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며칠 전 성북구 쇼핑물에서 범가온한테 명품 시계를 사지 말았어야 한다고 꾸지람을 듣던 남자가 떠올랐다.생김새며, 말투를 보니 범가온의 아들인 것 같았다.그때 범가온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여자 집안이 돈 많는 집안이에요. 제가 꾸미지 않으면 어떻게 꼬시겠어요.”‘설마 그 타깃이 은혜는 아니겠지? 이제 재밌어지려고 하네.’범가온의 조건을 보면 아들에게 이런 명품을 사줄 리가 없었다.딱 봐도 백유미가 도와준 것으로 보였다.백유미가 정신병원은 물론 주위 사람들한테 손을 뻗을 줄 몰았다.“재벌가로 시집간 사촌 언니예요. 이 차는 형부 거고요.”조은혜가 자랑하는 식으로 말했다.“전 세계에서 얼마 없는 메르세데스를 저희 형부가 가지고 있어요. 돈 있어도 못사는 거 알죠? 그 정도의 신분이 받쳐줘야 하거든요.”남자는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더니 다시 표정 관리하기 시작했다.“은혜 씨, 형부라는 분 그렇게 대단해요? 언제 저희한테도 소개해 줘요!”이때 다른 남자가 말했다.곽승재의 쌀쌀한 표정이 떠올랐는지 조은혜는 흔쾌히 대답하지 못했다.“엄청 바쁘신 분이라 나중에 기회 되면 소개해 줄게요. 노래방 가기로 했잖아요. 얼른 가요!”남자가 탐욕스럽게 메르세데스를 쳐다보더니 말했다.“몇 명 안 되는데 사촌 언니랑 함께 노는 거 어때요?”“됐어요. 그러면 무슨 재미에요. 저희끼리 놀아요.”조은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남자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똑같은 젊은이인데 같이 놀면 더 재미있을지도 몰라요!”조은혜는 여태까지 말이 없던 고은서를 보더니 무성의로 물었다.“갈래?”저번 생에는 조은혜가 조건이 괜찮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 상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나중에 정신병원에서 간호사의 대화를 통해 조은혜가 가정폭력을 당한 것도 모자라 남편이 다른 남자한테 보내 야동까지 찍었다고 했다. 삼촌은 조은혜를 그 집에서 빼내기 위해 전 재산을 털었다고 했다.원해 하향세를 타고 있던 M•Q는 그 이후로 다시는 살
한 여자가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반인은 못사는 핸드백인데. VIP만 살 수 있는 건데!”높은 목소리에 원지훈도 이쪽을 쳐다보았다.“돈 많으니까 사는 거죠!”조은혜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재벌가에 시집간 것도 모자라 결혼할 때 할아버지가 혼수로 200억 원이나 줬는데.”고은서는 돈 많은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때 웨이터 한 명이 들어오자 곽승재가 준 블랙카드를 꺼냈다.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웨이터한테 블랙카드를 꺼냈다.“이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오늘은 제가 사는 거거든요.”원지훈이 다가와서 말렸다.“안 돼요. 오늘은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은혜 언니인데 너희들 돈을 쓸 순 없잖아.”고은서는 마치 장난감을 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블랙카드를 꺼냈다.원지훈은 계속 말리면 눈치 없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동작을 멈췄다.“고마워요.”고은서는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네. 즐겁게들 놀아.”조은혜는 그녀가 꼴보기 싫어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고은서가 밖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원지훈이 쫓아 나왔다.“누나, 혹시 연락처 좀 추가해도 될까요?”고은서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원지훈을 쳐다보았다.이에 원지훈이 바쁘게 설명했다.“다른 뜻은 없어요. 은혜 씨 언니면 은혜 씨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요. 은혜 씨랑 빨리 친해지고 싶은데...”고은서가 태연하게 물었다.“은혜가 마음에 들어?”원지훈이 사실대로 인정했다.“네. 은혜 씨랑 서로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많이 좋아해요. 한번 노력해 보려고요.”고은서가 고개를 쳐들면서 말했다.“우리 집안은 아무나 들이지 않아. 우리 외삼촌한테 자식은 은혜 하나뿐이야. 딸을 엄청 아끼시는 분이라 아무한테나 못 줘.”“알아요. 근데 그래도 조건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은혜 씨를 쫓아다니는 거예요. 저희 아빠가 고향에서 커다란 농산품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조건이
