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입술만 깨물 뿐 고은서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평온하게 말했다.“예전에 네가 해주고 싶어 했잖아. 네 마음대로 하라는데 뭐가 잘못됐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오빠 말대로 그건 예전 일이잖아. 오빠가 싫다고 했는데 나도 이제는 싫어. 그냥 화끈하게 이혼합의서에 사인이나 해!”“고은서, 정말 싫은 거 맞아? 그럼 왜 외숙모한테 내 물건을 이쪽 방으로 옮겨달라고 했어? 그리고 왜 자주 집에서 밥 안 먹는다고 했어?”고은서는 뻘쭘하기만 했다.외숙모가 이 말을 그대로 곽승재에게 전했다니!“내가 불러온 거 아니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고은서! 조카사위! 얼른 내려와! 밥이 다 됐어!”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1층에서 단은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곽승재에게 말했다.“나중에 얘기해. 이따 외숙모가 어떤 요구를 하든 절대 들어주지 마.”곽승재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힐끔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옷을 갈아입으려다 말고 1층으로 내려갔다.1층에서는 이미숙이 단은숙이 해놓은 요리를 주방에서 꺼내오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삼계탕, 전복 등 고급 요리가 많았다. 딱 봐도 돈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분명 부탁할 것이 있을 거라는 예감도 들었다.“가만히 서서 뭐 해. 조카사위는? 얼른 손 씻고 밥 먹으라고 해!”단은숙은 적반하장으로 이 집 주인 행세를 했다.고은서가 직접적으로 말했다.“외숙모. 다음부터 우리 집에 와서 요리하지 마세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줌마께서 다 해줘요.”단은숙은 고은서의 뜻을 알아차리고 꾸지람했다.“은서야, 내가 이러는 거 다 너를 위해 하는 거잖아. 난 네가 조카사위랑 가까워졌으면 해. 부부 사이가 돈독해지면 얼마나 좋아. 뭐 문제라도 있어? 왜 내가 오지랖을 떨고 있는 것처럼 말해?”고은서가 말했다.“함부로 저희 둘 사이의 일에 끼어들면 안 되죠!”고은서의 아이디어라고 곽승재가 오해했으니 말이다!단은숙은 미처 무슨 뜻인지 몰랐다.“내가 무슨
“우리가 뭐 인맥도 없고, 배경도 없는 작은 회사가 아닌데 왜 돈 벌 기회를 다른 사람한테 떠넘겨 줘야 해!”단은숙은 바로 곽승재에게 요구했다.“조카사위, 사실대로 말할게. 오늘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 외삼촌이 FY 그룹이랑 손잡고 싶어 하는데 그쪽에서 싫다고 해서 말이야. 조카사위가 중간에서 이어주면 안 될까?”“승재 오빠 바빠요. 저희 집안일을 신경 쓸 새 없으니까 부담 주지 마세요!”고은서가 냉랭하게 말했다.“은서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승재도 이제는 고씨 가문 사람인데 처가 좀 도와주면 안 돼? 이게 그렇게 부담될 일이야? 조카사위는 어떻게 생각해?”단은숙은 다시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표정이 차가운 고은서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외숙모, 이따 자료 남겨두고 가세요.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아이고, 고마워. 난 조카사위가 도와줄 줄 알았어.”단은숙은 기쁜 마음에 또 곽승재에게 삼계탕을 떠주었다.“조카사위, 많이 먹어. 외숙모만큼 삼계탕을 잘 끓이는 사람이 없어.”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밥을 다 먹고, 단은숙은 자료를 남겨두고 만족스럽게 이곳을 떠났다.고은서는 불쾌한 표정으로 곽승재를 째려보았다.“외숙모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고 했잖아.”“고씨 가문 사업이 나랑 엮이는 거 싫어?”곽승재가 되물었다.고은서는 더는 그에게 숨길 수 없어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우리 언젠간 이혼할 거잖아. 이제부터는 오빠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미리 적응해야지.”곽승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너한테는 내가 그렇게 냉혈 인간으로 보여?”고은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지난 생에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로 한 번도 고씨 가문을 보살피지 않았던 그였다.심지어 M•Q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발목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말이다.띠링띠링.마침 외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와서 2층으로 올라갔다.외숙모가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확인하러 전화한 것이다.“너희 삼촌이랑 상의했던 내용을 듣고 찾아간 모양이야.”외할아버지가
