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감정의 깊이는 결혼한 시간과 상관이 없죠.”왠지 오늘따라 도아름의 기분이 이상해 보이는 건 고은서의 착각일까.지나치게 평온했다, 폭풍전야처럼.혹시 서인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걸까, 아니면 단순히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걸까?“은서 씨, 오늘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따로 있죠?”도아름은 차를 마시더니 살짝 주름이 잡힌 눈매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요.”고은서는 도아름의 관찰력에 감탄하면서도 부인하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주제넘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도아름이 살짝 웃었다.“그 사람이 약접 잡혀서 협박당하는 거 알고 있죠?”고은서는 깜짝 놀랐다.“그럼 사모님도 알고 계셨어요?”“아름 언니라고 불러요.”도아름의 얼굴이 한층 차가워졌다.“이젠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도아름은 어젯밤에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서인수가 그런 더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아름 언니, 그럼 어떻게 하실 거예요?”고은서는 그들이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고, 가정과 자식, 이익 관계가 걸려 있어 이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배우자의 바람을 알면서도 참는 것을 선택한다.특히 도아름처럼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곪아 터진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도아름은 차를 마시며 자신의 결정을 숨김없이 말했다.“전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것도 못 참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한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고은서는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이렇듯 확실한 도아름의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잘 생각해 보신 거예요? 명운은 곧 상장을 앞두고 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으면 안 돼요. 안 그러면 모든 걸 잃으니까요.”현실적인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한순간의 분노 때문에 힘들게 쌓아온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나보고 참으라고 설득하는 건가요?” 도아름이 되묻자 고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회사가 지난 몇 년 동안 침체기였잖아요. 곽씨 가문의 이름을 빌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더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 거예요.”외삼촌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 잔뜩 들떠서 이전 임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는 등 막무가내로 권력을 휘둘러 해를 거듭할수록 MQ의 발전은 악화됐다.운 좋게도 남아있는 할아버지는 명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리를 지키고 있기에 회사가 무너지지 않았다.그러나 할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고 기력도 딸려 삼촌에게 훈계를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지난해 그녀가 곽승재와 결혼하고 외삼촌이 곽씨 가문의 사돈이라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협업을 따내서야 겨우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곽씨 가문에 계속 의존하는 건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면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그래도 전문가들이라 우리에게 가져다줄 이익도 많고 삼촌보다 훨씬 잘할 텐데 더 좋지 않겠어요?”고준석은 이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은서 네가 나이를 먹더니 철이 들었구나. 사업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어.”“할아버지, 놀리지 마세요.” 고은서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할아버지, 제 제안 한번 고려해 주세요.”고준석이 손녀의 간청을 뿌리칠 리 없었다.“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며칠 후에 외삼촌과 상의해 볼게.”“역시 할아버지가 제일 현명해요! 할아버지, 삼촌을 꼭 설득하셔야 해요!”고준석은 고은서의 이마를 가볍게 톡 두드렸다.“말해 봐, 웬일로 집안 사업에 신경을 쓰는 거야. 넌 곽승재 그놈만 바라보고 있잖아.”“할아버지도 이제 저 다 컸다고 하지 않았어요?”고은서는 고준석의 팔짱을 끼고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할아버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아끼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요.”전생에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할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고, 자연스레 삼촌도 더 이상 회사를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죽음을 택하기 전 MQ는 이미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고은서는 할아버지의 피땀 눈물인 MQ가 망가
