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연이 일어나서 따지려 하자 나는 곧바로 말렸다. 나는 성지연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갔다.“놀자. 어떻게 하는 건데?”내가 너무 빨리 대답한 탓인지 친구들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다가가서 게임 룰을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맨 먼저 반응한 한정수가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더러 옆에 앉으라고 하고는 게임 룰을 설명해 주었다.게임 룰은 간단했다.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돌리다가 맥주병 입구가 가리키는 사람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야 했다.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은 전 라운드에서 걸렸던 사람이고 벌칙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설명을 마친 한정수가 나에게 물었다.“알아들었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게임이 금방 시작됐을 땐 다들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질문도 반에서 누가 가장 예쁜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연애한 적이 있는지, 지금까지 했던 창피한 일 등 이런 질문밖에 없었다.그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질문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고 벌칙도 어려워졌다.대부분 걸려서 질문을 받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라운드가 시작되었고 맥주병 입구가 정민규를 가리켰다.그러자 친구들이 갑자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게임이라 그런지 용기도 더욱 생기는 것 같았다.전 라운드에 걸렸던 친구가 정민규에게 물었다.“민규야, 왼쪽에 앉은 애를 좋아해? 아니면 오른쪽에 앉은 애를 좋아해?”그 친구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친구들이 분위기를 띄웠다.그때 누군가가 말했다.“진성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당연히 세라지. 안 그러면 그렇게 바쁜 민규가 우리랑 놀 리가 있겠어?”진세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쑥스러워하면서 기쁜 얼굴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분위기를 띄우는 친구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내 자리를 힐끗거렸다.한정수가 내어준 그 자리가 바로 정민규의 왼쪽 자리였다. 그러니까 방금 정민규에게 한 질문은 진세라와 나 중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나를 향해 있는 맥주병을 내려다보았다.전 라운드에서 걸린 사람이 정민규였기에 이젠 그가 나에게 질문할 차례였다.나는 저속한 마음으로 고상한 사람의 생각을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나에게 여러 번 시비를 건 걸 생각하면 이번에도 난감하게 할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할 때는 난감해도 이게 바로 행복이고 나를 신경 써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은 그때의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그런데 뜻밖에도 정민규는 아주 평범한 질문을 건넸다.“좋아하는 사람의 성이 뭐야?”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아주 쉽게 대답했겠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나의 이성은 정민규를 멀리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좋아하고 사랑했던 마음이 어떻게 짧은 몇 달 사이에 깔끔하게 사라지겠는가.내가 아무 말이 없자 정민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한 친구가 말했다.“그 질문이 그렇게 어려워? 예전에 민규를 쫓아다닐 땐 그렇게 얼굴이 두껍더니 이제 와서 쑥스러운 척이야?”친구들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진세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 질투와 언짢음이 가득했다.나의 시선을 느낀 진세라는 보란 듯이 정민규의 팔을 잡으면서 상황을 수습하는 척했다.“아이고, 다들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여자는 뭐 체면이 없는 줄 알아? 아니면...”진세라가 두 눈을 깜빡였다.“은성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가 함부로 입에 올려선 안 되는 사람인가?”진세라는 내가 누구의 여자 친구라는 수식어를 한시라도 빨리 붙이고 싶어 하는 듯했다.정민규가 그녀를 사랑하고 신경 쓰는데 이깟 일로 겁을 낼 필요가 있을까?“얼마 마시면 돼?”나는 정민규를 보면서 술을 마시는 걸 택했다. 그러자 정민규가 피식 웃었다.“6병.”맥주 6병을 마셔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설임 없이 뚜껑을 딴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주량이 별로였고 위도 좋지 않았다. 여섯 병째를 마시던 그때 위가 아프기 시작했고 이마에 땀방울도
그 빗물이 다른 사람에게 닿으면 미움만 살 뿐이었다.한참 동안 토하다가 마신 술을 전부 비우고 나서야 속이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빙빙 돌았다.다시 룸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성지연에게 그만 집에 가자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노래방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회전문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과를 건넸다.“미안합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죠?”예상했던 책망이 들리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나상민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물어볼 사람은 나지. 어디 아픈 데 없어? 내 초콜릿 복근이 꽤 탄탄할 텐데.”생뚱맞긴 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나는 나상민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괜찮다면 먼저 가볼게.”