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가장 아끼는 분이지만, 전생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반드시 곁에서 효도하여 외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은서는 몸이 만신창이라 당분간 외할아버지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결국 설렘과 간절함을 애써 억누르고 며칠 후에 찾아뵙기로 약속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고은서는 테라스에 앉아 지난 일들을 회상했다.18살이 되던 해, 사랑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사랑에 빠진 소녀는 체면 불고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남자에게 대시했지만, 끝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대학 졸업할 때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곽승재의 할머니 전미자가 둘이 혼인신고 하도록 적극 추진한 덕분에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비록 곽승재는 대놓고 그녀를 싫어했지만, 언젠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는 이름다운 환상을 줄곧 품고 있었다.결혼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나자 백유미가 귀국해서 곽승재의 회사에 입사했다.두 사람 사이의 남다른 인연은 그녀에게 어쩌면 곽승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결국 점점 초조해지면서 떼를 부리기 시작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확인받고 싶었다.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투신자살로 협박하는 바람에 곽승재과 백유미의 사이는 갈수록 돈독해졌고, 곽승재가 집에 돌아오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절망에 빠진 그녀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미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곽승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출국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하지만 출국 전날, 뜻하지 않게 집에 강도가 들어 불까지 지핀 탓에 백유미는 자칫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 심지어 범인을 붙잡았는데 다름 아닌 그녀가 시켰다고 딱 잡아뗐다.이 사건은 곽승재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입이 아프게 변명해봤자 그녀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대쪽 같이 밀어붙였다.결국 외할아버지의 설득과 전미자의 도움을 받아 옥살이는 면하게 하겠다는 대답을 어렵게 받아냈다.그
고은서가 몸을 홱 돌렸다.“누가 버리라고 했죠? 당장 주워요.”프런트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어차피 대표님은 볼 생각도 없을 텐데 굳이 헛수고할 필요 있어요? 그동안 챙겨온 물건도 다 버리라고 했거든요.”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일하는 게 힘들까 봐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음식이며, 옷이며,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마저 가져다주었다.게다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처럼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은 진심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꼴이라니.어떻게 고작 프런트 직원이 감히 그녀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냐는 말이다.고은서는 싸늘한 시선으로 프런트 직원을 노려보았다.“대표님이 보든 말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물건을 함부로 버리죠? 얼른 챙기지 못해요?”여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알겠어요, 다시 챙기면 되잖아요. 목을 매서 겨우 대표님을 만난 주제에 어디서 사모님 행세를 하는 건지, 참.”“무슨 일이죠?”그녀에게 사과를 요구하려던 찰나,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내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의 비서 주민기가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주민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색 프리미엄 맞춤 정장 차림의 곽승재였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비록 안색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지만 비주얼 자체가 워낙 훈훈한지라 오히려 남성미를 한층 더 부각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그를 만날 때마다 고은서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이름을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입도 벙긋하기 싫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주민기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득의양양한 얼굴로 잽싸게 대답하는 예전과 달리 고은서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곽승재가 인정한 아내가 아니었다.남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처세술에 불과했으니까.“무슨 일이지?”고은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곽승재는 프런트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펜 이리 줘요.”“대표님, 거래처 분들이 계약 체결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주민기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는 GS 그룹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중요한 협력 건이었는데, 자칫 고은서 때문에 망칠 뻔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무시하고 주민기와 함께 급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곽승재!”고은서가 뒤쫓아갔다.“저 여자 끌어내.”곽승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고은서를 에워쌌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워커홀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바빠지기 시작하면 오늘은 이혼하기 글렀기에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내일 오전 9시, 구청에서 봐!”