단은숙은 불쾌한 듯 말했다. “은서야, 너도 M·Q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데, 회사 일에 이렇게 무관심해서야 되겠니? 거래가 성사되면 너에게도 이익이 될 텐데 말이야!”“어떻게 은서한테 승재에게 그런 부탁을 하라고 할 수 있지?” 고준석이 나섰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우리 고 씨 집안이 원래 높은 곳에 올라탔다고 보는데,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하면 은서가 중간에서 어떻게 하겠나?”단은숙은 억울한 듯 말했다. “아버님도 지금 사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잖아요. FY 그룹 쪽은 우리를 만나주지도 않아요. 그러데 그들이 GS 그룹과 교류가 있으니 승재가 나서면 이 일은 분명 성사될 거예요!”“그쪽이 만나주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너희가 직접 해결책을 찾아야지 은서한테 승재를 찾아가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지.”“하지만...”“더 이상 말하지 마. 너희가 알아서 해결해, 은서를 곤란하게 할 순 없어.” 고준석은 단호히 명령을 내렸다.고은서는 마음속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언제나 외할아버지는 자신을 이렇게 보호해 주었다.“외숙모, 외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뭐든 승재한테 의지할 순 없어요. 그러니 이번 일은 도와드릴 수 없어요.”단은숙은 한껏 실망했지만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아내였고 아버지는 그녀만 보호해주었으니 그녀가 화를 내면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해서였다.“외할아버지, 저 이제 가볼게요. 아까 말씀드린 일은 꼭 기억해주세요.”고은서는 말을 마치고 거실을 떠났다.“아버님, 은서가 무슨 일을 말씀드렸나요?” 단은숙은 긴장한 듯 물었다. 아버님은 이미 고은서한테 많은 지분을 줬는데 혹시 그 계집애가 더 원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고준석은 며느리의 생각을 읽고 고개를 저었다. “은서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욕심이 많지 않아. 내일 국성한테 돌아오라고 해.”...고은서는 안전하게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 곽승재의 자주 사용하는 차가 이미 차고에 주차되어 있는 걸 보니 그가 돌아왔다는 걸 알
고은서는 갑자기 곽승재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은은한 남성의 향기가 코로 들어오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 최근 그녀와 곽승재 사이에 몇 번의 예상치 못한 신체 접촉이 있었지만 이렇게 그의 품에 안긴 것은 처음이었다.그의 가슴은 강하고 뜨거웠으며 그 온도가 얇은 옷을 통해 전해졌다.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어 고은서는 곽승재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까지 느낄 수 있었다. 전생에서 수없이 갈망하고 상상했던 포옹을 그녀는 이번 생에서 마침내 얻게 되었다.곽승재도 자신이 안고 있는 고은서의 향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열이 나서 감각이 예민해진 듯했다. 고은서가 물처럼 그의 몸에 녹아드는 느낌이 들자 그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급해졌다. 고은서의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을 상상하면서 곽승재의 머릿속이 뜨거워졌고, 심지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는 미꾸라지처럼 옆으로 빠져나가 그의 품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곽승재, 당신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냐? 갑자기 내 방에 들어와서 이런 짓을 하다니!”고은서는 두 팔을 감싸며 얼굴을 붉힌 채 그를 노려보았다. 곽승재도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도망치자 허전했고 그의 마음은 마치 무언가에 물린 것처럼 아릿하고 간지러웠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 방이라니, 이건 우리 침실이야.”고은서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이걸 침실로 사용한 적이 있기나 해? 그럼 지금까지는 손님으로 이 집에 살았단 말이야?”결혼 이후, 곽승재는 이 방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여기서 자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힘없이 말했다. “네 덕분에 할머니가 가정 의사를 보내서 내 몸을 검사하게 했어. 의사가 돌아가면 할머니가 분명히 상황을 물어볼 테니, 할머니의 꾸지람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방에 온 거야.”이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의사도 갔잖아, 왜 아직 여기 있는 건데?”“나 아파
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눈을 감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고은서가 베개를 들고 몇 개의 객실을 둘러보니 침대는 텅 비어 있고 침구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왜 곽승재가 그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소파에서 잘 수도 빈 침대에서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 그녀가 그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베개를 안고 화가 난 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곽승재를 내쫓으려 했지만 그는 외할아버지와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외할아버지, 은서가 왔어요.” 곽승재가 휴대폰을 그녀 쪽으로 돌리자 고은서는 급히 웃음을 지었다. “외할아버지, 이렇게 늦게까지 안 주무셨네요?”“네가 집에 도착하면 전화한다고 하지 않았니.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래.” 외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며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베개는 어디서 온 거니?”“아, 옆방에서 가져온 거예요.”“승재가 좀 아프고 열이 있다고 하던데 잘 좀 돌봐줘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지 말고.”“알겠습니다, 외할아버지.”“그래, 너희 부부는 빨리 자. 외할아버지는 끊을게!”영상 통화가 끝나자 고은서가 침대 일로 다시 말하려 했지만 곽승재가 먼저 말했다. “네가 외할아버지께 나를 돌보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 그렇지 않으면 외할아버지께 영상을 보낼 거야.”“...” 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곽승재가 정말 그렇게 유치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베개를 의자에 던져 놓고 욕실로 갔다.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곽승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더운 건지, 불편한 건지, 그의 잠옷 단추는 몇 개나 풀려 있었고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고은서는 잠시 생각한 후 휴대폰을 꺼내 이 모습을 찍었다. 침대 위에 있는 분홍색 곰 인형도 함께 찍어 사진을 백유미에게 보냈다.백유미가 이런 일을 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녀도 똑같이 당해보라고 한 것이다.
