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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작가: 봉숭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11 13:28:02
“재수 없어.”

성지연은 진세라를 보자마자 싫은 내색을 하며 나를 끌고 매장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은성아, 파리 꼬이니까 다른 가게 둘러보자.”

이내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진세라는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닌지라 굳이 시비가 붙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가자.”

성지연과 함께 밖으로 나서는데 일당 중 한 명이 눈을 흘기면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부자 코스플레이하기는, 곧 파산 직전인 거 다 아는데 아직도 거들먹거리고 있네.”

진세라는 그녀를 말리는 척했다.

“그만 해.”

“뭐라고?”

성지연이 문득 뒤돌아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다가가 진세라를 밀어내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옷걸이에 부딪혔다.

일당 중 또 다른 한 명이 급히 뛰어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세라야, 괜찮아? 성지연! 손찌검은 왜 하는 거야?”

“맞아도 싸거든? 주둥아리 함부로 놀렸다가 흠씬 두들겨 맞을 줄 알아.”

추진력이 어찌나 좋은지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지연은 일당 앞으로 다가가 뺨을 때리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는 이미 머릿수에서 밀렸기에 고작 둘이서 세 명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소에 금지옥엽으로 자라 누가 봐도 여리여리한 모습인지라 막상 싸우게 되면 승산이 희박했다.

심지어 선방을 날린 사람은 성지연이지 않은가?

그것도 수능 전날에 시비에 휘말려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내 서둘러 뛰어가 있는 힘껏 휘두르는 성지연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제지하는 줄 알았다.

진세라의 껌딱지가 대뜸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주인이 상황 파악이 더 빠르군. 졸개는 가만히 찌그러져 있는 게 어때?”

곧이어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얼굴이 옆으로 꺾였다.

다시 태어난 이후로 나는 굳이 사사건건 대응하거나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진세라가 아무리 태클을 걸어도 시종일관 못 본 척했다.

하지만 인내의 결과는 설령 업신여김을 당해도 찍소리 못하는 물러터진 사람으로 비친 듯싶었다. 심지어 친구마저 무시하고 괴롭혀도 될 정도로 나약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나는 인정사정없이 따귀를 날렸다. 상대방은 뺨을 맞자마자 얼굴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

아무도 내가 손찌검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진세라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껌딱지를 끌어안았다.

“고은성, 사람은 왜 때려!”

성지연이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지 정녕 모르겠어?”

나는 진세라를 무시하고 성지연을 뒤로 끌어당긴 다음 껌딱지를 바라보았다.

“안유정 맞지? 지난번 모의고사 끝나고 패싸움하다가 퇴학당할 뻔했다고 들었는데 엄마 아빠가 교장실까지 찾아가 무릎 꿇고 싹싹 빌어서 겨우 없던 일로 했다며?”

조운고등학교는 조운시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학교에는 다양한 계층의 학생들이 있는데 나랑 성지연처럼 가정형편이 좋아서 후원금을 내고 입학하거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잘해서 시험 보고 합격한 진세라 일당 같은 유형도 존재했다.

두 가지 부류의 제일 큰 차이점은 아마도 돈 많은 사람이 선택지가 더 많고 뱃심이 두둑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안유정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싸늘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내일이면 수능인데 괜히 말썽 피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과연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지는 두고 보자고.”

이내 진세라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진세라는 흠칫 놀라더니 금세 정신을 차리고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우리 협박하는 거야?”

“진세라.”

왠지 모르게 인내심이 점점 바닥이 났지만 그래도 꾹 참고 말했다.

“굳이 날 견제하지 않아도 돼. 이제 정민규 안 좋아한다고 여러 번 얘기했잖아. 나한테 적대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정력을 쏟아부어도 헛수고일 테니까. 똑똑한 사람이라면 공부에 더 집중해서 스스로 향상하는 데 노력했을 거야. 정민규의 할아버지는 워낙 널 좋아해서 집안 배경 따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정민규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라는 보장은 없거든?”

