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자가 곽승재라는 걸 확인한 고은서는 받을지 말지 약간 망설여졌다.‘전에 다툰데다가 삼촌 일 때문에 연루까지 받았고 심지어 그날 날 구하다가 다치기까지 했는데 하필 난 또 곽현수가 요구한 일을 완성해야 하고. 대체 이후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은서야, 누구 전화야? 왜 안 받는 거야?”옆에 있던 육현석이 말했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나가 전화 받고 올게요.”그녀는 조용한 곳에 가서야 곽승재의 전화를 받았다.“곽승재.”“무슨 일이야?”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육현석이 며칠 동안 당신한테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어?”“지금 내가 걱정되어서 날 찾은 거야?”곽승재가 덤덤하게 되물었다.고은서는 멈칫하다가 화제를 바꾸었다.“민기 씨한테 당신이 등을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어?”“낫든 안 낫든 넌 아무런 관심이 없잖아.”“...”고은서는 서로 동문서답하는 대화 모드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날 은혜가 당신한테 연락해 도움을 청한 걸 모르고 있었어. 오해하고 듣기 싫은 소리 해서 미안해. 이후로 당신한테 민페를 끼치는 일은 삼가라고 가족들한테 말해 둘게.”전화너머에서 곽승재가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할 말 다했어?”고은서는 곽승재가 아직도 그날 일로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평소 같으면 화를 내건 말건 전화를 뚝 끊어버렸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은혜가 그날 일로 자책하면서 삼촌이랑 얘기 해봤는데 당신한테 사과할 겸 같이 밥 한 끼 먹자고 하는데 언제 시간 돼?”고은서가 고민끝에 말했다.“또 누가 있는데?”‘누가 더 있겠어. 알면서 묻기는.’“나랑 삼촌 가족만 있어.”곽승재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덤덤하게 답했다.“주민기랑 스케줄 확인해. 시간나는 대로 갈 테니까.”‘이 남자가 정말. 어디서 꼰대 짓이야.’“조금이따 민기 씨한테 얘기해볼게.”고은서가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곽승재가 갑자기 입을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고은서는 고국성 집에 들렀다.고국성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고은혜는 상을 찌푸리고 폰을 놀고 있었다.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 옆으로 다급히 걸어오며 말했다.“언니, 엄마가 방문을 잠그고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아빠랑 이혼한다고 변호사까지 찾았어.”기자 회견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성이 오미나와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단은숙은 오미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아이가 생겼다는 건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맺었다는 걸 의미했고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고은혜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고국성 앞으로 다가가 일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오미나가 아이를 없애겠대?”고국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동의할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정말이야? 엄마한테 이 소식을 알려줘야지.”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러나 고국성은 낙관적인 고은혜와 달리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동의하지 않았단 얘기야?”고은서는 고국성 옆에 앉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삼촌, MQ를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MQ를 더 크게 이끌고 나가려거든 다른 사람한테 너무 의지해서도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후부터 곽승재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그만 하세요. 이 또한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해주는 대신 삼촌이 들어줘야 할 조건이기도 해요.”고은서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고국성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곽승재를 찾아간 건 어떻게 안 거지? 분명히 유승준도 모르게 몰래 찾아갔는데.’그는 결연한 태도의 고은서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계에서 곽승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
고국성은 이내 다가가 그와 악수하면서 인사했고 단은숙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유독 고은혜만은 입을 꾹 다문 채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곽승재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눈길을 고은서 쪽으로 돌렸다.그는 무언갈 억누르고 있는 듯한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승재야, 네 자리 남겨뒀으니까 얼른 앉아.”고국성은 고은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여서 앉을 수 있는 곳이 남아돌았는데 고국성은 하 곽승재를 고은서 옆에 앉히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속셈이 너무 선명했다.아무튼 고은서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꺼낸 거였기에 그가 어디에 앉든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을 한 채 고은서 옆에 앉았다.너무 가까운 탓인지 그의 특유한 설송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이어 차를 따라주는 웨이터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고은서는 이 기회에 찻잔을 대신 들어주면서 슬쩍 옆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곽승재도 손을 뻗으면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그의 체온이 피부결을 통해 뜨겁게 느껴지면서 고은서는 손을 확 거두어들였다.반면 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웨이터에게 건네주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고은혜는 두 사람이 행여나 어색해할까 봐 다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음식이 다 오른 후 고국성은 자신이 소장해 둔 진귀한 술을 가져오라고 웨이터를 시켰다.고은서는 레스토랑에 오기 전부터 고국성한테 밥만 먹으면 어색할 수도 있으니 술이라도 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암시했었다.아니나 다를까 고국성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말대로 행동했다.“승재야, 평소에 너무 바빠서 별로 모일 시간도 없었는데 이 좋은 기회에 우리 실컷 마셔보자고.”고국성은 웨이터를 다시 내보내고 직접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기쁜 날인데 다 같이 마셔야죠.”곽승재가 제안했다.고국성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그래. 가족끼리 떠들썩하게 재밌게 보내