고은서는 핸드폰을 거두었다.아까 자랑하는 척 블랙카드를 꺼낸 이유는 바로 원지훈에게 경제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탐욕스러운 그는 절대 고은서와 친해질 기회를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러면 조은혜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그리고 원지훈은 딱 봐도 백유미 라인인데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쇼핑몰에서 최신상 드레스, 액세서리와 금을 샀다.예전에는 금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금의 가치를 알아버렸다.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기도 좋고 가치도 있고. 돈이 필요할 때는 팔 수도 있고.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없었다.쇼핑이 끝나고, 곽승재한테서 연락이 왔다.고은서는 발신인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전화를 별로 받지도 않던 사람이 주동적으로 전화를 하다니!“무슨 일인데? 설마 금 몇 덩어리를 샀다고 나를 탓할 건 아니지? 아침에 분명 마음대로 쇼핑하라고 했잖아.”사레 걸린 곽승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외할아버지께서 벼루 좋아하시잖아. 하나 좋은 거 얻어놨거든. 내가 지금 바빠서 그러는데 네가 할아버지께 갖다드려.”곽승재가 외할아버지의 취향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알았어.”고은서가 흔쾌히 대답했다.“지금 쇼핑몰에 있는 거야?”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곽승재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응. 인제 가려고.”곽승재가 또 물었다.“무슨 물건을 샀는데?”“옷이랑 액세서리랑 금이랑.”“저번에도 이런 가게에 들렀어?”“아니. 저번에는 지연이가 온 의사 선생님께 옷을 선물하고 싶대서 남성 옷 전문점을 들렀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은서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왜 묻는데? 사고 싶은 거 있어?”곽승재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알아서 사. 난 회의가 있어서.”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옷을 사줘도 입지 않는데 돈 낭비할 바에 사지 않는 것이 나아.’고은서는 쇼핑한 물건들을 들고 GS 그룹으로 향했다.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했다.고은서는 갑자기
‘왜 바쁜 줄 알았더니, 이러고 있느라고 바쁜 거였네. 업무가 바쁜 와중에도 일을 찾아서 하다니.’“은서 씨.”백유미가 먼저 고은서를 발견하고 인사했다.그러고는 눈치껏 곽승재에게 이렇게 말했다.“승재야, 다른 일 없으면 먼저 판주 투자은행으로 가볼게.”“응.”백유미가 떠나고, 곽승재는 고은서의 텅 빈 두 손을 쳐다보았다. 마치 왜 자기 물건은 사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듯했다.고은서는 모른 척하면서 물었다.“벼루는?”전화할 때는 괜찮더니 갑자기 말투가 바뀐 고은서의 모습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떠난 백유미가 생각나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유미는 내일 파티 관련해서 보고하러 온 것뿐이야...”“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고은서가 곽승재의 말을 끊었다.“줄 거면 빨리 줘. 나도 바쁘니까.”침묵을 지키던 곽승재가 서랍에서 벼루가 담긴 선물 박스를 꺼냈다.“회의 취소하고 같이 외할아버지한테 다녀올까?”“안 그래도 돼.”고은서는 벼루를 받아쥐고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떠났다.‘이 이혼, 하고야 말겠어! 내가 왜 대충 살아야 하는데? 오빠 말고 다른 남자를 찾지 못할 정도로 내가 별로인 것도 아니고.’육현석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고은서를 마주치고 인사를 할까 말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가, 고은서가 차가운 얼굴로 옆을 쓱 지나가는 바람에 머쓱해서 코를 만졌다.‘왜 갑자기 안하무인이 된 거지?’육현석은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곽승재의 표정도 안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형, 은서 씨가 또 화를 돋우고 갔어?”곽승재가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은서 씨? 네가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야? 버릇도 없이.”육현석은 할 말을 잃었다.‘계속 이렇게 불러도 뭐라고 하지 않더니.’하지만 연애 경험이 많은 윤현석은 단번에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은서 씨가 좋아져서 이런 호칭까지도 신경 쓰이는 거지.’그래서 눈치껏 호칭을 이렇게 정리했다.“형, 아까 형수님이랑 마주쳤는데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둘이 싸웠어?”
