 있어서 환경이 좀 나아진 거야.”‘GS 그룹에서 병원에 새 건물을 지어준다고?’“네 덕일지도 몰라. 너 전에 여기 입원해 있을 때 곽승재가 자주 왔었잖아. 병원 측에서도 그 틈에 후원을 요청하기도 쉬웠겠지.고은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이전에 병원장이 곽승재와 관련된 일은 간섭하지 말라고 했던 지시가 생각났다.‘후원 때문이었네.’박지연이 식판을 두 개 받아 와서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지연아, 이제 말해줄 수 있지 않아? 온 선생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전에 온 선생님께서 해외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같은 병원에 온 거야?”박지연은 부인하지 않았다.그녀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보름 전에 발령받아서 왔어. 전에 오기로 했던 사람이 국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 여자로 교체됐다고 하더라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온 선생님께서 이 사실을 계속 너한테 숨겼던 거야?”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그 사람은 바로 박지연의 남편 온 닥터 였다.온 닥터 옆에는 가녀린 여자 한 명도 함께였다.그 둘은 캐주얼한 차림에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있었는데 어디론가 함께 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지연이가 선생님께서 많이 바쁘시다고 했는데... 발에 불이 날 정도로 바쁘다던 사람이 왜 다른 여자와 카페에 나타난 거지?’고은서는 비록 그 여자를 본 적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으로 고은서는 그 여자가 온 닥터의 첫사랑일 것으로 생각했다.‘지연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어 고은서는 생각을 이어 나갈 겨를 없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 한 장을 찍었다.뒤차의 재촉에 서둘러 출발하면서 고은서는 백미러를 통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이전에 박지연이 온 닥터에게 물었을 때, 그의 첫사랑은 같은 병원으로 발령받지 않았다고 했었다.‘온 선생님께서 거짓말하신 건가? 아니면 내 직감이 틀린 걸까? 평범한 동료나 친구인 걸까?’두 사람은 단지 카페에서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을 뿐 특별히 친밀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후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그녀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지연아, 병원에 있어? 재검진받으러 가려고 하는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병원에 있긴 한데 당직이라 어려울 것 같아.”“요즘 별일 없지?”고은서는 박지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없이 느껴졌다.두 사람은 고은서가 외할아버지 집에 있는 동안 연락한 적이 없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이혼했단 사실도, 요양 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고 그간 있었던 일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평소 박지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어.”고은서는 통화만으로 박지연의 기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만나서 얘기하자.”전화를 끊은 고은서가 병원으로 향했다.박지연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몇몇 간호사들이 고은서를 알아보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지난번
원지훈은 굽히지 않고 손을 뻗어 찻잔을 내팽개쳤다.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고은서는 그를 흘깃 보더니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내 목적이 뭔지 너도 잘 알겠지. 협조해. 이 위기에서 널 구해줄게. 네 삶은 지금보다 더 빛나게 될 거야.”원지훈은 고은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이미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았다.고은서가 웃으며 말했다.“지훈 씨, 똑똑한 사람이잖아. 아니면 백유미도 지훈 씨를 선택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 생각은 안 해봤어? 지금 상태로 고은혜는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야. 물론 회사도 지키기 어렵겠지. 백유미가 지훈 씨가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한 신뢰도 깨져서 앞으로 도움은 기대할 수 없겠지. 정말 이대로 모든 걸 잃고 싶어?”원지훈은 잠시 망설였다.그동안 풍족하게 살며 누렸던 시간이 너무나도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얼마 못 누리고 이 모든 게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하지만 고은서를 믿어도 될까?’고은서는 원지훈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말했다.“지훈 씨, 우리 사이에는 이익 관계가 없잖아. 지훈 씨가 고은혜에게 실질적인 행동을 해서 피해준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내 목표는 오직 백유미뿐이지 지훈 씨랑은 상관없어.”이어 고은서가 말을 이어가며 원지훈을 설득했다.“지훈 씨, 당신은 잃을 게 없어. 이번 프로젝트가 무산되면 당신은 백유미의 버린 패가 될 뿐이야. 나랑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아?”원지훈이 그녀의 말에 흔들렸다.“뭘 원해요?”“걱정하지 마.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고은서가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지금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어. 이틀 동안 시간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이건 선착금이야. 내 제안을 받아들이든 말든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돼.”원지훈은 아직 백유미와 완전히 틀어진 상태가 아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돌아설 가능성도 있었다.하여 고은서는 바로 목적을 밝히는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