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술을 깨문 채 정민규가 걸쳐준 겉옷을 꽉 잡았다.고개를 들어 옆을 힐끗거렸는데 진세라가 어둡기 그지없는 안색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 섞인 눈빛에 나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고 나와 정민규가 함께 자리를 떠나서 무척이나 분노한 모습이었다.그렇다. 여자는 질투에 눈이 멀면 자기만의 상상을 펼치게 된다.진세라의 질투와 혐오 섞인 눈빛을 본 나는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정민규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고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뒤에서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신경 쓸 새가 없이 그냥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을 뿐이었다.이 자리는 고민욱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였고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권력에 빌붙고 상류 사회에 들어가는 디딤돌이었다. 정민규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고민욱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문 앞에 다 와서야 나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가서 옷 갈아입어.”그의 말투는 냉랭했지만 불만도 섞여 있었다.“괜찮아.”나는 정민규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내가 얼마나 그와 선을 긋고 싶어 하는지 아마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럼 계속 여기 서서 사람들이 쳐다보게 놔둘 거야? 이런 수단으로 시선을 끌고 싶어?”정민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내가 이러고 있는 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정민규,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그러고는 그의 겉옷을 잡고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았다.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쫓아오려는 것 같았다.그런데 가녀린 누군가가 정민규의 앞에 나타났다. 진세라가 쫓아온 것이었다. 나와 정민규가 단둘이 있게 내버려 둘 진세라가 아니었다.“기사님, 출발하세요.”나는 겉옷을 움켜잡았다. 조금 전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지금 걸치고 있는 이 겉옷이 창피함을 가리는 옷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돌아간 후 나는 드레스를 벗고 꼼꼼하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드레스를 건드렸
나는 고민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상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한 건 물론이고 체면을 잃어 배상까지 하게 생겼다. 지금 나에 대한 미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은성.”고민욱은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와? 넌 어떻게 된 게 창피한 줄을 몰라? 너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알아?”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서 있자 고민욱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그런 창피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이 엄청난 사고를 어떻게 수습할 건데?”고민욱은 분노에 찬 두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망친 계약의 책임을 나에게 물을 기세였다.나는 싸늘하게 웃었고 두 눈에 하찮음이 스쳤다. 마음이 하도 차갑게 식은 탓인지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고민욱의 친딸이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나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고 혼내기만 했다.한 사람이 가치를 잃게 되면 함부로 짓밟아도 된단 말인가?“지금까지 아빠는 나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고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한 적도 없이 다짜고짜 혼내기만 했어요. 그러니 회사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문제니까 그 사람이 주요 책임을 져야 하는 거 맞죠?”고민욱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왜 이렇게 당당하게 째려보는지도 알지 못했다.김다비가 얼굴을 찌푸리고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은성아, 이젠 그 나이가 됐으면 아빠 걱정 좀 덜어주면 안 돼?”싸움을 말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진퇴양난에 빠뜨려 비난하려 했다.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쇼핑백을 바닥에 던졌다. 드레스가 떨어진 순간 고은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나의 날카로운 시선은 비수처럼 고은빈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치명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드레스를 망가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