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떠났다.대체 간다는 건가? 만다는 건가?하루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곽승재라면 무조건 올 텐데...이런 생각에 고은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곧이어 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메일에 접속했다.메일함에는 여러 투자은행에서 보낸 채용 제의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처럼 바로 메일을 삭제하는 대신 하나씩 클릭해 봤다.그러나 전부 기한이 지난 메일로 심지어 난다긴다하는 금융권 엘리트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투자은행도 있었다.정작 그녀는 쓰레기 같은 곽승재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차지 않았는가?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지경이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서 절대로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삶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했다.몇 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서 내일이면 곽승재와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이내 PC 전원을 끄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으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다.한창 열심히 짐을 싸고 있을 때 이미숙이 걸어 들어왔다.“사모님, 짐을 왜 싸는 거죠? 여행 가시게요?”이미숙은 곽승재가 임시 고용한 도우미로 혹시라도 두 사람의 상황을 전미자에게 보고하는
“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괜찮아.”고은서가 거절했다.“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푹!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이제 네 차례야.”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디 가!”고운서가 버럭 외쳤다.“사인 안 해?”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네가 꾸민 짓이지?”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고은서, 우리 할
고은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전생에 무려 8년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건 달랑 이혼협의서 한 장, 그리고 백유미와 결혼했다는 소식뿐이지 않은가?그런 남자가 어찌 단 몇 주 만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냐는 말이다.“할머니는 만약 승재가 우리 은서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이혼하고 싶냐는 뜻이야.”전미자가 다시 물었다.노부인의 잔뜩 기대하는 눈빛 속에서도 고은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번 생에는 어떻든 간에 곽승재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제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지긋지긋했고, 곽승재와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삶을 맞이할 생각이다....본가 거실을 나서자 고은서는 싸늘한 얼굴로 차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이혼한다고 생난리를 쳤는데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지 않은가?어쩌면 곽승재는 그녀와 전미자가 짜고 치는 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에 차에 타면 추궁과 모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결국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택시 타고 가려고 했다.“타!”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곽승재는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괜찮아, 어차피 가는 길도 아닌데.”고은서도 매섭게 쏘아 붙었다.이혼을 못 해서 짜증이 난 건 매한가지라 스스로 제 무덤을 파서 곽승재의 화풀이를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곽승재의 말투에 협박이 담겨 있었다.“소리는 왜 질러?! 그렇게 능력 있으면 나한테 따지는 시간에 이혼 수속이나 하지?”고은서가 화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이런 말투로 그를 대한 적은 처음이고, 심지어 반박까지 하다니?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이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의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는 곽승재를 발견했고, 잽싸게 도망치려는 찰나 이미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이거 놔!”결국 다급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그의 팔뚝을 콱 물었다.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목덜미를 잡고 차에 쑤셔 넣었다.“
화면에 뜬 연락처를 보자 곽승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고, 잽싸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승재야, 판주 미팅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언제 와?”고요한 차 안에서 백유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곽승재의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은서의 귀에 들렸다.곽승재는 최근에 판주 투자은행을 인수했고, 백유미가 이사직을 담당하고 있다.전생에 백유미는 판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커리어 여왕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당시 납득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GS 그룹에 입사해서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지만 곽승재의 조롱만 받았다.“네가 출근한다고?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고 있어? 이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유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할애했는데 고작 호언장담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비록 유미는 너보다 배경이 빵빵하거나 가진 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항상 노력하고 사리에 밝기도 해. 