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니에요. 물 마시러 내려왔을 뿐이에요.”“도련님께서 전화하셨어요. 오늘 출장 가서 돌아오지 않으신대요.”이미숙은 이해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사모님, 도련님께서는 사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저한테 전화하신 거예요. 사실 사모님께 일정을 보고하시는 거죠.”“도련님께서 먼저 침실로 돌아오신 건 좋은 일이에요. 사모님, 도련님과 더 이상 다투지 마시고 물건들을 침실로 옮겨놓으시는 게 어떨까요?” 이미숙이 간곡히 권했다.“아주머니, 번거로우시겠지만 객실 하나를 정리해 주시겠어요? 침실은 곽승재한테 양보하겠어요.”“...”물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주인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분께 저 대신 감사 인사 전해주세요. 다음에 식사 대접할게요.]주인혁이 답장했다. [괜찮아요, 누나.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요.】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감시 카메라를 해킹해야 했는지 전혀 묻지 않았다.이렇게 존중받는 느낌에 고은서는 주인혁에 대한 인상이 더욱 좋아졌다.다음 날, 고은서는 다시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개인 명의로 200억을 투자하겠다고 말하며, 우선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당면한 위기를 먼저 해결하고 나중 일은 그때 가서 다시 방법을 찾으면 되었다.도아름은 고은서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시장 가격보다 높은 주식으로 환산해 주겠다고 고집했고 즉시 변호사를 불러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은서 씨, 이렇게 의리 있게 나서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건 은서 씨가 마땅히 받아야 할 거니까 사양하지 마요!”고은서도 도아름의 진심을 알았기에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도아름의 식사 초대를 정중히 거절하고 고은서는 명운을 나섰다.차를 얼마 운전하지 않았을 때 타이어 공기압이 부족하다는 표시가 나왔다.고은서가 차에서 내려 상황을 확인하려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양복을 입은 두 명의 큰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들의 모습을 보니 계속 그녀의 차를 따라온 것 같았고 그녀에게 일어
쾅 소리와 함께 민시후가 책상 위에 쌓여있던 높은 서류 더미를 발로 차버렸다. 서류들이 떨어지면서 그의 잘생기고 방탕한 얼굴이 드러났다.경호원들은 이런 모습에 익숙한 듯 고은서를 민시후 앞으로 안내한 후 문밖으로 물러났다.“고은서 씨, 앉으시죠.”민시후는 와인 잔을 들고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린 채 무례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왜 당신을 불렀는지 알아요?”“글쎄요.” 고은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도련님한테 사과드리고 싶어요. 지난번 서인수 일은 제가 오해했어요.”민시후가 코웃음을 쳤다. “꽤 눈치가 빠르군요, 먼저 사과할 줄도 알고. 곽승재가 내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든 일에 대해서는 사과할 생각이 없나 보죠?”고은서는 민시후가 트집 잡으려 한다는 걸 알았다. “미안해요. 저도 그 이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렇게 큰 소동을 일으킬 줄 몰랐어요.”고은서는 사과만 했을 뿐, 민시후가 먼저 그녀를 납치하려 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이 말에 민시후의 기분이 확실히 좋아진 듯했다. 그는 바 카운터 위에 있는 큰 병의 XO를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고은서를 바라봤다.“당신이 잘못을 인정했으니, 진심으로 사과하는 자세를 보여줘요. 저 술을 다 마시면 그 다음 정신적 손해배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죠.”고은서의 주량이 보통이라는 것은 뒤로하고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큰 병을 다 마시면 쓰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도련님, 저는 그 술을 다 마실 수 없어요. 지난번 술집 일은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당신도 조사해 보셨겠지만, 곽승재가 서인수의 소식을 알게 된 건 저와 무관합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속였다는 일은 없어요.”“하지만 곽승재가 당신을 위해 내 가게를 망가뜨린 건 사실이지.”민시후가 와인 잔을 흔들며 말했다. “당신은 그 사람과 대립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곽승재는 당신 일에 여러모로 신경 쓰고 있네요. 이렇게 하는 건 나를 이용해 당신들 부부의 로맨스에 자극을 주려는 거 아닌가요?”민
