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서자마자 이미숙이 달려왔다.“사모님, 외숙모께서 지금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계셔요. 저까지 내쫓으셨어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왜 갑자기 집에 찾아온 거지?’“은서 왔어?”단은숙이 인기척을 느끼고 주방에서 나왔다.“삼계탕 끓여놨어. 조금만 더 끓이면 돼. 아, 조카사위한테도 전화했어. 돌아오는 길인데 곧 도착할 거라고 했어.”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외숙모께서는 뭐 하러 오셨어요?”단은숙이 말했다.“애도, 참. 내가 너 어릴 때부터 친딸처럼 키웠는데 딸 집에 와서 뭐 하겠어. 당연히 딸 보러 왔지! 저번에 조카사위가 집에서 별로 밥을 먹지 않는다며? 직접 밥해주려고 왔어.”친딸은 무슨, 단은숙은 고은서를 구박만 했던 사람이었다.아마도 저번 FY 그룹 일을 포기하지 않았거나 고준석이 M•Q 관리팀을 바꾸겠다고 해서 소식을 엿들으려고 왔을 수 있었다.이때, 곽승재의 차 소리가 들려 이미숙이 문을 열어주었다.검은 정장을 입고 작은 캐리어를 들고있는 그는 훤칠한 키에 심상찮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으며 온 하루 힘들었는지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고은서를 쳐다보는 눈빛은 마치 먼저 인사를 건네주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두날 전 불쾌했던 일이 떠올라 못 본 척하고 2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조카사위, 출장 다녀오느라 힘들었지? 얼른 앉아서 쉬어!”단은숙이 대신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심마니한테 부탁해서 얻어온 산삼으로 삼계탕 끓여놨어. 면역력도 보충한다니까 이따 많이 먹어.”고은서는 뻘쭘하기만 했다.“외숙모, 손님이신데 앉아서 쉬세요. 주방일은 아줌마한테 맡기면 돼요.”“그럴 수 없지. 오랜만에 외숙모가 해주는 요리를 맛보는 건데 내가 직접 해줘야지! 아, 맞다. 은서야, 조카사위 물건은 방에 갖다 뒀어.”단은숙은 가르치는 말투로 말했다.“얘도 참. 외할아버지가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웠더니 성질만 나면 물건을 집어 던져. 다음부터 그러면 안 돼!”고은서는
곽승재는 입술만 깨물 뿐 고은서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평온하게 말했다.“예전에 네가 해주고 싶어 했잖아. 네 마음대로 하라는데 뭐가 잘못됐어?”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오빠 말대로 그건 예전 일이잖아. 오빠가 싫다고 했는데 나도 이제는 싫어. 그냥 화끈하게 이혼합의서에 사인이나 해!”“고은서, 정말 싫은 거 맞아? 그럼 왜 외숙모한테 내 물건을 이쪽 방으로 옮겨달라고 했어? 그리고 왜 자주 집에서 밥 안 먹는다고 했어?”고은서는 뻘쭘하기만 했다.외숙모가 이 말을 그대로 곽승재에게 전했다니!“내가 불러온 거 아니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고은서! 조카사위! 얼른 내려와! 밥이 다 됐어!”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1층에서 단은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곽승재에게 말했다.“나중에 얘기해. 이따 외숙모가 어떤 요구를 하든 절대 들어주지 마.”곽승재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힐끔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옷을 갈아입으려다 말고 1층으로 내려갔다.1층에서는 이미숙이 단은숙이 해놓은 요리를 주방에서 꺼내오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삼계탕, 전복 등 고급 요리가 많았다. 딱 봐도 돈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분명 부탁할 것이 있을 거라는 예감도 들었다.“가만히 서서 뭐 해. 조카사위는? 얼른 손 씻고 밥 먹으라고 해!”단은숙은 적반하장으로 이 집 주인 행세를 했다.고은서가 직접적으로 말했다.“외숙모. 다음부터 우리 집에 와서 요리하지 마세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줌마께서 다 해줘요.”단은숙은 고은서의 뜻을 알아차리고 꾸지람했다.“은서야, 내가 이러는 거 다 너를 위해 하는 거잖아. 난 네가 조카사위랑 가까워졌으면 해. 부부 사이가 돈독해지면 얼마나 좋아. 뭐 문제라도 있어? 왜 내가 오지랖을 떨고 있는 것처럼 말해?”고은서가 말했다.“함부로 저희 둘 사이의 일에 끼어들면 안 되죠!”고은서의 아이디어라고 곽승재가 오해했으니 말이다!단은숙은 미처 무슨 뜻인지 몰랐다.“내가 무슨
“우리가 뭐 인맥도 없고, 배경도 없는 작은 회사가 아닌데 왜 돈 벌 기회를 다른 사람한테 떠넘겨 줘야 해!”단은숙은 바로 곽승재에게 요구했다.“조카사위, 사실대로 말할게. 오늘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 외삼촌이 FY 그룹이랑 손잡고 싶어 하는데 그쪽에서 싫다고 해서 말이야. 조카사위가 중간에서 이어주면 안 될까?”“승재 오빠 바빠요. 저희 집안일을 신경 쓸 새 없으니까 부담 주지 마세요!”고은서가 냉랭하게 말했다.“은서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승재도 이제는 고씨 가문 사람인데 처가 좀 도와주면 안 돼? 이게 그렇게 부담될 일이야? 조카사위는 어떻게 생각해?”단은숙은 다시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표정이 차가운 고은서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외숙모, 이따 자료 남겨두고 가세요.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아이고, 고마워. 난 조카사위가 도와줄 줄 알았어.”