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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작가: 류한나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

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

“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

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

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

“이제 네 차례야.”

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

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

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

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

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디 가!”

고운서가 버럭 외쳤다.

“사인 안 해?”

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

“네가 꾸민 짓이지?”

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

“고은서, 우리 할머니 건드리면 죽는 줄 알아.”

말을 마치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의 반응과 대화에서 전미자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결국 서둘러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장순이한테서 할머님이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자 그녀도 서둘러 구청을 나섰다.

전미자는 항상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곽승재와 결혼하게 된 일등 공신일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화풀이해 주기도 했다.

이 혼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전미자가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단지 전생에서는 너무 큰 실망감을 안겨드렸을 뿐이었다.

나중에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할머니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접하긴 했으나 제 코가 석 자인 지라 더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번 생에는 비록 더는 손자며느리가 될 수 없지만, 전미자가 베푼 친절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주차장에 곽승재의 차는 이미 사라졌고, 고은서는 부득이하게 택시를 잡아 최대한 빨리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

거실로 직행하자 상상 속 의사들이 들락거리고 도우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광경과 전혀 달랐다.

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은 전미자는 아픈 기색이란 찾아보기 힘들었고, 화가 난 듯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 겁도 없이 감히 나 몰래 은서와 이혼하려고 해?”

“할머니, 진짜 고은서가...”

곽승재가 입을 떼려는 찰나 전미자가 대뜸 지팡이로 그를 때렸다.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변명을 해? 은서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혼이 웬 말이야? 아주 내가 화나서 죽는 꼴 보고 싶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전미자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기침까지 했다.

“할머니!”

고은서가 급히 뛰어갔다.

그녀를 보자마자 전미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은서, 마침 잘 왔어. 이 할머니한테 얘기해 봐. 저놈이 너한테 이혼하자고 강요한 거지?”

고은서는 곽승재를 흘긋 쳐다보았다.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에는 싸늘한 분노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전미자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이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은서는 왜 노려봐!”

전미자는 또다시 지팡이로 곽승재를 내리치더니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

“은서야, 걱정하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해. 이 할머니만 믿어.”

고은서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내 노부인의 손을 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할머니, 오빠가 이혼하자고 한 거 아니에요. 제가 먼저 제안했거든요.”

전미자는 고은서의 손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은서야, 억울한 일이 있으면 할머니한테 말해. 사과받을 일은 사과받고 매를 맞아야 한다면 할머니가 대신 때려줄게. 다만 이혼 갖고 장난치지 마.”

아직도 자신을 믿지 않는 전미자 때문에 고은서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절 아끼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농담 아니에요. 물론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도 아니고 충분한 고민을 거쳤거든요. 저 이혼할 거예요.”

단호한 고은서의 표정을 보자 전미자의 안색도 사뭇 진지해졌다.

“은서야, 할머니 따라 방으로 오너라.”

...

30분 후, 고은서는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전미자를 부축하고 거실로 돌아왔다.

노부인은 씩씩거리며 곽승재를 노려보았다.

“은서 데리고 이만 가 봐. 만약 나 몰래 이혼한다는 소리가 또 들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곽승재는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콧방귀를 뀌더니 일어나서 자리를 떠났다.

“이놈이!”

전미자는 대뜸 욕설을 퍼붓더니 안쓰러운 얼굴로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

“은서야, 할머니랑 약속했다?”

“그럼 할머니도 약속해주세요. 다음 달 할머니 생신이 지나면 이혼을 반대하지 않기로.”

“만약 승재가 너한테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떡할 거야?”