“이건 또 무슨 말이지?”‘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한 이불을 덮고 자!’곽승재는 고은서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일단 우린 아직 부부야. 같이 자도 합법적이라고. 그리고 나를 안방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이유가 아직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지?”고은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안방으로 들어오게 하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는 거야?”곽승재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할머니를 위해서라도 할머니 생신 전까지는 정상적인 부부처럼 지내봐. 그때까지도 너의 뜻이 그렇다면 내가 합의이혼 해줄게.”고은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쌍방 어르신의 동의 없이도?”“당연히 알리긴 해야지. 그때 가서 어르신들 반응을 감당할 수 있을지 봐야지.”고은서는 곽승재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쌍방 어르신들한테 이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어르신들이 동의하든 말든 그 반응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이혼합의서에 사인하겠다는 말이었다.고은서는 쌍방 어르신들의 뜻은 상관없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20날 정도는 조금만 버티면 바로 지나갔다.고은서가 흔쾌히 대답했다.“부부처럼 지내는 건 상관없는데 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 그리고 하기 싫은 거 강제로 시키지도 말고.”곽승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네가 먼저 꼬시면?”“그럴 일은 없어!”저번에 속옷을 던진 일이 생각나 고은서의 얼굴이 화끈해지고 말았다.“저번에는 침대에 있는 줄 몰랐다고!”곽승재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마른 몸매에 별로 관심이 없거든.”‘쳇! 100근도 안 되는 몸무게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고은서는 화가 났다.“약속 지키길 바래!”고은서가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가려고 하자 곽승재가 말했다.“나도 샤워하고 싶은데 잠옷 좀 골라줘.”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부부 사이에 남편한테 잠옷을 챙겨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곽승재가 태연하게 말했다.“몇 번이고 나한테 커플
고은서가 말했다.“부부 사이에도 냉전이라는 것이 있어. 우리가 지금 냉전 중인 거야. 오빠를 보고 싶지도 않아.”곽승재가 물었다.“우리가 무엇 때문에 냉전 중이지?”“기억을 잃었어? 며칠 전 복싱장 밖에서 누가 무례하게 내 친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곽승재가 피식 웃고 말았다.“내 마누라를 훔쳐보고 있는데 내가 왜 예의를 차려야 해?”“미친 거 아니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주인혁을 오해하는 것이 싫었다.“젊은 남자가 나 같은 유부녀를 왜 훔쳐봐!”곽승재가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아직도 그 사람 편을 드는 거야? 너보다 내가 남자를 더 잘 알거든?”고은서는 일그러진 곽승재의 표정을 보더니 무언가 생각했다.“다른 남자가 와이프를 훔쳐봐서 기분이 나빴어?”‘글쎄 왜 부부행세를 하자고 하는 줄 알았더니. 역시 남자는 소유욕이 강한 동물이야! 좋다고 따라다닐 때는 귀찮아하더니,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까 봐 불안한 거야. 참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야.’곽승재는 가소롭게 쳐다보는 고은서의 눈빛을 확인하고 냉랭하게 말했다.“난 그저 네가 자꾸만 난리를 피우는 것이 싫어 서로에게 조용할 기회를 줬을 뿐이야.”‘핑계도 대단해.’“그래. 서로 조용한 시간을 갖자고. 이제부터 나랑 말하지 마.”고은서는 곽승재를 등지고 소파에 누웠다.곽승재는 화를 억누르고 고은서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책을 읽기 시작했다.“불 꺼! 너무 밝아서 잠이 안 오잖아!”이제 두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 고은서의 짜증 가득한 말투가 들려왔다.곽승재는 결국 이를 꽉 깨문 채 책을 내려놓고 소등하고 작은 스탠드 등만 켜놨다.어두운 불빛 아래, 분위기가 차분해졌다.아직 시간이 이른지라 곽승재는 잠이 오지 않았다.고은서가 움직이지도 않길래 잠든 줄 알고 침대에서 내려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움츠린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안정적으로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잠든 것 같았다.잠든 그녀는 시끄러운 평소와는 달랐다.곽승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책과 핸드폰을 들고
다 씻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 곽승재는 자료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흰 셔츠를 입고있는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아침햇살이 그의 흠 잡을 데 없는 얼굴에 비쳐 표정마저 부드러워 보였다.어느 각도로 보든 고은서의 스타일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고은서는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야 정신을 차렸다.‘아무리 잘생겨봤자 싫은 짓만 골라 하잖아!’고은서는 차가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갔다.“어젯밤 오빠가 나를 침대로 옮겼어?”쨍그랑!이때 주방에서 젓가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깜짝 놀란 표정의 주민기가 보였다.