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짙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고 심지어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그런 반응에 백유미는 당황하며 울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서 부드럽게 사과를 건넸다.“승재야, 어쨌든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벌이든 욕이든 내가 다 감수할게.”이 정도 설명이면 백유미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곽승재는 더 이상 문제를 추궁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서인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모함이 아니라면 투자 계획을 철회해.”백유미가 서둘러 답했다.“걱정 마, 이미 사람들을 시켜서 확인하는 중이니까. 정말 문제가 있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만둘 거야.”곽승재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미간을 어루만졌다.“별일 없으면 나가.”백유미는 곽승재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슬쩍 떠보았다.“승재야, 너무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머리 좀 주물러줄까? 아빠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마사지를 해드렸는데 아빠가 나 마사지 잘한다고 칭찬했어.”“됐어.” 곽승재는 거절했다.“기사한테 나 데리러 오라고 해.”백유미는 부드럽고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하룻밤 지내는 게 어때, 어차피 내일 아침에 서인수 관련해서 회의해야 하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있어?”곽승재는 여전히 거절했다.“아니.”고은서가 또 무슨 말썽을 피우면 더 이상 감당할 기운이 없다.백유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곽승재는 최근 들어 고은서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예전 같았으면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고은서에게 절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곽승재는 항상 자신의 일에 엄격했고 명운처럼 중요한 프로젝트를 절대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오늘 그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일을 뒤로 미루고 며칠 전 성아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쳐 망신을 준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일부러 그녀를 피하기까지 했다
이미숙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그가 감기 걸리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던 찰나, 곽승재가 오늘 밤 자신을 도와준 게 떠올랐다.배은망덕할 수는 없으니 고은서는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분명 도련님이 올라와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침대를 정리하는 줄 알고 이미숙은 안도하며 기다렸다.곧 다시 나온 고은서의 손에 얇은 담요가 들려 있었다.“여기요.”이미숙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사모님, 도련님 부축해서 올라오게 하시지 않고요? 이런 날 소파에서 자면 추워서 병 걸리기 쉬워요.”“아픈 고양이도 아니고 어디 그렇게 쉽게 얼어 죽겠어요?”고은서는 얇은 담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여기 담요 있으니까 가서 덮어주면 돼요.”고마운 건 이 정도면 되지.이미숙은 망설이며 담요를 받아 들었다. “사모님, 이거 의자에 깔고 발로 밟던 거 아니에요?” 고은서는 집에서 맨발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별다른 할 일이 없을 때면 의자를 밟고 뛰어다니거나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해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두었던 것이다.“괜찮아요, 안 더러워요. 여기에 여분의 담요도 없어요.”이미숙은 침대와 의자에 놓인 예쁘고 깨끗한 여러 개의 담요를 슬쩍 바라보았다.“이건 다 내가 아끼는 건데 어떻게 곽승재한테 줘요!”고은서가 품에 껴안았다.“하지만...”“없어요, 없어” 고은서가 재촉했다.“이게 제일 나아요. 아주머니, 빨리 가져가세요!”“...”...다음 날 점심때, GS 그룹대표 사무실.판주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주민기는 사장님의 미간에서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었다.“대표님, 몸이 안 좋으시면 일단 쉬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저 부르세요.”곽승재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육현석의 모습이 보였다.그를 본 육현석이 오바스럽게 달려왔다.“형, 드디어 만났네! 어제 하루 종일, 오늘 오전 내내 기다렸어. 정말 대통령보다 더 바쁘네!”육현석
“고은서가 좀 귀찮게 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닌데, 그러면 안 되지 않아?” 육현석이 묻자 곽승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나가.”마침 비서가 차를 가져왔고 육현석이 아부하며 그에게 건넸다.“형, 차 마시고 목 좀 축여.”곽승재는 마침 목이 불편해 물을 받아 마셨다.“헤헤, 형은 내가 왜 왔는지 알잖아!”비서가 나가자 육현석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이렇게 말했다.“걸프 프로젝트 우리 집 영감탱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형이 기각하면 난 몇 달, 아니 올해 내내 자유가 없어. 분명 회사로 끌려가서 공부시킬 거라고!”“마침 내 귀도 조용할 수 있겠네.”“형 이러면 안 돼.”육현석이 울먹이며 징징거렸다.“학교 다닐 때 형이랑 민시후가 싸우면 누가 달려가서 도와줬어?”“발차기 한 번에 피 줄줄 흘리면 쓰러진 너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질뻔했을 때?”“... 그래도 형에 대한 내 의리는 인정해 줘야지!”곽승재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다시 상세하게 제안서 만들어. 직접 만들고 직접 설명해.”육현석이 울상을 지었다.“내가 어떻게 해!”“그럼 네 의리 챙겨서 아버지 회사로 가서 일해.”“해, 바로 할게!”멘탈 하나는 갑이었던 육현석은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형,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바람피우면 안 돼. 아니면 내가 고은서한테 내가 말해서 형 빨리 포기하게 만들까?”곽승재는 육현석을 노려보았다.“당장 나가,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는 내 사무실에 발도 들이지 마.”‘이 형 기분이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해?’고은서를 언급할 때마다 화를 낸다는 건 분명 떨쳐내지 못해 짜증이 난 거겠지.“알았어, 형. 바로 갈게.”육현석은 사무실을 나서기 전 이렇게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난 항상 곁에서 형 편이 되어줄 테니까!”곽승재는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쓸 기운이 없어 눈을 감았다....고은서는 정오 무렵 낮잠에서 깨어났다.어젯밤 도아름에게 서인