고은서가 바라보면서 물었다.“무슨 일인데요?”민시후가 말했다.“이따 어떤 여자가 찾아오면 이유를 둘러대서 보내주세요.”고은서가 귀를 의심하면서 물었다.“어떤 여자길래 이유를 대면서까지 쫓아내야 하는데요?”민시후는 싫증난 표정으로 말했다.“아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여자요.”고은서는 민시후의 반응을 보고 아마도 관계가 심상찮은 사이라고 생각했다.민시후는 집안 어르신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 여자와 멀리할 수 없어 고은서의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었다.그냥 일반 여자였다면 민시후의 성격으로는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하지 않고 진작에 내쫓았을 것이다.“민 도련님도 참 유별나네요. 제가 어떻게 내쫓아요? 민 도련님을 좋아하는 사람인 척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고은서가 묻자 민시후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건 그쪽이 생각할 문제고, 저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쫓아내는 데 성공하면 지난번 일은 없었던 일로 해드릴게요. 아니면 이 술을 한 병 다 마시든가요. 그러면 제가 기분을 봐서 손해배상을 청구할지 말지 생각해 볼게요. 곽 대표가 구하러 올 거라고 기대하지 말고요. 한번 본 손해, 두 번 다시는 안 당할 거예요. 곽 대표가 와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고은서는 민시후가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더욱이 곽승재는 출장 중이라 올 수도 없었다.고은서가 진지하게 물었다.“민 도련님, 이런 일은 왜 꼭 저를 찾으세요? 여자 하나 내쫓는 거, 저보다 잘하는 사람도 많잖아요.”“아니요. 그쪽보다 더 어울릴 만한 사람은 없어요.”민시후가 인내심 가득한 말투로 설명했다.“예쁘고, 나한테 매달릴 일도 없고, 나한테 빚진 거 있고, 내가 원하고 있고.”“...”고은서는 할 말이 없었다.그제야 민시후가 이곳까지 부른 이유를 알았다.납치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보다 일부러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더욱 화가 풀렸기 때문이다.“도련님, 송민아 씨가 오셨습니다.”이때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이 틈을 타 핸드폰을 찾으
민시후가 의자에 앉아 빙 돌면서 말했다.“자기소개해달라고 하든가.”고은서는 이렇게 어이없는 상황이 처음이었다.‘유부녀의 신분으로 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를 쫓아내야 한다고?’고은서는 송민아의 의문이 가득한 눈빛과 마주치더니 말했다.“민 도련님이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 건가요?”송민아는 딱 봐도 안 믿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꼈다.“누구를 속이려고 그러세요! 딱 봐도 시후 오빠한테 찝쩍거리려고 온 것 같은데. 외모가 좀 괜찮다 싶은 여자들은 시후 오빠를 꼬셔보려고 사무실까지 찾아오던데. 약혼녀가 있는 줄도 모르고!”고은서는 민시후가 쫓아내달라고 한 사람이 약혼녀일 줄은 몰랐다.“정말 죄송해요. 저...”해명하려고 할 때, 민시후가 경고의 눈빛으로 쳐다보자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저도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데 민 도련님께서 저를 잡고 놔주지 않길래요. 아무리 뿌리쳐 봐도 뿌리칠 수가 없었어요.”이 말에 민시후는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고은서는 담담하기만 했다.“저를 내버려 둘 수 있게 설득해 주신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송민아는 무슨 웃음거리를 들은 것처럼 말했다.“오빠가 당신을 쫓아다닌다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민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신데 당신과 같은 여자를 좋아할 리가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를 왜 좋아하는지. 못 믿으시겠으면 제가 증명해 드릴까요?”고은서가 사무실 입구로 걸어가자 두 보디가드가 절대 가면 안 된다는 눈빛을 하고서 앞을 가로막았다.“이거 봤죠?”고은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민 도련님은 제가 한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잖아요.”송민아가 민시후를 째려보았다.“시후 오빠, 왜 안 놔주는데요? 정말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예요?”민시후는 아무 말도 없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은서를 쳐다보았고, 고은서는 모른 척하기만 했다.하지만 송민아의 눈에는 민시후가 인정한 거로 보였다.“어
“제 약혼녀가 아니에요!”약혼녀라는 호칭이 싫은 민시후가 냉랭하게 말했다.“은서 씨도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염치도 없이 제가 은서 씨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죠?”고은서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다 도련님을 위해서 한 말이잖아요. 만약 제가 도련님을 좋아한다고 하면 이런 반응이 아니었을 거예요. 도련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야 마음을 접을 거라고요.”“그러면 제가 고마워해야겠네요?”“그럴 필요까지는 없고요. 약속만 지켜주세요.”민시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밖에서 보디가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불법감금이 의심된다고 경찰이 찾아왔어요.”민시후는 그제야 반응하고 이상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겁도 없이 제 앞에서 수작을 부려요?”고은서는 태연하기만 했다.“도련님이 또 저를 납치하면 어떡해요. 