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눈을 감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고은서가 베개를 들고 몇 개의 객실을 둘러보니 침대는 텅 비어 있고 침구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왜 곽승재가 그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소파에서 잘 수도 빈 침대에서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 그녀가 그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베개를 안고 화가 난 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곽승재를 내쫓으려 했지만 그는 외할아버지와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외할아버지, 은서가 왔어요.” 곽승재가 휴대폰을 그녀 쪽으로 돌리자 고은서는 급히 웃음을 지었다. “외할아버지, 이렇게 늦게까지 안 주무셨네요?”“네가 집에 도착하면 전화한다고 하지 않았니.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래.” 외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며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베개는 어디서 온 거니?”“아, 옆방에서 가져온 거예요.”“승재가 좀 아프고 열이 있다고 하던데 잘 좀 돌봐줘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지 말고.”“알겠습니다, 외할아버지.”“그래, 너희 부부는 빨리 자. 외할아버지는 끊을게!”영상 통화가 끝나자 고은서가 침대 일로 다시 말하려 했지만 곽승재가 먼저 말했다. “네가 외할아버지께 나를 돌보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 그렇지 않으면 외할아버지께 영상을 보낼 거야.”“...” 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곽승재가 정말 그렇게 유치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베개를 의자에 던져 놓고 욕실로 갔다.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곽승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더운 건지, 불편한 건지, 그의 잠옷 단추는 몇 개나 풀려 있었고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고은서는 잠시 생각한 후 휴대폰을 꺼내 이 모습을 찍었다. 침대 위에 있는 분홍색 곰 인형도 함께 찍어 사진을 백유미에게 보냈다.백유미가 이런 일을 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녀도 똑같이 당해보라고 한 것이다.
명운이 곧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런 자극적인 소식이 담긴 포스팅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온라인에서는 서인수를 비난하는 목소리, 복지시설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는 목소리, 사회적 풍토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물론, 서인수의 아내의 행동이 시원하다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은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제 도아름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할 줄은 예상했지만, 설마 서인수의 휴대폰을 이용해 직접 이런 포스팅을 올릴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서인수와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명운은 자금 조달은커녕 명성과 매출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명운을 질투하는 사람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고은서는 곧바로 도아름에게 ‘포옹’ 이모티콘을 보냈다. 지금 서인수의 집은 분명 혼란스러울 것이므로 그녀는 전화를 걸기보다는 이 정도의 무의미한 지원만 할 수 있었다. 도아름이 말한, 서인수가 없으면 명운에 투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했다.....판주 투자은행 회의실에서는 모두의 표정이 무거웠다. 특히 백유미는 평소 온화한 모습과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몇 고위 임원들은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었다.곧 곽승재가 주민기와 함께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차갑게 방안을 둘러보고 회의실 중앙 자리에 앉아 힘차게 서류 한 묶음을 던졌다. “명운 사건에 대해 설명해봐요.”“조사할 때 서인수가 무고하다고 하지 않았나? 문제가 없다더니, 어떻게 그 사람 아내가 모든 것을 폭로할 수 있었던 겁니까?”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백유미가 일어섰다. “제가 조사에 소홀했습니다. 서인수의 말을 믿은 제 잘못입니다. 어떠한 처벌도 받겠습니다.”곽승재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협력을 이루고자 하는 의욕은 좋지만,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거야.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결정하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거라고!”“이건 단순히 프로젝트를 잃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판
