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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류한나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

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

“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

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

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

“이제 네 차례야.”

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

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

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

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

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디 가!”

고운서가 버럭 외쳤다.

“사인 안 해?”

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

“네가 꾸민 짓이지?”

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

“고은서, 우리 할머니 건드리면 죽는 줄 알아.”

말을 마치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의 반응과 대화에서 전미자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결국 서둘러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장순이한테서 할머님이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자 그녀도 서둘러 구청을 나섰다.

전미자는 항상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곽승재와 결혼하게 된 일등 공신일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화풀이해 주기도 했다.

이 혼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전미자가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단지 전생에서는 너무 큰 실망감을 안겨드렸을 뿐이었다.

나중에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할머니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접하긴 했으나 제 코가 석 자인 지라 더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번 생에는 비록 더는 손자며느리가 될 수 없지만, 전미자가 베푼 친절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주차장에 곽승재의 차는 이미 사라졌고, 고은서는 부득이하게 택시를 잡아 최대한 빨리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

거실로 직행하자 상상 속 의사들이 들락거리고 도우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광경과 전혀 달랐다.

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은 전미자는 아픈 기색이란 찾아보기 힘들었고, 화가 난 듯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 겁도 없이 감히 나 몰래 은서와 이혼하려고 해?”

“할머니, 진짜 고은서가...”

곽승재가 입을 떼려는 찰나 전미자가 대뜸 지팡이로 그를 때렸다.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변명을 해? 은서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혼이 웬 말이야? 아주 내가 화나서 죽는 꼴 보고 싶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전미자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기침까지 했다.

“할머니!”

고은서가 급히 뛰어갔다.

그녀를 보자마자 전미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은서, 마침 잘 왔어. 이 할머니한테 얘기해 봐. 저놈이 너한테 이혼하자고 강요한 거지?”

고은서는 곽승재를 흘긋 쳐다보았다.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에는 싸늘한 분노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전미자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이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은서는 왜 노려봐!”

전미자는 또다시 지팡이로 곽승재를 내리치더니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

“은서야, 걱정하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해. 이 할머니만 믿어.”

고은서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내 노부인의 손을 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할머니, 오빠가 이혼하자고 한 거 아니에요. 제가 먼저 제안했거든요.”

전미자는 고은서의 손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은서야, 억울한 일이 있으면 할머니한테 말해. 사과받을 일은 사과받고 매를 맞아야 한다면 할머니가 대신 때려줄게. 다만 이혼 갖고 장난치지 마.”

아직도 자신을 믿지 않는 전미자 때문에 고은서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절 아끼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농담 아니에요. 물론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도 아니고 충분한 고민을 거쳤거든요. 저 이혼할 거예요.”

단호한 고은서의 표정을 보자 전미자의 안색도 사뭇 진지해졌다.

“은서야, 할머니 따라 방으로 오너라.”

...

30분 후, 고은서는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전미자를 부축하고 거실로 돌아왔다.

노부인은 씩씩거리며 곽승재를 노려보았다.

“은서 데리고 이만 가 봐. 만약 나 몰래 이혼한다는 소리가 또 들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곽승재는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콧방귀를 뀌더니 일어나서 자리를 떠났다.

“이놈이!”

전미자는 대뜸 욕설을 퍼붓더니 안쓰러운 얼굴로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

“은서야, 할머니랑 약속했다?”

“그럼 할머니도 약속해주세요. 다음 달 할머니 생신이 지나면 이혼을 반대하지 않기로.”

“만약 승재가 너한테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떡할 거야?”

전미자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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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며칠 동안 고은서는 매우 바빴다. 유일 투자은행의 공식 연회가 송민아의 기획으로 예정대로 열렸다. 연회 당일, 주인혁은 자발적으로 현장에 도착해 개막 게스트로 두 곡을 불렀다. 고은서는 그 장면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인혁의 현재 명성에 비해 그가 공연하는 것은 다소 과한 일이었지만 그는 연예인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무대를 도와준다고 했다. “누나, 개업식 때 제가 가려고 했었는데 그때 계약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었어요. 이번에는 절대 거절하지 마세요.” 주인혁이 간절하게 말했고 송민아도 부추기자 고은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의 챔피언인 주인혁의 목소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현장 사람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송민아는 리허설에서 이미 그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전에 왜 팬들이 연예인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 조금 알겠어. 진짜 매력적인 점이 있네.” “발라드 왕자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야.” 고은서가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좋아하면 인혁 씨를 남자친구로 만들어서 노래 듣고 싶을 때마다 현장에서 불러 달라고 해.” 송민아가 고은서의 농담에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너한테 관심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게스트로 온 이유도 결국 너 때문이잖아.” 고은서는 주인혁을 도와준 일을 송민아에게 털어놓았다. “사람은 힘든 순간에 받는 따뜻함에 특별히 감동을 받게 돼. 인혁 씨도 결국 언젠가는 깨달을 거야.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송민아가 고은서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나이 든 사람처럼 말해? 마치 많은 걸 겪은 사람처럼...” 고은서는 그냥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확실히 많은 일을 겪었다.곽승재가 그 괴상한 남자를 쫓아내 준 순간, 고은서는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난 게 아니었다면 곽승재는 단지 잘생긴 남자

