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회사가 지난 몇 년 동안 침체기였잖아요. 곽씨 가문의 이름을 빌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더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 거예요.”외삼촌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 잔뜩 들떠서 이전 임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는 등 막무가내로 권력을 휘둘러 해를 거듭할수록 MQ의 발전은 악화됐다.운 좋게도 남아있는 할아버지는 명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리를 지키고 있기에 회사가 무너지지 않았다.그러나 할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고 기력도 딸려 삼촌에게 훈계를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지난해 그녀가 곽승재와 결혼하고 외삼촌이 곽씨 가문의 사돈이라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협업을 따내서야 겨우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곽씨 가문에 계속 의존하는 건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면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그래도 전문가들이라 우리에게 가져다줄 이익도 많고 삼촌보다 훨씬 잘할 텐데 더 좋지 않겠어요?”고준석은 이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은서 네가 나이를 먹더니 철이 들었구나. 사업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어.”“할아버지, 놀리지 마세요.” 고은서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할아버지, 제 제안 한번 고려해 주세요.”고준석이 손녀의 간청을 뿌리칠 리 없었다.“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며칠 후에 외삼촌과 상의해 볼게.”“역시 할아버지가 제일 현명해요! 할아버지, 삼촌을 꼭 설득하셔야 해요!”고준석은 고은서의 이마를 가볍게 톡 두드렸다.“말해 봐, 웬일로 집안 사업에 신경을 쓰는 거야. 넌 곽승재 그놈만 바라보고 있잖아.”“할아버지도 이제 저 다 컸다고 하지 않았어요?”고은서는 고준석의 팔짱을 끼고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할아버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아끼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요.”전생에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할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고, 자연스레 삼촌도 더 이상 회사를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죽음을 택하기 전 MQ는 이미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고은서는 할아버지의 피땀 눈물인 MQ가 망가
단은숙은 불쾌한 듯 말했다. “은서야, 너도 M·Q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데, 회사 일에 이렇게 무관심해서야 되겠니? 거래가 성사되면 너에게도 이익이 될 텐데 말이야!”“어떻게 은서한테 승재에게 그런 부탁을 하라고 할 수 있지?” 고준석이 나섰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우리 고 씨 집안이 원래 높은 곳에 올라탔다고 보는데,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하면 은서가 중간에서 어떻게 하겠나?”단은숙은 억울한 듯 말했다. “아버님도 지금 사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잖아요. FY 그룹 쪽은 우리를 만나주지도 않아요. 그러데 그들이 GS 그룹과 교류가 있으니 승재가 나서면 이 일은 분명 성사될 거예요!”“그쪽이 만나주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너희가 직접 해결책을 찾아야지 은서한테 승재를 찾아가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지.”“하지만...”“더 이상 말하지 마. 너희가 알아서 해결해, 은서를 곤란하게 할 순 없어.” 고준석은 단호히 명령을 내렸다.고은서는 마음속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언제나 외할아버지는 자신을 이렇게 보호해 주었다.“외숙모, 외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뭐든 승재한테 의지할 순 없어요. 그러니 이번 일은 도와드릴 수 없어요.”단은숙은 한껏 실망했지만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아내였고 아버지는 그녀만 보호해주었으니 그녀가 화를 내면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해서였다.“외할아버지, 저 이제 가볼게요. 아까 말씀드린 일은 꼭 기억해주세요.”고은서는 말을 마치고 거실을 떠났다.“아버님, 은서가 무슨 일을 말씀드렸나요?” 단은숙은 긴장한 듯 물었다. 아버님은 이미 고은서한테 많은 지분을 줬는데 혹시 그 계집애가 더 원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고준석은 며느리의 생각을 읽고 고개를 저었다. “은서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욕심이 많지 않아. 내일 국성한테 돌아오라고 해.”...고은서는 안전하게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 곽승재의 자주 사용하는 차가 이미 차고에 주차되어 있는 걸 보니 그가 돌아왔다는 걸 알