명운이 곧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런 자극적인 소식이 담긴 포스팅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온라인에서는 서인수를 비난하는 목소리, 복지시설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는 목소리, 사회적 풍토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물론, 서인수의 아내의 행동이 시원하다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은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제 도아름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할 줄은 예상했지만, 설마 서인수의 휴대폰을 이용해 직접 이런 포스팅을 올릴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서인수와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명운은 자금 조달은커녕 명성과 매출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명운을 질투하는 사람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고은서는 곧바로 도아름에게 ‘포옹’ 이모티콘을 보냈다. 지금 서인수의 집은 분명 혼란스러울 것이므로 그녀는 전화를 걸기보다는 이 정도의 무의미한 지원만 할 수 있었다. 도아름이 말한, 서인수가 없으면 명운에 투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했다.....판주 투자은행 회의실에서는 모두의 표정이 무거웠다. 특히 백유미는 평소 온화한 모습과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몇 고위 임원들은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었다.곧 곽승재가 주민기와 함께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차갑게 방안을 둘러보고 회의실 중앙 자리에 앉아 힘차게 서류 한 묶음을 던졌다. “명운 사건에 대해 설명해봐요.”“조사할 때 서인수가 무고하다고 하지 않았나? 문제가 없다더니, 어떻게 그 사람 아내가 모든 것을 폭로할 수 있었던 겁니까?”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백유미가 일어섰다. “제가 조사에 소홀했습니다. 서인수의 말을 믿은 제 잘못입니다. 어떠한 처벌도 받겠습니다.”곽승재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협력을 이루고자 하는 의욕은 좋지만,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거야.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결정하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거라고!”“이건 단순히 프로젝트를 잃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판
백유미의 분석은 정확했다. 서인수의 약점을 잡으려는 사람이나 이번 기회를 이용하려는 사람 모두 서인수의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인수의 아내는 이 정보를 알고, 빠르게 증거를 모아 서인수를 폭로했다. 서인수는 하루아침에 웃음거리가 되었고 명운은 스캔들로 인해 자금 조달과 상장 기회를 잃게 되었다. 더 중요한 건 판주 또한 서인수를 도와준 사실이 알려지면 비난을 받을 것이다.“모두에게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야,” 곽승재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프로젝트를 가져갈 수 없다는 걸 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혼란을 일으키는 거지.”백유미는 곧바로 반응했다. “미래 투자은행?”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꽉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백유미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옛날과 같네. 자신이 얻지 못하는 건 다른 사람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거.”“승재야, 서인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변에서 민시후희 사람이 목격되었어. 그리고 비슷한 시각에 은서 씨가 술집에서 민시후한테 괴롭힘을 당했고.”“은서 씨한테 물어봤어? 그날 왜 민시후 술집에 갔는지, 민시후가 왜 은서 씨한테 해를 끼치려 했는지?”“뭘 말하고 싶은 거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백유미를 쳐다보았다.백유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딱히 다른 의미는 없어. 그냥 좀 이상해서. 만약 민시후가 서인수의 정보를 미리 알았다면 왜 직접 해결하지 않고 술집에 있었을까?”곽승재가 막 화를 내기 전에 백유미는 서둘러 말했다. “잠깐만. 내 말 끝까지 들어봐. 전에 주 비서님이 가져온 계획서가 은서 씨가 만든 것 맞지?”곽승재는 부정하지 않았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는 은서 씨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래서 계획서를 보고 바로 지지했지. 그런데 우리가 그 계획서를 사용하기로 한 후 승재 넌 은서 씨가 판주에 오지 않고 후속 작업도 진행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이상하잖아? 누가 그렇게 공을 들여 계획서를
훈련관에는 좋은 체격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고은서는 금세 고민을 잊고 이를 훑어보았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으로, 우아하고 냉정하게 행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고 고은서는 잠시 어색함을 느꼈다. 사실 예전의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고 행동도 대담했다. 하지만 곽승재에게 무시당하면서 점점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고, 점점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매일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성격은 점점 더 나빠지고 기괴해졌다.“어, 오셨네요!” 고은서가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는 찰나 주인혁이 다가와 예의 바르고 친근하게 인사했다. “네, 오늘 시간 나서 연습 좀 하러 왔어요.” 