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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작가: 봉숭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11 13:28:02
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흘겨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나상민이 뒤따라오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단성에는 언제 왔어? 집은 왜? 단성에 집을 사려고?”

‘시끄러워 죽겠네. 뭔 말이 이렇게 많아.’

고개도 돌릴 생각이 없었는데 나상민이 갑자기 물었다.

“네가 단성에 집을 산다는 걸 가족들은 알아?”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웃는 모습이 정말 교활한 여우가 따로 없었다.

“드디어 멈춰 섰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아무 뜻도 없어.”

나상민은 배시시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현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지 않겠어? 난 단성 사람이니까 우리 관계에 당연히 밥 한 끼라도 대접해야지.”

“그럴 필요 없어.”

“그럼 집 살 때 할인 좀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까? 안 그러면...”

나상민이 아래턱을 어루만졌다.

“너희 가족들한테...”

“그 입 다물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로챘다. 승기를 손에 쥔 듯한 나상민의 모습만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나상민은 나에게 단성시 구경을 시켜주었다. SNS에서 핫한 버블티 가게에서 버블티를 샀고 또 핫플레이스에서 사진도 찍었으며 맛집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맛이 없는 음식도 먹었다.

정말 너무도 재미없었다. 하도 재미없어서 단성 토박이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세 번째 날, 나상민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던 길에 나상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고작 십여 초 사이에 나상민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토록 어두운 그의 표정은 처음 봤다. 그가 택시를 잡고 올라타자 나도 다른 택시를 잡고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상민이 탄 택시가 한 요양원 앞에 멈춰 섰다. 나도 따라서 택시에서 내렸다.

나는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가다가 VIP 병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요양원의 관리가 아주 엄격했다. 병문안을 왔다고 해도 프런트 직원은 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로비에서 잠깐 방황하다가 이대로 떠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상민은 나와 부모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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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이후 나상민은 더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찾아오지 않으니 차라리 더 좋았다. 나는 성지연에게 필요한 서류들을 보내 달라고 한 다음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가 집을 계약했다.잔금을 내는 그날 나상민이 나타났다. 호텔 밑에서 나를 기다렸는데 여전히 껄렁껄렁한 모습이었다.“벌써 돈 내려고? 내 얼굴이 그래도 나름 먹히는데.”나상민은 얼굴도 잘생겼고 피부도 여자보다 훨씬 하얬다. 살짝 홍조가 띤 그의 얼굴을 보다가 요양원에 있던 그 여자가 문득 떠올랐다.“괜찮아. 그 정도 돈은 있어.”“쯧쯧.”나상민은 나의 손목을 잡고 차에 태웠다.“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데 거절하는 건 바보지.”그러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억지로 차에 탄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싸게 사도록 도와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나는 분양 사무실로 가서야 분양주택들이 나씨 가문의 것인 걸 알았다. 생각지도 못한 할인에 나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나상민은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돈을 보니까 그렇게 좋아?”나는 은행 계좌의 잔액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너랑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지.”“그럼 어떻게 보답할 건데?”나상민은 허리를 곧추 펴더니 내가 앉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피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밥 한 끼 사주면 되지 않아?”나상민은 내가 말이라도 바꿀까 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금방 벗은 외투를 다시 챙겼다.“좋아. 가자.”나는 이마를 긁적였다가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그런데 밖에 나가자마자 정민규와 진세라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나상민을 잡고 다른 길로 가려는데 진세라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은성아, 여기서 다 보네. 두 사람 왜 여기 있어?”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러게. 여기서 다 보네.”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어. 만나기 싫다는 사람만 계속 만나잖아.’그때 정민규와 진세라가 앞으로 다가왔다.조금 전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일부러 정민규를 무시해서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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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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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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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4화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고민욱이 버럭 화를 냈다.“거기 서. 이젠 막 나가겠다는 거야? 말도 없이 집을 나가고 들어와도 인사도 안 하고. 네 눈에는 이 아빠랑 새엄마가 안 보여?”나는 어두운 표정의 고민욱을 덤덤하게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 눈에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빠 눈에 이 딸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어요.”“아빠.”나는 중얼거리듯 두 글자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욱은 아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비행기를 다섯 시간이나 타서 좀 피곤해요. 아빠...”나는 일부러 강조해서 아빠를 불렀다.“이만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요?”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더 화가 난 고민욱이 내 앞으로 다가와 따귀를 날리려 하자 김다비가 재빨리 다가와 말렸다.“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애가 피곤하다고 하면 올라가서 쉬게 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이게?”그녀는 돌아서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은성아, 아빠 신경 쓰지 마. 요 며칠 네가 연락이 없어서 아빠가 걱정돼서 그래. 됐어. 올라가서 쉬어. 이따가 밥 다 되면 부를게.”김다비가 좋은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나는 그들과 더는 싸우지 않았고 지금 그들의 가면을 벗길 때도 아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2층 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김다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왜 그래? 은성이가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귀한 애인지 몰라? 수능을 잘 봐서 많은 사람이 은성이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한다고.”나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안 그러면 이 자리에 서서 휴대전화로 그들의 대화를 녹음할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웠다. 비행기에서 꾼 그 꿈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환생한 덕에 많은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 대신 나도 까칠해졌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또 내가 원하는 자유와 행복을 언제쯤이면 누릴 수 있을지 생각하곤 했다.한창 이런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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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5화