박지연은 카메라 앞에 서 있고, 그 뒤로 그녀의 남편이 손에 든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다정한 사진이라기엔 아쉬웠지만 박지연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고은서는 달콤한 휴가를 방해할 수 없어 고민 끝에 도아름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 오후에 시간 되시면 같이 스파나 가실래요? 명운 쪽의 일을 재촉하려는 게 아니라 새로 오픈한 샵이 아주 좋다고 들어서 같이 가보고 싶어서요.]고은서는 직접 말하기에는 너무 건방진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어서 서인수에 대한 도아름의 태도를 살펴본 다음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잠시 후 도아름이 답장을 보냈다.[그래요.]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아름과 약속을 잡고 샵 주소를 보냈다.그때 이미숙이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아주머니, 어차피 둘밖에 없는데 같이 먹어요.”이미숙은 고은서가 전보다 훨씬 소탈하고 친근하게 대하니 자연스레 거절하지 않았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어제 밤새 소파에서 주무셨어요. 아침에 나가보니 기침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는데 감기 걸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미숙이 말하자 고은서는 짧게 대꾸할 뿐 맛있게 밥을 먹었다.“...” 왜 사모님이 더 이상 도련님에게 애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이미숙이 덧붙였다.“사모님, 도련님께 전화해서 일찍 오시라고 하는 건 어때요? 오전에 여사님께서 사모님보고 도련님 약 드시는 거 감독하라고 하셨어요.”곽승재가 약 먹는 걸 감독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아주머니, 약은 다 됐어요?”고은서가 묻자 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불에 끓이고 있으니까 도련님 오시면 바로 드실 수 있어요.”“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약은 제때 마셔야 효과가 있죠. 아주머니, 한 그릇 챙겨주세요. 제가 곽승재한테 가져다줄게요.”샵은 GS그룹과 같은 방향이었고 아직 도아름을 만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고은서는 가는 길에 곽승재의 표정을 즐길 생각이었다.어쩌면 체면이 깎인 곽승재가 분노에 휩싸여 이혼 서류에 사인할지도 모른
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예전처럼 짜증을 내는 대신 진지하게 물었다.“곽승재랑 친하죠, 그럼 그쪽이 설득해 볼래요?”육현석이 오만하게 말했다.“난 당연히 형이랑 친하지만, 그쪽 좋아하라고 형 설득할 수는 없어요.”“아니요, 그 사람 이혼 서류에 사인하도록 설득하자는 얘기예요.”“난 절대… 엥?”육현석은 고은서가 계속 애원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지금 뭐라고 한 거지?“이혼 서류? 형이 그쪽이랑 이혼해요?”“정확히 제가 그 사람과 이혼하려는 거예요.”고은서는 보온병을 육현석의 손에 밀어주며 정정하고는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 사본을 꺼내며 말했다.“어떻게든 사인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건, 난...” 육현석은 충격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이게 무슨 상황인지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이혼을 원하는 사람이 왜 고은서가 된 걸까, 왜 그녀는 이혼 서류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걸까!그때 육현석은 갑자기 고은서에게서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번뜩 정신이 들었다!형의 사무실에 있던 담요에서 똑같은 냄새가 났다.희미했지만 그는 같은 향기라고 확신했다.그렇다면 형이 주우라고 한 담요도 고은서 것이고, 전날 형이 심적으로 괴로워했던 것도 고은서 때문이라고?“전 못 받아요!”고은서가 이혼 합의서까지 자신의 품에 밀어 넣으려는 것을 본 육현석은 불에 덴 듯 펄쩍 뛰며 피했다.“전 그쪽 도와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잖아요!”그렇게 말한 뒤 육현석은 고은서에게 보온병을 다시 돌려주며 그대로 도망쳤다.“...”합의서를 가방에 넣고 고은서는 계속해서 로비로 걸어갔다.프런트 직원은 여느 때처럼 따뜻하게 그녀를 맞이했고 안내하는 사람 없이 그녀는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프런트에서 알렸는지 주민기는 그녀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고 곽승재가 안쪽 사무실에서 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곽승재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마른