단은숙은 기쁜 마음에 또 곽승재에게 삼계탕을 떠주었다.“조카사위, 많이 먹어. 외숙모만큼 삼계탕을 잘 끓이는 사람이 없어.”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밥을 다 먹고, 단은숙은 자료를 남겨두고 만족스럽게 이곳을 떠났다.고은서는 불쾌한 표정으로 곽승재를 째려보았다.“외숙모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고 했잖아.”“고씨 가문 사업이 나랑 엮이는 거 싫어?”곽승재가 되물었다.고은서는 더는 그에게 숨길 수 없어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우리 언젠간 이혼할 거잖아. 이제부터는 오빠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미리 적응해야지.”곽승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너한테는 내가 그렇게 냉혈 인간으로 보여?”고은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지난 생에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로 한 번도 고씨 가문을 보살피지 않았던 그였다.심지어 M•Q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발목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말이다.띠링띠링.마침 외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와서 2층으로 올라갔다.외숙모가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확인하러 전화한 것이다.“너희 삼촌이랑 상의했던 내용을 듣고 찾아간 모양이야.”외할아버지가
“이건 또 무슨 말이지?”‘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한 이불을 덮고 자!’곽승재는 고은서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일단 우린 아직 부부야. 같이 자도 합법적이라고. 그리고 나를 안방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이유가 아직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지?”고은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안방으로 들어오게 하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는 거야?”곽승재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할머니를 위해서라도 할머니 생신 전까지는 정상적인 부부처럼 지내봐. 그때까지도 너의 뜻이 그렇다면 내가 합의이혼 해줄게.”고은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쌍방 어르신의 동의 없이도?”“당연히 알리긴 해야지. 그때 가서 어르신들 반응을 감당할 수 있을지 봐야지.”고은서는 곽승재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쌍방 어르신들한테 이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어르신들이 동의하든 말든 그 반응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이혼합의서에 사인하겠다는 말이었다.고은서는 쌍방 어르신들의 뜻은 상관없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20날 정도는 조금만 버티면 바로 지나갔다.고은서가 흔쾌히 대답했다.“부부처럼 지내는 건 상관없는데 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 그리고 하기 싫은 거 강제로 시키지도 말고.”곽승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네가 먼저 꼬시면?”“그럴 일은 없어!”저번에 속옷을 던진 일이 생각나 고은서의 얼굴이 화끈해지고 말았다.“저번에는 침대에 있는 줄 몰랐다고!”곽승재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마른 몸매에 별로 관심이 없거든.”‘쳇! 100근도 안 되는 몸무게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고은서는 화가 났다.“약속 지키길 바래!”고은서가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가려고 하자 곽승재가 말했다.“나도 샤워하고 싶은데 잠옷 좀 골라줘.”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부부 사이에 남편한테 잠옷을 챙겨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곽승재가 태연하게 말했다.“몇 번이고 나한테 커플
고은서가 말했다.“부부 사이에도 냉전이라는 것이 있어. 우리가 지금 냉전 중인 거야. 오빠를 보고 싶지도 않아.”곽승재가 물었다.“우리가 무엇 때문에 냉전 중이지?”“기억을 잃었어? 며칠 전 복싱장 밖에서 누가 무례하게 내 친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곽승재가 피식 웃고 말았다.“내 마누라를 훔쳐보고 있는데 내가 왜 예의를 차려야 해?”“미친 거 아니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주인혁을 오해하는 것이 싫었다.“젊은 남자가 나 같은 유부녀를 왜 훔쳐봐!”곽승재가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아직도 그 사람 편을 드는 거야? 너보다 내가 남자를 더 잘 알거든?”고은서는 일그러진 곽승재의 표정을 보더니 무언가 생각했다.“다른 남자가 와이프를 훔쳐봐서 기분이 나빴어?”‘글쎄 왜 부부행세를 하자고 하는 줄 알았더니. 역시 남자는 소유욕이 강한 동물이야! 좋다고 따라다닐 때는 귀찮아하더니,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까 봐 불안한 거야. 참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야.’곽승재는 가소롭게 쳐다보는 고은서의 눈빛을 확인하고 냉랭하게 말했다.