그러고는 나가려 했다.“잠깐.”나상민이 쫓아와서 말했다.“내 제안 한 번 더 생각해 봐.”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그의 제안이 무엇이었던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물었다.“제안?”“내 여자 친구가 되어달라는 거 말이야.”나상민이 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주고 아껴줄게. 네 말이라면 토 달지 않고 무조건 따를게.”나는 그런 나상민이 귀찮기만 했다. 짜증이 밀려와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냈다.“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 다른 여자들은 알아?”“하하하하, 걔네들은 내가 말하기를 바랄걸?”나상민은 외투를 벗어 나에게 걸쳐주었다.“밖에 비 와. 이것만 입고 나가면 감기 걸려. 고마워할 건 없고.”그러고는 또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내 제안 진짜로 한번 생각해 봐.”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나상민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나는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그때 누군가 나의 손목을 잡고 확 잡아당겼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다가 삼나무 향이 코를 스쳤다.‘정민규.’누구인지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이미 벽과 벽 사이의 복도
화가 난 나와 달리 정민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속으로 그를 헐뜯었다.‘참 변덕스러운 사람이야. 태도가 한순간에 180도 바뀌었어.’나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말을 잘 듣는 개는 길을 막지 않아. 그러니까 비켜.”나는 분노를 터트리며 나가버렸다. 하지만 정민규의 행동을 진세라가 보고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그림을 찢고 나온 것처럼 미모가 뛰어났고 이목구비의 조화도 아주 좋았다. 그런데 입술에 빨간 상처가 나 있었다.조금 전 어두운 복도에서 한 소년이 나에게 거칠게 키스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정민규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좋아하지 않았다. 분명 싫어하면서 왜 또 나를 건드리는 걸까?나는 세면대의 변두리를 꽉 잡았다. 잠시 후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취기가 올라와 진작 잠이 들었을 시간이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다시 일어나 겉옷을 입고 베란다에서 일출을 기다렸다.아침 햇살이 구름층을 뚫으면서 하늘 전체가 몽환적인 색깔로 바뀌었다. 잠시 후 태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실눈을 뜨고 태양을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날 오후 나는 단성시로 가는 티켓을 구매했다. 고씨 가문을 떠나게 되면 할 일이 매우 많을 것이다.그리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집을 구매하는 것이었다....나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오전 9시에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단성시의 날씨는 참 좋았고 6월이라 한창 무더울 때였다.나는 옅은 초록색의 원피스로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연하게 한 다음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네 시간 동안 여섯 일곱 채를 구경했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풀이 죽은 채로 있었고 중개인도 답답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책임을 다했다.“고은성 씨, 남교 쪽
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흘겨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나상민이 뒤따라오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단성에는 언제 왔어? 집은 왜? 단성에 집을 사려고?”‘시끄러워 죽겠네. 뭔 말이 이렇게 많아.’고개도 돌릴 생각이 없었는데 나상민이 갑자기 물었다.“네가 단성에 집을 산다는 걸 가족들은 알아?”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웃는 모습이 정말 교활한 여우가 따로 없었다.“드디어 멈춰 섰네.”나는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야?”“아무 뜻도 없어.”나상민은 배시시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현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지 않겠어? 난 단성 사람이니까 우리 관계에 당연히 밥 한 끼라도 대접해야지.”“그럴 필요 없어.”“그럼 집 살 때 할인 좀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까? 안 그러면...”나상민이 아래턱을 어루만졌다.“너희 가족들한테...”“그 입 다물어.”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로챘다. 승기를 손에 쥔 듯한 나상민의 모습만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그 후 며칠 동안 나상민은 나에게 단성시 구경을 시켜주었다. SNS에서 핫한 버블티 가게에서 버블티를 샀고 또 핫플레이스에서 사진도 찍었으며 맛집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맛이 없는 음식도 먹었다.정말 너무도 재미없었다. 하도 재미없어서 단성 토박이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세 번째 날, 나상민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던 길에 나상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고작 십여 초 사이에 나상민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이토록 어두운 그의 표정은 처음 봤다. 그가 택시를 잡고 올라타자 나도 다른 택시를 잡고 따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상민이 탄 택시가 한 요양원 앞에 멈춰 섰다. 나도 따라서 택시에서 내렸다.나는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가다가 VIP 병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요양원의 관리가 아주 엄격했다. 병문안을 왔다고 해도 프런트 직원은 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로비에서 잠깐 방황하다가 이대로 떠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상민은 나와 부모님의 관계