    그리고 이 일의 배후에는 김다비와 고민욱이 있었다.모든 걸 알게 된 후에야 이 다정하고 지적인 모습 뒤에 얼마나 악랄한 마음이 숨어있는지 알게 되었다.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그럼 다행이고.”김다비가 나의 손을 잡았다.“부녀끼리 이렇게 싸워서야 하겠어? 안 그래?”나는 김다비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할 얘기 있으면 하세요. 빙빙 돌리지 말고.”김다비는 멋쩍어하면서 부자연스럽게 두 손을 잡았다.“무슨 일이냐면 네가 수능에서 조운시 2등을 했잖아. 네 아빠가 체면이 선다고 진학 연회를 해주고 싶대.”나는 싸늘하게 웃었다.‘진학 연회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나가서 값어치가 얼마나 되나 보려는 거겠지.’“그렇게 하세요, 그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그 전에 1억 주세요. 개학하면 옷도 사야 하고 학용품도 사야 해서요. 줄 수 있어요?”그들이 나의 가치를 원한다면 나도 그만큼 뜯어내야 했다.1억이라는 소리에 김다비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괜찮은 척했다.“당연하지. 네 아빠더러 너한테 단성에 집을 사주는 건 어떨지 말하려던 참이었어. 네가 혼자 밖에 있는 게 걱정돼서 말이야. 집을 사서 도우미를 구하면 일상생활에 많이 도움이 될 거야.”‘나의 일상생활을 챙긴다는 건 거짓말이고 원하는 건 감시겠지.’“괜찮아요. 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싶어요.”김다비의 연기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돈은 언제 줄 거예요?”김다비도 일어났다.“일단 네 아빠한테 얘기한 다음에 바로 입금할게. 밥도 다 됐으니까 내려가서 먹자.”“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나가려는 기미가 없자 눈썹을 치켜세웠다.“안 나가요? 여긴 내 방인데.”김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나갈게.”그러고는 방을 나갔다.나는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옷방으로 가서 캐리어 안에 넣은 부동산 등기등본을 꺼내 다른 곳에 숨겼다. 조금 전 김다비는 분명 내 방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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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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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고민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상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한 건 물론이고 체면을 잃어 배상까지 하게 생겼다. 지금 나에 대한 미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은성.”고민욱은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와? 넌 어떻게 된 게 창피한 줄을 몰라? 너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알아?”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서 있자 고민욱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그런 창피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이 엄청난 사고를 어떻게 수습할 건데?”고민욱은 분노에 찬 두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망친 계약의 책임을 나에게 물을 기세였다.나는 싸늘하게 웃었고 두 눈에 하찮음이 스쳤다. 마음이 하도 차갑게 식은 탓인지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고민욱의 친딸이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나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고 혼내기만 했다.한 사람이 가치를 잃게 되면 함부로 짓밟아도 된단 말인가?“지금까지 아빠는 나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고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한 적도 없이 다짜고짜 혼내기만 했어요. 그러니 회사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문제니까 그 사람이 주요 책임을 져야 하는 거 맞죠?”고민욱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왜 이렇게 당당하게 째려보는지도 알지 못했다.김다비가 얼굴을 찌푸리고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은성아, 이젠 그 나이가 됐으면 아빠 걱정 좀 덜어주면 안 돼?”싸움을 말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진퇴양난에 빠뜨려 비난하려 했다.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쇼핑백을 바닥에 던졌다. 드레스가 떨어진 순간 고은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나의 날카로운 시선은 비수처럼 고은빈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치명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드레스를 망가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9화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정민규가 걸쳐준 겉옷을 꽉 잡았다.고개를 들어 옆을 힐끗거렸는데 진세라가 어둡기 그지없는 안색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 섞인 눈빛에 나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고 나와 정민규가 함께 자리를 떠나서 무척이나 분노한 모습이었다.그렇다. 여자는 질투에 눈이 멀면 자기만의 상상을 펼치게 된다.진세라의 질투와 혐오 섞인 눈빛을 본 나는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정민규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고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뒤에서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신경 쓸 새가 없이 그냥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을 뿐이었다.이 자리는 고민욱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였고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권력에 빌붙고 상류 사회에 들어가는 디딤돌이었다. 정민규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고민욱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문 앞에 다 와서야 나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가서 옷 갈아입어.”그의 말투는 냉랭했지만 불만도 섞여 있었다.“괜찮아.”나는 정민규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내가 얼마나 그와 선을 긋고 싶어 하는지 아마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럼 계속 여기 서서 사람들이 쳐다보게 놔둘 거야? 이런 수단으로 시선을 끌고 싶어?”정민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내가 이러고 있는 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정민규,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그러고는 그의 겉옷을 잡고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았다.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쫓아오려는 것 같았다.그런데 가녀린 누군가가 정민규의 앞에 나타났다. 진세라가 쫓아온 것이었다. 나와 정민규가 단둘이 있게 내버려 둘 진세라가 아니었다.“기사님, 출발하세요.”나는 겉옷을 움켜잡았다. 조금 전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지금 걸치고 있는 이 겉옷이 창피함을 가리는 옷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돌아간 후 나는 드레스를 벗고 꼼꼼하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드레스를 건드렸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8화