“난 그저 네가 자꾸만 난리를 피우는 것이 싫어 서로에게 조용할 기회를 줬을 뿐이야.”‘핑계도 대단해.’“그래. 서로 조용한 시간을 갖자고. 이제부터 나랑 말하지 마.”고은서는 곽승재를 등지고 소파에 누웠다.곽승재는 화를 억누르고 고은서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책을 읽기 시작했다.“불 꺼! 너무 밝아서 잠이 안 오잖아!”이제 두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 고은서의 짜증 가득한 말투가 들려왔다.곽승재는 결국 이를 꽉 깨문 채 책을 내려놓고 소등하고 작은 스탠드 등만 켜놨다.어두운 불빛 아래, 분위기가 차분해졌다.아직 시간이 이른지라 곽승재는 잠이 오지 않았다.고은서가 움직이지도 않길래 잠든 줄 알고 침대에서 내려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움츠린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안정적으로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잠든 것 같았다.잠든 그녀는 시끄러운 평소와는 달랐다.곽승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책과 핸드폰을 들고
다 씻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 곽승재는 자료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흰 셔츠를 입고있는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아침햇살이 그의 흠 잡을 데 없는 얼굴에 비쳐 표정마저 부드러워 보였다.어느 각도로 보든 고은서의 스타일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고은서는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야 정신을 차렸다.‘아무리 잘생겨봤자 싫은 짓만 골라 하잖아!’고은서는 차가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갔다.“어젯밤 오빠가 나를 침대로 옮겼어?”쨍그랑!이때 주방에서 젓가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깜짝 놀란 표정의 주민기가 보였다.주민기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젓가락을 주우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방으로 물러갔다.“사모님...”그러면서 주방에서 나오려는 이미숙을 말렸다.이미숙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왜 그러세요. 사모님께 아침 식사로 뭘 드실지 물어봐야 하는데!”주민기는 여전히 이미숙을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아줌마, 젓가락에 기름기가 묻어있어서 미끄러운 거 아니에요?”“분명 깨끗한데...”주민기와 이미숙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고은서는 자신이 한 말이 오해를 샀다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졌다.“내가 그랬어.”곽승재는 일부러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를 냈다.“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곽승재는 자료를 내려놓고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부부 사이에는 한잠 자면 화가 풀린다고 하잖아. 이제 냉전도 끝날 때가 된 것 같은데?”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이건 또 무슨 도리지?’고은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말했다.“나갈 준비나 해. 내일 GS 그룹 파티에 같이 참석해.”“미안한데 난 시간 없어.”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했다.판주 투자은행 매수를 축하하는 파티라 이사인 백유미가 나댈 거란 생각에 별로 가고싶지 않았다.“곽 사모님으로서 남편이랑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잖아.”곽승재는 은행 카드 두 장을
곽승재는 어느 정도 싫증 섞인 눈빛으로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씨 가문에서 귀하게 컸겠는데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해?”“돈을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돈이 있어야 자신감도 생기는 거지!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빠도 돈이 많으면서 맨날 GS 그룹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잖아. 뭐, 당연히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 재벌가는 일반인 세계를 모를 수도 있어.”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주방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주민기는 내심 부러웠다.‘사모님은 좋겠어. 이렇게나 많은 돈을 받고. 판주 투자은행 최고 보너스가 분명 2,000만 원이었는데 대표님께서 2억 원을 드렸어. 뭐, 어차피 대표님 돈이 사모님 돈이긴 하지만. 그저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흘러 들어갈 뿐이지. 사모님도 기분이 좋고, 돈이 다른 사람 주머니에 흘러 들어갈 일도 없고. 일거양득이네. 대표님은 역시 현명하셔.’“민기 씨, 언제까지 막고 있을 거예요? 저 이제 나가도 되죠?”이미숙이 급한 마음에 물었다.“사모님 아직 아침도 못 드셨는데.”곽승재와 고은서의 대화가 슬슬 마무리되자 주민기는 그제야 길을 비켰다.“아줌마께서도 힘드시면 며칠 쉬세요.”