주민기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젓가락을 주우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방으로 물러갔다.“사모님...”그러면서 주방에서 나오려는 이미숙을 말렸다.이미숙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왜 그러세요. 사모님께 아침 식사로 뭘 드실지 물어봐야 하는데!”주민기는 여전히 이미숙을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아줌마, 젓가락에 기름기가 묻어있어서 미끄러운 거 아니에요?”“분명 깨끗한데...”주민기와 이미숙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고은서는 자신이 한 말이 오해를 샀다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졌다.“내가 그랬어.”곽승재는 일부러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를 냈다.“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곽승재는 자료를 내려놓고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부부 사이에는 한잠 자면 화가 풀린다고 하잖아. 이제 냉전도 끝날 때가 된 것 같은데?”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이건 또 무슨 도리지?’고은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말했다.“나갈 준비나 해. 내일 GS 그룹 파티에 같이 참석해.”“미안한데 난 시간 없어.”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했다.판주 투자은행 매수를 축하하는 파티라 이사인 백유미가 나댈 거란 생각에 별로 가고싶지 않았다.“곽 사모님으로서 남편이랑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잖아.”곽승재는 은행 카드 두 장을
곽승재는 어느 정도 싫증 섞인 눈빛으로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씨 가문에서 귀하게 컸겠는데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해?”“돈을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돈이 있어야 자신감도 생기는 거지!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빠도 돈이 많으면서 맨날 GS 그룹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잖아. 뭐, 당연히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 재벌가는 일반인 세계를 모를 수도 있어.”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주방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주민기는 내심 부러웠다.‘사모님은 좋겠어. 이렇게나 많은 돈을 받고. 판주 투자은행 최고 보너스가 분명 2,000만 원이었는데 대표님께서 2억 원을 드렸어. 뭐, 어차피 대표님 돈이 사모님 돈이긴 하지만. 그저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흘러 들어갈 뿐이지. 사모님도 기분이 좋고, 돈이 다른 사람 주머니에 흘러 들어갈 일도 없고. 일거양득이네. 대표님은 역시 현명하셔.’“민기 씨, 언제까지 막고 있을 거예요? 저 이제 나가도 되죠?”이미숙이 급한 마음에 물었다.“사모님 아직 아침도 못 드셨는데.”곽승재와 고은서의 대화가 슬슬 마무리되자 주민기는 그제야 길을 비켰다.“아줌마께서도 힘드시면 며칠 쉬세요.”‘이러면 대표님이 사모님께서 해주시는 요리를 드실 수 있잖아?’이미숙은 순식간에 긴장하기 시작했다.“민기 씨,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대표님께서 저를 해고하래요?”“아니요, 오해하지 마세요.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이미숙은 주민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아침 식사 후, 곽승재와 주민기는 회사로 향했고, 고은서는 쇼핑하러 갈 준비를 했다. 이참에 할머니 선물도 알아보려고 했다.1층에서는 이미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아줌마, 무슨 일 있으세요?”“사모님, 아까 민기 씨가 저보고 며칠 쉬라고 하던데... 혹시 제가 무슨 잘못한 거 있나 해서요.”고은서가 위로했다.“아니에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이미숙은 그래도 불안했다.“그런데 어제저녁 대표님한테 약을 드렸더니
이때, 며칠 전 성북구 쇼핑물에서 범가온한테 명품 시계를 사지 말았어야 한다고 꾸지람을 듣던 남자가 떠올랐다.생김새며, 말투를 보니 범가온의 아들인 것 같았다.그때 범가온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여자 집안이 돈 많는 집안이에요. 제가 꾸미지 않으면 어떻게 꼬시겠어요.”‘설마 그 타깃이 은혜는 아니겠지? 이제 재밌어지려고 하네.’범가온의 조건을 보면 아들에게 이런 명품을 사줄 리가 없었다.딱 봐도 백유미가 도와준 것으로 보였다.백유미가 정신병원은 물론 주위 사람들한테 손을 뻗을 줄 몰았다.“재벌가로 시집간 사촌 언니예요. 이 차는 형부 거고요.”조은혜가 자랑하는 식으로 말했다.“전 세계에서 얼마 없는 메르세데스를 저희 형부가 가지고 있어요. 돈 있어도 못사는 거 알죠? 그 정도의 신분이 받쳐줘야 하거든요.”남자는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더니 다시 표정 관리하기 시작했다.“은혜 씨, 형부라는 분 그렇게 대단해요? 언제 저희한테도 소개해 줘요!”이때 다른 남자가 말했다.곽승재의 쌀쌀한 표정이 떠올랐는지 조은혜는 흔쾌히 대답하지 못했다.“엄청 바쁘신 분이라 나중에 기회 되면 소개해 줄게요. 노래방 가기로 했잖아요. 얼른 가요!”남자가 탐욕스럽게 메르세데스를 쳐다보더니 말했다.“몇 명 안 되는데 사촌 언니랑 함께 노는 거 어때요?”“됐어요. 그러면 무슨 재미에요. 저희끼리 놀아요.”조은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남자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똑같은 젊은이인데 같이 놀면 더 재미있을지도 몰라요!”조은혜는 여태까지 말이 없던 고은서를 보더니 무성의로 물었다.“갈래?”저번 생에는 조은혜가 조건이 괜찮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 상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나중에 정신병원에서 간호사의 대화를 통해 조은혜가 가정폭력을 당한 것도 모자라 남편이 다른 남자한테 보내 야동까지 찍었다고 했다. 삼촌은 조은혜를 그 집에서 빼내기 위해 전 재산을 털었다고 했다.원해 하향세를 타고 있던 M•Q는 그 이후로 다시는 살
