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인정할게요.” 고은서가 말했다. “시간 될지 확인해 보고 그쪽 개인 트레이닝 수업을 등록할게요!”주인혁은 급히 말했다. “수업을 살 필요 없어요. 공짜로 가르쳐 드릴게요.”“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고객을 밀어내다니, 내가 당신 수업을 선택한 건 당신을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잘 가르치지 못하면 바꾸면 그만이지 왜 공짜로 가르치려고 해요?”고은서의 논리적인 말에 주인혁은 설득되었다.“그럼 저 꼭 열심히 가르칠게요!”“그 정도는 돼야죠.”고은서는 돈을 지불하고 시간이 늦어지자 샤워를 한 후 가방을 들고 차를 타러 갔다. 그때 근육으로 가득한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앞에 있던 사람에게 강하게 주먹을 휘둘렀다.“이 자식아, 또 내 고객을 빼앗아?”고은서가 고개를 들어보니 때리는 사람은 아까 함께 운동했던 코치였고, 맞을 뻔한 사람은 주인혁이었다. 왜 ‘맞을 뻔’ 했냐면 주인혁이 빠르게 피했기 때문이다.근육남은 어디서 쌍절곤을 집어 들었는지 주인혁의 얼굴을 거칠게 내리쳤다. 이렇게 밝고 잘생긴 남자애가 얼굴을 다치면 앞으로 아이돌이 될 수 있을까?고은서가 그들을 말리려고 하려는 순간 주인혁이 앞으로 팔을 뻗어 쌍절곤을 바로 잡았다. 고은서가 놀랄 새도 없이 화가 난 코치는 주인혁을 잡고 땅에 내던지려 했다. 주인혁도 만만치 않았다. 쓰러지는 순간, 그의 두 다리가 코치의 목을 감고 함께 넘어졌다.쾅!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얽히며 싸우기 시작했다. 둘 다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 싸우는 모습은 마치 무술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서로 치고받았는데 한 방 한 방이 치명적이었다.“두 사람 다 일하기 싫은 거야?” 훈련관 매니저가 다가와 엄하게 꾸짖었다. “훈련관 규칙을 잊었어?”코치는 마지못해 주인혁을 놓아주며 화를 냈다. “이 자식이 내 고객을 자꾸 빼앗아 가잖아요! 그것도 꼭 예쁘고 돈 많은 사람들만 골라서! 아까도 내가 가르치고 있는데 이 자식이 가로채 갔어요! 내가 참을 수가 있어야지!”주인혁은 얼굴이
곽승재는 냉담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긴 목선과 정교한 작은 얼굴이 조명 아래서 더욱 빛나 보였다.그리고 그녀가 지켜준 남자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반짝이는 눈빛이 곽승재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그렇게 정의롭게 말하지 마요. 당신도 다른 여자들처럼 집에 있는 남편이 늙고 못생겨서 이 잘생긴 녀석을 보고 수업을 신청해 꼬시려는 거 아니에요? 아우!” 코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인혁이 그의 턱에 강하게 주먹을 날렸다.“헛소리하지 마요!” 코치는 맞고 나서 바닥에 쓰러졌고 입과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입을 감싸며 울부짖었다.“미쳤어? 어떻게 이렇게 세게 때릴 수 있어!” 주인혁은 그저 아르바이트 직원일 뿐이었다. 관리자는 정직원이 피를 보자 급하게 다가왔다.“김성군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렇게 젊고 예쁜 여자가 돈을 펑펑 쓰는 걸 보면 늙은 남자에게 후원을 받거나 늙은 남자랑 결혼한 거겠지!”“누굴 늙은 남자라고 하는 거지?” 고은서가 주인혁을 말리려는 찰나 앞에서 냉랭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은서가 고개를 들어보니 곽승재가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정교하고 단정한 검은 셔츠를 입고 날카로운 눈매와 높은 콧날 그리고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며 걸어왔다. 어제 밤의 병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차가운 분위기와 그의 외모만으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인물로 돌아왔다.훈련관 관리자와 김성군은 곽승재의 등장에 순간 얼어붙었다. 그들도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눈앞의 남자처럼 위엄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품격이 눈에 들어왔다.“당, 당신은 누구죠?” 관리자는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곽승재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고은서를 보며 긴 팔을 뻗어 그녀를 감싸안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은서 남편입니다.”민시후 술집 사건 이후, 곽승재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은서의 남편이라고 말하며 주권을