고은서는 갑자기 곽승재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은은한 남성의 향기가 코로 들어오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 최근 그녀와 곽승재 사이에 몇 번의 예상치 못한 신체 접촉이 있었지만 이렇게 그의 품에 안긴 것은 처음이었다.그의 가슴은 강하고 뜨거웠으며 그 온도가 얇은 옷을 통해 전해졌다.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어 고은서는 곽승재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까지 느낄 수 있었다. 전생에서 수없이 갈망하고 상상했던 포옹을 그녀는 이번 생에서 마침내 얻게 되었다.곽승재도 자신이 안고 있는 고은서의 향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열이 나서 감각이 예민해진 듯했다. 고은서가 물처럼 그의 몸에 녹아드는 느낌이 들자 그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급해졌다. 고은서의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을 상상하면서 곽승재의 머릿속이 뜨거워졌고, 심지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는 미꾸라지처럼 옆으로 빠져나가 그의 품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곽승재, 당신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냐? 갑자기 내 방에 들어와서 이런 짓을 하다니!”고은서는 두 팔을 감싸며 얼굴을 붉힌 채 그를 노려보았다. 곽승재도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도망치자 허전했고 그의 마음은 마치 무언가에 물린 것처럼 아릿하고 간지러웠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 방이라니, 이건 우리 침실이야.”고은서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이걸 침실로 사용한 적이 있기나 해? 그럼 지금까지는 손님으로 이 집에 살았단 말이야?”결혼 이후, 곽승재는 이 방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여기서 자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힘없이 말했다. “네 덕분에 할머니가 가정 의사를 보내서 내 몸을 검사하게 했어. 의사가 돌아가면 할머니가 분명히 상황을 물어볼 테니, 할머니의 꾸지람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방에 온 거야.”이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의사도 갔잖아, 왜 아직 여기 있는 건데?”“나 아파
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눈을 감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고은서가 베개를 들고 몇 개의 객실을 둘러보니 침대는 텅 비어 있고 침구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왜 곽승재가 그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소파에서 잘 수도 빈 침대에서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 그녀가 그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베개를 안고 화가 난 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곽승재를 내쫓으려 했지만 그는 외할아버지와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외할아버지, 은서가 왔어요.” 곽승재가 휴대폰을 그녀 쪽으로 돌리자 고은서는 급히 웃음을 지었다. “외할아버지, 이렇게 늦게까지 안 주무셨네요?”“네가 집에 도착하면 전화한다고 하지 않았니.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래.” 외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며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베개는 어디서 온 거니?”“아, 옆방에서 가져온 거예요.”“승재가 좀 아프고 열이 있다고 하던데 잘 좀 돌봐줘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지 말고.”“알겠습니다, 외할아버지.”“그래, 너희 부부는 빨리 자. 외할아버지는 끊을게!”영상 통화가 끝나자 고은서가 침대 일로 다시 말하려 했지만 곽승재가 먼저 말했다. “네가 외할아버지께 나를 돌보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 그렇지 않으면 외할아버지께 영상을 보낼 거야.”“...” 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곽승재가 정말 그렇게 유치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베개를 의자에 던져 놓고 욕실로 갔다.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곽승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더운 건지, 불편한 건지, 그의 잠옷 단추는 몇 개나 풀려 있었고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고은서는 잠시 생각한 후 휴대폰을 꺼내 이 모습을 찍었다. 침대 위에 있는 분홍색 곰 인형도 함께 찍어 사진을 백유미에게 보냈다.백유미가 이런 일을 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녀도 똑같이 당해보라고 한 것이다.
