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스물 다섯

열여덟, 스물 다섯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By:   봉숭아  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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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정민규를 향한 내 마음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나는 오로지 한 남자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였다. 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결국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 되고 말았다. 몇 년 뒤,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침내 소원대로 그와 결혼했다. 이제 행복한 날만 남았을 거라 믿으며 3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갔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심장을 녹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첫사랑이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생을 돌이켜보니, 남은 거라고는 후회와 좌절뿐이었다. 수능 전으로 환생한 나는 전생에 열광했던 소년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더는 그에게 목매지 않고 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일방적인 사랑은 포기하는 것이 답이었다. 그러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가 어느 날, 인기척이 드문 구석에서 나를 벽에 밀치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고은성, 남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도망가려고? 꿈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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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칠흑처럼 어두운 밤.적막 속에서 정민규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비록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기도 했다.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했고, 호흡마저 흐트러졌으며 그의 움직임은 점점 다급해졌다.결국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민규야...”띠링-귀에 거슬리는 벨소리가 후끈 달아올랐던 방 안의 열기를 단숨에 식혔다.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화면에 뜬 발신인을 확인했다.[세라.]숨이 턱 막혔고, 나도 모르게 패닉에 빠졌다.어둠 속에서 비록 정민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나는 용기를 내어 절박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키스하려고 했다.그러나 정민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피하고는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너머로 나긋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민규야.”곧이어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달빛 아래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그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가슴 속을 가득 채운 행복감이 썰물처럼 밀려났고,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분노와 좌절, 절망만 남았다.마침내 정민규는 전화를 끊었다.딸깍!눈부신 조명이 켜지고 정민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잘생긴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오후에 네가 세라의 전화를 받았어?”비록 의문조였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고, 죄라도 묻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나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그래. 전화를 받았을뿐더러 통화 기록도 삭제했지. 심지어 오늘 귀국 사실을 숨기려고 일부러 너한테 술까지 먹였어.”순순히 인정하자, 정민규의 눈에서 분노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그는 무표정한 얼굴은 더는 상종하기 싫은 듯싶었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정민규!”나는 이불을 움켜쥐고 눈물을 애써 참았다.“우리 결혼기념일에 꼭 전 여친 보러 가야 해?”정민규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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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칠흑처럼 어두운 밤.적막 속에서 정민규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비록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기도 했다.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했고, 호흡마저 흐트러졌으며 그의 움직임은 점점 다급해졌다.결국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민규야...”띠링-귀에 거슬리는 벨소리가 후끈 달아올랐던 방 안의 열기를 단숨에 식혔다.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화면에 뜬 발신인을 확인했다.[세라.]숨이 턱 막혔고, 나도 모르게 패닉에 빠졌다.어둠 속에서 비록 정민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나는 용기를 내어 절박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키스하려고 했다.그러나 정민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피하고는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너머로 나긋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민규야.”곧이어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달빛 아래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그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가슴 속을 가득 채운 행복감이 썰물처럼 밀려났고,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분노와 좌절, 절망만 남았다.