그녀는 곽승재를 신경 쓰지 않고 주인혁에게 물었다. “다쳤어요? 병원 가서 검사 받아볼래요?”주인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누나, 오늘 일은 미안해요. 누나까지 끌어들여서.”“뭘요, 그들이 잘못한 거죠.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돌아가요.”주인혁이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주인혁이 떠난 뒤 고은서는 화가 난 듯 곽승재를 바라보았다. “당신 왜 그래? 주인혁 씨가 악수하려는데 왜 무시하냐고?”“너랑 친한 사람이야?” 곽승재는 담담하게 반문했다. “누나라 부를 정도로 친한가?”“누나가 뭔 문제야? 백유미도 당신한테는 ‘승재야’ 라고 부르잖아! 난 그것도 신경 안 썼어!”고은서의 말에 곽승재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고은서, 억지 그만 좀 부려! 지금 그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사람들 앞에서 다른 남자 편을 들어? 당신은 이미 결혼했어!”“알고 있으니까 계속 언급할 필요 없어.” 고은서가 말했다. “당신이 백유미 씨 편을 든 적이 없는 것처럼 말하네.”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혼하는 것도 싫고 심지어 당신을 기다리는 여자한테 명분도 주지 않고, 정말 한심하네.”더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고은서의 목구멍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곽승재는 그녀에게 말했다.“타, 묻고 싶은 게 있어.”“싫어, 여기서 말해. 차 갖고 왔으니까.”“그럼 당신 차에서 얘기해.”“돌아가서 하자. 집중해서 차를 몰아야 하니까 당신과 얘기할 시간 없어.”“고은서, 난 지금 당신이랑 협상하고 있는 게 아니야!” 곽승재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차에 끌려가기 싫으면 빨리 차 문을 열어!”고은서는 곽승재가 확실히 참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그가 말한 대로 될까 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차 문을 열었다.곽승재가 조수석에 앉은 후 고은서는 차를 몰았고 곽승재의 기사는 뒤에서 따라왔다.고은서는 앞을 바라보며 좀 불만스럽게 말했다.“물어보고 싶은 게 뭔데.”“전에 명운의 계획서, 당신
침실에 들어서자 고은서는 이미숙이 여전히 곽승재의 물건들을 치우지 않았음을 발견했다.하지만 다행히도 곽승재는 오늘 밤 그녀의 침실에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고, 고은서는 안에서 문을 잠갔다.침대에 누우니 고은서는 여전히 그 위에 곽승재의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아 편히 쉴 수가 없었다.그녀는 차라리 일어나 곽승재의 물건들을 복도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손을 털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훨씬 편안해진 느낌이 들었고 고은서는 베개에 엎드려 잠들었다.다음 날 고은서가 일어났을 때 집에는 이미 곽승재의 흔적이 없었다.그의 물건들은 여전히 문 옆에 버려져 있었다.이미숙에게 버리라고 하고 고은서는 휴대폰을 확인했다.명운의 뉴스가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서인수와 도아름은 가장 빠른 속도로 이혼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명운의 재산도 나누었다.서인수는 자신의 기술과 거액의 현금을 가지고 독립했고, 도아름은 명운의 이름과 주식을 가져갔다.명운의 전신은 도아름의 아버지가 설립한 주류 공장이었기에 도아름이 되찾으려 한 것은 이해할 만했다.고은서는 도아름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명운에 도착했을 때 도아름은 막 회의를 마친 참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피로감이 묻어났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의기소침해 보이지도 않고 좌절한 것 같지도 않았다.“아름 언니.” 고은서가 그녀를 불렀다.도아름은 그녀를 보고 약간 놀란 듯했지만 곧 사무실로 안내했다.“아름 언니, 괜찮으세요?” 고은서가 물었다.도아름은 짧은 며칠 사이에 남편의 배신을 겪었고 그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그녀는 신속하게 이혼을 마쳤고 이제 혼자서 명운을 운영해 나가야 했다.고은서는 자신이 환생한 사람이라 해도 그녀처럼 강인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도아름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요, 이미 결정을 했으니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명운에 서 사장님의 기술이 없는데, 언니는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도아름은 아버지가 예전부터 자신만의 제조법을 가지고