‘이러면 대표님이 사모님께서 해주시는 요리를 드실 수 있잖아?’이미숙은 순식간에 긴장하기 시작했다.“민기 씨,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대표님께서 저를 해고하래요?”“아니요, 오해하지 마세요.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이미숙은 주민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아침 식사 후, 곽승재와 주민기는 회사로 향했고, 고은서는 쇼핑하러 갈 준비를 했다. 이참에 할머니 선물도 알아보려고 했다.1층에서는 이미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아줌마, 무슨 일 있으세요?”“사모님, 아까 민기 씨가 저보고 며칠 쉬라고 하던데... 혹시 제가 무슨 잘못한 거 있나 해서요.”고은서가 위로했다.“아니에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이미숙은 그래도 불안했다.“그런데 어제저녁 대표님한테 약을 드렸더니
이때, 며칠 전 성북구 쇼핑물에서 범가온한테 명품 시계를 사지 말았어야 한다고 꾸지람을 듣던 남자가 떠올랐다.생김새며, 말투를 보니 범가온의 아들인 것 같았다.그때 범가온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여자 집안이 돈 많는 집안이에요. 제가 꾸미지 않으면 어떻게 꼬시겠어요.”‘설마 그 타깃이 은혜는 아니겠지? 이제 재밌어지려고 하네.’범가온의 조건을 보면 아들에게 이런 명품을 사줄 리가 없었다.딱 봐도 백유미가 도와준 것으로 보였다.백유미가 정신병원은 물론 주위 사람들한테 손을 뻗을 줄 몰았다.“재벌가로 시집간 사촌 언니예요. 이 차는 형부 거고요.”조은혜가 자랑하는 식으로 말했다.“전 세계에서 얼마 없는 메르세데스를 저희 형부가 가지고 있어요. 돈 있어도 못사는 거 알죠? 그 정도의 신분이 받쳐줘야 하거든요.”남자는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더니 다시 표정 관리하기 시작했다.“은혜 씨, 형부라는 분 그렇게 대단해요? 언제 저희한테도 소개해 줘요!”이때 다른 남자가 말했다.곽승재의 쌀쌀한 표정이 떠올랐는지 조은혜는 흔쾌히 대답하지 못했다.“엄청 바쁘신 분이라 나중에 기회 되면 소개해 줄게요. 노래방 가기로 했잖아요. 얼른 가요!”남자가 탐욕스럽게 메르세데스를 쳐다보더니 말했다.“몇 명 안 되는데 사촌 언니랑 함께 노는 거 어때요?”“됐어요. 그러면 무슨 재미에요. 저희끼리 놀아요.”조은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남자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똑같은 젊은이인데 같이 놀면 더 재미있을지도 몰라요!”조은혜는 여태까지 말이 없던 고은서를 보더니 무성의로 물었다.“갈래?”저번 생에는 조은혜가 조건이 괜찮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 상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나중에 정신병원에서 간호사의 대화를 통해 조은혜가 가정폭력을 당한 것도 모자라 남편이 다른 남자한테 보내 야동까지 찍었다고 했다. 삼촌은 조은혜를 그 집에서 빼내기 위해 전 재산을 털었다고 했다.원해 하향세를 타고 있던 M•Q는 그 이후로 다시는 살
고은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 어머니도 쉬운 사람이 아닌 데 가면 혼나기만 하는 거 아니야? 가지 말고 온 선생님께 전화해서 상황 물어보고 돈 좀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박지연이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도 본인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내가 안 가면 분명 이 일을 빌미로 병원에 찾아와서 매일 소란을 피울 거야. 조용히 살려면 내가 가야 해.”화가 난 고은서가 답했다.“스스로 일을 벌여 놓고 왜 네게 화내는 거야? 정말 예전 버릇 그대로네! 이전처럼 네가 고분고분하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잖아. 같이 가자. 난 그 여자가 또 소란을 피운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 네 편이 하나라도 있어야지.”“됐어. 네가 가면 또 무슨 모진 말을 할지 몰라. 그런 여자 때문에 네가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박지연이 거절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아. 온 선생님 앞에서 상황을 명확히 설명할 거야. 그래도 계속 억지를 부리면 나도 더는 참지 않을 거야.”“은서야, 너는 돌아가. 내가 같이 갈게.”육현석이 나섰다.“백화점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나한테도 책임이 있어. 그런 만큼 병문안 가서 어떤 속셈인지 묻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제대로 확인해야지. 그래야 마음이 편해.”육현석이 타당한 이유를 덧붙였다.육현석이 동행하면 박지연이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온 선생님에게도 육현석을 보여주면 지연이가 더 이상 연연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릴 수 있겠지. 일거양득이겠어.’고은서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그럼 잘됐네. 두 사람이 같이 가. 난 외삼촌 선물부터 사야겠어.”박지연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고은서가 떠난 뒤 박지연은 육현석의 차에 올랐다.운전기사가 운전하고 두 사람은 뒷좌석에 앉았다.“오늘은 정말 폐를 끼쳤네. 미안해.”박지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순히 쇼핑하러 나왔을 뿐인데 운 없게도 조수연을 우연히 만나 육현석까지 휘말리게 했어.’육현석이 웃으며 답했다.“별일도 아닌데 뭐. 우