유유자적 말을 마치는 순간 다들 감히 찍소리도 못 냈다.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성지연을 쳐다봤다.

성지연도 고개를 돌렸고 입맛 벙긋하다가 말을 아끼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귀신이라도 본 건가?

그러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비아냥거리는 정민규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주 점쟁이가 납셨네? 본인이 단성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는지도 예측할 수 있나 몰라?”

순간 등골에 오싹하며 식은땀이 바짝 났다.

정민규가 왜 여기 있단 말이지?

방금 한 말을 어디까지 들은 거지?

이제 정민규에게 관심은 없지만 남의 집안일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내 죄책감이 밀려왔고 난처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계속 얘기해보던가? 말발 하나는 끝내주잖아?”

정민규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이내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표정 관리한 다음 뒤로 돌아섰다.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알려줄래? 네 입맛에 맞춰서 화제를 바꿀 테니까.”

남의 험담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게다가 당사자 앞에서 떠벌리는 꼴이 되어 속으로 미안했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 하기에 설령 잘못을 인지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진세라와 그를 위해서 하는 말이지 않은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정민규는 옆에 있던 옷걸이를 발로 걷어찼다.

다들 겁을 먹은 나머지 덜덜 떨었고, 심지어 직원마저 아수라장이 된 매장을 보고도 감히 찍소리도 못 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정민규의 모습은 처음 보는지 진세라는 빨개진 눈시울로 조심스레 말했다.

“민규야...”

“나가.”

“민규...”

진세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민규는 인내심이 바닥 난 상황에서 반대편 옷걸이도 걷어차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다 꺼지라고.”

곧이어 진세라와 일당은 모습을 감췄고, 정민규가 계산대에 블랙 카드 한 장을 내려놓자 매장 직원도 눈치 빠르게 떠났다.

결국 가게에는 나랑 정민규, 성지연 단 세 사람만 남아 있었다.

성지연은 내가 정민규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되는 듯 손을 꼭 붙잡았다. 사실화가 난 정민규를 그녀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어차피 나 때문에 열을 받은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성지연을 향해 말했다.

“먼저 나가서 기다릴래? 금방 갈게.”

“안 돼, 나도...”

이내 정민규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폭발하기 직전까지 온 상태였다.

“괜찮아.”

그리고 성지연의 말을 끊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내 걱정하지 말고 먼저 나가 있어. 이따가 찾으러 갈게.”

성지연은 조심스레 정민규를 훔쳐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불안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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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덟, 스물 다섯   제18화

    그 빗물이 다른 사람에게 닿으면 미움만 살 뿐이었다.한참 동안 토하다가 마신 술을 전부 비우고 나서야 속이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빙빙 돌았다.다시 룸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성지연에게 그만 집에 가자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노래방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회전문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과를 건넸다.“미안합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죠?”예상했던 책망이 들리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나상민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물어볼 사람은 나지. 어디 아픈 데 없어? 내 초콜릿 복근이 꽤 탄탄할 텐데.”생뚱맞긴 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나는 나상민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괜찮다면 먼저 가볼게.”그러고는 나가려 했다.“잠깐.”나상민이 쫓아와서 말했다.“내 제안 한 번 더 생각해 봐.”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그의 제안이 무엇이었던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물었다.“제안?”“내 여자 친구가 되어달라는 거 말이야.”나상민이 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주고 아껴줄게. 네 말이라면 토 달지 않고 무조건 따를게.”나는 그런 나상민이 귀찮기만 했다. 짜증이 밀려와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냈다.“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 다른 여자들은 알아?”“하하하하, 걔네들은 내가 말하기를 바랄걸?”나상민은 외투를 벗어 나에게 걸쳐주었다.“밖에 비 와. 이것만 입고 나가면 감기 걸려. 고마워할 건 없고.”그러고는 또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내 제안 진짜로 한번 생각해 봐.”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나상민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나는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그때 누군가 나의 손목을 잡고 확 잡아당겼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다가 삼나무 향이 코를 스쳤다.‘정민규.’누구인지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이미 벽과 벽 사이의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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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챕터