고은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곽승재를 한 번 힐끔 바라본 뒤 재빨리 가방에서 숨겨둔 약을 꺼내어 물에 녹였다.긴장감 속에서 약은 빠르게 물속에 녹아들었고 고은서는 조심스럽게 그 물을 침대 옆으로 가져갔다.큰 키를 가진 곽승재가 침대에 평평히 누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굳게 감겨 있었고 술기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은 방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고은서가 조심스럽게 곽승재의 뺨을 건드리자 곽승재는 비몽사몽 눈을 뜨며 붉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은서야...”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 울림은 그대로 고은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고은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술 많이 마셔서 목마르지? 물 좀 마셔.”곽승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은서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고은서는 술에 취한 곽승재가 얼마나 고집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괜히 반박하는 것보다는 빨리 물을 마시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최선이었다.“안 마실 거야?”“마실 거야.”곽승재는 요구를 덧붙였다.“근데 네가 직접 먹여 줘.”고은서는 긴장하며 최대한 빨리 물을 마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반쯤 일으켜 세운 뒤 조심스레 컵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만 곽승재는 한 모금 마시더니 뜨겁다며 굳이 고은서도 마셔보라고 했다.술에 취한 채 그녀가 안 마시면 자신도 안 마시겠다는 완강한 태도에 고은서는 순간 물을 그대로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녀는 꾹 참고 단순히 상황을 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대충 물을 두 모금 마신 뒤 컵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이제 됐지?”곽승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손을 감싸며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그리고 그는 이전의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커다란 늑대처럼 그녀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은서야, 나 등 아파. 약 좀 발라줘.”고은서는 빨리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계
고은서는 지금까지 극도의 긴장 속에 있었기에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긴장이 풀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이 바짝 마르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감각이 몰려왔다.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고은서는 휘청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가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낸 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자자. 자면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모든 폭풍은 내일 다시 맞서면 돼.’자신을 그렇게 세뇌하듯 다독인 고은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하지만 꿈속에서도 그녀는 더위에 시달렸다.그 뜨거움은 단순한 체온 상승이 아닌 몸속 혈액에서부터 느껴지는 타오르는 듯한 열기였다.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하고 심지어 차가운 물병을 목에 대어 보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피부의 모든 세포가 시원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열기 속에서 고은서는 갑자기 무언가 뜨겁고 묵직한 존재가 자신의 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무게감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가왔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호흡을 앗아갔다.남자의 낮고 거친 숨소리가 술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그리고 익숙한 남성의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그 향기는 고은서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호흡이 교차하고 서로의 몸이 닿자 고은서는 더 뜨거워졌고 마음속에서부터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다.그녀는 지금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별할 여유도 정력도 없었다.약과 술의 작용하에 고은서는 몸이 반응하는 대로 손을 뻗었다.객실 안 에어컨 바람이 천천히 방안을 맴돌았다.낮은 온도로 설정된 냉기 속에서도 방 안의 온도는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은은한 조명이 커다란 침대 위에서 단단히 엉켜 있는 두 개의 실루엣을 비췄다.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열기에 가득 찬 입맞춤을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목으로 옮겨갔다.방 안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찼다.그 향기는 마치 봄의 미풍에 섞인 향처럼 감각을 부드럽게 자극했다.밤은
고은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혹시 누군가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직원은 그녀의 객실 문은 밤새 열리지 않았다고 확답했다.‘곽승재는 취한 상태에서 약까지 먹었으니 이 방에 올 리가 없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물에다 약을 너무 많이 타서 약효가 강해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목에 남은 자국은 병 자국에 눌린 흔적일까? 사지의 뻐근함은 단순한 숙취의 후유증?’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다.고은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도 몸의 감각은 확실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정말 꿈이라고? 아니면... 그 남자는 곽승재였을까?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갈 때는 어떻게 나가고? 줄곧 날 잡고 싶다고 말했으니 우리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면 계속 남아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머리가 복잡해진 고은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순간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고은서는 재빨리 옷을 걸쳐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아니나 다를까 복도에는 수많은 연예부 기자가 곽승재의 객실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들은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부으며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주민기가 경호원들과 함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끈질긴 기자들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그 혼란 속에서 어두운 표정을 한 곽승재가 고은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가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곽승재는 이미 어젯밤 일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그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고은서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곽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원하시는 대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세요.]