그날 이후 나상민은 더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찾아오지 않으니 차라리 더 좋았다. 나는 성지연에게 필요한 서류들을 보내 달라고 한 다음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가 집을 계약했다.잔금을 내는 그날 나상민이 나타났다. 호텔 밑에서 나를 기다렸는데 여전히 껄렁껄렁한 모습이었다.“벌써 돈 내려고? 내 얼굴이 그래도 나름 먹히는데.”나상민은 얼굴도 잘생겼고 피부도 여자보다 훨씬 하얬다. 살짝 홍조가 띤 그의 얼굴을 보다가 요양원에 있던 그 여자가 문득 떠올랐다.“괜찮아. 그 정도 돈은 있어.”“쯧쯧.”나상민은 나의 손목을 잡고 차에 태웠다.“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데 거절하는 건 바보지.”그러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억지로 차에 탄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싸게 사도록 도와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나는 분양 사무실로 가서야 분양주택들이 나씨 가문의 것인 걸 알았다. 생각지도 못한 할인에 나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나상민은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돈을 보니까 그렇게 좋아?”나는 은행 계좌의 잔액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너랑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지.”“그럼 어떻게 보답할 건데?”나상민은 허리를 곧추 펴더니 내가 앉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피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밥 한 끼 사주면 되지 않아?”나상민은 내가 말이라도 바꿀까 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금방 벗은 외투를 다시 챙겼다.“좋아. 가자.”나는 이마를 긁적였다가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그런데 밖에 나가자마자 정민규와 진세라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나상민을 잡고 다른 길로 가려는데 진세라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은성아, 여기서 다 보네. 두 사람 왜 여기 있어?”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러게. 여기서 다 보네.”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어. 만나기 싫다는 사람만 계속 만나잖아.’그때 정민규와 진세라가 앞으로 다가왔다.조금 전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일부러 정민규를 무시해서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
나상민은 고개를 돌리더니 요염한 눈매로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걸어갔다.“미쳐 날뛰고 싶으면 혼자 미쳐 날뛰어. 날 끌어들이지 말고.”“은성아.”나상민이 뒤따라왔다.“농담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나상민에게 밥을 사주기로 한 곳은 성지연이 추천해준 곳이었다.성지연의 삼촌네 집이 단성시에 있어 10살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단성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성지연이 추천해준 식당은 나상민과 함께 갔던 SNS 맛집보다 훨씬 맛있을 것이다.식당에 도착한 후 나상민은 주차하러 갔고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상민은 돌아오지 않았다.무슨 일인지 가보려던 그때 정민규와 진세라도 이 식당으로 오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길로 가려 했다.움직임이 빨라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민규가 갑자기 귀신처럼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으악.”화들짝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뒷걸음질 치면서 돌에 걸린 나머지 뒤로 넘어지려 했다.넘어지면서 눈을 감았는데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고 누군가 팔로 나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삼나무 향이 가득한 품에 와락 안겼다.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눈을 뜬 그때 정민규의 두 눈과 마주했다.정민규의 두 눈에 소용돌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는데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마워.”나는 똑바로 선 다음 정민규의 손을 밀어냈다. 정민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나와 거리를 멀리했다.“방금 일부러 나한테 안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 새로운 수법이야?”‘새로운 수법은 개뿔.’나는 헛웃음을 지었다.“농담하지 마. 네가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만 하지 않았어도 넘어질 뻔하지 않았어. 적반하장이 따로 없어, 정말.”“그래?”정민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만 가려는데 정민규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고은성