백유미의 분석은 정확했다. 서인수의 약점을 잡으려는 사람이나 이번 기회를 이용하려는 사람 모두 서인수의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인수의 아내는 이 정보를 알고, 빠르게 증거를 모아 서인수를 폭로했다. 서인수는 하루아침에 웃음거리가 되었고 명운은 스캔들로 인해 자금 조달과 상장 기회를 잃게 되었다. 더 중요한 건 판주 또한 서인수를 도와준 사실이 알려지면 비난을 받을 것이다.“모두에게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야,” 곽승재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프로젝트를 가져갈 수 없다는 걸 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혼란을 일으키는 거지.”백유미는 곧바로 반응했다. “미래 투자은행?”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꽉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백유미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옛날과 같네. 자신이 얻지 못하는 건 다른 사람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거.”“승재야, 서인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변에서 민시후희 사람이 목격되었어. 그리고 비슷한 시각에 은서 씨가 술집에서 민시후한테 괴롭힘을 당했고.”“은서 씨한테 물어봤어? 그날 왜 민시후 술집에 갔는지, 민시후가 왜 은서 씨한테 해를 끼치려 했는지?”“뭘 말하고 싶은 거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백유미를 쳐다보았다.백유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딱히 다른 의미는 없어. 그냥 좀 이상해서. 만약 민시후가 서인수의 정보를 미리 알았다면 왜 직접 해결하지 않고 술집에 있었을까?”곽승재가 막 화를 내기 전에 백유미는 서둘러 말했다. “잠깐만. 내 말 끝까지 들어봐. 전에 주 비서님이 가져온 계획서가 은서 씨가 만든 것 맞지?”곽승재는 부정하지 않았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는 은서 씨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래서 계획서를 보고 바로 지지했지. 그런데 우리가 그 계획서를 사용하기로 한 후 승재 넌 은서 씨가 판주에 오지 않고 후속 작업도 진행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이상하잖아? 누가 그렇게 공을 들여 계획서를
훈련관에는 좋은 체격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고은서는 금세 고민을 잊고 이를 훑어보았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으로, 우아하고 냉정하게 행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고 고은서는 잠시 어색함을 느꼈다. 사실 예전의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고 행동도 대담했다. 하지만 곽승재에게 무시당하면서 점점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고, 점점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매일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성격은 점점 더 나빠지고 기괴해졌다.“어, 오셨네요!” 고은서가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는 찰나 주인혁이 다가와 예의 바르고 친근하게 인사했다. “네, 오늘 시간 나서 연습 좀 하러 왔어요.” 고은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쪽은 바쁘잖아요, 저기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던데!”주인혁의 인기는 꽤 좋아 보였다. 그는 개인 트레이닝 수업도 하고 있었고 많은 여자들이 그의 수업을 듣고 싶어 했다. 명운이 그를 모델로 초빙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전 그냥 그쪽한테 인사드리러 왔어요. 연습하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 고은서는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코치의 지도 아래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체력 훈련과 기본기 연습을 했다. 고은서는 처음에는 간신히 따라갔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몸풀기, 체력 훈련, 기본기가 모두 지루하고 고되게 느껴졌다.“자, 계속해서 이 자세를 유지해요!” 코치가 엄격하게 호루라기를 불었다.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는 고은서는 더 이상 자세를 유지할 수 없어서 벽에 기대어 쉬기 시작했다.“저기요.”그때 문가에서 주인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랑 같이 연습해요. 덜 힘든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훈련 강도는 너무 높아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주인혁은 고은서를 샌드백이 매달린 훈련장으로