마침내 정민규는 전화를 끊었다.딸깍!눈부신 조명이 켜지고 정민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잘생긴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오후에 네가 세라의 전화를 받았어?”비록 의문조였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고, 죄라도 묻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나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그래. 전화를 받았을뿐더러 통화 기록도 삭제했지. 심지어 오늘 귀국 사실을 숨기려고 일부러 너한테 술까지 먹였어.”순순히 인정하자, 정민규의 눈에서 분노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그는 무표정한 얼굴은 더는 상종하기 싫은 듯싶었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정민규!”나는 이불을 움켜쥐고 눈물을 애써 참았다.“우리 결혼기념일에 꼭 전 여친 보러 가야 해?”정민규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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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18살의 나는 공개 고백이 용기의 상징이자 청춘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을 뿐이다.용기와 청춘은 무슨,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 따로 없었다.다행히 아직 고백하기 전이라 만회할 여지가 있었다.어찌 됐든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 이상 정민규와 최대한 거리를 두고 전생의 비극을 재현하지 않기로 다짐했다.나는 심호흡한 다음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대고 하느님에게 맹세하듯이 경건한 태도로 말했다.“맞는 말이야. 내가 저지른 행동에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동안 불편했으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미안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제 잘못을 뉘우친 이상 앞으로 허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학업과 꿈을 이루는 데 집중할게.”정민규는 벙찐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뒤를 돌아 단상에서 내려와 쏜살같이 도망쳤다.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고은성이 정민규를 포기해?”“그럴 리가? 쌀쌀맞은 민규의 태도에 얼마나 많은 여학생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는데 그중에서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은 자가 바로 고은성 아니야? 매번 거절당해도 지치지 않고 계속 열정적으로 대시했잖아. 지난달만 해도 정민규와 같은 대학교에 가겠다고 내기까지 했을걸?”“괜히 큰소리쳤다가 망신당할까 봐 자진 포기하는 것 같은데?”“정민규는 한시름 놓았겠네. 드디어 거머리에서 탈출하게 되어서.”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소년은 허둥지둥 도망가는 가녀린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작 본인은 전혀 기쁘지 않은 듯 잘생긴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교실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때, 책상 위에 있던 손거울에 얼굴이 비쳤다.비록 25살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3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해 눈빛이 생기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불면증에 시달린 탓에 안색이 창백하고 피부가 칙칙했으며 짙은 타크서클을 가리기 위해서는 항상 화장을 두껍게 해야만 했다.하지만 거울 속 어린 소녀의 피부는 뽀얗고 매끈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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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야자 시간에도 정민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진세라도 자리를 비웠다.어차피 수시로 일류 대학교에 합격했을뿐더러 외국에서도 러브콜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기에 사실 수업 들을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매일 같이 학교에 나왔다. 심지어 출국할 기회까지 포기했는데 전부 진세라를 위해서라는 사실은 모두가 뻔했다.텅 빈 두 자리를 보고 있자니 씁쓸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마음도 심란하고 문제를 하도 풀어서 머리가 뒤죽박죽 한 탓에 하교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새엄마를 보는 순간 짜증이 극에 달했다.나는 못 본 척 지나치고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고민욱이 물었다.“은성아, 민규랑 얘기해봤어? 뭐래?”나는 냉소를 지었다.“정민규가 전생에 우리한테 빚이라도 졌어요?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말 한마디에 수백억짜리 계약을 맺겠어요?”고민욱의 안색이 대뜸 어두워지더니 호통치려는 찰나 옆에 있던 김다비가 팔을 끌어당기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아빠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상 그룹과 거래할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는 거지. 요즘 민규랑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참에 식사하자고 집에 초대하는 건 어때?”“아니요.”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그동안 정민규를 하도 귀찮게 해서 절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요? 괜한 기대 하지 마세요.”“부모한테 말투가 그게 뭐니?”“은성아, 아빠가 진짜 화를 내면 어떡하려고 그래? 너한테 조금이라도 더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해주려고 이렇게 고생하시는 거잖아. 설마 회사가 부도나길 바라는 건 아니지?”나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하루빨리 망하는 게 제 소원인데요?”연명 수단으로 이용되는 신세도 이제 지긋지긋했다.“고은성!”그리고 노발대발하는 고민욱을 무시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문을 닫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은행 잔액을 확인했다.