    나상민은 차갑기 그지없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 고민욱을 까발리지 않았다.“그랬군요. 정말 영광입니다.”나상민은 등 뒤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이건 내가 준비한 진학 선물이야.”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선물을 받았다.“고마워.”나의 말이 떨어진 그때 또 세 사람이 도착했다. 정민규와 진세라, 그리고 한정수였다.나는 고민욱을 흘끔 보면서 정민규까지 초대한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민욱은 나에게 나상민을 안내하라고 한 후 빠른 걸음으로 정민규의 앞으로 걸어갔다.정민규는 오늘 밤 진세라와 커플룩으로 맞춰 입었다. 두 사람 모두 블랙 톤으로 맞춰 입었는데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나는 대충 힐끔거린 후 시선을 거두었다. 나상민이 팔을 내밀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그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네 파트너가 될 사람은 나뿐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나는 웃기만 할 뿐 팔짱을 끼진 않았다.“가끔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도 안 좋아.”그러고는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마치고 나니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재빨리 빈 자리를 찾아 하이힐을 벗고 휴식했다.그런데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다비가 다가오더니 춤을 춰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금방 벗은 신발을 다시 신었다.내가 다가가자마자 나상민이 인파 속에서 걸어왔다. 나에게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매너 있게 물었다.“아름다운 은성아, 너랑 같이 춤을 출 영광을 누려도 될까?”나상민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정민규도 다가왔다. 정민규는 블랙 슈트 차림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춤은 나랑 가장 먼저 추기로 약속했잖아.”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 정민규에게 매달릴 때 단성대학교에 붙기만 하면 그와 가장 먼저 춤을 추겠다고 약속했었다.시간이 하도 빨리 지나서 예전의 일을 많이 잊어버렸다.나는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건네진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은 고마운데 이미 함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7화

    김다비는 고은빈을 노려보면서 한심한 말투로 말했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날 밤에 엄마가 뭐라 했었는지 다 잊었어? 고은성은 지금 이용 가치가 있어. 고씨 가문이 더 많은 권력자와 친분을 맺으려면 고은성이 있어야 해.”“그럼 나는요?”고은빈이 속상해하며 울었다.“나도 이 집 딸이에요. 근데 왜 다 고은성한테 기대야 하는 건데요?”김다비는 고은빈이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놀란 마음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고은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고은성한테 기대는 게 아니라 엄마는 네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러지. 권력자들한테 빌붙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넌 엄마한테 가장 소중한 딸이야. 네가 다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엄마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한테는 가장 좋은 것만 줄 거야.”김다비는 고은빈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머리를 어루만졌다.“고씨 가문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서 고은성이 재벌에 시집가면 무조건 시댁에서 모욕을 당하면서 살 거야.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고은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전 고은성이 일부러 그녀 앞에서 자랑하던 것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이튿날 아침, 고씨 가문 전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고은성이 잠에서 깨자 피부 관리사가 먼저 와서 피부 케어를 해주었고 그 뒤로 메이크업도 받고 헤어도 했다.할 게 너무 많아 차라리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작은아가씨, 먼저 다른 데 가서 쉬세요. 큰아가씨 쪽이 하도 바빠서 작은아가씨를 돌봐줄 시간이 없어요.”도우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고은빈도 마침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발 저린 듯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드레스를 다림질하고 있었다.“은빈이 왜 왔대요?”“잠깐 들어와서 보고 그냥 나갔어요.”손목 화환을 가져다준 도우미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만 끄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6화