“좋아요, 인정할게요.” 고은서가 말했다. “시간 될지 확인해 보고 그쪽 개인 트레이닝 수업을 등록할게요!”주인혁은 급히 말했다. “수업을 살 필요 없어요. 공짜로 가르쳐 드릴게요.”“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고객을 밀어내다니, 내가 당신 수업을 선택한 건 당신을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잘 가르치지 못하면 바꾸면 그만이지 왜 공짜로 가르치려고 해요?”고은서의 논리적인 말에 주인혁은 설득되었다.“그럼 저 꼭 열심히 가르칠게요!”“그 정도는 돼야죠.”고은서는 돈을 지불하고 시간이 늦어지자 샤워를 한 후 가방을 들고 차를 타러 갔다. 그때 근육으로 가득한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앞에 있던 사람에게 강하게 주먹을 휘둘렀다.“이 자식아, 또 내 고객을 빼앗아?”고은서가 고개를 들어보니 때리는 사람은 아까 함께 운동했던 코치였고, 맞을 뻔한 사람은 주인혁이었다. 왜 ‘맞을 뻔’ 했냐면 주인혁이 빠르게 피했기 때문이다.근육남은 어디서 쌍절곤을 집어 들었는지 주인혁의 얼굴을 거칠게 내리쳤다. 이렇게 밝고 잘생긴 남자애가 얼굴을 다치면 앞으로 아이돌이 될 수 있을까?고은서가 그들을 말리려고 하려는 순간 주인혁이 앞으로 팔을 뻗어 쌍절곤을 바로 잡았다. 고은서가 놀랄 새도 없이 화가 난 코치는 주인혁을 잡고 땅에 내던지려 했다. 주인혁도 만만치 않았다. 쓰러지는 순간, 그의 두 다리가 코치의 목을 감고 함께 넘어졌다.쾅!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얽히며 싸우기 시작했다. 둘 다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 싸우는 모습은 마치 무술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서로 치고받았는데 한 방 한 방이 치명적이었다.“두 사람 다 일하기 싫은 거야?” 훈련관 매니저가 다가와 엄하게 꾸짖었다. “훈련관 규칙을 잊었어?”코치는 마지못해 주인혁을 놓아주며 화를 냈다. “이 자식이 내 고객을 자꾸 빼앗아 가잖아요! 그것도 꼭 예쁘고 돈 많은 사람들만 골라서! 아까도 내가 가르치고 있는데 이 자식이 가로채 갔어요! 내가 참을 수가 있어야지!”주인혁은 얼굴이
곽승재는 냉담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긴 목선과 정교한 작은 얼굴이 조명 아래서 더욱 빛나 보였다.그리고 그녀가 지켜준 남자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반짝이는 눈빛이 곽승재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그렇게 정의롭게 말하지 마요. 당신도 다른 여자들처럼 집에 있는 남편이 늙고 못생겨서 이 잘생긴 녀석을 보고 수업을 신청해 꼬시려는 거 아니에요? 아우!” 코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인혁이 그의 턱에 강하게 주먹을 날렸다.“헛소리하지 마요!” 코치는 맞고 나서 바닥에 쓰러졌고 입과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입을 감싸며 울부짖었다.“미쳤어? 어떻게 이렇게 세게 때릴 수 있어!” 주인혁은 그저 아르바이트 직원일 뿐이었다. 관리자는 정직원이 피를 보자 급하게 다가왔다.“김성군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렇게 젊고 예쁜 여자가 돈을 펑펑 쓰는 걸 보면 늙은 남자에게 후원을 받거나 늙은 남자랑 결혼한 거겠지!”“누굴 늙은 남자라고 하는 거지?” 고은서가 주인혁을 말리려는 찰나 앞에서 냉랭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은서가 고개를 들어보니 곽승재가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정교하고 단정한 검은 셔츠를 입고 날카로운 눈매와 높은 콧날 그리고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며 걸어왔다. 어제 밤의 병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차가운 분위기와 그의 외모만으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인물로 돌아왔다.훈련관 관리자와 김성군은 곽승재의 등장에 순간 얼어붙었다. 그들도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눈앞의 남자처럼 위엄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품격이 눈에 들어왔다.“당, 당신은 누구죠?” 관리자는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곽승재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고은서를 보며 긴 팔을 뻗어 그녀를 감싸안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은서 남편입니다.”민시후 술집 사건 이후, 곽승재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은서의 남편이라고 말하며 주권을