어디 너처럼 갑질밖에 모르는 줄 알아?”...“그래, 일단 알겠어.”곽승재가 전화를 끊자 고은서도 회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했다.전생에서 봤던 곽상재의 눈코입이 점차 현생과 오버랩되면서 별안간 차 안의 공기마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실장님, 저 앞에 세워주실래요? 여기서 내릴게요.”“사모님, 여기는 택시도 안 잡힐 텐데 대표님 먼저 회사로 모셔다드리고 댁까지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 여기서 세워주세요.”고은서는 단 1초라도 곽승재와 같은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주민기는 차를 세우는 대신 백미러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안달 난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의 속에서 또다시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차 세워요. 여기서 내려줘요.”주민기는 그의 말에 따라 길가에 차를 댔다.고은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았다.“고은서, 감히 우리 할머니를 한 번만 더 건드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곽승재의 경고에도 그녀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준수한 외모의 남자는 살짝 건방진 느낌마저 들었고, 흰색 캐쥬얼 정장을 입고 있었다.만약 보통 사람이 이런 옷차림이라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들겠지만, 그는 되레 귀티와 여유가 흘러넘쳐 이미지와 찰떡이었다.어딘가 낯익은 얼굴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도련님.”기사가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불렀다.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시간 지체해서 미안해요. 제가 100% 보상해드릴게요.”고은서가 진심으로 사과했다.이에 남자는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차량 수리비를 제외하고 정신적 보상 그리고 손실비도 있죠. 지금 몇조가 넘는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지체되었으니까 모두 책임지세요.”상대방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 고은서는 피식 웃기만 했다.“저기요, 외모도 멀쩡하고 돈도 좀 있어 보이는데 사기로 먹고사는 거였어요?”어쩐지 사진 찍고 증거를 남기는 기사의 모습이 절대로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남자는 화내기는커녕 여전히 여유만만했다.“내가 뭐로 먹고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만약 그쪽이 배상할 능력이 없다면 차주한테 하라고 해요.”그제야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타깃이 곽승재라는 것을 눈치챘다.한편, 머릿속으로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떠올랐다. 그는 바로 곽승재의 최대 라이벌인 민시후였다.전생에 민시후와 직접 만난 적은 없었고, 정신병원에 있을 때 경제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자주 접했다.당시 그는 곽승재에 버금가는 몸값을 자랑했고, 그가 설립한 투자회사는 GS 그룹을 바짝 추격하는 존재로 거듭났다.“곽 대표 와이프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당신 차를 끌고 나와 내 차를 박았는데 어떻게 할 건가?”고은서가 전생을 회상하고 있을 때 민시후는 이미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남편이랑 한마디 해요.”민시후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비록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여보세요’라고 말했다.“혼자 차 끌고 나갔어?”짜증이 덕
여시은은 흰색 운동복을 벗고 귀여운 스타일의 치마를 입고 있었고 덕분에 한층 더 상큼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곽승재를 본 여시은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곽 대표님, 은서 씨 보러 오신 건가요?”“은서 씨에게 이렇게 잘해주시다니! 오후에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에...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으셨을 텐데요?”곽승재는 여시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돌아갈 때 내가 태워 줄까?”“괜찮아.”고은서가 정중히 거절하며 대답했다.“고객과 저녁 약속이 있어서 그럼 이만.”곽승재는 계속 시간을 확인하는 고은서를 보며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가.”곽승재가 다정하게 말했다.그의 다정함에 고은서는 약간 어색함을 느끼며 그를 무시한 채 여시은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탈의실로 향했다.곽승재의 시선이 여전히 고은서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는 걸 발견하고 여시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곽 대표님, 이렇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시니 은서 씨도 언젠가는 감동할 거예요.”곽승재는 말없이 조용히 있었다. 사실, 고은서가 예전처럼 그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아직 감동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여시은이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아버지께 두 가문의 협력 문제를 해결하자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저를 놀리시면서 ‘너랑 곽씨 가문이 무슨 관계가 있냐? 왜 그렇게 급하게 도와주려 하느냐?’고 하셨어요.”여시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아버지는 또 곽씨 가문이 해성에서나 국내에서나 저희 집안보다 실력이 부족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제가 이런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곽 대표님...”여시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급하게 핸드폰을 열었다.“은서야, 무슨 일이야?”상대방의 말에 곽승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알았어. 기다릴게.”그 뒤, 곽승재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여시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죄송해요. 방금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