‘늦었으면 늦었지. 내가 왜 화를 풀어줘야 하는데?’곽승재는 육현석의 충고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계획서는 완성했어? 지금 회의실에 가서 브리핑할 수 있을 정도야?”“...”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육현석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형, 좀 봐주면 안 돼?”곽승재의 태도는 단호하기만 했다.“안 돼.”윤현석이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형, 형수님한테서 받은 화를 나한테 풀면 안 되지!”곽승재가 째려보면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할 거면 꺼져.”육현석은 바로 입을 닫았다....고은서는 외할아버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곽승재가 준비한 벼루를 선물했다.외할아버지는 선물을 보자마자 미소가 활짝 폈다.“승재 안목이 괜찮네. 이런 고급 벼루는 보기 힘들어. 내가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 은서야, 너도 한번 볼래?”“아니요.”고은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한테 선물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가지러 가지도 않았다.“할아버지, 저 작업실에 가서 향초를 좀 만들게요.”저번에 할머니한테 염주 팔찌만 선물해서 다른 선물도 드리고 싶었다.곽승재가 외할아버지한테 벼루를 선물하고 싶다고 할 때부터 할머니한테 잠이 잘 오는 향초를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고은서는 늘 집에서 향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준석은 습관 된 지 오래였다.그는 벼루를 감상하면서 말했다.“그래, 가봐.”마당 제일 끝에 있는 작업실은 공간이 넓고 조용했다. 이곳은 엄마가 살아생전 가장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은서는 어릴 때부터 향에 민감한 엄마를 닮아 향초 제작을 배우곤 했다.전문적인 퍼퓨머가 되려면 엄격한 향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엄마는 고은서가 고생할까 봐 그저 취미 삼아 만들어 보라고 했다.외할아버지 빼고는 누구도 그녀의 제대로 된 실력을 몰랐다.향초를 만들다 보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그냥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어떤 향은 오랫동안 정제해야 할 정도로 과정이 번거로웠다.“매일 청소해서 방이 깨끗해. 그냥 쓰면 돼. 온 오후 힘들었는데 얼른 밥이나 먹어.”고은
“아, 맞다. 할아버지, 은혜가 외국에 가고 싶어 하던데. 외삼촌한테 유학 보내자고 말해보는 거 어때요?”고은서는 오전에 조은혜를 만났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지금 성적이 안 좋은데. 환경을 바꾸면 성적이 좋아질지 어떻게 알아요?”조은혜가 외국에 나가면 원지훈이 더는 따라다니지 않을 것이고, 이러면 전생의 비극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고준석이 말했다.“외숙모가 예전에 하나뿐인 딸을 외국에 보내기 싫다고 말한 적 있어. 지금 이미 은혜한테 짝을 찾아주는 것 같던데?”조은혜를 끔찍이 생각하는 단은숙은 절대 고준석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산책을 마치고, 고은서는 고준석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고 그가 잠에 들어서야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그러고 또 몇 시간 뒤, 고은서는 할머니의 취향에 맞춰 베티베르, 베르가모트 등 방향유로 수면에 좋은 향초를 완성했다.저번에 주민기 엄마한테 선물한 향초가 효과 있다고 해서 또 만든 것이다.고은서는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고은서는 기지를 쭉 폈다.‘역시 어릴때부터 사용한 침대가 제일 편하네.’고은서는 이혼하고 집에서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차려주는 밥만 먹고, 고준석과 함께하는 시간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고은서는 세수를 마치고 머리가 부스스한 상태로 1층으로 내려갔다.이때 마당에서 고준석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거지?’밖으로 나가자, 고준석이 곽승재와 주민기에게 태극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정장 차림의 곽승재와 주민기가 진지한 표정으로 서툴게 태극권을 연습하는 모습은 웃기기만 했다.“풉!”고은서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째려보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주민기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사모님.”“민기 씨, 제가 향초 좀 만들었는데 이따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 사모님.”“은서야, 일어났어? 승재도 온 지