그녀는 곽승재를 신경 쓰지 않고 주인혁에게 물었다. “다쳤어요? 병원 가서 검사 받아볼래요?”주인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누나, 오늘 일은 미안해요. 누나까지 끌어들여서.”“뭘요, 그들이 잘못한 거죠.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돌아가요.”주인혁이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주인혁이 떠난 뒤 고은서는 화가 난 듯 곽승재를 바라보았다. “당신 왜 그래? 주인혁 씨가 악수하려는데 왜 무시하냐고?”“너랑 친한 사람이야?” 곽승재는 담담하게 반문했다. “누나라 부를 정도로 친한가?”“누나가 뭔 문제야? 백유미도 당신한테는 ‘승재야’ 라고 부르잖아! 난 그것도 신경 안 썼어!”고은서의 말에 곽승재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고은서, 억지 그만 좀 부려! 지금 그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사람들 앞에서 다른 남자 편을 들어? 당신은 이미 결혼했어!”“알고 있으니까 계속 언급할 필요 없어.” 고은서가 말했다. “당신이 백유미 씨 편을 든 적이 없는 것처럼 말하네.”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혼하는 것도 싫고 심지어 당신을 기다리는 여자한테 명분도 주지 않고, 정말 한심하네.”더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고은서의 목구멍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곽승재는 그녀에게 말했다.“타, 묻고 싶은 게 있어.”“싫어, 여기서 말해. 차 갖고 왔으니까.”“그럼 당신 차에서 얘기해.”“돌아가서 하자. 집중해서 차를 몰아야 하니까 당신과 얘기할 시간 없어.”“고은서, 난 지금 당신이랑 협상하고 있는 게 아니야!” 곽승재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차에 끌려가기 싫으면 빨리 차 문을 열어!”고은서는 곽승재가 확실히 참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그가 말한 대로 될까 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차 문을 열었다.곽승재가 조수석에 앉은 후 고은서는 차를 몰았고 곽승재의 기사는 뒤에서 따라왔다.고은서는 앞을 바라보며 좀 불만스럽게 말했다.“물어보고 싶은 게 뭔데.”“전에 명운의 계획서, 당신
침실에 들어서자 고은서는 이미숙이 여전히 곽승재의 물건들을 치우지 않았음을 발견했다.하지만 다행히도 곽승재는 오늘 밤 그녀의 침실에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고, 고은서는 안에서 문을 잠갔다.침대에 누우니 고은서는 여전히 그 위에 곽승재의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아 편히 쉴 수가 없었다.그녀는 차라리 일어나 곽승재의 물건들을 복도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손을 털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훨씬 편안해진 느낌이 들었고 고은서는 베개에 엎드려 잠들었다.다음 날 고은서가 일어났을 때 집에는 이미 곽승재의 흔적이 없었다.그의 물건들은 여전히 문 옆에 버려져 있었다.이미숙에게 버리라고 하고 고은서는 휴대폰을 확인했다.명운의 뉴스가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서인수와 도아름은 가장 빠른 속도로 이혼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명운의 재산도 나누었다.서인수는 자신의 기술과 거액의 현금을 가지고 독립했고, 도아름은 명운의 이름과 주식을 가져갔다.명운의 전신은 도아름의 아버지가 설립한 주류 공장이었기에 도아름이 되찾으려 한 것은 이해할 만했다.고은서는 도아름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명운에 도착했을 때 도아름은 막 회의를 마친 참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피로감이 묻어났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의기소침해 보이지도 않고 좌절한 것 같지도 않았다.“아름 언니.” 고은서가 그녀를 불렀다.도아름은 그녀를 보고 약간 놀란 듯했지만 곧 사무실로 안내했다.“아름 언니, 괜찮으세요?” 고은서가 물었다.도아름은 짧은 며칠 사이에 남편의 배신을 겪었고 그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그녀는 신속하게 이혼을 마쳤고 이제 혼자서 명운을 운영해 나가야 했다.고은서는 자신이 환생한 사람이라 해도 그녀처럼 강인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도아름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요, 이미 결정을 했으니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명운에 서 사장님의 기술이 없는데, 언니는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도아름은 아버지가 예전부터 자신만의 제조법을 가지고
