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맞으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뒤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정민규는 물론 나상민과 더더욱 엮이기 싫었다.그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대놓고 훑어보았고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소문과 아주 다른데? 찰거머리처럼 정민규한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더니 아까는 누가 봐도 선을 긋기 급급한 모습이잖아.”허리를 갑자기 숙인 탓에 숨결이 얼굴에 고스란히 닿았다.“새로운 수법인가? 밀당하는 거야?”낯선 사람의 접근이 어색한 나머지 나는 무의식중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커다란 손바닥이 어깨를 감쌌다.그리고 뒤로 잡아당기자 익숙한 향기를 풍기는 품에 쏙 안겼다.“저리 꺼져.”정민규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한일자로 꾹 닫힌 입술이 눈에 들어왔고 얼굴에는 짜증 난 기색이 역력했다.대체 왜 화가 난 거지?하지만 품에 안기는 다정한 스킨십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거 놔.”이내 품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서 멀어졌다.정민규는 내가 도망갈 줄 몰랐는지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려던 찰나 진세라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민규야, 생수 한 병 사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고은성? 너도 있었어?”나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몰래 민규를 따라온 거야?”진세라는 우리 둘을 번갈아 살피더니 정민규의 팔을 잡아당기며 천진난만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민규야, 이제 와서 스토킹 당한 거 따져봤자 뭐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 혼자서 밖에 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한데.”비아냥거리는 말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나상민이 싸늘한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어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몰라?”그는 평소에 착하고 다정해 보여도 실제로는 차갑고 야박한 사람이다. 예고도 없이 가면을 벗고 나니 어둡고 매정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마치 한가롭게 햇볕을
정민규가 날 찾으러 성지연 집 앞에 와 있다니?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싫어하는 사람을 제 발로 찾아올 리 있겠는가?심지어 무일푼으로 외박까지 했는데 정작 친아빠라는 인간은 연락조차 없는데 말이다.아마도 진세라 대신 사과를 받아내려고 찾아왔을 가능성이 컸다.어젯밤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볼펜과 시험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날 찾아왔다고 해서 만나줘야 한다는 법이 있어? 기다리다 지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방학 전 모의고사에서 내가 예상했던 점수보다 2점이 낮았는데 수능에서 2점 차이면 등수가 얼마나 많이 떨어지는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문제 풀이에 집중했지만 오히려 성지연이 안절부절못했다.나를 몰래 훔쳐보더니 일어나서 물 마시거나 화장실에 들락거리기도 했다.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재빨리 껐는데 결국 참다못해 볼펜과 종이를 단번에 빼앗아 갔다.“고은성! 문제 그만 풀고 솔직한 심정 얘기해줄래?”몇 시간 동안 시험지만 들여다봤더니 눈이 뻑뻑할 지경이다. 마침 볼펜과 종이를 가져간 바람에 겸사겸사 한숨 돌리기로 했다.“뭘?”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여전히 건조하게 느껴졌다.“정민규 말이야.”성지연은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돌리더니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진짜 포기할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으면 못 살았을 정도였잖아.”그녀가 한 말을 속으로 되뇌는 순간 가슴이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물론 정민규밖에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상처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언정 놓아주기 마련이다.이미 목숨까지 건 사랑을 해봤기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진짜 너무 힘들었다.다시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무력감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현실을 자각한 거지.”나는 성지연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마치 얼마 전에 미친 듯이 아이돌만 쫓아다녔던 너처럼, 어느 순간