저도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약혼녀를 쫓아내 주면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마음이 바뀔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민시후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지문 인식으로 핸드폰을 켜 박지연에게 전화했다.박지연은 눈치껏 아무 소리도 안 내고 고은서와 민시후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경찰에 신고했다.민시후는 화를 내는 대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쳐다보았다.“재미있네요. 은서 씨, 명운을 융자의 기준으로 만들어 주시면 은서 씨 건의를 다시 생각해 볼게요.”고은서는 시종 미소를 유지했다.“네. 이번에는 민 도련님을 실명시키지 않을게요.”잠시 후, 경찰이 걸어들어왔다.고은서는 친구가 신고했고,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민시후는 사무실 한구석을 가리키더니 말했다.“여기 CCTV 있습니다. 모든 걸 기록했으니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CCTV를 확인한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민시후가 일부러 그런 것이다!고은서가 송민아를 내쫓으려고 여자친구인 척 스킨십할 거라고 생각해 일부러 CCTV로 기록해 곽승재에게 수치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기발한 생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미숙이 달려왔다.“사모님, 외숙모께서 지금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계셔요. 저까지 내쫓으셨어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왜 갑자기 집에 찾아온 거지?’“은서 왔어?”단은숙이 인기척을 느끼고 주방에서 나왔다.“삼계탕 끓여놨어. 조금만 더 끓이면 돼. 아, 조카사위한테도 전화했어. 돌아오는 길인데 곧 도착할 거라고 했어.”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외숙모께서는 뭐 하러 오셨어요?”단은숙이 말했다.“애도, 참. 내가 너 어릴 때부터 친딸처럼 키웠는데 딸 집에 와서 뭐 하겠어. 당연히 딸 보러 왔지! 저번에 조카사위가 집에서 별로 밥을 먹지 않는다며? 직접 밥해주려고 왔어.”친딸은 무슨, 단은숙은 고은서를 구박만 했던 사람이었다.아마도 저번 FY 그룹 일을 포기하지 않았거나 고준석이 M•Q 관리팀을 바꾸겠다고 해서 소식을 엿들으려고 왔을 수 있었다.이때, 곽승재의 차 소리가 들려 이미숙이 문을 열어주었다.검은 정장을 입고 작은 캐리어를 들고있는 그는 훤칠한 키에 심상찮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으며 온 하루 힘들었는지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고은서를 쳐다보는 눈빛은 마치 먼저 인사를 건네주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두날 전 불쾌했던 일이 떠올라 못 본 척하고 2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조카사위, 출장 다녀오느라 힘들었지? 얼른 앉아서 쉬어!”단은숙이 대신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심마니한테 부탁해서 얻어온 산삼으로 삼계탕 끓여놨어. 면역력도 보충한다니까 이따 많이 먹어.”고은서는 뻘쭘하기만 했다.“외숙모, 손님이신데 앉아서 쉬세요. 주방일은 아줌마한테 맡기면 돼요.”“그럴 수 없지. 오랜만에 외숙모가 해주는 요리를 맛보는 건데 내가 직접 해줘야지! 아, 맞다. 은서야, 조카사위 물건은 방에 갖다 뒀어.”단은숙은 가르치는 말투로 말했다.“얘도 참. 외할아버지가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웠더니 성질만 나면 물건을 집어 던져. 다음부터 그러면 안 돼!”고은서는
곽승재는 입술만 깨물 뿐 고은서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평온하게 말했다.“예전에 네가 해주고 싶어 했잖아. 네 마음대로 하라는데 뭐가 잘못됐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오빠 말대로 그건 예전 일이잖아. 오빠가 싫다고 했는데 나도 이제는 싫어. 그냥 화끈하게 이혼합의서에 사인이나 해!”“고은서, 정말 싫은 거 맞아? 그럼 왜 외숙모한테 내 물건을 이쪽 방으로 옮겨달라고 했어? 그리고 왜 자주 집에서 밥 안 먹는다고 했어?”고은서는 뻘쭘하기만 했다.외숙모가 이 말을 그대로 곽승재에게 전했다니!“내가 불러온 거 아니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고은서! 조카사위! 얼른 내려와! 밥이 다 됐어!”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1층에서 단은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곽승재에게 말했다.“나중에 얘기해. 이따 외숙모가 어떤 요구를 하든 절대 들어주지 마.”곽승재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힐끔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옷을 갈아입으려다 말고 1층으로 내려갔다.1층에서는 이미숙이 단은숙이 해놓은 요리를 주방에서 꺼내오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삼계탕, 전복 등 고급 요리가 많았다. 딱 봐도 돈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분명 부탁할 것이 있을 거라는 예감도 들었다.“가만히 서서 뭐 해. 조카사위는? 얼른 손 씻고 밥 먹으라고 해!”단은숙은 적반하장으로 이 집 주인 행세를 했다.고은서가 직접적으로 말했다.“외숙모. 다음부터 우리 집에 와서 요리하지 마세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줌마께서 다 해줘요.”단은숙은 고은서의 뜻을 알아차리고 꾸지람했다.“은서야, 내가 이러는 거 다 너를 위해 하는 거잖아. 난 네가 조카사위랑 가까워졌으면 해. 부부 사이가 돈독해지면 얼마나 좋아. 뭐 문제라도 있어? 왜 내가 오지랖을 떨고 있는 것처럼 말해?”고은서가 말했다.“함부로 저희 둘 사이의 일에 끼어들면 안 되죠!”고은서의 아이디어라고 곽승재가 오해했으니 말이다!단은숙은 미처 무슨 뜻인지 몰랐다.“내가 무슨