  • 어게인, 비긴   제996화

    고은서는 고은혜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은혜도 알아챘을 정도로 여시은은 자신의 의도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은서야, 너랑 여시은 씨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방금 네 말에서 다른 의도가 느껴졌어.”유성준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한두 마디로는 설명이 안 돼.” 고은서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오빠, 여시은이 만약 오빠한테 비즈니스를 소개해 준다면 조심하는 게 좋아. 차라리 거절하는 게 나을 거야.” 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방금 여시은 씨에게 향수를 개인적으로 선물한다고 한 거야? 그걸 MQ의 기획에 쓸까 봐?” 고은서는 확실이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여시은은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왔고 그녀가 자신에게 향수를 맡기려는 목적이 무엇이든 MQ를 떠나서 그건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문제 생기지 않을까?” 고은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사람을 걱정할 줄도 아네?” 고은서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다 계획이 있어.” 복이 아니면 화가 될 테니, 고은서는 여시은이 과연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보려 했다. 그때,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고은혜는 고은서에게 해산물을 사달라고 했다. “최근 인턴 생활 너무 힘들어서 위로가 필요해.” “성준 오빠가 너를 소홀히 한 거야?” 고은서가 일부러 물었다. 유성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냥 내가 더 배우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 공부보다 더 힘들어.” 고은혜는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유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고은혜까 유성준을 초대했다. 유성준은 한동안 고은서를 못 봤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대접할게.”고은혜가 고른 곳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해산물 레스토랑이었다. 주문을 받을 때 웨이터가 하나의 디저트를 추천했다. 그 디저트에는 견과류가 들어 있었

  • 어게인, 비긴   제995화

    여시은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약간의 난처함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마치 고은서가 오해할까 봐 몹시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의 본색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노련한 연기에 속을 일은 없었다. 고은서는 그냥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네가 뭘 했길래 내가 오해할 거라고 생각해?” 여시은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야, 다들 내가 아는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다 같이 몰려와서 환불을 요구했으니 네가 괜히 나랑 연관 지어 오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럼 정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고은서가 다시 묻자 여시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오늘 난 향수 맞추러 온 거라니까. 마침 여기서 다들 만날 줄은 진짜 몰랐어.” 고은서는 처음부터 여시은이 무언가를 인정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얼마나 뻔뻔하게 모르는 척할 수 있을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굳이 더 캐물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고은서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MQ에 대한 오해를 풀어줘서 고마워. 시은아.”여시은도 환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야. 난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분위기를 살피던 여성들이 슬쩍 눈치를 보며 고은서와 MQ 측에 사과하기 시작했다. 특히 잘못된 향수를 가져와 문제를 일으킨 여성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유성준과 고은서에게 거듭 사과했다. 유성준은 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고 고은서 역시 적당히 넘어갈 수 있도록 형식적인 말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자 고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오해도 풀렸으니 이제 본론을 얘기해도 되겠죠?”여시은이 아름다운 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은서야, 그날 목장에서 풀향기가 정말 상쾌하고 좋았어. 그런 향기랑 비슷한 향수 만들 수 있어?” 여시은이 이렇게 연기를 하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 어게인, 비긴   제994화

    유성준과 A/S 책임자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마친 상태였다. “고객님들께서는 제품을 수령하신 후 검품까지 마치셨습니다. 별다른 하자가 없는 이상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받을 때는 미처 확인을 못 했어. 그런데 최근에 써보니까 향이 너무 저급하더라. 우리 이미지에 치명적이니까 반드시 반품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MQ의 실체를 폭로할 수밖에 없겠네?”그때, 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준 오빠.” 그녀가 자연스럽게 인사하자 응접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며칠 전 여시은의 저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상냥하고 공손하던 여자들은 이제 거만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 명 한 명 성을 부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여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눈빛에 조소까지 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순진하게 굴다니. 정말 어리석네.’ 한편, 유성준도 그들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는 눈짓으로 고은서에게 개입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자신과 직원들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MQ는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법적으로 따져도 MQ가 이길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저 여자들의 목적은 단순히 환불이 아니었다. 그들은 논란을 일으켜 MQ의 명성을 깎아내리고 싶어 했다. 불만을 부풀려 가십으로 만들기만 하면 결국 MQ를 향한 대중의 의심이 생겨날 것이고 진실이 어떻든 간에 MQ는 여론의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그 순간 고은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오는 길에 이미 몇몇 언론사에 연락해 두었어요.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지금 바로 공식적으로 논의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말에 상류층 여성들이 순간 움찔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이 MQ의 잘못이 아니라면 MQ는 법적으