나는 정민규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는데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이게 바로 남자였다.물론 납득은 갔다. 자신을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사람이 자존심을 내팽개칠 정도로 집착하다가 갑자기 싫어한다고 말하면 나 같아도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뜬금없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또한 남자친구라도 되냐는 질문에 무의식중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사실은 가벼운 테스트에 불과했는데 말이다.나는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그거 봐? 대답 못하겠지? 더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농담 같아? 그동안 밀당하느라 연기한 게 아니거든? 그리고 정민규!”이내 진지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제 놓아줄 테니까 의심 안 해도 돼. 앞으로 졸업까지 딱 5일 남았어. 졸업하고 나면 우린 남남이 되겠지. 세상이 참 좁다고 하지만 일부러 마주치려고 애쓰지 않은 이상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고개를 돌리고 떠나려고 했다.“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진 거야?”걸음을 옮기자마자 정민규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몸을 돌려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그리고 어깨를 움켜쥐며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혹시 나상민이니?”이내 웃음을 터뜨렸고,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경멸이 가득했다.“오늘 아침 나씨 가문에서 너희 집에 프로젝트를 하나 넘겨줬다고 하던데.”그러고 나서 나를 놓아주더니 쌩하니 돌아섰다.“고은성, 너희 일가족은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우리 집에 빌붙는 데 실패하니까 바로 나씨 가문을 타깃으로 삼은 거야?”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산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나는 방금 정민규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고민욱이 이번에 또 무슨 짓을 벌인 걸까?“은성아, 괜찮아?”정민규가 떠난 것을 보고 성지연이 우산을 쓰고 총총 뛰어왔다.하지만 입만 벙긋했을 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동안 어떻게든 정민규과 선을 긋고 다시는 정씨 가문의 발판이 되지 말자고
“재수 없어.”성지연은 진세라를 보자마자 싫은 내색을 하며 나를 끌고 매장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은성아, 파리 꼬이니까 다른 가게 둘러보자.”이내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진세라는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닌지라 굳이 시비가 붙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가자.”성지연과 함께 밖으로 나서는데 일당 중 한 명이 눈을 흘기면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부자 코스플레이하기는, 곧 파산 직전인 거 다 아는데 아직도 거들먹거리고 있네.”진세라는 그녀를 말리는 척했다.“그만 해.”“뭐라고?”성지연이 문득 뒤돌아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다가가 진세라를 밀어내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옷걸이에 부딪혔다.일당 중 또 다른 한 명이 급히 뛰어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세라야, 괜찮아? 성지연! 손찌검은 왜 하는 거야?”“맞아도 싸거든? 주둥아리 함부로 놀렸다가 흠씬 두들겨 맞을 줄 알아.”추진력이 어찌나 좋은지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지연은 일당 앞으로 다가가 뺨을 때리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우리는 이미 머릿수에서 밀렸기에 고작 둘이서 세 명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소에 금지옥엽으로 자라 누가 봐도 여리여리한 모습인지라 막상 싸우게 되면 승산이 희박했다.심지어 선방을 날린 사람은 성지연이지 않은가?그것도 수능 전날에 시비에 휘말려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내 서둘러 뛰어가 있는 힘껏 휘두르는 성지연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하지만 상대방은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제지하는 줄 알았다.진세라의 껌딱지가 대뜸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역시 주인이 상황 파악이 더 빠르군. 졸개는 가만히 찌그러져 있는 게 어때?”곧이어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얼굴이 옆으로 꺾였다.다시 태어난 이후로 나는 굳이 사사건건 대응하거나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래서 진세라
이제 남은 사람이라곤 우리 둘뿐이다.그날 정민규와 기분이 상한 채 헤어진 후로 처음 만났다. 그날 이후로 우리가 한동안은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은 일부러 나를 괴롭히기라도 하듯 빨리 만난 건 물론이고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했다.정민규가 굳은 얼굴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뒷걸음질 치려 했다.그런데 아직 뒤로 가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나의 손목을 잡더니 카운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내 앞을 막아선 채 한 손으로 카운터를 잡고 지탱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나랑 세라를 한 쌍으로 만들었더라? 그럼 네 짝은 누군데? 나상민? 아니면 조운시의 다른 재벌?”정민규는 나를 값어치를 매긴 상품처럼 말했다. 그가 이미 한번 말했고 그의 마음속에 비친 나는 목적이 불순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욕을 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나는 정민규를 빤히 보며 웃으면서 일부러 화를 돋우었다.“내가 누굴 선택할 것 같아?”“고은성.”정민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에 닿을 무렵 확 밀어버렸다.“아무튼 누굴 선택하든 절대 넌 아니야.”나는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가게를 나온 그 순간 성지연이 다가와서 나의 손을 잡았다.“은성아, 괜찮아?”