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석의 관심사는 정말 유별나게 독특했다.고은서가 걱정하는 것이 육현석이 생각하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녀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생각이었다.‘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곽승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게 뻔해.’“삼촌 일 때문에 영향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곽 회장님께서 곽승재의 꼬투리를 잡을 만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요.”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육현석도 고국성의 일에 관해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곽현수 성격에 확실히 그럴만 하지.’“그날 삼촌 일이 승재 형 아버님이랑 연관 있다고 했잖아. 나중에 확인해 봤어?”육현석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곽현수는 애초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그러나 이걸 그대로 육현석에게 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고은서는 억지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인했다.“아직 확인해보지 못했어요.”“그럼 오늘 나랑 승재 형 찾으러 온 것도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야?”육현석이 무언 갈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그렇죠.”어이가 없었지만 고은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그후로 한참 동안 사무실에서 기다려 보았지만 곽승재는 나타나지 않았다.고은서는 육현석의 말을 듣고 곽승재한테 연락해 보았으나 여전히 그녀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은서는 이내 주민기한테 연락했다.얼마 후, 주민기가 전화를 받았다.“고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고은서는 주민기의 아주 공식적인 말투를 들으면서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주민시 씨, 곽승재 혹시 다쳐서 병원에 있는 건 아니죠?”주민기는 멈칫하다가 이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등을 다치긴 했으나 지금은 별다른 문제 없습니다.”‘그날 정말 다친 거였어? 그런데 왜 병원도 가지 않고 나한테 거짓말이라고 한 거지?’고은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났다.“곽승재 지금 어디 있죠?”주민기는 그녀의 물음을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답했다.“지금 GS그룹의 주주분을 만나러 와서
육현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가 털썩하고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육 도련님, 저예요. 제발 경호우너을 부르지 말아 주세요.”“한 비서?”고은서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을 때 육현석은 그 여자를 알아 보았다.삼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GS그룹의 검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비서들처럼 자랑스럽고 우월한 면을 뽐내는 대신 공포에 질린 듯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대체 무슨 일인데 주차장에 숨어 있는 거야?”육현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그의 말을 들은 한 비서는 본능적으로 몸서리를 치면서 갑자기 그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육 도련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는데 용서를 빌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주차한 곳 뒤에는 나무들이 주지어 있었고 차들이 빼곡히 들어선 탓에 사람이 숨어있는 걸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한 비서는 무릎을 꿇은 채 끊임없이 육현석을 향해 사과했다.그녀는 육현석의 차를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이곳으로 오는 걸 알고 일부러 차 뒤에 숨어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이러지 말고 일어나서 말해.”“아니요. 그냥 꿇고 말하겠습니다.”한 비서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말했다.그녀는 방금전에 머리를 땅에 박으며 절을 한 탓에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랐고 공포 질린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면 일부러 보여주기 식으로 연기하려는 거야?”육현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니요. 저는 그저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한 비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사과하려거든 조용한 곳에 가서 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해.”육현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한 비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현석 씨, 일 봐요. 저는 혼자 차 불러서 가면 돼요.”“안 돼요. 고은서 씨 용서도 받아야 하니까 같이 가요.”육현석이 말을 꺼내기도
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도 어리둥절해졌다.만약 간단한 스케줄만 알려줬다면 이정도로 겁에 질려 있을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더 큰 일과 엮여 있는 건가?’아니나 다를까 육현석의 엄숙한 모습을 본 한 비서는 얼굴이 방금전보다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한 번 커피 가져다 드릴 때 곽 대표님한테 고은서 씨 친구분과 백유미 사이의 조사해보겠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그걸 백유미한테 알렸어요...”육현석은 그제야 곽승재가 자신더러 성아연과 백유미 사이에 관해 조사해보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러나 당시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두 사람은 몇 번 만나고 연락한 것 외에는 경제적 래왕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그 일로 백유미가 산장에서 곽승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약을 잘못 복용한 거라고 의심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로부터 백유미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고은서의 혐의를 씻어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육현석은 백유미가 고은서를 해치려거든 왜 고은서를 대신해 진상을 밝힌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그러니까 백유미가 한 비서를 통해 내가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그런 대책을 세웠다는 거야?’