두 사람은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룸 문이 닫힌 후에야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까지는 배가 고파서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정작 메뉴를 보니 입맛이 없었다.종업원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종업원이 기다리는 게 미안했던 나는 오늘의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온 후에도 먹지 않고 계속 밥알만 셌다.머릿속에 조금 전 두 사람이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그날 밤 나에게 키스하던 그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그럼 난 뭐지? 그냥 데리고 노는 고양이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그냥 욕구나 푸는 도구?’젓가락을 하도 꽉 쥐어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식당에서 나왔다.이튿날 이른 아침 나는 공항으로 갔다. 거의 탑승하기 직전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낯선 번호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너머로 나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성아,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식사 약속도 펑크낸 건 물론이고 호텔까지 바꿔? 일부러 날 피하는 거 맞지?”나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발끝을 툭툭 차면서 말했다.“결제는 내가 했어. 그리고 내가 어디에 묵든 그건 내 자유지,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양심 없는 것.”나상민이 속상한 척했다.“내 번호야. 저장해둬.”체크인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하러 갔다.“너랑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이만 끊을게.”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창문 밖에 하얀 뭉게구름이 가득했고 하늘이 어찌나 파란지 또 다른 바다 같았다.어젯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잠이 솔솔 왔다. 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데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정민규에게 매달리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었다.나는 도서관에 가려는 정민규를 막아서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진세라가 뭐가 좋다고 그래? 나보다 예뻐?
나는 고민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상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한 건 물론이고 체면을 잃어 배상까지 하게 생겼다. 지금 나에 대한 미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은성.”고민욱은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와? 넌 어떻게 된 게 창피한 줄을 몰라? 너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알아?”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서 있자 고민욱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그런 창피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이 엄청난 사고를 어떻게 수습할 건데?”고민욱은 분노에 찬 두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망친 계약의 책임을 나에게 물을 기세였다.나는 싸늘하게 웃었고 두 눈에 하찮음이 스쳤다. 마음이 하도 차갑게 식은 탓인지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고민욱의 친딸이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나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고 혼내기만 했다.한 사람이 가치를 잃게 되면 함부로 짓밟아도 된단 말인가?“지금까지 아빠는 나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고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한 적도 없이 다짜고짜 혼내기만 했어요. 그러니 회사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문제니까 그 사람이 주요 책임을 져야 하는 거 맞죠?”고민욱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왜 이렇게 당당하게 째려보는지도 알지 못했다.김다비가 얼굴을 찌푸리고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은성아, 이젠 그 나이가 됐으면 아빠 걱정 좀 덜어주면 안 돼?”싸움을 말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진퇴양난에 빠뜨려 비난하려 했다.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쇼핑백을 바닥에 던졌다. 드레스가 떨어진 순간 고은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나의 날카로운 시선은 비수처럼 고은빈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치명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드레스를 망가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정민규가 걸쳐준 겉옷을 꽉 잡았다.고개를 들어 옆을 힐끗거렸는데 진세라가 어둡기 그지없는 안색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 섞인 눈빛에 나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고 나와 정민규가 함께 자리를 떠나서 무척이나 분노한 모습이었다.그렇다. 여자는 질투에 눈이 멀면 자기만의 상상을 펼치게 된다.진세라의 질투와 혐오 섞인 눈빛을 본 나는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정민규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고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뒤에서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신경 쓸 새가 없이 그냥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을 뿐이었다.이 자리는 고민욱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였고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권력에 빌붙고 상류 사회에 들어가는 디딤돌이었다. 정민규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고민욱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문 앞에 다 와서야 나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가서 옷 갈아입어.”그의 말투는 냉랭했지만 불만도 섞여 있었다.“괜찮아.”나는 정민규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내가 얼마나 그와 선을 긋고 싶어 하는지 아마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럼 계속 여기 서서 사람들이 쳐다보게 놔둘 거야? 