나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더는 쇼핑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냥 집에 가자.”“그래.”성지연은 곧바로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이내 자리를 비웠다.우리가 떠날 때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보지 않았다.성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바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성지연의 부모님이 곧 수능인 딸의 옆에 있어 주려고 먼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걸 알게 되었다.성지연은 기쁜 나머지 부모님의 품에 와락 안겨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 아빠를 불렀다.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
적금과 필요 없는 사치품을 정리하던 그때 도우미가 와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하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물건을 내려놓고 방에서 나갔다.위층에 꽤 오래 있어서 나상민이 이쯤이면 그만 돌아갔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주방에 들어가 보니 마치 주인처럼 센터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민욱이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평소 고민욱은 나와 고은빈에게 어른을 존경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었는데...고민욱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은성아, 얼른 와서 도련님이랑 얘기 나눠. 난 이젠 나이 먹어서 내가 얘기하면 젊은이들이 별로 관심 없어 해.”나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고민욱에게 휴대전화를 흔들면서 입 모양으로 숫자를 얘기했다. 곧이어 입금됐다는 문자를 받았다.나는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천만 원이 입금된 것이었다.문자를 확인한 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뒷짐을 진 채 발걸음을 멈췄다.“회장님, 매수비가 좀 적은데요? 아니면...”나는 고의인 듯 아닌 듯 나상민을 힐끗거렸다.머리가 좋은 나상민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나와 고민욱 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갔다는 걸 알아챘다.그는 피식 웃다가 자세를 고쳐잡고 더 편하게 의자에 기댔다.“회장님, 은성이 용돈이라도 깎았어요?”고민욱이 다급하게 부정하면서 웃었다.“오해야, 오해. 이번 달에 하도 바빠서 용돈을 이틀 늦게 줬거든. 그래서 삐졌어.”그러고는 이를 꽉 깨물고 나에게 웃었다.“일단 와서 밥 먹어. 이따가 은빈이 엄마더러 2천만 원 입금하라고 할게.”밥 한 끼에 이렇게 많은 돈을 얻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나는 두 눈이 반짝였다. 나는 순간 머리를 굴려 더 많은 돈을 얻어내려 했다.“아빠, 2천만 원으로는 부족해요. 수능이 끝나서 친구들이랑 나가 놀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입학 통지서가 나오면 참석해야 할 진학 연회도 엄청 많을 텐데. 아빠, 이참에 용돈 더 올려주세요.”고민욱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했다.“그럼 얼마를 원
수능이 끝난 탓인지 긴장이 풀리면서 그날 밤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입학 통지서를 받기 전날이 돼서야 몸이 괜찮아졌다.수능 성적이 나온 그날 밤에 나는 인터넷으로 점수를 확인했다. 400점 만점에 370점을 맞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단성대학교에 붙었다. 나는 이 결과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었는데 드디어 아름다운 꿈이 악몽을 뒤덮어버렸다.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학교로 갔다.성지연은 수능을 마치자마자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십여 일 만에 학교 문 앞에서 만났다.그녀는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브라운 톤으로 염색까지 했다. 이젠 졸업했으니 그다지 단정하지 않은 스커트를 입었는데 만화 속을 찢고 나온 소녀 같았다.성지연은 나를 보자마자 기뻐하면서 달려와 와락 안았다.“너무 보고 싶었어, 은성아. 마애민에서 너한테 줄 선물 엄청 많이 사 왔어. 이따가 입학 통지서 받으면 같이 우리 집에 가지러 가자.”성지연에게 안긴 나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알았어.”“그럼 약속한 거다?”성지연은 나를 풀어주고는 다시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며칠 못 본 사이에 살이 쪘는지 야위었는지 보자.”그러더니 점점 얼굴을 찌푸렸다.“왜 야위었어? 밥 제대로 안 먹었어?”성지연은 부모처럼 나를 챙겼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와 함께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며칠 전에 얘기했잖아. 감기 때문에 입맛이 없어서 끼니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고.”“맞다.”성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량소년처럼 나의 아래턱을 잡고 말했다.“이런 상황에 해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너 많이 예뻐졌어. 네 미모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그녀의 과장에 나는 그녀의 손을 툭 치면서 말했다.“거짓말쟁이, 어제는 아이돌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하더니.”성지연이 헤벌쭉 웃었다.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교실로 들어왔다. 이젠 고등학생이 아니어서 그런지 짧디짧은 십여 일 동안 친구들이 다 변한 듯했다.