고은서는 명운의 현재 상황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도아름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고은서는 대화를 멈추었다.“아름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금 문제는 방법을 찾아볼게요.”“평소엔 누구나 도와주려 하지만 어려울 때 도와주는 건 쉽지 않죠.”도아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마음을 가진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명운의 현재 상황은 나도 잘 알아요. 누구도 감히 투자하지 않을 거예요.”고은서도 당연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도아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명운을 나온 고은서는 박지연의 전화를 받았다.그녀도 명운의 뉴스를 봤던 것이다.“서인수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자선이란 이름으로 비열하고 더러운 짓을 하다니, 경찰이 그를 체포해 조사하지 않아?” 박지연이 분개했다.“아름 언니가 이 일로 이미 신고했어. 하지만 복지원의 여자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술자리에 갔고 서인수와 함께 있는 것도 자발적이라고 했대.”“복지원 쪽 사람들은 서인수와의 사적인 교류가 모두 복지원 업무를 위한 것이라고 변명했어. 그래서 도덕적 비난 외에는 그들을 실제로 처벌하기 어려워.”“그럼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거야?” 박지연이 화를 냈다.“서인수는 현재 명운을 떠났고 이런 추문도 있어서 다시 주류 공장을 열어도 재기하기 어려울 거야. 이것도 일종의 업보라고 볼 수 있지.”“그게 무슨 업보야. 여전히 돈 있고, 평판만 나빠졌을 뿐 아무런 손해도 없잖아!”박지연은 몇 마디 욕을 하더니 도아름의 현재 상황에 대해 물었다.고은서는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아름 언니를 어떻게 도울 계획이야? 미래 투자은행에서 명운에 다시 투자할까?” 박지연이 물었다.“아마 안 할 거야.”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와의 사이가 틀어진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이익 측면에서 민시후는 쉽게 투자하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200억의 자금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 명운 상황으로는 긴급한 위기를 모면하는 정도밖에 안 될
고은서는 정말 박지연이 정신을 차리길 바랐다. “남편의 과거 연애사에 관심을 갖는 건 절대 나쁘지 않아. 지금 당장 온 선생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줘 봐. 관심하는 동시에 그 여자 동창을 관찰할 수도 있잖아.”“알았어, 알았어. 갈게.”박지연과의 통화를 끝낸 후에도 고은서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는 박지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시어머니가 옥을 좋아하신다고 했지? L국의 옥 제품이 유명하잖아. 팔찌 하나 골라서 선물로 드리는 게 어때?]전생에 박지연의 말에 따르면 온 선생님의 이 첫사랑은 수준이 꽤 높았다고 한다. 박지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온 선생님 부모님 마음도 잘 사로잡았다.이번에 귀국 후 그녀가 온 선생님 집안을 방문했을 때 가져간 선물이 바로 옥팔찌였고 온 선생님 어머니가 매우 좋아하셨다.그래서 박지연은 온 선생님과 함께 L국에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었다.이번 생에는 박지연의 노력이 그녀와 온 선생님의 결말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랐다.선물 얘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할머니의 생일이 3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할머니께 특별한 선물을 골라 드리고 싶었다.손자며느리로서 할 수 있는 작은 효도라고 생각했다.앞으로 할머니의 생일을 함께 보낼 때 그녀는 기껏해야 평범한 후배일 뿐일 테니까.고은서는 먼저 쇼핑몰에 가서 보리수 염주를 주문했다. 할머니가 불교를 믿으시니 이 선물이 적합할 것 같았다.그리고 사진 액자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을 찾아갔다. 지난번 레스토랑 정원에서 찍은 사진들 중 예쁜 것들을 골라 할머니를 위해 정교한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고급 옷 몇 벌만 사라고 했는데, 꼭 이렇게 비싼 시계를 사야겠니? 돈 좀 아낄 줄 모르는구나!”사진을 고르고 있는데 약간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를 들리자 고은서는 손을 흠칫 떨었다.고은서가 환생한 지 꽤 되었지만 이 목소리를 들으니 두피가 조건반사적으로 찌릿해졌다.전생에 이 목소리의 주인공인 범가온은 그녀를 2년 넘게 괴롭혔다.매일