이런 수단으로 시선을 끌고 싶어?”정민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내가 이러고 있는 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정민규,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그러고는 그의 겉옷을 잡고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았다.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쫓아오려는 것 같았다.그런데 가녀린 누군가가 정민규의 앞에 나타났다. 진세라가 쫓아온 것이었다. 나와 정민규가 단둘이 있게 내버려 둘 진세라가 아니었다.“기사님, 출발하세요.”나는 겉옷을 움켜잡았다. 조금 전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지금 걸치고 있는 이 겉옷이 창피함을 가리는 옷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돌아간 후 나는 드레스를 벗고 꼼꼼하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드레스를 건드렸
나상민은 차갑기 그지없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 고민욱을 까발리지 않았다.“그랬군요. 정말 영광입니다.”나상민은 등 뒤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이건 내가 준비한 진학 선물이야.”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선물을 받았다.“고마워.”나의 말이 떨어진 그때 또 세 사람이 도착했다. 정민규와 진세라, 그리고 한정수였다.나는 고민욱을 흘끔 보면서 정민규까지 초대한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민욱은 나에게 나상민을 안내하라고 한 후 빠른 걸음으로 정민규의 앞으로 걸어갔다.정민규는 오늘 밤 진세라와 커플룩으로 맞춰 입었다. 두 사람 모두 블랙 톤으로 맞춰 입었는데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나는 대충 힐끔거린 후 시선을 거두었다. 나상민이 팔을 내밀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그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네 파트너가 될 사람은 나뿐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나는 웃기만 할 뿐 팔짱을 끼진 않았다.“가끔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도 안 좋아.”그러고는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마치고 나니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재빨리 빈 자리를 찾아 하이힐을 벗고 휴식했다.그런데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다비가 다가오더니 춤을 춰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금방 벗은 신발을 다시 신었다.내가 다가가자마자 나상민이 인파 속에서 걸어왔다. 나에게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매너 있게 물었다.“아름다운 은성아, 너랑 같이 춤을 출 영광을 누려도 될까?”나상민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정민규도 다가왔다. 정민규는 블랙 슈트 차림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춤은 나랑 가장 먼저 추기로 약속했잖아.”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 정민규에게 매달릴 때 단성대학교에 붙기만 하면 그와 가장 먼저 춤을 추겠다고 약속했었다.시간이 하도 빨리 지나서 예전의 일을 많이 잊어버렸다.나는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건네진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은 고마운데 이미 함
김다비는 고은빈을 노려보면서 한심한 말투로 말했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날 밤에 엄마가 뭐라 했었는지 다 잊었어? 고은성은 지금 이용 가치가 있어. 고씨 가문이 더 많은 권력자와 친분을 맺으려면 고은성이 있어야 해.”“그럼 나는요?”고은빈이 속상해하며 울었다.“나도 이 집 딸이에요. 근데 왜 다 고은성한테 기대야 하는 건데요?”김다비는 고은빈이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놀란 마음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고은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고은성한테 기대는 게 아니라 엄마는 네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러지. 권력자들한테 빌붙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넌 엄마한테 가장 소중한 딸이야. 네가 다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엄마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한테는 가장 좋은 것만 줄 거야.”김다비는 고은빈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머리를 어루만졌다.“고씨 가문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서 고은성이 재벌에 시집가면 무조건 시댁에서 모욕을 당하면서 살 거야.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고은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전 고은성이 일부러 그녀 앞에서 자랑하던 것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이튿날 아침, 고씨 가문 전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고은성이 잠에서 깨자 피부 관리사가 먼저 와서 피부 케어를 해주었고 그 뒤로 메이크업도 받고 헤어도 했다.할 게 너무 많아 차라리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작은아가씨, 먼저 다른 데 가서 쉬세요. 큰아가씨 쪽이 하도 바빠서 작은아가씨를 돌봐줄 시간이 없어요.”도우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고은빈도 마침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발 저린 듯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드레스를 다림질하고 있었다.“은빈이 왜 왔대요?”“잠깐 들어와서 보고 그냥 나갔어요.”손목 화환을 가져다준 도우미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만 끄