고은서는 곽승재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질문도 이상하다고 느껴져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내가 왜 화났다고 생각해?”“그럼 왜 집에 안 들어왔는데?”‘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서로 죽고 못사는 부부처럼 말하네. 자기가 결혼생활 1년동안 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생각하지 않고.’고은서는 의미 없는 말을 하기 싫어 그를 째려보고는 식탁 앞에 가서 앉았다.고은서가 컵에 우유를 따라 먹으려고 하자 곽승재가 말했다.“나도 줘.”“손 뒀다 뭐 하는데?”곽승재는 이를 꽉 깨물고 말았다.“예전에는 맨날 우유며 빵이며 선물하더니, 그때는 착한 척했던 거야?”‘염치도 없이 예전 일을 꺼내?’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왜, 난 맨날 오빠만 따라다녀야 해? 이제는 지쳤어.”살기가 가득한 말에 곽승재는 움찔하고 말았다.“고은서, 아침부터 왜 화를 내고 그래!”“오빠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화도 안 날 것 같은데?”“...”곽승재는 화를 참아보기로 했다.“집에 안 들어오는 건 그렇다 치고, 왜 문자는 답장하지 않는 건데?”고은서는 핸드폰을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다.“문자는 왜 보냈는데?”곽승재가 애써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어제는 유미 아버님 생신이었어. 그래서 유미한테 영양제를 사서 보내드렸을 뿐이야.”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백씨 가문을 좋아하고 있네. 백유미 생일을 함께 보내더니, 아버님 생신에도 선물을 드려?’“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데?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신경 쓰이지 않았으면 태도가 바뀔 일도 없었겠지.”곽승재가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고은서,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불만이 있으면 말하라고. 이런 의미 없는 짓이나 하지 말고.”“그래도 저녁에 다른 여자 집에서 샤워하는 오빠보다는 낫잖아!”고은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두 번째 언급에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내가 언제 남의 집에서 샤워했다고 그래?”‘아직도 인정 안 하네!’고은서는 핸드폰에 저장
곽승재는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은 후 마침 전화가 와서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아무렇지 않게 소파 위에 올려놓은 셔츠가 백유미한테 찍힐 줄 몰랐고, 더욱이 이 사진이 고은서의 손에 들어갈 줄도 몰랐다.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이 사진, 유미가 보내줬어?”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누가 보내줬든 이 셔츠 오빠 거 맞냐고.”곽승재는 대답 대신 고은서의 앞에서 바로 백유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백유미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승재야,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곽승재는 백유미에게 사진을 보내주면서 물었다.“설명해 봐. 이 사진, 어떻게 된 건지.”백유미는 물론 고은서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 몰랐다.전화기 너머의 백유미는 사진을 보고 멈칫하더니 그제야 그날 일을 떠올렸다.“이거 내가 SNS에 올렸다가 삭제한 사진이잖아. 요리 솜씨 자랑한다고 맨날 음식사진을 올리고 있잖아.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지웠었어. 승재야, 이 사진을 왜 저장한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왜 내 셔츠까지 함께 찍은 건데?”“그래?”백유미는 그제야 자세히 확인했다.“정말이네. 승재야, 혹시 은서 씨가 오해한 거야?”곽승재가 직접적으로 말했다.“내가 너의 집에서 샤워하고 잔줄 알잖아.”백유미는 곽승재 옆에 있는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은서 씨,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오해에요.”백유미는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은서 씨, 그래도 믿지 못하겠으면 CCTV 영상을 보여드릴게요.”곽승재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 고은서는 백유미의 비웃음 가득한 눈빛을 읽고 말았다.고은서는 피식 웃더니 곽승재의 넥타이를 잡아끌어 입술에 키스했다.향긋함과 부드러운 촉감에 곽승재는 멈칫하고 말았다.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그 역시 고개 숙여 키스를 마저 했다.핸드폰이 걸리적거렸는지 곽승재는 테이블 위에 뿌리치고 고은서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계속해서 키스했다.하지만 허리를 꽉 끌어안는 순간 고
조수연이 온범준을 뿌리치며 말했다.“나는 신경 쓰지 마. 아들이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걸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재결합을 원하는 거잖아. 내가 빌면 되지. 내가 무릎...”비록 작은 골목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수연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박지연은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조수연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계속해서 온승준과 재혼해달라고 애원했다.슬프게 우는 조수연은 초췌해 보였고 휠체어에 앉아 있기까지 하니 정말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약자처럼 보였다.육현석은 말로만 경고하며 말릴 뿐 손을 댈 수도 없었다.“아버지, 어머니.”박지연과 육현석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사람들 속에서 온승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승준은 예전처럼 아무 표정 없이 그저 무심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돌아가세요.”“승준아, 엄마 지금 지연이한테 사과하고 있어. 해외 가지 않으면 안 될까? 두 사람 재혼하는 거 동의할게. 앞으로도 너희 일에 간섭하지 않을게.”