전미자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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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677화

    고은서가 갑자기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하루 세 통 이상은 안 돼.”“세 통은 너무 적어. 다섯 통.”“네 통. 더는 안돼. 그게 한계야.”민시후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았다.마침 두 사람의 협상 장면을 마주한 박지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은서야, 잠깐만 나와 줄래? 할 말이 있어.”고은서는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앉았다.“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박지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서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수간호사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가십 팀 팀장 하나 맡으세요.”“오, 괜찮네. 좋은 팀 있으면 소개해 줄래?”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자, 이제 얘기해 봐. 왜 불러낸 거야?”박지연이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곽승재가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병원 측에서는 곽승재를 위해 제일 좋은 병실과 의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곽씨 일가 본가에서 마주쳤을 때 곽승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이 병원에 오기로 했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을 거고 네가 자주 여기 올 거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 병원을 선택한 거야. 곽승재도 참 재밌어. 한 편으로는 널 놓지 못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유미에게 너그럽잖아. 하지만 육현석이 말하길 백유미는 아직 T 국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대. 범가온이 백유미를 죽도록 때려서 이제는 호흡기까지 달아야 한대.”박지연은 오후에 육현석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은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T 국 병원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따라서 그녀는 백유미에게 한 폭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범가온은 굉장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다.‘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

  • 어게인, 비긴   제676화

    “얼른 와서 은서랑 인사하지 않고 거기서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전미자가 말했다.장순이 과일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갔다.곽승재는 느린 걸음으로 그녀들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고은서를 어두운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본 뒤 입술을 약간 움직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요 며칠 뭐하면서 지낸 거야? 왜 이렇게 병든 고양이처럼 힘이 없어 보여?”전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할머니, 제가 T 국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승재는 저를 도와주려다가 다쳤어요.”고은서가 솔직하게 말했다.“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너무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은서를 도와주고도 은서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니. 내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이 있었겠네.’전미자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몰래 한숨을 쉰 후 더 이상 곽승재를 질책하지 않았다.“할머니, 저 친구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저녁은 가서 먹을게요.”곽승재가 돌아오지 않은 줄 알고 저녁을 함께 먹겠다고 했던 고은서였지만 그가 돌아오자 고은서는 그와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전미자는 다시 한번 나서 고은서를 잡으려 했다.“주방에도 다 준비했는데 먹고 가. 급한 거 아니잖아.”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안은 감사하지만 먼저 가볼게요.”전미자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은서야, 시간 나면 자주 와.”“네. 할머니, 다음에 봬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곽승재가 말하자 고은서는 싸늘한 어조가 아닌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괜찮아. 넌 좀 쉬어.”곽승재는 그 말에 다시 한층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그저 고은서가 밖으로 나갈 때 뒤따라 나갔다.고은서가 차키를 누르자 곽승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어깨는 이제 괜찮아졌어?”고은서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평온하게 답했다.“응, 괜찮아.”말을 마친 고은서가 운전석에 앉으려 했다.“민시후를 돌보려고 병원에 급하

  • 어게인, 비긴   제675화

    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재랑 이혼할 때 급해서 제때 돌려드리지 못했어요.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가져왔어요.”“은서야, 이건 할머니가 너한테 준 선물이야. 그걸 돌려주면 이 할머니가 섭섭하잖니?”전미자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말했다.“할머니 마음은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이건 원래 미래 손자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잖아요. 그런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담긴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이것도 저 대신 곽승재한테 전해 주세요.”지난번 곽승재가 가져갔던 브로치를 다시 돌려주려 하자 전미자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은서야, 할머니는 너와 승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승재가 또 너를 실망하게 했겠지. 너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날 너무 어려워하지 말렴. 이 목걸이는 손자며느리를 위한 게 아니라 너에게 준 선물이야.”전미자가 말을 이었다.“너처럼 똑똑하고 착한 아이가 승재와의 결혼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지. 할머니도 다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가 승재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네가 힘들 걸 알면서도 네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고은서는 전미자의 따뜻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곽승재랑 결혼한 건 제 고집이지 할머니랑 상관없는 일이었잖아요. 목걸이를 돌려드리는 것도 할머니랑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목걸이가 할머니에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서예요.”“뭐가 부적절하다는 거야? 너도 1년 넘게 내 손자며느리로 살았잖니. 내가 준 선물을 돌려주면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니?”그 말에 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느끼고 말했다.“할머니께서 제가 주시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그래야지.”전미자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보며 말했다.“이건 승재가 네가 좋아한다고

