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봉숭아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2-11 13:28:02
방정맞으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뒤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민규는 물론 나상민과 더더욱 엮이기 싫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대놓고 훑어보았고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소문과 아주 다른데? 찰거머리처럼 정민규한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더니 아까는 누가 봐도 선을 긋기 급급한 모습이잖아.”

허리를 갑자기 숙인 탓에 숨결이 얼굴에 고스란히 닿았다.

“새로운 수법인가? 밀당하는 거야?”

낯선 사람의 접근이 어색한 나머지 나는 무의식중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커다란 손바닥이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뒤로 잡아당기자 익숙한 향기를 풍기는 품에 쏙 안겼다.

“저리 꺼져.”

정민규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한일자로 꾹 닫힌 입술이 눈에 들어왔고 얼굴에는 짜증 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왜 화가 난 거지?

하지만 품에 안기는 다정한 스킨십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거 놔.”

이내 품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정민규는 내가 도망갈 줄 몰랐는지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려던 찰나 진세라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민규야, 생수 한 병 사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고은성? 너도 있었어?”

나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몰래 민규를 따라온 거야?”

진세라는 우리 둘을 번갈아 살피더니 정민규의 팔을 잡아당기며 천진난만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규야, 이제 와서 스토킹 당한 거 따져봤자 뭐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 혼자서 밖에 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한데.”

비아냥거리는 말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나상민이 싸늘한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

“어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몰라?”

그는 평소에 착하고 다정해 보여도 실제로는 차갑고 야박한 사람이다. 예고도 없이 가면을 벗고 나니 어둡고 매정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치 한가롭게 햇볕을 쬐고 있다가 갑자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는 초원의 치타 같았다.

겁에 질린 진세라는 서둘러 정민규의 품에 파고들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민규야, 저 사람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정민규는 밀어내는 대신 껴안는 시늉을 했고 누가 봐도 그녀를 감싸주는 의미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사과해.”

그동안 진세라만 편애하는 모습을 줄곧 지켜봤지만 다시금 목격하자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밤 연회 때문에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는데 말이다.

속으로 뻔하면서도 진세라가 비꼬는 걸 묵인했다.

무의미한 전쟁에 연루되어 싸움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가끔은 싫어도 마주해야 할 상황이 오게 된다.

“왜 사과해야 하지? 대체 누구한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민규를 바라보며 두 눈을 빤히 응시하고 도발에 가까운 말투로 되물었다.

정민규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느낌이 들었다.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뒤돌아서 떠나갔다.

한 번 편애하기 시작하면 평생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길가에 다다랐을 때 정민규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는데?”

나는 황당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허락이 왜 필요해? 네가 뭔데?”

이제 더는 고분고분 따르고 싶지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고은성!”

정민규의 손아귀에 힘이 불끈 들어갔고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움켜쥐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정민규 씨, 당신 때문에 은성이가 아파하는 게 안 보여?”

나상민은 다가와서 정민규의 손가락을 풀더니 나를 등 뒤로 끌어당겨 앞을 가로막았다.

“꺼져.”

정민규는 손을 뻗어 나상민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오라 가라야?”

나상민은 멱살을 잡은 정민규의 손을 움켜쥐고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은성한테 물어봐. 과연 꺼져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민규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고개를 들자 마치 폭풍전야를 연상케 하는 눈빛과 마주했다.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그만 가보겠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진세라가 뛰어와서 나상민의 손을 잡아당겼다.

“얼른 민규 놓지 못해? 이 손 놔!”

그러고 나서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고은성, 뭐라도 얘기해 봐. 두 사람이 싸우는 꼴 보고 싶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새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내려다보자 꾹꾹 참아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오늘 밤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들을 건드린 적이 없거든? 일이 있으면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 괜히 남의 귀한 시간은 왜 낭비하는데?”

말을 마치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를 세우고 현장을 벗어났다.

...

택시에 올라탄 다음 나는 창문에 기대어 시시각각 변하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과거로 환생하고 나니 예전만큼 욕심이 많지 않았다. 현재로서 전생에 상처를 줬던 사람과 선을 긋고 내 삶을 살아가는 게 제일 간절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민규, 진세라 그리고 전생에서 2년 뒤에 만나게 될 나상민과 계속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나는 문득 전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까 봐 겁이 났다.

성지연이 픽업 왔을 때 컨디션은 이미 엉망이었다.

다행히 배려심이 깊은 그녀는 어두운 표정을 발견하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푹 쉬라고만 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샤워하러 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차피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든 맞이해야 하기 마련이다. 아직 발생하기도 전에 막연한 공포에 질려서 굴복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에 우울했던 마음이 그나마 조금 회복되었다.