명운이 곧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런 자극적인 소식이 담긴 포스팅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온라인에서는 서인수를 비난하는 목소리, 복지시설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는 목소리, 사회적 풍토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물론, 서인수의 아내의 행동이 시원하다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은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제 도아름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할 줄은 예상했지만, 설마 서인수의 휴대폰을 이용해 직접 이런 포스팅을 올릴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서인수와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명운은 자금 조달은커녕 명성과 매출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명운을 질투하는 사람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고은서는 곧바로 도아름에게 ‘포옹’ 이모티콘을 보냈다. 지금 서인수의 집은 분명 혼란스러울 것이므로 그녀는 전화를 걸기보다는 이 정도의 무의미한 지원만 할 수 있었다. 도아름이 말한, 서인수가 없으면 명운에 투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했다.....판주 투자은행 회의실에서는 모두의 표정이 무거웠다. 특히 백유미는 평소 온화한 모습과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몇 고위 임원들은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었다.곧 곽승재가 주민기와 함께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차갑게 방안을 둘러보고 회의실 중앙 자리에 앉아 힘차게 서류 한 묶음을 던졌다. “명운 사건에 대해 설명해봐요.”“조사할 때 서인수가 무고하다고 하지 않았나? 문제가 없다더니, 어떻게 그 사람 아내가 모든 것을 폭로할 수 있었던 겁니까?”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백유미가 일어섰다. “제가 조사에 소홀했습니다. 서인수의 말을 믿은 제 잘못입니다. 어떠한 처벌도 받겠습니다.”곽승재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협력을 이루고자 하는 의욕은 좋지만,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거야.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결정하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거라고!”“이건 단순히 프로젝트를 잃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판
백유미의 분석은 정확했다. 서인수의 약점을 잡으려는 사람이나 이번 기회를 이용하려는 사람 모두 서인수의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인수의 아내는 이 정보를 알고, 빠르게 증거를 모아 서인수를 폭로했다. 서인수는 하루아침에 웃음거리가 되었고 명운은 스캔들로 인해 자금 조달과 상장 기회를 잃게 되었다. 더 중요한 건 판주 또한 서인수를 도와준 사실이 알려지면 비난을 받을 것이다.“모두에게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야,” 곽승재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프로젝트를 가져갈 수 없다는 걸 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혼란을 일으키는 거지.”백유미는 곧바로 반응했다. “미래 투자은행?”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꽉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백유미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옛날과 같네. 자신이 얻지 못하는 건 다른 사람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거.”“승재야, 서인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변에서 민시후희 사람이 목격되었어. 그리고 비슷한 시각에 은서 씨가 술집에서 민시후한테 괴롭힘을 당했고.”“은서 씨한테 물어봤어? 그날 왜 민시후 술집에 갔는지, 민시후가 왜 은서 씨한테 해를 끼치려 했는지?”“뭘 말하고 싶은 거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백유미를 쳐다보았다.백유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딱히 다른 의미는 없어. 그냥 좀 이상해서. 만약 민시후가 서인수의 정보를 미리 알았다면 왜 직접 해결하지 않고 술집에 있었을까?”곽승재가 막 화를 내기 전에 백유미는 서둘러 말했다. “잠깐만. 내 말 끝까지 들어봐. 전에 주 비서님이 가져온 계획서가 은서 씨가 만든 것 맞지?”곽승재는 부정하지 않았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는 은서 씨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래서 계획서를 보고 바로 지지했지. 그런데 우리가 그 계획서를 사용하기로 한 후 승재 넌 은서 씨가 판주에 오지 않고 후속 작업도 진행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이상하잖아? 누가 그렇게 공을 들여 계획서를