조수연은 박지연을 놓고 온승준을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다.주위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려 하자 육현석은 급히 손을 들어 박지연의 얼굴을 가리며 보호했다.온승준은 담담한 말투로 박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소란 피워서 미안해. 가도 돼.”박지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육현석과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육현석의 차에 오르고 나서야 박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수연의 소동 덕분에 박지연은 외출하거나 쇼핑할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피곤하다고 말하며 일찍 집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육현석도 반대하지 않고 그녀를 라이트문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차 안에서 육현석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조용히 운전만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이트문 아파트에 도착했다.“육현석, 아까는 미안해. 온 선생님 부모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 나 때문에 너까지 휘말리게 했네.”집에 가기 전 박지연이 육현석에게 사과했다.“네 잘못도 아
박지연이 고개를 들자 육현석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바로 박지연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박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온승준의 부모님도 자연스레 육현석을 바라보았다.조수연은 육현석을 알고 있었고 박지연과 그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이미 생각했기에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을 보며 조금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육현석 씨죠? 지연이는 우리 승준이 아내인데 이렇게 손잡는 건 부적절하지 않나요?”육현석이 차분히 답했다.“여사님, 그 말씀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연이는 이미 온 선생님과 이혼했고 이제는 제 여자 친구예요.”여자 친구라는 단어가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특히 조수연은 육현석이 박지연을 여자 친구로 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육현석이 부유한 집 아들이기에 단지 박지연을 새로운 맛에 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박지연이 이혼한 걸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연이 체면 좀 살려주려고 그러는 걸 거야.’조수연은 육현석과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박지연에게 충고를 시작했다.“지연아, 너도 승준이랑 2년을 함께 해서 알겠지만 승준이는 한 번도 너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어. 집안일은 전부 네 말에 따르고 간섭도 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승준이는 생활 루틴도 깨끗해. 도박도 하지 않고 여자를 만나지도 않고 접대로 하지 않아. 성격이 조금 둔할 뿐이지. 다른 남자들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헤쳐나가는 생활에서는 승준이처럼 신중한 사람이 더 좋지 않겠니?”조수연이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승준이는 이혼하고 나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겠대. 지금까지 이렇게 고집부리는 건 처음이야. 승준이랑 재결합해서 살면 우리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온범준도 말을 보탰다.“지연아, 네가 심성이 착한 아이라는 거 우리도 잘 알고 있어. 예전 일은 정말 미안하다. 원하는 보상이나 요구가 있으면 말해보거라. 다 들어줄게.”박지
저녁이 되어 간신히 손에 쥔 일을 마무리한 박지연은 미리 아래층으로 가 육현석을 기다리기로 했다.병원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 온범준이 휠체어에 앉은 조수연을 밀고 오고 있었다.박지연은 두 사람을 마주하고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곧바로 옆길로 발걸음을 돌렸다.“지연아, 잠깐만 기다려줘.”온범준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그리고 이내 온범준은 조수연을 이끌고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지난번 병실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박지연은 지금 상황이 귀찮게 여겼다.“또 저를 괴롭히거나 모욕적인 말씀을 하실 거면 바로 신고할 거예요.”“아니야. 지연아, 오해하지 마. 우리는 너에게 사과하러 왔어.”놀랍게도 조수연은 자세를 낮추었다.“맞아. 지연아. 우리는 정말 너랑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 자리 옮겨서 얘기 좀 할까?”온범준은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자존심을 챙기고 싶었는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걸 원치 않았다.박지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두 분이랑 할 얘기 없습니다. 저는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지연아, 미안해!”박지연이 발을 떼기도 전에 조수연이 갑자기 큰 소리로 사과했다.