“우리가 뭐 인맥도 없고, 배경도 없는 작은 회사가 아닌데 왜 돈 벌 기회를 다른 사람한테 떠넘겨 줘야 해!”단은숙은 바로 곽승재에게 요구했다.“조카사위, 사실대로 말할게. 오늘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 외삼촌이 FY 그룹이랑 손잡고 싶어 하는데 그쪽에서 싫다고 해서 말이야. 조카사위가 중간에서 이어주면 안 될까?”“승재 오빠 바빠요. 저희 집안일을 신경 쓸 새 없으니까 부담 주지 마세요!”고은서가 냉랭하게 말했다.“은서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승재도 이제는 고씨 가문 사람인데 처가 좀 도와주면 안 돼? 이게 그렇게 부담될 일이야? 조카사위는 어떻게 생각해?”단은숙은 다시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표정이 차가운 고은서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외숙모, 이따 자료 남겨두고 가세요.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아이고, 고마워. 난 조카사위가 도와줄 줄 알았어.”단은숙은 기쁜 마음에 또 곽승재에게 삼계탕을 떠주었다.“조카사위, 많이 먹어. 외숙모만큼 삼계탕을 잘 끓이는 사람이 없어.”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밥을 다 먹고, 단은숙은 자료를 남겨두고 만족스럽게 이곳을 떠났다.고은서는 불쾌한 표정으로 곽승재를 째려보았다.“외숙모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고 했잖아.”“고씨 가문 사업이 나랑 엮이는 거 싫어?”곽승재가 되물었다.고은서는 더는 그에게 숨길 수 없어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우리 언젠간 이혼할 거잖아. 이제부터는 오빠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미리 적응해야지.”곽승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너한테는 내가 그렇게 냉혈 인간으로 보여?”고은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지난 생에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로 한 번도 고씨 가문을 보살피지 않았던 그였다.심지어 M•Q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발목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말이다.띠링띠링.마침 외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와서 2층으로 올라갔다.외숙모가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확인하러 전화한 것이다.“너희 삼촌이랑 상의했던 내용을 듣고 찾아간 모양이야.”외할아버지가
조수연이 온범준을 뿌리치며 말했다.“나는 신경 쓰지 마. 아들이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걸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재결합을 원하는 거잖아. 내가 빌면 되지. 내가 무릎...”비록 작은 골목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수연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박지연은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조수연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계속해서 온승준과 재혼해달라고 애원했다.슬프게 우는 조수연은 초췌해 보였고 휠체어에 앉아 있기까지 하니 정말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약자처럼 보였다.육현석은 말로만 경고하며 말릴 뿐 손을 댈 수도 없었다.“아버지, 어머니.”박지연과 육현석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사람들 속에서 온승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승준은 예전처럼 아무 표정 없이 그저 무심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돌아가세요.”“승준아, 엄마 지금 지연이한테 사과하고 있어. 해외 가지 않으면 안 될까? 두 사람 재혼하는 거 동의할게. 앞으로도 너희 일에 간섭하지 않을게.”조수연은 박지연을 놓고 온승준을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다.주위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려 하자 육현석은 급히 손을 들어 박지연의 얼굴을 가리며 보호했다.온승준은 담담한 말투로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소란 피워서 미안해. 가도 돼.”박지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육현석과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육현석의 차에 오르고 나서야 박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수연의 소동 덕분에 박지연은 외출하거나 쇼핑할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피곤하다고 말하며 일찍 집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육현석도 반대하지 않고 그녀를 라이트문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차 안에서 육현석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조용히 운전만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이트문 아파트에 도착했다.“육현석, 아까는 미안해. 온 선생님 부모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 나 때문에 너까지 휘말리게 했네.”집에 가기 전 박지연이 육현석에게 사과했다.“네 잘못도 아