“정말 내려놨다면서 한쪽으로는 날 걱정하고 한쪽으로는 이혼하려는 건가, 어른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곽승재가 묻자 고은서는 진심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곽승재는 여전히 이혼하겠단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그녀를 아는 그 누구도 믿지 않겠지, 다 바보같이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잘못이다.이혼에 있어 외삼촌과 외숙모의 동의를 받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고씨 가문의 사업은 전부 그들이 손에 쥐고 있었고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난리를 부릴 수가 없었다.그녀가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질 정도로 힘이 세지 않는 한 그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빨리 돈도 벌고 사업을 해야 했다.“당신이 말한 걱정이라는 게 이거야?”고은서는 보온병을 가리켰다.“당신한테 주려고 가져온 건 맞아. 할머니가 당신 약 먹는 걸 감독하라고 하셨거든.”또다시 지난번처럼 약을 탔다고 생각한 곽승재는 머리가 아팠다.“저리 치워, 너랑 장난칠 시간 없어.”“그건 안 돼, 꼭 마셔야 해.”그녀가 보온병을 열자 강한 허브 냄새가 풍겼다.“할머니가 유명한 한의사한테서 특별히 구해 온 신장 강장 한약이야.”고은서는 신장을 튼튼하게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다 마실 때까지 지켜보다가 할머니께 영상 찍어 보내야 해.”고은서의 말투에서 곽승재는 무언가를 떠올렸고, 곧바로 잘생긴 얼굴이 가라앉았다.“버려.”고은서는 다소 아쉬웠다.“할머니의 성의를 이대로 버릴 거야?”곽승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고은서, 또 말썽 피우면 내가 강장제가 필요한지 아닌지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속에 담긴 협박을 알아차리고 보온병을 내려놓으면서 다정한 척 말했다.“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면 안 되지. 괜찮아, 여기 둘 테니까 사람 없을 때 몰래 마셔도 돼.”곽승재의 서늘한 눈빛이 그녀에게 향하자 고은서는 재빨리 사무실 문으로 물러섰다.“누가 자길 걱정한다고, 과대망상인가!”말을 마친 고은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턱을 들고 당당하게 나갔다.주민기는 고은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도아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감정의 깊이는 결혼한 시간과 상관이 없죠.”왠지 오늘따라 도아름의 기분이 이상해 보이는 건 고은서의 착각일까.지나치게 평온했다, 폭풍전야처럼.혹시 서인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걸까, 아니면 단순히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걸까?“은서 씨, 오늘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따로 있죠?”도아름은 차를 마시더니 살짝 주름이 잡힌 눈매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요.”고은서는 도아름의 관찰력에 감탄하면서도 부인하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주제넘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도아름이 살짝 웃었다.“그 사람이 약접 잡혀서 협박당하는 거 알고 있죠?”고은서는 깜짝 놀랐다.“그럼 사모님도 알고 계셨어요?”“아름 언니라고 불러요.”도아름의 얼굴이 한층 차가워졌다.“이젠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도아름은 어젯밤에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서인수가 그런 더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아름 언니, 그럼 어떻게 하실 거예요?”고은서는 그들이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고, 가정과 자식, 이익 관계가 걸려 있어 이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배우자의 바람을 알면서도 참는 것을 선택한다.특히 도아름처럼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곪아 터진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도아름은 차를 마시며 자신의 결정을 숨김없이 말했다.“전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것도 못 참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한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고은서는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이렇듯 확실한 도아름의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잘 생각해 보신 거예요? 명운은 곧 상장을 앞두고 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으면 안 돼요. 안 그러면 모든 걸 잃으니까요.”현실적인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한순간의 분노 때문에 힘들게 쌓아온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나보고 참으라고 설득하는 건가요?” 도아름이 되묻자 고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회사가 지난 몇 년 동안 침체기였잖아요. 곽씨 가문의 이름을 빌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더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 거예요.”외삼촌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 잔뜩 들떠서 이전 임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는 등 막무가내로 권력을 휘둘러 해를 거듭할수록 MQ의 발전은 악화됐다.운 좋게도 남아있는 할아버지는 명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리를 지키고 있기에 회사가 무너지지 않았다.그러나 할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고 기력도 딸려 삼촌에게 훈계를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지난해 그녀가 곽승재와 결혼하고 외삼촌이 곽씨 가문의 사돈이라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협업을 따내서야 겨우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곽씨 가문에 계속 의존하는 건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면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그래도 전문가들이라 우리에게 가져다줄 이익도 많고 삼촌보다 훨씬 잘할 텐데 더 좋지 않겠어요?”고준석은 이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은서 네가 나이를 먹더니 철이 들었구나. 사업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어.”“할아버지, 놀리지 마세요.” 고은서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할아버지, 제 제안 한번 고려해 주세요.”고준석이 손녀의 간청을 뿌리칠 리 없었다.