고은서도 문뜩 곽승재가 육현석한테 백유미와 성아연 두 사람 사이에 관해 조사하라고 시켰다면서 자신도 백유미를 찾아가 따졌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그런데 그녀는 당시 곽승재가 이 일을 얼버무리고 넘어가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었다.‘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나랑 곽승재 사이의 모순이 거의 다 백유미 때문에 생긴 거네.’백유미가 현재 정신병원에 갇혀있다고 한들 고은서는 아직도 생각하면 할 수록 공포감이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정말 악독한 여자야.’한 비서는 계속 자신이 했던 행위를 후회한다면서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다.육현석은 이마가 빨개진 한 비서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이익을 탐내는 동시에 그 대가도 따르는 법이야. 백유미한테 몰래 소식을 전달한 건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죽
한 비서는 그제서야 승진하게 된 이유가 자신 능력 덕분이 아니라 누군가가 일부러 안배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그러나 계약까지 체결한 탓에 거액의 보상금을 내지 않고는 사직을 할 수가 없었다.위약금보다 더 중요한 건 이렇게 GS그룹을 떠나게 되면 외부 사람들이 그녀가 곽승재를 건드렸다고 오해하면서 해성에서 일자리 하나도 못 찾게 된다는 것이었다.“육 도련님, 고은서 씨, 백유미가 현재 매우 폭력적이고 불안정하다고 하는데 저 그곳에 갔다가 죽을지도 몰라요. 다가가는 것조차 두렵다고요.”한 비서가 울부짖었다.육현석은 곽승재 T국에서 있었던 일로 백유미를 샅샅이 조사해보았다는 걸 깨달았다.‘아마 백유미랑 한 비서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걸 발견하고 이런 방식으로 벌을 주려는 거겠지.’“사직하려거든 GS그룹 내부 문제야. 내가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야.”육현석이 단호하게 거절했다.한 비서는 이내 고은서의 다리를 잡고 빌었다.“고은서 씨,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는 그저 정보를 몇 번 전달했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요. 전에 백유미를 돌보던 사람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저는 죽기 싫어요...”고은서는 덜덜 떨고 한 비서를 보면서 그제야 그녀가 겁에 질려하는 이유를 깨달았다.그러나 그녀는 GS그룹의 일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하지만 마침 백유미가 진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한 비서를 보내면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이익을 위해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을 돕는 것도 모자라 피해자 코스플레이를 하면서 도와달라고 비는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저는 저를 해치려한 사람을 쉽게 용서해줄 만큼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에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저에게 더 절실하게 와닿거든요. 그러니 제 도움을 받으려거든 제 요구부터 들어줘야 해요.”고은서는 희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비서에게 자신의 부탁을 말했다.육현석도 현장에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피
발신자가 곽승재라는 걸 확인한 고은서는 받을지 말지 약간 망설여졌다.‘전에 다툰데다가 삼촌 일 때문에 연루까지 받았고 심지어 그날 날 구하다가 다치기까지 했는데 하필 난 또 곽현수가 요구한 일을 완성해야 하고. 대체 이후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은서야, 누구 전화야? 왜 안 받는 거야?”옆에 있던 육현석이 말했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나가 전화 받고 올게요.”그녀는 조용한 곳에 가서야 곽승재의 전화를 받았다.“곽승재.”“무슨 일이야?”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육현석이 며칠 동안 당신한테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어?”“지금 내가 걱정되어서 날 찾은 거야?”곽승재가 덤덤하게 되물었다.고은서는 멈칫하다가 화제를 바꾸었다.“민기 씨한테 당신이 등을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어?”“낫든 안 낫든 넌 아무런 관심이 없잖아.”“...”고은서는 서로 동문서답하는 대화 모드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날 은혜가 당신한테 연락해 도움을 청한 걸 모르고 있었어. 오해하고 듣기 싫은 소리 해서 미안해. 이후로 당신한테 민페를 끼치는 일은 삼가라고 가족들한테 말해 둘게.”전화너머에서 곽승재가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할 말 다했어?”고은서는 곽승재가 아직도 그날 일로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평소 같으면 화를 내건 말건 전화를 뚝 끊어버렸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은혜가 그날 일로 자책하면서 삼촌이랑 얘기 해봤는데 당신한테 사과할 겸 같이 밥 한 끼 먹자고 하는데 언제 시간 돼?”고은서가 고민끝에 말했다.“또 누가 있는데?”‘누가 더 있겠어. 알면서 묻기는.’“나랑 삼촌 가족만 있어.”곽승재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덤덤하게 답했다.“주민기랑 스케줄 확인해. 시간나는 대로 갈 테니까.”‘이 남자가 정말. 어디서 꼰대 짓이야.’“조금이따 민기 씨한테 얘기해볼게.”고은서가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곽승재가 갑자기 입을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고은서는 고국성 집에 들렀다.고국성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고은혜는 상을 찌푸리고 폰을 놀고 있었다.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 옆으로 다급히 걸어오며 말했다.“언니, 엄마가 방문을 잠그고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아빠랑 이혼한다고 변호사까지 찾았어.”기자 회견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성이 오미나와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단은숙은 오미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아이가 생겼다는 건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맺었다는 걸 의미했고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고은혜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고국성 앞으로 다가가 일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오미나가 아이를 없애겠대?”