  • 열여덟, 스물 다섯   제30화

    나는 고민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상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한 건 물론이고 체면을 잃어 배상까지 하게 생겼다. 지금 나에 대한 미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은성.”고민욱은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와? 넌 어떻게 된 게 창피한 줄을 몰라? 너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알아?”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서 있자 고민욱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그런 창피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이 엄청난 사고를 어떻게 수습할 건데?”고민욱은 분노에 찬 두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망친 계약의 책임을 나에게 물을 기세였다.나는 싸늘하게 웃었고 두 눈에 하찮음이 스쳤다. 마음이 하도 차갑게 식은 탓인지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고민욱의 친딸이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나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고 혼내기만 했다.한 사람이 가치를 잃게 되면 함부로 짓밟아도 된단 말인가?“지금까지 아빠는 나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고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한 적도 없이 다짜고짜 혼내기만 했어요. 그러니 회사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문제니까 그 사람이 주요 책임을 져야 하는 거 맞죠?”고민욱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왜 이렇게 당당하게 째려보는지도 알지 못했다.김다비가 얼굴을 찌푸리고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은성아, 이젠 그 나이가 됐으면 아빠 걱정 좀 덜어주면 안 돼?”싸움을 말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진퇴양난에 빠뜨려 비난하려 했다.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쇼핑백을 바닥에 던졌다. 드레스가 떨어진 순간 고은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나의 날카로운 시선은 비수처럼 고은빈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치명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드레스를 망가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9화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정민규가 걸쳐준 겉옷을 꽉 잡았다.고개를 들어 옆을 힐끗거렸는데 진세라가 어둡기 그지없는 안색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 섞인 눈빛에 나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고 나와 정민규가 함께 자리를 떠나서 무척이나 분노한 모습이었다.그렇다. 여자는 질투에 눈이 멀면 자기만의 상상을 펼치게 된다.진세라의 질투와 혐오 섞인 눈빛을 본 나는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정민규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고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뒤에서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신경 쓸 새가 없이 그냥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을 뿐이었다.이 자리는 고민욱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였고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권력에 빌붙고 상류 사회에 들어가는 디딤돌이었다. 정민규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고민욱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문 앞에 다 와서야 나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가서 옷 갈아입어.”그의 말투는 냉랭했지만 불만도 섞여 있었다.“괜찮아.”나는 정민규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내가 얼마나 그와 선을 긋고 싶어 하는지 아마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럼 계속 여기 서서 사람들이 쳐다보게 놔둘 거야? 이런 수단으로 시선을 끌고 싶어?”정민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내가 이러고 있는 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정민규,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그러고는 그의 겉옷을 잡고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았다.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쫓아오려는 것 같았다.그런데 가녀린 누군가가 정민규의 앞에 나타났다. 진세라가 쫓아온 것이었다. 나와 정민규가 단둘이 있게 내버려 둘 진세라가 아니었다.“기사님, 출발하세요.”나는 겉옷을 움켜잡았다. 조금 전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지금 걸치고 있는 이 겉옷이 창피함을 가리는 옷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돌아간 후 나는 드레스를 벗고 꼼꼼하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드레스를 건드렸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8화