훈련관에는 좋은 체격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고은서는 금세 고민을 잊고 이를 훑어보았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으로, 우아하고 냉정하게 행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고 고은서는 잠시 어색함을 느꼈다. 사실 예전의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고 행동도 대담했다. 하지만 곽승재에게 무시당하면서 점점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고, 점점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매일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성격은 점점 더 나빠지고 기괴해졌다.“어, 오셨네요!” 고은서가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는 찰나 주인혁이 다가와 예의 바르고 친근하게 인사했다. “네, 오늘 시간 나서 연습 좀 하러 왔어요.” 고은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쪽은 바쁘잖아요, 저기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던데!”주인혁의 인기는 꽤 좋아 보였다. 그는 개인 트레이닝 수업도 하고 있었고 많은 여자들이 그의 수업을 듣고 싶어 했다. 명운이 그를 모델로 초빙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전 그냥 그쪽한테 인사드리러 왔어요. 연습하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 고은서는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코치의 지도 아래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체력 훈련과 기본기 연습을 했다. 고은서는 처음에는 간신히 따라갔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몸풀기, 체력 훈련, 기본기가 모두 지루하고 고되게 느껴졌다.“자, 계속해서 이 자세를 유지해요!” 코치가 엄격하게 호루라기를 불었다.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는 고은서는 더 이상 자세를 유지할 수 없어서 벽에 기대어 쉬기 시작했다.“저기요.”그때 문가에서 주인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랑 같이 연습해요. 덜 힘든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훈련 강도는 너무 높아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주인혁은 고은서를 샌드백이 매달린 훈련장으로
“좋아요, 인정할게요.” 고은서가 말했다. “시간 될지 확인해 보고 그쪽 개인 트레이닝 수업을 등록할게요!”주인혁은 급히 말했다. “수업을 살 필요 없어요. 공짜로 가르쳐 드릴게요.”“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고객을 밀어내다니, 내가 당신 수업을 선택한 건 당신을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잘 가르치지 못하면 바꾸면 그만이지 왜 공짜로 가르치려고 해요?”고은서의 논리적인 말에 주인혁은 설득되었다.“그럼 저 꼭 열심히 가르칠게요!”“그 정도는 돼야죠.”고은서는 돈을 지불하고 시간이 늦어지자 샤워를 한 후 가방을 들고 차를 타러 갔다. 그때 근육으로 가득한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앞에 있던 사람에게 강하게 주먹을 휘둘렀다.“이 자식아, 또 내 고객을 빼앗아?”고은서가 고개를 들어보니 때리는 사람은 아까 함께 운동했던 코치였고, 맞을 뻔한 사람은 주인혁이었다. 왜 ‘맞을 뻔’ 했냐면 주인혁이 빠르게 피했기 때문이다.근육남은 어디서 쌍절곤을 집어 들었는지 주인혁의 얼굴을 거칠게 내리쳤다. 이렇게 밝고 잘생긴 남자애가 얼굴을 다치면 앞으로 아이돌이 될 수 있을까?고은서가 그들을 말리려고 하려는 순간 주인혁이 앞으로 팔을 뻗어 쌍절곤을 바로 잡았다. 고은서가 놀랄 새도 없이 화가 난 코치는 주인혁을 잡고 땅에 내던지려 했다. 주인혁도 만만치 않았다. 쓰러지는 순간, 그의 두 다리가 코치의 목을 감고 함께 넘어졌다.쾅!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얽히며 싸우기 시작했다. 둘 다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 싸우는 모습은 마치 무술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서로 치고받았는데 한 방 한 방이 치명적이었다.“두 사람 다 일하기 싫은 거야?” 훈련관 매니저가 다가와 엄하게 꾸짖었다. “훈련관 규칙을 잊었어?”코치는 마지못해 주인혁을 놓아주며 화를 냈다. “이 자식이 내 고객을 자꾸 빼앗아 가잖아요! 그것도 꼭 예쁘고 돈 많은 사람들만 골라서! 아까도 내가 가르치고 있는데 이 자식이 가로채 갔어요! 내가 참을 수가 있어야지!”주인혁은 얼굴이
