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어느 정도 싫증 섞인 눈빛으로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씨 가문에서 귀하게 컸겠는데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해?”“돈을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돈이 있어야 자신감도 생기는 거지!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빠도 돈이 많으면서 맨날 GS 그룹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잖아. 뭐, 당연히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 재벌가는 일반인 세계를 모를 수도 있어.”곽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주방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주민기는 내심 부러웠다.‘사모님은 좋겠어. 이렇게나 많은 돈을 받고. 판주 투자은행 최고 보너스가 분명 2,000만 원이었는데 대표님께서 2억 원을 드렸어. 뭐, 어차피 대표님 돈이 사모님 돈이긴 하지만. 그저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흘러 들어갈 뿐이지. 사모님도 기분이 좋고, 돈이 다른 사람 주머니에 흘러 들어갈 일도 없고. 일거양득이네. 대표님은 역시 현명하셔.’“민기 씨, 언제까지 막고 있을 거예요? 저 이제 나가도 되죠?”이미숙이 급한 마음에 물었다.“사모님 아직 아침도 못 드셨는데.”곽승재와 고은서의 대화가 슬슬 마무리되자 주민기는 그제야 길을 비켰다.“아줌마께서도 힘드시면 며칠 쉬세요.”‘이러면 대표님이 사모님께서 해주시는 요리를 드실 수 있잖아?’이미숙은 순식간에 긴장하기 시작했다.“민기 씨,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대표님께서 저를 해고하래요?”“아니요, 오해하지 마세요.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이미숙은 주민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아침 식사 후, 곽승재와 주민기는 회사로 향했고, 고은서는 쇼핑하러 갈 준비를 했다. 이참에 할머니 선물도 알아보려고 했다.1층에서는 이미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아줌마, 무슨 일 있으세요?”“사모님, 아까 민기 씨가 저보고 며칠 쉬라고 하던데... 혹시 제가 무슨 잘못한 거 있나 해서요.”고은서가 위로했다.“아니에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이미숙은 그래도 불안했다.“그런데 어제저녁 대표님한테 약을 드렸더니
이때, 며칠 전 성북구 쇼핑물에서 범가온한테 명품 시계를 사지 말았어야 한다고 꾸지람을 듣던 남자가 떠올랐다.생김새며, 말투를 보니 범가온의 아들인 것 같았다.그때 범가온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여자 집안이 돈 많는 집안이에요. 제가 꾸미지 않으면 어떻게 꼬시겠어요.”‘설마 그 타깃이 은혜는 아니겠지? 이제 재밌어지려고 하네.’범가온의 조건을 보면 아들에게 이런 명품을 사줄 리가 없었다.딱 봐도 백유미가 도와준 것으로 보였다.백유미가 정신병원은 물론 주위 사람들한테 손을 뻗을 줄 몰았다.“재벌가로 시집간 사촌 언니예요. 이 차는 형부 거고요.”조은혜가 자랑하는 식으로 말했다.“전 세계에서 얼마 없는 메르세데스를 저희 형부가 가지고 있어요. 돈 있어도 못사는 거 알죠? 그 정도의 신분이 받쳐줘야 하거든요.”남자는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더니 다시 표정 관리하기 시작했다.“은혜 씨, 형부라는 분 그렇게 대단해요? 언제 저희한테도 소개해 줘요!”이때 다른 남자가 말했다.곽승재의 쌀쌀한 표정이 떠올랐는지 조은혜는 흔쾌히 대답하지 못했다.“엄청 바쁘신 분이라 나중에 기회 되면 소개해 줄게요. 노래방 가기로 했잖아요. 얼른 가요!”남자가 탐욕스럽게 메르세데스를 쳐다보더니 말했다.“몇 명 안 되는데 사촌 언니랑 함께 노는 거 어때요?”“됐어요. 그러면 무슨 재미에요. 저희끼리 놀아요.”조은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남자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똑같은 젊은이인데 같이 놀면 더 재미있을지도 몰라요!”조은혜는 여태까지 말이 없던 고은서를 보더니 무성의로 물었다.“갈래?”저번 생에는 조은혜가 조건이 괜찮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 상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나중에 정신병원에서 간호사의 대화를 통해 조은혜가 가정폭력을 당한 것도 모자라 남편이 다른 남자한테 보내 야동까지 찍었다고 했다. 삼촌은 조은혜를 그 집에서 빼내기 위해 전 재산을 털었다고 했다.원해 하향세를 타고 있던 M•Q는 그 이후로 다시는 살
한 여자가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반인은 못사는 핸드백인데. VIP만 살 수 있는 건데!”높은 목소리에 원지훈도 이쪽을 쳐다보았다.“돈 많으니까 사는 거죠!”조은혜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재벌가에 시집간 것도 모자라 결혼할 때 할아버지가 혼수로 200억 원이나 줬는데.”고은서는 돈 많은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때 웨이터 한 명이 들어오자 곽승재가 준 블랙카드를 꺼냈다.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웨이터한테 블랙카드를 꺼냈다.“이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오늘은 제가 사는 거거든요.”원지훈이 다가와서 말렸다.“안 돼요. 오늘은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은혜 언니인데 너희들 돈을 쓸 순 없잖아.”