6개월 전에 조운고등학교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여학생이 남학생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남학생이 학교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바람에 그 여학생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미 잊은 듯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성지연이 진세라를 째려보았다.“무슨 일이든 다 알려고 하고. 참 오지랖이 넓어.”그러자 진세라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악의로 물어본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진세라가 하도 당당해서 그만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하니까 그러지.”나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널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있어.”진세라는 나를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더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고 성지연과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나의 자리와 두 줄 떨어진 곳에 정민규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책상 위에 앉아 있었는데 한쪽 다리를 옆 책상에 올려놓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올려다보면서 비켜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만 그의 두 눈과 마주하고 말았다.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두 눈에 억제와 복잡함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정민규가 다리를 옮기고 나서야 나와 성지연은 제자리로 돌아갔다.잠시 후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담임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면서 교단에서 말했다.“오늘 몇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 조운시의 이과 1등과 2등이 모두 우리 반 학생이야.”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대박. 우리 반이 이렇게나 대단했어?”“누구예요?”“선생님 얼른 말해주세요. 그 대단한 학생이 누군지.”담임선생님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1등은 당연히 정민규 학생이고 2등은...”담임선생님이 일부러 말끝을 흐리자 학생들이 또 떠들어댔다.“2등은 고은성 학생이야. 고은성 학생이 370점을 맞았는데 정민규 학생과 불과 1점 차이밖에 안 나.”담임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록 지금 나에게 약을 썼고 내일 모든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고 욕을 먹게 하려고 작정했지만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도울게. 김씨 가문도 형편이 괜찮은 가문이야. 고 대표에게 있어 나쁜 선택이 아니야.”고개를 돌려보니 정민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밤은 유난히 길었다.배가 부둣가에 멈춰서자 고민욱이 한 무리 사람들을 걸리고 뛰어왔다.그들은 정민규의 침실로 곧장 향했고 나는 멀리서부터 김다비의 가식적인 목소리를 들었다.“여보, 화내지 마. 아이가 이미 컸으니 말로 해.”곧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도련님, 우리 은성이는 깨끗한 아이인데 앞으로...”고민욱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나는 그의 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제가 왜요?”정민규도 올 블랙차림으로 나왔다.“고 대표님 방금 하신 말씀은 무슨 말이세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저한테 무슨 용건이 있어서죠?”“아빠와 아줌마는 혹시 은빈을 데리러 왔어요?”나는 아까 고민욱을 쌀쌀하게 대해던 태도와 달리 웃으며 말했다.“제가 안내할게요.”그런 후 그들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고은빈의 방으로 갔다.고민욱과 김다비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고은빈은 김씨 가문의 도련님과 부둥켜안고 있었고 바닥에는 속옷, 바지, 신발이 널브러졌다.안색이 변한 김다비는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보지 마세요. 그만 봐요.”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말했다.“아빠, 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그리고...”나는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을 둘러봤다.“함부로 말하며 내 동생의 명성을 어지럽히면 안 돼요. 저의 동생은 아직 18살이 되지 않았거든요.”‘퍽’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따귀를 맞았고 김다비는 씩씩거리며 나를 째려봤다.“고은성, 감히 은빈이를 해치다니!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김다비의 동작이 너무 빨랐다. 그녀가 나를 때리자 정민규는 즉시 나를 몸 뒤로 숨기며 말했다.“사모님, 감히 내 구