나를 낳아준 친엄마는 박혜경인데 초등학교 때 고민욱이 비서인 김다비와 몰래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뿐더러 고작 6개월 터울이라고 했다.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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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정민규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아래로 향한 눈동자 위로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웠다. 게다가 고고한 분위기는 잘생긴 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10년이 넘는 감정은 결코 한순간에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넋을 잃고 떨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인기척을 느낀 듯 정민규는 고개를 돌렸다.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설령 포기했다고 한들 안면박대할 정도는 아닌지라 머쓱한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뭐야? 너도 화장실이 급했어?”어리석은 내 모습이 너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다행히 정민규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똑바로 서서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이리 와.”나는 넌지시 물었다.“무슨 일인데?”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정민규는 표정이 눈에 띄게 불쾌해졌다.그리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이리 오라고.”결국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고 여전히 거리를 유지했다.정민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잠시 후, 의미심장한 얼굴로 손에 든 책가방을 휙 던졌다.나는 무방비 상태에서 자칫 놓칠 뻔했다.‘왜 이렇게 무거워?’“이게 뭔데?”정민규는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였다.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가 다가오자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고 숨이 턱 막히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고은성, 죽을힘을 다해 공부해.”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이를 악물고 말하는 듯싶었다.어리둥절한 나를 뒤로한 채 그는 이미 멀리 떠나갔다.룸에 돌아가자 성지연이 바짝 다가왔다.“이게 뭐야? 누가 생일 선물을 줬어?”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가방을 여는 순간 성지연은 폭소를 터뜨렸다.“맙소사, 시험지를 선물로 주는 기발한 생각은 어떻게 했대? 네가 단성대학교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라나 본데?”결국 머쓱한 웃음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7년 전으로 환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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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한 여학생이 불쑥 끼어들었다.“민규야, 고은성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맨날 세라만 괴롭혀.”진세라의 눈시울이 금세 빨개지더니 울컥하는 표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난 괜찮아. 다만 은성이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정민규는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온몸으로 냉기를 뿜어냈다.순간 공기마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눈이 마주치는 찰나 비록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속으로 비꼬았다.‘진세라 대신 화풀이라도 할 작정인가?’정민규의 시선이 문득 게시판을 향하더니 한참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국어 성적이 왜 이거밖에 안 돼?”진지한 얼굴로 툴툴거리는 모습은 왠지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본격적으로 진세라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하는 건가?나는 발끈한 나머지 냉소를 지으며 반박하려고 했다.하지만 정민규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네. 계속 노력해.”‘뭐지?’가벼운 말투는 마치 오늘의 날씨라도 얘기하는 듯싶었다.결국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미쳤나?’벙쪄 있는 나를 보더니 정민규는 서늘한 목소리로 따끔하게 혼냈다.“정신 똑바로 차리고 시간 남으면 작문 연습 많이 해. 괜히 엉뚱한 데 신경 쓰지 말고.”그리고 남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성큼성큼 멀어져갔다.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복잡미묘했다.고은성을 욕하는 거... 맞겠지?물론 나도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진세라를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어쨌거나 자존심 때문에 청순가련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표정이 일그러지고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 내는 게 티가 날 정도였다.이내 피식 비웃고는 성지연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교실로 돌아와 보니 정민규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책상 위의 문제집을 무심코 뒤적거리다가 눈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전생에 담임 선생님이 주셨던 것과 동일하지 않은가?당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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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정민규뿐만 아니라 이미 은퇴한 정상 그룹 창업자이자 정민규의 할아버지 정한석까지 왜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어떻게 보면 오늘의 연회는 고씨 가문에서 주최했다고 볼 수 있지만 몰락한 귀족과 다름없는 집안인지라 기껏해야 껍데기만 그럴싸한 재벌들과 왕래할 뿐이었다. 그런데 손가락만 까딱해도 조운시를 휘청거리게 하는 정씨 가문 1인자를 대체 무슨 수로 초대했다는 거지?