칠흑처럼 어두운 밤.적막 속에서 정민규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비록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기도 했다.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했고, 호흡마저 흐트러졌으며 그의 움직임은 점점 다급해졌다.결국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민규야...”띠링-귀에 거슬리는 벨소리가 후끈 달아올랐던 방 안의 열기를 단숨에 식혔다.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화면에 뜬 발신인을 확인했다.[세라.]숨이 턱 막혔고, 나도 모르게 패닉에 빠졌다.어둠 속에서 비록 정민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나는 용기를 내어 절박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키스하려고 했다.그러나 정민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피하고는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너머로 나긋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민규야.”곧이어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달빛 아래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그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가슴 속을 가득 채운 행복감이 썰물처럼 밀려났고,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분노와 좌절, 절망만 남았다.마침내 정민규는 전화를 끊었다.딸깍!눈부신 조명이 켜지고 정민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잘생긴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오후에 네가 세라의 전화를 받았어?”비록 의문조였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고, 죄라도 묻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나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그래. 전화를 받았을뿐더러 통화 기록도 삭제했지. 심지어 오늘 귀국 사실을 숨기려고 일부러 너한테 술까지 먹였어.”순순히 인정하자, 정민규의 눈에서 분노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그는 무표정한 얼굴은 더는 상종하기 싫은 듯싶었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정민규!”나는 이불을 움켜쥐고 눈물을 애써 참았다.“우리 결혼기념일에 꼭 전 여친 보러 가야 해?”정민규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18살의 나는 공개 고백이 용기의 상징이자 청춘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을 뿐이다.용기와 청춘은 무슨,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 따로 없었다.다행히 아직 고백하기 전이라 만회할 여지가 있었다.어찌 됐든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 이상 정민규와 최대한 거리를 두고 전생의 비극을 재현하지 않기로 다짐했다.나는 심호흡한 다음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대고 하느님에게 맹세하듯이 경건한 태도로 말했다.“맞는 말이야. 내가 저지른 행동에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동안 불편했으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미안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제 잘못을 뉘우친 이상 앞으로 허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학업과 꿈을 이루는 데 집중할게.”정민규는 벙찐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뒤를 돌아 단상에서 내려와 쏜살같이 도망쳤다.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고은성이 정민규를 포기해?”“그럴 리가? 쌀쌀맞은 민규의 태도에 얼마나 많은 여학생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는데 그중에서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은 자가 바로 고은성 아니야? 매번 거절당해도 지치지 않고 계속 열정적으로 대시했잖아. 지난달만 해도 정민규와 같은 대학교에 가겠다고 내기까지 했을걸?”“괜히 큰소리쳤다가 망신당할까 봐 자진 포기하는 것 같은데?”“정민규는 한시름 놓았겠네. 드디어 거머리에서 탈출하게 되어서.”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소년은 허둥지둥 도망가는 가녀린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작 본인은 전혀 기쁘지 않은 듯 잘생긴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교실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때, 책상 위에 있던 손거울에 얼굴이 비쳤다.비록 25살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3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해 눈빛이 생기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불면증에 시달린 탓에 안색이 창백하고 피부가 칙칙했으며 짙은 타크서클을 가리기 위해서는 항상 화장을 두껍게 해야만 했다.하지만 거울 속 어린 소녀의 피부는 뽀얗고 매끈했으며
야자 시간에도 정민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진세라도 자리를 비웠다.어차피 수시로 일류 대학교에 합격했을뿐더러 외국에서도 러브콜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기에 사실 수업 들을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매일 같이 학교에 나왔다. 심지어 출국할 기회까지 포기했는데 전부 진세라를 위해서라는 사실은 모두가 뻔했다.텅 빈 두 자리를 보고 있자니 씁쓸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마음도 심란하고 문제를 하도 풀어서 머리가 뒤죽박죽 한 탓에 하교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새엄마를 보는 순간 짜증이 극에 달했다.나는 못 본 척 지나치고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고민욱이 물었다.“은성아, 민규랑 얘기해봤어? 뭐래?”나는 냉소를 지었다.“정민규가 전생에 우리한테 빚이라도 졌어요?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말 한마디에 수백억짜리 계약을 맺겠어요?”고민욱의 안색이 대뜸 어두워지더니 호통치려는 찰나 옆에 있던 김다비가 팔을 끌어당기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아빠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상 그룹과 거래할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는 거지. 요즘 민규랑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참에 식사하자고 집에 초대하는 건 어때?”“아니요.”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그동안 정민규를 하도 귀찮게 해서 절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요? 괜한 기대 하지 마세요.”“부모한테 말투가 그게 뭐니?”“은성아, 아빠가 진짜 화를 내면 어떡하려고 그래? 너한테 조금이라도 더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해주려고 이렇게 고생하시는 거잖아. 설마 회사가 부도나길 바라는 건 아니지?”나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하루빨리 망하는 게 제 소원인데요?”연명 수단으로 이용되는 신세도 이제 지긋지긋했다.“고은성!”그리고 노발대발하는 고민욱을 무시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문을 닫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은행 잔액을 확인했다.나를 낳아준 친엄마는 박혜경인데 초등학교 때 고민욱이 비서인 김다비와 몰래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뿐더러 고작 6개월 터울이라고 했다.두
