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성지연에게 방해가 될까 봐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몸에 걸치고 별을 보러 나갔다.올해의 이상기후 때문인지 나는 몸에 부는 바람이 의외로 따뜻하게 느껴졌다.도시를 벗어나니 별들도 환하고 밝게 빛나 보여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보여줬다.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별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미세한 문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정민규가 다른 문에서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그는 여전히 어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몸에서 어둠 속을 뚫고 나온 것과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워 고개를 저었다.그는 정민규다. 언제나 사랑받을 듬뿍 받아온 그가 어찌 외로울 수 있겠는가.돌아가려고 할 때 나는 정민규가 담배 한 갑을 더듬어 내더니 한대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았다.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정민규는 두 모금 힘껏 빨았다.‘정민규가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지?’내 기억에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담배 냄새도 싫어해서 주변 친구들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것 같다.내가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때 정민규는 갑자기 돌아섰다.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왠지 훔쳐보다가 들킨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떠나면 또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드러나는 어쩔 수 없이 뻣뻣하게 서 있었다.정민규는 재빨리 몇 모금 빨아들인 후 나를 향해 다가왔다.“담배는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했어?”“넌 왜 아직도 자지 않아?”우리 둘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잠에서 깨어 별 보러 나왔어.”“얼마 전.”우리는 또 한 번 함께 목소리를 냈다.“...”“...”나와 정민규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웃고 나니 분위기가 갑자기 편안해졌다.“졸려? 지금 쉴래? 급하지 않으면 나와 좀 더 있어 줄 수 있어?”왠지 오늘따라 나는 정민규가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난간에 엎드렸다.우리는
이튿날 나는 성지연이 깨워서야 겨우 일어났다.그녀는 나를 이불속에서 끄집어냈다.“은성아, 우린 스노클링을 하러 갈 건데 너도 갈래?”“안 가.”아직도 졸렸던 나는 다친 손을 꺼내 보였다.“선생님이 물을 다치면 안 된다고 말했어.”내가 일깨워줘서야 그제야 기억이 난 듯 성지연은 나를 깨우지 않고 몇 마디 당부한 후 떠나갔다.그 후 5분도 아니 되어 잠이 싹 사라진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세수를 다 한 나는 갈아입을 옷을 찾아보려고 캐리어를 열었다.캐리어 안에는 치마뿐이다. 나는 하얀색 원피를 꺼냈는데 펼쳐보니 치마 길이가 겨우 허벅지까지 온다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또 파란색을 꺼냈는데 이 치마는 아까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길지만 등과 허리에는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캐리어에서 나는 겨우 검은색 브이넥 허리를 꽉 조이는 원피를 억지로 골라 입은 후방에서 나왔다.어젯밤에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던 나는 먹을 것을 찾으려고 주방으로 갔다.방에서 나왔는데 밖에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에 바닷바람을 맞아서인지 나는 머리가 아팠다.배가 너무 조용해서 나는 그들이 모두 잠수하러 간 줄 알았다. 주방의 회전계단에 도착했을 무렵 고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았어요. 재촉하지 마세요!”나는 걸음을 멈추고 계단 모퉁이 자리에 섰다.고은빈의 화가 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제가 아직 기회를 찾지 못했잖아요, 내가 기회를 찾아야 고은성에게 약을 먹일 수 있어요! 급하시면 직접 하지 그래요?”‘약을 먹인다고?’나는 난간을 꽉 잡았다.‘그래서 이번에 고민욱이 할머니를 이용해 나더러 조운시에 돌아오게 한 것은 약을 먹여 정민규와 관계를 맺으라는 건가? 그래서 고씨 가문을 등에 업고 싶었던 거야?’어쩐지 고우빈이 사람들과 친하지 않고 거의 무시 당하면서 배에 탔더라니.어쩐지 나에게 속셈이 훤히 보이는 이상한 치마들을 준비했더라니.나는 몸을 돌려 고은빈에게 들키기 전에 먼저 떠났다.심장은 바위에