한 여자가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반인은 못사는 핸드백인데. VIP만 살 수 있는 건데!”높은 목소리에 원지훈도 이쪽을 쳐다보았다.“돈 많으니까 사는 거죠!”조은혜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재벌가에 시집간 것도 모자라 결혼할 때 할아버지가 혼수로 200억 원이나 줬는데.”고은서는 돈 많은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때 웨이터 한 명이 들어오자 곽승재가 준 블랙카드를 꺼냈다.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웨이터한테 블랙카드를 꺼냈다.“이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오늘은 제가 사는 거거든요.”원지훈이 다가와서 말렸다.“안 돼요. 오늘은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은혜 언니인데 너희들 돈을 쓸 순 없잖아.”고은서는 마치 장난감을 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블랙카드를 꺼냈다.원지훈은 계속 말리면 눈치 없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동작을 멈췄다.“고마워요.”고은서는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네. 즐겁게들 놀아.”조은혜는 그녀가 꼴보기 싫어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고은서가 밖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원지훈이 쫓아 나왔다.“누나, 혹시 연락처 좀 추가해도 될까요?”고은서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원지훈을 쳐다보았다.이에 원지훈이 바쁘게 설명했다.“다른 뜻은 없어요. 은혜 씨 언니면 은혜 씨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요. 은혜 씨랑 빨리 친해지고 싶은데...”고은서가 태연하게 물었다.“은혜가 마음에 들어?”원지훈이 사실대로 인정했다.“네. 은혜 씨랑 서로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많이 좋아해요. 한번 노력해 보려고요.”고은서가 고개를 쳐들면서 말했다.“우리 집안은 아무나 들이지 않아. 우리 외삼촌한테 자식은 은혜 하나뿐이야. 딸을 엄청 아끼시는 분이라 아무한테나 못 줘.”“알아요. 근데 그래도 조건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은혜 씨를 쫓아다니는 거예요. 저희 아빠가 고향에서 커다란 농산품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조건이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고은서는 고국성 집에 들렀다.고국성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고은혜는 상을 찌푸리고 폰을 놀고 있었다.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싸했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 옆으로 다급히 걸어오며 말했다.“언니, 엄마가 방문을 잠그고 계속 나오지 않으면서 아빠랑 이혼한다고 변호사까지 찾았어.”기자 회견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성이 오미나와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단은숙은 오미나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아이가 생겼다는 건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맺었다는 걸 의미했고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고은혜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고국성 앞으로 다가가 일은 자신이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오미나가 아이를 없애겠대?”고국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동의할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정말이야? 엄마한테 이 소식을 알려줘야지.”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러나 고국성은 낙관적인 고은혜와 달리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동의하지 않았단 얘기야?”고은서는 고국성 옆에 앉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삼촌, MQ를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MQ를 더 크게 이끌고 나가려거든 다른 사람한테 너무 의지해서도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후부터 곽승재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그만 하세요. 이 또한 제가 이번 일을 처리해주는 대신 삼촌이 들어줘야 할 조건이기도 해요.”고은서가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고국성은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곽승재를 찾아간 건 어떻게 안 거지? 분명히 유승준도 모르게 몰래 찾아갔는데.’그는 결연한 태도의 고은서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계에서 곽승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게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니