앞으로 5일 뒤에 수능이 있는지라 모든 에너지를 대학 입시에 쏟아부어야만 했다.

전생에 그렇게 좋아하던 패션 디자인 전공을 공부하지 못해서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접었어야 했지만 이번 생에는 꼭 이루리라 다짐했다.

다음 날.

성지연과 문제 풀이에 여념이 없을 때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대충 얼버무리는 대답을 듣긴 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수학 문제 풀이법을 확인하려고 복습 노트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미처 찾기도 전에 성지연이 휴대폰을 들고 다가왔다.

입술을 꾹 닫고 자리에 앉아 한참이 지나서도 공부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나는 손에 든 시험지를 내려놓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묶으며 넌지시 물었다.

“누가 연락했는데? 왜 전화를 받고 멍때리고만 있어?”

성지연은 볼펜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돌아앉았지만 말을 아꼈다.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진 나머지 손을 뻗어 통통한 볼살을 꼬집으며 달래주었다.

“우거지상 하지 말고 얼른 얘기해 봐.”

“네가 말하라고 했다?”

성지연은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심호흡한 뒤 용기를 끌어내 입을 열었다.

“정민규가 연락이 왔는데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대.”

Related chapters

  • 열여덟, 스물 다섯   제8화

    정민규가 날 찾으러 성지연 집 앞에 와 있다니?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싫어하는 사람을 제 발로 찾아올 리 있겠는가?심지어 무일푼으로 외박까지 했는데 정작 친아빠라는 인간은 연락조차 없는데 말이다.아마도 진세라 대신 사과를 받아내려고 찾아왔을 가능성이 컸다.어젯밤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볼펜과 시험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날 찾아왔다고 해서 만나줘야 한다는 법이 있어? 기다리다 지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방학 전 모의고사에서 내가 예상했던 점수보다 2점이 낮았는데 수능에서 2점 차이면 등수가 얼마나 많이 떨어지는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문제 풀이에 집중했지만 오히려 성지연이 안절부절못했다.나를 몰래 훔쳐보더니 일어나서 물 마시거나 화장실에 들락거리기도 했다.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재빨리 껐는데 결국 참다못해 볼펜과 종이를 단번에 빼앗아 갔다.“고은성! 문제 그만 풀고 솔직한 심정 얘기해줄래?”몇 시간 동안 시험지만 들여다봤더니 눈이 뻑뻑할 지경이다. 마침 볼펜과 종이를 가져간 바람에 겸사겸사 한숨 돌리기로 했다.“뭘?”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여전히 건조하게 느껴졌다.“정민규 말이야.”성지연은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돌리더니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진짜 포기할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으면 못 살았을 정도였잖아.”그녀가 한 말을 속으로 되뇌는 순간 가슴이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물론 정민규밖에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상처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언정 놓아주기 마련이다.이미 목숨까지 건 사랑을 해봤기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진짜 너무 힘들었다.다시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무력감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현실을 자각한 거지.”나는 성지연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마치 얼마 전에 미친 듯이 아이돌만 쫓아다녔던 너처럼, 어느 순간

    Last Updated : 2024-12-11
  • 열여덟, 스물 다섯   제9화

    나는 정민규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는데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이게 바로 남자였다.물론 납득은 갔다. 자신을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사람이 자존심을 내팽개칠 정도로 집착하다가 갑자기 싫어한다고 말하면 나 같아도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뜬금없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또한 남자친구라도 되냐는 질문에 무의식중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사실은 가벼운 테스트에 불과했는데 말이다.나는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그거 봐? 대답 못하겠지? 더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농담 같아? 그동안 밀당하느라 연기한 게 아니거든? 그리고 정민규!”이내 진지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제 놓아줄 테니까 의심 안 해도 돼. 앞으로 졸업까지 딱 5일 남았어. 졸업하고 나면 우린 남남이 되겠지. 세상이 참 좁다고 하지만 일부러 마주치려고 애쓰지 않은 이상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고개를 돌리고 떠나려고 했다.“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진 거야?”걸음을 옮기자마자 정민규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몸을 돌려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그리고 어깨를 움켜쥐며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혹시 나상민이니?”이내 웃음을 터뜨렸고,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경멸이 가득했다.“오늘 아침 나씨 가문에서 너희 집에 프로젝트를 하나 넘겨줬다고 하던데.”그러고 나서 나를 놓아주더니 쌩하니 돌아섰다.“고은성, 너희 일가족은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우리 집에 빌붙는 데 실패하니까 바로 나씨 가문을 타깃으로 삼은 거야?”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산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나는 방금 정민규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고민욱이 이번에 또 무슨 짓을 벌인 걸까?“은성아, 괜찮아?”정민규가 떠난 것을 보고 성지연이 우산을 쓰고 총총 뛰어왔다.하지만 입만 벙긋했을 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동안 어떻게든 정민규과 선을 긋고 다시는 정씨 가문의 발판이 되지 말자고