...나는 화로 위에 올려져 구워지고 있는 것처럼 더워 피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었다.악몽을 연달아 꾸며 나는 환생 전 정민규가 진세라 전화를 받고 가차 없이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가 꿈속에서 나는 정민규와 룸에 있었는데 그는 차가운 얼굴로 나에게 진세라를 놓아달라고 말했다.마지막 우리 둘이 관계를 맺은 후 그가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타났다.“고은성, 너 정말 징그러워.”“아니... 내가 아니야...”나는 눈을 번쩍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태양이 해수면을 비추며 굴절되어 물결무늬가 나타났다.“깨어났어?”정민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그의 얼굴에 검푸른 수염이 새로 자라나 피곤해 보였다. 얼마나 잤는지 몰라 나는 핸드폰을 찾으려고 손을 뻗다가 움직이자마자 정민규에게 잡혔다.“움직이지 마. 링거를 맞고 있어.”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뒤늦게야 창가에 링거 주머니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나 얼마나 잤어?”입을 열었지만 나는 거의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목은 칼날을 문 것처럼 아팠다.정민규는 나를 일으키며 물을 한 컵 먹여줬다.“종일 잤어. 그리고 종일 열이 났어.”나는 물 두 모금을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아직도 바다에 있어?”“응.”정민규는 대신 이불을 덮어주며 물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가져다줄게.”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규는 몸을 돌려 나갔다.정민규가 떠난 후 나는 일어서서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켜고 성지연에게 문자를 보내 고은빈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성지연은 고은빈이 밖에서 젊은 청년 남자와 놀고 있다고 말했다.답장을 보낸 후 전화가 걸려왔는데 성지연의 목소리는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은성아, 깨어났어? 정민규는 참 나쁜 거 있지? 내가 시끄럽다고 방에서 널 돌보지도 못하게 했어. 난 그 자식 마음을 알아버렸어! 무조건 널 독차지하려고 했던 게 틀림없어.”“며칠 동안 정민규가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손에 든 약을 몸 뒤로 숨겼다.내 반응이 너무 컸는지 정민규는 허공에 정지된 손을 미처 거두지도 못한 채 말했다.“손에서 피가 나.”내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때 성지연과 친구들이 돌아왔다.성지연의 손에는 작은 통이 들려있었는데 재빨리 내 곁으로 와서 보물처럼 나에게 보여줬다.“은성아, 내가 잡은 해파리를 봐. 저녁이면 빛을 낼 수 있다고 했어.”“정말이야?”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통에 담긴 반투명 해파리를 쳐다봤다.“그럼 어항을 찾아 해파리를 담가야지.”그러면서 나는 성지연을 방으로 끌고 가며 정민규를 바라보지 않았다.방에는 해파리를 키우는 데 적합한 공구가 없어 성지연은 한정수를 찾아가 투명한 유리 꽃병을 구해왔다.해파리를 꽃병에 넣은 후에야 나의 손등에 마른 핏자국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성지연은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은성아, 너의 손.”“괜찮아.”나는 방금 바늘을 뽑으며 피가 흐른 손등을 힐끗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테이블에서 티슈를 꺼내 닦았다.“아까 바늘을 뽑으며 피가 났어. 걱정하지 마.”“그럼 다행이야. 난 왠지 네가 바다로 놀라고 온 게 시련을 겪으러 온 것 같아. 먼저 안지선때문에 오른손이 다쳤고 그런 후 감기에 걸렸잖아. 넌 모르겠지만 그날 밤 열이 39도까지 올라갔거든.”성지연은 고개를 들어 머루 같은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난 놀라 미치는 줄 알았어. 정민규가 온밤 간호하며 물리적 방법으로 해열했고 다행히 넌 새벽이 되어서야 열이 내렸어.”그날 비를 맞은 후의 일에 대해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저 내가 기절하기 바로 직전에 정민규가 돌아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빗속에서 성큼성큼 내 곁으로 걸어온 모습만 기억에 남았다.“그래?”“응. 은성아...”고개를 끄덕이다가 성지연은 잠시 머뭇거렸다.“난 왠지 정민규가 변한 것 같아. 너에게 신경 쓰는 것 같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바다로 나가는 것은 정민규
“와.”성지연은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은성아, 얘네들 너무 귀여워. 나 녹았어.”성지연의 영향을 받아 나의 마음도 홀가분해졌다.20분 후에 돌고래는 서서히 떠났지만 핑크 돌고래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성지연은 낙담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어쨌든 우리가 그들의 생활에 끼어든 것이기 때문이다.한정수가 다가와 그녀를 놀려주었는데 나는 이 두 사람이 어쩐지 수상해 보였다.눈치 있게 자리를 비워주려고 나는 테이블로 가서 주스를 쥐려고 했는데 이때 정민규가 내 팔을 잡았다.그는 나더러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보라고 눈짓했다. 그 방향으로 보니 핑크색 돌고래가 수면에 나타났다.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는 나를 보고 정민규가 물었다.“예뻐?”