고은서는 마치 장난감을 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블랙카드를 꺼냈다.원지훈은 계속 말리면 눈치 없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동작을 멈췄다.“고마워요.”고은서는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네. 즐겁게들 놀아.”조은혜는 그녀가 꼴보기 싫어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고은서가 밖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원지훈이 쫓아 나왔다.“누나, 혹시 연락처 좀 추가해도 될까요?”고은서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원지훈을 쳐다보았다.이에 원지훈이 바쁘게 설명했다.“다른 뜻은 없어요. 은혜 씨 언니면 은혜 씨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요. 은혜 씨랑 빨리 친해지고 싶은데...”고은서가 태연하게 물었다.“은혜가 마음에 들어?”원지훈이 사실대로 인정했다.“네. 은혜 씨랑 서로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많이 좋아해요. 한번 노력해 보려고요.”고은서가 고개를 쳐들면서 말했다.“우리 집안은 아무나 들이지 않아. 우리 외삼촌한테 자식은 은혜 하나뿐이야. 딸을 엄청 아끼시는 분이라 아무한테나 못 줘.”“알아요. 근데 그래도 조건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은혜 씨를 쫓아다니는 거예요. 저희 아빠가 고향에서 커다란 농산품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조건이
고은서는 핸드폰을 거두었다.아까 자랑하는 척 블랙카드를 꺼낸 이유는 바로 원지훈에게 경제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탐욕스러운 그는 절대 고은서와 친해질 기회를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러면 조은혜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그리고 원지훈은 딱 봐도 백유미 라인인데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쇼핑몰에서 최신상 드레스, 액세서리와 금을 샀다.예전에는 금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금의 가치를 알아버렸다.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기도 좋고 가치도 있고. 돈이 필요할 때는 팔 수도 있고.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없었다.쇼핑이 끝나고, 곽승재한테서 연락이 왔다.고은서는 발신인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전화를 별로 받지도 않던 사람이 주동적으로 전화를 하다니!“무슨 일인데? 설마 금 몇 덩어리를 샀다고 나를 탓할 건 아니지? 아침에 분명 마음대로 쇼핑하라고 했잖아.”사레 걸린 곽승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외할아버지께서 벼루 좋아하시잖아. 하나 좋은 거 얻어놨거든. 내가 지금 바빠서 그러는데 네가 할아버지께 갖다드려.”곽승재가 외할아버지의 취향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알았어.”고은서가 흔쾌히 대답했다.“지금 쇼핑몰에 있는 거야?”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곽승재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응. 인제 가려고.”곽승재가 또 물었다.“무슨 물건을 샀는데?”“옷이랑 액세서리랑 금이랑.”“저번에도 이런 가게에 들렀어?”“아니. 저번에는 지연이가 온 의사 선생님께 옷을 선물하고 싶대서 남성 옷 전문점을 들렀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은서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왜 묻는데? 사고 싶은 거 있어?”곽승재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알아서 사. 난 회의가 있어서.”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옷을 사줘도 입지 않는데 돈 낭비할 바에 사지 않는 것이 나아.’고은서는 쇼핑한 물건들을 들고 GS 그룹으로 향했다.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했다.고은서는 갑자기
‘왜 바쁜 줄 알았더니, 이러고 있느라고 바쁜 거였네. 업무가 바쁜 와중에도 일을 찾아서 하다니.’“은서 씨.”백유미가 먼저 고은서를 발견하고 인사했다.그러고는 눈치껏 곽승재에게 이렇게 말했다.“승재야, 다른 일 없으면 먼저 판주 투자은행으로 가볼게.”“응.”백유미가 떠나고, 곽승재는 고은서의 텅 빈 두 손을 쳐다보았다. 마치 왜 자기 물건은 사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듯했다.고은서는 모른 척하면서 물었다.“벼루는?”전화할 때는 괜찮더니 갑자기 말투가 바뀐 고은서의 모습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떠난 백유미가 생각나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유미는 내일 파티 관련해서 보고하러 온 것뿐이야...”“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고은서가 곽승재의 말을 끊었다.“줄 거면 빨리 줘. 나도 바쁘니까.”침묵을 지키던 곽승재가 서랍에서 벼루가 담긴 선물 박스를 꺼냈다.“회의 취소하고 같이 외할아버지한테 다녀올까?”“안 그래도 돼.”고은서는 벼루를 받아쥐고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떠났다.‘이 이혼, 하고야 말겠어! 내가 왜 대충 살아야 하는데? 