  • 어게인, 비긴   제993화

    유일 투자은행은 최근 여러 프로젝트에 투자했으며 그녀가 맡은 명운의 상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찾아와 투자 요청을 해왔다. 하지만 고은서는 너무 두각을 나타내면 경쟁자들의 질투를 사기 쉽다고 우려했다. 반면 송민아의 생각은 달랐다. “질투할 사람들은 우리가 작은 축하 파티를 열든, 공식적인 술자리를 마련하든 어차피 질투할 거야.” 그녀는 유일 투자은행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실력을 널리 알리는 게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 잡는 길 아니겠어?” 송민아는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가 ‘world 게임’ 프로젝트 하나만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맡은 프로젝트도 많잖아. 회사 명성이 커지면 우리 일도 더 수월해질 거야.”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술자리를 한 번 덜 연다고 해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결국 고은서는 송민아의 의견에 설득당했고 그녀를 칭찬했다. “민아야, 대단하네. 갈수록 더 능숙해지는 것 같아.”송민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직접 사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빠가 옛날 무용담을 워낙 자주 들려주셔서 자연스럽게 배웠거든.” 결국 연회는 송민아가 전적으로 맡기로 했다. 한편, KK 측에서 WOR 게임 회사의 핵심 창작진 자료를 고은서에게 전달해왔다. 책임자가 말했던 대로 주요 제작진들은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으며 사회적 배경도 복잡하지 않았고 별다른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허 씨 성을 가진 한 핵심 멤버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가 몇 년 동안 게임을 개발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반대했고 결국 그는 집을 나와 독립했다. 하지만 이제 ‘WOR 게임’의 내부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정식 출시만 된다면 그들의 몸값은 자연스럽게 치솟을 터였다. 드디어 오랜 시간 버텨온 보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고은서는 자료를 덮고 데이터를 확인하려던 찰나 핸드폰 벨

  • 어게인, 비긴   제992화

    온승준이 말을 하려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맑고 가벼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야, 스테이크 몇 분 익힐까?” “왜 지연이한테 안 물어봐요?” “지연이꺼는 내가 다 알아. 지연이의 모든 취향과 금기 사항은 남자친구로서 당근 다 알아야지.”“네. 잘 들었습니다. 제껀 7분 정도 익혀 주세요. 자꾸 그런 눈빛으로 지연이를 쳐다보면 밥을 안 먹어도 당신들의 애정폭탄에 배부를 것 같아요.” “고은서, 제발 입 다물어.” 장난스러운 대화 뒤로 문이 닫히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방금 뭐라고 하려던 거야?] 박지연은 비로소 아직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별일 아니야.] 온승준은 전화를 끊으면서 ‘요즘 잘 지내?’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박지연은 잘 지내고 있었고 그 행복한 모습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육현석이라는 남자는 박지연에게 정말 잘해주고 있었다. 그는 박지연의 모든 습관을 알고 심지어 박지연과 친구들을 위해 직접 요리까지 해주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자 온승준의 얼굴이 간지러워졌다. 그는 손을 대어보았고 손에 물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잠시 후, 육현석이 준비한 음식이 완성됐다. 풍성한 서양 요리와 간단한 한식도 함께였다. 도아름 외에도 송민아가 함께 와서 자리를 빛냈다. “현석 씨, 이렇게 많은 요리를 할 줄 알다니 정말 대단해요.” 송민아가 진심 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육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서양 요리는 간단해서 잘하는 편이고 한식은 이 정도만 할 수 있어요. 더 많이 배워서 지연이가 매번 새로운 요리를 먹을 수 있게 해줄 거예요.” “지연 언니, 이런 남자친구는 어디서 구해요?” 송민아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육현석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민아 씨, 그 말은 틀렸어요. 제가 운이 좋은 거예요. 지연이 같은 좋은 여자를 만났으니까요.” “맞