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규는 나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름도 있어.”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정민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이름이 젤리야.”젤리. 나는 그때 2학년 때 그의 곁에 붙어 함께 점심을 먹던 일이 생각났다.그날 늦게 가다 보니 식당에는 음식이 다 팔리고 그저 간식인 젤리만 남았다. 간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끄느라 젤리는 모양이 귀엽고 이름도 듣기 좋다고 말하며 나중에 애완동물을 키우면 이름을 젤리라고 짓자고 말했다.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이미 잊어버렸지만 그는 나에게 이 핑크색 돌고래의 이름이 젤리라고 했다.만약 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기록이 있었다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크루즈가 귀항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저녁에 작은 파티를 열어 2025년을 맞이해야 한저녁 12시가 되니 나는 하품을 했다.고은빈은 우유 한 잔을 들고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우유 먹고 다시 자.”고은빈은 우유를 들고 어색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잠자기 전에 우유를 먹는 습관이 있었지만 사이가 별로인 고은성이 처음이 처음으로 우유를 건넸다.고은빈을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널 관심한다고 생각하지 마. 아빠가 그러는데 너
정민규가 나를 그의 방으로 데려가자 나는 불편한 척 연기했고 그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그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송향이 코끝에서 점점 더 짙게 맡아졌다.더듬거리며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탠드를 켜려고 할 때 정민규는 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움직이지 마.”정민규의 두 눈은 마치 끝없는 심연처럼 아득했다.내가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의 귓가에 뽀뽀했다.“고은빈이 밖에서 보고 있어.”이 말을 듣고 나는 저도 모르게 정민규를 쳐다봤다.“잠시만 참아.”나의 손을 잡고 있던 자세가 천천히 깍지를 끼는 자세로 변했고 그는 나의 목에 키스했다.“지난번에 고씨 가문에 프로젝트를 줄 때 그들은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알아버렸어. 최근에 정씨 가문에서 고급 요양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고민욱은 전화를 걸어 네가 할머니 건강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며 함께 놀러 가라고 했어.”정민규의 키스가 점점 더 많아져 나는 좀 견딜 수 없었다.어디서 생긴 힘인지 나는 그를 밀어내고 그의 몸에 올라탔다.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받친 후 나는 머리카락이 흩어져 어깨로부터 가슴으로 미끄러졌다.정민규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보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의 반응을 즉시 알아차렸다.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고 그의 곁을 떠나려고 했으나 정민규는 손을 뻗어 나의 뒤통수를 잡고 다시 끌어당겼다.불빛이 번쩍이고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민규를 밀쳐버린 후 곧 그의 몸에서 내려와 째려봤다.“정민규, 너 양아치야?”정민규는 여전히 나 때문에 침대에 누운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는데 눈 밑에는 욕망이 깔려있었다.나는 이런 그의 모습이 익숙했다.정민규는 침대를 떠나면 점잖은 선비 같았으나 침대에 오르기만 하면 용맹한 호랑이로 변신했고 내가 울면서 용서를 빌어야 그만둘 때가 많았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그의 눈을 피하려고 돌아누웠다.잠시 후 나는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비록 지금 나에게 약을 썼고 내일 모든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고 욕을 먹게 하려고 작정했지만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도울게. 김씨 가문도 형편이 괜찮은 가문이야. 고 대표에게 있어 나쁜 선택이 아니야.”고개를 돌려보니 정민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밤은 유난히 길었다.배가 부둣가에 멈춰서자 고민욱이 한 무리 사람들을 걸리고 뛰어왔다.그들은 정민규의 침실로 곧장 향했고 나는 멀리서부터 김다비의 가식적인 목소리를 들었다.“여보, 화내지 마. 아이가 이미 컸으니 말로 해.”곧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도련님, 우리 은성이는 깨끗한 아이인데 앞으로...”고민욱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나는 그의 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제가 왜요?”정민규도 올 블랙차림으로 나왔다.