답장은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어떻게 곽승재를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곽승재의 손아귀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고 그의 표정도 매우 차가웠다.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에는 뚜렷한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의 희미한 장면들 속에서 그녀의 눈앞을 스쳤던 것도 이렇게 광적이고 핏빛이 감도는 눈이었던 것 같다“왜 말이 없어?”곽승재는 맹수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고은서는 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알고 싶은 건 다 알았잖아. 내가 뭘 더 말해야 해?”“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저녁을 먹자고 한 게 날 함정에 빠뜨리고 여자를 침대에 보내려고 그랬던 거야?”곽승재는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턱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곽승재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맞아.”“그래서 내가 다른 여자랑 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고은서는 마음을 다잡고 냉소를 지었다.“아니면?”그녀의 대답에 곽승재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그의 눈가에는 실망으로 가득 찼다.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쓸쓸함이 차올랐다.곽현수에게 이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녀는 이미 곽승재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었다.만약 곽승재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꾸몄다면 그녀 역시 충격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을 것이었다.“곽승재, 여러 번 말했잖아. 난 이미 너를 내려놓았다고. 이쯤이면 그만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고은서는 불난 집에 다시 한번 기름을 부었다.‘끝내려면 완전히 끝내야 해. 이러면 곽현수도 더 안심하겠지.’곽승재는 싸늘하게 웃었고 눈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고은서까지 태워버릴 듯했다.“알았어. 고은서, 후회하지 마.”말을 마친 곽승재는 그녀를 내팽개친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떴다.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제자리에 멈춰선 고은서는 머릿속도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은서야, 지금 곽승재 편을 든 거야?”박지연은 뒤늦게 반응하며 물었다.“육현석 말로는 엊그제 같이 곽승재를 만나러 갔었다며? 걔는 네가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하더라. 아니다. 곽승재가 인플루언서와 호텔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니 미련은 없겠다.”박지연은 바로 스스로 부정했다.박지연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볼일 봐. 퇴근 후에 다시 얘기하자.”박지연은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고은서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지연아.”“왜?”고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했다.“아니야. 그냥 밖에 나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이제 시간 나면 우리 같이 놀러 가자.”“그게 다야? 깜짝 놀랐잖아.”박지연이 투덜댔다.“됐어. 가서 일해.”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동네 약국에서 긴급 피임약을 주문했다.비록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라고 해도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한 번으로 충분해.’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른 약품들도 몇 가지 골랐다.약을 고르던 중 이미숙이 노크했다.“사모님, 배 안 고프세요? 뭐 좀 만들어 드릴까요?”고은서는 승낙했다.세수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니 고국성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미나가 수술비와 위자료를 요구하며 돈만 주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더구나.”‘그래도 약속은 지키네.’“은서야, 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났다던데 사실이야?”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를 좋아하던 고국성은 곽승재의 상황을 알고 걱정했다.고은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삼촌, 사실이든 아니든 저랑 다시는 곽승재를 찾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 어기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예요.”고국성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고국성은 고은서가 능력도 갖추고 오미나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해결했으니 이제 그녀의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
고은서는 아무리 두 사람이 남매라고 해도 상대방의 사무실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다치는 게 무례한 행위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송민아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그냥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뭘?”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 났다.“오빠가 하도 경각심이 높은 사람이라 폰이랑 컴퓨터에 다 비밀번호가 걸려있거든. 그리고 평소엔 손도 못 대게 한다니까. 그런데 내가 전에 몰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걸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까진 모를걸. 그래서 혹시 사무실 컴퓨터도 같은 비밀번호인지 확인해 보려고.”‘이건 또 뭔 호기심이래?’“민아야, 그냥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개인 프라이버시와 연관된 일이잖아.”고은서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그러나 송민아는 그녀의 말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괜찮아. 내가 기밀문서를 찾아보는 것도 아닌데. 그냥 비밀번호만 확인해 보는 거잖아. 우리 둘 다 비밀로 하면 오빠도 영원히 모를 거야.”“...”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민아는 이내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열렸어!”송민아는 흥분해 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기 시작했다.“이러고 보면 내 시력하고 기억력이 다 어마어마하네.”“네네네. 세상 제일로 가는 시력과 기억력을 가지셨어요.”고은서는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오빠가 조금 이따 곧 올 건데 얼른 다시 잠가. 발각되어서 욕먹지 말고.”“알겠어.”송민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마우스로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그러나 마우스가 손에 익지 않은 탓에 실수로 동영상 파일 하나를 클릭하게 되었다.갑작스레 재생된 동영상에 깜짝 놀란 송민아는 인츰 꺼버리려고 했다.그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동영상 내용을 보게 되었고 이내 황급히 고은서를 불렀다.“고은서, 얼른 와서 봐봐. 이거 우리가 갔던 농장 아니야?”