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표정에 짜증이 묻어난 손자와 위엄이 넘치는 반면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할아버지, 그동안 질리도록 많이 봐 왔던 모습이었다.고민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지만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곧이어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옆에 서 있던 김다비가 잽싸게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끌고 갔다.전생에 정한석을 만난 적이 3번에 불과했지만 시작은 항상 트집부터 잡고 모욕하는 것으로 끝냈다.정한석의 전우가 바로 진세라의 할아버지인데 둘은 일찌감치 아이들을 위해 혼사를 정했다. 하지만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 때문에 진세라는 마지못해 출국길에 올랐고 정한석은 나만 언급하면 치를 떨었다.설령 그가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직접 대소변을 받아주고 극진히 보살폈음에도 불구하고 대우는 달라진 게 없었다.어차피 이번 생에 정민규를 포기한 이상 굳이 정씨 가문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회장님, 제 딸 은성이에요.”정한석 앞에서 고민욱은 굽신거리며 아부하기 급급했다.“지난달 15일에 딸이 민규랑 같은 차를 탔는데 밤새 돌아오지 않았더라고요. 다음날에 집에 도착했는데 민규 옷을 입고 있었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지금 뭐 하자는 거지?자기 딸이 정민규와 외박했다고 정한석에게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이렇게 황당할 수가!기껏해야 자식들이 동창이라는 관계를 이용해 눈도장을 찍고 정씨 가문에 빌붙으려는 줄 알았지만 본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딸의 순정까지 모욕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아버지로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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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방정맞으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뒤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정민규는 물론 나상민과 더더욱 엮이기 싫었다.그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대놓고 훑어보았고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소문과 아주 다른데? 찰거머리처럼 정민규한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더니 아까는 누가 봐도 선을 긋기 급급한 모습이잖아.”허리를 갑자기 숙인 탓에 숨결이 얼굴에 고스란히 닿았다.“새로운 수법인가? 밀당하는 거야?”낯선 사람의 접근이 어색한 나머지 나는 무의식중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커다란 손바닥이 어깨를 감쌌다.그리고 뒤로 잡아당기자 익숙한 향기를 풍기는 품에 쏙 안겼다.“저리 꺼져.”정민규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한일자로 꾹 닫힌 입술이 눈에 들어왔고 얼굴에는 짜증 난 기색이 역력했다.대체 왜 화가 난 거지?하지만 품에 안기는 다정한 스킨십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거 놔.”이내 품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서 멀어졌다.정민규는 내가 도망갈 줄 몰랐는지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려던 찰나 진세라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민규야, 생수 한 병 사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고은성? 너도 있었어?”나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몰래 민규를 따라온 거야?”진세라는 우리 둘을 번갈아 살피더니 정민규의 팔을 잡아당기며 천진난만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민규야, 이제 와서 스토킹 당한 거 따져봤자 뭐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 혼자서 밖에 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한데.”비아냥거리는 말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나상민이 싸늘한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어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몰라?”그는 평소에 착하고 다정해 보여도 실제로는 차갑고 야박한 사람이다. 예고도 없이 가면을 벗고 나니 어둡고 매정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마치 한가롭게 햇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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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정민규가 날 찾으러 성지연 집 앞에 와 있다니?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싫어하는 사람을 제 발로 찾아올 리 있겠는가?심지어 무일푼으로 외박까지 했는데 정작 친아빠라는 인간은 연락조차 없는데 말이다.아마도 진세라 대신 사과를 받아내려고 찾아왔을 가능성이 컸다.어젯밤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볼펜과 시험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날 찾아왔다고 해서 만나줘야 한다는 법이 있어? 기다리다 지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방학 전 모의고사에서 내가 예상했던 점수보다 2점이 낮았는데 수능에서 2점 차이면 등수가 얼마나 많이 떨어지는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문제 풀이에 집중했지만 오히려 성지연이 안절부절못했다.나를 몰래 훔쳐보더니 일어나서 물 마시거나 화장실에 들락거리기도 했다.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재빨리 껐는데 결국 참다못해 볼펜과 종이를 단번에 빼앗아 갔다.“고은성! 문제 그만 풀고 솔직한 심정 얘기해줄래?”몇 시간 동안 시험지만 들여다봤더니 눈이 뻑뻑할 지경이다. 마침 볼펜과 종이를 가져간 바람에 겸사겸사 한숨 돌리기로 했다.“뭘?”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여전히 건조하게 느껴졌다.“정민규 말이야.”성지연은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돌리더니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진짜 포기할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으면 못 살았을 정도였잖아.”