고은서는 이상하다고 느꼈다.‘건장한 중년 남자가 골프 같은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다칠 수 있을까?’사람들에게 물어본 후, 고은서는 남자가 탄 골프카트에 문제가 생겨 운전 중 갑자기 밑에 있는 인공 호수로 돌진했다고 알게 되었다.중년 남자는 차가 부딪치는 충격으로 머리와 다리가 꽤 심하게 다친 것으로 보였다.유명하고 오래된 골프장이라 이런 사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제기하며 골프장의 안전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은서는 중년 남자의 부상에 대해 계속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히 무엇이 이상한지 꼬집을 수 없었다.직원들은 현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고 고은서는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고객들에게 저녁을 제안했다.고객은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고 고은서를 따라 골프카트를 타고 잔디밭을 떠나 휴게실로 돌아갔다.고은서가 휴대폰을 꺼내자 마침 게임 회사 대표가 전화를 걸어왔다.그녀는 직원에게 고객을 남자 탈의실로 안내하라고 눈짓하고 송민아와 다른 직원들은 여자 탈의실로 갔다.고은서는 전화를 받자 게임 회사에서는 고은서와 유일 투자은행이 사기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협력하고 싶다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고은서는 상대방에게 게임 프로젝트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와 투자 예상 금액 등을 검토한 후 나중에 세부 사항을 논의하자고 말했다.상대방은 기쁜 마음으로 최대한 빨리 보고서를 완성하겠다고 약속했다.“은서야.”전화를 마친 후,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곽승재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정장과 넥타이를 잘 갖춰 입고 마치 중요한 자리를 마친 듯한 모습이었다.“괜찮아?”곽승재가 급하게 고은서를 살폈고 그녀는 의아해하며 말했다.“괜찮아. 왜 그렇게 물어?”곽승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골프카가 고장 나서 다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혹시 다친 건 아닌지 걱정했어.”고은서는 휴대
고은서는 옅게 미소 지으며 여시은과 더 깊이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 여재훈을 데려와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여재훈이 참석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유일 투자은행의 실력을 다시금 평가하게 되었고 개업식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이제 몇 개의 프로젝트만 더 따낸다면 유일 투자은행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터였다.여시은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친구잖아요.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당연히 도와야죠! 아빠도 마침 시간 되길래 같이 가자고 했어요.”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시은의 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그녀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했다.“정말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며칠 더 쉬게 한 후에 제가 데리러 갈게요.”통화를 마친 여시은은 먼저 고은서에게 쿠아가 다쳤다는 사실을 설명했다.“며칠 전 쿠아가 위층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앞다리가 골절되고 이빨도 하나 부러졌어요. 방금 수의사가 추가 검진을 마치고 다친 다리도 붕대로 잘 감싸 놓았다고 연락하셨어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쿠아가 다쳤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었다.사진 속 쿠아는 대리석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입 주변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엉망이 된 털, 몸을 웅크린 앞발, 반쯤 감긴 눈에는 공포와 경계심이 가득 차 있었다.고은서는 사진만 봐도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은서 씨 개업식 날 저녁에 떨어졌어요. 제가 그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르실 거예요.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다행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여시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쿠아가 그렇게 말썽꾸러기였어요?”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녀도 쿠아를 여러 번 안아봤지만 쿠아는 겁이 많고 심지어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그런 녀석이 활발하게 뛰어다니다가 위층에서 떨어졌다고? 고양이들은 유연성이 좋아서 웬만해선 크게 다칠 일이 없을 텐데...’여시은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죠. 미리 케이지에 넣어놔
여재훈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중년 남자는 다시 한번 감탄하며 말했다.“특히 이 눈썹과 눈매. 마치 똑같은 틀에서 찍어낸 것 같네.”고은서는 여재훈의 날카로운 눈매를 바라보았다.그는 이미 중년이 되었지만 전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이목구비에서 강한 기품이 느껴졌다. 젊었을 때는 분명 완벽한 미남이었을 것이다.자신도 외모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두 사람을 부녀로 착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은서가 당황해하며 해명하려던 찰나 앞쪽에서 되돌아오는 여시은이 보였다.아마도 중년 남자의 말을 들었는지 여시은의 얼굴이 잠깐 굳어진 듯했다.“장 대표, 내 딸은 저쪽에 있네.”여재훈이 여시은을 바라보며 손짓했다.여시은은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늘 그렇듯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아빠!”여재훈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개했다.“전에 말한 적 있지? 한라 그룹 장 대표야. 조금 늦게 왔어.”여시은이 달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장우현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아하! 여기가 우리 조카였네. 내가 착각했어. 우리 조카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네. 분위기만 봐도 명문가 아가씨라는 게 티 나네.”여시은도 웃으며 말했다.“제가 엄마를 더 닮았어요. 아저씨는 전에 저를 만난 적이 없으니 착각하실 만도 하죠.”