정민규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아래로 향한 눈동자 위로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웠다. 게다가 고고한 분위기는 잘생긴 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10년이 넘는 감정은 결코 한순간에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넋을 잃고 떨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인기척을 느낀 듯 정민규는 고개를 돌렸다.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설령 포기했다고 한들 안면박대할 정도는 아닌지라 머쓱한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뭐야? 너도 화장실이 급했어?”어리석은 내 모습이 너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다행히 정민규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똑바로 서서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이리 와.”나는 넌지시 물었다.“무슨 일인데?”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정민규는 표정이 눈에 띄게 불쾌해졌다.그리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이리 오라고.”결국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고 여전히 거리를 유지했다.정민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잠시 후, 의미심장한 얼굴로 손에 든 책가방을 휙 던졌다.나는 무방비 상태에서 자칫 놓칠 뻔했다.‘왜 이렇게 무거워?’“이게 뭔데?”정민규는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였다.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가 다가오자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고 숨이 턱 막히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고은성, 죽을힘을 다해 공부해.”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이를 악물고 말하는 듯싶었다.어리둥절한 나를 뒤로한 채 그는 이미 멀리 떠나갔다.룸에 돌아가자 성지연이 바짝 다가왔다.“이게 뭐야? 누가 생일 선물을 줬어?”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가방을 여는 순간 성지연은 폭소를 터뜨렸다.“맙소사, 시험지를 선물로 주는 기발한 생각은 어떻게 했대? 네가 단성대학교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라나 본데?”결국 머쓱한 웃음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7년 전으로 환생해
한 여학생이 불쑥 끼어들었다.“민규야, 고은성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맨날 세라만 괴롭혀.”진세라의 눈시울이 금세 빨개지더니 울컥하는 표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난 괜찮아. 다만 은성이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정민규는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온몸으로 냉기를 뿜어냈다.순간 공기마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눈이 마주치는 찰나 비록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속으로 비꼬았다.‘진세라 대신 화풀이라도 할 작정인가?’정민규의 시선이 문득 게시판을 향하더니 한참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국어 성적이 왜 이거밖에 안 돼?”진지한 얼굴로 툴툴거리는 모습은 왠지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본격적으로 진세라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하는 건가?나는 발끈한 나머지 냉소를 지으며 반박하려고 했다.하지만 정민규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네. 계속 노력해.”‘뭐지?’가벼운 말투는 마치 오늘의 날씨라도 얘기하는 듯싶었다.결국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미쳤나?’벙쪄 있는 나를 보더니 정민규는 서늘한 목소리로 따끔하게 혼냈다.“정신 똑바로 차리고 시간 남으면 작문 연습 많이 해. 괜히 엉뚱한 데 신경 쓰지 말고.”그리고 남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성큼성큼 멀어져갔다.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복잡미묘했다.고은성을 욕하는 거... 맞겠지?물론 나도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진세라를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어쨌거나 자존심 때문에 청순가련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표정이 일그러지고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 내는 게 티가 날 정도였다.이내 피식 비웃고는 성지연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교실로 돌아와 보니 정민규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책상 위의 문제집을 무심코 뒤적거리다가 눈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전생에 담임 선생님이 주셨던 것과 동일하지 않은가?당시만