    Last Updated : 2024-12-11
  • 열여덟, 스물 다섯   제10화

    “재수 없어.”성지연은 진세라를 보자마자 싫은 내색을 하며 나를 끌고 매장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은성아, 파리 꼬이니까 다른 가게 둘러보자.”이내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진세라는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닌지라 굳이 시비가 붙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가자.”성지연과 함께 밖으로 나서는데 일당 중 한 명이 눈을 흘기면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부자 코스플레이하기는, 곧 파산 직전인 거 다 아는데 아직도 거들먹거리고 있네.”진세라는 그녀를 말리는 척했다.“그만 해.”“뭐라고?”성지연이 문득 뒤돌아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다가가 진세라를 밀어내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옷걸이에 부딪혔다.일당 중 또 다른 한 명이 급히 뛰어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세라야, 괜찮아? 성지연! 손찌검은 왜 하는 거야?”“맞아도 싸거든? 주둥아리 함부로 놀렸다가 흠씬 두들겨 맞을 줄 알아.”추진력이 어찌나 좋은지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지연은 일당 앞으로 다가가 뺨을 때리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우리는 이미 머릿수에서 밀렸기에 고작 둘이서 세 명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소에 금지옥엽으로 자라 누가 봐도 여리여리한 모습인지라 막상 싸우게 되면 승산이 희박했다.심지어 선방을 날린 사람은 성지연이지 않은가?그것도 수능 전날에 시비에 휘말려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내 서둘러 뛰어가 있는 힘껏 휘두르는 성지연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하지만 상대방은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제지하는 줄 알았다.진세라의 껌딱지가 대뜸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역시 주인이 상황 파악이 더 빠르군. 졸개는 가만히 찌그러져 있는 게 어때?”곧이어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얼굴이 옆으로 꺾였다.다시 태어난 이후로 나는 굳이 사사건건 대응하거나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래서 진세라

    Last Updated : 2024-12-11
  • 열여덟, 스물 다섯   제11화

    이제 남은 사람이라곤 우리 둘뿐이다.그날 정민규와 기분이 상한 채 헤어진 후로 처음 만났다. 그날 이후로 우리가 한동안은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은 일부러 나를 괴롭히기라도 하듯 빨리 만난 건 물론이고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했다.정민규가 굳은 얼굴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뒷걸음질 치려 했다.그런데 아직 뒤로 가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나의 손목을 잡더니 카운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내 앞을 막아선 채 한 손으로 카운터를 잡고 지탱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나랑 세라를 한 쌍으로 만들었더라? 그럼 네 짝은 누군데? 나상민? 아니면 조운시의 다른 재벌?”정민규는 나를 값어치를 매긴 상품처럼 말했다. 그가 이미 한번 말했고 그의 마음속에 비친 나는 목적이 불순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욕을 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나는 정민규를 빤히 보며 웃으면서 일부러 화를 돋우었다.“내가 누굴 선택할 것 같아?”“고은성.”정민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에 닿을 무렵 확 밀어버렸다.“아무튼 누굴 선택하든 절대 넌 아니야.”나는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가게를 나온 그 순간 성지연이 다가와서 나의 손을 잡았다.“은성아, 괜찮아?”나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더는 쇼핑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냥 집에 가자.”“그래.”성지연은 곧바로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이내 자리를 비웠다.우리가 떠날 때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보지 않았다.성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바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성지연의 부모님이 곧 수능인 딸의 옆에 있어 주려고 먼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걸 알게 되었다.성지연은 기쁜 나머지 부모님의 품에 와락 안겨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 아빠를 불렀다.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