    나상민은 차갑기 그지없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 고민욱을 까발리지 않았다.“그랬군요. 정말 영광입니다.”나상민은 등 뒤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이건 내가 준비한 진학 선물이야.”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선물을 받았다.“고마워.”나의 말이 떨어진 그때 또 세 사람이 도착했다. 정민규와 진세라, 그리고 한정수였다.나는 고민욱을 흘끔 보면서 정민규까지 초대한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민욱은 나에게 나상민을 안내하라고 한 후 빠른 걸음으로 정민규의 앞으로 걸어갔다.정민규는 오늘 밤 진세라와 커플룩으로 맞춰 입었다. 두 사람 모두 블랙 톤으로 맞춰 입었는데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나는 대충 힐끔거린 후 시선을 거두었다. 나상민이 팔을 내밀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그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네 파트너가 될 사람은 나뿐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나는 웃기만 할 뿐 팔짱을 끼진 않았다.“가끔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도 안 좋아.”그러고는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마치고 나니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재빨리 빈 자리를 찾아 하이힐을 벗고 휴식했다.그런데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다비가 다가오더니 춤을 춰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금방 벗은 신발을 다시 신었다.내가 다가가자마자 나상민이 인파 속에서 걸어왔다. 나에게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매너 있게 물었다.“아름다운 은성아, 너랑 같이 춤을 출 영광을 누려도 될까?”나상민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정민규도 다가왔다. 정민규는 블랙 슈트 차림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춤은 나랑 가장 먼저 추기로 약속했잖아.”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 정민규에게 매달릴 때 단성대학교에 붙기만 하면 그와 가장 먼저 춤을 추겠다고 약속했었다.시간이 하도 빨리 지나서 예전의 일을 많이 잊어버렸다.나는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건네진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은 고마운데 이미 함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7화

    김다비는 고은빈을 노려보면서 한심한 말투로 말했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날 밤에 엄마가 뭐라 했었는지 다 잊었어? 고은성은 지금 이용 가치가 있어. 고씨 가문이 더 많은 권력자와 친분을 맺으려면 고은성이 있어야 해.”“그럼 나는요?”고은빈이 속상해하며 울었다.“나도 이 집 딸이에요. 근데 왜 다 고은성한테 기대야 하는 건데요?”김다비는 고은빈이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놀란 마음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고은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고은성한테 기대는 게 아니라 엄마는 네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러지. 권력자들한테 빌붙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넌 엄마한테 가장 소중한 딸이야. 네가 다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엄마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한테는 가장 좋은 것만 줄 거야.”김다비는 고은빈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머리를 어루만졌다.“고씨 가문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서 고은성이 재벌에 시집가면 무조건 시댁에서 모욕을 당하면서 살 거야.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고은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전 고은성이 일부러 그녀 앞에서 자랑하던 것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이튿날 아침, 고씨 가문 전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고은성이 잠에서 깨자 피부 관리사가 먼저 와서 피부 케어를 해주었고 그 뒤로 메이크업도 받고 헤어도 했다.할 게 너무 많아 차라리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작은아가씨, 먼저 다른 데 가서 쉬세요. 큰아가씨 쪽이 하도 바빠서 작은아가씨를 돌봐줄 시간이 없어요.”도우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고은빈도 마침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발 저린 듯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드레스를 다림질하고 있었다.“은빈이 왜 왔대요?”“잠깐 들어와서 보고 그냥 나갔어요.”손목 화환을 가져다준 도우미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만 끄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6화