조수연의 말이 떨어지자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모두가 박지연과 육현석을 바라보았다.“불륜이라뇨! 지연이는 이미 당신 아들이랑 이혼했잖아요. 새 연애를 시작하는 게 무슨 죄라도 되나요?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조금 전 유혜린이 당신 아들에게 깊은 감정을 품어서 아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더니 다른 사람이 지연이한테 관심을 가졌다고 불륜이라고 단정하나요? 이중잣대 아니에요?”주위 사람들은 다시 조수연을 쳐다보며 그녀가 변명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누가 이중잣대란 거야!”조수연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박지연은 승준이랑 이혼하기도 전에 이 남자와 엮였어. 저 남자는 처음부터 지연이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우리 승준이야 순진해서 지연이 말에 넘어갔겠지만...”조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현석의 강렬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육현석의 외모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싸늘한 눈빛은 조수연을 움찔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육현석의 시선에 조수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와 동시에 조수연은 박지연이 이혼 전날 했던 말을 떠올렸다.“저를 모욕하면 저도 이제 더 이상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자기 남편과 아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떠올린 조수연은 그들에게 피해가 갈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내오는 시선에 조수연은 굴복하기 싫어서 아예 머리를 감싸며 울기 시작했다.“아이고. 머리가 너무 아프네. 다리도 아프고... 이러다가 걷지도 못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애먼 사람을 괴롭히네. 경찰은 안 불렀어? 신고할 거야!”이러한 상황에 나서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유혜린은 조수연을 달래며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대표님.”그 순간 정장을 입은 몇몇 회사 임원들이 다가왔다.그들은 육현석에게 공손히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처리할까요?”“우선 이분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세요. 관련된 CCTV와 증인들을 최대한 빠르게 확보해 경찰 조사에 협조하도록 하세요.”“알겠습니다.”육현석의 말을
박지연이 온승준한테 전화를 걸려고 하는 순간 조수연이 갑자기 그녀에게 덮쳐들었다.박지연은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피했다.“아악!”조수연은 비명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더니 하행하는 에스컬레이터 위로 넘어졌다.퉁퉁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수연은 그대로 아래층으로 떨어졌다.“어머님!”유혜린은 소리를 지르면서 조수연을 향해 달려갔다.큰 소란 소리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박지연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박지연은 습관적으로 폰을 고은서한테 건네주고 달려 내려가 조수연의 상태를 확인했다.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고은서는 멍해 있었다.그녀는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조수연은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허리와 다리를 다쳤는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유혜린은 그녀의 상태를 검사하고 있었고 박지연은 그녀의 이마에 있는 상처를 간단히 처치해주고 있었다.그러나 조수연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박지연한테 살인범이라면서 신고하겠다고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고은서는 조수연의 상태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렇게 소리 지르는 거 봐서는 내상을 입거나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네.’그녀는 고민 끝에 온승준한테 전화 쳤다.다행히 수술 일정이 없어서인지 그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은서 씨?”“네, 저예요.”고은서는 자초지종을 온승준한테 알려주면서 그를 재촉했다.“지금 119에 전화 했는데 구급차가 곧 도착할 거예요. 얼른 가보세요.”전화를 끊자마자 박지연의 폰이 또 울렸다.발신자는 다름 아닌 육현석이었다.조수연을 보살피는 박지연 대신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다.“육현석 씨, 지연이랑 저한테 지금 급한 일이 발생해서 지연한테 나중에 연락하라고 할게요.”“무슨 일 있어요? 지금 어디예요?”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육현석은 바짝 긴장되었다.자초지종을 다 알려주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고은서는 육현석에게 쇼핑몰 이름을 알려주면서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다.“금방 갈