오빠 말고 다른 남자를 찾지 못할 정도로 내가 별로인 것도 아니고.’육현석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고은서를 마주치고 인사를 할까 말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가, 고은서가 차가운 얼굴로 옆을 쓱 지나가는 바람에 머쓱해서 코를 만졌다.‘왜 갑자기 안하무인이 된 거지?’육현석은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곽승재의 표정도 안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형, 은서 씨가 또 화를 돋우고 갔어?”곽승재가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은서 씨? 네가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야? 버릇도 없이.”육현석은 할 말을 잃었다.‘계속 이렇게 불러도 뭐라고 하지 않더니.’하지만 연애 경험이 많은 윤현석은 단번에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은서 씨가 좋아져서 이런 호칭까지도 신경 쓰이는 거지.’그래서 눈치껏 호칭을 이렇게 정리했다.“형, 아까 형수님이랑 마주쳤는데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둘이 싸웠어?”
‘늦었으면 늦었지. 내가 왜 화를 풀어줘야 하는데?’곽승재는 육현석의 충고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계획서는 완성했어? 지금 회의실에 가서 브리핑할 수 있을 정도야?”“...”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육현석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형, 좀 봐주면 안 돼?”곽승재의 태도는 단호하기만 했다.“안 돼.”윤현석이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형, 형수님한테서 받은 화를 나한테 풀면 안 되지!”곽승재가 째려보면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할 거면 꺼져.”육현석은 바로 입을 닫았다....고은서는 외할아버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곽승재가 준비한 벼루를 선물했다.외할아버지는 선물을 보자마자 미소가 활짝 폈다.“승재 안목이 괜찮네. 이런 고급 벼루는 보기 힘들어. 내가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 은서야, 너도 한번 볼래?”“아니요.”고은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한테 선물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가지러 가지도 않았다.“할아버지, 저 작업실에 가서 향초를 좀 만들게요.”저번에 할머니한테 염주 팔찌만 선물해서 다른 선물도 드리고 싶었다.곽승재가 외할아버지한테 벼루를 선물하고 싶다고 할 때부터 할머니한테 잠이 잘 오는 향초를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고은서는 늘 집에서 향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준석은 습관 된 지 오래였다.그는 벼루를 감상하면서 말했다.“그래, 가봐.”마당 제일 끝에 있는 작업실은 공간이 넓고 조용했다. 이곳은 엄마가 살아생전 가장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은서는 어릴 때부터 향에 민감한 엄마를 닮아 향초 제작을 배우곤 했다.전문적인 퍼퓨머가 되려면 엄격한 향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엄마는 고은서가 고생할까 봐 그저 취미 삼아 만들어 보라고 했다.외할아버지 빼고는 누구도 그녀의 제대로 된 실력을 몰랐다.향초를 만들다 보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그냥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어떤 향은 오랫동안 정제해야 할 정도로 과정이 번거로웠다.“매일 청소해서 방이 깨끗해. 그냥 쓰면 돼. 온 오후 힘들었는데 얼른 밥이나 먹어.”고은
“아, 맞다. 할아버지, 은혜가 외국에 가고 싶어 하던데. 외삼촌한테 유학 보내자고 말해보는 거 어때요?”고은서는 오전에 조은혜를 만났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지금 성적이 안 좋은데. 환경을 바꾸면 성적이 좋아질지 어떻게 알아요?”조은혜가 외국에 나가면 원지훈이 더는 따라다니지 않을 것이고, 이러면 전생의 비극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고준석이 말했다.“외숙모가 예전에 하나뿐인 딸을 외국에 보내기 싫다고 말한 적 있어. 지금 이미 은혜한테 짝을 찾아주는 것 같던데?”조은혜를 끔찍이 생각하는 단은숙은 절대 고준석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산책을 마치고, 고은서는 고준석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고 그가 잠에 들어서야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그러고 또 몇 시간 뒤, 고은서는 할머니의 취향에 맞춰 베티베르, 베르가모트 등 방향유로 수면에 좋은 향초를 완성했다.저번에 주민기 엄마한테 선물한 향초가 효과 있다고 해서 또 만든 것이다.고은서는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고은서는 기지를 쭉 폈다.‘역시 어릴때부터 사용한 침대가 제일 편하네.’고은서는 이혼하고 집에서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차려주는 밥만 먹고, 고준석과 함께하는 시간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고은서는 세수를 마치고 머리가 부스스한 상태로 1층으로 내려갔다.이때 마당에서 고준석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거지?’밖으로 나가자, 고준석이 곽승재와 주민기에게 태극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정장 차림의 곽승재와 주민기가 진지한 표정으로 서툴게 태극권을 연습하는 모습은 웃기기만 했다.“풉!”고은서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째려보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주민기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사모님.”“민기 씨, 제가 향초 좀 만들었는데 이따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 사모님.”“은서야, 일어났어? 승재도 온 지