정민규가 나를 그의 방으로 데려가자 나는 불편한 척 연기했고 그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그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송향이 코끝에서 점점 더 짙게 맡아졌다.더듬거리며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탠드를 켜려고 할 때 정민규는 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움직이지 마.”정민규의 두 눈은 마치 끝없는 심연처럼 아득했다.내가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의 귓가에 뽀뽀했다.“고은빈이 밖에서 보고 있어.”이 말을 듣고 나는 저도 모르게 정민규를 쳐다봤다.“잠시만 참아.”나의 손을 잡고 있던 자세가 천천히 깍지를 끼는 자세로 변했고 그는 나의 목에 키스했다.“지난번에 고씨 가문에 프로젝트를 줄 때 그들은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알아버렸어. 최근에 정씨 가문에서 고급 요양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고민욱은 전화를 걸어 네가 할머니 건강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며 함께 놀러 가라고 했어.”정민규의 키스가 점점 더 많아져 나는 좀 견딜 수 없었다.어디서 생긴 힘인지 나는 그를 밀어내고 그의 몸에 올라탔다.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받친 후 나는 머리카락이 흩어져 어깨로부터 가슴으로 미끄러졌다.정민규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보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의 반응을 즉시 알아차렸다.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고 그의 곁을 떠나려고 했으나 정민규는 손을 뻗어 나의 뒤통수를 잡고 다시 끌어당겼다.불빛이 번쩍이고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민규를 밀쳐버린 후 곧 그의 몸에서 내려와 째려봤다.“정민규, 너 양아치야?”정민규는 여전히 나 때문에 침대에 누운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는데 눈 밑에는 욕망이 깔려있었다.나는 이런 그의 모습이 익숙했다.정민규는 침대를 떠나면 점잖은 선비 같았으나 침대에 오르기만 하면 용맹한 호랑이로 변신했고 내가 울면서 용서를 빌어야 그만둘 때가 많았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그의 눈을 피하려고 돌아누웠다.잠시 후 나는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와.”성지연은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은성아, 얘네들 너무 귀여워. 나 녹았어.”성지연의 영향을 받아 나의 마음도 홀가분해졌다.20분 후에 돌고래는 서서히 떠났지만 핑크 돌고래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성지연은 낙담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어쨌든 우리가 그들의 생활에 끼어든 것이기 때문이다.한정수가 다가와 그녀를 놀려주었는데 나는 이 두 사람이 어쩐지 수상해 보였다.눈치 있게 자리를 비워주려고 나는 테이블로 가서 주스를 쥐려고 했는데 이때 정민규가 내 팔을 잡았다.그는 나더러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보라고 눈짓했다. 그 방향으로 보니 핑크색 돌고래가 수면에 나타났다.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는 나를 보고 정민규가 물었다.“예뻐?”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규는 나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름도 있어.”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정민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이름이 젤리야.”젤리. 나는 그때 2학년 때 그의 곁에 붙어 함께 점심을 먹던 일이 생각났다.그날 늦게 가다 보니 식당에는 음식이 다 팔리고 그저 간식인 젤리만 남았다. 간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끄느라 젤리는 모양이 귀엽고 이름도 듣기 좋다고 말하며 나중에 애완동물을 키우면 이름을 젤리라고 짓자고 말했다.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이미 잊어버렸지만 그는 나에게 이 핑크색 돌고래의 이름이 젤리라고 했다.만약 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기록이 있었다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크루즈가 귀항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저녁에 작은 파티를 열어 2025년을 맞이해야 한저녁 12시가 되니 나는 하품을 했다.