‘송민준의 컴퓨터에 농장 동영상이 저장되어 있다고?’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의를 따지던 고은서는 모든 걸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고은서가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송민아는 WOR에서 나오자마자 여시은에 관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입으로만 계속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좋은 아버지를 뒀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 드는 사람이 누군데. 우리가 WOR을 투자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 찾아오는 이유가 뻔하잖아.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거겠지.”“네 말처럼 능력 있는 아버지를 배후에 두고 있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어. 게다가 그냥 알아보러 온 거라고 말한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잖아.”고은서가 웃으면서 그녀를 달랬다.“다 우리 아빠 탓이야. 여시은한테 지다니 너무 분해.”송민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우리가 굳이 아버지한테 의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자아 발전에 중심을 두면 되지. 게다가 넌 훌륭한 오빠를 뒀잖아. 북성에서 ST그룹 송민준이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송민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내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하긴. 오빠가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 그보다 고은서, 우리 오빠 찾으러 가자. 오빠가 전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내가 며칠 동안 떼쓰며 빌었는데 어제 겨우 나한테 넘기겠다고 했거든. 오빠가 마음 바꾸기 전에 얼른 가자.”“이미 약속한 일인데 괜찮지 않을까?“그럴 리가. 오빠가 이런 면에서는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거든. 높은 이익만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사인한다니까. 나중에 핑계 대며 모른다고 하면 나만 손해잖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얼른 가자. 지금쯤 사무실에 있을 거야.”송민아는 재촉하면서 고은서를 끌고 차에 탔다. 그리고 이내 기사한테 ST그룹 해성 지사로 가달라고 부탁했다.“미리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가 물었다.“아니. 그냥 쳐들어갈 거야. 그리고 가는 김에 밥도 한 끼 얻어먹어야지.”“...”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날 백유미가 송민준을 의심하고 있다고 했는데 곽승재도 확실한 증거
고은서는 소식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어제 금방 곽승재한테서 여시은도 게임 회사에 관심 있어 한다고 주의하라는 소릴 들었는데 오늘 바로 찾아온다고?’“여긴 무슨 일로 온 거래?”고은서의 물음에 송민아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 비서랑 같이 온 것 같던데 보자마자 너한테 전하러 달려왔어.”“한번 나가 보자.”고은서는 송민아랑 책임자와 함께 여시은을 만나러 갔다.WOR 게임 회사 직원은 이미 그녀를 또 다른 접대실로 데려갔다.고은서가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시은과 비서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평소의 귀여운 옷차림 대신 여시은은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그러나 원래도 귀엽게 생긴 데다가 항상 천진하고 무구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해서인지 정장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어머, 은서 씨 아니에요. 여기에서 은서 씨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여시은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의외라는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랐을 리가.’“여시은 씨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오신 거죠?”고은서가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여시은이 눈을 깜빡이면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요즘 WOR 게임 회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게임에 흥취가 생겨서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찾아왔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고 싶어서요.”여시은은 숨김없이 그대로 말했다.“WOR이 우리 유일에서 투자한 프로젝트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옆에 있던 송민아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알고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유일과도 합작하면 되죠.”여시은이 미소를 유지하며 답했다.송민아는 화가 나긴 했지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드러내고 반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죄송하지만 우린 WOR 프로젝트에 관해서 아직 다른 회사와 합작할 생각이 없습니다.”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WOR 책임자도 유일 투자 은행과 단독 계약을 체결한 터라 다른 회사와 합작할 의향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여시은은 전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고은서는 도리어 자기 아이디어가 인정받았다는 거에 내심 기뻐했다.곽승재는 GS그룹을 물려받을 때부터 엘리트라고 불리면서 많은 기사에 떴었는데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이어 곽승재와 여시은에 관해 더 자세히 토론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갈게. 나중에라도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해.”“은서야.”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왜?”고은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배는 괜찮아?”“다 나았어. 전에 나한테 문자로 물어봤었잖아.”곽승재는 그녀가 조금 더 머물 수 있게끔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잘 자.”“응.”‘이상하게 왜 저러는 거야?’고은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머무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고은서는 먼저 회사에서 긴급한 서류들을 처리한 후 송민아와 함께 WOR 게임 회사로 갔다.게임 회사는 전보다 더 밝고 넓은 곳으로 이사하였고 규모도 훨씬 더 커졌다.그러나 분위기만은 변함없이 활력이 넘쳤다.아무래도 젊은이끼리 자체로 팀을 묶어 제작한 게임이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자기 친자식과 다름없었는 존재였다.책임자는 고은서와 송민아를 보자마자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면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곧 테스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테스팅이 순리롭게 진행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출시도 가능했다.듣기만 해도 격동되는 순간이었다.책임자는 두 사람한테 얘기하면서 매우 흥분해 했다.송민아는 여러 가지 절차를 확인하러 가고 고은서는 책임자와 함께 접대실에 앉아 어제저녁 곽승재가 말했던 일에 관해 의논했다.“정말 이런 밑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