고은서는 곽승재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질문도 이상하다고 느껴져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내가 왜 화났다고 생각해?”“그럼 왜 집에 안 들어왔는데?”‘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서로 죽고 못사는 부부처럼 말하네. 자기가 결혼생활 1년동안 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생각하지 않고.’고은서는 의미 없는 말을 하기 싫어 그를 째려보고는 식탁 앞에 가서 앉았다.고은서가 컵에 우유를 따라 먹으려고 하자 곽승재가 말했다.“나도 줘.”“손 뒀다 뭐 하는데?”곽승재는 이를 꽉 깨물고 말았다.“예전에는 맨날 우유며 빵이며 선물하더니, 그때는 착한 척했던 거야?”‘염치도 없이 예전 일을 꺼내?’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왜, 난 맨날 오빠만 따라다녀야 해? 이제는 지쳤어.”살기가 가득한 말에 곽승재는 움찔하고 말았다.“고은서, 아침부터 왜 화를 내고 그래!”“오빠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화도 안 날 것 같은데?”“...”곽승재는 화를 참아보기로 했다.“집에 안 들어오는 건 그렇다 치고, 왜 문자는 답장하지 않는 건데?”고은서는 핸드폰을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다.“문자는 왜 보냈는데?”곽승재가 애써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어제는 유미 아버님 생신이었어. 그래서 유미한테 영양제를 사서 보내드렸을 뿐이야.”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백씨 가문을 좋아하고 있네. 백유미 생일을 함께 보내더니, 아버님 생신에도 선물을 드려?’“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데?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신경 쓰이지 않았으면 태도가 바뀔 일도 없었겠지.”곽승재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고은서,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불만이 있으면 말하라고. 이런 의미 없는 짓이나 하지 말고.”“그래도 저녁에 다른 여자 집에서 샤워하는 오빠보다는 낫잖아!”고은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두 번째 언급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내가 언제 남의 집에서 샤워했다고 그래?”‘아직도 인정 안 하네!’고은서는 핸드폰에 저장
조수연의 불쾌한 표정을 마주하고도 온승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혜린이 적절한 타이밍에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어머님, 시간이 꽤 늦었네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내일은 굳이 오지 않아도 돼. 어머니를 위해 간병인 구할 거야.”온승준이 바로 말했다.유혜린은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조수연은 몹시 불쾌해하며 말했다.“승준아, 너 도대체 뭐 하는 거니! 혜린이 또 뭘 잘못했다고 그래!”온승준이 싸늘하게 답했다.“예전에 지연이가 밤낮으로 어머니를 돌봤을 때는 한 번도 고맙다는 말 하지 않으셨잖아요.”“뭘 고마워해야 해? 아픈 시어머니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조수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손에 든 건 뭐야? 어디서 났어?”말을 마친 조수연은 온승준 손에 들려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 불현듯 깨달았다.“박지연이 다녀갔니? 뭐야, 겨우 볼품없는 물건 가져와 놓고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거야?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가버린 건 양심에 찔려서 그런 거 아니야?”“제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너 정말 그 애를 지나치게 감싸고 도는구나.”조수연이 화를 냈다.온승준은 조수연과 다투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아버지, 어머니. 오늘 밤 일은 이대로 끝낼 거예요. 저는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을 거고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철회할 생각이에요.”온승준은 두 사람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다시는 집 비밀번호 타인에게 알려주는 일 없도록 하세요. 집 비밀번호 교체하겠습니다. 제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을 겁니다.”“너... 너... 지금 내가 혜린이에게 비밀번호 알려준 거에 불만을 품고 이러는 거야?”