유일 투자 은행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먼저 직원들과 함께 간단한 업무 회의를 열고 곽승재의 스케줄을 알아보기 위해 육현석한테 연락했다.“은서야, 마침 전화하려고 했는데.”육현석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승재 형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러는데 혹시 승재 형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게 있어?”정보를 캐내려고 전화했는데 도리어 정보를 알려주는 입장이 될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저도 잘 몰라요. 연락이 안 되나요?”고은서가 물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연락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주민기도 연락이 안 되어서 비서실에 전화 해보았는데 비서는 그저 곽승재가 바쁘다고만 했다고 말했다.“은서야, 혹시 승재 형이랑 싸웠어?”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 대신 스테인리스 철봉 공격을 막아준 그 날 자신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은 탓에 그가 약간 기분 나빠했던 일이 떠올랐다.‘내가 한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건가? 아니면 그날 진짜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또 그날 육현석이 곽승재한테 전화했을 때 전화 너머로부터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온 게 떠올랐다.‘그럼 그 여자는 곽승재가 다쳐서 마음 아파서 운 거야?’“은서야, 우리 승재 형 찾으러 같이 GS그룹으로 가보지 않으래?”평소 같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텐데 지금은 곽현수가 준 임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곽승재를 어떻게서든 만나야 했다.그러나 육현석의 의심을 받는 걸 피면하기 위해 그녀는 한참 동안 망설이는 척하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나 마침 볼 일이 있어서 유일 투자 은행 근처에 있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가방을 들고 내려가려고 할 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육현석이 까먹은 일이라도 있는가 해서 폰을 들고 확인해 보았는데 낯선 유선전화 번호였다.받아보니 다름 아닌 해성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상대방은 아주 예의 바르게 백유미가 거의 완치 되어서 전에 얘기했던 정신병 위장 사건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가를 파견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끔
고은서는 고씨 집안 본가에 들렀다.비록 며칠 전에 고준석을 만났지만 지금도 너무 보고 싶었는지라 가서 함께 앉아 소소한 대화라도 나눌 생각이었다.그날 고은서가 고국성 집에서 나오면서 고준석한테 고국성 일에 관해 다 알린 탓에 그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화를 내긴 했으나 그녀가 유성준과 함께 고국성을 도와 일을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 달랜 덕분인지 아니면 나이도 있고 유성준을 굳게 믿어서인지 직접 나서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고국성도 이미 마흔이 넘어갔고 MQ의 현 관리자로서 회사 일에 이미 손을 뗀 고준석이 계속 모든 일을 일일이 신경 써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은서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준석은 오춘식과 함께 정자에서 바둑을 하고 있었다.그녀가 고준석을 향해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오춘식은 눈치 있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고준석은 다가와 다정하게 자신의 어깨에 기대는 고은서를 보면서 웃으며 물었다.“아이고, 우리 은서 얼마 만에 애교를 부리는 거야? 할아버지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고준석은 고은서를 매우 아꼈는데 그녀가 애교만 부리면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다 응해 줬었다.그 때문에 고은서는 자신이 모든 걸 쉽사리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차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전생에 자신이 곽승재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고은서는 자신만만하게 전미자한테 곽씨 가문 며느리 직책을 잘 이행하고 꼭 곽승재가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정신병원에서 자살하고서야 이 세상엔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이 쉽다고 느낀 건 누군가가 대신 그 대가를 치러줬기 때문이라는 것도 깊게 깨달았다.이번 생만큼은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항상 조심스럽게 살아왔다.그녀는 곽승재랑 이혼만 하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현실은 그보다 더 잔인했다.“은서야,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누가 널 괴롭혔어?”