    Last Updated : 2024-12-11
  • 열여덟, 스물 다섯   제12화

    적금과 필요 없는 사치품을 정리하던 그때 도우미가 와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하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물건을 내려놓고 방에서 나갔다.위층에 꽤 오래 있어서 나상민이 이쯤이면 그만 돌아갔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주방에 들어가 보니 마치 주인처럼 센터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민욱이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평소 고민욱은 나와 고은빈에게 어른을 존경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었는데...고민욱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은성아, 얼른 와서 도련님이랑 얘기 나눠. 난 이젠 나이 먹어서 내가 얘기하면 젊은이들이 별로 관심 없어 해.”나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고민욱에게 휴대전화를 흔들면서 입 모양으로 숫자를 얘기했다. 곧이어 입금됐다는 문자를 받았다.나는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천만 원이 입금된 것이었다.문자를 확인한 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뒷짐을 진 채 발걸음을 멈췄다.“회장님, 매수비가 좀 적은데요? 아니면...”나는 고의인 듯 아닌 듯 나상민을 힐끗거렸다.머리가 좋은 나상민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나와 고민욱 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갔다는 걸 알아챘다.그는 피식 웃다가 자세를 고쳐잡고 더 편하게 의자에 기댔다.“회장님, 은성이 용돈이라도 깎았어요?”고민욱이 다급하게 부정하면서 웃었다.“오해야, 오해. 이번 달에 하도 바빠서 용돈을 이틀 늦게 줬거든. 그래서 삐졌어.”그러고는 이를 꽉 깨물고 나에게 웃었다.“일단 와서 밥 먹어. 이따가 은빈이 엄마더러 2천만 원 입금하라고 할게.”밥 한 끼에 이렇게 많은 돈을 얻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나는 두 눈이 반짝였다. 나는 순간 머리를 굴려 더 많은 돈을 얻어내려 했다.“아빠, 2천만 원으로는 부족해요. 수능이 끝나서 친구들이랑 나가 놀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입학 통지서가 나오면 참석해야 할 진학 연회도 엄청 많을 텐데. 아빠, 이참에 용돈 더 올려주세요.”고민욱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했다.“그럼 얼마를 원

    Last Updated : 2024-12-11
  • 열여덟, 스물 다섯   제13화

    수능이 끝난 탓인지 긴장이 풀리면서 그날 밤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입학 통지서를 받기 전날이 돼서야 몸이 괜찮아졌다.수능 성적이 나온 그날 밤에 나는 인터넷으로 점수를 확인했다. 400점 만점에 370점을 맞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단성대학교에 붙었다. 나는 이 결과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었는데 드디어 아름다운 꿈이 악몽을 뒤덮어버렸다.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학교로 갔다.성지연은 수능을 마치자마자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십여 일 만에 학교 문 앞에서 만났다.그녀는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브라운 톤으로 염색까지 했다. 이젠 졸업했으니 그다지 단정하지 않은 스커트를 입었는데 만화 속을 찢고 나온 소녀 같았다.성지연은 나를 보자마자 기뻐하면서 달려와 와락 안았다.“너무 보고 싶었어, 은성아. 마애민에서 너한테 줄 선물 엄청 많이 사 왔어. 이따가 입학 통지서 받으면 같이 우리 집에 가지러 가자.”성지연에게 안긴 나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알았어.”“그럼 약속한 거다?”성지연은 나를 풀어주고는 다시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며칠 못 본 사이에 살이 쪘는지 야위었는지 보자.”그러더니 점점 얼굴을 찌푸렸다.“왜 야위었어? 밥 제대로 안 먹었어?”성지연은 부모처럼 나를 챙겼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와 함께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며칠 전에 얘기했잖아. 감기 때문에 입맛이 없어서 끼니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고.”“맞다.”성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량소년처럼 나의 아래턱을 잡고 말했다.“이런 상황에 해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너 많이 예뻐졌어. 네 미모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그녀의 과장에 나는 그녀의 손을 툭 치면서 말했다.“거짓말쟁이, 어제는 아이돌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하더니.”성지연이 헤벌쭉 웃었다.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교실로 들어왔다. 이젠 고등학생이 아니어서 그런지 짧디짧은 십여 일 동안 친구들이 다 변한 듯했다.