발신자가 곽승재라는 걸 확인한 고은서는 받을지 말지 약간 망설여졌다.‘전에 다툰데다가 삼촌 일 때문에 연루까지 받았고 심지어 그날 날 구하다가 다치기까지 했는데 하필 난 또 곽현수가 요구한 일을 완성해야 하고. 대체 이후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은서야, 누구 전화야? 왜 안 받는 거야?”옆에 있던 육현석이 말했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나가 전화 받고 올게요.”그녀는 조용한 곳에 가서야 곽승재의 전화를 받았다.“곽승재.”“무슨 일이야?”곽승재의 목소리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육현석이 며칠 동안 당신한테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어?”“지금 내가 걱정되어서 날 찾은 거야?”곽승재가 덤덤하게 되물었다.고은서는 멈칫하다가 화제를 바꾸었다.“민기 씨한테 당신이 등을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어?”“낫든 안 낫든 넌 아무런 관심이 없잖아.”“...”고은서는 서로 동문서답하는 대화 모드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날 은혜가 당신한테 연락해 도움을 청한 걸 모르고 있었어. 오해하고 듣기 싫은 소리 해서 미안해. 이후로 당신한테 민페를 끼치는 일은 삼가라고 가족들한테 말해 둘게.”전화너머에서 곽승재가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할 말 다했어?”고은서는 곽승재가 아직도 그날 일로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평소 같으면 화를 내건 말건 전화를 뚝 끊어버렸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은혜가 그날 일로 자책하면서 삼촌이랑 얘기 해봤는데 당신한테 사과할 겸 같이 밥 한 끼 먹자고 하는데 언제 시간 돼?”고은서가 고민끝에 말했다.“또 누가 있는데?”‘누가 더 있겠어. 알면서 묻기는.’“나랑 삼촌 가족만 있어.”곽승재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덤덤하게 답했다.“주민기랑 스케줄 확인해. 시간나는 대로 갈 테니까.”‘이 남자가 정말. 어디서 꼰대 짓이야.’“조금이따 민기 씨한테 얘기해볼게.”고은서가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곽승재가 갑자기 입을
한 비서는 그제서야 승진하게 된 이유가 자신 능력 덕분이 아니라 누군가가 일부러 안배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그러나 계약까지 체결한 탓에 거액의 보상금을 내지 않고는 사직을 할 수가 없었다.위약금보다 더 중요한 건 이렇게 GS그룹을 떠나게 되면 외부 사람들이 그녀가 곽승재를 건드렸다고 오해하면서 해성에서 일자리 하나도 못 찾게 된다는 것이었다.“육 도련님, 고은서 씨, 백유미가 현재 매우 폭력적이고 불안정하다고 하는데 저 그곳에 갔다가 죽을지도 몰라요. 다가가는 것조차 두렵다고요.”한 비서가 울부짖었다.육현석은 곽승재 T국에서 있었던 일로 백유미를 샅샅이 조사해보았다는 걸 깨달았다.‘아마 백유미랑 한 비서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걸 발견하고 이런 방식으로 벌을 주려는 거겠지.’“사직하려거든 GS그룹 내부 문제야. 내가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야.”육현석이 단호하게 거절했다.한 비서는 이내 고은서의 다리를 잡고 빌었다.“고은서 씨,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는 그저 정보를 몇 번 전달했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요. 전에 백유미를 돌보던 사람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저는 죽기 싫어요...”고은서는 덜덜 떨고 한 비서를 보면서 그제야 그녀가 겁에 질려하는 이유를 깨달았다.그러나 그녀는 GS그룹의 일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하지만 마침 백유미가 진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한 비서를 보내면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이익을 위해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을 돕는 것도 모자라 피해자 코스플레이를 하면서 도와달라고 비는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저는 저를 해치려한 사람을 쉽게 용서해줄 만큼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에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저에게 더 절실하게 와닿거든요. 그러니 제 도움을 받으려거든 제 요구부터 들어줘야 해요.”고은서는 희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비서에게 자신의 부탁을 말했다.육현석도 현장에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피