육현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가 털썩하고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육 도련님, 저예요. 제발 경호우너을 부르지 말아 주세요.”“한 비서?”고은서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을 때 육현석은 그 여자를 알아 보았다.삼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GS그룹의 검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비서들처럼 자랑스럽고 우월한 면을 뽐내는 대신 공포에 질린 듯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대체 무슨 일인데 주차장에 숨어 있는 거야?”육현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그의 말을 들은 한 비서는 본능적으로 몸서리를 치면서 갑자기 그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육 도련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는데 용서를 빌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주차한 곳 뒤에는 나무들이 주지어 있었고 차들이 빼곡히 들어선 탓에 사람이 숨어있는 걸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한 비서는 무릎을 꿇은 채 끊임없이 육현석을 향해 사과했다.그녀는 육현석의 차를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이곳으로 오는 걸 알고 일부러 차 뒤에 숨어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이러지 말고 일어나서 말해.”“아니요. 그냥 꿇고 말하겠습니다.”한 비서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말했다.그녀는 방금전에 머리를 땅에 박으며 절을 한 탓에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랐고 공포 질린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면 일부러 보여주기 식으로 연기하려는 거야?”육현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니요. 저는 그저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한 비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사과하려거든 조용한 곳에 가서 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해.”육현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한 비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현석 씨, 일 봐요. 저는 혼자 차 불러서 가면 돼요.”“안 돼요. 고은서 씨 용서도 받아야 하니까 같이 가요.”육현석이 말을 꺼내기도
육현석의 관심사는 정말 유별나게 독특했다.고은서가 걱정하는 것이 육현석이 생각하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녀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생각이었다.‘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곽승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게 뻔해.’“삼촌 일 때문에 영향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곽 회장님께서 곽승재의 꼬투리를 잡을 만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요.”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육현석도 고국성의 일에 관해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곽현수 성격에 확실히 그럴만 하지.’“그날 삼촌 일이 승재 형 아버님이랑 연관 있다고 했잖아. 나중에 확인해 봤어?”육현석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곽현수는 애초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그러나 이걸 그대로 육현석에게 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고은서는 억지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인했다.“아직 확인해보지 못했어요.”“그럼 오늘 나랑 승재 형 찾으러 온 것도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야?”육현석이 무언 갈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그렇죠.”어이가 없었지만 고은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그후로 한참 동안 사무실에서 기다려 보았지만 곽승재는 나타나지 않았다.고은서는 육현석의 말을 듣고 곽승재한테 연락해 보았으나 여전히 그녀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은서는 이내 주민기한테 연락했다.얼마 후, 주민기가 전화를 받았다.“고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고은서는 주민기의 아주 공식적인 말투를 들으면서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주민시 씨, 곽승재 혹시 다쳐서 병원에 있는 건 아니죠?”주민기는 멈칫하다가 이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등을 다치긴 했으나 지금은 별다른 문제 없습니다.”‘그날 정말 다친 거였어? 그런데 왜 병원도 가지 않고 나한테 거짓말이라고 한 거지?’고은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났다.“곽승재 지금 어디 있죠?”주민기는 그녀의 물음을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답했다.“지금 GS그룹의 주주분을 만나러 와서