정민규뿐만 아니라 이미 은퇴한 정상 그룹 창업자이자 정민규의 할아버지 정한석까지 왜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어떻게 보면 오늘의 연회는 고씨 가문에서 주최했다고 볼 수 있지만 몰락한 귀족과 다름없는 집안인지라 기껏해야 껍데기만 그럴싸한 재벌들과 왕래할 뿐이었다. 그런데 손가락만 까딱해도 조운시를 휘청거리게 하는 정씨 가문 1인자를 대체 무슨 수로 초대했다는 거지?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표정에 짜증이 묻어난 손자와 위엄이 넘치는 반면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할아버지, 그동안 질리도록 많이 봐 왔던 모습이었다.고민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지만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곧이어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옆에 서 있던 김다비가 잽싸게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끌고 갔다.전생에 정한석을 만난 적이 3번에 불과했지만 시작은 항상 트집부터 잡고 모욕하는 것으로 끝냈다.정한석의 전우가 바로 진세라의 할아버지인데 둘은 일찌감치 아이들을 위해 혼사를 정했다. 하지만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 때문에 진세라는 마지못해 출국길에 올랐고 정한석은 나만 언급하면 치를 떨었다.설령 그가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직접 대소변을 받아주고 극진히 보살폈음에도 불구하고 대우는 달라진 게 없었다.어차피 이번 생에 정민규를 포기한 이상 굳이 정씨 가문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회장님, 제 딸 은성이에요.”정한석 앞에서 고민욱은 굽신거리며 아부하기 급급했다.“지난달 15일에 딸이 민규랑 같은 차를 탔는데 밤새 돌아오지 않았더라고요. 다음날에 집에 도착했는데 민규 옷을 입고 있었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지금 뭐 하자는 거지?자기 딸이 정민규와 외박했다고 정한석에게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이렇게 황당할 수가!기껏해야 자식들이 동창이라는 관계를 이용해 눈도장을 찍고 정씨 가문에 빌붙으려는 줄 알았지만 본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딸의 순정까지 모욕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아버지로서 어
나는 고민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상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한 건 물론이고 체면을 잃어 배상까지 하게 생겼다. 지금 나에 대한 미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은성.”고민욱은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와? 넌 어떻게 된 게 창피한 줄을 몰라? 너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알아?”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서 있자 고민욱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그런 창피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이 엄청난 사고를 어떻게 수습할 건데?”고민욱은 분노에 찬 두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망친 계약의 책임을 나에게 물을 기세였다.나는 싸늘하게 웃었고 두 눈에 하찮음이 스쳤다. 마음이 하도 차갑게 식은 탓인지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고민욱의 친딸이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나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고 혼내기만 했다.한 사람이 가치를 잃게 되면 함부로 짓밟아도 된단 말인가?“지금까지 아빠는 나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고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한 적도 없이 다짜고짜 혼내기만 했어요. 그러니 회사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문제니까 그 사람이 주요 책임을 져야 하는 거 맞죠?”고민욱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왜 이렇게 당당하게 째려보는지도 알지 못했다.김다비가 얼굴을 찌푸리고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은성아, 이젠 그 나이가 됐으면 아빠 걱정 좀 덜어주면 안 돼?”싸움을 말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진퇴양난에 빠뜨려 비난하려 했다.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쇼핑백을 바닥에 던졌다. 드레스가 떨어진 순간 고은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나의 날카로운 시선은 비수처럼 고은빈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치명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드레스를 망가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정민규가 걸쳐준 겉옷을 꽉 잡았다.고개를 들어 옆을 힐끗거렸는데 진세라가 어둡기 그지없는 안색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 섞인 눈빛에 나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고 나와 정민규가 함께 자리를 떠나서 무척이나 분노한 모습이었다.그렇다. 여자는 질투에 눈이 멀면 자기만의 상상을 펼치게 된다.진세라의 질투와 혐오 섞인 눈빛을 본 나는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정민규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고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뒤에서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신경 쓸 새가 없이 그냥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을 뿐이었다.이 자리는 고민욱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였고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권력에 빌붙고 상류 사회에 들어가는 디딤돌이었다. 정민규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고민욱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문 앞에 다 와서야 나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가서 옷 갈아입어.”그의 말투는 냉랭했지만 불만도 섞여 있었다.“괜찮아.”