떠나기 전, 그녀는 ‘수리 중’ 표지판을 밖에 세워두었다.그리고 주인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컴퓨터에 아주 능숙한 친구가 있다고 했죠? 그 친구에게 부탁 좀 해줘요. XX 쇼핑몰 1층의 지난 30분간 감시 카메라 영상을 해킹해서 지워달라고요.”주인혁은 약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승낙했다. “알겠어요, 구체적인 위치를 보내줘요.”고은서는 주인혁의 SNS를 통해 그의 밴드에 실력 있는 컴퓨터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난 생에 어떤 인터뷰에서 그는 농담 삼아 그 친구가 악기에 빠진 해커 재목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모든 것을 처리하고 나니 고은서의 마음속 분노가 조금은 해소되는 듯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고은서는 어젯밤에 침실 밖으로 던져놓은 물건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명운의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성명은 이미 발표되었기에 모두가 명운의 사장이 스캔들에 휘말렸고 부부가 신속하게 이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사람들은 또한 명운이 핵심 기술을 잃었고, 서인수가 새 회사를 설립해 경쟁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어떻게 하면 이 화제성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도아름에게 불쌍한 척하라고 하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는 건 동정이 아니라 모욕과 키보드 워리어들의 공격일 수도 있었다.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모두 실행하기 어려워 보였다. 고은서는 휴대폰을 열어 뉴스를 훑어보기 시작했다.그러다 한 기사를 발견했다.판주 인수를 축하하기 위해 GS 그룹이 성대한 파티를 개최하고 각계 엘리트들을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지난 생에도 GS 그룹은 업계에 파티를 열었었다. 하지만 그때는 판주가 명운에 성공적으로 투자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이번엔 투자가 성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판주를 위한 성대한 파티가 열리게 된 것이다.GS 그룹이 판주를 인수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지금 파티를 여는 건 명운 사건의 실수를 덮으려는 의도였다.어쨌든 이것도 판주를 대중의 눈에
고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니에요. 물 마시러 내려왔을 뿐이에요.”“도련님께서 전화하셨어요. 오늘 출장 가서 돌아오지 않으신대요.”이미숙은 이해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사모님, 도련님께서는 사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저한테 전화하신 거예요. 사실 사모님께 일정을 보고하시는 거죠.”“도련님께서 먼저 침실로 돌아오신 건 좋은 일이에요. 사모님, 도련님과 더 이상 다투지 마시고 물건들을 침실로 옮겨놓으시는 게 어떨까요?” 이미숙이 간곡히 권했다.“아주머니, 번거로우시겠지만 객실 하나를 정리해 주시겠어요? 침실은 곽승재한테 양보하겠어요.”“...”물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주인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분께 저 대신 감사 인사 전해주세요. 다음에 식사 대접할게요.]주인혁이 답장했다. [괜찮아요, 누나.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요.】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감시 카메라를 해킹해야 했는지 전혀 묻지 않았다.이렇게 존중받는 느낌에 고은서는 주인혁에 대한 인상이 더욱 좋아졌다.다음 날, 고은서는 다시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개인 명의로 200억을 투자하겠다고 말하며, 우선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당면한 위기를 먼저 해결하고 나중 일은 그때 가서 다시 방법을 찾으면 되었다.도아름은 고은서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시장 가격보다 높은 주식으로 환산해 주겠다고 고집했고 즉시 변호사를 불러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은서 씨, 이렇게 의리 있게 나서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건 은서 씨가 마땅히 받아야 할 거니까 사양하지 마요!”고은서도 도아름의 진심을 알았기에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도아름의 식사 초대를 정중히 거절하고 고은서는 명운을 나섰다.차를 얼마 운전하지 않았을 때 타이어 공기압이 부족하다는 표시가 나왔다.고은서가 차에서 내려 상황을 확인하려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양복을 입은 두 명의 큰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들의 모습을 보니 계속 그녀의 차를 따라온 것 같았고 그녀에게 일어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