16살에 내가 넘어졌을 때 나를 일으켜주고 밴드를 붙여준 다음 아프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고 약한 마음을 다잡았다.‘오히려 지금이 좋아.’더는 그들에게 기대할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나도 사랑할 필요가 없었다.이런 것들이 없으니 차라리 더 홀가분했다....진학 연회는 3일 뒤로 정해졌다. 그날이 오기 전에 고민욱과 김다비는 나에게 꽤 많은 돈을 썼다.김다비는 조운시에서 가장 잘하는 피부 관리사를 예약하여 연속 이틀 관리를 받게 해주었고 헤어도 바꾸고 매니큐어도 받게 해주었다. 귀티나도록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꿔주었다.연회 전날 저녁 고민욱이 나를 위해 제작한 드레스가 도착했다. 샴페인 색의 공주 원피스였는데 치맛자락에 보석이 박혀있었다.드레스를 입어 봤는데 참으로 예뻤다. 청순함과 섹시함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었다.나는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다들 예쁘다고 했고 고민욱마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우리 딸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고개를 들고 고민욱을 쳐다보았는데 고은빈이 질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어 웃으면서 일부러 물었다.“은빈아, 언니가 입은 이 드레스 예뻐?”슬쩍 건드렸을 뿐인데 고은빈이 그대로 폭발했다.“고은성,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이야?”“얼굴이 예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서?”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치맛자락을 들고 한 바퀴 돌았다.“엄청 예쁘지? 지금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지?”고은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고 얼굴도 시뻘게졌다.“질투는 무슨. 질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엄마 아빠 사랑도 못 받은 주제에. 하도 운이 좋아서 수능에 조운시 2등을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같은 날이 있을 것 같아?”고은빈의 말은 나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고민욱과 김다비가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고민욱이 고은빈에게 호통쳤다.
그리고 이 일의 배후에는 김다비와 고민욱이 있었다.모든 걸 알게 된 후에야 이 다정하고 지적인 모습 뒤에 얼마나 악랄한 마음이 숨어있는지 알게 되었다.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그럼 다행이고.”김다비가 나의 손을 잡았다.“부녀끼리 이렇게 싸워서야 하겠어? 안 그래?”나는 김다비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할 얘기 있으면 하세요. 빙빙 돌리지 말고.”김다비는 멋쩍어하면서 부자연스럽게 두 손을 잡았다.“무슨 일이냐면 네가 수능에서 조운시 2등을 했잖아. 네 아빠가 체면이 선다고 진학 연회를 해주고 싶대.”나는 싸늘하게 웃었다.‘진학 연회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나가서 값어치가 얼마나 되나 보려는 거겠지.’“그렇게 하세요, 그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그 전에 1억 주세요. 개학하면 옷도 사야 하고 학용품도 사야 해서요. 줄 수 있어요?”그들이 나의 가치를 원한다면 나도 그만큼 뜯어내야 했다.1억이라는 소리에 김다비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괜찮은 척했다.“당연하지. 네 아빠더러 너한테 단성에 집을 사주는 건 어떨지 말하려던 참이었어. 네가 혼자 밖에 있는 게 걱정돼서 말이야. 집을 사서 도우미를 구하면 일상생활에 많이 도움이 될 거야.”‘나의 일상생활을 챙긴다는 건 거짓말이고 원하는 건 감시겠지.’“괜찮아요. 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싶어요.”김다비의 연기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돈은 언제 줄 거예요?”김다비도 일어났다.“일단 네 아빠한테 얘기한 다음에 바로 입금할게. 밥도 다 됐으니까 내려가서 먹자.”“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나가려는 기미가 없자 눈썹을 치켜세웠다.“안 나가요? 여긴 내 방인데.”김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나갈게.”그러고는 방을 나갔다.나는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옷방으로 가서 캐리어 안에 넣은 부동산 등기등본을 꺼내 다른 곳에 숨겼다. 조금 전 김다비는 분명 내 방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고민욱이 버럭 화를 냈다.“거기 서. 이젠 막 나가겠다는 거야? 말도 없이 집을 나가고 들어와도 인사도 안 하고. 네 눈에는 이 아빠랑 새엄마가 안 보여?”나는 어두운 표정의 고민욱을 덤덤하게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 눈에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빠 눈에 이 딸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어요.”“아빠.”나는 중얼거리듯 두 글자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욱은 아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비행기를 다섯 시간이나 타서 좀 피곤해요. 아빠...”나는 일부러 강조해서 아빠를 불렀다.“이만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요?”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더 화가 난 고민욱이 내 앞으로 다가와 따귀를 날리려 하자 김다비가 재빨리 다가와 말렸다.“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애가 피곤하다고 하면 올라가서 쉬게 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이게?”그녀는 돌아서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은성아, 아빠 신경 쓰지 마. 요 며칠 네가 연락이 없어서 아빠가 걱정돼서 그래. 됐어. 올라가서 쉬어. 이따가 밥 다 되면 부를게.”김다비가 좋은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나는 그들과 더는 싸우지 않았고 지금 그들의 가면을 벗길 때도 아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2층 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김다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왜 그래? 