화가 난 조수연은 상처가 아파졌다.“박지연 때문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신 너를 혜린이가 착하게도 집에 데려다준 건데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으면 집은 어떻게 들어가? 그리고 혜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박지연이 말했다.“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가볼게.”“아직 할 말 있어!”온승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그날 내가 술에 취했던 날 밤, 차 안에서 잠들어 버렸어. 유 닥터가 운전기사에게 날 부축해 집으로 올려보내라고 했어. 나는 유 닥터가 돌아가지 않은 줄도 몰랐어. 그저 침대 옆에 앉아 밤을 보냈을 뿐 우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온승준이 드물게 상황을 설명했다.박지연은 지금 이 상황이 우스웠다.“왜 나한테 설명하는 거야? 우리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나랑 무슨 상관이야?”온승준은 박지연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끝까지 하고 싶던 말을 이어갔다.“지연아, 네가 우리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혹시라도 널 찾으러 가면 폐를 끼칠까 봐 요즘 너를 찾지 않았어. 하지만 이 일은 꼭 말해주고 싶었어.”온승준은 평소 잘 하지 않던 긴말을 이어가며 다소 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온승준, 이미 이혼한 사이에 무슨 해명이야? 이혼 하기 전에는 이런 얘기 하지도 않았잖아. 그때는 내가 오해할지 걱정도 하지 않았지?”온승준이 솔직히 답했다.“내가 그런 부분에 소홀했어. 난 우리가 꽤 잘 지낸다고 생각했어. 네가 그렇게 많은 걸 참고 있었는지는 몰랐어.”“몰랐다고?”박지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따지듯 말했다.“당신 어머니가 유혜린을 집에 부르고 날 불러 요리시켰던 날 내가 손을 데었을 때 당신은 날 병원에 데려다주지도 않고 내 상태를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런데 우리 사이가 원만했다고? 내가 정말 서운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한 거야? 온승준, 모든 걸 둔감했던 탓이라고 돌리지 마. 넌 내가 알아서 나을 거로 생각했겠지. 그래서 나에게 시간 쓰는 걸 낭비라고 여긴 거야.”온승준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지연아, 그런 게 아니라 그때 내가 병원에 같이 가겠다고 고집
박지연과 육현석은 병원에서 먼저 의사로부터 조수연의 상태를 확인했다.조수연은 이마에 타박상을 입었고 팔꿈치와 몸 여러 곳에 찰과상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허리와 다리로 다양한 정도의 골절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했다.다행히 에스컬레이터 높이가 높지 않았고 조수연이 머리부터 떨어지지 않아 내상을 입지 않았다.상태를 확인한 후 병실로 병문안 가려던 박지연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온승준을 발견했다.캐주얼한 옷을 입은 온승준은 큰 키에 곧은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늘 무표정하던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피곤함마저 느껴졌다.육현석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부하가 준비한 선물 상자를 온승준에게 건넸다.“온승준 씨, 오늘 밤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의 치료비와 관련 비용은 백화점에서 책임지겠습니다. 혹시 어머님께서 다른 요구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아야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니 백화점 측에서도 즉각 대처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야.”박지연이 덧붙였다.조수연은 자신을 귀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어서 돈을 뜯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풀이 삼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가능성은 있었다.박지연의 말을 듣고도 온승준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육현석의 선물도 받지 않고 입을 열었다.“육현석 씨, 경찰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오늘 밤은 저희 어머니가 잘못한 일이니 여러분과는 무관합니다. 이 얘기를 하려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 그 어떤 배상도 책임도 필요 없습니다.”“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져야 할 책임은 반드시 지겠습니다. 경찰 쪽은 제 변호사가 처리 중이고 이후 문제도 변호사를 통해 협의하도록 하시죠. 저희는 여사님을 방문하여 직접 사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온승준이 완곡히 거절했다.“괜찮습니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깨어나시면 다녀가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온승준의 말을 듣고 박지연은 조수연이 사실 잠들지 않았음을 바로 알아차렸다.‘오