“고 대표님 방금 하신 말씀은 무슨 말이세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저한테 무슨 용건이 있어서죠?”“아빠와 아줌마는 혹시 은빈을 데리러 왔어요?”나는 아까 고민욱을 쌀쌀하게 대해던 태도와 달리 웃으며 말했다.“제가 안내할게요.”그런 후 그들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고은빈의 방으로 갔다.고민욱과 김다비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고은빈은 김씨 가문의 도련님과 부둥켜안고 있었고 바닥에는 속옷, 바지, 신발이 널브러졌다.안색이 변한 김다비는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보지 마세요. 그만 봐요.”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말했다.“아빠, 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그리고...”나는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을 둘러봤다.“함부로 말하며 내 동생의 명성을 어지럽히면 안 돼요. 저의 동생은 아직 18살이 되지 않았거든요.”‘퍽’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따귀를 맞았고 김다비는 씩씩거리며 나를 째려봤다.“고은성, 감히 은빈이를 해치다니!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김다비의 동작이 너무 빨랐다. 그녀가 나를 때리자 정민규는 즉시 나를 몸 뒤로 숨기며 말했다.“사모님, 감히 내 구
칠흑처럼 어두운 밤.적막 속에서 정민규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비록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기도 했다.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했고, 호흡마저 흐트러졌으며 그의 움직임은 점점 다급해졌다.결국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민규야...”띠링-귀에 거슬리는 벨소리가 후끈 달아올랐던 방 안의 열기를 단숨에 식혔다.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화면에 뜬 발신인을 확인했다.[세라.]숨이 턱 막혔고, 나도 모르게 패닉에 빠졌다.어둠 속에서 비록 정민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나는 용기를 내어 절박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키스하려고 했다.그러나 정민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피하고는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너머로 나긋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민규야.”곧이어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달빛 아래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그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가슴 속을 가득 채운 행복감이 썰물처럼 밀려났고,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분노와 좌절, 절망만 남았다.마침내 정민규는 전화를 끊었다.딸깍!눈부신 조명이 켜지고 정민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잘생긴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오후에 네가 세라의 전화를 받았어?”비록 의문조였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고, 죄라도 묻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나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그래. 전화를 받았을뿐더러 통화 기록도 삭제했지. 심지어 오늘 귀국 사실을 숨기려고 일부러 너한테 술까지 먹였어.”순순히 인정하자, 정민규의 눈에서 분노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그는 무표정한 얼굴은 더는 상종하기 싫은 듯싶었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정민규!”나는 이불을 움켜쥐고 눈물을 애써 참았다.“우리 결혼기념일에 꼭 전 여친 보러 가야 해?”정민규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비록 지금 나에게 약을 썼고 내일 모든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고 욕을 먹게 하려고 작정했지만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도울게. 김씨 가문도 형편이 괜찮은 가문이야. 고 대표에게 있어 나쁜 선택이 아니야.”고개를 돌려보니 정민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밤은 유난히 길었다.배가 부둣가에 멈춰서자 고민욱이 한 무리 사람들을 걸리고 뛰어왔다.그들은 정민규의 침실로 곧장 향했고 나는 멀리서부터 김다비의 가식적인 목소리를 들었다.“여보, 화내지 마. 아이가 이미 컸으니 말로 해.”곧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도련님, 우리 은성이는 깨끗한 아이인데 앞으로...”고민욱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나는 그의 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제가 왜요?”정민규도 올 블랙차림으로 나왔다.