그녀가 한 말을 속으로 되뇌는 순간 가슴이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물론 정민규밖에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상처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언정 놓아주기 마련이다.이미 목숨까지 건 사랑을 해봤기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진짜 너무 힘들었다.다시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무력감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현실을 자각한 거지.”나는 성지연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마치 얼마 전에 미친 듯이 아이돌만 쫓아다녔던 너처럼, 어느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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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정민규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는데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이게 바로 남자였다.물론 납득은 갔다. 자신을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사람이 자존심을 내팽개칠 정도로 집착하다가 갑자기 싫어한다고 말하면 나 같아도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뜬금없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또한 남자친구라도 되냐는 질문에 무의식중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사실은 가벼운 테스트에 불과했는데 말이다.나는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그거 봐? 대답 못하겠지? 더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농담 같아? 그동안 밀당하느라 연기한 게 아니거든? 그리고 정민규!”이내 진지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제 놓아줄 테니까 의심 안 해도 돼. 앞으로 졸업까지 딱 5일 남았어. 졸업하고 나면 우린 남남이 되겠지. 세상이 참 좁다고 하지만 일부러 마주치려고 애쓰지 않은 이상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고개를 돌리고 떠나려고 했다.“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진 거야?”걸음을 옮기자마자 정민규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몸을 돌려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그리고 어깨를 움켜쥐며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혹시 나상민이니?”이내 웃음을 터뜨렸고,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경멸이 가득했다.“오늘 아침 나씨 가문에서 너희 집에 프로젝트를 하나 넘겨줬다고 하던데.”그러고 나서 나를 놓아주더니 쌩하니 돌아섰다.“고은성, 너희 일가족은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우리 집에 빌붙는 데 실패하니까 바로 나씨 가문을 타깃으로 삼은 거야?”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산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나는 방금 정민규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고민욱이 이번에 또 무슨 짓을 벌인 걸까?“은성아, 괜찮아?”정민규가 떠난 것을 보고 성지연이 우산을 쓰고 총총 뛰어왔다.하지만 입만 벙긋했을 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동안 어떻게든 정민규과 선을 긋고 다시는 정씨 가문의 발판이 되지 말자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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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재수 없어.”성지연은 진세라를 보자마자 싫은 내색을 하며 나를 끌고 매장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은성아, 파리 꼬이니까 다른 가게 둘러보자.”이내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진세라는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닌지라 굳이 시비가 붙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가자.”성지연과 함께 밖으로 나서는데 일당 중 한 명이 눈을 흘기면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부자 코스플레이하기는, 곧 파산 직전인 거 다 아는데 아직도 거들먹거리고 있네.”진세라는 그녀를 말리는 척했다.“그만 해.”“뭐라고?”성지연이 문득 뒤돌아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다가가 진세라를 밀어내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옷걸이에 부딪혔다.일당 중 또 다른 한 명이 급히 뛰어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세라야, 괜찮아? 성지연! 손찌검은 왜 하는 거야?”“맞아도 싸거든? 주둥아리 함부로 놀렸다가 흠씬 두들겨 맞을 줄 알아.”추진력이 어찌나 좋은지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지연은 일당 앞으로 다가가 뺨을 때리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우리는 이미 머릿수에서 밀렸기에 고작 둘이서 세 명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소에 금지옥엽으로 자라 누가 봐도 여리여리한 모습인지라 막상 싸우게 되면 승산이 희박했다.심지어 선방을 날린 사람은 성지연이지 않은가?그것도 수능 전날에 시비에 휘말려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내 서둘러 뛰어가 있는 힘껏 휘두르는 성지연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하지만 상대방은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제지하는 줄 알았다.진세라의 껌딱지가 대뜸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역시 주인이 상황 파악이 더 빠르군. 졸개는 가만히 찌그러져 있는 게 어때?”곧이어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얼굴이 옆으로 꺾였다.다시 태어난 이후로 나는 굳이 사사건건 대응하거나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래서 진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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