그러나 박지연은 실패했다.그 후로 박지연은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두려워졌다.하지만 지금 육현석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었다.그는 그녀의 모든 걱정을 고려하고 해결책까지 내놓았다.심지어 그녀가 성공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하기까지 했다.이런 진심 어린 마음에 어떤 여자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박지연은 드물게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육현석, 나는 네가 이렇게까지 좋아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육현석이 낮게 웃으며 답했다.“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널 좋아한 건 내 선택이야. 넌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고 다른 사람이랑 널 비교할 필요도 없어. 지연아, 너는 이미 그 자체로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한 번의 실패한 결혼 때문에 너 자신을 의심하지 마.”육현석의 말에 박지연은 다시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감동하게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육현석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여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답게 능숙한 말솜씨로 현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지연은 그저 그에게 감사했다.박지연도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육현석, 고마워. 네 말처럼 나는 방금 실패한 결혼에서 벗어난 상태라 이렇게 빨리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용기가 없어. 네가 한 말들은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나 때문에 너를 바꾸지는 마. 사업하기 싫으면 굳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성공적인 사업가라는 이미지가 남자의 매력을 더해주는 건 맞지만 내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네가 무리하면 오히려 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육현석이 웃으며 답했다.“사실 꼭 너 때문에 변하려는 건 아니야. 우리 아버지도 이제 곧 환갑이잖아.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가업을 물려받길 바라셨어. 그동안은 좀 더 놀고 싶어서 미뤘던 건데 이제는 놀
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육현석을 바라보았다.육현석은 그녀가 묻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입을 열었다.“사실 오래전부터 너한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어. 막 이혼해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건 알아. 그래서 내 감정을 마음 깊숙이 숨긴다고 숨겼어. 네가 내 고백에 놀라 멀어질까 봐 두려웠거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아.”육현석은 단호한 눈빛으로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지연아, 좋아해.”이미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육현석에게 직접 들으니 박지연은 여전히 놀라웠다.조건 좋은 육현석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명문가의 아가씨들도 많았다.‘조건 좋은 아가씨들은 뒤로하고 나를 좋아한다고? 그것도 오래전부터?’“조건이 좋으니 더 좋은 여자가 어울린다는 말로 나를 거절하지는 마. 나도 많은 여자를 만나봤고 새로운 사람에게 끌린 적도 있어. 하지만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너에 대한 내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야. 나는 낙관적이고 자신감 있는 네 모습, 밝고 활기찬 네 모습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좋아. 당연히 너의 그 착한 마음도 좋아.”육현석은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듯 솔직하게 말했다.“나는 왜 그 사람들이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돼. 네가 말하지 않아도 가끔 너에게서 느껴지는 슬픔이 네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줘. 그런 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박지연은 그의 진심 어린 말에 계속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날 좋아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날 보며 마음 아파하며까지 아껴줄 줄은 몰랐네. 육현석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에게 호감을 품었어.’“육현석, 우리...”“지연아, 나 거절하지 말아줘. 나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육현석은 부드럽게 박지연이 하려던 말을 제지했다.“네가 사업적으로 성공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그런 남자가 너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