  • 어게인, 비긴   제674화

    유성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에게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다만 내가 항상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유성준이 몇 년 동안 자신을 좋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기 뜻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미안해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성준 오빠.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했어요.”고은서의 솔직한 말에 유성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살짝 쓸쓸하게 변했다.“네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겠지.”...오후, 고은서는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전미자가 생일에 선물해 준 에메랄드 펜던트 목걸이, 그리고 그녀가 전미자를 위해 직접 조향한 캔들을 챙겨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차 속도를 늦췄다.저택의 정원 입구에는 인공 폭포와 연못이 있는 조형물이 있었고 연못에는 녹색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그때 연못 가장자리에서 한 가냘픈 소녀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서는 가정부가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아가씨, 이제 들어가세요. 바람이 차요.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됩니다.”가정부의 호칭을 듣고 고은서는 그녀가 곽승재의 여동생 곽승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곽승재가 전에 말하길 그녀는 어떤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재발했고 약간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고 했다.‘어머니께서 귀국하셔서 전문의를 찾으러 오신 걸까?’연못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곽승연은 가정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연못 속의 초록색 잎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가정부는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고은서는 차를 세우고 걸어 내려갔다.“사모님.”가정부는 고은서를 보자 예전과 같은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저는 이제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이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네요.”고은서가 곽승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저러는 거예요?”가정부는 그녀가 산책하러 나왔다

  • 어게인, 비긴   제673화

    이때 민시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고은서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을 내세우며 곽승재와 대립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단순히 오빠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유성준과 달리 민시후의 진심 어린 고백은 고은서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하지만 고은서는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민시후, 시간을 좀 줘.”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고은서, 그 말을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고은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 국 마실 거야?”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물론이지.”박지연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폭죽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기뻐했다.“은서야, 드디어 마음을 정리했구나.”박지연이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안 되겠어. 이 소식을 육현석에게 알려서 곽승재와 너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라고 해야겠어.”“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아 줄래?”고은서가 박지연을 말렸다.“내가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이든 들이지 않든 그건 육현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굳이 그 사람한테 알릴 필요 없어.”육현석에게 알리는 것은 곽승재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백유미 일 때문에 그와 감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박지연은 당장 육현석에게 이 소식을 알려 곽승재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알았어. 말 안 할게. 어차피 사귀게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 고은서는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유성준도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왔다.“은서야, 너 요즘 너

  • 어게인, 비긴   제672화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매번 술집이나 클럽에서 마주쳤잖아. 그때마다 양옆에 여자들을 끼고 있었잖아.”그 말을 들은 민시후는 대꾸하지 않고 매력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그렇게 봐? 내가 없는 말 했어?”“아니, 틀린 말도 아니야.”민시후는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을 지우,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예전에 주위에 여자가 많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식일 뿐이었고 진지한 관계도 없었고 부적절한 행위도 없었어.”고은서는 믿지 않았다.“M 국에 있을 때 어떤 섹시한 여자랑 데이트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민시후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고 그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자랑스러운 일인가? 왜 저렇게 웃지?’민시후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고은서, 혹시 질투야?”고은서는 그제야 자신이 민시후의 과거 연애사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해하지 마. 그냥 네가 민아 일로 화내는 게 웃겨서 예로 든 거야.”고은서가 단호히 답했다.그러나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은서, 뭔가 걸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괜히 설명하는 거야. 평소 내가 이렇게 물었으면 넌 주먹부터 날렸을 거야.”고은서는 지금 당장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헛소리 그만해. 네 연애사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별 관심 없어.”“괜찮아. 네가 신경 쓰든 안 쓰든 모두 솔직하게 얘기해 줄게. M 국의 그 여자는 내 친구야. 그날 우리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이었는데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친구는 기다리는 게 지겨워서 몇 번 재촉했을 뿐이야. 외국은 보통 오픈 마인드 잖아. 그래서 호칭도 더 친근했을 뿐인데 우린 순수한 친구 관계였어.”민시후의 눈빛은 너무 반짝여서 고은서가 눈을 돌리며 기침했다.“이미 말했잖아. 나랑 상관없다고.”“상관있어.”민시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고은서, 나는