고은서는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면 삼촌 일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승재가 도와준다고 한 번 더 넘어갈 생각이야?”곽현수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고은서는 곽현수가 직접 나선 이상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게다가 어제 오미나의 반응을 보아서는 그녀의 배 속의 아이가 십중팔구 고국성의 아이가 맞을 것이다.아이를 지우지 않는다면 시한폭탄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리고 곽현수가 마음만 먹는다면 경찰에 잡힌 강현철을 데리고 나오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어느 날엔가 갑자기 고준석 앞에 나타나거나 또는 고국성을 대하듯이 똑같은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곽승재는 현재 회사 일을 처리하기도 바쁠 텐데 더는 민폐를 끼쳐서는 안 돼.’시가 가게의 부드러운 불빛이 유독 눈부시게 느껴지는 때이다.사실 곽현수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곽승재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가 자신을 좋아하든 원망하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곽현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고은서가 떠난 후 곽현수는 VIP룸 뒤에 있는 실내 정원으로 갔다.그곳에는 트위드 자켓을 입은 여시은이 고양이를 그네 위에 앉아 함께 놀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는 장면이었다.곽현수를 발견한 여시은은 이내 그네에서 내려오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버님이라고 불렀다.“시은아, 많이 기다렸지?”곽현수가 웃으면서 물었다.“아니에요. 여기 풍경도 좋고 캣닢도 있어서 쿠아랑 엄청 재밌게 놀고 있었어요.”여시은이 달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저기 가서 앉자.”곽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손짓했다.“좋아요!”여시은은 쿠아를 캣닢 옆에 내려놓고 곽현수와 함께 파라솔 아래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직원은 두 사람을 위해 차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여시은은 한 입 맛보고는 이내 똘망똘망한 눈
고은서는 순간 죄책감에 휩싸였다.육현석도 전에 곽승재가 회사 내부에서 곽현수와 기 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다고 했는데 또 고국성 일로 꼬투리까지 잡힌 이상 많이 힘들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제인 제약 사건은 판주 투자 은행과도 연관된 일이었기에 곽현수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고국성 일은 확실히 공사가 선명하지 못하다고 꼬투리가 잡힐 만 했다.방금전 곽현수가 한 말도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가 곽승재를 쫓아내려거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승재가 너 때문에 이성을 잃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난 그게 무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곽현수가 말을 이어갔다.“입으로는 승재랑 더는 같이 있을 리가 절대 없다고 하지만 한두 번은 그렇다 쳐도 승재가 열 번 심지어 스무 번이 되도록 너를 향해 구애한다고 해도 네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어? 시간만 나면 네 할아버지랑 바둑하고 얘기 나누러 고씨 가문 본가로 찾아가는데 아버지인 나도 그런 혜택을 누린 적이 없어. 게다가 네 가족들도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승재를 계속 사위로 대하면서 걔한테서 얻을 만큼 얻어 가졌잖아.”곽현수가 하찮다는 듯 비아냥거렸다.“네가 말로만 하는 보장은 단지 너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하는 거겠지.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거야. 그런데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고은서는 순간 난감해졌다.‘할아버지한테는 곽승재가 스스로 찾아간 게 맞겠지만 삼촌이랑 숙모 쪽은 분명히 아닐 거야. 곽승재가 나랑 재혼하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일부러 나를 속이고 MQ 일로 여러 번 찾아간 게 분명해.’고은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거짓말로 들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확실히 곽승재의 도움으로 혜택을 누릴 만큼 누린 이상 곽현수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곽현수가 삼촌 일로 나를 만나자 한 것도 또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마 다 원하는 바가 있어서겠지.’고은서는 더는 변명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
전미자 생일 연회 때마침 성씨 집안 소개로 새로운 사업 계약서를 체결한 고국성은 눈에 띄게 우쭐대며 다녔는데 곽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업적을 적지 않게 으리으리하게 포장해서 떠벌리고 다녔었다.그래서 곽현수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그녀는 그가 자신은 고국성처럼 천한 사람을 직접 처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은서는 화내는 대신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우리 삼촌이 약간 잘난 체하면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이건 삼촌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 이 이유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죠. 회장님께서 우리 삼촌이 면한 일에 관해 잘 모르신다면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그녀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지라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아니면 어제 오미나 씨랑 대화한 내용을 녹음해 두었는데 직접 들어보실래요?”