고은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쪽은 바쁘잖아요, 저기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던데!”주인혁의 인기는 꽤 좋아 보였다. 그는 개인 트레이닝 수업도 하고 있었고 많은 여자들이 그의 수업을 듣고 싶어 했다. 명운이 그를 모델로 초빙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전 그냥 그쪽한테 인사드리러 왔어요. 연습하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 고은서는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코치의 지도 아래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체력 훈련과 기본기 연습을 했다. 고은서는 처음에는 간신히 따라갔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몸풀기, 체력 훈련, 기본기가 모두 지루하고 고되게 느껴졌다.“자, 계속해서 이 자세를 유지해요!” 코치가 엄격하게 호루라기를 불었다.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는 고은서는 더 이상 자세를 유지할 수 없어서 벽에 기대어 쉬기 시작했다.“저기요.”그때 문가에서 주인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랑 같이 연습해요. 덜 힘든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훈련 강도는 너무 높아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주인혁은 고은서를 샌드백이 매달린 훈련장으로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
“곽승재보다 더 나쁜 놈이잖아!”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백유미가 약물 알레르기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곽승재는 그녀가 다친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었다.하지만 온 닥터는 박지연의 상처를 봤으면서도 그녀를 혼자 병원에 보냈다.“네 시어머니도 너무해! 널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는 거잖아!”고은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자기 아들이 힘들까 봐 다친 며느리를 혼자 병원에 가게 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아들 첫사랑한테는 친절하게 굴면서 며느리한테는 밥하라고 시키는 게 정말 시어머니가 할 짓이야?”이미 화를 냈던 건지 박지연은 오히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시어머니는 항상 날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으셨잖아. 그런 사람이 내가 다쳤다고 해서 신경 쓸 리가 없지.”“더 나쁜 건 온 선생님이야! 네게 다정하지도 그렇다고 네 편을 들어주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너한테 얘기조차 안 하잖아. 이런 생활을 어떻게 견디는 거야!”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지연아, 너도 온 선생님 그냥 차 버려! 우리 둘이 지내면 되잖아. 남자는 필요 없어!”박지연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너도 알잖아. 속상하긴 해도 남편 얼굴만 보면 그래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단지 성격이 차갑고 딴짓 안 한다면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첫사랑이 작정하고 돌아왔잖아. 안 그래도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인데 뭘 더 버티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네가 다친 이 며칠 동안 네 상태에 관해 물어본 적 있어?”“의사잖아.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있으니까 물어봐도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게다가 요즘 학회가 많아서 바쁘거든. 얼굴 마주 볼 시간도 별로 없어.”“결국 물어본 적 없다는 얘기네?”화가 난 고은서가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바빠서 다친 아내 상태를 물어볼 시간은 없으면서 첫사랑이랑 쇼핑하고 커피 마실 시간은 있나 보네.”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말을 밖으로 뱉은 고은서는 곧바로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이미 입 밖으
박지연의 안색이 확연히 어두워졌다.그녀는 팔을 살짝 뒤로 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요리하다가 실수로 데었어.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검진받으러 왔다며? 같이 있어 줄게.”고은서는 직감적으로 박지연과 온 닥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대화하기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기에 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따랐다.고은서는 잘 회복하고 있었다.전에 옥상에서 떨어지며 생긴 부상도 별 탈 없이 회복 중이었다.“아직 밥 안 먹었지? 같이 뭐라도 좀 먹을까?”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도 거절하지 않았다.“식당에 가자. 당직이라서 얼른 가봐야 해.”“그러자.”병원 식당은 환한 조명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곳곳에 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병원 환경 좋네.”고은서가 칭찬하자 박지연이 답했다.“평소에는 이렇게 깔끔하지 않아. GS 그룹에서 병원에 새 건물 몇 개 지어준다며 시찰 나온 사람들이 있어서 환경이 좀 나아진 거야.”‘GS 그룹에서 병원에 새 건물을 지어준다고?’“네 덕일지도 몰라. 너 전에 여기 입원해 있을 때 곽승재가 자주 왔었잖아. 병원 측에서도 그 틈에 후원을 요청하기도 쉬웠겠지.고은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이전에 병원장이 곽승재와 관련된 일은 간섭하지 말라고 했던 지시가 생각났다.‘후원 때문이었네.’