고은빈은 우유 한 잔을 들고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우유 먹고 다시 자.”고은빈은 우유를 들고 어색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잠자기 전에 우유를 먹는 습관이 있었지만 사이가 별로인 고은성이 처음이 처음으로 우유를 건넸다.고은빈을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널 관심한다고 생각하지 마. 아빠가 그러는데 너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손에 든 약을 몸 뒤로 숨겼다.내 반응이 너무 컸는지 정민규는 허공에 정지된 손을 미처 거두지도 못한 채 말했다.“손에서 피가 나.”내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때 성지연과 친구들이 돌아왔다.성지연의 손에는 작은 통이 들려있었는데 재빨리 내 곁으로 와서 보물처럼 나에게 보여줬다.“은성아, 내가 잡은 해파리를 봐. 저녁이면 빛을 낼 수 있다고 했어.”“정말이야?”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통에 담긴 반투명 해파리를 쳐다봤다.“그럼 어항을 찾아 해파리를 담가야지.”그러면서 나는 성지연을 방으로 끌고 가며 정민규를 바라보지 않았다.방에는 해파리를 키우는 데 적합한 공구가 없어 성지연은 한정수를 찾아가 투명한 유리 꽃병을 구해왔다.해파리를 꽃병에 넣은 후에야 나의 손등에 마른 핏자국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성지연은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은성아, 너의 손.”“괜찮아.”나는 방금 바늘을 뽑으며 피가 흐른 손등을 힐끗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테이블에서 티슈를 꺼내 닦았다.“아까 바늘을 뽑으며 피가 났어. 걱정하지 마.”“그럼 다행이야. 난 왠지 네가 바다로 놀라고 온 게 시련을 겪으러 온 것 같아. 먼저 안지선때문에 오른손이 다쳤고 그런 후 감기에 걸렸잖아. 넌 모르겠지만 그날 밤 열이 39도까지 올라갔거든.”성지연은 고개를 들어 머루 같은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난 놀라 미치는 줄 알았어. 정민규가 온밤 간호하며 물리적 방법으로 해열했고 다행히 넌 새벽이 되어서야 열이 내렸어.”그날 비를 맞은 후의 일에 대해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저 내가 기절하기 바로 직전에 정민규가 돌아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빗속에서 성큼성큼 내 곁으로 걸어온 모습만 기억에 남았다.“그래?”“응. 은성아...”고개를 끄덕이다가 성지연은 잠시 머뭇거렸다.“난 왠지 정민규가 변한 것 같아. 너에게 신경 쓰는 것 같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바다로 나가는 것은 정민규
...나는 화로 위에 올려져 구워지고 있는 것처럼 더워 피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었다.악몽을 연달아 꾸며 나는 환생 전 정민규가 진세라 전화를 받고 가차 없이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가 꿈속에서 나는 정민규와 룸에 있었는데 그는 차가운 얼굴로 나에게 진세라를 놓아달라고 말했다.마지막 우리 둘이 관계를 맺은 후 그가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타났다.“고은성, 너 정말 징그러워.”“아니... 내가 아니야...”나는 눈을 번쩍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태양이 해수면을 비추며 굴절되어 물결무늬가 나타났다.“깨어났어?”정민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그의 얼굴에 검푸른 수염이 새로 자라나 피곤해 보였다. 얼마나 잤는지 몰라 나는 핸드폰을 찾으려고 손을 뻗다가 움직이자마자 정민규에게 잡혔다.“움직이지 마. 링거를 맞고 있어.”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뒤늦게야 창가에 링거 주머니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나 얼마나 잤어?”입을 열었지만 나는 거의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목은 칼날을 문 것처럼 아팠다.정민규는 나를 일으키며 물을 한 컵 먹여줬다.“종일 잤어. 그리고 종일 열이 났어.”나는 물 두 모금을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아직도 바다에 있어?”“응.”정민규는 대신 이불을 덮어주며 물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가져다줄게.”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규는 몸을 돌려 나갔다.정민규가 떠난 후 나는 일어서서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켜고 성지연에게 문자를 보내 고은빈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성지연은 고은빈이 밖에서 젊은 청년 남자와 놀고 있다고 말했다.답장을 보낸 후 전화가 걸려왔는데 성지연의 목소리는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은성아, 깨어났어? 정민규는 참 나쁜 거 있지? 내가 시끄럽다고 방에서 널 돌보지도 못하게 했어. 난 그 자식 마음을 알아버렸어! 무조건 널 독차지하려고 했던 게 틀림없어.”“며칠 동안 정민규가