    16살에 내가 넘어졌을 때 나를 일으켜주고 밴드를 붙여준 다음 아프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고 약한 마음을 다잡았다.‘오히려 지금이 좋아.’더는 그들에게 기대할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나도 사랑할 필요가 없었다.이런 것들이 없으니 차라리 더 홀가분했다....진학 연회는 3일 뒤로 정해졌다. 그날이 오기 전에 고민욱과 김다비는 나에게 꽤 많은 돈을 썼다.김다비는 조운시에서 가장 잘하는 피부 관리사를 예약하여 연속 이틀 관리를 받게 해주었고 헤어도 바꾸고 매니큐어도 받게 해주었다. 귀티나도록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꿔주었다.연회 전날 저녁 고민욱이 나를 위해 제작한 드레스가 도착했다. 샴페인 색의 공주 원피스였는데 치맛자락에 보석이 박혀있었다.드레스를 입어 봤는데 참으로 예뻤다. 청순함과 섹시함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었다.나는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다들 예쁘다고 했고 고민욱마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우리 딸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고개를 들고 고민욱을 쳐다보았는데 고은빈이 질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어 웃으면서 일부러 물었다.“은빈아, 언니가 입은 이 드레스 예뻐?”슬쩍 건드렸을 뿐인데 고은빈이 그대로 폭발했다.“고은성,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이야?”“얼굴이 예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서?”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치맛자락을 들고 한 바퀴 돌았다.“엄청 예쁘지? 지금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지?”고은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고 얼굴도 시뻘게졌다.“질투는 무슨. 질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엄마 아빠 사랑도 못 받은 주제에. 하도 운이 좋아서 수능에 조운시 2등을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같은 날이 있을 것 같아?”고은빈의 말은 나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고민욱과 김다비가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고민욱이 고은빈에게 호통쳤다.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5화

    그리고 이 일의 배후에는 김다비와 고민욱이 있었다.모든 걸 알게 된 후에야 이 다정하고 지적인 모습 뒤에 얼마나 악랄한 마음이 숨어있는지 알게 되었다.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그럼 다행이고.”김다비가 나의 손을 잡았다.“부녀끼리 이렇게 싸워서야 하겠어? 안 그래?”나는 김다비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할 얘기 있으면 하세요. 빙빙 돌리지 말고.”김다비는 멋쩍어하면서 부자연스럽게 두 손을 잡았다.“무슨 일이냐면 네가 수능에서 조운시 2등을 했잖아. 네 아빠가 체면이 선다고 진학 연회를 해주고 싶대.”나는 싸늘하게 웃었다.‘진학 연회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나가서 값어치가 얼마나 되나 보려는 거겠지.’“그렇게 하세요, 그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그 전에 1억 주세요. 개학하면 옷도 사야 하고 학용품도 사야 해서요. 줄 수 있어요?”그들이 나의 가치를 원한다면 나도 그만큼 뜯어내야 했다.1억이라는 소리에 김다비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괜찮은 척했다.“당연하지. 네 아빠더러 너한테 단성에 집을 사주는 건 어떨지 말하려던 참이었어. 네가 혼자 밖에 있는 게 걱정돼서 말이야. 집을 사서 도우미를 구하면 일상생활에 많이 도움이 될 거야.”‘나의 일상생활을 챙긴다는 건 거짓말이고 원하는 건 감시겠지.’“괜찮아요. 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싶어요.”김다비의 연기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돈은 언제 줄 거예요?”김다비도 일어났다.“일단 네 아빠한테 얘기한 다음에 바로 입금할게. 밥도 다 됐으니까 내려가서 먹자.”“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나가려는 기미가 없자 눈썹을 치켜세웠다.“안 나가요? 여긴 내 방인데.”김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나갈게.”그러고는 방을 나갔다.나는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옷방으로 가서 캐리어 안에 넣은 부동산 등기등본을 꺼내 다른 곳에 숨겼다. 조금 전 김다비는 분명 내 방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4화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고민욱이 버럭 화를 냈다.“거기 서. 이젠 막 나가겠다는 거야? 말도 없이 집을 나가고 들어와도 인사도 안 하고. 네 눈에는 이 아빠랑 새엄마가 안 보여?”나는 어두운 표정의 고민욱을 덤덤하게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 눈에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빠 눈에 이 딸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어요.”“아빠.”나는 중얼거리듯 두 글자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욱은 아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비행기를 다섯 시간이나 타서 좀 피곤해요. 아빠...”나는 일부러 강조해서 아빠를 불렀다.“이만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요?”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더 화가 난 고민욱이 내 앞으로 다가와 따귀를 날리려 하자 김다비가 재빨리 다가와 말렸다.“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애가 피곤하다고 하면 올라가서 쉬게 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이게?”그녀는 돌아서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은성아, 아빠 신경 쓰지 마. 요 며칠 네가 연락이 없어서 아빠가 걱정돼서 그래. 됐어. 올라가서 쉬어. 이따가 밥 다 되면 부를게.”김다비가 좋은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나는 그들과 더는 싸우지 않았고 지금 그들의 가면을 벗길 때도 아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2층 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김다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왜 그래? 은성이가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귀한 애인지 몰라? 수능을 잘 봐서 많은 사람이 은성이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한다고.”나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안 그러면 이 자리에 서서 휴대전화로 그들의 대화를 녹음할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웠다. 비행기에서 꾼 그 꿈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환생한 덕에 많은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 대신 나도 까칠해졌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또 내가 원하는 자유와 행복을 언제쯤이면 누릴 수 있을지 생각하곤 했다.한창 이런저런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3화