나는 정민규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내가 얼마나 그와 선을 긋고 싶어 하는지 아마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럼 계속 여기 서서 사람들이 쳐다보게 놔둘 거야? 이런 수단으로 시선을 끌고 싶어?”정민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내가 이러고 있는 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정민규,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그러고는 그의 겉옷을 잡고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았다.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쫓아오려는 것 같았다.그런데 가녀린 누군가가 정민규의 앞에 나타났다. 진세라가 쫓아온 것이었다. 나와 정민규가 단둘이 있게 내버려 둘 진세라가 아니었다.“기사님, 출발하세요.”나는 겉옷을 움켜잡았다. 조금 전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지금 걸치고 있는 이 겉옷이 창피함을 가리는 옷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돌아간 후 나는 드레스를 벗고 꼼꼼하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드레스를 건드렸
나상민은 차갑기 그지없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 고민욱을 까발리지 않았다.“그랬군요. 정말 영광입니다.”나상민은 등 뒤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이건 내가 준비한 진학 선물이야.”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선물을 받았다.“고마워.”나의 말이 떨어진 그때 또 세 사람이 도착했다. 정민규와 진세라, 그리고 한정수였다.나는 고민욱을 흘끔 보면서 정민규까지 초대한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민욱은 나에게 나상민을 안내하라고 한 후 빠른 걸음으로 정민규의 앞으로 걸어갔다.정민규는 오늘 밤 진세라와 커플룩으로 맞춰 입었다. 두 사람 모두 블랙 톤으로 맞춰 입었는데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나는 대충 힐끔거린 후 시선을 거두었다. 나상민이 팔을 내밀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그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네 파트너가 될 사람은 나뿐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나는 웃기만 할 뿐 팔짱을 끼진 않았다.“가끔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도 안 좋아.”그러고는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마치고 나니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재빨리 빈 자리를 찾아 하이힐을 벗고 휴식했다.그런데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다비가 다가오더니 춤을 춰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금방 벗은 신발을 다시 신었다.내가 다가가자마자 나상민이 인파 속에서 걸어왔다. 나에게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매너 있게 물었다.“아름다운 은성아, 너랑 같이 춤을 출 영광을 누려도 될까?”나상민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정민규도 다가왔다. 정민규는 블랙 슈트 차림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춤은 나랑 가장 먼저 추기로 약속했잖아.”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 정민규에게 매달릴 때 단성대학교에 붙기만 하면 그와 가장 먼저 춤을 추겠다고 약속했었다.시간이 하도 빨리 지나서 예전의 일을 많이 잊어버렸다.나는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건네진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은 고마운데 이미 함
김다비는 고은빈을 노려보면서 한심한 말투로 말했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날 밤에 엄마가 뭐라 했었는지 다 잊었어? 고은성은 지금 이용 가치가 있어. 고씨 가문이 더 많은 권력자와 친분을 맺으려면 고은성이 있어야 해.”“그럼 나는요?”고은빈이 속상해하며 울었다.“나도 이 집 딸이에요. 근데 왜 다 고은성한테 기대야 하는 건데요?”김다비는 고은빈이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놀란 마음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고은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고은성한테 기대는 게 아니라 엄마는 네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러지. 권력자들한테 빌붙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넌 엄마한테 가장 소중한 딸이야. 네가 다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엄마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한테는 가장 좋은 것만 줄 거야.”김다비는 고은빈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머리를 어루만졌다.“고씨 가문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서 고은성이 재벌에 시집가면 무조건 시댁에서 모욕을 당하면서 살 거야.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고은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전 고은성이 일부러 그녀 앞에서 자랑하던 것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이튿날 아침, 고씨 가문 전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고은성이 잠에서 깨자 피부 관리사가 먼저 와서 피부 케어를 해주었고 그 뒤로 메이크업도 받고 헤어도 했다.할 게 너무 많아 차라리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작은아가씨, 먼저 다른 데 가서 쉬세요. 큰아가씨 쪽이 하도 바빠서 작은아가씨를 돌봐줄 시간이 없어요.”도우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고은빈도 마침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발 저린 듯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드레스를 다림질하고 있었다.“은빈이 왜 왔대요?”“잠깐 들어와서 보고 그냥 나갔어요.”손목 화환을 가져다준 도우미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만 끄