박지연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어머니 조수연과 그의 첫사랑 유혜린이었다.조수연은 유혜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서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마치 친모녀 같았다.두 사람은 박지연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건지 조수연은 표정이 거의 썩어 있었고 유혜린은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심지어 그녀는 먼저 박지연을 향해 인사했다.“지연 씨, 여기서 만나네요. 친구랑 쇼핑 중인가요?”박지연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고은서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가자.”“이혼을 협박 수단으로 삼는 여자를 누가 좋아해.”조수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어떤 사람은 진짜 존재하는 것 자체가 화를 불러온다니까. 승준이가 그렇게 취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혜린이가 제때 가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밤새 보살피지 않았더라면 큰일 났을 거야.”박지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옆에 있던 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조수연 씨, 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르게 해야죠. 그날 회식은 지연이 부문 회식이었거든요. 당신이 아들이 기어코 고집부리며 따라간 거예요. 술도 스스로 마신 건데 지연이랑 무슨 상관이에요!”그러나 조수연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비아냥거렸다.“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면서 우리를 가해자로 만드는 게 좋은 사람이야? 승준이가 착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바보처럼 저 애를 쫓아다녀서 그렇지.”“지연이가 없는 말을 했어요?”고은서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연이한테 잘해준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지연이가 온씨 집안에서 언제 한 번 편하게 지낸 적이 있어요?”“승준이한테 시집온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친구로 남편이랑 남편 가족을 잘 챙기라고 타이르기는커녕 승준이랑 이혼하라고 시키고 정말 친구를 사귀어도 하필 이런 애를 사귀고 난리야. 이게 다 네 탓이야!”“나만 욕하면 됐지 왜 은서까지 끌어들이고 난리세요!”박지연이 더는 참지 못하고 호통쳤다.“당신 아들한테 시집간 걸
고은서가 신고한 덕분에 백유미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은 그녀를 찾아갔고 정신질환 감정도 다시 하게 되었다.하지만 백유미가 진짜 정신질환이라도 있는 듯 아주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게다가 몸에 상처도 다 낫지 않은 데다가 정서 기복이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조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백유미가 이 상황에서 순순히 조사에 협조할 리가 없었으니까 말이다.소식을 전해 들은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경찰 측에서 백유미가 정신질환이 없다는 증거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 압력을 가하겠다고 얘기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곽현수가 증명을 내놓을 수 있다는 건 이미 백유미가 꼬리를 밟히지 않게끔 깨끗하게 처리했다는 걸 의미한다.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경찰은 T국에 온 사건 처리 결과가 명확하다는 공함과 백유미 정신질환 진단서를 받았다.경찰 측도 자연스레 T국에서 보내온 각 증거 자료들을 접수했다.백유미는 귀국해서도 형사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고 대신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라고 한다.범가온도 이틀 전에 귀국했는데 백씨 집안에서 마찬가지로 정신질환 진단서가 가짜라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바람에 백유미와 똑같은 정신병원에 갇힐 거라고 한다.해 질 무렵, 고은서는 민시후로부터 백유미가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튀어나온 범가온의 발에 여러 대 차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먼저 예상하고 간병인 여러 명을 불러 자신을 보호하게 했지만 범가온의 힘이 하도 세서 제대로 막지 못한다 데가 하마터면 간병인들까지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한다.“여러 명이 범가온 한 사람을 못 막았다고?”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범가온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엄연히 따지면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여러 명을 제치고 백유미를 발로 찼다고?’“특별한 상황에서 사람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한 법.”민시후가 말했다.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자꾸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아무튼 범가온이