그러고는 다정하게 고은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여기는 제 친구예요. 은서 씨는 능력 있는 친구예요. 직접 투자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아저씨도 관련된 업무 있으시면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장우현이 호쾌하게 웃으며 답했다.“그럼, 그럼. 조카의 친구인데 당연히 잘 챙겨야지.”그렇게 답한 장우현은 실수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여시은을 한참 동안 칭찬했다.“아저씨, 아빠랑 가서 라운딩하세요. 아버님도 저쪽에 계세요.”여시은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여재훈을 향해 말했다.“아빠, 저는 은서 씨랑 얘기 좀 나눌 테니까 아빠는 가서 아버님이랑 있어 주세요.”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서가 먼저 투자의사를 비추자 상대방은 당연히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동시에 몇 가지 의문도 품고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서 다음 단계를 논의하기로 약속했다.명운 주류의 상장 일정이 확정되고 판매 상황도 안정적이었다.상장만 하면 도아름의 가치는 더욱 상승할 것이 분명했다.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도아름에게 아첨하려고 했고 그녀가 유일 투자은행에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교육 관련 프로젝트를 소개해 주었다.교육 관련 프로젝트는 상당히 성숙한 분야 이를 추진하려는 회사들도 많았기에 좋은 프로젝트로 평가받았다.고은서는 도아름에게 연락처를 받은 후 대표와 골프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후가 되어 고은서는 송민아와 전문 투자 분석가와 함께 해성에 있는 유명한 골프장으로 향했다.만나자마자 양측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형식적인 대화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협력을 요청했었는지 상대방은 고은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차가운 태도를 보였고 그들이 새로 시작한 회사라는 사실을 알자 협력 의사가 전혀 없는 듯해 보였다.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상대방이 골프를 좋아한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비즈니스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고은서도 골프를 할 줄 알았지만 오랜만이라 약간 서툴렀다.송민아는 자진해서 골프를 잘한다며 몇 게임 함께 치자고 제안했다.상대방도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열고 함께 골프 코스로 향했다.“우와, 내가 이겼어!”그때 멀리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역시나 여시은이 있었다.그녀는 흰색 골프복을 입고 흰색 장갑을 끼고 기뻐하며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다.“은서 씨!”여시은도 그녀를 발견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여시은이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 여재훈을 데리고 왔다는 생각에 고은서는 감사 인사를 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송민아와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시은에게 다가갔다.고은서가
고은서는 잠시 생각한 후 거절했다.“고맙지만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돌볼 시간이 없을 것 같네.”곽승재가 차분히 답했다.“그럼 아주머니가 계속 여기 남아서 돌봐주면 되겠네.”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좋아한다고 해서 꼭 소유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가끔 보는 걸로 만족할게.”곽승재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이미숙이 차를 가져와 고은서와 곽승재에게 각각 한 잔씩 건넸다.고은서는 작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이미숙에게 말했다.“며칠 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 나았으니 짐 정리하셔서 승재랑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셔도 돼요.”그 말을 들은 이미숙이 급히 말했다.“사모님,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예원 별장에는 이미 가정부가 많이 있어서 제가 없어도 괜찮아요. 예전에도 말씀하셨잖아요. 같이 나와서 돌봐달라고. 저 여기 남아도 괜찮을까요?”고은서는 예원 별장을 나오기 전 이미숙을 설득한 적이 있었다.그녀는 신중하고 음식도 잘하고 나쁜 습관도 없었다.하지만 이미숙은 그녀가 곽승재를 사랑한 과거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지금에 와서 집에 남긴다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고 어쩌면 그녀의 행방을 곽승재에게 이를지도 몰랐다.“네 일정 알기는 쉬워. 아주머니가 아니더라도 알아낼 방법은 많아.”고은서의 생각을 눈치챈 곽승재가 담담히 말했다.“잘 생각해 봐. 아주머니를 남기고 싶으면 앞으로 네가 월급을 주면 돼. 주 비서에게 계약 해지 하라고 통보할게.”곽승재는 공사를 구분해서 말했다.“사모님, 사모님과 지연 아가씨 두 분 모두 출근해야 하잖아요. 스스로 돌보기도 어려우니 제가 남으면 두 분 잘 도와드릴 수 있어요.”이미숙의 말에 고은서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지금까지 밥은 항상 박지연이 하고 있어 그녀도 부담스러운 참이었다.적당한 가정부를 찾고 싶었던 차에 이미숙이 자발적으로 남고 싶다고 하니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아주머니가 수고해 주세요.”“감사합니다. 사모님!”이미숙은 기뻐
곽승재가 태연히 답했다.“목적지가 같은 데 왜 같이 안 가? 너랑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잖아.”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결국 운전대는 곽승재의 손으로 넘어갔다.그가 내세운 이유는 고은서가 하루 종일 피곤하게 돌아다녔으니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운전하는 건 피로 운전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했다.차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주인혁의 연락을 받았다.주인혁이 명운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나서 두 사람의 연락은 줄어들었다.주인혁의 매니저가 좋은 배역을 따내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전생에서 주인혁은 가요계에서만 발전하고 영화계거나 드라마계에는 들어가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왜 마음을 바꿨는지는 몰라도 고은서는 그를 응원했다.“인혁 씨, 촬영은 다 끝났어요?”고은서가 물었다.“아니요. 