    16살에 내가 넘어졌을 때 나를 일으켜주고 밴드를 붙여준 다음 아프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고 약한 마음을 다잡았다.‘오히려 지금이 좋아.’더는 그들에게 기대할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나도 사랑할 필요가 없었다.이런 것들이 없으니 차라리 더 홀가분했다....진학 연회는 3일 뒤로 정해졌다. 그날이 오기 전에 고민욱과 김다비는 나에게 꽤 많은 돈을 썼다.김다비는 조운시에서 가장 잘하는 피부 관리사를 예약하여 연속 이틀 관리를 받게 해주었고 헤어도 바꾸고 매니큐어도 받게 해주었다. 귀티나도록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꿔주었다.연회 전날 저녁 고민욱이 나를 위해 제작한 드레스가 도착했다. 샴페인 색의 공주 원피스였는데 치맛자락에 보석이 박혀있었다.드레스를 입어 봤는데 참으로 예뻤다. 청순함과 섹시함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었다.나는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다들 예쁘다고 했고 고민욱마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우리 딸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고개를 들고 고민욱을 쳐다보았는데 고은빈이 질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어 웃으면서 일부러 물었다.“은빈아, 언니가 입은 이 드레스 예뻐?”슬쩍 건드렸을 뿐인데 고은빈이 그대로 폭발했다.“고은성,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이야?”“얼굴이 예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서?”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치맛자락을 들고 한 바퀴 돌았다.“엄청 예쁘지? 지금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지?”고은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고 얼굴도 시뻘게졌다.“질투는 무슨. 질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엄마 아빠 사랑도 못 받은 주제에. 하도 운이 좋아서 수능에 조운시 2등을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같은 날이 있을 것 같아?”고은빈의 말은 나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고민욱과 김다비가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고민욱이 고은빈에게 호통쳤다.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5화

    그리고 이 일의 배후에는 김다비와 고민욱이 있었다.모든 걸 알게 된 후에야 이 다정하고 지적인 모습 뒤에 얼마나 악랄한 마음이 숨어있는지 알게 되었다.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그럼 다행이고.”김다비가 나의 손을 잡았다.“부녀끼리 이렇게 싸워서야 하겠어? 안 그래?”나는 김다비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할 얘기 있으면 하세요. 빙빙 돌리지 말고.”김다비는 멋쩍어하면서 부자연스럽게 두 손을 잡았다.“무슨 일이냐면 네가 수능에서 조운시 2등을 했잖아. 네 아빠가 체면이 선다고 진학 연회를 해주고 싶대.”나는 싸늘하게 웃었다.‘진학 연회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나가서 값어치가 얼마나 되나 보려는 거겠지.’“그렇게 하세요, 그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그 전에 1억 주세요. 개학하면 옷도 사야 하고 학용품도 사야 해서요. 줄 수 있어요?”그들이 나의 가치를 원한다면 나도 그만큼 뜯어내야 했다.1억이라는 소리에 김다비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괜찮은 척했다.“당연하지. 네 아빠더러 너한테 단성에 집을 사주는 건 어떨지 말하려던 참이었어. 네가 혼자 밖에 있는 게 걱정돼서 말이야. 집을 사서 도우미를 구하면 일상생활에 많이 도움이 될 거야.”‘나의 일상생활을 챙긴다는 건 거짓말이고 원하는 건 감시겠지.’“괜찮아요. 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싶어요.”김다비의 연기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돈은 언제 줄 거예요?”김다비도 일어났다.“일단 네 아빠한테 얘기한 다음에 바로 입금할게. 밥도 다 됐으니까 내려가서 먹자.”“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나가려는 기미가 없자 눈썹을 치켜세웠다.“안 나가요? 여긴 내 방인데.”김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나갈게.”그러고는 방을 나갔다.나는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옷방으로 가서 캐리어 안에 넣은 부동산 등기등본을 꺼내 다른 곳에 숨겼다. 조금 전 김다비는 분명 내 방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4화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고민욱이 버럭 화를 냈다.“거기 서. 이젠 막 나가겠다는 거야? 말도 없이 집을 나가고 들어와도 인사도 안 하고. 네 눈에는 이 아빠랑 새엄마가 안 보여?”나는 어두운 표정의 고민욱을 덤덤하게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 눈에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빠 눈에 이 딸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어요.”“아빠.”나는 중얼거리듯 두 글자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욱은 아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비행기를 다섯 시간이나 타서 좀 피곤해요. 아빠...”나는 일부러 강조해서 아빠를 불렀다.“이만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요?”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더 화가 난 고민욱이 내 앞으로 다가와 따귀를 날리려 하자 김다비가 재빨리 다가와 말렸다.“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애가 피곤하다고 하면 올라가서 쉬게 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이게?”그녀는 돌아서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은성아, 아빠 신경 쓰지 마. 요 며칠 네가 연락이 없어서 아빠가 걱정돼서 그래. 됐어. 올라가서 쉬어. 이따가 밥 다 되면 부를게.”김다비가 좋은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나는 그들과 더는 싸우지 않았고 지금 그들의 가면을 벗길 때도 아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2층 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김다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왜 그래? 은성이가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귀한 애인지 몰라? 수능을 잘 봐서 많은 사람이 은성이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한다고.”나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안 그러면 이 자리에 서서 휴대전화로 그들의 대화를 녹음할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웠다. 비행기에서 꾼 그 꿈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환생한 덕에 많은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 대신 나도 까칠해졌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또 내가 원하는 자유와 행복을 언제쯤이면 누릴 수 있을지 생각하곤 했다.한창 이런저런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3화