고은서는 육현석을 막았다.“그래도 곽승재 사무실인데 그냥 들어온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물건은 함부로 다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그러나 육현석은 괜찮다면서 손짓했다.“괜찮아. 우리가 낯선 사람도 아니고 설마 내가 승재 형 물건을 훔치겠어? 게다가 네 물건을 가지는 건데 뭐가 어때.”“...”고은서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육현석은 이미 사무실 책상 옆으로 걸어가더니 그곳에 있는 캐비닛을 열고 가지런히 접혀있는 회색 담요 하나를 꺼냈다.“계속 여기 있을 줄 알았다니까.”육현석은 이내 담요를 고은서한테 건네주었다.“은서야, 봐봐. 익숙하지 않아?”익숙하다고 느낀 고은서는 문뜩 자신이 예원 별장에 있을 때 귀비 의자에 깔고 발을 덮는데 썼던 담요라는 걸 발견했다.“이 담요가 왜 여기 있는 거죠?”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승재 형이 넣어둔 거겠지.”그러나 육현석은 이내 놀라 하며 물었다.“설마 네가 승재 형한테 준 건 아니지?”‘승재 형이 고은서가 준 담요까지 소장할 정도로 변태적인 사람이었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부인하려고 할 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예원 별장에 있을 때 이미숙이 한 번 소파에 있는 곽승재한테 관심을 표해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마침 곽승재의 도움을 받은 탓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담요 하나를 이미숙한테 건네주면서 그에게 덮어주라고 했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발을 놓는데 쓰던 낡은 담요를 아줌마가 이미 처리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곽승재 사무실에 있는 거야?’“진짜 형이 훔친 거야?”육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은서를 보면서 깜짝 놀라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어색해하며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부인했다.“그럼 네가 준 거네.”육현석이 이내 흥분해 하며 말했다.“은서야, 형이 이 담요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내가 한 번 우연하게 덮고 있었는데 형이 갑자기 화를 내면서 날 꾸짖기까지 했다니까.
육현석은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고은서가 회사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멀리서 그의 차가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고은서가 차에 오르자마자 육현석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은서야, 무슨 일 있었어? 승재 형이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그의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던 고은서는 방금전에 경찰과 했던 통화내용을 육현석한테 다 알려주었다.그도 듣자마자 약간 의아해했다.“갑자기 진짜 정신병 환자가 되었다고? 전에 갔을 땐 다 연기였잖아.”“전에는 연기지만 그사이에 정신병 환자가 될만한 일을 겪었을 수도 있잖아요.”고은서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신병원에 갇혀서 자유의 몸도 아닌 사람이 무슨 일을 겪겠어?”육현석이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래서 정신병원에 가서 백유미를 만나보려고 했는데 경찰 측에서 상황이 심각하다면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걸 피면하기 위해 특별 병실에 안배해 놓았다고 면회가 불가능하다고 하네요.”그 말을 들은 육현석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헛된 생각은 그만하고 승재 형 찾으러 가자. 승재 형이라면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백유미가 정말 전문가까지 속일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거든 곽승재도 그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곽승재의 생각을 한번 들어봐야겠어.’고은서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육현석과 함께 GS그룹으로 향했다.프론트 데스크 직원은 고은서를 알아보고 공손하게 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다가왔다.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약간 불편했던 고은서는 호칭을 바꿔 달라고 당부했다.“죄송하지만 현재 저랑 곽승재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 그냥 은서 씨라고 불러주세요.”프론트 데스크 직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뜻대로 고은서 씨라고 불렀다.그리고 이내 공손하게 물었다.“곽 대표님 찾으러 오신 거죠?”“네. 승재 형 찾으러 왔어요. 위에 있죠?”“요즘 바쁘셔서 지금 회사에 안 계세요. 찾으시려거든 직접 전화하시는 게 더 나을 것