  • 어게인, 비긴   제991화

    온승준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박지연은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난처하게 안 했어. 그런데 당신은 사과 말고 어머니에게 뭐 더 할 수 있겠어?] 박지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온 선생님,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많이 약속했는지 기억 안 나? 당신 어머니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조 여사님은 날 볼 때마다 비아냥거리기만 했어.][미... 미안...] 온승준이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자 박지연은 그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 원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유혜린 씨가 임신 중이라는 이유로 이번 한 번만 봐준 거야.] 박지연은 잠시 멈춘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정말 법적 절차를 밟을 거야. 당신 아이가 나중에 죄를 지은 할머니를 두게 될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온승준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혜린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자연스럽게 박지연을 한 번 언급했다. 그 뒤로 조수연은 잘못된 걸 느끼고 대화를 얼버무리며 다른 이야기로 돌렸다. 온승준은 자신이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들어줬으면 어머니가 약속을 지킬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박지연의 말 속에서 유혜린이 뱃속의 아이를 이용해 박지연에게 신고를 취소하도록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온승준은 부모님의 강한 요청에 따라 유혜린과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식은 할 마음도 없었고 마침 국경 없는 의료팀에서 그를 초대해 X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곳은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고 온승준은 그곳에서 점점 더 조국이 그리워졌고 특히 박지연이 몹시 그리워졌다. 수없이 많은 밤을 보내며 그는 박지연을 꿈에서 만났다. 꿈 속에서 박지연은 예전처럼 그에게 손을 흔들며 웃었고 병원의 이야기들을 기쁨 가득한 얼굴로 나누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

  • 어게인, 비긴   제990화

    “너희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지. 내가 갈 데가 어딨다고?” 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집에서까지 왜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어?” 그러다 박지연의 옷깃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붉은 흔적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고은서의 눈빛이 번뜩였다. “설마... 현석 씨 어젯밤 여기서 잤어? 너희 둘...”“쉿! 조용히 좀 해.” 박지연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은서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부엌 쪽에서 육현석이 고개를 내밀었다. “은서 왔네. 지연이랑 얘기하고 있어. 아름 누나랑 애들 도착하면 밥 먹자.” 고은서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힌 채 억울하다는 듯 눈을 굴렸다. ‘나 지금 입도 못 연다고...’하지만 육현석의 시선에는 오직 박지연만 보이는 듯했다. 그는 박지연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이더니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혹시... 나 지금 투명인간이 된 거야?’ 고은서는 천천히 박지연을 흘끗 쳐다보았다. 박지연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고은서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거실 옆 서재로 데려갔다. “물 마실래? 주스도 있는데.” 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물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소파에 털썩 앉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냥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공기 자체가 달달하거든.” 그러곤 곧바로 한마디 더 던졌다. “어쩐지 어젯밤 갑자기 연락 두절되더라니. 역시 달콤한 밤은 천금보다 귀하다 이거지?”고은서의 농담을 듣는 순간, 박지연의 머릿속에 어젯밤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민망한 순간을 육현석에게 들킨 것도 모자라 아침까지도 그에게 휘둘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아닌 척할 필요가 있을까?’박지연은 단번에 체념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고은서의 목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다 너 때문

  • 어게인, 비긴   제989화

    박지연은 육현석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며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게다가 그의 표정은 박지연의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도대체 왜 은서랑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지?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얘기한 거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지?’박지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베란다에 땅굴을 파서 당장이라고 숨어버리고 싶었다.육현석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박지연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헛기침을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척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배고프지? 주방에 먹을 거 뭐 있는지 볼까?”그러면서 도망치려는데 육현석이 그녀의 길을 막아섰다.별처럼 반짝이는 육현석의 눈을 바라보자 박지연은 심장이 쿵쾅거렸다.“현, 현석아... 뭐 하려고...”육현석이 손을 뻗어 박지연의 머리카락 한 오리를 휘감으며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한밤에 일곱 번이라니. 내가 지연이 마음속에서 아주 용맹한가 봐.”이미 당황한 상태에서 이런 톤과 눈빛으로 말하는 육현석을 보자 박지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세상이 지금 당장이라도 멸망했으면 좋겠어.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박지연은 육현석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방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육현석이 힘껏 밀착하며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박지연은 육현석의 뜨거운 체온과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꼈다.“현... 음.”박지연이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육현석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갑작스럽고도 열정적인 이 키스에 박지연은 처음에는 몸을 비틀거리며 저항하려 했다. 어찌 됐든 베란다에서 키스하는 건 너무 쑥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육현석은 그녀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박지연의 얼굴을 감싸 쥐고 숨을 훔치듯 격렬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박지연은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의 리듬에 휩쓸려갔다.육현석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박지연은 숨이 차올라 예전처럼 그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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