박지연이 고개를 들자 육현석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바로 박지연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박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온승준의 부모님도 자연스레 육현석을 바라보았다.조수연은 육현석을 알고 있었고 박지연과 그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이미 생각했기에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을 보며 조금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육현석 씨죠? 지연이는 우리 승준이 아내인데 이렇게 손잡는 건 부적절하지 않나요?”육현석이 차분히 답했다.“여사님, 그 말씀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연이는 이미 온 선생님과 이혼했고 이제는 제 여자 친구예요.”여자 친구라는 단어가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특히 조수연은 육현석이 박지연을 여자 친구로 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육현석이 부유한 집 아들이기에 단지 박지연을 새로운 맛에 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박지연이 이혼한 걸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연이 체면 좀 살려주려고 그러는 걸 거야.’조수연은 육현석과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박지연에게 충고를 시작했다.“지연아, 너도 승준이랑 2년을 함께 해서 알겠지만 승준이는 한 번도 너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어. 집안일은 전부 네 말에 따르고 간섭도 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승준이는 생활 루틴도 깨끗해. 도박도 하지 않고 여자를 만나지도 않고 접대로 하지 않아. 성격이 조금 둔할 뿐이지. 다른 남자들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헤쳐나가는 생활에서는 승준이처럼 신중한 사람이 더 좋지 않겠니?”조수연이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승준이는 이혼하고 나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겠대. 지금까지 이렇게 고집부리는 건 처음이야. 승준이랑 재결합해서 살면 우리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온범준도 말을 보탰다.“지연아, 네가 심성이 착한 아이라는 거 우리도 잘 알고 있어. 예전 일은 정말 미안하다. 원하는 보상이나 요구가 있으면 말해보거라. 다 들어줄게.”박지
저녁이 되어 간신히 손에 쥔 일을 마무리한 박지연은 미리 아래층으로 가 육현석을 기다리기로 했다.병원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 온범준이 휠체어에 앉은 조수연을 밀고 오고 있었다.박지연은 두 사람을 마주하고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곧바로 옆길로 발걸음을 돌렸다.“지연아, 잠깐만 기다려줘.”온범준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그리고 이내 온범준은 조수연을 이끌고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지난번 병실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박지연은 지금 상황이 귀찮게 여겼다.“또 저를 괴롭히거나 모욕적인 말씀을 하실 거면 바로 신고할 거예요.”“아니야. 지연아, 오해하지 마. 우리는 너에게 사과하러 왔어.”놀랍게도 조수연은 자세를 낮추었다.“맞아. 지연아. 우리는 정말 너랑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 자리 옮겨서 얘기 좀 할까?”온범준은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자존심을 챙기고 싶었는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걸 원치 않았다.박지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두 분이랑 할 얘기 없습니다. 저는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지연아, 미안해!”박지연이 발을 떼기도 전에 조수연이 갑자기 큰 소리로 사과했다.박지연은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수연을 쳐다보았다.조수연은 아첨하는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지연아, 전에는 이 엄마가 잘못했다. 너한테 그렇게 엄하게 굴지 말아야 했어. 그리고 너희 두 사람 일에 지나친 간섭은 하지 말았어야...”“그만하세요!”박지연이 조수연의 말을 끊었다.“조 여사님, 제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호칭 좀 주의해 주세요.”조수연은 비난을 받아도 화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지연아, 네가 많이 참았다는 거 알아. 다 내 잘못이야. 진심으로 사과할게.”온범준이 기침 두 번하며 말했다.“지연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집안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다. 너무 많은 걸 감내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나도 진심으로 사과한다.”박지연은 두 사람의 행동에 혼란스러웠다.‘지금 이게 또 뭐 하는 거