  • 어게인, 비긴   제671화

    민시후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눈빛으로 거절하자 고은서가 설득했다.“조금 전에 뭐 좀 먹어서 배가 부르네. 네가 마셔. 버릴 순 없잖아.”민시후는 그녀를 보며 일부러 말했다.“네가 먹여주면 한 번 생각해 볼게.”고은서는 화가 난 듯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숟가락 드는 데는 아무 지장 없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고은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진짜 화내는 거 보고 싶어?”화가 난 고은서는 결국 직접 국을 다 마셔버렸다.“민아야, 이거 정말 맛있네. 어떤 사람은 즐길 줄 모르는 것 같아. 복이 없는 거지 뭐.”송민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고은서, 너도 정말 유치하다.”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만해. 난 그냥 병문안 온 거야. 무사한 거 봤으면 됐어. 먼저 가볼게.”송민아가 가려고 하자 고은서는 그녀를 배웅했다.복도로 나온 송민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야, 나 정말 시후 오빠 포기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도와주지 않아도 돼. 오빠 다친 거 너 때문이지?”송민아도 T 국에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오빠 겉으로는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전에 오빠한테 감정적으로 더 상처를 주라고 말했던 건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었어. 너도 마음이 있다면 그냥 오빠 받아줘. 내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네가 민시후를 도와준다는 걸 민시후가 알면 네게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던 걸 후회하겠네.”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도와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오빠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면서 난감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웃을 뿐 별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들어가 봐. 민준 오빠가 북성 간식들을 좀 보내줬어. 얼른 먹고 싶어서 눈에 아른거리네. 이제 그만 갈게.”고은서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무심코 말했다.“네 오빠는 널 잘 챙기네.”‘귀찮은 일도 처리해 주고 클럽까지 데리러 와주고 심지어 먹

  • 어게인, 비긴   제670화

    이 사실은 전에 뛰어내리겠다고 곽승재를 협박할 때 고은서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믿지 않았다.‘지연이는 어떻게 믿게 만든 거지?’고은서는 자신의 의문을 숨김없이 말했고 박지연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다 말해줬다.“유전자검사는 언제 한 거야? 난 모르고 있었는데.”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속상해하는 너를 보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박지연이 답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왔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를 구하러 호수에 뛰어든 곽승재를 보며 이혼할 때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면서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 다짐했었다.그러나 막상 후회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게 틀린 소리는 아니네.’이튿날, 고은서와 박지연은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아직도 거동이 불편한 민시후는 인파를 피면하기 위해 전용기로 귀국할 예정이었다.두 사람도 그와 동행했다.공항으로 가기 전에 고은서는 병원 로비에서 곽현수와 백승엽을 만났다.곽현수는 그녀를 보자마자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백승엽은 악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째려만 볼뿐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낼 용기조차 없었는지 그녀와의 눈 맞춤을 피했다.“쯧.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범죄자를 감싸는 주제에 왜 저리 거만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비록 이름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곽현수와 백승엽의 표정이 다 굳어졌다.뻔뻔함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잖아요.”박지연은 맞장구를 치고는 이내 민시후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곽현수를 무시한 채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민시후는 박지연이 출근하고 있는 이레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은서는 푹 쉬고 경찰서로 찾아가 T국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증거 자료를 제출하면서 백유미의 법적 책임을 묻겠다

  • 어게인, 비긴   제669화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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