“고 대표님 방금 하신 말씀은 무슨 말이세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저한테 무슨 용건이 있어서죠?”“아빠와 아줌마는 혹시 은빈을 데리러 왔어요?”나는 아까 고민욱을 쌀쌀하게 대해던 태도와 달리 웃으며 말했다.“제가 안내할게요.”그런 후 그들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고은빈의 방으로 갔다.고민욱과 김다비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고은빈은 김씨 가문의 도련님과 부둥켜안고 있었고 바닥에는 속옷, 바지, 신발이 널브러졌다.안색이 변한 김다비는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보지 마세요. 그만 봐요.”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말했다.“아빠, 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그리고...”나는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을 둘러봤다.“함부로 말하며 내 동생의 명성을 어지럽히면 안 돼요. 저의 동생은 아직 18살이 되지 않았거든요.”‘퍽’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따귀를 맞았고 김다비는 씩씩거리며 나를 째려봤다.“고은성, 감히 은빈이를 해치다니!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김다비의 동작이 너무 빨랐다. 그녀가 나를 때리자 정민규는 즉시 나를 몸 뒤로 숨기며 말했다.“사모님, 감히 내 구
정민규가 나를 그의 방으로 데려가자 나는 불편한 척 연기했고 그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그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송향이 코끝에서 점점 더 짙게 맡아졌다.더듬거리며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탠드를 켜려고 할 때 정민규는 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움직이지 마.”정민규의 두 눈은 마치 끝없는 심연처럼 아득했다.내가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의 귓가에 뽀뽀했다.“고은빈이 밖에서 보고 있어.”이 말을 듣고 나는 저도 모르게 정민규를 쳐다봤다.“잠시만 참아.”나의 손을 잡고 있던 자세가 천천히 깍지를 끼는 자세로 변했고 그는 나의 목에 키스했다.“지난번에 고씨 가문에 프로젝트를 줄 때 그들은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알아버렸어. 최근에 정씨 가문에서 고급 요양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고민욱은 전화를 걸어 네가 할머니 건강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며 함께 놀러 가라고 했어.”정민규의 키스가 점점 더 많아져 나는 좀 견딜 수 없었다.어디서 생긴 힘인지 나는 그를 밀어내고 그의 몸에 올라탔다.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받친 후 나는 머리카락이 흩어져 어깨로부터 가슴으로 미끄러졌다.정민규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보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의 반응을 즉시 알아차렸다.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고 그의 곁을 떠나려고 했으나 정민규는 손을 뻗어 나의 뒤통수를 잡고 다시 끌어당겼다.불빛이 번쩍이고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민규를 밀쳐버린 후 곧 그의 몸에서 내려와 째려봤다.“정민규, 너 양아치야?”정민규는 여전히 나 때문에 침대에 누운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는데 눈 밑에는 욕망이 깔려있었다.나는 이런 그의 모습이 익숙했다.정민규는 침대를 떠나면 점잖은 선비 같았으나 침대에 오르기만 하면 용맹한 호랑이로 변신했고 내가 울면서 용서를 빌어야 그만둘 때가 많았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그의 눈을 피하려고 돌아누웠다.잠시 후 나는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와.”성지연은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은성아, 얘네들 너무 귀여워. 나 녹았어.”성지연의 영향을 받아 나의 마음도 홀가분해졌다.20분 후에 돌고래는 서서히 떠났지만 핑크 돌고래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성지연은 낙담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어쨌든 우리가 그들의 생활에 끼어든 것이기 때문이다.한정수가 다가와 그녀를 놀려주었는데 나는 이 두 사람이 어쩐지 수상해 보였다.눈치 있게 자리를 비워주려고 나는 테이블로 가서 주스를 쥐려고 했는데 이때 정민규가 내 팔을 잡았다.그는 나더러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보라고 눈짓했다. 그 방향으로 보니 핑크색 돌고래가 수면에 나타났다.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는 나를 보고 정민규가 물었다.“예뻐?”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규는 나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름도 있어.”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정민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이름이 젤리야.”