온승준은 등산을 좋아하는 병원 주임의 권유로 산에 오르게 되었다.원래는 참여할 마음이 없었지만 주임의 무심한 한마디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온 선생, 맨날 그렇게 무뚝뚝하게 있으면 안 돼요. 가끔 바람도 쐬고 그래야지. 안 그러면 누가 그런 성격 좋아하겠어요.”온승준이 박지연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일은 병원 내에서 이미 퍼져 있었고 주임 역시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그의 농담 같은 말은 온승준으로 하여금 박지연을 떠올리게 했다.이전 박지연은 그에게 너무 무뚝뚝하다고 가끔 함께 밖으로 나가자고 했던 적도 있었다.L 국에 있을 때는 그녀와 함께 몇 번 외출했었는데 당시 박지연은 그 시간을 무척 즐거워하며 허니문 여행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결국 온승준은 주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러나 산 정상에 오르자마자 박지연이 한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그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부드럽고도 절제된 모습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태양은 이미 떠올라 있었고 산을 오르느라 땀범벅이 되었음에도 온승준은 그 장면을 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온승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키스를 마친 두 사람은 떨어졌고 박지연의 얼굴은 발그레해져 있었다.그녀의 눈은 부끄러움과 기쁨으로 반짝였고 온 신경은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남자 역시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야에는 오직 서로만이 존재하는 듯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온승준 같은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 사이에 넘치는 사랑이 주변의 모든 것을 그림자처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온승준은 자신이 어떻게 그곳을 떠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저 다리가 납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기계적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을 뿐이었다....다음 날 박지연이 출근했을 때 한 간호사가 그녀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온 선생님 어제 사직서 제출했대요. 국경 없는
“알고 있어.”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은서야, 형이 널 찾아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리고 예전부터 너와 내 관계를 오해하도록 내버렸던 것도 내 잘못이야. 그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너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졌어. 모든 게 내 경솔함에서 비롯된 거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널 힘들게 한 점 진심으로 미안해. 우리 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너에게 다시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게. 하지만 은서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괜찮아. 그렇지만 제발 나를 네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진 말아줘.”민시후의 진지한 표정과 간절함이 섞인 목소리에 고은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우리 아직 친구잖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널 어떻게 지워.”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답했다.그 말을 들은 민시후도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부람스러워할까 봐 그런 거야. 차라리 안 보면 편할까 해서.”하지만 그들의 가벼운 대화는 결국 억지로 만들어낸 분위기에 불과했고 대화가 끝난 후에도 분위기는 가벼워지지 않았다.결국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이는 고은서가 민시후와 알고 지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두 사람은 항상 서로 투덕거리거나 웃고 떠들기에 바빴는데 지금의 침묵은 고은서를 어색하게 만들었다.“맞다. 여시은 씨가 너한테 밥 사겠대. 지난번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고은서는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민시후가 고개를 저었다.“여시은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지난번 일은 민시현이 꾸민 일이야.”고은서가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 민시후가 물었다.“이미 알고 있었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곽승재를 탓했던 일과 곽승재가 이를 조사했던 사실을 민시후에게 이야기했다.민시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차의 머리 받침에 기대며 약간 자조적으로 말했다.“나보다 더 철저히 조사했네. 나는 송민준까지만 알아냈지 민시현까지는 못 알아냈어. 은서야, 네가 날 너무 좋아하지 않는