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도 어리둥절해졌다.만약 간단한 스케줄만 알려줬다면 이정도로 겁에 질려 있을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더 큰 일과 엮여 있는 건가?’아니나 다를까 육현석의 엄숙한 모습을 본 한 비서는 얼굴이 방금전보다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한 번 커피 가져다 드릴 때 곽 대표님한테 고은서 씨 친구분과 백유미 사이의 조사해보겠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그걸 백유미한테 알렸어요...”육현석은 그제야 곽승재가 자신더러 성아연과 백유미 사이에 관해 조사해보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러나 당시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두 사람은 몇 번 만나고 연락한 것 외에는 경제적 래왕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그 일로 백유미가 산장에서 곽승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약을 잘못 복용한 거라고 의심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로부터 백유미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고은서의 혐의를 씻어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육현석은 백유미가 고은서를 해치려거든 왜 고은서를 대신해 진상을 밝힌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그러니까 백유미가 한 비서를 통해 내가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그런 대책을 세웠다는 거야?’고은서도 문뜩 곽승재가 육현석한테 백유미와 성아연 두 사람 사이에 관해 조사하라고 시켰다면서 자신도 백유미를 찾아가 따졌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그런데 그녀는 당시 곽승재가 이 일을 얼버무리고 넘어가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었다.‘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나랑 곽승재 사이의 모순이 거의 다 백유미 때문에 생긴 거네.’백유미가 현재 정신병원에 갇혀있다고 한들 고은서는 아직도 생각하면 할 수록 공포감이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정말 악독한 여자야.’한 비서는 계속 자신이 했던 행위를 후회한다면서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다.육현석은 이마가 빨개진 한 비서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이익을 탐내는 동시에 그 대가도 따르는 법이야. 백유미한테 몰래 소식을 전달한 건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죽
육현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가 털썩하고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육 도련님, 저예요. 제발 경호우너을 부르지 말아 주세요.”“한 비서?”고은서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을 때 육현석은 그 여자를 알아 보았다.삼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GS그룹의 검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비서들처럼 자랑스럽고 우월한 면을 뽐내는 대신 공포에 질린 듯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대체 무슨 일인데 주차장에 숨어 있는 거야?”육현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그의 말을 들은 한 비서는 본능적으로 몸서리를 치면서 갑자기 그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육 도련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는데 용서를 빌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주차한 곳 뒤에는 나무들이 주지어 있었고 차들이 빼곡히 들어선 탓에 사람이 숨어있는 걸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한 비서는 무릎을 꿇은 채 끊임없이 육현석을 향해 사과했다.그녀는 육현석의 차를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이곳으로 오는 걸 알고 일부러 차 뒤에 숨어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이러지 말고 일어나서 말해.”“아니요. 그냥 꿇고 말하겠습니다.”한 비서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말했다.그녀는 방금전에 머리를 땅에 박으며 절을 한 탓에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랐고 공포 질린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면 일부러 보여주기 식으로 연기하려는 거야?”육현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니요. 저는 그저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한 비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사과하려거든 조용한 곳에 가서 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해.”육현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한 비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현석 씨, 일 봐요. 저는 혼자 차 불러서 가면 돼요.”“안 돼요. 고은서 씨 용서도 받아야 하니까 같이 가요.”육현석이 말을 꺼내기도