곽현수는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설명과 녹음파일 같은 걸 계속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그는 오미나에 관해서도 더는 묻지 않고 찻잔을 들고 아주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으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오늘 찾아온 이유가 대체 오미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야 아니면 네 삼촌 일을 해결하고 싶어서야?”“삼촌 일을 해결할 겸 오미나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사실 그보다 우리 삼촌이 어느 면에서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더 알고 싶네요.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은데 회장님께서 알려줬으면 좋겠네요.”고은서도 꿀리지 않고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생각보다 더 총명하네.”곽현수는 여전히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총명해 보았자 당신 같은 사람 눈에는 들지 않겠지.’고은서는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곽현수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잠시 후, 곽현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승재가 이혼
이튿날 오후, 고은서는 약속 시간에 맞춰 곽현수가 얘기한 시가 가게에 도착했다.전시 구역에는 다양한 시가 상자가 진열되어 있었고 주변 벽에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직원은 고은서를 VIP룸으로 안내해 주었다.VIP룸에는 검은 가죽 소파와 부드러운 캐시미어 카펫, 그리고 정교한 티 테이블이 놓여있었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차분한 느낌 주었다.곽현수는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고 직원이 그에게 다양한 신제품을 소개해주는 걸 듣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상위자의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와 달리 유독 더 날카롭게 다가왔는데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고은서는 곽현수와 만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전과 같이 고은서는 곽현수를 보자마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그녀는 자신이 이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얼마나 우울한 사람으로 컸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도착했습니다.”고은서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인기척을 느낀 곽현수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곽현수를 향해 덤덤하게 곽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곽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직원이 들고 있는 트레이 위에 있는 시가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직원은 이내 공손하게 시가를 꺼내주었다.그는 그제서야 눈길을 고은서한테 돌리면서 그녀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고은서가 소파에 앉는 동시에 직원은 곽현수를 위해 시가에 불을 붙여주었다.“난 무슨 일로 찾은 거지?”곽현수는 말하면서 시가를 한 입 맛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직원은 아주 눈치 있게 곽현수에게 다른 시가를 건네주었다.그와 동시에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제가 곽 회장님이 시가를 즐기는 시간을 방해한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곽현수는 새 시가를 들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마음에 드는지 직원에게 잘라 달라고 한 다음 내려보라고 손짓했다.직원이 나간 후, 그는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담담한
고국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이렇게 치밀하게 계산해서 접근한 이유가 결국 돈 때문 아니야? 도대체 얼마면 너랑 네 전남편 배를 채울 수 있는데? 금액이나 말해!”그러나 오미나는 여전히 처량한 표정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고 대표님, 아이는 정말 뜻밖이었어요. 저는 그냥 조용히 낳아서 혼자 키울 생각이었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몰아붙이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밝힌 것뿐이에요.”“일부러 접근한 게 아닌데 왜 미리 증거들을 남겨둔 거죠?”유성준이 물었다.고은서는 유성준이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했다.오미나가 제시한 증거들은 단순한 우연으로 준비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모든 정황이 그녀의 의도적인 접근을 증명하고 있었다.하지만 오미나는 유성준을 무시한 채 다시 고국성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대표님 그렇게 화내실 필요 없어요. 검사하면서 물어봤더니 남자아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모님보다 훨씬 젊어요. 그리고 그분처럼 강압적이지도 않죠. 만약 사모님께서 이번 일로 이혼을 원하신다면 저와 함께 사는 것도 고려해 보세요. 우리 함께 아들을 키워요. 따님도 친딸처럼 소중히 보살필게요.”“네가 감히!”오미나의 말에 분노에 찬 고국성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나를 호구로 보지 마! 난 아들 같은 것도 필요 없어!”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히 오미나의 말에 혹해서 판단을 흐리지 않았네.’그녀는 유성준에게 눈짓을 보내 고국성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진정시키게 했다.그리고 자신은 남아 오미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곽현수가 어떤 대가를 제시했길래 이렇게까지 우리 삼촌을 벼랑 끝으로 모는 거죠?”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나 오미나는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고 대표님과 저는 평범하게 만나 가까워졌어요. 벼랑 끝으로 내몬다니요?”그 말에 고은서는 손안에 쥐고 있던 녹음 중인 핸드폰을 더욱 꽉 쥐었다.오미나는 곽현수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곽현수와 관련이 없다고