곽승연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그녀는 혼자 앉아서 멍을 때리면서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거부했다.고은서는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꽃다운 나이에 단 한 번도 활발하게 실컷 놀아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이상하게 여기고 가여워하는 눈빛을 마주해야 한다는 게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졌다.전에 곽승연이 그렸던 수련꽃을 떠올린 고은서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하인에게 수련꽃 몇 송이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곽승연은 수련꽃을 쥔 채 피곤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연정 몸에 기대어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진 서연정은 가슴 아파하며 그녀를 꼭 끌어안아 줬다.고은서는 더는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곽승재는 문 쪽에 서서 서연정 품에 기대어 있는 곽승연을 빤히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아주 담담해 보였다.서연정은 곽승재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해외로 나간 후로 거의 해성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고 따라서 곽승재도 단 한 번도 서연정과 화목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곽승재의 창백한 얼굴과 씁쓸한 표정을 본 고은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위안했다.“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아. 당신 어머니는 그저 당신이랑 가까워지는 법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곽승재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상관없어. 난 한 번도 이런 일을 마음에 둔 적이 없으니까.”‘상관없을 리가 없잖아.’그러나 고은서는 더는 그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할머니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난 먼저 가볼게.”곽승재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가여워하는 고은서의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원래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녀의 눈빛을 보자마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날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한다고 해도 여전히 날 관심해 주는구나. 난 왜 이토록 착한 여자를 악랄하다고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을까?’...한 주일 후.민시후는 이미 완쾌되었지만 별로 퇴원하
민시후는 그저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을 뿐이다.고은서는 웃으면서 곽씨 가문 본가에 간다면서 저녁이 되어서 시간이 된다면서 말했다.민시후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했다.“나랑 저녁 먹어줄 사람 없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고은서는 웃으면서 저녁 시간에 맞춰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콜록콜록.”바로 이때, 곽승재가 사레에 들린 듯 갑자기 기침 소리를 냈다.아니나 다를까 민시후는 기침 소리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곽승재도 차에 같이 있는 거야?”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미안, 갑자기 목이 간질거려서.”“곽승재도 본가에 간다고 해서 같이 가는 것뿐이야.”고은서가 설명했다.“곽승재, GS그룹이 기사 한 명 못 내올 정도로 망해가는 거야? 내가 빌려줄게. 제발 고은서한테서 멀리 떨어져.”민시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먼저 끊을게. 일 끝나고 다시 연락할게.”영상통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곽승재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적당히 하지 그래?”“목이 정말 간질거려서 그랬던 거야. 다음부터 주의할게.”그는 말로만 사과할 뿐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고은서는 더는 말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피부는 매우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고 속눈썹도 아주 길었으며 눈망울도 아주 맑아 보였다.차창 너머로 비춰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그녀의 얼굴의 미세한 솜털까지 눈에 들어왔다.곽승재는 이 순간이 너무 고요하고 좋았다. 마치 그녀와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그러나 이는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현재의 고은서는 그를 만날 때마다 차가운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은서야,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있는 거야?”곽승재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원망