    Last Updated : 2024-12-11
  • 열여덟, 스물 다섯   제14화

    6개월 전에 조운고등학교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여학생이 남학생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남학생이 학교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바람에 그 여학생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미 잊은 듯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성지연이 진세라를 째려보았다.“무슨 일이든 다 알려고 하고. 참 오지랖이 넓어.”그러자 진세라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악의로 물어본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진세라가 하도 당당해서 그만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하니까 그러지.”나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널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있어.”진세라는 나를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더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고 성지연과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나의 자리와 두 줄 떨어진 곳에 정민규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책상 위에 앉아 있었는데 한쪽 다리를 옆 책상에 올려놓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올려다보면서 비켜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만 그의 두 눈과 마주하고 말았다.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두 눈에 억제와 복잡함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정민규가 다리를 옮기고 나서야 나와 성지연은 제자리로 돌아갔다.잠시 후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담임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면서 교단에서 말했다.“오늘 몇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 조운시의 이과 1등과 2등이 모두 우리 반 학생이야.”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대박. 우리 반이 이렇게나 대단했어?”“누구예요?”“선생님 얼른 말해주세요. 그 대단한 학생이 누군지.”담임선생님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1등은 당연히 정민규 학생이고 2등은...”담임선생님이 일부러 말끝을 흐리자 학생들이 또 떠들어댔다.“2등은 고은성 학생이야. 고은성 학생이 370점을 맞았는데 정민규 학생과 불과 1점 차이밖에 안 나.”담임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Last Updated : 2024-12-11
  • 열여덟, 스물 다섯   제15화

    마지막 학급 회의가 끝났고 3년 동안 힘들었던 공부도 끝이 났다.조운고등학교의 관례에 따라 오늘 저녁에 사은회를 진행한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친구들끼리 한바탕 제대로 놀아야만 완벽한 결말을 맺을 수 있었다.식사를 마친 후 시간은 이미 9시가 넘었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워 누군가 노래방으로 가자고 제안했다.이젠 다 성인이라 담임선생님도 말리진 않았다. 하지만 젊은이들끼리 즐길 시간을 주려고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를 비웠다.나는 정민규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고 진세라의 여우 짓을 계속 경계하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대고 떠나려 했지만 텐션이 업된 성지연이 나를 잡고 놓지 않았다.“은성아, 우리 이따가 술 한잔하자. 모히토 어때? 나 아직 술 마셔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먹어보고 싶어. 진짜 그렇게 맛있는지.”성지연은 나를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성지연은 지금까지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었다.이젠 성인이 되었고 게다가 초롱초롱한 두 눈에 기대가 가득한 걸 보고 있자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알았어. 근데 나랑 약속해.”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보았다.“지금 10시니까 12시에 집에 가자. 술도 많이 마셔선 안 되고 맛만 살짝 보는 거야. 알았지?”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찾질 못했다.성지연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면서 배시시 웃었다.“알았어.”그 시각 진세라가 정민규에게 물었다.“민규야, 너도 갈래?”정민규가 덤덤하게 말했다.“넌 가고 싶어?”그러자 진세라가 대답했다.“가고 싶어. 앞으로 애들이 뿔뿔이 흩어질 텐데 이렇게 놀 기회가 별로 없어.”정민규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가자.”나의 기억 속 정민규는 친구들과의 연락을 그리 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니었다.성격이 통쾌하고 예의가 바른 정민규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친구들과 서로 도우면서 잘 어울려 지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과의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아니었다.정민

    Last Updated : 2024-12-11

Latest chapter

  • 열여덟, 스물 다섯   제30화

    나는 고민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상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한 건 물론이고 체면을 잃어 배상까지 하게 생겼다. 지금 나에 대한 미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은성.”고민욱은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와? 넌 어떻게 된 게 창피한 줄을 몰라? 너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알아?”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서 있자 고민욱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그런 창피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이 엄청난 사고를 어떻게 수습할 건데?”고민욱은 분노에 찬 두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망친 계약의 책임을 나에게 물을 기세였다.나는 싸늘하게 웃었고 두 눈에 하찮음이 스쳤다. 마음이 하도 차갑게 식은 탓인지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고민욱의 친딸이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나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고 혼내기만 했다.한 사람이 가치를 잃게 되면 함부로 짓밟아도 된단 말인가?“지금까지 아빠는 나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고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한 적도 없이 다짜고짜 혼내기만 했어요. 그러니 회사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문제니까 그 사람이 주요 책임을 져야 하는 거 맞죠?”고민욱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왜 이렇게 당당하게 째려보는지도 알지 못했다.김다비가 얼굴을 찌푸리고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은성아, 이젠 그 나이가 됐으면 아빠 걱정 좀 덜어주면 안 돼?”싸움을 말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진퇴양난에 빠뜨려 비난하려 했다.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쇼핑백을 바닥에 던졌다. 드레스가 떨어진 순간 고은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나의 날카로운 시선은 비수처럼 고은빈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치명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드레스를 망가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9화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정민규가 걸쳐준 겉옷을 꽉 잡았다.고개를 들어 옆을 힐끗거렸는데 진세라가 어둡기 그지없는 안색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 섞인 눈빛에 나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고 나와 정민규가 함께 자리를 떠나서 무척이나 분노한 모습이었다.그렇다. 여자는 질투에 눈이 멀면 자기만의 상상을 펼치게 된다.진세라의 질투와 혐오 섞인 눈빛을 본 나는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정민규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고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뒤에서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신경 쓸 새가 없이 그냥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을 뿐이었다.이 자리는 고민욱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였고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권력에 빌붙고 상류 사회에 들어가는 디딤돌이었다. 정민규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고민욱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문 앞에 다 와서야 나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가서 옷 갈아입어.”그의 말투는 냉랭했지만 불만도 섞여 있었다.“괜찮아.”나는 정민규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내가 얼마나 그와 선을 긋고 싶어 하는지 아마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럼 계속 여기 서서 사람들이 쳐다보게 놔둘 거야? 이런 수단으로 시선을 끌고 싶어?”정민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내가 이러고 있는 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정민규,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그러고는 그의 겉옷을 잡고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았다.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쫓아오려는 것 같았다.그런데 가녀린 누군가가 정민규의 앞에 나타났다. 진세라가 쫓아온 것이었다. 나와 정민규가 단둘이 있게 내버려 둘 진세라가 아니었다.“기사님, 출발하세요.”나는 겉옷을 움켜잡았다. 조금 전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지금 걸치고 있는 이 겉옷이 창피함을 가리는 옷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돌아간 후 나는 드레스를 벗고 꼼꼼하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드레스를 건드렸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8화