고국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동의할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정말이야? 엄마한테 이 소식을 알려줘야지.”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러나 고국성은 낙관적인 고은혜와 달리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동의하지 않았단 얘기야?”고은서는 고국성 옆에 앉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삼촌, MQ를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MQ를 더 크게 이끌고 나가려거든 다른 사람한테 너무 의지해서도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후부터 곽승재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그만 하세요. 이 또한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해주는 대신 삼촌이 들어줘야 할 조건이기도 해요.”고은서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고국성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곽승재를 찾아간 건 어떻게 안 거지? 분명히 유승준도 모르게 몰래 찾아갔는데.’그는 결연한 태도의 고은서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계에서 곽승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
고국성은 이내 다가가 그와 악수하면서 인사했고 단은숙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유독 고은혜만은 입을 꾹 다문 채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곽승재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눈길을 고은서 쪽으로 돌렸다.그는 무언갈 억누르고 있는 듯한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승재야, 네 자리 남겨뒀으니까 얼른 앉아.”고국성은 고은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여서 앉을 수 있는 곳이 남아돌았는데 고국성은 하 곽승재를 고은서 옆에 앉히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속셈이 너무 선명했다.아무튼 고은서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꺼낸 거였기에 그가 어디에 앉든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을 한 채 고은서 옆에 앉았다.너무 가까운 탓인지 그의 특유한 설송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이어 차를 따라주는 웨이터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고은서는 이 기회에 찻잔을 대신 들어주면서 슬쩍 옆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곽승재도 손을 뻗으면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그의 체온이 피부결을 통해 뜨겁게 느껴지면서 고은서는 손을 확 거두어들였다.반면 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웨이터에게 건네주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고은혜는 두 사람이 행여나 어색해할까 봐 다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음식이 다 오른 후 고국성은 자신이 소장해 둔 진귀한 술을 가져오라고 웨이터를 시켰다.고은서는 레스토랑에 오기 전부터 고국성한테 밥만 먹으면 어색할 수도 있으니 술이라도 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암시했었다.아니나 다를까 고국성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말대로 행동했다.“승재야, 평소에 너무 바빠서 별로 모일 시간도 없었는데 이 좋은 기회에 우리 실컷 마셔보자고.”고국성은 웨이터를 다시 내보내고 직접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기쁜 날인데 다 같이 마셔야죠.”곽승재가 제안했다.고국성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그래. 가족끼리 떠들썩하게 재밌게 보내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곽승재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뒤 재빨리 가방에서 숨겨둔 약을 꺼내어 물에 녹였다.긴장감 속에서 약은 빠르게 물속에 녹아들었고 고은서는 조심스럽게 그 물을 침대 옆으로 가져갔다.큰 키를 가진 곽승재가 침대에 평평히 누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굳게 감겨 있었고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은 방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고은서가 조심스럽게 곽승재의 뺨을 건드리자 곽승재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붉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은서야...”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 울림은 그대로 고은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고은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술 많이 마셔서 목마르지? 물 좀 마셔.”곽승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은서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고은서는 술에 취한 곽승재가 얼마나 고집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괜히 반박하는 것보다는 빨리 물을 마시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이었다.“안 마실 거야?”“마실 거야.”곽승재는 요구를 덧붙였다.“근데 네가 직접 먹여 줘.”고은서는 긴장하며 최대한 빨리 물을 마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반쯤 일으켜 세운 뒤 조심스레 컵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만 곽승재는 한 모금 마시더니 뜨겁다며 굳이 고은서도 마셔보라고 했다.술에 취한 채 그녀가 안 마시면 자신도 안 마시겠다는 완강한 태도에 고은서는 순간 물을 그대로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녀는 꾹 참고 단순히 상황을 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대충 물을 두 모금 마신 뒤 컵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이제 됐지?”곽승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손을 감싸며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그리고 그는 이전의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커다란 늑대처럼 그녀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은서야, 나 등 아파. 약 좀 발라줘.”고은서는 빨리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계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