    두 사람은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룸 문이 닫힌 후에야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까지는 배가 고파서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정작 메뉴를 보니 입맛이 없었다.종업원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종업원이 기다리는 게 미안했던 나는 오늘의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온 후에도 먹지 않고 계속 밥알만 셌다.머릿속에 조금 전 두 사람이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그날 밤 나에게 키스하던 그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그럼 난 뭐지? 그냥 데리고 노는 고양이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그냥 욕구나 푸는 도구?’젓가락을 하도 꽉 쥐어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식당에서 나왔다.이튿날 이른 아침 나는 공항으로 갔다. 거의 탑승하기 직전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낯선 번호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너머로 나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성아,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식사 약속도 펑크낸 건 물론이고 호텔까지 바꿔? 일부러 날 피하는 거 맞지?”나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발끝을 툭툭 차면서 말했다.“결제는 내가 했어. 그리고 내가 어디에 묵든 그건 내 자유지,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양심 없는 것.”나상민이 속상한 척했다.“내 번호야. 저장해둬.”체크인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하러 갔다.“너랑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이만 끊을게.”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창문 밖에 하얀 뭉게구름이 가득했고 하늘이 어찌나 파란지 또 다른 바다 같았다.어젯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잠이 솔솔 왔다. 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데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정민규에게 매달리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었다.나는 도서관에 가려는 정민규를 막아서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진세라가 뭐가 좋다고 그래? 나보다 예뻐?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2화

    나상민은 고개를 돌리더니 요염한 눈매로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걸어갔다.“미쳐 날뛰고 싶으면 혼자 미쳐 날뛰어. 날 끌어들이지 말고.”“은성아.”나상민이 뒤따라왔다.“농담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나상민에게 밥을 사주기로 한 곳은 성지연이 추천해준 곳이었다.성지연의 삼촌네 집이 단성시에 있어 10살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단성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성지연이 추천해준 식당은 나상민과 함께 갔던 SNS 맛집보다 훨씬 맛있을 것이다.식당에 도착한 후 나상민은 주차하러 갔고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상민은 돌아오지 않았다.무슨 일인지 가보려던 그때 정민규와 진세라도 이 식당으로 오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길로 가려 했다.움직임이 빨라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민규가 갑자기 귀신처럼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으악.”화들짝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뒷걸음질 치면서 돌에 걸린 나머지 뒤로 넘어지려 했다.넘어지면서 눈을 감았는데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고 누군가 팔로 나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삼나무 향이 가득한 품에 와락 안겼다.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눈을 뜬 그때 정민규의 두 눈과 마주했다.정민규의 두 눈에 소용돌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는데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마워.”나는 똑바로 선 다음 정민규의 손을 밀어냈다. 정민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나와 거리를 멀리했다.“방금 일부러 나한테 안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 새로운 수법이야?”‘새로운 수법은 개뿔.’나는 헛웃음을 지었다.“농담하지 마. 네가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만 하지 않았어도 넘어질 뻔하지 않았어. 적반하장이 따로 없어, 정말.”“그래?”정민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만 가려는데 정민규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고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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