고개를 든 박지연의 눈에 들어온 건 곽승재였다.고은서도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평소와 같이 검은 맞춤 제작 정장에 곤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 포스터에서 걸어 나온 캐릭터처럼 잘생겨 보였다.박지연의 말을 들었는지 그의 눈빛이 약간 차갑게 느껴졌는데 얼굴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그는 두 사람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지연은 T국 병원에서 곽승재를 찾아가 호통친 이후로 그와 만난 적이 없었다.그런데 하필 그의 뒷담화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은서야, 나 금방 회진 돌고 올게.”박지연은 어색해하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또 왜 찾아온 거야?”고은서가 곽승재를 쳐다보며 물었다.“어머니한테서 들었어. 오늘 승연이 보러 본가로 간다며. 나도 마침 본가에 들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기사가 일이 있어서 데리러 못 온대. 그래서 너랑 같이 가려고.”고은서가 거절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앞서 말을 보태었다.“고은서, 나도 심하게 다쳤어. 그런데 넌 한 번도 날 보러 온 적이 없고 또 나한테 아프냐고 물은 적도 없잖아. 지금은 그저 네 차에 앉아서 본가로 같이 가겠다는데 이것마저도 거절할 생각이야?”고은서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곽승재가 총상을 입은 게 확실히 그녀 탓이 맞았다.그리고 총상 때문인지 요즘 따라 많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기사가 못 온다는 게 핑계일 가능성이 컸지만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박지연에게 간다고 인사한 후 곽승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박지연의 동료들을 만났다.“은서 씨, 일 보러 가시는 거예요?”동료 한 명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동료들은 고은서와 곽승재 사이에 관해 조금 알고 있었는데 요즘 따라 고은서가 민시후를 더 돌보는 바람에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짙어졌다.“나오다가 만나서 같이 가는 것뿐이에요.”고은서는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먼저 엘리베
“그럼 조금 이따 집 오는 거지?”온승준이 흥분해 하며 물었다.“응.”박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온승준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고집부리지 않고 유혜린 따라 차에 올랐다.“지연아, 아까 그 여자 온 선생님 좋아하는 거 맞지? 전화 받자마자 달려온 데다가 엄청 걱정하는 것 같던데.”온승준이 가자마자 간호사 한 명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아마도.”박지연은 아주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답했다.“온 선생님은 널 좋아하고 아까 그 여자는 온 선생님을 좋아하고. 이거 삼각연애 아니야?”옆에 있던 간호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지연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답했다.“이게 왜 삼각연애에요? 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거든요.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은 그냥 없던 일로 치세요.”동료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전혀 없던 일로 칠 생각이 없었다.그중 몇몇 동료는 온승준이 취해서 박지연을 안고 여보라고 부르는 장면을 촬영해서 채팅 그룹에 올렸다.그 덕분에 병원 내의 많은 사람이 온승준이 박지연한테 구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러나 당사자 두 명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특히 온승준은 회식 이튿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상적으로 출근했다.인턴을 통해 동영상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예전의 차도남 모습 그대로였다.이튿날 점심, 텅 빈 간호사실.고은서도 박지연 폰에서 그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취중 진담이라는 말도 있잖아. 온 닥터가 너랑 집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거 봐서는 진짜 너랑 재혼할 생각인 것 같은데.”“뭔 소리야. 온승준은 그저 도우미처럼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이러는 것뿐이야.”박지연이 이내 부인했다.“유혜린 아직도 온승준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전화를 받자마자 온승준한테 달려간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어제 온승준이 취했다며? 유혜린이 과연 가만있었을까?”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연을 보며 물었다.“몰라. 나랑 상관없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