    두 사람은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룸 문이 닫힌 후에야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까지는 배가 고파서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정작 메뉴를 보니 입맛이 없었다.종업원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종업원이 기다리는 게 미안했던 나는 오늘의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온 후에도 먹지 않고 계속 밥알만 셌다.머릿속에 조금 전 두 사람이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그날 밤 나에게 키스하던 그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그럼 난 뭐지? 그냥 데리고 노는 고양이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그냥 욕구나 푸는 도구?’젓가락을 하도 꽉 쥐어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식당에서 나왔다.이튿날 이른 아침 나는 공항으로 갔다. 거의 탑승하기 직전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낯선 번호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너머로 나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성아,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식사 약속도 펑크낸 건 물론이고 호텔까지 바꿔? 일부러 날 피하는 거 맞지?”나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발끝을 툭툭 차면서 말했다.“결제는 내가 했어. 그리고 내가 어디에 묵든 그건 내 자유지,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양심 없는 것.”나상민이 속상한 척했다.“내 번호야. 저장해둬.”체크인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하러 갔다.“너랑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이만 끊을게.”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창문 밖에 하얀 뭉게구름이 가득했고 하늘이 어찌나 파란지 또 다른 바다 같았다.어젯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잠이 솔솔 왔다. 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데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정민규에게 매달리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었다.나는 도서관에 가려는 정민규를 막아서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진세라가 뭐가 좋다고 그래? 나보다 예뻐?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2화

    나상민은 고개를 돌리더니 요염한 눈매로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걸어갔다.“미쳐 날뛰고 싶으면 혼자 미쳐 날뛰어. 날 끌어들이지 말고.”“은성아.”나상민이 뒤따라왔다.“농담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나상민에게 밥을 사주기로 한 곳은 성지연이 추천해준 곳이었다.성지연의 삼촌네 집이 단성시에 있어 10살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단성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성지연이 추천해준 식당은 나상민과 함께 갔던 SNS 맛집보다 훨씬 맛있을 것이다.식당에 도착한 후 나상민은 주차하러 갔고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상민은 돌아오지 않았다.무슨 일인지 가보려던 그때 정민규와 진세라도 이 식당으로 오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길로 가려 했다.움직임이 빨라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민규가 갑자기 귀신처럼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으악.”화들짝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뒷걸음질 치면서 돌에 걸린 나머지 뒤로 넘어지려 했다.넘어지면서 눈을 감았는데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고 누군가 팔로 나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삼나무 향이 가득한 품에 와락 안겼다.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눈을 뜬 그때 정민규의 두 눈과 마주했다.정민규의 두 눈에 소용돌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는데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마워.”나는 똑바로 선 다음 정민규의 손을 밀어냈다. 정민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나와 거리를 멀리했다.“방금 일부러 나한테 안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 새로운 수법이야?”‘새로운 수법은 개뿔.’나는 헛웃음을 지었다.“농담하지 마. 네가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만 하지 않았어도 넘어질 뻔하지 않았어. 적반하장이 따로 없어, 정말.”“그래?”정민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만 가려는데 정민규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고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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