박지연은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수연을 쳐다보았다.조수연은 아첨하는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지연아, 전에는 이 엄마가 잘못했다. 너한테 그렇게 엄하게 굴지 말아야 했어. 그리고 너희 두 사람 일에 지나친 간섭은 하지 말았어야...”“그만하세요!”박지연이 조수연의 말을 끊었다.“조 여사님, 제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호칭 좀 주의해 주세요.”조수연은 비난을 받아도 화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지연아, 네가 많이 참았다는 거 알아. 다 내 잘못이야. 진심으로 사과할게.”온범준이 기침 두 번하며 말했다.“지연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집안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다. 너무 많은 걸 감내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나도 진심으로 사과한다.”박지연은 두 사람의 행동에 혼란스러웠다.‘지금 이게 또 뭐 하는 거
온승준은 등산을 좋아하는 병원 주임의 권유로 산에 오르게 되었다.원래는 참여할 마음이 없었지만 주임의 무심한 한마디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온 선생, 맨날 그렇게 무뚝뚝하게 있으면 안 돼요. 가끔 바람도 쐬고 그래야지. 안 그러면 누가 그런 성격 좋아하겠어요.”온승준이 박지연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일은 병원 내에서 이미 퍼져 있었고 주임 역시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그의 농담 같은 말은 온승준으로 하여금 박지연을 떠올리게 했다.이전 박지연은 그에게 너무 무뚝뚝하다고 가끔 함께 밖으로 나가자고 했던 적도 있었다.L 국에 있을 때는 그녀와 함께 몇 번 외출했었는데 당시 박지연은 그 시간을 무척 즐거워하며 허니문 여행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결국 온승준은 주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러나 산 정상에 오르자마자 박지연이 한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그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부드럽고도 절제된 모습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태양은 이미 떠올라 있었고 산을 오르느라 땀범벅이 되었음에도 온승준은 그 장면을 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온승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키스를 마친 두 사람은 떨어졌고 박지연의 얼굴은 발그레해져 있었다.그녀의 눈은 부끄러움과 기쁨으로 반짝였고 온 신경은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남자 역시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야에는 오직 서로만이 존재하는 듯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온승준 같은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 사이에 넘치는 사랑이 주변의 모든 것을 그림자처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온승준은 자신이 어떻게 그곳을 떠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저 다리가 납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기계적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을 뿐이었다....다음 날 박지연이 출근했을 때 한 간호사가 그녀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온 선생님 어제 사직서 제출했대요. 국경 없는
“알고 있어.”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은서야, 형이 널 찾아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리고 예전부터 너와 내 관계를 오해하도록 내버렸던 것도 내 잘못이야. 그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너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졌어. 모든 게 내 경솔함에서 비롯된 거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널 힘들게 한 점 진심으로 미안해. 우리 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너에게 다시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게. 하지만 은서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괜찮아. 그렇지만 제발 나를 네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진 말아줘.”민시후의 진지한 표정과 간절함이 섞인 목소리에 고은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우리 아직 친구잖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널 어떻게 지워.”고은서는 일부러 가볍게 답했다.그 말을 들은 민시후도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부람스러워할까 봐 그런 거야. 차라리 안 보면 편할까 해서.”하지만 그들의 가벼운 대화는 결국 억지로 만들어낸 분위기에 불과했고 대화가 끝난 후에도 분위기는 가벼워지지 않았다.결국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이는 고은서가 민시후와 알고 지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두 사람은 항상 서로 투덕거리거나 웃고 떠들기에 바빴는데 지금의 침묵은 고은서를 어색하게 만들었다.“맞다. 여시은 씨가 너한테 밥 사겠대. 지난번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고은서는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민시후가 고개를 저었다.“여시은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지난번 일은 민시현이 꾸민 일이야.”고은서가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 민시후가 물었다.“이미 알고 있었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곽승재를 탓했던 일과 곽승재가 이를 조사했던 사실을 민시후에게 이야기했다.민시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차의 머리 받침에 기대며 약간 자조적으로 말했다.“나보다 더 철저히 조사했네. 나는 송민준까지만 알아냈지 민시현까지는 못 알아냈어. 은서야, 네가 날 너무 좋아하지 않는