16살에 내가 넘어졌을 때 나를 일으켜주고 밴드를 붙여준 다음 아프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고 약한 마음을 다잡았다.‘오히려 지금이 좋아.’더는 그들에게 기대할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나도 사랑할 필요가 없었다.이런 것들이 없으니 차라리 더 홀가분했다....진학 연회는 3일 뒤로 정해졌다. 그날이 오기 전에 고민욱과 김다비는 나에게 꽤 많은 돈을 썼다.김다비는 조운시에서 가장 잘하는 피부 관리사를 예약하여 연속 이틀 관리를 받게 해주었고 헤어도 바꾸고 매니큐어도 받게 해주었다. 귀티나도록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꿔주었다.연회 전날 저녁 고민욱이 나를 위해 제작한 드레스가 도착했다. 샴페인 색의 공주 원피스였는데 치맛자락에 보석이 박혀있었다.드레스를 입어 봤는데 참으로 예뻤다. 청순함과 섹시함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었다.나는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다들 예쁘다고 했고 고민욱마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우리 딸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고개를 들고 고민욱을 쳐다보았는데 고은빈이 질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어 웃으면서 일부러 물었다.“은빈아, 언니가 입은 이 드레스 예뻐?”슬쩍 건드렸을 뿐인데 고은빈이 그대로 폭발했다.“고은성,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이야?”“얼굴이 예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서?”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치맛자락을 들고 한 바퀴 돌았다.“엄청 예쁘지? 지금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지?”고은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고 얼굴도 시뻘게졌다.“질투는 무슨. 질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엄마 아빠 사랑도 못 받은 주제에. 하도 운이 좋아서 수능에 조운시 2등을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같은 날이 있을 것 같아?”고은빈의 말은 나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고민욱과 김다비가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고민욱이 고은빈에게 호통쳤다.
그리고 이 일의 배후에는 김다비와 고민욱이 있었다.모든 걸 알게 된 후에야 이 다정하고 지적인 모습 뒤에 얼마나 악랄한 마음이 숨어있는지 알게 되었다.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그럼 다행이고.”김다비가 나의 손을 잡았다.“부녀끼리 이렇게 싸워서야 하겠어? 안 그래?”나는 김다비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할 얘기 있으면 하세요. 빙빙 돌리지 말고.”김다비는 멋쩍어하면서 부자연스럽게 두 손을 잡았다.“무슨 일이냐면 네가 수능에서 조운시 2등을 했잖아. 네 아빠가 체면이 선다고 진학 연회를 해주고 싶대.”나는 싸늘하게 웃었다.‘진학 연회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나가서 값어치가 얼마나 되나 보려는 거겠지.’“그렇게 하세요, 그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그 전에 1억 주세요. 개학하면 옷도 사야 하고 학용품도 사야 해서요. 줄 수 있어요?”그들이 나의 가치를 원한다면 나도 그만큼 뜯어내야 했다.1억이라는 소리에 김다비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괜찮은 척했다.“당연하지. 네 아빠더러 너한테 단성에 집을 사주는 건 어떨지 말하려던 참이었어. 네가 혼자 밖에 있는 게 걱정돼서 말이야. 집을 사서 도우미를 구하면 일상생활에 많이 도움이 될 거야.”‘나의 일상생활을 챙긴다는 건 거짓말이고 원하는 건 감시겠지.’“괜찮아요. 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싶어요.”김다비의 연기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돈은 언제 줄 거예요?”김다비도 일어났다.“일단 네 아빠한테 얘기한 다음에 바로 입금할게. 밥도 다 됐으니까 내려가서 먹자.”“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나가려는 기미가 없자 눈썹을 치켜세웠다.“안 나가요? 여긴 내 방인데.”김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나갈게.”그러고는 방을 나갔다.나는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옷방으로 가서 캐리어 안에 넣은 부동산 등기등본을 꺼내 다른 곳에 숨겼다. 조금 전 김다비는 분명 내 방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고민욱이 버럭 화를 냈다.“거기 서. 이젠 막 나가겠다는 거야? 말도 없이 집을 나가고 들어와도 인사도 안 하고. 네 눈에는 이 아빠랑 새엄마가 안 보여?”나는 어두운 표정의 고민욱을 덤덤하게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 눈에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빠 눈에 이 딸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어요.”“아빠.”나는 중얼거리듯 두 글자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욱은 아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비행기를 다섯 시간이나 타서 좀 피곤해요. 아빠...”나는 일부러 강조해서 아빠를 불렀다.“이만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요?”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더 화가 난 고민욱이 내 앞으로 다가와 따귀를 날리려 하자 김다비가 재빨리 다가와 말렸다.“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애가 피곤하다고 하면 올라가서 쉬게 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이게?”그녀는 돌아서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은성아, 아빠 신경 쓰지 마. 요 며칠 네가 연락이 없어서 아빠가 걱정돼서 그래. 됐어. 올라가서 쉬어. 이따가 밥 다 되면 부를게.”김다비가 좋은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나는 그들과 더는 싸우지 않았고 지금 그들의 가면을 벗길 때도 아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2층 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김다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왜 그래? 