이튿날 나는 성지연이 깨워서야 겨우 일어났다.그녀는 나를 이불속에서 끄집어냈다.“은성아, 우린 스노클링을 하러 갈 건데 너도 갈래?”“안 가.”아직도 졸렸던 나는 다친 손을 꺼내 보였다.“선생님이 물을 다치면 안 된다고 말했어.”내가 일깨워줘서야 그제야 기억이 난 듯 성지연은 나를 깨우지 않고 몇 마디 당부한 후 떠나갔다.그 후 5분도 아니 되어 잠이 싹 사라진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세수를 다 한 나는 갈아입을 옷을 찾아보려고 캐리어를 열었다.캐리어 안에는 치마뿐이다. 나는 하얀색 원피를 꺼냈는데 펼쳐보니 치마 길이가 겨우 허벅지까지 온다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또 파란색을 꺼냈는데 이 치마는 아까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길지만 등과 허리에는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캐리어에서 나는 겨우 검은색 브이넥 허리를 꽉 조이는 원피를 억지로 골라 입은 후방에서 나왔다.어젯밤에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던 나는 먹을 것을 찾으려고 주방으로 갔다.방에서 나왔는데 밖에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에 바닷바람을 맞아서인지 나는 머리가 아팠다.배가 너무 조용해서 나는 그들이 모두 잠수하러 간 줄 알았다. 주방의 회전계단에 도착했을 무렵 고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았어요. 재촉하지 마세요!”나는 걸음을 멈추고 계단 모퉁이 자리에 섰다.고은빈의 화가 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제가 아직 기회를 찾지 못했잖아요, 내가 기회를 찾아야 고은성에게 약을 먹일 수 있어요! 급하시면 직접 하지 그래요?”‘약을 먹인다고?’나는 난간을 꽉 잡았다.‘그래서 이번에 고민욱이 할머니를 이용해 나더러 조운시에 돌아오게 한 것은 약을 먹여 정민규와 관계를 맺으라는 건가? 그래서 고씨 가문을 등에 업고 싶었던 거야?’어쩐지 고우빈이 사람들과 친하지 않고 거의 무시 당하면서 배에 탔더라니.어쩐지 나에게 속셈이 훤히 보이는 이상한 치마들을 준비했더라니.나는 몸을 돌려 고은빈에게 들키기 전에 먼저 떠났다.심장은 바위에
휴대폰을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성지연에게 방해가 될까 봐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몸에 걸치고 별을 보러 나갔다.올해의 이상기후 때문인지 나는 몸에 부는 바람이 의외로 따뜻하게 느껴졌다.도시를 벗어나니 별들도 환하고 밝게 빛나 보여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보여줬다.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별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미세한 문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정민규가 다른 문에서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그는 여전히 어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몸에서 어둠 속을 뚫고 나온 것과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워 고개를 저었다.그는 정민규다. 언제나 사랑받을 듬뿍 받아온 그가 어찌 외로울 수 있겠는가.돌아가려고 할 때 나는 정민규가 담배 한 갑을 더듬어 내더니 한대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았다.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정민규는 두 모금 힘껏 빨았다.‘정민규가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지?’내 기억에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담배 냄새도 싫어해서 주변 친구들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것 같다.내가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때 정민규는 갑자기 돌아섰다.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왠지 훔쳐보다가 들킨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떠나면 또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드러나는 어쩔 수 없이 뻣뻣하게 서 있었다.정민규는 재빨리 몇 모금 빨아들인 후 나를 향해 다가왔다.“담배는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했어?”“넌 왜 아직도 자지 않아?”우리 둘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잠에서 깨어 별 보러 나왔어.”“얼마 전.”우리는 또 한 번 함께 목소리를 냈다.“...”“...”나와 정민규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웃고 나니 분위기가 갑자기 편안해졌다.“졸려? 지금 쉴래? 급하지 않으면 나와 좀 더 있어 줄 수 있어?”왠지 오늘따라 나는 정민규가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난간에 엎드렸다.우리는