    나상민은 차갑기 그지없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 고민욱을 까발리지 않았다.“그랬군요. 정말 영광입니다.”나상민은 등 뒤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이건 내가 준비한 진학 선물이야.”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선물을 받았다.“고마워.”나의 말이 떨어진 그때 또 세 사람이 도착했다. 정민규와 진세라, 그리고 한정수였다.나는 고민욱을 흘끔 보면서 정민규까지 초대한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민욱은 나에게 나상민을 안내하라고 한 후 빠른 걸음으로 정민규의 앞으로 걸어갔다.정민규는 오늘 밤 진세라와 커플룩으로 맞춰 입었다. 두 사람 모두 블랙 톤으로 맞춰 입었는데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나는 대충 힐끔거린 후 시선을 거두었다. 나상민이 팔을 내밀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그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네 파트너가 될 사람은 나뿐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나는 웃기만 할 뿐 팔짱을 끼진 않았다.“가끔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도 안 좋아.”그러고는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마치고 나니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재빨리 빈 자리를 찾아 하이힐을 벗고 휴식했다.그런데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다비가 다가오더니 춤을 춰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금방 벗은 신발을 다시 신었다.내가 다가가자마자 나상민이 인파 속에서 걸어왔다. 나에게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매너 있게 물었다.“아름다운 은성아, 너랑 같이 춤을 출 영광을 누려도 될까?”나상민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정민규도 다가왔다. 정민규는 블랙 슈트 차림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춤은 나랑 가장 먼저 추기로 약속했잖아.”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 정민규에게 매달릴 때 단성대학교에 붙기만 하면 그와 가장 먼저 춤을 추겠다고 약속했었다.시간이 하도 빨리 지나서 예전의 일을 많이 잊어버렸다.나는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건네진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은 고마운데 이미 함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7화

    김다비는 고은빈을 노려보면서 한심한 말투로 말했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날 밤에 엄마가 뭐라 했었는지 다 잊었어? 고은성은 지금 이용 가치가 있어. 고씨 가문이 더 많은 권력자와 친분을 맺으려면 고은성이 있어야 해.”“그럼 나는요?”고은빈이 속상해하며 울었다.“나도 이 집 딸이에요. 근데 왜 다 고은성한테 기대야 하는 건데요?”김다비는 고은빈이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놀란 마음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고은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고은성한테 기대는 게 아니라 엄마는 네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러지. 권력자들한테 빌붙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넌 엄마한테 가장 소중한 딸이야. 네가 다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엄마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한테는 가장 좋은 것만 줄 거야.”김다비는 고은빈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머리를 어루만졌다.“고씨 가문이 그렇게 권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서 고은성이 재벌에 시집가면 무조건 시댁에서 모욕을 당하면서 살 거야.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고은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전 고은성이 일부러 그녀 앞에서 자랑하던 것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이튿날 아침, 고씨 가문 전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고은성이 잠에서 깨자 피부 관리사가 먼저 와서 피부 케어를 해주었고 그 뒤로 메이크업도 받고 헤어도 했다.할 게 너무 많아 차라리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작은아가씨, 먼저 다른 데 가서 쉬세요. 큰아가씨 쪽이 하도 바빠서 작은아가씨를 돌봐줄 시간이 없어요.”도우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고은빈도 마침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발 저린 듯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드레스를 다림질하고 있었다.“은빈이 왜 왔대요?”“잠깐 들어와서 보고 그냥 나갔어요.”손목 화환을 가져다준 도우미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만 끄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6화