유일 투자 은행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먼저 직원들과 함께 간단한 업무 회의를 열고 곽승재의 스케줄을 알아보기 위해 육현석한테 연락했다.“은서야, 마침 전화하려고 했는데.”육현석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승재 형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러는데 혹시 승재 형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게 있어?”정보를 캐내려고 전화했는데 도리어 정보를 알려주는 입장이 될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저도 잘 몰라요. 연락이 안 되나요?”고은서가 물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연락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주민기도 연락이 안 되어서 비서실에 전화 해보았는데 비서는 그저 곽승재가 바쁘다고만 했다고 말했다.“은서야, 혹시 승재 형이랑 싸웠어?”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 대신 스테인리스 철봉 공격을 막아준 그 날 자신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은 탓에 그가 약간 기분 나빠했던 일이 떠올랐다.‘내가 한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건가? 아니면 그날 진짜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또 그날 육현석이 곽승재한테 전화했을 때 전화 너머로부터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온 게 떠올랐다.‘그럼 그 여자는 곽승재가 다쳐서 마음 아파서 운 거야?’“은서야, 우리 승재 형 찾으러 같이 GS그룹으로 가보지 않으래?”평소 같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텐데 지금은 곽현수가 준 임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곽승재를 어떻게서든 만나야 했다.그러나 육현석의 의심을 받는 걸 피면하기 위해 그녀는 한참 동안 망설이는 척하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나 마침 볼 일이 있어서 유일 투자 은행 근처에 있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가방을 들고 내려가려고 할 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육현석이 까먹은 일이라도 있는가 해서 폰을 들고 확인해 보았는데 낯선 유선전화 번호였다.받아보니 다름 아닌 해성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상대방은 아주 예의 바르게 백유미가 거의 완치 되어서 전에 얘기했던 정신병 위장 사건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가를 파견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끔
고은서는 고씨 집안 본가에 들렀다.비록 며칠 전에 고준석을 만났지만 지금도 너무 보고 싶었는지라 가서 함께 앉아 소소한 대화라도 나눌 생각이었다.그날 고은서가 고국성 집에서 나오면서 고준석한테 고국성 일에 관해 다 알린 탓에 그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화를 내긴 했으나 그녀가 유성준과 함께 고국성을 도와 일을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 달랜 덕분인지 아니면 나이도 있고 유성준을 굳게 믿어서인지 직접 나서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고국성도 이미 마흔이 넘어갔고 MQ의 현 관리자로서 회사 일에 이미 손을 뗀 고준석이 계속 모든 일을 일일이 신경 써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은서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준석은 오춘식과 함께 정자에서 바둑을 하고 있었다.그녀가 고준석을 향해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오춘식은 눈치 있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고준석은 다가와 다정하게 자신의 어깨에 기대는 고은서를 보면서 웃으며 물었다.“아이고, 우리 은서 얼마 만에 애교를 부리는 거야? 할아버지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고준석은 고은서를 매우 아꼈는데 그녀가 애교만 부리면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다 응해 줬었다.그 때문에 고은서는 자신이 모든 걸 쉽사리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차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전생에 자신이 곽승재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고은서는 자신만만하게 전미자한테 곽씨 가문 며느리 직책을 잘 이행하고 꼭 곽승재가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정신병원에서 자살하고서야 이 세상엔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이 쉽다고 느낀 건 누군가가 대신 그 대가를 치러줬기 때문이라는 것도 깊게 깨달았다.이번 생만큼은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항상 조심스럽게 살아왔다.그녀는 곽승재랑 이혼만 하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현실은 그보다 더 잔인했다.“은서야,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누가 널 괴롭혔어?”