나는 괜히 찔려서 뒤로 물러서서 그의 동작을 피하려다가 어색하게 멈춰 섰다.정민규가 핑크 돌고래를 보고 싶냐고 다시 묻자 나는 입술을 감빨며 일부러 쌀쌀하게 말했다.“싫어.”정민규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런데 난 은성이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어떡하지?”귓가에서 짜릿한 저린 느낌이 퍼져 나오자 나는 고개를 홱 돌렸는데 마침 정민규도 같은 시간에 머리를 젖히며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갑자기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그의 턱에 묻은 명도 크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벌떡 일어나 정민규가 나의 눈을 가린 손을 밀쳤다.선생님은 일회용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3일 이내에 물을 다쳐도 자주 움직여서도 안 됩니다. 제가 매일 약 바꿔주러 올 건데 아마 보름 정도면 나을 수 있을 겁니다. 아참, 제가 미용실로 꿰맸으니 은성 씨는 흉터가 남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멍한 표정으로 거즈에 싸인 오른손을 바라보았다....정민규가 룸에서 나와보니 고은빈과 기타 두 남자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한정수가 먼저 설명했다.“안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안지선을 데려갔어. 안지선의 아빠가 그러는데 앞으로 한 달 동안 감금한대. 그럼 구정까지는 아마 나와서 방해하지 못할 거야.”정민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알았다고 대답했다.한정수가 말한 감금은 아마 안씨 가문에서 안지선을 고향에 돌려보냈을 것을 말한다.안씨 가문은 벼락부자였다. 20여 년 전 오씨 가문은 조운시 외딴 산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약재 장사를 하면서 부자가 됐다.듣기론 그곳은 아직도 낙후한 상태라고 했는데 아직도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고 전기도 조명만 쓸 수 있을뿐더러 인터넷은 아예 없다고 했다.시내에 살고 있던 아이가 그곳에 가도 이 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종일 술집과 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 자리에 있던 남학생도 미처 반응이 없자 나는 안지선이 와인잔을 내던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다.곧 투명한 와인잔이 내 손등에 부딪혀 깨졌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흩날리며 내 손등에서는 선홍색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내가 아파서 바닥에 주저앉자 성지연이 부축했다.“은성아.”인기척을 듣고 갑판에서 돌아온 정민규와 한정수는 피투성이가 된 내 손을 보았고 정민규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는 빨리 내 곁으로 다가와 깨끗한 수건으로 피가 흐르는 곳을 가렸다.“어디 다쳤어?”난 아픔을 잘 타지만 또 잘 참았다.전에 병이 너무 심하고 열이 많이 나서 정신이 혼미해졌어도 나는 울어본 적이 없었지만 오늘따라 눈물이 고인 채로 긴장해진 정민규를 바라보았다. “몰라. 아파.”내가 아프다고 했더니 정민규는 더 급해졌다. 그는 한정수더러 수행 의사를 찾아오게 한 후 나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괜찮아. 선생님이 곧 올 거야.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나는 손에 있는 수건을 누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사기꾼, 이건 오랫동안 아플 거야.’곧 한정수가 수행 의사를 데려와 검사한 결과 근골은 다치지 않았지만 상처가 좀 커서 꿰매야 했다.성지연은 곁에서 자책하며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미안해, 은성아. 다 내 탓이야. 내가 아니었으면 넌 다치지 않았을 거야.”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네 탓 아니야.”“지연이 내보내.”나의 상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정민규는 미간을 찌푸리고 성지연을 힐끗 곁눈질했다.한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우리 먼저 나갈게.”“싫어.”성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훔쳤다.바늘을 꿰매는 도구들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성지연이 여기에 남기고 싶지 않아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지연아, 일단 나가서 기다려줘. 난 괜찮아.”내가 이렇게 말하자 한정수는 내가 무균 환경에서 꿰매야 하는데 사람이 많으면 세균이 많아 안 된다며 성지연을 속여 데리고 나갔다.룸 안에는 정민규, 나, 선생님 세 분만 남았다. 바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