육현석의 관심사는 정말 유별나게 독특했다.고은서가 걱정하는 것이 육현석이 생각하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녀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생각이었다.‘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곽승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게 뻔해.’“삼촌 일 때문에 영향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곽 회장님께서 곽승재의 꼬투리를 잡을 만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요.”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육현석도 고국성의 일에 관해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곽현수 성격에 확실히 그럴만 하지.’“그날 삼촌 일이 승재 형 아버님이랑 연관 있다고 했잖아. 나중에 확인해 봤어?”육현석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곽현수는 애초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그러나 이걸 그대로 육현석에게 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고은서는 억지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인했다.“아직 확인해보지 못했어요.”“그럼 오늘 나랑 승재 형 찾으러 온 것도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야?”육현석이 무언 갈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그렇죠.”어이가 없었지만 고은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그후로 한참 동안 사무실에서 기다려 보았지만 곽승재는 나타나지 않았다.고은서는 육현석의 말을 듣고 곽승재한테 연락해 보았으나 여전히 그녀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은서는 이내 주민기한테 연락했다.얼마 후, 주민기가 전화를 받았다.“고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고은서는 주민기의 아주 공식적인 말투를 들으면서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주민시 씨, 곽승재 혹시 다쳐서 병원에 있는 건 아니죠?”주민기는 멈칫하다가 이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등을 다치긴 했으나 지금은 별다른 문제 없습니다.”‘그날 정말 다친 거였어? 그런데 왜 병원도 가지 않고 나한테 거짓말이라고 한 거지?’고은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났다.“곽승재 지금 어디 있죠?”주민기는 그녀의 물음을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답했다.“지금 GS그룹의 주주분을 만나러 와서
고은서는 육현석을 막았다.“그래도 곽승재 사무실인데 그냥 들어온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물건은 함부로 다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그러나 육현석은 괜찮다면서 손짓했다.“괜찮아. 우리가 낯선 사람도 아니고 설마 내가 승재 형 물건을 훔치겠어? 게다가 네 물건을 가지는 건데 뭐가 어때.”“...”고은서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육현석은 이미 사무실 책상 옆으로 걸어가더니 그곳에 있는 캐비닛을 열고 가지런히 접혀있는 회색 담요 하나를 꺼냈다.“계속 여기 있을 줄 알았다니까.”육현석은 이내 담요를 고은서한테 건네주었다.“은서야, 봐봐. 익숙하지 않아?”익숙하다고 느낀 고은서는 문뜩 자신이 예원 별장에 있을 때 귀비 의자에 깔고 발을 덮는데 썼던 담요라는 걸 발견했다.“이 담요가 왜 여기 있는 거죠?”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승재 형이 넣어둔 거겠지.”그러나 육현석은 이내 놀라 하며 물었다.“설마 네가 승재 형한테 준 건 아니지?”‘승재 형이 고은서가 준 담요까지 소장할 정도로 변태적인 사람이었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부인하려고 할 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예원 별장에 있을 때 이미숙이 한 번 소파에 있는 곽승재한테 관심을 표해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마침 곽승재의 도움을 받은 탓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담요 하나를 이미숙한테 건네주면서 그에게 덮어주라고 했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발을 놓는데 쓰던 낡은 담요를 아줌마가 이미 처리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곽승재 사무실에 있는 거야?’“진짜 형이 훔친 거야?”육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은서를 보면서 깜짝 놀라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어색해하며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부인했다.“그럼 네가 준 거네.”육현석이 이내 흥분해 하며 말했다.“은서야, 형이 이 담요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내가 한 번 우연하게 덮고 있었는데 형이 갑자기 화를 내면서 날 꾸짖기까지 했다니까.