“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며칠 후에 외삼촌과 상의해 볼게.”“역시 할아버지가 제일 현명해요! 할아버지, 삼촌을 꼭 설득하셔야 해요!”고준석은 고은서의 이마를 가볍게 톡 두드렸다.“말해 봐, 웬일로 집안 사업에 신경을 쓰는 거야. 넌 곽승재 그놈만 바라보고 있잖아.”“할아버지도 이제 저 다 컸다고 하지 않았어요?”고은서는 고준석의 팔짱을 끼고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할아버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아끼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요.”전생에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할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고, 자연스레 삼촌도 더 이상 회사를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죽음을 택하기 전 MQ는 이미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고은서는 할아버지의 피땀 눈물인 MQ가 망가
유일 투자 은행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먼저 직원들과 함께 간단한 업무 회의를 열고 곽승재의 스케줄을 알아보기 위해 육현석한테 연락했다.“은서야, 마침 전화하려고 했는데.”육현석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승재 형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러는데 혹시 승재 형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게 있어?”정보를 캐내려고 전화했는데 도리어 정보를 알려주는 입장이 될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저도 잘 몰라요. 연락이 안 되나요?”고은서가 물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연락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주민기도 연락이 안 되어서 비서실에 전화 해보았는데 비서는 그저 곽승재가 바쁘다고만 했다고 말했다.“은서야, 혹시 승재 형이랑 싸웠어?”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 대신 스테인리스 철봉 공격을 막아준 그 날 자신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은 탓에 그가 약간 기분 나빠했던 일이 떠올랐다.‘내가 한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건가? 아니면 그날 진짜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또 그날 육현석이 곽승재한테 전화했을 때 전화 너머로부터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온 게 떠올랐다.‘그럼 그 여자는 곽승재가 다쳐서 마음 아파서 운 거야?’“은서야, 우리 승재 형 찾으러 같이 GS그룹으로 가보지 않으래?”평소 같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텐데 지금은 곽현수가 준 임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곽승재를 어떻게서든 만나야 했다.그러나 육현석의 의심을 받는 걸 피면하기 위해 그녀는 한참 동안 망설이는 척하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나 마침 볼 일이 있어서 유일 투자 은행 근처에 있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가방을 들고 내려가려고 할 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육현석이 까먹은 일이라도 있는가 해서 폰을 들고 확인해 보았는데 낯선 유선전화 번호였다.받아보니 다름 아닌 해성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상대방은 아주 예의 바르게 백유미가 거의 완치 되어서 전에 얘기했던 정신병 위장 사건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가를 파견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끔
고은서는 고씨 집안 본가에 들렀다.비록 며칠 전에 고준석을 만났지만 지금도 너무 보고 싶었는지라 가서 함께 앉아 소소한 대화라도 나눌 생각이었다.그날 고은서가 고국성 집에서 나오면서 고준석한테 고국성 일에 관해 다 알린 탓에 그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화를 내긴 했으나 그녀가 유성준과 함께 고국성을 도와 일을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 달랜 덕분인지 아니면 나이도 있고 유성준을 굳게 믿어서인지 직접 나서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고국성도 이미 마흔이 넘어갔고 MQ의 현 관리자로서 회사 일에 이미 손을 뗀 고준석이 계속 모든 일을 일일이 신경 써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은서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준석은 오춘식과 함께 정자에서 바둑을 하고 있었다.그녀가 고준석을 향해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오춘식은 눈치 있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고준석은 다가와 다정하게 자신의 어깨에 기대는 고은서를 보면서 웃으며 물었다.“아이고, 우리 은서 얼마 만에 애교를 부리는 거야? 할아버지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고준석은 고은서를 매우 아꼈는데 그녀가 애교만 부리면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다 응해 줬었다.그 때문에 고은서는 자신이 모든 걸 쉽사리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차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전생에 자신이 곽승재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고은서는 자신만만하게 전미자한테 곽씨 가문 며느리 직책을 잘 이행하고 꼭 곽승재가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정신병원에서 자살하고서야 이 세상엔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이 쉽다고 느낀 건 누군가가 대신 그 대가를 치러줬기 때문이라는 것도 깊게 깨달았다.이번 생만큼은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항상 조심스럽게 살아왔다.그녀는 곽승재랑 이혼만 하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현실은 그보다 더 잔인했다.“은서야,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누가 널 괴롭혔어?”