은성이가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귀한 애인지 몰라? 수능을 잘 봐서 많은 사람이 은성이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한다고.”나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안 그러면 이 자리에 서서 휴대전화로 그들의 대화를 녹음할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웠다. 비행기에서 꾼 그 꿈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환생한 덕에 많은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 대신 나도 까칠해졌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또 내가 원하는 자유와 행복을 언제쯤이면 누릴 수 있을지 생각하곤 했다.한창 이런저런
두 사람은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룸 문이 닫힌 후에야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까지는 배가 고파서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정작 메뉴를 보니 입맛이 없었다.종업원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종업원이 기다리는 게 미안했던 나는 오늘의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온 후에도 먹지 않고 계속 밥알만 셌다.머릿속에 조금 전 두 사람이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그날 밤 나에게 키스하던 그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그럼 난 뭐지? 그냥 데리고 노는 고양이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그냥 욕구나 푸는 도구?’젓가락을 하도 꽉 쥐어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식당에서 나왔다.이튿날 이른 아침 나는 공항으로 갔다. 거의 탑승하기 직전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낯선 번호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너머로 나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성아,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식사 약속도 펑크낸 건 물론이고 호텔까지 바꿔? 일부러 날 피하는 거 맞지?”나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발끝을 툭툭 차면서 말했다.“결제는 내가 했어. 그리고 내가 어디에 묵든 그건 내 자유지,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양심 없는 것.”나상민이 속상한 척했다.“내 번호야. 저장해둬.”체크인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하러 갔다.“너랑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이만 끊을게.”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창문 밖에 하얀 뭉게구름이 가득했고 하늘이 어찌나 파란지 또 다른 바다 같았다.어젯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잠이 솔솔 왔다. 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데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정민규에게 매달리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었다.나는 도서관에 가려는 정민규를 막아서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진세라가 뭐가 좋다고 그래? 나보다 예뻐?
나상민은 고개를 돌리더니 요염한 눈매로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걸어갔다.“미쳐 날뛰고 싶으면 혼자 미쳐 날뛰어. 날 끌어들이지 말고.”“은성아.”나상민이 뒤따라왔다.“농담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나상민에게 밥을 사주기로 한 곳은 성지연이 추천해준 곳이었다.성지연의 삼촌네 집이 단성시에 있어 10살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단성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성지연이 추천해준 식당은 나상민과 함께 갔던 SNS 맛집보다 훨씬 맛있을 것이다.식당에 도착한 후 나상민은 주차하러 갔고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상민은 돌아오지 않았다.무슨 일인지 가보려던 그때 정민규와 진세라도 이 식당으로 오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길로 가려 했다.움직임이 빨라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민규가 갑자기 귀신처럼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으악.”화들짝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뒷걸음질 치면서 돌에 걸린 나머지 뒤로 넘어지려 했다.넘어지면서 눈을 감았는데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고 누군가 팔로 나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삼나무 향이 가득한 품에 와락 안겼다.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눈을 뜬 그때 정민규의 두 눈과 마주했다.정민규의 두 눈에 소용돌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는데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마워.”나는 똑바로 선 다음 정민규의 손을 밀어냈다. 정민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나와 거리를 멀리했다.“방금 일부러 나한테 안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 새로운 수법이야?”‘새로운 수법은 개뿔.’나는 헛웃음을 지었다.“농담하지 마. 네가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만 하지 않았어도 넘어질 뻔하지 않았어. 적반하장이 따로 없어, 정말.”“그래?”정민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만 가려는데 정민규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고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