민시후를 본 고은서는 약간 놀랐다.‘북성으로 가서 오늘 해성에 오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생각에 잠겨 있을 사이 민시후는 이미 그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그리고 그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보았다.민시후의 얼굴에 뚜렷한 불쾌감이 떠올랐다.“곽 대표, 왜 어디나 다 당신이 있는 걸까?”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그 말은 그대로 돌려줘야겠는데?”“곽 대표, 지나간 버스는 다시 잡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민시후는 곽승재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며 말했다.“은서에게 잘해줬다면 전 남편이 될 리가 없었겠지?”곽승재는 그 말에 화가 난 듯 얼굴이 굳어졌고 차가운 눈동자에는 분노가 서렸다.“늦었어. 돌아가.”고은서는 두 사람이 또 다툴까 걱정되어 곽승재에게 한마디 하고는 차 문을 닫으며 이혁재에게 말했다.“아저씨, 출발해 주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곽승재는 차창 너머로 나란히 서 있는 고은서와 민시후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고 그 광경에 눈이 시려왔다.어쩌면 눈뿐만 아니라 마음도 시려지는 듯했다.그는 당장 차에서 내려 고은서를 안아 들고 예원 별장으로 데려가 다시는 민시후와 못 만나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고은서가 자신을 더 미워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차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셔츠 목 부분의 단추를 풀었지만 여전히 숨이 막혀온 그는 외투를 벗으려다 포켓에 든 돈을 건드리게 되었다.문득 고은서가 치료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건넬 때의 냉랭한 표정이 떠올랐다.마치 남을 대하듯 선을 긋는듯한 모습이었다.고은서도 그가 원하는 것이 돈도 치료비도 아닌 그녀의 미소 혹은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민시후를 도와 진실을 밝힌 것도 자신이 그렇게 비열하지 않다는 것을 고은서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서 그의 이미지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듯했다.곽승
고은서는 조향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때로는 너무 늦어져 집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곽승재가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집 근처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은 작았다.나아가 고은서는 지난번 곽승재를 이유 없이 오해한 일이 떠올라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은서가 승낙하자 운전기사는 다시 곽승재를 설득하며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곽승재는 그제야 천천히 차에 올라탔고 차 안으로 밤공기와 담배 향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그는 고은서 옆에 앉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곽승재의 운전기사는 차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혁재는 바로 출발했고 차는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먼저 고은서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또한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 차가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지 동승한 것처럼 보였다.“지난번 민시후와 관련된 일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어. 오해해서 미안해.”복수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잘못도 제때 인정하는 것이 고은서의 원칙이었다.지난번 GS 그룹에서 그녀는 시시비비도 제대로 가리지 않고 곽승재를 비난했고 며칠 전 그가 찾아왔을 때도 오해하여 그에게 손찌검까지 했다.고은서의 충동임이 틀림없었다.그녀의 사과를 들은 곽승재는 살짝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현금 뭉치를 꺼냈다.“이거 받아.”지난번 M 국에서 노숙자에게 쫓기고 나서 고은서는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데 익숙해졌고 마침 쓸모가 생겼다.곽승재는 그녀가 내민 돈을 보고 눈빛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치료비에 대한 보상이야.”그녀는 곽승재를 몇 번이나 때렸고 비록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이라도 발라야 했을 테니 보상으로 돈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곽승재의 차분했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은서, 이렇게 대충 넘어가려고?”그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와 서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니면?”고은서는