    16살에 내가 넘어졌을 때 나를 일으켜주고 밴드를 붙여준 다음 아프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고 약한 마음을 다잡았다.‘오히려 지금이 좋아.’더는 그들에게 기대할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나도 사랑할 필요가 없었다.이런 것들이 없으니 차라리 더 홀가분했다....진학 연회는 3일 뒤로 정해졌다. 그날이 오기 전에 고민욱과 김다비는 나에게 꽤 많은 돈을 썼다.김다비는 조운시에서 가장 잘하는 피부 관리사를 예약하여 연속 이틀 관리를 받게 해주었고 헤어도 바꾸고 매니큐어도 받게 해주었다. 귀티나도록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꿔주었다.연회 전날 저녁 고민욱이 나를 위해 제작한 드레스가 도착했다. 샴페인 색의 공주 원피스였는데 치맛자락에 보석이 박혀있었다.드레스를 입어 봤는데 참으로 예뻤다. 청순함과 섹시함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었다.나는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다들 예쁘다고 했고 고민욱마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우리 딸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고개를 들고 고민욱을 쳐다보았는데 고은빈이 질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어 웃으면서 일부러 물었다.“은빈아, 언니가 입은 이 드레스 예뻐?”슬쩍 건드렸을 뿐인데 고은빈이 그대로 폭발했다.“고은성,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이야?”“얼굴이 예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서?”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치맛자락을 들고 한 바퀴 돌았다.“엄청 예쁘지? 지금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지?”고은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고 얼굴도 시뻘게졌다.“질투는 무슨. 질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엄마 아빠 사랑도 못 받은 주제에. 하도 운이 좋아서 수능에 조운시 2등을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같은 날이 있을 것 같아?”고은빈의 말은 나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고민욱과 김다비가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고민욱이 고은빈에게 호통쳤다.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5화

    그리고 이 일의 배후에는 김다비와 고민욱이 있었다.모든 걸 알게 된 후에야 이 다정하고 지적인 모습 뒤에 얼마나 악랄한 마음이 숨어있는지 알게 되었다.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그럼 다행이고.”김다비가 나의 손을 잡았다.“부녀끼리 이렇게 싸워서야 하겠어? 안 그래?”나는 김다비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할 얘기 있으면 하세요. 빙빙 돌리지 말고.”김다비는 멋쩍어하면서 부자연스럽게 두 손을 잡았다.“무슨 일이냐면 네가 수능에서 조운시 2등을 했잖아. 네 아빠가 체면이 선다고 진학 연회를 해주고 싶대.”나는 싸늘하게 웃었다.‘진학 연회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나가서 값어치가 얼마나 되나 보려는 거겠지.’“그렇게 하세요, 그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그 전에 1억 주세요. 개학하면 옷도 사야 하고 학용품도 사야 해서요. 줄 수 있어요?”그들이 나의 가치를 원한다면 나도 그만큼 뜯어내야 했다.1억이라는 소리에 김다비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괜찮은 척했다.“당연하지. 네 아빠더러 너한테 단성에 집을 사주는 건 어떨지 말하려던 참이었어. 네가 혼자 밖에 있는 게 걱정돼서 말이야. 집을 사서 도우미를 구하면 일상생활에 많이 도움이 될 거야.”‘나의 일상생활을 챙긴다는 건 거짓말이고 원하는 건 감시겠지.’“괜찮아요. 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싶어요.”김다비의 연기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돈은 언제 줄 거예요?”김다비도 일어났다.“일단 네 아빠한테 얘기한 다음에 바로 입금할게. 밥도 다 됐으니까 내려가서 먹자.”“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나가려는 기미가 없자 눈썹을 치켜세웠다.“안 나가요? 여긴 내 방인데.”김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나갈게.”그러고는 방을 나갔다.나는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옷방으로 가서 캐리어 안에 넣은 부동산 등기등본을 꺼내 다른 곳에 숨겼다. 조금 전 김다비는 분명 내 방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4화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고민욱이 버럭 화를 냈다.“거기 서. 이젠 막 나가겠다는 거야? 말도 없이 집을 나가고 들어와도 인사도 안 하고. 네 눈에는 이 아빠랑 새엄마가 안 보여?”나는 어두운 표정의 고민욱을 덤덤하게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 눈에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빠 눈에 이 딸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어요.”“아빠.”나는 중얼거리듯 두 글자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욱은 아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비행기를 다섯 시간이나 타서 좀 피곤해요. 아빠...”나는 일부러 강조해서 아빠를 불렀다.“이만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요?”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더 화가 난 고민욱이 내 앞으로 다가와 따귀를 날리려 하자 김다비가 재빨리 다가와 말렸다.“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애가 피곤하다고 하면 올라가서 쉬게 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이게?”그녀는 돌아서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은성아, 아빠 신경 쓰지 마. 요 며칠 네가 연락이 없어서 아빠가 걱정돼서 그래. 됐어. 올라가서 쉬어. 이따가 밥 다 되면 부를게.”김다비가 좋은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나는 그들과 더는 싸우지 않았고 지금 그들의 가면을 벗길 때도 아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2층 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김다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왜 그래? 은성이가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귀한 애인지 몰라? 수능을 잘 봐서 많은 사람이 은성이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한다고.”나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안 그러면 이 자리에 서서 휴대전화로 그들의 대화를 녹음할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웠다. 비행기에서 꾼 그 꿈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환생한 덕에 많은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 대신 나도 까칠해졌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또 내가 원하는 자유와 행복을 언제쯤이면 누릴 수 있을지 생각하곤 했다.한창 이런저런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3화