민시후를 본 고은서는 약간 놀랐다.‘북성으로 가서 오늘 해성에 오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생각에 잠겨 있을 사이 민시후는 이미 그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그리고 그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보았다.민시후의 얼굴에 뚜렷한 불쾌감이 떠올랐다.“곽 대표, 왜 어디나 다 당신이 있는 걸까?”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그 말은 그대로 돌려줘야겠는데?”“곽 대표, 지나간 버스는 다시 잡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민시후는 곽승재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며 말했다.“은서에게 잘해줬다면 전 남편이 될 리가 없었겠지?”곽승재는 그 말에 화가 난 듯 얼굴이 굳어졌고 차가운 눈동자에는 분노가 서렸다.“늦었어. 돌아가.”고은서는 두 사람이 또 다툴까 걱정되어 곽승재에게 한마디 하고는 차 문을 닫으며 이혁재에게 말했다.“아저씨, 출발해 주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곽승재는 차창 너머로 나란히 서 있는 고은서와 민시후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고 그 광경에 눈이 시려왔다.어쩌면 눈뿐만 아니라 마음도 시려지는 듯했다.그는 당장 차에서 내려 고은서를 안아 들고 예원 별장으로 데려가 다시는 민시후와 못 만나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고은서가 자신을 더 미워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차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셔츠 목 부분의 단추를 풀었지만 여전히 숨이 막혀온 그는 외투를 벗으려다 포켓에 든 돈을 건드리게 되었다.문득 고은서가 치료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건넬 때의 냉랭한 표정이 떠올랐다.마치 남을 대하듯 선을 긋는듯한 모습이었다.고은서도 그가 원하는 것이 돈도 치료비도 아닌 그녀의 미소 혹은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민시후를 도와 진실을 밝힌 것도 자신이 그렇게 비열하지 않다는 것을 고은서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서 그의 이미지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듯했다.곽승
고은서는 조향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때로는 너무 늦어져 집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곽승재가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집 근처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은 작았다.나아가 고은서는 지난번 곽승재를 이유 없이 오해한 일이 떠올라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은서가 승낙하자 운전기사는 다시 곽승재를 설득하며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곽승재는 그제야 천천히 차에 올라탔고 차 안으로 밤공기와 담배 향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그는 고은서 옆에 앉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곽승재의 운전기사는 차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혁재는 바로 출발했고 차는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먼저 고은서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또한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 차가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지 동승한 것처럼 보였다.“지난번 민시후와 관련된 일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어. 오해해서 미안해.”복수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잘못도 제때 인정하는 것이 고은서의 원칙이었다.지난번 GS 그룹에서 그녀는 시시비비도 제대로 가리지 않고 곽승재를 비난했고 며칠 전 그가 찾아왔을 때도 오해하여 그에게 손찌검까지 했다.고은서의 충동임이 틀림없었다.그녀의 사과를 들은 곽승재는 살짝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현금 뭉치를 꺼냈다.“이거 받아.”지난번 M 국에서 노숙자에게 쫓기고 나서 고은서는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데 익숙해졌고 마침 쓸모가 생겼다.곽승재는 그녀가 내민 돈을 보고 눈빛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치료비에 대한 보상이야.”그녀는 곽승재를 몇 번이나 때렸고 비록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이라도 발라야 했을 테니 보상으로 돈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곽승재의 차분했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은서, 이렇게 대충 넘어가려고?”그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와 서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니면?”고은서는