젤리. 나는 그때 2학년 때 그의 곁에 붙어 함께 점심을 먹던 일이 생각났다.그날 늦게 가다 보니 식당에는 음식이 다 팔리고 그저 간식인 젤리만 남았다. 간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끄느라 젤리는 모양이 귀엽고 이름도 듣기 좋다고 말하며 나중에 애완동물을 키우면 이름을 젤리라고 짓자고 말했다.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이미 잊어버렸지만 그는 나에게 이 핑크색 돌고래의 이름이 젤리라고 했다.만약 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기록이 있었다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크루즈가 귀항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저녁에 작은 파티를 열어 2025년을 맞이해야 한저녁 12시가 되니 나는 하품을 했다.고은빈은 우유 한 잔을 들고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우유 먹고 다시 자.”고은빈은 우유를 들고 어색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잠자기 전에 우유를 먹는 습관이 있었지만 사이가 별로인 고은성이 처음이 처음으로 우유를 건넸다.고은빈을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널 관심한다고 생각하지 마. 아빠가 그러는데 너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손에 든 약을 몸 뒤로 숨겼다.내 반응이 너무 컸는지 정민규는 허공에 정지된 손을 미처 거두지도 못한 채 말했다.“손에서 피가 나.”내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때 성지연과 친구들이 돌아왔다.성지연의 손에는 작은 통이 들려있었는데 재빨리 내 곁으로 와서 보물처럼 나에게 보여줬다.“은성아, 내가 잡은 해파리를 봐. 저녁이면 빛을 낼 수 있다고 했어.”“정말이야?”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통에 담긴 반투명 해파리를 쳐다봤다.“그럼 어항을 찾아 해파리를 담가야지.”그러면서 나는 성지연을 방으로 끌고 가며 정민규를 바라보지 않았다.방에는 해파리를 키우는 데 적합한 공구가 없어 성지연은 한정수를 찾아가 투명한 유리 꽃병을 구해왔다.해파리를 꽃병에 넣은 후에야 나의 손등에 마른 핏자국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성지연은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은성아, 너의 손.”“괜찮아.”나는 방금 바늘을 뽑으며 피가 흐른 손등을 힐끗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테이블에서 티슈를 꺼내 닦았다.“아까 바늘을 뽑으며 피가 났어. 걱정하지 마.”“그럼 다행이야. 난 왠지 네가 바다로 놀라고 온 게 시련을 겪으러 온 것 같아. 먼저 안지선때문에 오른손이 다쳤고 그런 후 감기에 걸렸잖아. 넌 모르겠지만 그날 밤 열이 39도까지 올라갔거든.”성지연은 고개를 들어 머루 같은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난 놀라 미치는 줄 알았어. 정민규가 온밤 간호하며 물리적 방법으로 해열했고 다행히 넌 새벽이 되어서야 열이 내렸어.”그날 비를 맞은 후의 일에 대해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저 내가 기절하기 바로 직전에 정민규가 돌아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빗속에서 성큼성큼 내 곁으로 걸어온 모습만 기억에 남았다.“그래?”“응. 은성아...”고개를 끄덕이다가 성지연은 잠시 머뭇거렸다.“난 왠지 정민규가 변한 것 같아. 너에게 신경 쓰는 것 같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바다로 나가는 것은 정민규
...나는 화로 위에 올려져 구워지고 있는 것처럼 더워 피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었다.악몽을 연달아 꾸며 나는 환생 전 정민규가 진세라 전화를 받고 가차 없이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가 꿈속에서 나는 정민규와 룸에 있었는데 그는 차가운 얼굴로 나에게 진세라를 놓아달라고 말했다.마지막 우리 둘이 관계를 맺은 후 그가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타났다.“고은성, 너 정말 징그러워.”“아니... 내가 아니야...”나는 눈을 번쩍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태양이 해수면을 비추며 굴절되어 물결무늬가 나타났다.“깨어났어?”정민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그의 얼굴에 검푸른 수염이 새로 자라나 피곤해 보였다. 얼마나 잤는지 몰라 나는 핸드폰을 찾으려고 손을 뻗다가 움직이자마자 정민규에게 잡혔다.“움직이지 마. 링거를 맞고 있어.”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뒤늦게야 창가에 링거 주머니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나 얼마나 잤어?”입을 열었지만 나는 거의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목은 칼날을 문 것처럼 아팠다.정민규는 나를 일으키며 물을 한 컵 먹여줬다.“종일 잤어. 그리고 종일 열이 났어.”나는 물 두 모금을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아직도 바다에 있어?”“응.”정민규는 대신 이불을 덮어주며 물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가져다줄게.”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규는 몸을 돌려 나갔다.정민규가 떠난 후 나는 일어서서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켜고 성지연에게 문자를 보내 고은빈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성지연은 고은빈이 밖에서 젊은 청년 남자와 놀고 있다고 말했다.답장을 보낸 후 전화가 걸려왔는데 성지연의 목소리는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은성아, 깨어났어? 정민규는 참 나쁜 거 있지? 내가 시끄럽다고 방에서 널 돌보지도 못하게 했어. 난 그 자식 마음을 알아버렸어! 무조건 널 독차지하려고 했던 게 틀림없어.”“며칠 동안 정민규가