고은서는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면 삼촌 일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승재가 도와준다고 한 번 더 넘어갈 생각이야?”곽현수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고은서는 곽현수가 직접 나선 이상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게다가 어제 오미나의 반응을 보아서는 그녀의 배 속의 아이가 십중팔구 고국성의 아이가 맞을 것이다.아이를 지우지 않는다면 시한폭탄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리고 곽현수가 마음만 먹는다면 경찰에 잡힌 강현철을 데리고 나오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어느 날엔가 갑자기 고준석 앞에 나타나거나 또는 고국성을 대하듯이 똑같은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곽승재는 현재 회사 일을 처리하기도 바쁠 텐데 더는 민폐를 끼쳐서는 안 돼.’시가 가게의 부드러운 불빛이 유독 눈부시게 느껴지는 때이다.사실 곽현수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곽승재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가 자신을 좋아하든 원망하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곽현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고은서가 떠난 후 곽현수는 VIP룸 뒤에 있는 실내 정원으로 갔다.그곳에는 트위드 자켓을 입은 여시은이 고양이를 그네 위에 앉아 함께 놀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는 장면이었다.곽현수를 발견한 여시은은 이내 그네에서 내려오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버님이라고 불렀다.“시은아, 많이 기다렸지?”곽현수가 웃으면서 물었다.“아니에요. 여기 풍경도 좋고 캣닢도 있어서 쿠아랑 엄청 재밌게 놀고 있었어요.”여시은이 달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저기 가서 앉자.”곽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손짓했다.“좋아요!”여시은은 쿠아를 캣닢 옆에 내려놓고 곽현수와 함께 파라솔 아래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직원은 두 사람을 위해 차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여시은은 한 입 맛보고는 이내 똘망똘망한 눈
고은서는 순간 죄책감에 휩싸였다.육현석도 전에 곽승재가 회사 내부에서 곽현수와 기 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다고 했는데 또 고국성 일로 꼬투리까지 잡힌 이상 많이 힘들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제인 제약 사건은 판주 투자 은행과도 연관된 일이었기에 곽현수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고국성 일은 확실히 공사가 선명하지 못하다고 꼬투리가 잡힐 만 했다.방금전 곽현수가 한 말도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가 곽승재를 쫓아내려거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승재가 너 때문에 이성을 잃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난 그게 무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곽현수가 말을 이어갔다.“입으로는 승재랑 더는 같이 있을 리가 절대 없다고 하지만 한두 번은 그렇다 쳐도 승재가 열 번 심지어 스무 번이 되도록 너를 향해 구애한다고 해도 네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어? 시간만 나면 네 할아버지랑 바둑하고 얘기 나누러 고씨 가문 본가로 찾아가는데 아버지인 나도 그런 혜택을 누린 적이 없어. 게다가 네 가족들도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승재를 계속 사위로 대하면서 걔한테서 얻을 만큼 얻어 가졌잖아.”곽현수가 하찮다는 듯 비아냥거렸다.“네가 말로만 하는 보장은 단지 너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하는 거겠지.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거야. 그런데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고은서는 순간 난감해졌다.‘할아버지한테는 곽승재가 스스로 찾아간 게 맞겠지만 삼촌이랑 숙모 쪽은 분명히 아닐 거야. 곽승재가 나랑 재혼하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일부러 나를 속이고 MQ 일로 여러 번 찾아간 게 분명해.’고은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거짓말로 들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확실히 곽승재의 도움으로 혜택을 누릴 만큼 누린 이상 곽현수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곽현수가 삼촌 일로 나를 만나자 한 것도 또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마 다 원하는 바가 있어서겠지.’고은서는 더는 변명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
전미자 생일 연회 때마침 성씨 집안 소개로 새로운 사업 계약서를 체결한 고국성은 눈에 띄게 우쭐대며 다녔는데 곽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업적을 적지 않게 으리으리하게 포장해서 떠벌리고 다녔었다.그래서 곽현수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그녀는 그가 자신은 고국성처럼 천한 사람을 직접 처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은서는 화내는 대신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우리 삼촌이 약간 잘난 체하면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이건 삼촌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 이 이유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죠. 회장님께서 우리 삼촌이 면한 일에 관해 잘 모르신다면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그녀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지라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아니면 어제 오미나 씨랑 대화한 내용을 녹음해 두었는데 직접 들어보실래요?”