고준석은 고은서의 불쾌한 표정을 알아채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승재가 먼저 약속 잡고 나랑 바둑 두러 온 거야.”고은서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그 사람 집에 자주 와요?”‘전에는 이렇게 한가해 보이지 않더니...’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일주일에 한두 번은 와. 바쁘면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 나랑 바둑 두는 게 좋다며 굳이 오더라. 심지어 네가 싫어할까 봐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더라.”‘내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온다고?’고은서가 더 말하려는 순간 곽승재가 이미 집 안으로 들어섰다.곽승재는 그녀를 보고 약간 놀라는 듯했지만 곧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는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할아버지, 저 왔어요.”곽승재는 고준석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승재 왔니? 앉아라.”고준석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번에도 녹차로 줄까?”“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준석 옆 의자에 앉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할아버지, 저는 조향실에 좀 있다가 올게요.”“과일차 마시고 싶다며? 지금 아주머니가 준비하고 있어.”“준비되면 조향실로 가져다 달라고 해주세요.”고은서는 말을 마치고 거실을 떠났다.“애도 참.”고준석이 한숨을 내쉬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승재야, 은서 원래 저런 성격이니까 네가 이해해 줘.”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깊은 눈으로 고은서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고준석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 문제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은서의 마음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몫이지.’최근 곽승연을 위해 조향한 아로마 캔들의 효과는 괜찮은 편이었다. 기분도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인 터라 고은서는 이를 더 개선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두세 시간이 지나 있었고 어깨를 주무르며 거실로 돌아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떠나고 고준석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은
“백유미가 먼저 자살 시도를 하고 곽승재는 그 후에 수술을 받았는데 그런 졸렬한 변명이 통할 거로 생각하나?”박지연은 아무렴 믿지 않을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육현석이 머쓱한지 코를 만지며 답했다.“승재 형 그 얘기 할 때 꽤 슬퍼 보였어. 난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정말 친동생보다 더 친한 사이네.”육현석과 박지연은 티격태격 말다툼을 시작했고 그 사이 도아름은 생각에 잠겨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도아름은 T 국에서 고은서가 겪었던 일과 백유미의 몇몇 추문 그리고 그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은서야, 괜찮아?”도아름은 고은서가 슬퍼하는 줄 알고 걱정스레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곽 대표가 일부러 너를 슬프게 하려 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 그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은서야, 화해를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야. 난 네가 막다른 길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긍정적으로 앞을 바라보면 돼.”고은서가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저도 알아요.”전생에 곽승재에게 자신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상관없었다.하지만 그가 싸늘한 말투로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말한 건 사실이었고 그녀도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아름 언니, 저 회사 차리면 주주로 들어오실래요?”도아름은 흔쾌히 승낙했다.“우리 명운을 알아보고 투자했으니 나도 참여해야지.”“나도 참여하게 해 줘!”육현석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나도 할래. 난 그냥 주주로만 있을게. 경영이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그 정도로 날 믿어도 돼? 혹시 손해 보면 어쩌려고?”“그럴 리가! 난 네가 큰돈을 벌 거라는 예감이 들어!”“그럼 네 말대로 되길 빌게!”식사를 마친 후 고은서는 육현석에게 박지연을 데려다주라고 했고 그녀는 도아름과 함께 명운으로 가서 전문가들과 회사를 설립하는 일에 대해 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