박지연이 식판을 두 개 받아 와서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지연아, 이제 말해줄 수 있지 않아? 온 선생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전에 온 선생님께서 해외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같은 병원에 온 거야?”박지연은 부인하지 않았다.그녀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보름 전에 발령받아서 왔어. 전에 오기로 했던 사람이 국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 여자로 교체됐다고 하더라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온 선생님께서 이 사실을 계속 너한테 숨겼던 거야?”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그 사람은 바로 박지연의 남편 온 닥터 였다.온 닥터 옆에는 가녀린 여자 한 명도 함께였다.그 둘은 캐주얼한 차림에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있었는데 어디론가 함께 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지연이가 선생님께서 많이 바쁘시다고 했는데... 발에 불이 날 정도로 바쁘다던 사람이 왜 다른 여자와 카페에 나타난 거지?’고은서는 비록 그 여자를 본 적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으로 고은서는 그 여자가 온 닥터의 첫사랑일 것으로 생각했다.‘지연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어 고은서는 생각을 이어 나갈 겨를 없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 한 장을 찍었다.뒤차의 재촉에 서둘러 출발하면서 고은서는 백미러를 통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이전에 박지연이 온 닥터에게 물었을 때, 그의 첫사랑은 같은 병원으로 발령받지 않았다고 했었다.‘온 선생님께서 거짓말하신 건가? 아니면 내 직감이 틀린 걸까? 평범한 동료나 친구인 걸까?’두 사람은 단지 카페에서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을 뿐 특별히 친밀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후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그녀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지연아, 병원에 있어? 재검진받으러 가려고 하는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병원에 있긴 한데 당직이라 어려울 것 같아.”“요즘 별일 없지?”고은서는 박지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없이 느껴졌다.두 사람은 고은서가 외할아버지 집에 있는 동안 연락한 적이 없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이혼했단 사실도, 요양 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고 그간 있었던 일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평소 박지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어.”고은서는 통화만으로 박지연의 기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만나서 얘기하자.”전화를 끊은 고은서가 병원으로 향했다.박지연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몇몇 간호사들이 고은서를 알아보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지난번
원지훈은 굽히지 않고 손을 뻗어 찻잔을 내팽개쳤다.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고은서는 그를 흘깃 보더니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내 목적이 뭔지 너도 잘 알겠지. 협조해. 이 위기에서 널 구해줄게. 네 삶은 지금보다 더 빛나게 될 거야.”원지훈은 고은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이미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았다.고은서가 웃으며 말했다.“지훈 씨, 똑똑한 사람이잖아. 아니면 백유미도 지훈 씨를 선택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 생각은 안 해봤어? 지금 상태로 고은혜는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야. 물론 회사도 지키기 어렵겠지. 백유미가 지훈 씨가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한 신뢰도 깨져서 앞으로 도움은 기대할 수 없겠지. 정말 이대로 모든 걸 잃고 싶어?”원지훈은 잠시 망설였다.그동안 풍족하게 살며 누렸던 시간이 너무나도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얼마 못 누리고 이 모든 게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하지만 고은서를 믿어도 될까?’고은서는 원지훈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말했다.“지훈 씨, 우리 사이에는 이익 관계가 없잖아. 지훈 씨가 고은혜에게 실질적인 행동을 해서 피해준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내 목표는 오직 백유미뿐이지 지훈 씨랑은 상관없어.”이어 고은서가 말을 이어가며 원지훈을 설득했다.“지훈 씨, 당신은 잃을 게 없어. 이번 프로젝트가 무산되면 당신은 백유미의 버린 패가 될 뿐이야. 나랑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아?”원지훈이 그녀의 말에 흔들렸다.“뭘 원해요?”“걱정하지 마.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고은서가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지금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어. 이틀 동안 시간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이건 선착금이야. 내 제안을 받아들이든 말든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돼.”원지훈은 아직 백유미와 완전히 틀어진 상태가 아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돌아설 가능성도 있었다.하여 고은서는 바로 목적을 밝히는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