곽현수는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설명과 녹음파일 같은 걸 계속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그는 오미나에 관해서도 더는 묻지 않고 찻잔을 들고 아주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으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오늘 찾아온 이유가 대체 오미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야 아니면 네 삼촌 일을 해결하고 싶어서야?”“삼촌 일을 해결할 겸 오미나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사실 그보다 우리 삼촌이 어느 면에서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더 알고 싶네요.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은데 회장님께서 알려줬으면 좋겠네요.”고은서도 꿀리지 않고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생각보다 더 총명하네.”곽현수는 여전히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총명해 보았자 당신 같은 사람 눈에는 들지 않겠지.’고은서는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곽현수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잠시 후, 곽현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승재가 이혼
이튿날 오후, 고은서는 약속 시간에 맞춰 곽현수가 얘기한 시가 가게에 도착했다.전시 구역에는 다양한 시가 상자가 진열되어 있었고 주변 벽에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직원은 고은서를 VIP룸으로 안내해 주었다.VIP룸에는 검은 가죽 소파와 부드러운 캐시미어 카펫, 그리고 정교한 티 테이블이 놓여있었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차분한 느낌 주었다.곽현수는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고 직원이 그에게 다양한 신제품을 소개해주는 걸 듣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상위자의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와 달리 유독 더 날카롭게 다가왔는데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고은서는 곽현수와 만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전과 같이 고은서는 곽현수를 보자마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그녀는 자신이 이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얼마나 우울한 사람으로 컸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도착했습니다.”고은서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인기척을 느낀 곽현수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곽현수를 향해 덤덤하게 곽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곽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직원이 들고 있는 트레이 위에 있는 시가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직원은 이내 공손하게 시가를 꺼내주었다.그는 그제서야 눈길을 고은서한테 돌리면서 그녀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고은서가 소파에 앉는 동시에 직원은 곽현수를 위해 시가에 불을 붙여주었다.“난 무슨 일로 찾은 거지?”곽현수는 말하면서 시가를 한 입 맛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직원은 아주 눈치 있게 곽현수에게 다른 시가를 건네주었다.그와 동시에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제가 곽 회장님이 시가를 즐기는 시간을 방해한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곽현수는 새 시가를 들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마음에 드는지 직원에게 잘라 달라고 한 다음 내려보라고 손짓했다.직원이 나간 후, 그는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담담한
고국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이렇게 치밀하게 계산해서 접근한 이유가 결국 돈 때문 아니야? 도대체 얼마면 너랑 네 전남편 배를 채울 수 있는데? 금액이나 말해!”그러나 오미나는 여전히 처량한 표정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고 대표님, 아이는 정말 뜻밖이었어요. 저는 그냥 조용히 낳아서 혼자 키울 생각이었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몰아붙이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밝힌 것뿐이에요.”“일부러 접근한 게 아닌데 왜 미리 증거들을 남겨둔 거죠?”유성준이 물었다.고은서는 유성준이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했다.오미나가 제시한 증거들은 단순한 우연으로 준비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모든 정황이 그녀의 의도적인 접근을 증명하고 있었다.하지만 오미나는 유성준을 무시한 채 다시 고국성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대표님 그렇게 화내실 필요 없어요. 검사하면서 물어봤더니 남자아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모님보다 훨씬 젊어요. 그리고 그분처럼 강압적이지도 않죠. 만약 사모님께서 이번 일로 이혼을 원하신다면 저와 함께 사는 것도 고려해 보세요. 우리 함께 아들을 키워요. 따님도 친딸처럼 소중히 보살필게요.”“네가 감히!”오미나의 말에 분노에 찬 고국성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나를 호구로 보지 마! 난 아들 같은 것도 필요 없어!”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히 오미나의 말에 혹해서 판단을 흐리지 않았네.’그녀는 유성준에게 눈짓을 보내 고국성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진정시키게 했다.그리고 자신은 남아 오미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곽현수가 어떤 대가를 제시했길래 이렇게까지 우리 삼촌을 벼랑 끝으로 모는 거죠?”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나 오미나는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고 대표님과 저는 평범하게 만나 가까워졌어요. 벼랑 끝으로 내몬다니요?”그 말에 고은서는 손안에 쥐고 있던 녹음 중인 핸드폰을 더욱 꽉 쥐었다.오미나는 곽현수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곽현수와 관련이 없다고