고은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 어머니도 쉬운 사람이 아닌 데 가면 혼나기만 하는 거 아니야? 가지 말고 온 선생님께 전화해서 상황 물어보고 돈 좀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박지연이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도 본인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내가 안 가면 분명 이 일을 빌미로 병원에 찾아와서 매일 소란을 피울 거야. 조용히 살려면 내가 가야 해.”화가 난 고은서가 답했다.“스스로 일을 벌여 놓고 왜 네게 화내는 거야? 정말 예전 버릇 그대로네! 이전처럼 네가 고분고분하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잖아. 같이 가자. 난 그 여자가 또 소란을 피운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 네 편이 하나라도 있어야지.”“됐어. 네가 가면 또 무슨 모진 말을 할지 몰라. 그런 여자 때문에 네가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박지연이 거절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아. 온 선생님 앞에서 상황을 명확히 설명할 거야. 그래도 계속 억지를 부리면 나도 더는 참지 않을 거야.”“은서야, 너는 돌아가. 내가 같이 갈게.”육현석이 나섰다.“백화점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나한테도 책임이 있어. 그런 만큼 병문안 가서 어떤 속셈인지 묻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제대로 확인해야지. 그래야 마음이 편해.”육현석이 타당한 이유를 덧붙였다.육현석이 동행하면 박지연이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온 선생님에게도 육현석을 보여주면 지연이가 더 이상 연연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릴 수 있겠지. 일거양득이겠어.’고은서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그럼 잘됐네. 두 사람이 같이 가. 난 외삼촌 선물부터 사야겠어.”박지연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고은서가 떠난 뒤 박지연은 육현석의 차에 올랐다.운전기사가 운전하고 두 사람은 뒷좌석에 앉았다.“오늘은 정말 폐를 끼쳤네. 미안해.”박지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순히 쇼핑하러 나왔을 뿐인데 운 없게도 조수연을 우연히 만나 육현석까지 휘말리게 했어.’육현석이 웃으며 답했다.“별일도 아닌데 뭐. 우
조수연의 말이 떨어지자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모두가 박지연과 육현석을 바라보았다.“불륜이라뇨! 지연이는 이미 당신 아들이랑 이혼했잖아요. 새 연애를 시작하는 게 무슨 죄라도 되나요?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조금 전 유혜린이 당신 아들에게 깊은 감정을 품어서 아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더니 다른 사람이 지연이한테 관심을 가졌다고 불륜이라고 단정하나요? 이중잣대 아니에요?”주위 사람들은 다시 조수연을 쳐다보며 그녀가 변명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누가 이중잣대란 거야!”조수연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박지연은 승준이랑 이혼하기도 전에 이 남자와 엮였어. 저 남자는 처음부터 지연이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우리 승준이야 순진해서 지연이 말에 넘어갔겠지만...”조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현석의 강렬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육현석의 외모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싸늘한 눈빛은 조수연을 움찔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육현석의 시선에 조수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와 동시에 조수연은 박지연이 이혼 전날 했던 말을 떠올렸다.“저를 모욕하면 저도 이제 더 이상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자기 남편과 아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떠올린 조수연은 그들에게 피해가 갈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내오는 시선에 조수연은 굴복하기 싫어서 아예 머리를 감싸며 울기 시작했다.“아이고. 머리가 너무 아프네. 다리도 아프고... 이러다가 걷지도 못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애먼 사람을 괴롭히네. 경찰은 안 불렀어? 신고할 거야!”이러한 상황에 나서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유혜린은 조수연을 달래며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대표님.”그 순간 정장을 입은 몇몇 회사 임원들이 다가왔다.그들은 육현석에게 공손히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처리할까요?”“우선 이분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세요. 관련된 CCTV와 증인들을 최대한 빠르게 확보해 경찰 조사에 협조하도록 하세요.”“알겠습니다.”육현석의 말을