이튿날 나는 성지연이 깨워서야 겨우 일어났다.그녀는 나를 이불속에서 끄집어냈다.“은성아, 우린 스노클링을 하러 갈 건데 너도 갈래?”“안 가.”아직도 졸렸던 나는 다친 손을 꺼내 보였다.“선생님이 물을 다치면 안 된다고 말했어.”내가 일깨워줘서야 그제야 기억이 난 듯 성지연은 나를 깨우지 않고 몇 마디 당부한 후 떠나갔다.그 후 5분도 아니 되어 잠이 싹 사라진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세수를 다 한 나는 갈아입을 옷을 찾아보려고 캐리어를 열었다.캐리어 안에는 치마뿐이다. 나는 하얀색 원피를 꺼냈는데 펼쳐보니 치마 길이가 겨우 허벅지까지 온다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또 파란색을 꺼냈는데 이 치마는 아까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길지만 등과 허리에는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캐리어에서 나는 겨우 검은색 브이넥 허리를 꽉 조이는 원피를 억지로 골라 입은 후방에서 나왔다.어젯밤에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던 나는 먹을 것을 찾으려고 주방으로 갔다.방에서 나왔는데 밖에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에 바닷바람을 맞아서인지 나는 머리가 아팠다.배가 너무 조용해서 나는 그들이 모두 잠수하러 간 줄 알았다. 주방의 회전계단에 도착했을 무렵 고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았어요. 재촉하지 마세요!”나는 걸음을 멈추고 계단 모퉁이 자리에 섰다.고은빈의 화가 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제가 아직 기회를 찾지 못했잖아요, 내가 기회를 찾아야 고은성에게 약을 먹일 수 있어요! 급하시면 직접 하지 그래요?”‘약을 먹인다고?’나는 난간을 꽉 잡았다.‘그래서 이번에 고민욱이 할머니를 이용해 나더러 조운시에 돌아오게 한 것은 약을 먹여 정민규와 관계를 맺으라는 건가? 그래서 고씨 가문을 등에 업고 싶었던 거야?’어쩐지 고우빈이 사람들과 친하지 않고 거의 무시 당하면서 배에 탔더라니.어쩐지 나에게 속셈이 훤히 보이는 이상한 치마들을 준비했더라니.나는 몸을 돌려 고은빈에게 들키기 전에 먼저 떠났다.심장은 바위에
휴대폰을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성지연에게 방해가 될까 봐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몸에 걸치고 별을 보러 나갔다.올해의 이상기후 때문인지 나는 몸에 부는 바람이 의외로 따뜻하게 느껴졌다.도시를 벗어나니 별들도 환하고 밝게 빛나 보여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보여줬다.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별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미세한 문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정민규가 다른 문에서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그는 여전히 어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몸에서 어둠 속을 뚫고 나온 것과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워 고개를 저었다.그는 정민규다. 언제나 사랑받을 듬뿍 받아온 그가 어찌 외로울 수 있겠는가.돌아가려고 할 때 나는 정민규가 담배 한 갑을 더듬어 내더니 한대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았다.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정민규는 두 모금 힘껏 빨았다.‘정민규가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지?’내 기억에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담배 냄새도 싫어해서 주변 친구들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것 같다.내가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때 정민규는 갑자기 돌아섰다.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왠지 훔쳐보다가 들킨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떠나면 또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드러나는 어쩔 수 없이 뻣뻣하게 서 있었다.정민규는 재빨리 몇 모금 빨아들인 후 나를 향해 다가왔다.“담배는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했어?”“넌 왜 아직도 자지 않아?”우리 둘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잠에서 깨어 별 보러 나왔어.”“얼마 전.”우리는 또 한 번 함께 목소리를 냈다.“...”“...”나와 정민규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웃고 나니 분위기가 갑자기 편안해졌다.“졸려? 지금 쉴래? 급하지 않으면 나와 좀 더 있어 줄 수 있어?”왠지 오늘따라 나는 정민규가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난간에 엎드렸다.우리는