은성이가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귀한 애인지 몰라? 수능을 잘 봐서 많은 사람이 은성이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한다고.”나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안 그러면 이 자리에 서서 휴대전화로 그들의 대화를 녹음할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웠다. 비행기에서 꾼 그 꿈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환생한 덕에 많은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 대신 나도 까칠해졌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또 내가 원하는 자유와 행복을 언제쯤이면 누릴 수 있을지 생각하곤 했다.한창 이런저런
두 사람은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룸 문이 닫힌 후에야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까지는 배가 고파서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정작 메뉴를 보니 입맛이 없었다.종업원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종업원이 기다리는 게 미안했던 나는 오늘의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온 후에도 먹지 않고 계속 밥알만 셌다.머릿속에 조금 전 두 사람이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그날 밤 나에게 키스하던 그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그럼 난 뭐지? 그냥 데리고 노는 고양이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그냥 욕구나 푸는 도구?’젓가락을 하도 꽉 쥐어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식당에서 나왔다.이튿날 이른 아침 나는 공항으로 갔다. 거의 탑승하기 직전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낯선 번호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너머로 나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성아,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식사 약속도 펑크낸 건 물론이고 호텔까지 바꿔? 일부러 날 피하는 거 맞지?”나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발끝을 툭툭 차면서 말했다.“결제는 내가 했어. 그리고 내가 어디에 묵든 그건 내 자유지,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양심 없는 것.”나상민이 속상한 척했다.“내 번호야. 저장해둬.”체크인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하러 갔다.“너랑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이만 끊을게.”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창문 밖에 하얀 뭉게구름이 가득했고 하늘이 어찌나 파란지 또 다른 바다 같았다.어젯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잠이 솔솔 왔다. 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데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정민규에게 매달리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었다.나는 도서관에 가려는 정민규를 막아서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진세라가 뭐가 좋다고 그래? 나보다 예뻐?
나상민은 고개를 돌리더니 요염한 눈매로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걸어갔다.“미쳐 날뛰고 싶으면 혼자 미쳐 날뛰어. 날 끌어들이지 말고.”“은성아.”나상민이 뒤따라왔다.“농담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나상민에게 밥을 사주기로 한 곳은 성지연이 추천해준 곳이었다.성지연의 삼촌네 집이 단성시에 있어 10살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단성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성지연이 추천해준 식당은 나상민과 함께 갔던 SNS 맛집보다 훨씬 맛있을 것이다.식당에 도착한 후 나상민은 주차하러 갔고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상민은 돌아오지 않았다.무슨 일인지 가보려던 그때 정민규와 진세라도 이 식당으로 오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길로 가려 했다.움직임이 빨라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민규가 갑자기 귀신처럼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으악.”화들짝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뒷걸음질 치면서 돌에 걸린 나머지 뒤로 넘어지려 했다.넘어지면서 눈을 감았는데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고 누군가 팔로 나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삼나무 향이 가득한 품에 와락 안겼다.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눈을 뜬 그때 정민규의 두 눈과 마주했다.정민규의 두 눈에 소용돌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는데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마워.”나는 똑바로 선 다음 정민규의 손을 밀어냈다. 정민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나와 거리를 멀리했다.“방금 일부러 나한테 안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 새로운 수법이야?”‘새로운 수법은 개뿔.’나는 헛웃음을 지었다.“농담하지 마. 네가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만 하지 않았어도 넘어질 뻔하지 않았어. 적반하장이 따로 없어, 정말.”“그래?”정민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만 가려는데 정민규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고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