박지연이 온승준한테 전화를 걸려고 하는 순간 조수연이 갑자기 그녀에게 덮쳐들었다.박지연은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피했다.“아악!”조수연은 비명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더니 하행하는 에스컬레이터 위로 넘어졌다.퉁퉁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수연은 그대로 아래층으로 떨어졌다.“어머님!”유혜린은 소리를 지르면서 조수연을 향해 달려갔다.큰 소란 소리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박지연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박지연은 습관적으로 폰을 고은서한테 건네주고 달려 내려가 조수연의 상태를 확인했다.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고은서는 멍해 있었다.그녀는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조수연은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허리와 다리를 다쳤는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유혜린은 그녀의 상태를 검사하고 있었고 박지연은 그녀의 이마에 있는 상처를 간단히 처치해주고 있었다.그러나 조수연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박지연한테 살인범이라면서 신고하겠다고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고은서는 조수연의 상태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렇게 소리 지르는 거 봐서는 내상을 입거나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네.’그녀는 고민 끝에 온승준한테 전화 쳤다.다행히 수술 일정이 없어서인지 그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은서 씨?”“네, 저예요.”고은서는 자초지종을 온승준한테 알려주면서 그를 재촉했다.“지금 119에 전화 했는데 구급차가 곧 도착할 거예요. 얼른 가보세요.”전화를 끊자마자 박지연의 폰이 또 울렸다.발신자는 다름 아닌 육현석이었다.조수연을 보살피는 박지연 대신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다.“육현석 씨, 지연이랑 저한테 지금 급한 일이 발생해서 지연한테 나중에 연락하라고 할게요.”“무슨 일 있어요? 지금 어디예요?”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육현석은 바짝 긴장되었다.자초지종을 다 알려주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고은서는 육현석에게 쇼핑몰 이름을 알려주면서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다.“금방 갈
박지연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어머니 조수연과 그의 첫사랑 유혜린이었다.조수연은 유혜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서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마치 친모녀 같았다.두 사람은 박지연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건지 조수연은 표정이 거의 썩어 있었고 유혜린은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심지어 그녀는 먼저 박지연을 향해 인사했다.“지연 씨, 여기서 만나네요. 친구랑 쇼핑 중인가요?”박지연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고은서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가자.”“이혼을 협박 수단으로 삼는 여자를 누가 좋아해.”조수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어떤 사람은 진짜 존재하는 것 자체가 화를 불러온다니까. 승준이가 그렇게 취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혜린이가 제때 가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밤새 보살피지 않았더라면 큰일 났을 거야.”박지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옆에 있던 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조수연 씨, 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르게 해야죠. 그날 회식은 지연이 부문 회식이었거든요. 당신이 아들이 기어코 고집부리며 따라간 거예요. 술도 스스로 마신 건데 지연이랑 무슨 상관이에요!”그러나 조수연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비아냥거렸다.“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면서 우리를 가해자로 만드는 게 좋은 사람이야? 승준이가 착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바보처럼 저 애를 쫓아다녀서 그렇지.”“지연이가 없는 말을 했어요?”고은서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연이한테 잘해준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지연이가 온씨 집안에서 언제 한 번 편하게 지낸 적이 있어요?”“승준이한테 시집온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친구로 남편이랑 남편 가족을 잘 챙기라고 타이르기는커녕 승준이랑 이혼하라고 시키고 정말 친구를 사귀어도 하필 이런 애를 사귀고 난리야. 이게 다 네 탓이야!”“나만 욕하면 됐지 왜 은서까지 끌어들이고 난리세요!”박지연이 더는 참지 못하고 호통쳤다.“당신 아들한테 시집간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