기자 회견은 호텔 2층 연회장에서 열렸다.유성준이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회견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국성은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진지하게 사과하며 관련된 사건은 이미 경찰에 신고한 상태이며 조사가 진행되면 자신의 결백이 증명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단은숙 역시 남편의 인품을 믿는다며 고국성이 결코 가정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며 이번 사건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모략이고 아이 역시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고국성의 아이예요! 친자 확인서도 있습니다.”고국성을 향한 여론이 점점 우호적으로 바뀌려던 찰나 입구 쪽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시선을 돌리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미나였다.오미나는 헐렁한 임부복 차림을 한 채 손에는 감정서를 들고 있었다.걸어오는 걸음걸이는 다소 불안정해 보였다.“고국성 씨, 당신이 먼저 나에게 끊임없이 호감을 표현하고 선물도 주고 식사에도 초대했잖아요. 그래서 경계를 풀고 친구가 된 건데 당신은 제가 술에 취한 틈을 타 호텔에서 강제로 저를 안은 거잖아요!”오미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기자들은 충격적인 폭로에 즉각 반응하며 고국성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냈다.“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미나를 유혹한 적도 없고 그런 짓을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고국성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그러나 오미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신 사진과 영상 그리고 고국성이 자신에게 선물을 건넨 증거 자료를 하나씩 꺼내 보였다.심지어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가는 CCTV 영상까지 있었다.“고국성 씨, 원래는 당신과 이렇게 적대적으로 싸울 생각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모함하고 내 명예를 짓밟으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모두 공개할 수밖에 없네요!”오미나는 본래 가련한 스타일이었다.화장기 없는 얼굴에 울 것 같은 억울한 표정까지 더해지자 그녀는 완벽한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반면 중년이 되어 배가 나온 고
육현석은 자신의 속셈을 들켰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난 그냥 네가 승재 형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네 전화는 꼭 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한번 시험해 볼래?”고은서는 시험해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하지만 흥미를 느낀 박지연이 곽승재의 번호를 눌렀다.육현석이 말릴 틈도 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연 씨, 은서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은서는 아무 일도 없어! 형, 내 전화는 왜 안 받았어!”육현석이 화가 난 듯 따져 묻자 곽승재 쪽에서 갑자기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거리가 멀었던 탓에 여자의 신분은 확인하기 어려웠다.“누가 우는 거야? 형 지금 어디야?”육현석이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할게.”차분하게 답한 곽승재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육현석이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쯧, 망했네?”박지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곽승재가 은서를 특별히 여긴다는 걸 증명하려다가 결국은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들켜 버렸네?”육현석은 급히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오해하면 안 돼!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고은서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육현석은 그녀를 유심히 살피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넌 지금 화난 거야? 아닌 거야?”고은서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대답 대신 되물었다.“내가 화내길 바라는 거야? 아니길 바라는 거야?”뜻밖의 질문에 육현석은 말문이 막혔다.화가 났다면 지금 상황이 조금 두려웠고 화가 나지 않았다면 완전히 신경도 안 쓴다는 뜻 같아 왠지 씁쓸했다.“됐어. 음식 준비도 끝났으니까 가서 나르는 거나 좀 도와줘.”박지연은 육현석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주의를 돌렸다.육현석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박지연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곽승재가 정말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고 있는 거라면 기분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