    두 사람은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룸 문이 닫힌 후에야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까지는 배가 고파서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정작 메뉴를 보니 입맛이 없었다.종업원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종업원이 기다리는 게 미안했던 나는 오늘의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온 후에도 먹지 않고 계속 밥알만 셌다.머릿속에 조금 전 두 사람이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그날 밤 나에게 키스하던 그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그럼 난 뭐지? 그냥 데리고 노는 고양이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그냥 욕구나 푸는 도구?’젓가락을 하도 꽉 쥐어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식당에서 나왔다.이튿날 이른 아침 나는 공항으로 갔다. 거의 탑승하기 직전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낯선 번호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너머로 나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성아,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식사 약속도 펑크낸 건 물론이고 호텔까지 바꿔? 일부러 날 피하는 거 맞지?”나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발끝을 툭툭 차면서 말했다.“결제는 내가 했어. 그리고 내가 어디에 묵든 그건 내 자유지,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양심 없는 것.”나상민이 속상한 척했다.“내 번호야. 저장해둬.”체크인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하러 갔다.“너랑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이만 끊을게.”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창문 밖에 하얀 뭉게구름이 가득했고 하늘이 어찌나 파란지 또 다른 바다 같았다.어젯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잠이 솔솔 왔다. 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데 꿈까지 꿨다. 꿈속에서 정민규에게 매달리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었다.나는 도서관에 가려는 정민규를 막아서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진세라가 뭐가 좋다고 그래? 나보다 예뻐?

  • 열여덟, 스물 다섯   제22화

    나상민은 고개를 돌리더니 요염한 눈매로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걸어갔다.“미쳐 날뛰고 싶으면 혼자 미쳐 날뛰어. 날 끌어들이지 말고.”“은성아.”나상민이 뒤따라왔다.“농담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나상민에게 밥을 사주기로 한 곳은 성지연이 추천해준 곳이었다.성지연의 삼촌네 집이 단성시에 있어 10살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단성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성지연이 추천해준 식당은 나상민과 함께 갔던 SNS 맛집보다 훨씬 맛있을 것이다.식당에 도착한 후 나상민은 주차하러 갔고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상민은 돌아오지 않았다.무슨 일인지 가보려던 그때 정민규와 진세라도 이 식당으로 오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길로 가려 했다.움직임이 빨라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민규가 갑자기 귀신처럼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으악.”화들짝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뒷걸음질 치면서 돌에 걸린 나머지 뒤로 넘어지려 했다.넘어지면서 눈을 감았는데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고 누군가 팔로 나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삼나무 향이 가득한 품에 와락 안겼다.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눈을 뜬 그때 정민규의 두 눈과 마주했다.정민규의 두 눈에 소용돌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는데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마워.”나는 똑바로 선 다음 정민규의 손을 밀어냈다. 정민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나와 거리를 멀리했다.“방금 일부러 나한테 안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 새로운 수법이야?”‘새로운 수법은 개뿔.’나는 헛웃음을 지었다.“농담하지 마. 네가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만 하지 않았어도 넘어질 뻔하지 않았어. 적반하장이 따로 없어, 정말.”“그래?”정민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만 가려는데 정민규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고은성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