육현석은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고은서가 회사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멀리서 그의 차가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고은서가 차에 오르자마자 육현석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은서야, 무슨 일 있었어? 승재 형이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그의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던 고은서는 방금전에 경찰과 했던 통화내용을 육현석한테 다 알려주었다.그도 듣자마자 약간 의아해했다.“갑자기 진짜 정신병 환자가 되었다고? 전에 갔을 땐 다 연기였잖아.”“전에는 연기지만 그사이에 정신병 환자가 될만한 일을 겪었을 수도 있잖아요.”고은서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신병원에 갇혀서 자유의 몸도 아닌 사람이 무슨 일을 겪겠어?”육현석이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래서 정신병원에 가서 백유미를 만나보려고 했는데 경찰 측에서 상황이 심각하다면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걸 피면하기 위해 특별 병실에 안배해 놓았다고 면회가 불가능하다고 하네요.”그 말을 들은 육현석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헛된 생각은 그만하고 승재 형 찾으러 가자. 승재 형이라면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백유미가 정말 전문가까지 속일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거든 곽승재도 그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곽승재의 생각을 한번 들어봐야겠어.’고은서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육현석과 함께 GS그룹으로 향했다.프론트 데스크 직원은 고은서를 알아보고 공손하게 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다가왔다.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약간 불편했던 고은서는 호칭을 바꿔 달라고 당부했다.“죄송하지만 현재 저랑 곽승재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 그냥 은서 씨라고 불러주세요.”프론트 데스크 직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뜻대로 고은서 씨라고 불렀다.그리고 이내 공손하게 물었다.“곽 대표님 찾으러 오신 거죠?”“네. 승재 형 찾으러 왔어요. 위에 있죠?”“요즘 바쁘셔서 지금 회사에 안 계세요. 찾으시려거든 직접 전화하시는 게 더 나을 것
유일 투자 은행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먼저 직원들과 함께 간단한 업무 회의를 열고 곽승재의 스케줄을 알아보기 위해 육현석한테 연락했다.“은서야, 마침 전화하려고 했는데.”육현석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승재 형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러는데 혹시 승재 형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게 있어?”정보를 캐내려고 전화했는데 도리어 정보를 알려주는 입장이 될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저도 잘 몰라요. 연락이 안 되나요?”고은서가 물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연락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주민기도 연락이 안 되어서 비서실에 전화 해보았는데 비서는 그저 곽승재가 바쁘다고만 했다고 말했다.“은서야, 혹시 승재 형이랑 싸웠어?”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 대신 스테인리스 철봉 공격을 막아준 그 날 자신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은 탓에 그가 약간 기분 나빠했던 일이 떠올랐다.‘내가 한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건가? 아니면 그날 진짜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또 그날 육현석이 곽승재한테 전화했을 때 전화 너머로부터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온 게 떠올랐다.‘그럼 그 여자는 곽승재가 다쳐서 마음 아파서 운 거야?’“은서야, 우리 승재 형 찾으러 같이 GS그룹으로 가보지 않으래?”평소 같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텐데 지금은 곽현수가 준 임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곽승재를 어떻게서든 만나야 했다.그러나 육현석의 의심을 받는 걸 피면하기 위해 그녀는 한참 동안 망설이는 척하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나 마침 볼 일이 있어서 유일 투자 은행 근처에 있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가방을 들고 내려가려고 할 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육현석이 까먹은 일이라도 있는가 해서 폰을 들고 확인해 보았는데 낯선 유선전화 번호였다.받아보니 다름 아닌 해성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상대방은 아주 예의 바르게 백유미가 거의 완치 되어서 전에 얘기했던 정신병 위장 사건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가를 파견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