고준석은 고은서의 불쾌한 표정을 알아채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승재가 먼저 약속 잡고 나랑 바둑 두러 온 거야.”고은서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그 사람 집에 자주 와요?”‘전에는 이렇게 한가해 보이지 않더니...’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일주일에 한두 번은 와. 바쁘면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 나랑 바둑 두는 게 좋다며 굳이 오더라. 심지어 네가 싫어할까 봐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더라.”‘내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온다고?’고은서가 더 말하려는 순간 곽승재가 이미 집 안으로 들어섰다.곽승재는 그녀를 보고 약간 놀라는 듯했지만 곧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는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할아버지, 저 왔어요.”곽승재는 고준석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승재 왔니? 앉아라.”고준석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번에도 녹차로 줄까?”“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준석 옆 의자에 앉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할아버지, 저는 조향실에 좀 있다가 올게요.”“과일차 마시고 싶다며? 지금 아주머니가 준비하고 있어.”“준비되면 조향실로 가져다 달라고 해주세요.”고은서는 말을 마치고 거실을 떠났다.“애도 참.”고준석이 한숨을 내쉬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승재야, 은서 원래 저런 성격이니까 네가 이해해 줘.”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깊은 눈으로 고은서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고준석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 문제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은서의 마음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몫이지.’최근 곽승연을 위해 조향한 아로마 캔들의 효과는 괜찮은 편이었다. 기분도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인 터라 고은서는 이를 더 개선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두세 시간이 지나 있었고 어깨를 주무르며 거실로 돌아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떠나고 고준석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은
“백유미가 먼저 자살 시도를 하고 곽승재는 그 후에 수술을 받았는데 그런 졸렬한 변명이 통할 거로 생각하나?”박지연은 아무렴 믿지 않을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육현석이 머쓱한지 코를 만지며 답했다.“승재 형 그 얘기 할 때 꽤 슬퍼 보였어. 난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정말 친동생보다 더 친한 사이네.”육현석과 박지연은 티격태격 말다툼을 시작했고 그 사이 도아름은 생각에 잠겨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도아름은 T 국에서 고은서가 겪었던 일과 백유미의 몇몇 추문 그리고 그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은서야, 괜찮아?”도아름은 고은서가 슬퍼하는 줄 알고 걱정스레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곽 대표가 일부러 너를 슬프게 하려 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 그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은서야, 화해를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야. 난 네가 막다른 길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긍정적으로 앞을 바라보면 돼.”고은서가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저도 알아요.”전생에 곽승재에게 자신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상관없었다.하지만 그가 싸늘한 말투로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말한 건 사실이었고 그녀도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아름 언니, 저 회사 차리면 주주로 들어오실래요?”도아름은 흔쾌히 승낙했다.“우리 명운을 알아보고 투자했으니 나도 참여해야지.”“나도 참여하게 해 줘!”육현석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나도 할래. 난 그냥 주주로만 있을게. 경영이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그 정도로 날 믿어도 돼? 혹시 손해 보면 어쩌려고?”“그럴 리가! 난 네가 큰돈을 벌 거라는 예감이 들어!”“그럼 네 말대로 되길 빌게!”식사를 마친 후 고은서는 육현석에게 박지연을 데려다주라고 했고 그녀는 도아름과 함께 명운으로 가서 전문가들과 회사를 설립하는 일에 대해 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