기자 회견은 호텔 2층 연회장에서 열렸다.유성준이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회견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국성은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진지하게 사과하며 관련된 사건은 이미 경찰에 신고한 상태이며 조사가 진행되면 자신의 결백이 증명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단은숙 역시 남편의 인품을 믿는다며 고국성이 결코 가정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며 이번 사건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모략이고 아이 역시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고국성의 아이예요! 친자 확인서도 있습니다.”고국성을 향한 여론이 점점 우호적으로 바뀌려던 찰나 입구 쪽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시선을 돌리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미나였다.오미나는 헐렁한 임부복 차림을 한 채 손에는 감정서를 들고 있었다.걸어오는 걸음걸이는 다소 불안정해 보였다.“고국성 씨, 당신이 먼저 나에게 끊임없이 호감을 표현하고 선물도 주고 식사에도 초대했잖아요. 그래서 경계를 풀고 친구가 된 건데 당신은 제가 술에 취한 틈을 타 호텔에서 강제로 저를 안은 거잖아요!”오미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기자들은 충격적인 폭로에 즉각 반응하며 고국성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냈다.“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미나를 유혹한 적도 없고 그런 짓을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고국성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그러나 오미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신 사진과 영상 그리고 고국성이 자신에게 선물을 건넨 증거 자료를 하나씩 꺼내 보였다.심지어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가는 CCTV 영상까지 있었다.“고국성 씨, 원래는 당신과 이렇게 적대적으로 싸울 생각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모함하고 내 명예를 짓밟으니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모두 공개할 수밖에 없네요!”오미나는 본래 가련한 스타일이었다.화장기 없는 얼굴에 울 것 같은 억울한 표정까지 더해지자 그녀는 완벽한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반면 중년이 되어 배가 나온 고
육현석은 자신의 속셈을 들켰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난 그냥 네가 승재 형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네 전화는 꼭 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한번 시험해 볼래?”고은서는 시험해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하지만 흥미를 느낀 박지연이 곽승재의 번호를 눌렀다.육현석이 말릴 틈도 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연 씨, 은서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은서는 아무 일도 없어! 형, 내 전화는 왜 안 받았어!”육현석이 화가 난 듯 따져 묻자 곽승재 쪽에서 갑자기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거리가 멀었던 탓에 여자의 신분은 확인하기 어려웠다.“누가 우는 거야? 형 지금 어디야?”육현석이 다급하게 물었다.“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할게.”차분하게 답한 곽승재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육현석이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쯧, 망했네?”박지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곽승재가 은서를 특별히 여긴다는 걸 증명하려다가 결국은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들켜 버렸네?”육현석은 급히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오해하면 안 돼!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고은서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육현석은 그녀를 유심히 살피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넌 지금 화난 거야? 아닌 거야?”고은서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대답 대신 되물었다.“내가 화내길 바라는 거야? 아니길 바라는 거야?”뜻밖의 질문에 육현석은 말문이 막혔다.화가 났다면 지금 상황이 조금 두려웠고 화가 나지 않았다면 완전히 신경도 안 쓴다는 뜻 같아 왠지 씁쓸했다.“됐어. 음식 준비도 끝났으니까 가서 나르는 거나 좀 도와줘.”박지연은 육현석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주의를 돌렸다.육현석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박지연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곽승재가 정말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고 있는 거라면 기분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