고은서는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면 삼촌 일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승재가 도와준다고 한 번 더 넘어갈 생각이야?”곽현수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고은서는 곽현수가 직접 나선 이상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게다가 어제 오미나의 반응을 보아서는 그녀의 배 속의 아이가 십중팔구 고국성의 아이가 맞을 것이다.아이를 지우지 않는다면 시한폭탄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리고 곽현수가 마음만 먹는다면 경찰에 잡힌 강현철을 데리고 나오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어느 날엔가 갑자기 고준석 앞에 나타나거나 또는 고국성을 대하듯이 똑같은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곽승재는 현재 회사 일을 처리하기도 바쁠 텐데 더는 민폐를 끼쳐서는 안 돼.’시가 가게의 부드러운 불빛이 유독 눈부시게 느껴지는 때이다.사실 곽현수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곽승재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가 자신을 좋아하든 원망하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곽현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고은서가 떠난 후 곽현수는 VIP룸 뒤에 있는 실내 정원으로 갔다.그곳에는 트위드 자켓을 입은 여시은이 고양이를 그네 위에 앉아 함께 놀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는 장면이었다.곽현수를 발견한 여시은은 이내 그네에서 내려오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버님이라고 불렀다.“시은아, 많이 기다렸지?”곽현수가 웃으면서 물었다.“아니에요. 여기 풍경도 좋고 캣닢도 있어서 쿠아랑 엄청 재밌게 놀고 있었어요.”여시은이 달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저기 가서 앉자.”곽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손짓했다.“좋아요!”여시은은 쿠아를 캣닢 옆에 내려놓고 곽현수와 함께 파라솔 아래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직원은 두 사람을 위해 차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여시은은 한 입 맛보고는 이내 똘망똘망한 눈
고은서는 순간 죄책감에 휩싸였다.육현석도 전에 곽승재가 회사 내부에서 곽현수와 기 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다고 했는데 또 고국성 일로 꼬투리까지 잡힌 이상 많이 힘들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제인 제약 사건은 판주 투자 은행과도 연관된 일이었기에 곽현수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고국성 일은 확실히 공사가 선명하지 못하다고 꼬투리가 잡힐 만 했다.방금전 곽현수가 한 말도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가 곽승재를 쫓아내려거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승재가 너 때문에 이성을 잃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난 그게 무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곽현수가 말을 이어갔다.“입으로는 승재랑 더는 같이 있을 리가 절대 없다고 하지만 한두 번은 그렇다 쳐도 승재가 열 번 심지어 스무 번이 되도록 너를 향해 구애한다고 해도 네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어? 시간만 나면 네 할아버지랑 바둑하고 얘기 나누러 고씨 가문 본가로 찾아가는데 아버지인 나도 그런 혜택을 누린 적이 없어. 게다가 네 가족들도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승재를 계속 사위로 대하면서 걔한테서 얻을 만큼 얻어 가졌잖아.”곽현수가 하찮다는 듯 비아냥거렸다.“네가 말로만 하는 보장은 단지 너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하는 거겠지.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거야. 그런데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고은서는 순간 난감해졌다.‘할아버지한테는 곽승재가 스스로 찾아간 게 맞겠지만 삼촌이랑 숙모 쪽은 분명히 아닐 거야. 곽승재가 나랑 재혼하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일부러 나를 속이고 MQ 일로 여러 번 찾아간 게 분명해.’고은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거짓말로 들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확실히 곽승재의 도움으로 혜택을 누릴 만큼 누린 이상 곽현수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곽현수가 삼촌 일로 나를 만나자 한 것도 또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마 다 원하는 바가 있어서겠지.’고은서는 더는 변명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
전미자 생일 연회 때마침 성씨 집안 소개로 새로운 사업 계약서를 체결한 고국성은 눈에 띄게 우쭐대며 다녔는데 곽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업적을 적지 않게 으리으리하게 포장해서 떠벌리고 다녔었다.그래서 곽현수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그녀는 그가 자신은 고국성처럼 천한 사람을 직접 처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은서는 화내는 대신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우리 삼촌이 약간 잘난 체하면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이건 삼촌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 이 이유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죠. 회장님께서 우리 삼촌이 면한 일에 관해 잘 모르신다면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그녀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지라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아니면 어제 오미나 씨랑 대화한 내용을 녹음해 두었는데 직접 들어보실래요?”곽현수는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설명과 녹음파일 같은 걸 계속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그는 오미나에 관해서도 더는 묻지 않고 찻잔을 들고 아주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으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오늘 찾아온 이유가 대체 오미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야 아니면 네 삼촌 일을 해결하고 싶어서야?”“삼촌 일을 해결할 겸 오미나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사실 그보다 우리 삼촌이 어느 면에서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더 알고 싶네요.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은데 회장님께서 알려줬으면 좋겠네요.”고은서도 꿀리지 않고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생각보다 더 총명하네.”곽현수는 여전히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총명해 보았자 당신 같은 사람 눈에는 들지 않겠지.’고은서는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곽현수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잠시 후, 곽현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승재가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