아직 촬영 중이에요.”주인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부드러웠다.“누나, 오늘 회사 개업했다면서요? 죄송해요. 이제야 소식을 들어서 축하 화환도 보내지 못했네요.”고은서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괜찮아요. 촬영이 중요하죠.”“며칠 뒤에 해성에 돌아가는데 밥이라도 한 끼 살게요.”고은서가 장난스럽게 답했다.“팬도 많은 가요계 왕자인데 함부로 밥을 어떻게 먹어요. 혹시나 팬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히는 날에는 팬들이 저를 괴롭힐지도 몰라요.”“누나, 놀리지 마세요.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도 직업일 뿐이에요. 사생활까지 다 빼앗길 순 없죠.”주인혁은 마음이 급했다.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농담이에요. 촬영 잘하고 해성으로 오면 연락해요.”“네.”주인혁은 전화를 끊기 아쉬운 듯 다시 말했다.“누나, 바빠도 몸 잘 챙기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요.”“내가 누나인데 그런 건 동생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고은서가 장난스럽게 답했다.“걱정하지 마요. 신경 쓸게요.”주인혁이 잠시 멈칫하여 말했다.“누나, 지금은 제가 크게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그래요. 인혁 씨도 몸 잘 챙겨요.”전화를
곽승재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속에 있는 실망감을 감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널 돕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고은서는 갑자기 짜증 내며 답했다.“곽승재, 정말 이럴 필요 없어. 난 당신한테 감정이 식었어.”곽승재는 잠시 침묵한 후 단호하게 말했다“알아. 네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말했잖아. 네 결정에도 간섭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를 좋아하고 널 위해 움직이는 건 내 선택이고 내 권리야. 그걸 네가 막을 수는 없어.”고은서는 말로 다 하지 못할 느낌을 받았다.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곽승재는 근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직원들은 음식을 보고 고은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대표님 정말 통이 크시네.”직원들은 모두 큰 책상에 둘러 앉아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곽승재도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앉았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곽승재를 알고 있었고 고은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고은서 옆자리를 그에게 양보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많이 빠졌더라.”고은서가 그를 경고하듯이 바라보자 곽승재는 더 이상 음식을 집지 않고 대신 고은서에게 물과 휴지를 건넸다.“대표님, 곽 대표님 정말 다정하시네요.”한 직원이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정말 너무 보기 좋으세요. 저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네요.”곽승재의 외모도 자신감 있는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렵게 했다.하지만 그런 사람이 고은서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은서가 말한 여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보는 사람마다 응원하다가는 큰코다칠 거예요.”“몰라요. 너무 보기 좋은 걸 어떡해요! 곽 대표님, 힘내세요! 저희가 열심히 응원해 드릴게요.”곽승재는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노력할게요.”“와!”곽승재의 대답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고은서의 반응을 기대했다.“다들 그만 떠들고 밥이나 먹어요.”고은서는 직원들의 호들갑을
고은서가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곽승재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러나 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처리하지 못한 메시지가 담긴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고된 일정을 나타내듯 미간은 찌푸려지고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고은서는 육현석에게서 곽승재가 제인 제약 프로젝트로 인해 주주들의 압박을 받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GS 그룹 다음 분기 실적의 상승을 약속했다고 들었다.그로 인해 최근 거의 매일 같이 야근하고 있다고 했다.“은서야, 볼일은 다 끝났어?”고은서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곽승재가 눈을 떴다.시선이 마주치자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에 또렷한 눈이 반짝였고 목소리에는 낮고 유혹적인 톤이 섞여 있었다.고은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왜 아직 안 갔어? 할 말이라도 있어?”“저녁 안 먹었지? 옆에 가서 뭐라도 좀 먹을래?”곽승재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제안했다.고은서도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밖에 나갈 시간이 없었다.“괜찮아. 배 안 고파.”하지만 곽승재는 굽히지 않았다.“그럼 음식 좀 배달시킬게.”곽승재는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음식을 많이 보내라고 지시했다.“직원들도 아직 저녁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다 같이 먹자.”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이미 주문된 음식이었으므로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얼마야? 송금해 줄게.”곽승재가 깊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나랑 그렇게 내외하지 않아도 돼.”“나눌 건 나눠야지. 우리가 무슨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네게 빚질 수는 없잖아.”곽승재는 고은서의 목소리에서 불쾌함과 짜증을 느꼈다.하지만 곽승재는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게 좋은 신호라 생각했다.그는 고은서가 그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 정도 불만을 가지는 것이 더 나았다고 느꼈다.하여 곽승재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현금으로 줘. 지난번에 준 치료비랑 합쳐서 적금하면 되겠다.”고은서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