나는 괜히 찔려서 뒤로 물러서서 그의 동작을 피하려다가 어색하게 멈춰 섰다.정민규가 핑크 돌고래를 보고 싶냐고 다시 묻자 나는 입술을 감빨며 일부러 쌀쌀하게 말했다.“싫어.”정민규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런데 난 은성이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어떡하지?”귓가에서 짜릿한 저린 느낌이 퍼져 나오자 나는 고개를 홱 돌렸는데 마침 정민규도 같은 시간에 머리를 젖히며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갑자기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그의 턱에 묻은 명도 크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벌떡 일어나 정민규가 나의 눈을 가린 손을 밀쳤다.선생님은 일회용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3일 이내에 물을 다쳐도 자주 움직여서도 안 됩니다. 제가 매일 약 바꿔주러 올 건데 아마 보름 정도면 나을 수 있을 겁니다. 아참, 제가 미용실로 꿰맸으니 은성 씨는 흉터가 남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멍한 표정으로 거즈에 싸인 오른손을 바라보았다....정민규가 룸에서 나와보니 고은빈과 기타 두 남자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한정수가 먼저 설명했다.“안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안지선을 데려갔어. 안지선의 아빠가 그러는데 앞으로 한 달 동안 감금한대. 그럼 구정까지는 아마 나와서 방해하지 못할 거야.”정민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알았다고 대답했다.한정수가 말한 감금은 아마 안씨 가문에서 안지선을 고향에 돌려보냈을 것을 말한다.안씨 가문은 벼락부자였다. 20여 년 전 오씨 가문은 조운시 외딴 산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약재 장사를 하면서 부자가 됐다.듣기론 그곳은 아직도 낙후한 상태라고 했는데 아직도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고 전기도 조명만 쓸 수 있을뿐더러 인터넷은 아예 없다고 했다.시내에 살고 있던 아이가 그곳에 가도 이 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종일 술집과 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 자리에 있던 남학생도 미처 반응이 없자 나는 안지선이 와인잔을 내던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다.곧 투명한 와인잔이 내 손등에 부딪혀 깨졌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흩날리며 내 손등에서는 선홍색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내가 아파서 바닥에 주저앉자 성지연이 부축했다.“은성아.”인기척을 듣고 갑판에서 돌아온 정민규와 한정수는 피투성이가 된 내 손을 보았고 정민규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는 빨리 내 곁으로 다가와 깨끗한 수건으로 피가 흐르는 곳을 가렸다.“어디 다쳤어?”난 아픔을 잘 타지만 또 잘 참았다.전에 병이 너무 심하고 열이 많이 나서 정신이 혼미해졌어도 나는 울어본 적이 없었지만 오늘따라 눈물이 고인 채로 긴장해진 정민규를 바라보았다. “몰라. 아파.”내가 아프다고 했더니 정민규는 더 급해졌다. 그는 한정수더러 수행 의사를 찾아오게 한 후 나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괜찮아. 선생님이 곧 올 거야.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나는 손에 있는 수건을 누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사기꾼, 이건 오랫동안 아플 거야.’곧 한정수가 수행 의사를 데려와 검사한 결과 근골은 다치지 않았지만 상처가 좀 커서 꿰매야 했다.성지연은 곁에서 자책하며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미안해, 은성아. 다 내 탓이야. 내가 아니었으면 넌 다치지 않았을 거야.”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네 탓 아니야.”“지연이 내보내.”나의 상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정민규는 미간을 찌푸리고 성지연을 힐끗 곁눈질했다.한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우리 먼저 나갈게.”“싫어.”성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훔쳤다.바늘을 꿰매는 도구들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성지연이 여기에 남기고 싶지 않아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지연아, 일단 나가서 기다려줘. 난 괜찮아.”내가 이렇게 말하자 한정수는 내가 무균 환경에서 꿰매야 하는데 사람이 많으면 세균이 많아 안 된다며 성지연을 속여 데리고 나갔다.룸 안에는 정민규, 나, 선생님 세 분만 남았다. 바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